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독립을 외치다,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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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독립을 외치다, 일제강점기
청을 제압한 일본
제국주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이후 조선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1876년 일본은 무력시위를 동원해 조선의 문호를 열도록 한 불평등한 강제 조약을 체결하여 병탄을 시작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케 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개입을 원천적으로 배제시킬 수 있었다. 이어 조선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청나라와 경쟁을 벌였으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 중국을 완전히 따돌리게 되었다.
을미사변
그와 동시에 일본은 청나라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조선의 정치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른바 개화파라고 지칭되는 정치세력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조선 내 친일 정부를 수립코자 갑신정변을 일으키는가 하면, 직접적으로 일본에 반대되는 인물들을 제거하여 조선 안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 정치 세력의 핵심은 바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였다.
일본은 1895년 자객들을 동원해 궁궐을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며 조선 정부를 다시 친일 내각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 이에 반발해 거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중봉기(동학농민군)를 일본 군대를 불법적으로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다.
을사늑약
하지만 고종이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그들은 이제 러시아와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몰래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1904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마저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게 되었다.
1905년 조선 정부를 협박하여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내용으로 조선을 식민지 상태로 만들었다. 이 조약은 당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서명을 거부한 상태에서 조선 정부의 내각 대신 5명을 강압적으로 협박해 얻어낸 것이었다. 이어 1910년에는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병탄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역시 황제인 순종이 서명을 거부하자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이 옥쇄를 훔쳐 날인하였다.
착취 대상이 된 조선
병탄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의 모든 제도와 질서를 일본의 통치와 일본인의 지배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어 나갔다. 농업사회였던 조선의 막대한 토지를 빼앗아 일본의 국유지로 편입시킨 뒤,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에게 싼 값에 넘겨줌으로써 조선인들을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또 산업화를 명목으로 조선의 각종 자원과 이권 착취에도 몰두하였다. 일본에 의한 조선 통치는 대부분 일본인과 그들에게 부역한 친일 부역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인들은 점차 하층민으로 전락해 그들의 지배에 종속되어갔다.
조선의 정신을 능욕하다
한편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 문화유산의 파괴와 수탈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철도와 도로, 신식 건축물들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주요한 건물들과 성벽, 성문 등 각종 문화유산들이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바로 총독부 청사였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면서 그 건물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안에 지어버렸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워버린 것이다. 이로써 경복궁은 거대한 총독부 건물에 가려 그 그늘 뒤에 숨어야만 했다. 또 수많은 유물들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때 강탈된 조선의 유물들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것만도 대략 30,000여 점이 넘는다.
나아가 일본은 식민통치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까지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일본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하였고, 한국어 사용과 한국의 역사 교육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또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종교의식인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경우 엄하게 처벌하였으며 외국인 선교사조차 강제로 추방시키는 등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물적·인적 수탈
이러한 수탈과 억압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제국주의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군수물자를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수탈해 갔다. 총알과 무기 제작에 필요했던 금속들은 심지어 수저와 식기류까지도 강탈해갔다. 조선의 산업구조 역시 일본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구조로 재편하기도 하였다. 자원이 풍부했던 한반도 북부를 중공업 중심으로, 농경지와 인구가 많은 남부를 경공업과 농업위주로 육성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였다.
하지만 수탈의 대상은 단지 물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로까지 이어졌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선에서 강제로 징발하였다. 탄광과 공장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은 노예와 같은 노동환경에 시달리며 정당한 댓가를 제공받지 못하였고, 심지어 혹독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다.
또 학생들까지도 강제로 군대에 동원하여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급기야 여자들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치욕적인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는 731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에게 끔찍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행동하는 독립운동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 하에서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일본에 병탄되기 이전부터 그들이 억지로 떠넘긴 국가의 부채를 갚기 위해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국민들의 자각과 계몽 그리고 실력양성을 목표로 신민회가 조직되어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열망은 직접적인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3.1 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계기로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3.1 운동을 시발점으로 전국에서 대략 20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1,500여 회 이상 시위에 참가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무력을 동원한 잔인한 진압으로 이를 억누르려 하였다. 몇몇 곳에서는 제암리 사건과 같이 잔인한 학살까지 자행되었다.
국제적 독립운동
일본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은 한동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고 계속 이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이끌어 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공작 속에서도 나라 밖에서 조국의 독립을 주도하였으며, 때로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무장투장과 의열투쟁의 방식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말미에는 연합국과 손을 잡고 국내에 군대를 파견해 일본과 전쟁을 펼친다는 진공작전까지 기획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은 1945년 8월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감격스런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