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 정신이 담긴 글자,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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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27일 (월) 12: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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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 정신이 담긴 글자, 한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훈민정음에 담긴 과학과 철학

처음 반포할 당시 한글은 모두 스물여덟 자였다.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는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은 단군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물을 이루는 요소로 꼽는 것이다.

한국의 나라 글자, 한글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의학 서적, 농업 서적,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10월 9은 한글날인데,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한 것이다.

쉽고도 현대적인 글자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답게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 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터넷이 발달하여 컴퓨터 사용인구가 많다. 여기에는 한글이 컴퓨터 사용에 용이한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컴퓨터 인자(印字)에서 앞의 자모 24자에 이중자모 16자를 합쳐 40자면 어떤 글자라도 모두 쓸 수 있다.

이런 편리한 표기 방식 때문에 한글은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훈민정음 창제와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강신항,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사』, 경진, 2010.
  • 김주원, 『훈민정음 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 민음사, 2013.
  • 사재동, 『훈민정음의 창제와 실용』, 역락, 2014.
  • 김영욱, 『한글 세종이 발명한 최고의 알파벳』, 루덴스, 2007.
  • 김슬옹,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지식산업사, 2011.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사』는 훈민정음 창제, 한글로 쓰인 문헌과 외국어 어음 표기에 활용된 한글 사용의 확대, 한글 창제 이후 개화기까지의 한글에 대한 연구와 변천, 개화기 이후의 훈민정음 정리 등 다양한 측면에서 훈민정음 연구와 변천을 알아본다.

『훈민정음 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는 훈민정음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김주원 교수가 ‘우리가 훈민정음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이 책에 담아냈다. 2012년 5월에 있었던 서울대 인문 강의에서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것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와 신화를 벗기고 더 넓은 시각에서 우리글의 진정한 실체를 밝힌다. 여기에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52장의 사진과 풍부한 역사 기록들을 덧붙임으로써, 독자들이 직접 훈민정음을 둘러싼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실용』은 총3부로 구성하여, 총론부터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실제, 훈민정음의 실용 양상까지 다룬 책이다. 컴퓨터와 휴대폰의 언어로 그 우수함을 세계에 입증하고 있는 한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한글 세종이 발명한 최고의 알파벳』은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한글 창제와 그 운영 원리를 밝히고 있다. 대왕의 인품과 학문적 열정, 평화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문화 군주로서의 노력, 아내 소헌왕후와의 사랑과 아들 문종과 함께 한 창제 동업의 비화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비밀들이 이 작은 한 권의 책자 속에 가득하다.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은 세종이 펼친 삼조화 사상의 결정체인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이 책은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배경, 주요 원리,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역과 대중화,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와 교육, 세종의 언어정책과 업적의 평가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개화기 한글보급운동을 주도했던 주시경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이규수 외, 『주시경』, 역사공간, 2014.

주시경은 삶을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고, 국어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다.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혁신적인 주장을 한 국어학의 선봉자였다. 자기 생애를 모두 바쳐 이루어 놓은 주시경의 업적과 애국계몽운동은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제자들에 의해 국어와 국문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민족문화투쟁과 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주시경』에서 저자는 주시경이 마주친 근대사의 역사적 정황, 국어운동의 동력 기반인 민족주의 언어관, 이에 근거한 한글운동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전개한 한글문화운동의 의미를 민족문화사적으로 재조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