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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반도에 처음 사람이 거주한 것은 약 50만 년 전부터였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에서 사람의 뼈와 함께 발굴된 유물을 통해 석기의 초기 형태와 이후의 발전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기원전 6000년 이후인)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에서는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음이 확인되며, 토기와 함께 뗀석기와 간석기가 발굴되고 있다. 한반도의 동부 해안 유적지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굴되는 데 비해, 그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부 해안의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었다. 두 유형의 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넌에 걸쳐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수렵과 어로, 소규모 농경으로 생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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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민무늬 토기의 등장은 좀 더 발전된 다음 시대로 넘어감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걸친 이 시대에는 농업, 특히 벼농사가 발달했다. 사람들은 주거지를 강기슭에서 언덕으로 옮기고 강변의 평지를 농토로 활용하였다. 또한 매장 풍습이 한층 진전되면서, 거석의 고인돌이 매장지의 표시로 설치되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한국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기도 사용되었는데, 세형 동검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반면에 비파형 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 한국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어서, 당시에 교역이 폭넓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에 사용되었다. | |
− | + | 철기는 기원전 3세기 들어 생산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철기는 무기와 갑주뿐만 아니라 농경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철재 목공 도구의 개발은 지상 목조 가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으로 바닥 아래를 덥히는 온돌의 원시 형태가 수혈 주거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 |
− | ==''' | + | =='''연구원 검토'''== |
+ | {{검토의견 | ||
+ | |의견1=1.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고 연구된 구석기 문화애ㅔ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결점임.<br/> | ||
+ | 2. “거석의 고인돌이 매장지의 표시로 설치되었다.” 고인돌은 매장지 표시가 아니라 실제의 무덤이었음. 부장품들이 출토 되고 있음. 선돌과 착각(?). <br/> | ||
+ | “매장지의 표시” → “부족장들의 매장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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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제목: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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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 지금으로부터 약 50만년전부터인 것으로 확인이 된다. 물론 새로운 발굴 성과와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오래 전으로 수정될 것이다. 사람의 뼈와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초기 행태와 그 이후의 발전 과정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사냥과 채집 행위를 통해 생활 영위했던 구석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상태의 동굴 등에서 발굴된 유물 이외에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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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에 비해 기원전 8000년 이후에 출현하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정착생활을 했던 탓에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음이 확인되며, 그 생활의 흔적으로 토기와 더불어 뗀석기 및 간석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가운데 토기의 경우 한반도의 동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굴되는데 비해, 그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고 있다. 이 두 유형의 토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신석기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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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데 사용된 유물이다. 따라서 단순히 사냥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해왔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역시 중요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졌다. 아직 소규모 수준으로 농경이 이뤄졌던 만큼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는 수렵과 어로가 농경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덧무늬와 빗살무늬를 뒤 이어 등장한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다음 시대로 넘어감을 알리는 신호등과 같다.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접어들면서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기온과 강수량의 영향에 민감한 ‘벼’의 재배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농업적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 시기 벼농사의 출현은 당시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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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편 사람들의 주거양상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석기 시대 강기슭에 자리 잡았던 움집은 언덕이나 구릉지로 올라가고 강가의 평지는 이제 농토로 활용되었다. 또 매장의 풍습도 한층 진전되면서,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어야만 조성될 수 있는 큰 돌을 사용한 고인돌이 부족장의 무덤으로 조성되어 자리 잡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이렇게 조성된 고인돌이 다수 남아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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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것은 바로 돌에서 벗어나 금속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변화의 모습이다.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의 경우 비파형 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부터 한반도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은 한반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 북서부로부터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희소하고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 의례용품과 제기 등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과 나무를 사용하였다. | |
− | + | 철기는 기원전 300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는 청동보다 흔하고 풍부하여서 무기나 갑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일상 생활도구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철재 목공 도구도 개발되면서 이제 철기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집이 아니라 지상에 만들어진 목조 가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바닥 아래를 덥혀 난방을 하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 ‘온돌’이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처음 등장하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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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교열본'''== |
− | + | *'''제목: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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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50만 년 전의 구석기 사람들=== | |
− | + |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약 50만 년 전부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새로운 발굴 성과와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오래 전으로 수정될 것이다. 사람의 뼈와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초기 행태와 그 이후의 발전 과정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사냥과 채집 행위를 통해 생활을 영위했던 구석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상태의 동굴 등에서 발굴된 유물 이외에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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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에 정착한 신석기 사람들=== | ||
+ | 이에 비해 기원전 8000년 이후에 출현하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정착생활을 했던 탓에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룬 자취가 확인된다. 그 흔적으로 토기와 더불어 뗀석기와 간석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가운데 토기의 경우 한반도의 동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굴되는 데 비해, 그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두 유형의 토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신석기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 ||
+ | |||
+ | ===토기가 말하는 정착 농경생활=== | ||
+ | 단순히 사냥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해왔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경 외에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역시 중요한 생활의 수단이었다. 아직 소규모 수준으로 농경이 이뤄졌던 만큼 수렵과 어로도 농경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 ||
− | == | + |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 데 사용된 유물이다. 토기가 보다 다양해지는 것도 정착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기이다. 이 때의 토기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만들어 썼다. 덧무늬와 빗살무늬에 이어 등장한 이 때의 다양한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다음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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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농사의 발달과 진전된 생활 양식=== | ||
+ |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접어들면서 농업, 특히 벼농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기온과 강수량의 영향에 민감한 ‘벼’의 재배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농업적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 시기 벼농사의 출현은 당시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 ||
− | + | 한편 사람들의 주거양상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석기 시대 강기슭에 자리 잡았던 움집은 언덕이나 구릉지로 올라가고 강가의 평지는 이제 농토로 활용되었다. 또 매장의 풍습도 한 단계 진전된 양식을 보인다.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큰 돌을 사용한 고인돌이 부족장의 무덤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이렇게 조성된 고인돌이 다수 남아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 |
− | [[분류: | + | |
+ | ===청동으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사람들=== | ||
+ |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이제 청동기를 받아들여 한층 발전시키며 독특한 청동기문화권을 형성한다.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의 경우 비파형 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부터 한반도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은 한반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 북서부로부터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희소하고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 의례용품과 제기 등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과 나무를 사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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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기와 함께 발달한 주거 문화=== | ||
+ | 철기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는 청동보다 흔하고 풍부하여서 무기나 갑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일상 생활도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철재 목공 도구도 개발되면서 이제 철기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집이 아니라 지상에다 나무로 지은 목조 가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바닥 아래를 덥혀 난방을 하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 ‘온돌’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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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원고검토용]] |
2017년 11월 20일 (월) 00:39 기준 최신판
목차
1차 원고
한반도에 처음 사람이 거주한 것은 약 50만 년 전부터였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에서 사람의 뼈와 함께 발굴된 유물을 통해 석기의 초기 형태와 이후의 발전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기원전 6000년 이후인)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에서는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음이 확인되며, 토기와 함께 뗀석기와 간석기가 발굴되고 있다. 한반도의 동부 해안 유적지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굴되는 데 비해, 그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부 해안의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었다. 두 유형의 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넌에 걸쳐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수렵과 어로, 소규모 농경으로 생활하였다.
민무늬 토기의 등장은 좀 더 발전된 다음 시대로 넘어감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걸친 이 시대에는 농업, 특히 벼농사가 발달했다. 사람들은 주거지를 강기슭에서 언덕으로 옮기고 강변의 평지를 농토로 활용하였다. 또한 매장 풍습이 한층 진전되면서, 거석의 고인돌이 매장지의 표시로 설치되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한국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기도 사용되었는데, 세형 동검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반면에 비파형 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 한국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어서, 당시에 교역이 폭넓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에 사용되었다.
철기는 기원전 3세기 들어 생산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철기는 무기와 갑주뿐만 아니라 농경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철재 목공 도구의 개발은 지상 목조 가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으로 바닥 아래를 덥히는 온돌의 원시 형태가 수혈 주거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1.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고 연구된 구석기 문화애ㅔ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결점임. 2. “거석의 고인돌이 매장지의 표시로 설치되었다.” 고인돌은 매장지 표시가 아니라 실제의 무덤이었음. 부장품들이 출토 되고 있음. 선돌과 착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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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 제목: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 지금으로부터 약 50만년전부터인 것으로 확인이 된다. 물론 새로운 발굴 성과와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오래 전으로 수정될 것이다. 사람의 뼈와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초기 행태와 그 이후의 발전 과정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사냥과 채집 행위를 통해 생활 영위했던 구석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상태의 동굴 등에서 발굴된 유물 이외에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기원전 8000년 이후에 출현하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정착생활을 했던 탓에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음이 확인되며, 그 생활의 흔적으로 토기와 더불어 뗀석기 및 간석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가운데 토기의 경우 한반도의 동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굴되는데 비해, 그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고 있다. 이 두 유형의 토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신석기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데 사용된 유물이다. 따라서 단순히 사냥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해왔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역시 중요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졌다. 아직 소규모 수준으로 농경이 이뤄졌던 만큼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는 수렵과 어로가 농경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덧무늬와 빗살무늬를 뒤 이어 등장한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다음 시대로 넘어감을 알리는 신호등과 같다.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접어들면서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기온과 강수량의 영향에 민감한 ‘벼’의 재배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농업적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 시기 벼농사의 출현은 당시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사람들의 주거양상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석기 시대 강기슭에 자리 잡았던 움집은 언덕이나 구릉지로 올라가고 강가의 평지는 이제 농토로 활용되었다. 또 매장의 풍습도 한층 진전되면서,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어야만 조성될 수 있는 큰 돌을 사용한 고인돌이 부족장의 무덤으로 조성되어 자리 잡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이렇게 조성된 고인돌이 다수 남아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것은 바로 돌에서 벗어나 금속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변화의 모습이다.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의 경우 비파형 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부터 한반도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은 한반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 북서부로부터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희소하고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 의례용품과 제기 등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과 나무를 사용하였다.
철기는 기원전 300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는 청동보다 흔하고 풍부하여서 무기나 갑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일상 생활도구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철재 목공 도구도 개발되면서 이제 철기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집이 아니라 지상에 만들어진 목조 가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바닥 아래를 덥혀 난방을 하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 ‘온돌’이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처음 등장하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교열본
- 제목: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
50만 년 전의 구석기 사람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약 50만 년 전부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새로운 발굴 성과와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오래 전으로 수정될 것이다. 사람의 뼈와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초기 행태와 그 이후의 발전 과정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사냥과 채집 행위를 통해 생활을 영위했던 구석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상태의 동굴 등에서 발굴된 유물 이외에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반도에 정착한 신석기 사람들
이에 비해 기원전 8000년 이후에 출현하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정착생활을 했던 탓에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룬 자취가 확인된다. 그 흔적으로 토기와 더불어 뗀석기와 간석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가운데 토기의 경우 한반도의 동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굴되는 데 비해, 그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두 유형의 토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신석기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토기가 말하는 정착 농경생활
단순히 사냥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해왔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경 외에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역시 중요한 생활의 수단이었다. 아직 소규모 수준으로 농경이 이뤄졌던 만큼 수렵과 어로도 농경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 데 사용된 유물이다. 토기가 보다 다양해지는 것도 정착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기이다. 이 때의 토기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만들어 썼다. 덧무늬와 빗살무늬에 이어 등장한 이 때의 다양한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다음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다.
벼농사의 발달과 진전된 생활 양식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접어들면서 농업, 특히 벼농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기온과 강수량의 영향에 민감한 ‘벼’의 재배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농업적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 시기 벼농사의 출현은 당시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사람들의 주거양상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석기 시대 강기슭에 자리 잡았던 움집은 언덕이나 구릉지로 올라가고 강가의 평지는 이제 농토로 활용되었다. 또 매장의 풍습도 한 단계 진전된 양식을 보인다.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큰 돌을 사용한 고인돌이 부족장의 무덤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이렇게 조성된 고인돌이 다수 남아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청동으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사람들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이제 청동기를 받아들여 한층 발전시키며 독특한 청동기문화권을 형성한다.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의 경우 비파형 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부터 한반도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은 한반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 북서부로부터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희소하고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 의례용품과 제기 등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과 나무를 사용하였다.
철기와 함께 발달한 주거 문화
철기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는 청동보다 흔하고 풍부하여서 무기나 갑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일상 생활도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철재 목공 도구도 개발되면서 이제 철기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집이 아니라 지상에다 나무로 지은 목조 가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바닥 아래를 덥혀 난방을 하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 ‘온돌’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