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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 + |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역추적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진위 여부가 논쟁 중인 화랑세기의 자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기록과 설화만으로 선덕여왕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료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선덕여왕과 여왕의 시대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더불어 선덕여왕의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사찰과 탑 등 고대 유물, 유적을 더듬는 작업을 덧붙인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이 그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다. 풍성한 유물 사진과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함께 엮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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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을 그려낸 역사서이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신라에서 여왕이 되었던 선덕.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선덕여왕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통치를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했고 당 태종 이세민 역시 선덕 여왕 대신 자신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여성 군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이 반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 주역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적 추론을 통해 선덕 여왕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덕여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 특유의 포용의 정치와 문화의 정치를 폈던 그녀의 업적을 재평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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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 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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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1=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 | |참고문헌1=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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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 + |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여왕의 시대』는 여왕의 시대가 탄생하게 된 당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드러움과 통합이라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조명한다. 또한 여왕의 시대를 함께 조력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여왕들이 이들 인재를 활용했던 방식을 분석한다. 나아가 여왕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 여성적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어떠한 실책이 그러한 리더십의 발현에 한계를 지었는지 예리하게 파헤친다. |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 |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 |
2018년 2월 19일 (월) 22:30 기준 최신판
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
골품제 때문에 왕이 된 여성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여왕으로서의 고난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무례하게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지혜와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아 장지를 스스로 정하여 지시했다고도 한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선덕여왕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이적,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 어문학사, 2009. |
• 김용희,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초당, 2009. |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역추적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진위 여부가 논쟁 중인 화랑세기의 자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기록과 설화만으로 선덕여왕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료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선덕여왕과 여왕의 시대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더불어 선덕여왕의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사찰과 탑 등 고대 유물, 유적을 더듬는 작업을 덧붙인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이 그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다. 풍성한 유물 사진과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함께 엮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을 그려낸 역사서이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신라에서 여왕이 되었던 선덕.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선덕여왕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통치를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했고 당 태종 이세민 역시 선덕 여왕 대신 자신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여성 군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이 반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 주역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적 추론을 통해 선덕 여왕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덕여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 특유의 포용의 정치와 문화의 정치를 폈던 그녀의 업적을 재평가한다.
- 황룡사 9층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양정석,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서경문화사, 2004. |
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 한국사에서의 여왕의 지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 |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여왕의 시대』는 여왕의 시대가 탄생하게 된 당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드러움과 통합이라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조명한다. 또한 여왕의 시대를 함께 조력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여왕들이 이들 인재를 활용했던 방식을 분석한다. 나아가 여왕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 여성적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어떠한 실책이 그러한 리더십의 발현에 한계를 지었는지 예리하게 파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