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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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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0T06:53:48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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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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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Dawn of a People - The Prehistory of Korea&lt;br /&gt;
}}&lt;br /&gt;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lt;br /&gt;
===50만 년 전의 구석기 사람들===&lt;br /&gt;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약 50만 년 전부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새로운 발굴 성과와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오래 전으로 수정될 것이다. 사람의 뼈와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초기 행태와 그 이후의 발전 과정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사냥과 채집 행위를 통해 생활을 영위했던 구석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상태의 동굴 등에서 발굴된 유물 이외에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lt;br /&gt;
   &lt;br /&gt;
===한반도에 정착한 신석기 사람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 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 (2).jpg|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재현한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 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jpg|서울 암사동 움집 모형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김창락-반구대암각도-1978s.jpg|민족기록화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9%80%EC%B0%BD%EB%9D%BD-%EC%9A%B8%EC%A3%BC_%EB%B0%98%EA%B5%AC%EB%8C%80_%EC%95%94%EA%B0%81%EB%8F%84 울주 반구대 암각도]&amp;lt;br/&amp;gt; (김창락作, 1978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이에 비해 기원전 8000년 이후에 출현하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정착생활을 했던 탓에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룬 자취가 확인된다. 그 흔적으로 토기와 더불어 뗀석기와 간석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가운데 토기의 경우 한반도의 동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덧무늬토기]]가 발굴되는 데 비해, 그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두 유형의 토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신석기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토기가 말하는 정착 농경생활===&lt;br /&gt;
단순히 사냥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해왔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경 외에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역시 중요한 생활의 수단이었다. 아직 소규모 수준으로 농경이 이뤄졌던 만큼 수렵과 어로도 농경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 데 사용된 유물이다. 토기가 보다 다양해지는 것도 정착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기이다. 이 때의 토기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만들어 썼다. 덧무늬와 빗살무늬에 이어 등장한 이 때의 다양한 [[민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다음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다. &lt;br /&gt;
  &lt;br /&gt;
===벼농사의 발달과 진전된 생활 양식===&lt;br /&gt;
[[파일:1-1.고인돌-ESC_8997.jpg|thumb|230px|right|강화의 고인돌(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lt;br /&gt;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접어들면서 농업, 특히 벼농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기온과 강수량의 영향에 민감한 ‘벼’의 재배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농업적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 시기 벼농사의 출현은 당시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한편 사람들의 주거양상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석기 시대 강기슭에 자리 잡았던 움집은 언덕이나 구릉지로 올라가고 강가의 평지는 이제 농토로 활용되었다. 또 매장의 풍습도 한 단계 진전된 양식을 보인다.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큰 돌을 사용한 [[고인돌]]이 부족장의 무덤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이렇게 조성된 [[고인돌]]이 다수 남아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lt;br /&gt;
   &lt;br /&gt;
===청동으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사람들===&lt;br /&gt;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이제 청동기를 받아들여 한층 발전시키며 독특한  청동기문화권을 형성한다.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의 경우 [[비파형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부터 한반도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은 한반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 북서부로부터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희소하고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 의례용품과 제기 등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과 나무를 사용하였다. &lt;br /&gt;
   &lt;br /&gt;
===철기와 함께 발달한 주거 문화===&lt;br /&gt;
철기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는 청동보다 흔하고 풍부해서 무기나 갑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일상 생활도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철재 목공 도구도 개발되면서 이제 철기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집이 아니라 지상에다 나무로 지은 목조 가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바닥 아래를 덥혀 난방을 하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 ‘[[온돌]]’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File:013(K).jpg|동검 분포 지역&lt;br /&gt;
File:014(K).jpg|고인돌 분포 지역&lt;br /&gt;
File:015(K).jpg|주요 구석기 유적지&lt;br /&gt;
File:027(K).jpg|초기 인류의 이주 경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덧무늬토기]]&lt;br /&gt;
*[[빗살무늬토기]]&lt;br /&gt;
*[[민무늬토기]]&lt;br /&gt;
*[[고인돌]]&lt;br /&gt;
*[[비파형동검]]&lt;br /&gt;
*[[세형동검]]&lt;br /&gt;
*[[온돌]]&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의 구석기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정철,  『한강유역의 구석기 문화』, 진인진, 2012.&lt;br /&gt;
|참고문헌2=손보기,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 학연문화사, 2009.&lt;br /&gt;
|참고문헌3=연세대학교,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lt;br /&gt;
}}&lt;br /&gt;
'''『한강유역의 구석기 문화』'''는 남한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가 연천의 전곡리 유적이라는 점에서 한강 유역에 분포한 구석기 시대 유적지의 현황과 그 내용들을 소개하였다. 특히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동향, 연구 방법과 편년, 석기를 다루는 기술과 석기 자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어 석기시대와 구석기 전반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lt;br /&gt;
 &lt;br /&gt;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는 1968년 남한에서 발굴된 최초의 선사유적으로 공주 석장리 유적의 발굴을 주도했던 손보기 박사가 저술한 책이다. 한국 고고학계를 이끌었던 노학자의 평생 연구성과를 잘 담아낸 이 책은 석장리 유적지에 대한 상세한 소개뿐만 아니라, 한국의 구석기 문화 전반을 이야기하면서 한국구석기 문화의 특징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는 한국의 구석기 연구 성과 전반을 망라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저자들은 모두 현재까지 한국 고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대학자들이며, 이들을 통해 한국 고고학의 전개 과정과 구석기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신석기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국고고학회, 『농업의 고고학』, 사회평론아카데미, 2013.&lt;br /&gt;
|참고문헌2=최종혁, 『신석기 시대의 어로문화』, 동삼동패총전시관, 2006.&lt;br /&gt;
|참고문헌3=임효재, 『한국 신석기 문화의 전개』, 학연문화사, 2005.&lt;br /&gt;
}}&lt;br /&gt;
'''『농업의 고고학』'''은 신석기 시대가 농경을 처음 시작한 시기라는 점에서, 농경문화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가장 중요하고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농경문화를 통시대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농업기술의 발전, 시대별 작물의 변천, 농기구의 변화 양상, 농경유적의 고고학적 특징과 그 발굴 성과 등 매우 깊이 있는 내용을 충실하게 다루고 있어 신석기 시대를 망라하여 한국의 농경문화 전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lt;br /&gt;
&lt;br /&gt;
'''『신석기 시대의 어로문화』'''는 신석기 시대가 농경뿐만 아니라 어로 역시 식량을 공급하는 주요한 경제 수단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인식의 틀을 확장시켜준다. 특히 이렇게 확보한 물고기와 조개 등을 소비하고 버린 패총이 현재 신석기 시대 문화를 확인하는 매우 핵심적인 유적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한국의 어로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신석시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또 신석기 시대 어로민들의 생계 유형이나,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에서 나타나는 어로문화의 특징들, 구체적인 어로 방법과 도구들의 소개는 농경과 함께 신석기인들의 구체적인 생활방식의 이해를 돕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 신석기 문화의 전개』'''는 한국 신석기 연구 4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논문집이다. 저자가 지난 40년 동안 국내외에 발표한 학술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한국 신석기시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온 다양한 논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서술된 연구 결과들은 지난 40년간의 고고학 발전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민족의 기원과 선사시대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몽룡, 『한국 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주류성, 2016.  &lt;br /&gt;
|참고문헌2=단국대학교, 『동북아시아의 문명 기원과 교류』, 학연문화사, 2011.&lt;br /&gt;
|참고문헌3=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 유전학․고고학․언어학․신화학으로 풀어 본 우리의 과거』, 우리역사연구재단, 2010.&lt;br /&gt;
}}&lt;br /&gt;
'''『한국 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망라하여 선사시대 문화 전반을 조명하고, 나아가 금속도구 시기로 들어와 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을 매우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마치 교과서와 같이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그리고 고조선과 철기시대를 통틀어 각 시대의 고고학적 해석과 삶의 양상을 상세하고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석기시대에서 금속시대로의 전개, 선사문화에서 국가의 출현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이행을 넓은 시야로 소개하고 있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문명 발생 단계의 다른 지역의 문화적 양상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 한국의 역사적 발전을 비교사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동북아시아의 문명 기원과 교류』'''는 한민족의 출현과 문명의 발생 과정을 동아시아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문명의 여명기인 선사시대와 한민족의 문명 형성이 주변과의 교류와 융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동북지방과 연해주, 일본을 시야에 두고 그 교류 전파의 양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학자는 물론, 일본, 러시아, 몽골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참여해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한국인의 기원』'''은 내분비학 의사가 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규명한 책으로, 유전학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와 그 유전형의 특질 등을 주제로 한국인의 기원과 전승 등을 이야기한 책이다. 선사시대의 역사적 접근이 단지 유물과 유적 중심으로 편중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 과학 기술 특히 유전학과 언어학 등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해 접근했을 때, 보다 풍부한 성과와 흥미로운 결과가 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사의 중요 흐름]]&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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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22T15:42: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Dawn of a People - The Prehistory of Korea&lt;br /&gt;
}}&lt;br /&gt;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lt;br /&gt;
===50만 년 전의 구석기 사람들===&lt;br /&gt;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약 50만 년 전부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새로운 발굴 성과와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오래 전으로 수정될 것이다. 사람의 뼈와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의 초기 행태와 그 이후의 발전 과정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사냥과 채집 행위를 통해 생활을 영위했던 구석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하지 않았으므로, 자연 상태의 동굴 등에서 발굴된 유물 이외에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lt;br /&gt;
   &lt;br /&gt;
===한반도에 정착한 신석기 사람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 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 (2).jpg|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재현한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 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jpg|서울 암사동 움집 모형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김창락-반구대암각도-1978s.jpg|민족기록화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9%80%EC%B0%BD%EB%9D%BD-%EC%9A%B8%EC%A3%BC_%EB%B0%98%EA%B5%AC%EB%8C%80_%EC%95%94%EA%B0%81%EB%8F%84 울주 반구대 암각도]&amp;lt;br/&amp;gt; (김창락作, 1978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이에 비해 기원전 8000년 이후에 출현하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정착생활을 했던 탓에 반지하 움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룬 자취가 확인된다. 그 흔적으로 토기와 더불어 뗀석기와 간석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가운데 토기의 경우 한반도의 동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덧무늬토기]]가 발굴되는 데 비해, 그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형성된 서해안쪽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두 유형의 토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1500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신석기 사람들이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토기가 말하는 정착 농경생활===&lt;br /&gt;
단순히 사냥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해왔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경 외에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어로 역시 중요한 생활의 수단이었다. 아직 소규모 수준으로 농경이 이뤄졌던 만큼 수렵과 어로도 농경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 데 사용된 유물이다. 토기가 보다 다양해지는 것도 정착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기이다. 이 때의 토기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만들어 썼다. 덧무늬와 빗살무늬에 이어 등장한 이 때의 다양한 [[민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다음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다. &lt;br /&gt;
  &lt;br /&gt;
===벼농사의 발달과 진전된 생활 양식===&lt;br /&gt;
[[파일:1-1.고인돌-ESC_8997.jpg|thumb|230px|right|강화의 고인돌(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lt;br /&gt;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접어들면서 농업, 특히 벼농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기온과 강수량의 영향에 민감한 ‘벼’의 재배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농업적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 시기 벼농사의 출현은 당시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한편 사람들의 주거양상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석기 시대 강기슭에 자리 잡았던 움집은 언덕이나 구릉지로 올라가고 강가의 평지는 이제 농토로 활용되었다. 또 매장의 풍습도 한 단계 진전된 양식을 보인다.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큰 돌을 사용한 [[고인돌]]이 부족장의 무덤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이렇게 조성된 [[고인돌]]이 다수 남아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바로 한반도에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lt;br /&gt;
   &lt;br /&gt;
===청동으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사람들===&lt;br /&gt;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이제 청동기를 받아들여 한층 발전시키며 독특한  청동기문화권을 형성한다.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의 경우 [[비파형동검]]은 중국 북서부에서부터 한반도 남서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은 한반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 북서부로부터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동기는 희소하고 귀해서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었고, 주로 무기나 장신구, 의례용품과 제기 등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과 나무를 사용하였다. &lt;br /&gt;
   &lt;br /&gt;
===철기와 함께 발달한 주거 문화===&lt;br /&gt;
철기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철기는 청동보다 흔하고 풍부해서 무기나 갑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같은 일상 생활도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철재 목공 도구도 개발되면서 이제 철기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집이 아니라 지상에다 나무로 지은 목조 가옥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바닥 아래를 덥혀 난방을 하는 한국 고유의 난방 수단 ‘[[온돌]]’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File:013(K).jpg|동검 분포 지역&lt;br /&gt;
File:014(K).jpg|고인돌 분포 지역&lt;br /&gt;
File:015(K).jpg|주요 구석기 유적지&lt;br /&gt;
File:027(K).jpg|초기 인류의 이주 경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덧무늬토기]]&lt;br /&gt;
*[[빗살무늬토기]]&lt;br /&gt;
*[[민무늬토기]]&lt;br /&gt;
*[[고인돌]]&lt;br /&gt;
*[[비파형동검]]&lt;br /&gt;
*[[세형동검]]&lt;br /&gt;
*[[온돌]]&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의 구석기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정철,  『한강유역의 구석기 문화』, 진인진, 2012.&lt;br /&gt;
|참고문헌2=손보기,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 학연문화사, 2009.&lt;br /&gt;
|참고문헌3=연세대학교,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lt;br /&gt;
}}&lt;br /&gt;
'''『한강유역의 구석기 문화』'''는 남한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가 연천의 전곡리 유적이라는 점에서 한강 유역에 분포한 구석기 시대 유적지의 현황과 그 내용들을 소개하였다. 특히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동향, 연구 방법과 편년, 석기를 다루는 기술과 석기 자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어 석기시대와 구석기 전반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lt;br /&gt;
 &lt;br /&gt;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는 1968년 남한에서 발굴된 최초의 선사유적으로 공주 석장리 유적의 발굴을 주도했던 손보기 박사가 저술한 책이다. 한국 고고학계를 이끌었던 노학자의 평생 연구성과를 잘 담아낸 이 책은 석장리 유적지에 대한 상세한 소개뿐만 아니라, 한국의 구석기 문화 전반을 이야기하면서 한국구석기 문화의 특징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는 한국의 구석기 연구 성과 전반을 망라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저자들은 모두 현재까지 한국 고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대학자들이며, 이들을 통해 한국 고고학의 전개 과정과 구석기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신석기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국고고학회, 『농업의 고고학』, 사회평론아카데미, 2013.&lt;br /&gt;
|참고문헌2=최종혁, 『신석기 시대의 어로문화』, 동삼동패총전시관, 2006.&lt;br /&gt;
|참고문헌3=임효재, 『한국 신석기 문화의 전개』, 학연문화사, 2005.&lt;br /&gt;
}}&lt;br /&gt;
'''『농업의 고고학』'''은 신석기 시대가 농경을 처음 시작한 시기라는 점에서, 농경문화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가장 중요하고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농경문화를 통시대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농업기술의 발전, 시대별 작물의 변천, 농기구의 변화 양상, 농경유적의 고고학적 특징과 그 발굴 성과 등 매우 깊이 있는 내용을 충실하게 다루고 있어 신석기 시대를 망라하여 한국의 농경문화 전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lt;br /&gt;
&lt;br /&gt;
'''『신석기 시대의 어로문화』'''는 신석기 시대가 농경뿐만 아니라 어로 역시 식량을 공급하는 주요한 경제 수단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인식의 틀을 확장시켜준다. 특히 이렇게 확보한 물고기와 조개 등을 소비하고 버린 패총이 현재 신석기 시대 문화를 확인하는 매우 핵심적인 유적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한국의 어로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신석시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또 신석기 시대 어로민들의 생계 유형이나,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에서 나타나는 어로문화의 특징들, 구체적인 어로 방법과 도구들의 소개는 농경과 함께 신석기인들의 구체적인 생활방식의 이해를 돕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 신석기 문화의 전개』'''는 한국 신석기 연구 4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논문집이다. 저자가 지난 40년 동안 국내외에 발표한 학술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한국 신석기시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온 다양한 논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서술된 연구 결과들은 지난 40년간의 고고학 발전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한민족의 기원과 선사시대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몽룡, 『한국 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주류성, 2016.  &lt;br /&gt;
|참고문헌2=단국대학교, 『동북아시아의 문명 기원과 교류』, 학연문화사, 2011.&lt;br /&gt;
|참고문헌3=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 유전학․고고학․언어학․신화학으로 풀어 본 우리의 과거』, 우리역사연구재단, 2010.&lt;br /&gt;
}}&lt;br /&gt;
'''『한국 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망라하여 선사시대 문화 전반을 조명하고, 나아가 금속도구 시기로 들어와 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을 매우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마치 교과서와 같이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그리고 고조선과 철기시대를 통틀어 각 시대의 고고학적 해석과 삶의 양상을 상세하고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석기시대에서 금속시대로의 전개, 선사문화에서 국가의 출현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이행을 넓은 시야로 소개하고 있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문명 발생 단계의 다른 지역의 문화적 양상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 한국의 역사적 발전을 비교사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동북아시아의 문명 기원과 교류』'''는 한민족의 출현과 문명의 발생 과정을 동아시아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문명의 여명기인 선사시대와 한민족의 문명 형성이 주변과의 교류와 융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동북지방과 연해주, 일본을 시야에 두고 그 교류 전파의 양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학자는 물론, 일본, 러시아, 몽골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참여해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한국인의 기원』'''은 내분비학 의사가 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규명한 책으로, 유전학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와 그 유전형의 특질 등을 주제로 한국인의 기원과 전승 등을 이야기한 책이다. 선사시대의 역사적 접근이 단지 유물과 유적 중심으로 편중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 과학 기술 특히 유전학과 언어학 등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해 접근했을 때, 보다 풍부한 성과와 흥미로운 결과가 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사의 중요 흐름]]&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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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초기 선교사와 미션계 학교가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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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22T15:35: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한국 사회의 근대화로 연결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Modern Education and Christianity&lt;br /&gt;
}}&lt;br /&gt;
=='''초기 선교사와 미션계 학교가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lt;br /&gt;
===간접 선교 방식으로 설립된 학교===&lt;br /&gt;
한국은 오랜 기간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화도조약(1876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서구의 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전통교육은 서양학문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양학문과의 접촉은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기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진출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선교에 있었지만 조선정부가 이를 금지함에 따라 의료와 교육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곳에 미션계 학교를 대신 세우는 간접 선교방식을 택했다. 그들이 학교를 통해 펼친 교육은 한국이 전통교육에서 근대교육으로 전환하는 데 교량역할을 하였다. 한글의 대중화를 비롯해 근대사상의 확산, 신분제도 타파, 남녀평등, 민족의식 고취 등 현대식 교육의 보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을 통해 확산된 근대 사상===&lt;br /&gt;
특히 성서의 한글번역은 [[한글]]이 한국 문자로 정착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대상은 주로 서민층들이었고, 이들 서민층들은 양반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읽고 쓰기를 가르치면서 한글은 여성을 포함한 서민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한글이 대중화되고 한글 서적이 다량으로 출판 보급되면서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인도주의적 정신 또한 널리 전파되었다. 이는 한국의 봉건적인 사상을 변화시키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대표적인 미션계 학교로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등이 있다. 1886년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아펜젤러(Appenzeller)]]는 한국 최초의 선교학교(mission school)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이화학당|이화학당(1886년)]], [[경신학교|경신학교(1886년)]], [[정신여학교|정신여학교(1887년)]] 등 900여 선교학교들이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점 전인 1909년까지 설립되었다. &lt;br /&gt;
&lt;br /&gt;
그 중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스크랜튼]]은 열악한 한국의 여성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1886년 200평 정도의 교사를 마련해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이것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의 효시이다. 이렇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계 여학교인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영화학당 등은 당시 전통적인 교육에서 제외되었던 여성에 대한 교육을 시행함으로써 한국 여성 교육 근대화에 기여했다.&lt;br /&gt;
&lt;br /&gt;
===민간 사학 설립으로 이어진 기독교계 교육===&lt;br /&gt;
이외에도 [[한글]]의 보급과 미션계 학교를 통한 서양학문의 소개와 교육은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근대적 주체 형성에 공헌하기도 했다. 그 예로 기독교계의 학교설립에 자극을 받은 민간인 선각자들이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들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근대교육의 보급과 확산을 교육구국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하고, [[대한자강회]], [[교남학회]] 등 각종 학회를 조직하거나 지방자치를 표방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근대교육의 보급·확산에 주력했다.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국민교육론에 근거하여 의무교육을 주장하기도 하고, 사립학교·야학·강습소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이들이 설립한 학교들은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사학으로 남아있다. [[안창호|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세운 [[대성학교|대성학교(1907)]]와 [[이승훈|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이 설립한 [[오산학교|오산학교(1907)]]가 대표적이다. 또 양정의숙과 보성학교(1905), 1906년에 설립한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중동학교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미션계 학교의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션계 학교는 교육을 통한 근대교육의 확산은 물론 서양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 지도층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션계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 강사들은 선교사들보다 학생들에게 서양의 교과를 가르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배재학당]]에서 강의한 [[서재필|서재필(徐載弼, 1864~1951)]], 대성학교를 세운 [[안창호]] 등이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미션계 학교 출신 한국인들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 정신에 토대를 두고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위해 노력했다.&lt;br /&gt;
&lt;br /&gt;
===한국 사회의 근대화로 연결===&lt;br /&gt;
이와 같이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성경을 번역, 출판하고, 미션계 학교를 설립했지만,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들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글을 보급하고, 교육을 통해 여성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함께 우리민족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수용 노력은 교육의 대중화와 한국 근대교육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사회 엘리트 계층에 한정되었던 유교 경전 중심의 전통교육은 서민과 여성을 포함한 일반 국민 전체로 확산되었다. &lt;br /&gt;
&lt;br /&gt;
더불어 이를 통해 한국에 도입된 근대사상과 서양사상이 확산됨에 따라 신분제 붕괴도 가속화되었다. 교육을 통해 대물림되던 지위를 뛰어넘는 지도자도 배출되었으며, 이런 성공 경험은 한국의 교육열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3-12.배재학당 역사박물관_Appenzeller Noble Memorial Museum (2).jpg|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서울 중구 서소문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File:3-12.배재학당 역사박물관_Appenzeller Noble Memorial Museum.jpg|배재학당 역사박물관(서울 중구 서소문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File:3-12.이화여대_Ehwa Woman's University.jpg|이화여자대학교 본관(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lt;br /&gt;
File:3-13.이대캠퍼스1_Ehwa Woman's University.jpg|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헨리 아펜젤러]]&lt;br /&gt;
*[[메리 스크랜튼]]&lt;br /&gt;
*[[안창호]]&lt;br /&gt;
*[[이승훈]]&lt;br /&gt;
*[[서재필]]&lt;br /&gt;
*[[배재학당]]&lt;br /&gt;
*[[이화학당]]&lt;br /&gt;
*[[경신학교]]&lt;br /&gt;
*[[정신여학교]]&lt;br /&gt;
*[[이화여자대학교]]&lt;br /&gt;
*[[대한자강회]]&lt;br /&gt;
*[[교남학회]]&lt;br /&gt;
*[[대성학교]]&lt;br /&gt;
*[[오산학교]]&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개화기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안종철, 『미국 선교사와 한미관계, 1931-1948 : 교육철수, 전시협력 그리고 미군정』,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0.&lt;br /&gt;
|참고문헌2=김승태, 『한말·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lt;br /&gt;
|참고문헌3=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개화기 한국과 세계의 상호교류』, 국학자료원, 2004. &lt;br /&gt;
}}&lt;br /&gt;
'''『미국 선교사와 한미관계』'''는 선교사 가운데 미국 출신 선교사들의 활약상을 집중적으로 규명하고자 한 책이다. 시기적으로는 만주사변 이후부터의 활동을 범위로 하였는데, 이때는 일본의 식민정책이 민족말살 혹은 전쟁을 위한 병참의 성격으로 조선을 통치하고자 했던 상황이었으므로, 한민족의 위기에 대한 미국 출신 선교사들의 활동 내용과 그 면면들을 상세히 살피고자 하였다. 특히 미군정이 실시되고 난 이후 다시 돌아온 그들이 해방정국의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까지도 살피고 있어 근현대사 속의 선교사들의 활동 양상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말·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는 개화기 선교사들의 유입과 활동, 그들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을 망라하여 상세하게 정리한 책이다. 특히 서양으로부터 유입되어 온 선교사를 통해 조선이 근대적 문물과 자극을 받게 되면서 오는 영향을 두려워한 일본이 그들을 어떻게 견제 및 회유하고자 했는지, 또 선교사들의 반응과 교육을 통해 조선에 미친 결과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이었는지를 상세히 분석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이 서양사회와 조선을 연결 짓는 일종의 메신져 역할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개화기 한국과 세계의 상호교류』'''는 근대 일본과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를 위해 문호를 열고 세계로 나섰던 한국의 교류 양상을 다각도로 접근하여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우선적인 접촉과 교류의 대상은 일본과 중국이었지만, 당시 조선은 기독교를 매개로 서양과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면서 그 접촉의 양상은 더욱 다양해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적 교리와 삶의 양식들을 수용하는가 하면, 반대로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의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겨 서양에 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호교류를 통해 한국은 국제질서 속에 합류할 수 있었고, 전근대 시대로부터 근대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개화기 세계를 향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교류를 위한 열망들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학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재건 외 공저, 『한국 근대의학의 기원, 연세』, 역사공간, 2016.  &lt;br /&gt;
|참고문헌2=부산근대역사관, 『근대의 기억 학교에 가다 : 2011 부산근대역사관 특별기획전』, 부산근대역사관, 2011.&lt;br /&gt;
|참고문헌3=古川 昭, 『구한말 근대학교의 형성』, 경인문화사, 2006. &lt;br /&gt;
}}&lt;br /&gt;
'''『한국 근대의학의 기원, 연세』'''는 근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연희전문학교, 즉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역사와 활동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연희전문학교는 단순한 근대 교육기관의 의미를 넘어 근대적 의학교로서 설립되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개화기 의학과 의료체계의 확립은 전근대 조선의 껍질을 벗고 국민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국민 보건과 의료가 가능해지기 위한 선결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 전문성과 첨단 기술의 필요조건은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개화기 한국이 넘어야할 필수적인 한계였다. 그 한계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이 책은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제중원에서부터 출발해 연희·세브란스로 확장되는 내용들을 잘 서술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근대의 기억 학교에 가다 : 2011 부산근대역사관 특별기획전』'''은 2011년 부산근대역사관에서 열린 사진전시회의 모습을 담은 도록이다. 사진도록인 만큼 개화기 당시의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 학교와 학생들, 혹은 교육 현장의 다양한 모습들을 많이 담고 있다. 특히나 당시 학교에서 진행되었던 다양한 행사의 종류와 내용, 면면들, 제국주의 일본이 강요했던 조선교육령의 변천에 따라 실제 학교에서의 교육 내용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학도지원병들이나 학교근로보국대의 모습들, 일반 학생들의 일상생활까지 당시 현실을 21세기 우리들에게 그대로 옮겨와 전해주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실체와 모습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담아내는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사진전의 도록은 일반 대중들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다.   &lt;br /&gt;
&lt;br /&gt;
'''『구한말 근대학교의 형성』'''은 개화기 설립되기 시작한 근대적 학교의 형성과정과 그 특징들을 종합해서 정리한 책이다. 근대적 교육개혁이 이뤄지기 시작한 갑오개혁에서부터 지방 소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이후 사범학교로서 한성사범이 설립되는 과정, 그 교원조직의 양상 등을 소개하였다. 또 중등·고등 교육으로 확산되면서 한성고등학교, 외국어학교 등이 설립되는 과정도 살폈다. 특히 이 때 학교의 재정과 졸업생들의 진로 등 실질적인 문제까지도 접근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대한제국시기에는 농상공학교의 설립이 두드러지는데, 이 역시 구성은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일본인 저자의 시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근대 교육의 체제와 내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대식, 『한국 교육의 역사적 전개』,  학지사, 2017.&lt;br /&gt;
|참고문헌2=이건상 외 공저,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의 근대 : 서구 근대사상의 수용과 근대교육의 성립을 중심으로』, 모시는사람들, 2013. &lt;br /&gt;
|참고문헌3=한용진, 『근대 한국 고등교육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2.&lt;br /&gt;
}}&lt;br /&gt;
'''『한국 교육의 역사적 전개』'''는 전통적 교육제도에서 근대적 교육체제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변화 양상과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주로 제7장에서 근대 교육의 태동과 성장을 다루면서 근대교육의 주도세력을 선교사와 정부, 그리고 조선의 민간인으로 나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교육이 탄압 받으면서 그것이 조선인의 교육에 미친 영향 등을 함께 분석해 봄으로써 한국의 근대적 교육의 형성과 전개 내용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근대교육기관과 관련한 개설적 지식과 정보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lt;br /&gt;
&lt;br /&gt;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의 근대』'''는 근대적 교육제도와 체제의 수립과정을 두고 조선과 일본의 사례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그 내용을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근대적 교육 체제가 모두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조선과 일본이 전통적인 교육체계를 어떻게 개편해 가는지에 큰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였다. 특히 그 수용과 안착의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주목하면서 그 차이가 결국 양국의 근대화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근대 한국 고등교육 연구』'''는 근대 개화기 한국에 뿌리내린 근대교육 제도와 체제를 포함하여 교육기관을 망라한 종합적인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 저자는 근대시기 한국의 고등교육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면서 성균관에 대한 개혁을 그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후 등장한 근대 교육기관인 동문학과 육영공원의 설립과 운영 등을 소개하고, 기독교계열의 학교와 교육기관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과정과 대한제국기 관립학교들의 설립, 사관양성 교육의 등장, 사범교육과 의학교육에 이르기까지 근대 교육기관에 관련한 종합적인 사실들을 꼼꼼하게 나열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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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도로 보는 한국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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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Korean History as Seen through Maps&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본 지도들은 한반도에서 전개된 역사를 시대별로 나타낸 것으로 고조선,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 해군의 항전, 일제 강점기의 항일 투쟁, 세계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지도 등을 제시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 역사 시대별 지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01(K).jpg|고조선&lt;br /&gt;
File:002(K).jpg|삼국시대 초&lt;br /&gt;
File:003(K).jpg|삼국시대 4세기말~5세기초&lt;br /&gt;
File:004(K).jpg|삼국시대 5세기말~6세기초&lt;br /&gt;
File:005(K).jpg|삼국시대 6세기중~7세기초&lt;br /&gt;
File:006(K).jpg|남북시대&lt;br /&gt;
File:007(K).jpg|고려&lt;br /&gt;
File:008(K).jpg|조선&lt;br /&gt;
File:009(K).jpg|일제강점기&lt;br /&gt;
File:010(K).jpg|해방이후, 6.25전쟁&lt;br /&gt;
File:011(K).jpg|대한민국(남한)&lt;br /&gt;
File:012(K).jpg|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한국 주요 유적지 분포 지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13(K).jpg|동검 분포 지역&lt;br /&gt;
File:014(K).jpg|고인돌 분포 지역&lt;br /&gt;
File:015(K).jpg|주요 구석기 유적지&lt;br /&gt;
파일:022(K).jpg|고려시대 청자 가마터&lt;br /&gt;
파일:041(K).jpg|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터&lt;br /&gt;
파일:045(K).jpg|조선 왕릉의 위치&lt;br /&gt;
파일:046(K).jpg|서울의 5대 궁궐&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23(K).jpg|시기별 임진왜란 지도&lt;br /&gt;
File:023-2(K).jpg|일본의 주요 침략 경로&lt;br /&gt;
File:044(K).jpg|바다에서의 조선 해군의 항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지도로 보는 한국전쟁'''==&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18(K).jpg|북한의 남한 침략&lt;br /&gt;
File:019(K).jpg|UN군 참전&lt;br /&gt;
File:020(K).jpg|중공군의 개입&lt;br /&gt;
File:021(K).jpg|정전협정에 따른 군사분계선 설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지도로 보는 항일투쟁'''==&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32(K).jpg|3.1운동&lt;br /&gt;
File:032-2(K).jpg|3.1운동&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분류:멀티미디어로 보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B0%B1%EB%82%A8%EC%A4%80:_%EB%8F%99%EC%96%91%EC%97%90%EC%84%9C_%EC%98%A8_%EB%AC%B8%ED%99%94_%ED%85%8C%EB%9F%AC%EB%A6%AC%EC%8A%A4%ED%8A%B8&amp;diff=4765</id>
		<title>백남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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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ounder of Video Art and &amp;quot;Cultural Terrorist,&amp;quot; Nam June Paik&lt;br /&gt;
}}&lt;br /&gt;
=='''백남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lt;br /&gt;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lt;br /&gt;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비디오 아트 분야를 개척하고 많은 작품을 발표한 현대 예술가이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제품을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비디오 아트가 만들어짐으로써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백남준에게 독일의 언론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는 음악과 철학에 심취하였다. 1957년 독일로 간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 무렵 백남준은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꽃피웠던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중시하였다. &lt;br /&gt;
&lt;br /&gt;
&amp;quot;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amp;quot;라고 공언했던 그는 비디오의 폭넓은 표현가능성을 발견하고 순수 전자음악 작곡에서 시각미술로 방향을 바꿨다.&lt;br /&gt;
&lt;br /&gt;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lt;br /&gt;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열세 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다.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1965년에 발표되었다.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한 것이 미술사에 기록된 첫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백남준은 이 무렵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65년에는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음악과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뉴욕에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 때는 무어만이 웃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의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974년부터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영상을 내보내는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이 무렵 발표된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었다. &lt;br /&gt;
 &lt;br /&gt;
===굿모닝 미스터 오웰===&lt;br /&gt;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4년 1월 1일 실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되어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담은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lt;br /&gt;
&lt;br /&gt;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또 2000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에서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의 작품으로 레이저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선보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유해는 화장 후 본인의 소망대로 한국과 미국,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한국의 서울은 백남준이 태어난 곳이고 미국의 뉴욕은 주요 활동 무대였으며 독일은 그가 평소 예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나라이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비디오 아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플로랑스 드 메르디외, 『예술과 뉴테크놀로지: 비디오·디지털 아트, 멀티미디어 설치예술』, 마로니에북스, 2010.&lt;br /&gt;
|참고문헌2=실비아 마르틴, 『비디오 아트』, 마로니에북스, 2010.&lt;br /&gt;
|참고문헌3=그레고리 배트코크, 『비디오 예술의 세계 : 비디오 아트란 무엇인가』, 인간사랑, 1990.&lt;br /&gt;
}}&lt;br /&gt;
'''『예술과 뉴테크놀로지: 비디오·디지털 아트, 멀티미디어 설치예술』'''은 미디어 기술이 예술과 만나게 되는 지점인 디지털, 비디오 아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컴퓨터의 개발로부터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예술과 결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으며 이후 텔레비전의 등장과 비디오 아트의 영역이 개척될 수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 영역의 확립에는 한국인 아티스트 백남준이 그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고 소개하면서 그의 예술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비디오 아트』'''는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 개척된 미디어 아트 가운데 비디오 아트에 대해 집대성하여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비디오 아트 예술가들의 대표작과 예술적 특징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 35명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대중들에게 생소한 영역인 비디오 아트의 세계와 메시지들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이해를 돕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비디오 예술의 세계 : 비디오 아트란 무엇인가』'''는 비디오를 활용한 예술 장르로 새롭게 개척되고 있는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정리해낸 개설서이다. 저자는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서 비디오 아트 세계의 역사와 예술성, 주요한 아티스트와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그 안에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비디오 아트에 대한 개설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존 케이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케이지, 『사일런스 : 존 케이지의 강연과 글』, 오픈하우스, 2014.&lt;br /&gt;
|참고문헌2=리처드 코스텔라네츠, 『케이지와의 대화』,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1. &lt;br /&gt;
}}&lt;br /&gt;
'''『사일런스 : 존 케이지의 강연과 글』'''은 존 케이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정리하면서 현대음악의 전반에 대해 개설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미 출간 50주년이 된 이 책은 현대 음악가로서 저자가 개척하고 정립한 음악 세계의 구조와 의미, 자신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백남준과 연계하여 새로운 예술 장르 창출에 큰 역할을 했던 존 케이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케이지와의 대화』'''는 현대 음악의 개척자이자 거장 존 케이지의 음악과 예술 세계를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존 케이지가 현대 음악의 선구자로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위상을 소개하고, 그의 음악을 197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눠 특징과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그의 예술 세계가 음악에서만 머물지 않고 시각 예술 쪽으로도 확장되어 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추이와 전개과정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존 케이지 이후 그의 예술 세계를 계승한 그 후계자들의 활동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어 존 케이지에서 시작된 현대 음악과 예술 세계의 총체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진휘연,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아방가르드 미술, 도전과 새로움의 역사』, 민음사, 2004.&lt;br /&gt;
|참고문헌2=레나토 포지올리, 『아방가르드 예술론』, 문예출판사, 1998. &lt;br /&gt;
}}&lt;br /&gt;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아방가르드 미술, 도전과 새로움의 역사』'''는 아방가르드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뒤샹과 아방가르드의 관계, 네오다다이즘이 아방가르드의 영역인가의 여부 등 아방가르드 예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비판적 시선 등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일반 대중들에게 난해한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는 가운데 그 일상성에서 벗어난 사조의 특성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역시 예술사적 흐름 속에서 설명하였다.  &lt;br /&gt;
&lt;br /&gt;
'''『아방가르드 예술론』'''은 현대 미술의 사조 가운데 아방가르드 양식의 총체를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부터 그 용어를 쓰게 된 역사, 운동의 개념으로서 아방가르드의 의미와 활동 등을 상세하게 정리해 제공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아방가르드가 낭만주의와 대비되는 예술 세계라고 지적하고 낭만주의가 대중성을 지향한다면 아방가르드는 비대중성을 상징하는 사조라는 점을 충실히 소개하였다. 나아가 아방가르드의 모호성 문제는 아방가르드의 전위적 성격, 실험주의의 소산이라는 것도 함께 지적하였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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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백남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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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ounder of Video Art and &amp;quot;Cultural Terrorist,&amp;quot; Nam June Paik&lt;br /&gt;
}}&lt;br /&gt;
=='''백남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lt;br /&gt;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lt;br /&gt;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비디오 아트 분야를 개척하고 많은 작품을 발표한 현대 예술가이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제품을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비디오 아트가 만들어짐으로써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백남준에게 독일의 언론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는 음악과 철학에 심취하였다. 1957년 독일로 간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 무렵 백남준은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꽃피웠던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중시하였다. &lt;br /&gt;
&lt;br /&gt;
&amp;quot;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amp;quot;라고 공언했던 그는 비디오의 폭넓은 표현가능성을 발견하고 순수 전자음악 작곡에서 시각미술로 방향을 바꿨다.&lt;br /&gt;
&lt;br /&gt;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lt;br /&gt;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열세 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다.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1965년에 발표되었다.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한 것이 미술사에 기록된 첫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백남준은 이 무렵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65년에는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음악과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뉴욕에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 때는 무어만이 웃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의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974년부터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영상을 내보내는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이 무렵 발표된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었다. &lt;br /&gt;
 &lt;br /&gt;
===굿모닝 미스터 오웰===&lt;br /&gt;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4년 1월 1일 실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되어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담은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lt;br /&gt;
&lt;br /&gt;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또 2000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에서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의 작품으로 레이저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선보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유해는 화장 후 본인의 소망대로 한국과 미국,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한국의 서울은 백남준이 태어난 곳이고 미국의 뉴욕은 주요 활동 무대였으며 독일은 그가 평소 예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나라이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비디오 아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플로랑스 드 메르디외, 『예술과 뉴테크놀로지: 비디오·디지털 아트, 멀티미디어 설치예술』, 마로니에북스, 2010.&lt;br /&gt;
|참고문헌2=실비아 마르틴, 『비디오 아트』, 마로니에북스, 2010.&lt;br /&gt;
|참고문헌3=그레고리 배트코크, 『비디오 예술의 세계 : 비디오 아트란 무엇인가』, 인간사랑, 1990.&lt;br /&gt;
}}&lt;br /&gt;
'''『예술과 뉴테크놀로지: 비디오·디지털 아트, 멀티미디어 설치예술』'''은 미디어 기술이 예술과 만나게 되는 지점인 디지털, 비디오 아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컴퓨터의 개발로부터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예술과 결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지적하고 이후 텔레비전의 등장과 비디오 아트의 영역이 개척될 수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 영역의 확립에는 한국인 아티스트 백남준이 그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고 소개하면서 그의 예술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설명해 나가고 있다.   &lt;br /&gt;
&lt;br /&gt;
'''『비디오 아트』'''는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 개척된 미디어 아트 가운데 비디오 아트에 대해 집대성하여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비디오 아트 예술가들의 대표작과 예술적 특징들을 소개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전체 35명의 비디오 아티스트의 작품세계가 소개되고 있는 이 책은 대중들에게 생소한 영역인 비디오 아트의 세계와 메시지들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이해를 돕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비디오 예술의 세계 : 비디오 아트란 무엇인가』'''는 비디오를 활용한 예술 장르로 새롭게 개척되고 있는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정리해낸 개설서이다. 저자는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서 비디오 아트 세계의 역사와 예술성, 주요한 아티스트와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그 안에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비디오 아트에 대한 개설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존 케이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케이지, 『사일런스 : 존 케이지의 강연과 글』, 오픈하우스, 2014.&lt;br /&gt;
|참고문헌2=리처드 코스텔라네츠, 『케이지와의 대화』,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1. &lt;br /&gt;
}}&lt;br /&gt;
'''『사일런스 : 존 케이지의 강연과 글』'''은 존 케이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정리하면서 현대음악의 전반에 대해 개설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미 출간 50주년이 된 이 책은 현대 음악가로서 저자가 개척하고 정립한 음악 세계의 구조와 의미, 자신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백남준과 연계하여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존 케이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케이지와의 대화』'''는 현대 음악의 개척자이자 거장 존 케이지의 음악과 예술 세계를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존 케이지가 현대 음악의 선구자로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위상을 소개하고, 그의 음악을 7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눠 그 특징과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그의 예술 세계가 음악에서만 머물지 않고 시각 예술 쪽으로도 확장되어 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추이와 전개과정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존 케이지 이후 그의 예술 세계를 계승한 그 후계자들의 활동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어 존 케이지에서 시작된 현대 음악과 예술 세계의 총체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진휘연,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아방가르드 미술, 도전과 새로움의 역사』, 민음사, 2004.&lt;br /&gt;
|참고문헌2=레나토 포지올리, 『아방가르드 예술론』, 문예출판사, 1998. &lt;br /&gt;
}}&lt;br /&gt;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아방가르드 미술, 도전과 새로움의 역사』'''는 아방가르드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뒤샹과 아방가르드의 관계, 네오다다이즘이 아방가르드의 영역인가의 여부 등 아방가르드 예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비판적 시선 등을 친절학게 설명해 내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일반 대중들에게 난해한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는 가운데 그 일상성에서 벗어난 사조의 특성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역시 예술사적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아방가르드 예술론』'''은 현대 미술의 사조 가운데 아방가르드 양식의 총체를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부터 그 용어를 쓰게 된 역사, 운동의 개념으로서 아방가르드의 의미와 활동 등을 상세하게 정리해 제공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아방가르드가 낭만주의와 대비되는 예술 세계라고 지적하고 낭만주의가 대중성을 지향한다면 아방가르드는 비대중성을 상징하는 사조라는 점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아방가르드의 모호성 문제는 아방가르드의 전위적 성격, 실험주의의 소산이라는 것도 함께 지적하였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D%99%98%EA%B8%B0:_%ED%95%9C%EA%B5%AD%EC%A0%81_%ED%8A%B9%EC%84%B1%EA%B3%BC_%ED%98%84%EB%8C%80%EC%84%B1%EC%9D%84_%EC%A1%B0%ED%99%94%EC%8B%9C%ED%82%A8_%ED%99%94%EA%B0%80&amp;diff=4763</id>
		<title>김환기: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킨 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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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6:31: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Artist that Harmonized Korean Tradition and Modernity - Whanki Kim&lt;br /&gt;
}}&lt;br /&gt;
=='''김환기: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킨 화가'''==&lt;br /&gt;
===한국적이면서 현대적인 그림===&lt;br /&gt;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서양화가로서 20세기 한국 미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구성주의 계열의 추상 미술을 한국에 들여온 초기 모더니스트이다.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이며 전통적인 한국의 미에 서구 모더니즘을 결합한 화가이다. 또한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함께 갖춘 그림을 그린 화가로 평가된다. 호는 수화(樹話)이다. &lt;br /&gt;
&lt;br /&gt;
김환기는 1933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에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어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고 아마기화랑(天城畫廊)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신미술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서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홍익대학교로 옮긴 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65년 브라질에서 열린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ale)의 커미셔너로 출국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국제 미술의 주류로 발전하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다른 활동으로 작품 활동에 소홀했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작품 창작에 집중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으로 갔다. 그후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추상에서 한국적 정서로===&lt;br /&gt;
그의 작품 경향은 일본 유학 시기(1930년대~1940년대 초반), 해방 후부터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1945~1963), 미국 뉴욕에 있던 시기(1964~1974) 등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유학 중이던 제1기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 등이 현재 남아 있는데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부터 파리를 다녀와 뉴욕으로 가기까지의 시기인 제2기에는 한국적 소재를 담은 작품을 주로 그렸다. 이 시기에는 달과 산, 구름과 학, 나목(裸木) 등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 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렀던 3년 동안 이런 주제들이 더욱 함축된 작품들을 그렸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우거나 극히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산과 나목,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 ‘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의 대표 작품들이다.&lt;br /&gt;
&lt;br /&gt;
미국 뉴욕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약 10년에 걸친 시기인 제3기에는 지금까지의 경향과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화를 그렸고, 이전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 대신 수묵(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 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꼽힌다. &lt;br /&gt;
 &lt;br /&gt;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lt;br /&gt;
뉴욕 시기 김환기의 점화는 색조의 미묘한 변조와 농담의 변화, 발묵 효과와 같은 번짐 효과 등을 통해 미국의 미술 세계와는 다른 동양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우주적 공간의 이미지를 담은 추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세로 236㎝, 가로 172㎝. 개인 소장)’는 김환기의 1970년대 점화의 대표작이다. 점화는 화면 전체에 점을 찍고 그 점 하나 하나를 여러 차례 둘러싸가는 동안 색이 중첩되고 번져나가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체 화면을 메꾸어 만든 그림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먹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의 작은 점들을 화면 전체에 찍어나간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작품의 제목은,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라고 이어지는 시인 김광섭(金珖燮)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김환기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1971년부터 1972년까지 가로 2m, 세로 3m 정도 크기의 대작 점화를 여러 점 그렸다. 김환기는 자신의 점화에 대해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일기에 썼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현대미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오세권, 『현대 한국화의 표현과 흐름』, 신원, 2016.&lt;br /&gt;
|참고문헌2=박영택,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휴머니스트, 2014.&lt;br /&gt;
|참고문헌3=김윤수 외 공저,『한국미술 100년』, 국립현대미술관, 2006.&lt;br /&gt;
}}&lt;br /&gt;
'''『현대 한국화의 표현과 흐름』'''은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 미술의 동향과 흐름을 전체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각 시대별 한국 미술의 큰 흐름과 대세를 제시하면서 50년대는 추상미술, 60년대는 실험적 오브제, 70년대는 한국화에 대한 오브제의 표현적 강세, 80년대는 수묵화와 채색화의 흐름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양상과 전반적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 주로 한국화 위주의 설명이지만, 서양화 위주의 현대 미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전체적인 균형감을 제공해 주는 데도 부족함이 없다.            &lt;br /&gt;
&lt;br /&gt;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는 한국의 현대 미술을 인물 중심으로 구조화하여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의 현대 미술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하면서 김환기의 미술을 한국 모더니즘 미술과 개념적 작업의 기원으로 설정하여 그 의미를 분석해 제시하고 있다. 한국 미술의 모더니즘은 김환기를 중심으로 윤형근 이우환 박서보 등 후속 성과 속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김환기가 한국 미술의 발전적 흐름의 한 줄기를 만들어 간 존재임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한국 현대 미술의 큰 흐름 속에서 김환기의 존재감을 확인하기에 적절한 책이라고 판단된다. &lt;br /&gt;
&lt;br /&gt;
'''『한국미술 100년』'''은 한국 현대미술의 개설서적인 성격으로 정리된 책이다. 근대 개화기 근대미술의 유입에서부터, 전통적인 미술의 양식과 현대 미술의 습합과정, 미술사적 주요 맥락 속의 그 특성과 발전 양상을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은 개항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한 세부적인 설명과 시대별 특징의 분석이 가미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한국 미술사 전반에 대한 개설적 지식을 얻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구성주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광래, 『미술 철학사』, 미메시스, 2016.&lt;br /&gt;
|참고문헌2=정진국, 『열화당 20세기 미술운동 : 러시아 구성주의』, 열화당, 1996. &lt;br /&gt;
}}&lt;br /&gt;
'''『미술 철학사』'''는 미술사에 있어서 구성주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개념서에 해당하는 책이다. 저자는 구성주의가 미술을 대하는 철학적 카테고리 속에서 출현한 하나의 양상이라고 보고 현대 미술에서 구성주의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통시성과 공시성 속에서 구성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위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중심으로 그 미술사적 위상과 의미를 천착하여 분석해 내고자 하였다. 현대 미술사적 전개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열화당 20세기 미술운동 : 러시아 구성주의』'''는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구성주의라는 현대 미술의 한 장르를 개척한 러시아 현대미술의 면면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구성주의는 사실 묘사 위주의 기존 미술 사조에서 벗어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양식으로 이 책에서는 그 특성과 의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이래 미술사의 새로운 한 장르로 자리 잡은 구성주의의 출현과정과 그 역사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모더니즘 미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로잘린드 크라우스 공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언스북스, 2011.&lt;br /&gt;
|참고문헌2=이영철 외 공저,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 형식주의, 맑시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시각과언어, 1997. &lt;br /&gt;
}}&lt;br /&gt;
'''『1900년 이후의 미술사 :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미술사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조류와 양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책은 19세기 이후 서양의 정신세계가 개척한 지면을 미술의 사조가 흡수해 새로운 분야와 기법을 개척해 내었으며, 그 속에서 현대미술의 흐름이 만들어졌음을 세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른바 모더니즘의 미술 양식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과 그것에 대한 반작용, 그리고 그 대안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어 서양 현대미술의 흐름과 양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 형식주의, 맑시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은 현대 미술에서 모더니즘의 위상과 그 내용들을 종합적이고 전문적으로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모더니즘의 위상과 지점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정치적 수용 측면에서 많은 관심과 배려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구성주의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역시 정치적 흐름과 필요성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 이후 미술사적 형식주의 비평에 있어서도 맑시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형식주의와 반형식주의 등 현대 미술의 사조와 문제의식에 대해 종합적인 해석과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는 유용한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6%90%EA%B8%B0%EC%A0%95:_%EC%97%AD%EA%B2%BD%EC%9D%84_%EC%9D%B4%EA%B2%A8%EB%82%B8_%EC%98%AC%EB%A6%BC%ED%94%BD_%EA%B8%88%EB%A9%94%EB%8B%AC%EB%A6%AC%EC%8A%A4%ED%8A%B8&amp;diff=4762</id>
		<title>손기정: 역경을 이겨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6%90%EA%B8%B0%EC%A0%95:_%EC%97%AD%EA%B2%BD%EC%9D%84_%EC%9D%B4%EA%B2%A8%EB%82%B8_%EC%98%AC%EB%A6%BC%ED%94%BD_%EA%B8%88%EB%A9%94%EB%8B%AC%EB%A6%AC%EC%8A%A4%ED%8A%B8&amp;diff=4762"/>
				<updated>2018-03-13T05:58: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Gold Medal Olympian Marathon Runner, Sohn Kee-chung&lt;br /&gt;
}}&lt;br /&gt;
=='''손기정: 역경을 이겨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lt;br /&gt;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기록의 주인공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일본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점령 아래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기정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반드시 1등을 하여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달리기로 일본인을 이긴 한국인들===&lt;br /&gt;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 5,000m 달리기 종목에서 청장년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마라톤을 시작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lt;br /&gt;
&lt;br /&gt;
그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손기정은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올림픽 선발 최종전에서는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은 3위와 4위에 머물렀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나라가 없었던 한국인은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최종 선발전에서 한국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20㎞를 뛰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종 평가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lt;br /&gt;
 &lt;br /&gt;
===고개 숙인 슬픈 우승자===&lt;br /&gt;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한국의 경성(지금의 서울)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가 탄 열차는 승객이 아닌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열차는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손기정은 이 여정에 대해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 해도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열차의 규모도 컸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베를린 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조선인(한국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lt;br /&gt;
&lt;br /&gt;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은 당시 세계 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물리친 우승 후보들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lt;br /&gt;
&lt;br /&gt;
은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amp;quot;서두르지 말라&amp;quot;라고 충고를 보내주어 스포츠맨십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함께 출전한 한국의 남승룡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손기정에게 반환점부터 어떻게 그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었는가 묻자, 그는 &amp;quot;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amp;quot;라고 대답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은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가슴에 일본 국기를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lt;br /&gt;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도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말해준다. 이는 ≪동아일보≫가 1936년 8월 25일자 신문 2면에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이 지난 1937년 6월 3일자에야 이 처분에서 풀려났다. &lt;br /&gt;
&lt;br /&gt;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 당시 손기정은 우승 기념으로 고대 청동 투구를 받았다. 높이 21.5㎝의 이 투구는 기원전 6세기 쯤 고대 그리스 투사들이 마상 경기 때 사용했던 것으로 1875년 그리스 제우스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이 투구는 올림픽 당시에 손기정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고 그동안 독일 올림픽 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더다가 1986년에 그리스의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 투구가 민족의 것이라고 판단하여 1994년에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현재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마라톤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대한육상경기연맹, 『한국 육상경기 100년사』, 동아일보사, 2013.&lt;br /&gt;
|참고문헌2=손기정,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 손기정 자서전』, 학마을B&amp;amp;M, 2012.&lt;br /&gt;
}}&lt;br /&gt;
'''『한국 육상경기 100년사』'''는 한국 육상 100년의 역사를 정리해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식민지배의 억압 속에 한민족은 육상경기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얻을 수 있었다. 육상경기를 통해 우월하고 뛰어난 민족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한민족은 특히 마라톤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보이곤 하였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하는가 하면, 해방 이후에도 보스톤 마라톤을 포함해 많은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이며 마라톤 강국으로 자임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손기정에서부터 황영조와 이봉주에 이르기까지 한국 마라톤의 발전사를 잘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 손기정 자서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민족 최초의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의 일생을 담은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손기정의 어두운 어린 시절과 그러한 자신을 위로해 준 마라톤에 입문하게 된 계기, 그가 평생 마라톤을 통해 마주한 많은 승부의 상황들, 한국 마라톤의 영광과 시련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한국의 마라톤 영웅의 기억을 통해 한국 마라톤 백년의 역사와 기억들을 충실히 접할 수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베를린 올림픽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안진태, 『독일 제3제국의 비극』, 까치글방, 2010. &lt;br /&gt;
|참고문헌2=한국체육인동우회, 『겨레와 함께 뛰었다 손기정, 그 힘찬 발걸음 :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60주년 기념집』, 한국체육인동우회, 1996.&lt;br /&gt;
}}&lt;br /&gt;
'''『독일 제3제국의 비극』'''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의해 수립된 독일 제3제국의 영광의 무대로 기획된 베를린 올림픽의 적나라한 면면들을 상세하게 살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제1장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나치 독일이 내세운 국가사회주의의 선언과는 다르게 베를린 올림픽이 파시스트에 의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을 살펴보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히틀러에 의해 올림픽의 이념이 왜곡됨으로써 그 성과와 의의가 많이 손상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올림픽이었다고도 분석하였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성화점화와 같은 많은 이벤트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지만, 이 역시 나치 독일의 위대함과 체제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에서 동양의 식민지 지배민족인 한국인 손기정에게 금메달이 돌아감으로써 그러한 의도가 결국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함께 강조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겨레와 함께 뛰었다 손기정, 그 힘찬 발걸음 :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60주년 기념집』'''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그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내용으로 저술된 책이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당하던 피지배 민족의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확인해야 했던 절박한 무대였다. 특히 같은 군국주의 국가로서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나치 독일의 체제 선전에 도구로써 강조되었던 베를린 올림픽이 전세계를 제패하고 금메달을 차지한 영광의 무대였음을 이 책은 담담하게 추억해 내었다. 당시 화보 사진과 다양한 기록들, 생존자들의 인터뷰와 회상들을 담아내면서 우리에게 당시 베를린 올림픽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고,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이 얼마나 많은 기쁨과 희망을 제공해 주었었는지를 이 책은 생생하게 기록해 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채백,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 : 일제 강점기 일장기 말소 사건 연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lt;br /&gt;
|참고문헌2=이길용, 『이길용 :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한국체육기자연맹, 1993. &lt;br /&gt;
}}&lt;br /&gt;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 : 일제 강점기 일장기 말소 사건 연구』'''는 1936년 민족사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전말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것은 다양한 배경에서 검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1930년대 전반적인 언론의 상황을 검토해야 일장기 말소 사건의 전말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보고, 일제의 언론 통제와 3개의 민간 언론지의 상업적 경쟁이 이러한 상황을 부추겼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미 그 이전 1932년 LA올림픽에서 동아일보의 보도에 유사한 사례가 있었으며, 베를린 올림픽 당시에도 8월 13일자 조간에 두 가지 판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하여 그 의미를 도출해 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이길용 :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화재가 되었던 실제 취재기자 이길용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이길용은 당시 체육기자로서 베를린 올림픽의 동정을 취재하여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지우고 내보내 많은 파장을 야기했던 인물이다. 일종의 개인사 측면에서 저술된 이 책은 기자 이길용의 일대기와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련, 이후 체육기자의 사표로서 그가 걸어왔던 여정 등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일장기 말소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사건을 충실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5%88%EC%A4%91%EA%B7%BC:_%EB%8C%80%ED%95%9C%EC%A0%9C%EA%B5%AD_%EC%B9%A8%EB%9E%B5%EC%9D%98_%EC%9B%90%ED%9D%89%EC%9D%84_%EC%B4%9D%EC%82%B4%ED%95%98%EB%8B%A4&amp;diff=4761</id>
		<title>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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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5:41: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Independence Activist and Patriotic Assassin, An Jung-geun&lt;br /&gt;
}}&lt;br /&gt;
=='''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lt;br /&gt;
===하얼빈 역에 울린 총성===&lt;br /&gt;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안중근의 거사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를 예정이었다. &lt;br /&gt;
&lt;br /&gt;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인도 존경한 안중근===&lt;br /&gt;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lt;br /&gt;
&lt;br /&gt;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lt;br /&gt;
 &lt;br /&gt;
===동양 평화를 당부하고 순국하다===&lt;br /&gt;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lt;br /&gt;
&lt;br /&gt;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 터 부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8년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옥중에서 서론만 쓴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안중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안중근, 『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 2014.&lt;br /&gt;
|참고문헌2=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14.&lt;br /&gt;
}}&lt;br /&gt;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당시, 200여 개가 넘는 유묵과 함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 외에 『동양평화론』과 『인심결합론』, 유묵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게재 기사, 그리고 최후 공판 기록 등을 실었다.&lt;br /&gt;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안중근 평전』'''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하얼빈 의거와 이후 공판투쟁 모습 등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역사적 사료와 증언기록을 통해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처형 전후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 후반부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후 국내외에서 쏟아진 시문과 각종 전기 등을 수록해 당시 안중근 의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부록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옥중에서 쓴 각종 휘호를 정리해 수록했고, 중국에서 발했되었던 ≪민우일보≫에 실린 안중근 의사에 관한 사설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을 게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안중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태진 외,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지식산업사, 2010.&lt;br /&gt;
|참고문헌2=김영진,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모든북, 2017.&lt;br /&gt;
|참고문헌3=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채륜, 2010.&lt;br /&gt;
}}&lt;br /&gt;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물론,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안중근의 생애 및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2장에서는 국내에서의 활동, 3장에서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다루었으며, 4장에서 하얼빈 역에서의 총살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5장은 뤼순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과정을 다루었다. &lt;br /&gt;
&lt;br /&gt;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연구논문집」 제4권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을 위해 2009년 10월 &amp;lt;안중근 동양평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amp;gt;를 테마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토론한 논문을 엮은 것이다. 안중근의 사상의 궁극적 관심이 깃든 동양평화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지닌 국제정세적 배경을 살펴본다. 우리 시대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계승하는 방법을 모색한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A%B5%AC:_%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EC%9D%98_%EC%A4%91%EC%8B%AC_%EC%9D%B8%EB%AC%BC&amp;diff=4760</id>
		<title>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심 인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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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5:2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Political Leader and Independence Activist, Kim Gu&lt;br /&gt;
}}&lt;br /&gt;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심 인물'''==&lt;br /&gt;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로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호는 ‘백범’인데,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자를 따서 미천한 사람부터 평범한 사람까지 누구나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고 17세에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 동학교도가 되었던 김구는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lt;br /&gt;
&lt;br /&gt;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은 21세의 김구는 1896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 직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탈옥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 운동에 나서서 1907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7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는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수뇌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거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내 소원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요===&lt;br /&gt;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라고도 썼다. 독립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과 강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그는 1940년 3월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 치를 태세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였다. 또 미 육군과 제휴하여 비밀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는 등,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추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lt;br /&gt;
 &lt;br /&gt;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lt;br /&gt;
해방 전 임시 정부는 국외의 독립 운동 단체를 대표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쓸렸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서로 심하게 갈등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로부터 신탁 통치 방침이 전해지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남한에서 정치적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반공산주의만을 외친 것이 아니고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도 두 차례나 계획했다.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되자 김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또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추후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듬해인 1948년 2월 하순 유엔에서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김구는 이를 반대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에게 민족의 분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도 더 지난 후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lt;br /&gt;
&lt;br /&gt;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2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단독 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고,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며 평양으로 향했다. &lt;br /&gt;
 &lt;br /&gt;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10총선거를 거부하였다. 김구는 1948년 국회에서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하였다. 김구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도 유엔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삼웅,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14.&lt;br /&gt;
|참고문헌2=조범래, 『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1992.&lt;br /&gt;
|참고문헌3=박도,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눈빛, 2013.&lt;br /&gt;
|참고문헌4=김구, 『백범일지』, 돌베개, 2005.&lt;br /&gt;
}}&lt;br /&gt;
'''『백범 김구 평전』'''은 백범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백범이라는 인간의 자연인, 혁명가, 정치인 또한 자연 교육자와 문화주의 신봉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보인다. 일반적으로 혁명가와 독립투사로만 백범을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몰랐던 교육자적 자질과 정신 및 이상이 돋보이는 백범을 만나게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은 백범선생의 출생에서부터 파란 많았던 항일구국운동, 임정활동, 건국활동 중 노혁명가의 최후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였다.&lt;br /&gt;
&lt;br /&gt;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는 1949년 6월 26일 발생한 백범 김구 암살을 자세히 다루고, 사건 이후 그동안 계속되어 온 암살배후 진상규명 운동과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응징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저자는 김구 선생의 마지막 발자취를 더듬으며 암살자와 추적자들의 끈질긴 이야기, 그리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다녀온 이야기를 오롯이 담으면서 암살 배후의 거대한 실체를 희미하게 보여준다.&lt;br /&gt;
&lt;br /&gt;
'''『백범일지』'''는 전문연구자의 원전비평에 기초한 정본으로 진솔하고 감동적인 기록을 담았다. 이 책은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 대조했다. 또한 사전류는 물론 고전, 규장각 자료 등의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 중국 등 해외의 임정 관계 자료까지 두루 활용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원본의 미흡한 점과 착오 등을 수정, 보완했다.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lt;br /&gt;
|참고문헌2=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5.&lt;br /&gt;
|참고문헌3=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5)』, 한울, 2017.&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난에 찬 26년간의 독립투쟁 역사를 조망하면서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인물들의 사상과 활동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lt;br /&gt;
&lt;br /&gt;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는 대한민국의 요람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작과 끝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다. 상하이, 광둥, 충칭 등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펼쳤던 임시정부의 활동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그 의의를 밝힌다. 또한 임시정부의 터전을 마련했던 신규식과, 그 살림살이를 맡았던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그리고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김구까지, 그 행적을 낱낱이 전한다. &lt;br /&gt;
&lt;br /&gt;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5』'''는 1919년 3·1 운동 전후 시기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타국의 땅에서 목숨까지 희생하며 헌신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삶과 업적을 300여 점의 사진으로 소개한 책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싶고 누구나 알아야만 하는 역사가 이 사진집에 담겨 있다. 사진은 시간순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사진마다 명료한 설명이 함께 실려 있어, 어린 학생들에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학습할 수 있는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고, 성인들에게는 대한민국의 근원을 다시금 새기는 시간을 갖게 만들어줄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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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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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3:11: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Independence Activist and Patriotic Assassin, An Jung-geun&lt;br /&gt;
}}&lt;br /&gt;
=='''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lt;br /&gt;
===하얼빈 역에 울린 총성===&lt;br /&gt;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안중근의 거사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를 예정이었다. &lt;br /&gt;
&lt;br /&gt;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인도 존경한 안중근===&lt;br /&gt;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lt;br /&gt;
&lt;br /&gt;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lt;br /&gt;
 &lt;br /&gt;
===동양 평화를 당부하고 순국하다===&lt;br /&gt;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lt;br /&gt;
&lt;br /&gt;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 터 부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8년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옥중에서 서론만 쓴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안중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안중근, 『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 2014.&lt;br /&gt;
|참고문헌2=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14.&lt;br /&gt;
}}&lt;br /&gt;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당시, 200여 개가 넘는 유묵과 함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 외에 『동양평화론』과 『인심결합론』, 유묵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게재 기사, 그리고 최후 공판 기록 등을 실었다.&lt;br /&gt;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안중근 평전』'''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하얼빈 의거와 이후 공판투쟁 모습 등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역사적 사료와 증언기록을 통해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처형 전후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 후반부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후 국내외에서 쏟아진 시문과 각종 전기 등을 수록해 당시 안중근 의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부록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옥중에서 쓴 각종 휘호를 정리해 수록했고, 중국에서 발했되었던 &amp;lt;민우일보&amp;gt;에 실린 안중근 의사에 관한 사설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을 게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안중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태진 외,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지식산업사, 2010.&lt;br /&gt;
|참고문헌2=김영진,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모든북, 2017.&lt;br /&gt;
|참고문헌3=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채륜, 2010.&lt;br /&gt;
}}&lt;br /&gt;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물론,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안중근의 생애 및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2장에서는 국내에서의 활동, 3장에서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다루었으며, 4장에서 하얼빈 역에서의 총살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5장은 뤼순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과정을 다루었다. &lt;br /&gt;
&lt;br /&gt;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연구논문집」 제4권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을 위해 2009년 10월 &amp;lt;안중근 동양평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amp;gt;를 테마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토론한 논문을 엮은 것이다. 안중근의 사상의 궁극적 관심이 깃든 동양평화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지닌 국제정세적 배경을 살펴본다. 우리 시대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계승하는 방법을 모색한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5%88%EC%A4%91%EA%B7%BC:_%EB%8C%80%ED%95%9C%EC%A0%9C%EA%B5%AD_%EC%B9%A8%EB%9E%B5%EC%9D%98_%EC%9B%90%ED%9D%89%EC%9D%84_%EC%B4%9D%EC%82%B4%ED%95%98%EB%8B%A4&amp;diff=4758</id>
		<title>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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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3:08: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Independence Activist and Patriotic Assassin, An Jung-geun&lt;br /&gt;
}}&lt;br /&gt;
=='''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lt;br /&gt;
===하얼빈 역에 울린 총성===&lt;br /&gt;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안중근의 거사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를 예정이었다. &lt;br /&gt;
&lt;br /&gt;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인도 존경한 안중근===&lt;br /&gt;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lt;br /&gt;
&lt;br /&gt;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lt;br /&gt;
 &lt;br /&gt;
===동양 평화를 당부하고 순국하다===&lt;br /&gt;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lt;br /&gt;
&lt;br /&gt;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 터 부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8년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옥중에서 서론만 쓴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안중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안중근, 『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 2014.&lt;br /&gt;
|참고문헌2=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14.&lt;br /&gt;
}}&lt;br /&gt;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5개월 동안 투옥되어 있을 당시, 200여 개가 넘는 유묵과 함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 외에 『동양평화론』과 『인심결합론』, 유묵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게재 기사, 그리고 최후 공판 기록 등을 실었다.&lt;br /&gt;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안중근 평전』'''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하얼빈 의거와 이후 공판투쟁 모습 등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역사적 사료와 증언기록을 통해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처형 전후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 후반부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후 국내외에서 쏟아진 시문과 각종 전기 등을 수록해 당시 안중근 의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부록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옥중에서 쓴 각종 휘호를 정리해 수록했고, 중국에서 발했되었던 &amp;lt;민우일보&amp;gt;에 실린 안중근 의사에 관한 사설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을 게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안중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태진 외,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지식산업사, 2010.&lt;br /&gt;
|참고문헌2=김영진,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모든북, 2017.&lt;br /&gt;
|참고문헌3=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채륜, 2010.&lt;br /&gt;
}}&lt;br /&gt;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물론,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안중근의 생애 및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2장에서는 국내에서의 활동, 3장에서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다루었으며, 4장에서 하얼빈 역에서의 총살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5장은 뤼순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과정을 다루었다. &lt;br /&gt;
&lt;br /&gt;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연구논문집」 제4권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을 위해 2009년 10월 &amp;lt;안중근 동양평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amp;gt;를 테마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토론한 논문을 엮은 것이다. 안중근의 사상의 궁극적 관심이 깃든 동양평화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지닌 국제정세적 배경을 살펴본다. 우리 시대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계승하는 방법을 모색한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C%A4%EB%8F%99%EC%A3%BC:_%EC%8B%9C%EB%A1%9C_%EB%8F%85%EB%A6%BD%EC%9A%B4%EB%8F%99%EC%9D%84_%ED%95%98%EB%8B%A4&amp;diff=4757</id>
		<title>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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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2:54: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Beloved Poet and Independence Activist, Yun Dong-ju&lt;br /&gt;
}}&lt;br /&gt;
=='''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lt;br /&gt;
===암울한 현실에서의 자아 성찰===&lt;br /&gt;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 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amp;lt;문우(文友)&amp;gt;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amp;lt;경향신문&amp;gt;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lt;br /&gt;
  &lt;br /&gt;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lt;br /&gt;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lt;br /&gt;
&lt;br /&gt;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더 나아가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시 「참회록」의 전문이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lt;br /&gt;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lt;br /&gt;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lt;br /&gt;
이다지도 욕될까.&lt;br /&gt;
&lt;br /&gt;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lt;br /&gt;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lt;br /&gt;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lt;br /&gt;
&lt;br /&gt;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lt;br /&gt;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lt;br /&gt;
─ 그때 그 젊은 나이에&lt;br /&gt;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lt;br /&gt;
&lt;br /&gt;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lt;br /&gt;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lt;br /&gt;
&lt;br /&gt;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lt;br /&gt;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lt;br /&gt;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치안유지법으로 시인을 죽인 일본===&lt;br /&gt;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lt;br /&gt;
&lt;br /&gt;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를 근거로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4.&lt;br /&gt;
|참고문헌2=류양선, 『윤동주 순결한 영혼』, 북페리타, 2015.&lt;br /&gt;
}}&lt;br /&gt;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예리한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lt;br /&gt;
&lt;br /&gt;
'''『윤동주 순결한 영혼』'''에서는 윤동주의 생애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유의하면서, 시인이 걸어간 영혼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정의 맥락 안에서, 시인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윤동주의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윤동주, 『윤동주 전 시집』, 스타북스, 2017.&lt;br /&gt;
}}&lt;br /&gt;
이제까지 발간된 윤동주 시집 및 작품집은 많지만,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이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동주의 전체 작품을 담은 작품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는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 전체뿐만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과 후기와 발문 등도 모두 취합하여 실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 모두 살려 놓은 정지용, 유영, 강처중 등의 추모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초판본 전문을 실었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에 실려 있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실었으며,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역시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수록된 작품 외의 시 작품을 담았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에는 기존 윤동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 8편을 실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실었으며, 4부는 작품이 쓰인 해를 알 수 없는 경우 외에는 창작 년도에 따라 실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C%A4%EB%8F%99%EC%A3%BC:_%EC%8B%9C%EB%A1%9C_%EB%8F%85%EB%A6%BD%EC%9A%B4%EB%8F%99%EC%9D%84_%ED%95%98%EB%8B%A4&amp;diff=4756</id>
		<title>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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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3T02:53: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Beloved Poet and Independence Activist, Yun Dong-ju&lt;br /&gt;
}}&lt;br /&gt;
=='''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lt;br /&gt;
===암울한 현실에서의 자아 성찰===&lt;br /&gt;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 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amp;lt;문우(文友)&amp;gt;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amp;lt;경향신문&amp;gt;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lt;br /&gt;
  &lt;br /&gt;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lt;br /&gt;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lt;br /&gt;
&lt;br /&gt;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더 나아가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시 「참회록」의 전문이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lt;br /&gt;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lt;br /&gt;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lt;br /&gt;
이다지도 욕될까.&lt;br /&gt;
&lt;br /&gt;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lt;br /&gt;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lt;br /&gt;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lt;br /&gt;
&lt;br /&gt;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lt;br /&gt;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lt;br /&gt;
─ 그때 그 젊은 나이에&lt;br /&gt;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lt;br /&gt;
&lt;br /&gt;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lt;br /&gt;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lt;br /&gt;
&lt;br /&gt;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lt;br /&gt;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lt;br /&gt;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치안유지법으로 시인을 죽인 일본===&lt;br /&gt;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lt;br /&gt;
&lt;br /&gt;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를 근거로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4.&lt;br /&gt;
|참고문헌2=류양선, 『윤동주 순결한 영혼』, 북페리타, 2015.&lt;br /&gt;
}}&lt;br /&gt;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예리한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lt;br /&gt;
&lt;br /&gt;
'''『윤동주 순결한 영혼』'''에서는 윤동주의 생애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유의하면서, 시인이 걸어간 영혼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정의 맥락 안에서, 시인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윤동주의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윤동주, 『윤동주 전 시집』, 스타북스, 2017.&lt;br /&gt;
}}&lt;br /&gt;
&lt;br /&gt;
이제까지 발간된 윤동주 시집 및 작품집은 많지만,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이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동주의 전체 작품을 담은 작품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는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 전체뿐만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과 후기와 발문 등도 모두 취합하여 실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 모두 살려 놓은 정지용, 유영, 강처중 등의 추모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초판본 전문을 실었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에 실려 있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실었으며,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역시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수록된 작품 외의 시 작품을 담았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에는 기존 윤동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 8편을 실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실었으며, 4부는 작품이 쓰인 해를 알 수 없는 경우 외에는 창작 년도에 따라 실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C%A4%EB%8F%99%EC%A3%BC:_%EC%8B%9C%EB%A1%9C_%EB%8F%85%EB%A6%BD%EC%9A%B4%EB%8F%99%EC%9D%84_%ED%95%98%EB%8B%A4&amp;diff=4755</id>
		<title>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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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12T04:10: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Beloved Poet and Independence Activist, Yun Dong-ju&lt;br /&gt;
}}&lt;br /&gt;
=='''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lt;br /&gt;
===암울한 현실에서의 자아 성찰===&lt;br /&gt;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 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amp;lt;문우(文友)&amp;gt;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amp;lt;경향신문&amp;gt;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lt;br /&gt;
  &lt;br /&gt;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lt;br /&gt;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lt;br /&gt;
&lt;br /&gt;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더 나아가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시 「참회록」의 전문이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lt;br /&gt;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lt;br /&gt;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lt;br /&gt;
이다지도 욕될까.&lt;br /&gt;
&lt;br /&gt;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lt;br /&gt;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lt;br /&gt;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lt;br /&gt;
&lt;br /&gt;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lt;br /&gt;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lt;br /&gt;
─ 그때 그 젊은 나이에&lt;br /&gt;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lt;br /&gt;
&lt;br /&gt;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lt;br /&gt;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lt;br /&gt;
&lt;br /&gt;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lt;br /&gt;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lt;br /&gt;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치안유지법으로 시인을 죽인 일본===&lt;br /&gt;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lt;br /&gt;
&lt;br /&gt;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를 근거로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4.&lt;br /&gt;
● 류양선, 『윤동주 순결한 영혼』, 북페리타, 2015.&lt;br /&gt;
&lt;br /&gt;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lt;br /&gt;
『윤동주 순결한 영혼』에서는 윤동주의 생애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유의하면서, 시인이 걸어간 영혼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정의 맥락 안에서, 시인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2. 윤동주의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윤동주, 『윤동주 전 시집』, 스타북스, 2017.&lt;br /&gt;
&lt;br /&gt;
이제까지 발간된 윤동주 시집 및 작품집은 많지만,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이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동주의 전체 작품을 담은 작품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는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 전체뿐만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과 후기와 발문 등도 모두 취합하여 실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 모두 살려 놓은 정지용, 유영, 강처중 등의 추모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초판본 전문을 실었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에 실려 있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실었으며,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역시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수록된 작품 외의 시 작품을 담았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에는 기존 윤동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 8편을 실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실었으며, 4부는 작품이 쓰인 해를 알 수 없는 경우 외에는 창작 년도에 따라 실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C%A4%EB%8F%99%EC%A3%BC:_%EC%8B%9C%EB%A1%9C_%EB%8F%85%EB%A6%BD%EC%9A%B4%EB%8F%99%EC%9D%84_%ED%95%98%EB%8B%A4&amp;diff=4754</id>
		<title>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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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Beloved Poet and Independence Activist, Yun Dong-ju&lt;br /&gt;
}}&lt;br /&gt;
=='''윤동주: 시로 독립운동을 하다'''==&lt;br /&gt;
===암울한 현실에서의 자아 성찰===&lt;br /&gt;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 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amp;lt;문우(文友)&amp;gt;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amp;lt;경향신문&amp;gt;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lt;br /&gt;
  &lt;br /&gt;
===징용을 피하려 선택한 일본 유학===&lt;br /&gt;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lt;br /&gt;
&lt;br /&gt;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기 반성과 의지를 나타낸 시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더 나아가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시「참회록」의 전문이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lt;br /&gt;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lt;br /&gt;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lt;br /&gt;
이다지도 욕될까.&lt;br /&gt;
&lt;br /&gt;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lt;br /&gt;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lt;br /&gt;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lt;br /&gt;
&lt;br /&gt;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lt;br /&gt;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lt;br /&gt;
─ 그때 그 젊은 나이에&lt;br /&gt;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lt;br /&gt;
&lt;br /&gt;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lt;br /&gt;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lt;br /&gt;
&lt;br /&gt;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lt;br /&gt;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lt;br /&gt;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치안유지법으로 시인을 죽인 일본===&lt;br /&gt;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lt;br /&gt;
&lt;br /&gt;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를 근거로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4.&lt;br /&gt;
● 류양선, 『윤동주 순결한 영혼』, 북페리타, 2015.&lt;br /&gt;
&lt;br /&gt;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lt;br /&gt;
『윤동주 순결한 영혼』에서는 윤동주의 생애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유의하면서, 시인이 걸어간 영혼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정의 맥락 안에서, 시인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2. 윤동주의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윤동주, 『윤동주 전 시집』, 스타북스, 2017.&lt;br /&gt;
&lt;br /&gt;
이제까지 발간된 윤동주 시집 및 작품집은 많지만,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이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동주의 전체 작품을 담은 작품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는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 전체뿐만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과 후기와 발문 등도 모두 취합하여 실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 모두 살려 놓은 정지용, 유영, 강처중 등의 추모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초판본 전문을 실었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에 실려 있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실었으며,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역시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수록된 작품 외의 시 작품을 담았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에는 기존 윤동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 8편을 실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실었으며, 4부는 작품이 쓰인 해를 알 수 없는 경우 외에는 창작 년도에 따라 실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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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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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성학십도』로 집대성된 퇴계 사상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Renowned Neo-Confucian Scholar, Yi Hwang&lt;br /&gt;
}}&lt;br /&gt;
=='''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lt;br /&gt;
===왕들이 흠모한 학자===&lt;br /&gt;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에도 이황은  20여 차례에 걸쳐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육십이 된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덕성을 쌓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한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성학십도』로 집대성된 퇴계 사상===&lt;br /&gt;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주자서 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lt;br /&gt;
&lt;br /&gt;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이황 학문의 집약체로 볼 수 있는 『성학십도』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학풍을 따르는 300명에 가까운 학자들로 하여금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흠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을 받아, 퇴계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이황의 생애 및 학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lt;br /&gt;
|참고문헌2=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lt;br /&gt;
}}&lt;br /&gt;
'''『한국유학사』'''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 유학을 총 정리한 개설서이다. 제11장 제1절에서 퇴계문집의 연보를 활용하여 이황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특히 그가 일생토록 연구한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기론, 사단논변, 물격·격물설, 수양론, 저술 등 항목을 세분하여 다루고 있다. 제2절에서는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덟 명의 학자들(이항, 조식, 정지운, 김인후, 이중호, 류희춘, 노수신, 기대승)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황의 학문적 교유관계 및 당시 사상적 경향을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이황의 생애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수학 시기,  출사 시기,  은퇴 강학 시기,  퇴계 사후 평가이다. 학문 분야에서는 퇴계 학문의 배경, 성과, 그리고 퇴계사상의 핵심으로 『천명도설』을 꼽아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가 궁금하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lt;br /&gt;
|참고문헌2=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lt;br /&gt;
|참고문헌3=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lt;br /&gt;
|참고문헌4=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lt;br /&gt;
}}&lt;br /&gt;
이병도의 '''『한국유학사』'''의 제9장에서는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에서는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으로 형성된 붕당정치의 발생 과정과 정치운영의 원리 및 구조를 조명한 연구논저로 4·5장이 이황의 활동 시기와 겹친다. &lt;br /&gt;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대중서이다. &lt;br /&gt;
&lt;br /&gt;
윤사순의 '''『한국유학사』'''는 한국유학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개론서로서, 16세기 중엽의 조선시대 사상사를 폭 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황 당시의 시기를 보다 집중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이 책의 제3편 18장을 참조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과 서원과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lt;br /&gt;
}}&lt;br /&gt;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왕에게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조선시대 서원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서의 1장 “조선서원의 성립과정”과 2장 “퇴계의 서원론”을 통해 본문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변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lt;br /&gt;
|참고문헌2=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lt;br /&gt;
}}&lt;br /&gt;
그의 학문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기대승과 논쟁을 한 사단칠정논쟁을 들 수 있다. 둘 사이에 왕복편지를 통해 8년간이나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는데, 과정이 복잡하고 내용도 어렵다. 다만, 전반적인 논쟁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로서, 윤사순의 '''『한국유학사』 상'''의 제3편 19장을 보면 논쟁의 발단과 전개 및 성격과 영향 등을 이해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유학의 탐구』'''의 7장을 보면 당시 성리학의 쟁점으로서 사단칠정논쟁과 인물성동이논쟁을 함께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의 저술 및 사상과 관련하여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한형조, 『조선유학의 거장들』, 문학동네, 2008.&lt;br /&gt;
|참고문헌2=이황,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 동서문화사, 2008.&lt;br /&gt;
}}&lt;br /&gt;
'''『조선유학의 거장들』'''의 2장을 보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의 편찬배경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경(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는 이황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책으로 비록 원문은 아니지만, 직접 그의 글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하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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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D%99%8D%EB%8F%84%EC%99%80_%EC%8B%A0%EC%9C%A4%EB%B3%B5:_%EC%A1%B0%EC%84%A0_%ED%9B%84%EA%B8%B0%EC%9D%98_%ED%92%8D%EC%86%8D%ED%99%94%EA%B0%80&amp;diff=4720</id>
		<title>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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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05T16:08: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lt;br /&gt;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lt;br /&gt;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lt;br /&gt;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lt;br /&gt;
&lt;br /&gt;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진경을 그리다===&lt;br /&gt;
그의 화풍은 50세를 전후로 1기와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lt;br /&gt;
&lt;br /&gt;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씨름.jpg|김홍도, 「씨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춤추는아이.jpg|김홍도, 「춤추는 아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활쏘기.jpg|김홍도, 「활쏘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서당.jpg|김홍도, 「서당」/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화려한 색채로 그린 남녀 풍속화===&lt;br /&gt;
신윤복은 서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족보에도 올리지 않은 중인 신분이었는데 특히 종조부와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이 많이 나왔다.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 정도로 인정 받는 화가였다,&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림에서 양반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를 풍자한 해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혜원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는 「단오풍정(端午風情)」,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NMK_신윤복_거문고줄고르는여인.jpg|신윤복, 「거문고 줄고르는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신윤복_대쾌도.jpg|신윤복, 「대쾌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신윤복_전모를쓴여인.jpg|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lt;br /&gt;
|참고문헌2=오주석, 『단원 김홍도』, 솔, 2015.&lt;br /&gt;
}}&lt;br /&gt;
'''『단원 김홍도 연구』'''는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화가 중의 한명인 단원 김홍도 (1745-1806)의 생애와 미술사상, 작품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생애와 교유를 간략히 살피고 일반 산수화, 금강 산도와 진경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화조화, 기타 회화로 나누어 사진과 함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lt;br /&gt;
&lt;br /&gt;
'''『단원 김홍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 화가 김홍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다. 1995년에 출간된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 특별전 논고집 『단원 김홍도』를 저본으로 삼은 책이다. 체제와 표현 방식 가운데 장점을 취하고, 판형을 키워 김홍도의 작품을 보다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김홍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총망라하여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체계적인 구성 가운데 쉽게 서술함으로써 김홍도에 대한 정확하고 일관된 인상을 제시한다. 또한 관련 기록의 행간에 엿보이는 김홍도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품격, 즉 예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풍부한 인간적인 매력을 함께 전해준다. 김홍도의 전모를 크게 서화가의 면모, 풍류인의 면모, 선인의 면모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백금남, 『소설 신윤복』, 미래인, 2008.&lt;br /&gt;
|참고문헌2=정유현,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 범우사, 2011.&lt;br /&gt;
}}&lt;br /&gt;
'''『소설 신윤복』'''은 조선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신윤복이 김홍도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설정 아래 시작된다.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간의 본성과 예술의 본질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신윤복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또한 강세황, 김홍도, 최북, 김득신 등 조선 후기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함께 복원해냈다. 신윤복의 그림과 함께 수록된 그들의 대표작을 본문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은 한 시대를 앞서 살았던 배포 큰 대장부, 신윤복의 작품과 함께 풍속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옛 그림에 부연해설을 몇 마디씩 덧붙인 그림책 형식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풍속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EBS 화인 제작팀,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 지식채널, 2008.&lt;br /&gt;
|참고문헌2=윤진영,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 다섯수레, 2015.&lt;br /&gt;
}}&lt;br /&gt;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는 EBS에서 방송되었던 다큐멘터리를 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방송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 세 풍속화가의 독특한 이력과 그들만의 개성적인 미술 기법상의 비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세 명의 풍속화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들이 조선 후기 근대라는 시대를 어떻게 뜨겁게 살면서 실천했는지, 교과서나 그림 분석에 머물렀던 여타 미술 교양서가 전혀 말해주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들의 작품을 역추적해가면서, 조선 후기 세 풍속화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근대를 도입하여 근대를 살아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사회를 살아간 선조들의 다양한 삶을 만나게 된다. 풍속화를 저술한 윤진영 교수는 고전의 바다 장서각에서 역사연구와 미술사의 기초역량을 익힌 후 한국회화사로 미술사 석·박사 학위를 받아, 이제까지 접해 보기 쉽지 않았던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를 총망라한 다양한 그림을 진솔한 설명을 겻 들여 조선사회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D%99%8D%EB%8F%84%EC%99%80_%EC%8B%A0%EC%9C%A4%EB%B3%B5:_%EC%A1%B0%EC%84%A0_%ED%9B%84%EA%B8%B0%EC%9D%98_%ED%92%8D%EC%86%8D%ED%99%94%EA%B0%80&amp;diff=4719</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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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lt;br /&gt;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lt;br /&gt;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lt;br /&gt;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lt;br /&gt;
&lt;br /&gt;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amp;lt;금강전도&amp;gt;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진경을 그리다===&lt;br /&gt;
그의 화풍은 50세를 전후로 1기와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lt;br /&gt;
&lt;br /&gt;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amp;lt;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amp;gt;을 비롯해서 &amp;lt;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amp;gt;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씨름.jpg|김홍도, 「씨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춤추는아이.jpg|김홍도, 「춤추는 아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활쏘기.jpg|김홍도, 「활쏘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서당.jpg|김홍도, 「서당」/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화려한 색채로 그린 남녀 풍속화===&lt;br /&gt;
신윤복은 서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족보에도 올리지 않은 중인 신분이었는데 특히 종조부와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이 많이 나왔다.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 정도로 인정 받는 화가였다,&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림에서 양반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를 풍자한 해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혜원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amp;lt;풍속화첩&amp;gt;이 있다. &amp;lt;풍속화첩&amp;gt;에는 ‘단오풍정(端午風情)‘,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NMK_신윤복_거문고줄고르는여인.jpg|신윤복, 「거문고 줄고르는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신윤복_대쾌도.jpg|신윤복, 「대쾌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신윤복_전모를쓴여인.jpg|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lt;br /&gt;
|참고문헌2=오주석, 『단원 김홍도』, 솔, 2015.&lt;br /&gt;
}}&lt;br /&gt;
'''『단원 김홍도 연구』'''는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화가 중의 한명인 단원 김홍도 (1745-1806)의 생애와 미술사상, 작품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생애와 교유를 간략히 살피고 일반 산수화, 금강 산도와 진경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화조화, 기타 회화로 나누어 사진과 함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lt;br /&gt;
&lt;br /&gt;
'''『단원 김홍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 화가 김홍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다. 1995년에 출간된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 특별전 논고집 『단원 김홍도』를 저본으로 삼은 책이다. 체제와 표현 방식 가운데 장점을 취하고, 판형을 키워 김홍도의 작품을 보다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김홍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총망라하여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체계적인 구성 가운데 쉽게 서술함으로써 김홍도에 대한 정확하고 일관된 인상을 제시한다. 또한 관련 기록의 행간에 엿보이는 김홍도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품격, 즉 예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풍부한 인간적인 매력을 함께 전해준다. 김홍도의 전모를 크게 서화가의 면모, 풍류인의 면모, 선인의 면모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백금남, 『소설 신윤복』, 미래인, 2008.&lt;br /&gt;
|참고문헌2=정유현,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 범우사, 2011.&lt;br /&gt;
}}&lt;br /&gt;
'''『소설 신윤복』'''은 조선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신윤복이 김홍도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설정 아래 시작된다.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간의 본성과 예술의 본질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신윤복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또한 강세황, 김홍도, 최북, 김득신 등 조선 후기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함께 복원해냈다. 신윤복의 그림과 함께 수록된 그들의 대표작을 본문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은 한 시대를 앞서 살았던 배포 큰 대장부, 신윤복의 작품과 함께 풍속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옛 그림에 부연해설을 몇 마디씩 덧붙인 그림책 형식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풍속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EBS 화인 제작팀,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 지식채널, 2008.&lt;br /&gt;
|참고문헌2=윤진영,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 다섯수레, 2015.&lt;br /&gt;
}}&lt;br /&gt;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는 EBS에서 방송되었던 다큐멘터리를 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방송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 세 풍속화가의 독특한 이력과 그들만의 개성적인 미술 기법상의 비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세 명의 풍속화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들이 조선 후기 근대라는 시대를 어떻게 뜨겁게 살면서 실천했는지, 교과서나 그림 분석에 머물렀던 여타 미술 교양서가 전혀 말해주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들의 작품을 역추적해가면서, 조선 후기 세 풍속화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근대를 도입하여 근대를 살아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사회를 살아간 선조들의 다양한 삶을 만나게 된다. 풍속화를 저술한 윤진영 교수는 고전의 바다 장서각에서 역사연구와 미술사의 기초역량을 익힌 후 한국회화사로 미술사 석·박사 학위를 받아, 이제까지 접해 보기 쉽지 않았던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를 총망라한 다양한 그림을 진솔한 설명을 겻 들여 조선사회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D%99%8D%EB%8F%84%EC%99%80_%EC%8B%A0%EC%9C%A4%EB%B3%B5:_%EC%A1%B0%EC%84%A0_%ED%9B%84%EA%B8%B0%EC%9D%98_%ED%92%8D%EC%86%8D%ED%99%94%EA%B0%80&amp;diff=4718</id>
		<title>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D%99%8D%EB%8F%84%EC%99%80_%EC%8B%A0%EC%9C%A4%EB%B3%B5:_%EC%A1%B0%EC%84%A0_%ED%9B%84%EA%B8%B0%EC%9D%98_%ED%92%8D%EC%86%8D%ED%99%94%EA%B0%80&amp;diff=4718"/>
				<updated>2018-03-05T15:55: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lt;br /&gt;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lt;br /&gt;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lt;br /&gt;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lt;br /&gt;
&lt;br /&gt;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amp;lt;금강전도&amp;gt;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진경을 그리다===&lt;br /&gt;
그의 화풍은 50세를 전후로 1기와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lt;br /&gt;
&lt;br /&gt;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amp;lt;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amp;gt;을 비롯해서 &amp;lt;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amp;gt;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씨름.jpg|김홍도, 「씨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춤추는아이.jpg|김홍도, 「춤추는 아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활쏘기.jpg|김홍도, 「활쏘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서당.jpg|김홍도, 「서당」/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화려한 색채로 그린 남녀 풍속화===&lt;br /&gt;
신윤복은 서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족보에도 올리지 않은 중인 신분이었는데 특히 종조부와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이 많이 나왔다.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 정도로 인정 받는 화가였다,&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림에서 양반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를 풍자한 해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혜원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amp;lt;풍속화첩&amp;gt;이 있다. &amp;lt;풍속화첩&amp;gt;에는 ‘단오풍정(端午風情)‘,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NMK_신윤복_거문고줄고르는여인.jpg|신윤복, 「거문고 줄고르는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신윤복_대쾌도.jpg|신윤복, 「대쾌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File:NMK_신윤복_전모를쓴여인.jpg|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lt;br /&gt;
|참고문헌2=오주석, 『단원 김홍도』, 솔, 2015.&lt;br /&gt;
}}&lt;br /&gt;
'''『단원 김홍도 연구』'''는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화가 중의 한명인 단원 김홍도 (1745-1806)의 생애와 미술사상, 작품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생애와 교유를 간략히 살피고 일반 산수화, 금강 산도와 진경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화조화, 기타 회화로 나누어 사진과 함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lt;br /&gt;
&lt;br /&gt;
'''『단원 김홍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 화가 김홍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다. 1995년에 출간된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 특별전 논고집 『단원 김홍도』를 저본으로 삼은 책이다. 체제와 표현 방식 가운데 장점을 취하고, 판형을 키워 김홍도의 작품을 보다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김홍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총망라하여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체계적인 구성 가운데 쉽게 서술함으로써 김홍도에 대한 정확하고 일관된 인상을 제시한다. 또한 관련 기록의 행간에 엿보이는 김홍도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품격, 즉 예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풍부한 인간적인 매력을 함께 전해준다. 김홍도의 전모를 크게 서화가의 면모, 풍류인의 면모, 선인의 면모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백금남, 『소설 신윤복』, 미래인, 2008.&lt;br /&gt;
|참고문헌2=정유현,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 범우사, 2011.&lt;br /&gt;
}}&lt;br /&gt;
'''『소설 신윤복』'''은 조선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신윤복이 김홍도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설정 아래 시작된다.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간의 본성과 예술의 본질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신윤복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또한 강세황, 김홍도, 최북, 김득신 등 조선 후기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함께 복원해냈다. 신윤복의 그림과 함께 수록된 그들의 대표작을 본문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우리의 옛 그림: 신윤복 편』'''은 한 시대를 앞서 살았던 배포 큰 대장부, 신윤복의 작품과 함께 풍속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옛 그림에 부연해설을 몇 마디씩 덧붙인 그림책 형식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풍속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EBS 화인 제작팀,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 지식채널, 2008.&lt;br /&gt;
|참고문헌2=윤진영,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 다섯수레, 2015.&lt;br /&gt;
}}&lt;br /&gt;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는 EBS에서 방송되었던 다큐멘터리를 글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방송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 세 풍속화가의 독특한 이력과 그들만의 개성적인 미술 기법상의 비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세 명의 풍속화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들이 조선 후기 근대라는 시대를 어떻게 뜨겁게 살면서 실천했는지, 교과서나 그림 분석에 머물렀던 여타 미술 교양서가 전혀 말해주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들의 작품을 역추적해가면서, 조선 후기 세 풍속화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근대를 도입하여 근대를 살아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사회를 살아간 선조들의 다양한 삶을 만나게 된다. 풍속화를 저술한 윤진영 교수는 고전의 바다 장서각에서 역사연구와 미술사의 기초역량을 익힌 후 한국회화사로 미술사 석·박사 학위를 받아, 이제까지 접해 보기 쉽지 않았던 관인, 사인, 서민 풍속화를 총망라한 다양한 그림을 진솔한 설명을 겻 들여 조선사회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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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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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05T15:41: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87%B4%EA%B3%84_%EC%9D%B4%ED%99%A9:_%EC%A3%BC%EC%9E%90_%EC%9D%B4%ED%9B%84_%EC%84%B1%EB%A6%AC%ED%95%99%EC%9D%98_%EC%9D%BC%EC%9D%B8%EC%9E%90&amp;diff=4716</id>
		<title>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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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Renowned Neo-Confucian Scholar, Yi Hwang&lt;br /&gt;
}}&lt;br /&gt;
=='''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lt;br /&gt;
===왕들이 흠모한 학자===&lt;br /&gt;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에도 이황은  20여 차례에 걸쳐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육십이 된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덕성을 쌓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한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성학십도』로 집대성된 퇴계 사상===&lt;br /&gt;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주자서 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lt;br /&gt;
&lt;br /&gt;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이황 학문의 집약체로 볼 수 있는 『성학십도』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학풍을 따르는 300명에 가까운 학자들로 하여금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흠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을 받아, 퇴계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이황의 생애 및 학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lt;br /&gt;
|참고문헌2=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lt;br /&gt;
}}&lt;br /&gt;
'''『한국유학사』'''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 유학을 총 정리한 개설서이다. 제11장 제1절에서 퇴계문집의 연보를 활용하여 이황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특히 그가 일생토록 연구한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기론, 사단논변, 물격·격물설, 수양론, 저술 등 항목을 세분하여 다루고 있다. 제2절에서는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덟 명의 학자들(이항, 조식, 정지운, 김인후, 이중호, 류희춘, 노수신, 기대승)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황의 학문적 교유관계 및 당시 사상적 경향을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이황의 생애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수학 시기,  출사 시기,  은퇴 강학 시기,  퇴계 사후 평가이다. 학문 분야에서는 퇴계 학문의 배경, 성과, 그리고 퇴계사상의 핵심으로 『천명도설』을 꼽아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가 궁금하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lt;br /&gt;
|참고문헌2=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lt;br /&gt;
|참고문헌3=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lt;br /&gt;
|참고문헌4=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lt;br /&gt;
}}&lt;br /&gt;
이병도의 '''『한국유학사』'''의 제9장에서는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에서는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으로 형성된 붕당정치의 발생 과정과 정치운영의 원리 및 구조를 조명한 연구논저로 4·5장이 이황의 활동 시기와 겹친다. &lt;br /&gt;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대중서이다. &lt;br /&gt;
&lt;br /&gt;
윤사순의 '''『한국유학사』'''는 한국유학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개론서로서, 16세기 중엽의 조선시대 사상사를 폭 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황 당시의 시기를 보다 집중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이 책의 제3편 18장을 참조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과 서원과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lt;br /&gt;
}}&lt;br /&gt;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왕에게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조선시대 서원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서의 1장 “조선서원의 성립과정”과 2장 “퇴계의 서원론”을 통해 본문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변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lt;br /&gt;
|참고문헌2=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lt;br /&gt;
}}&lt;br /&gt;
그의 학문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기대승과 논쟁을 한 사단칠정논쟁을 들 수 있다. 둘 사이에 왕복편지를 통해 8년간이나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는데, 과정이 복잡하고 내용도 어렵다. 다만, 전반적인 논쟁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로서, 윤사순의 '''『한국유학사』 상'''의 제3편 19장을 보면 논쟁의 발단과 전개 및 성격과 영향 등을 이해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유학의 탐구』'''의 7장을 보면 당시 성리학의 쟁점으로서 사단칠정논쟁과 인물성동이논쟁을 함께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황의 저술 및 사상과 관련하여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한형조, 『조선유학의 거장들』, 문학동네, 2008.&lt;br /&gt;
|참고문헌2=이황,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 동서문화사, 2008.&lt;br /&gt;
}}&lt;br /&gt;
'''『조선유학의 거장들』'''의 2장을 보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의 편찬배경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경(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는 이황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책으로 비록 원문은 아니지만, 직접 그의 글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하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87%B4%EA%B3%84_%EC%9D%B4%ED%99%A9:_%EC%A3%BC%EC%9E%90_%EC%9D%B4%ED%9B%84_%EC%84%B1%EB%A6%AC%ED%95%99%EC%9D%98_%EC%9D%BC%EC%9D%B8%EC%9E%90&amp;diff=4715</id>
		<title>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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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3-05T14:11: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로 집대성된 퇴계 사상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Renowned Neo-Confucian Scholar, Yi Hwang&lt;br /&gt;
}}&lt;br /&gt;
=='''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lt;br /&gt;
===왕들이 흠모한 학자===&lt;br /&gt;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에도 이황은  20여 차례에 걸쳐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육십이 된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덕성을 쌓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한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성학십도』로 집대성된 퇴계 사상===&lt;br /&gt;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주자서 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lt;br /&gt;
&lt;br /&gt;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이황 학문의 집약체로 볼 수 있는 『성학십도』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학풍을 따르는 300명에 가까운 학자들로 하여금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흠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을 받아, 퇴계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이황의 생애 및 학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lt;br /&gt;
●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lt;br /&gt;
&lt;br /&gt;
󰡔한국유학사󰡕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 유학을 총 정리한 개설서이다. 제11장 제1절에서 퇴계문집의 연보를 활용하여 이황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특히 그가 일생토록 연구한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기론, 사단논변, 물격·격물설, 수양론, 저술 등 항목을 세분하여 다루고 있다. 제2절에서는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덟 명의 학자들(이항, 조식, 정지운, 김인후, 이중호, 류희춘, 노수신, 기대승)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황의 학문적 교유관계 및 당시 사상적 경향을 알 수 있다. &lt;br /&gt;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이황의 생애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수학 시기,  출사 시기,  은퇴 강학 시기,  퇴계 사후 평가이다. 학문 분야에서는 퇴계 학문의 배경, 성과, 그리고 퇴계사상의 핵심으로 ‘천명도설’을 꼽아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2.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가 궁금하다면...&lt;br /&gt;
&lt;br /&gt;
●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lt;br /&gt;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lt;br /&gt;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lt;br /&gt;
●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lt;br /&gt;
&lt;br /&gt;
이병도의 󰡔한국유학사󰡕의 제9장에서는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lt;br /&gt;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에서는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으로 형성된 붕당정치의 발생 과정과 정치운영의 원리 및 구조를 조명한 연구논저로 4·5장이 이황의 활동 시기와 겹친다. &lt;br /&gt;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대중서이다. &lt;br /&gt;
&lt;br /&gt;
윤사순의 󰡔한국유학사󰡕는 한국유학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개론서로서, 16세기 중엽의 조선시대 사상사를 폭 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황 당시의 시기를 보다 집중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이 책의 제3편 18장을 참조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3. 이황과 서원과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lt;br /&gt;
&lt;br /&gt;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왕에게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조선시대 서원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서의 1장 “조선서원의 성립과정”과 2장 “퇴계의 서원론”을 통해 본문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lt;br /&gt;
&lt;br /&gt;
4.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변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lt;br /&gt;
● 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lt;br /&gt;
&lt;br /&gt;
그의 학문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기대승과 논쟁을 한 사단칠정논쟁을 들 수 있다. 둘 사이에 왕복편지를 통해 8년간이나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는데, 과정이 복잡하고 내용도 어렵다. 다만, 전반적인 논쟁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로써, 윤사순의 󰡔한국유학사󰡕 상의 제3편 19장을 보면 논쟁의 발단과 전개 및 성격과 영향 등을 이해할 수 있다. &lt;br /&gt;
󰡔한국유학의 탐구󰡕의 7장을 보면 당시 성리학의 쟁점으로써 사단칠정논쟁과 인물성동이논쟁을 함께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lt;br /&gt;
&lt;br /&gt;
5. 이황의 저술 및 사상과 관련하여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 한형조, 󰡔조선유학의 거장들󰡕, 문학동네, 2008.&lt;br /&gt;
● 이황,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 동서문화사, 2008.&lt;br /&gt;
&lt;br /&gt;
󰡔조선유학의 거장들󰡕의 2장을 보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의 편찬배경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경(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lt;br /&gt;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는 이황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책으로 비록 원문은 아니지만, 직접 그의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하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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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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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rchitect of the Joseon Dynasty, Jeong Do-jeon&lt;br /&gt;
}}&lt;br /&gt;
=='''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lt;br /&gt;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조선 개국의 1등 공신===&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 『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lt;br /&gt;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lt;br /&gt;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lt;br /&gt;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lt;br /&gt;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도전의 생애과 개혁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lt;br /&gt;
|참고문헌2=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lt;br /&gt;
|참고문헌3=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쓴 전기이다. 정도전의 출세부터 3년간의 나주 귀양, 6년간의 유랑생활, 태조 원년 정치적 실권 장악, 한양의 방명을 짓다, 정도전에 대한 사후 평가 등을 싣고 그의 저술과 사회, 정치, 경제사상을 탐구했다.&lt;br /&gt;
&lt;br /&gt;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은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lt;br /&gt;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는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하고 지금의 정도전을 있게 한 역사적인 세 인물,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또한, 민본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도전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며, 철인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열태,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이북이십사, 2014.&lt;br /&gt;
|참고문헌2=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lt;br /&gt;
}}&lt;br /&gt;
조선건국사는 바꾸어 말하면 고려 멸망사가 된다.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암수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목적을 이루어 냈다.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이 사건과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사』'''는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왕조별로 정리하였으며, 자연 정치사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을 서술하였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장과 2장으로 개국전야와 건국 초기의 사건들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도전의 저술과 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도전 지음, 김병환 옮김, 『불씨잡변』, 아카넷, 2013.&lt;br /&gt;
|참고문헌2=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조선경국전』, 올재클래식스, 2014.&lt;br /&gt;
|참고문헌3=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lt;br /&gt;
}}&lt;br /&gt;
'''『불씨잡변』'''은 1398년(태조 7), 삼봉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정도전이 보지 못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삼봉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건국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아 태조에게 바친 역저이다. 그의 붓은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어 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는 그를 ‘조선의 설계자’라 칭한다.&lt;br /&gt;
&lt;br /&gt;
'''『정도전사상의 연구』'''에서는 고려말 조선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왕조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의 생애와 저술을 심도 있게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을 철학·윤리, 사회·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B%A0%EC%82%AC%EC%9E%84%EB%8B%B9:_%EC%A1%B0%EC%84%A0_%EC%B5%9C%EA%B3%A0%EC%9D%98_%EC%97%AC%EC%84%B1_%ED%99%94%EA%B0%80&amp;diff=4713</id>
		<title>신사임당: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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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38: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조선의 최고 여류화가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Joseon's Most Revered Female Artist, Sin Saimdang&lt;br /&gt;
}}&lt;br /&gt;
=='''신사임당: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lt;br /&gt;
===독립적 인간으로 산 사임당===&lt;br /&gt;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시 · 그림 · 글씨에 뛰어났던 조선 시대 여성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이름이 아닌 당호이다. 당호는 그 사람이 머무는 집의 이름으로 이름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지체 있거나 양반의 부녀자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여 당호를 부르는 일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남편은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 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李珥)가 그녀의 아들이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남편과 가정을 이끌었던 능동적인 여성이었고 자식들에게도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던 적극적인 어머니였다. 사임당은 자녀들을 지도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공부하여 이해한 다음에 가르쳤고 자식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었다.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현숙한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사임당은 조선 사회가 요구한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처럼 여겨 결혼한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그래서 사임당도 외가에서 자라났다. 19세에 결혼한 사임당은 처음에는 시집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사임당은 이따금 강릉의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친정에서 낳았다.&lt;br /&gt;
  &lt;br /&gt;
===친정의 영향을 받은 예술적 감수성===&lt;br /&gt;
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게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 7세에 이미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배웠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 등은 그녀가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외할아버지의 예술과 학문 세계가 신중하고 어진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어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 고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사임당이 강릉 친정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는 그녀가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깊고 절절한 애정을 가졌는가를 보여주고 어머니가 사임당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다음은 1537년 사임당이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 대관령 고개에서  멀리 있는 친정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의 전문이다.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慈親鶴髮在臨瀛(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lt;br /&gt;
身向長安獨去情(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lt;br /&gt;
回首北村時一望(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lt;br /&gt;
白雲飛下暮山靑(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조선의 최고 여류화가===&lt;br /&gt;
사임당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매화 · 난초 · 산수, 물고기나 새 등을 주된 화제(畫題)로 삼아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 「포도도」는 채 영글지 않은 포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세련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아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이 담긴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있는데 포도 그림만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자랑했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평소 자녀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하여 “그림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그릴 수 없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실체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려도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실제로 그녀는 잎사귀와 줄기의 느낌 하나하나, 벌레의 다리 끝까지도 꼼꼼하게 그려냈고, 그림 속 물체의 색과 재질까지 특성에 맞게 잘 표현했다. 사임당의 그림은 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볕에 말리려 하자 산 풀벌레인 줄 알고 닭이 쪼아서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일화도 전한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5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가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다. 여기에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 병풍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신사임당은 현재까지도 현모양처, 훌륭한 여성 작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한국은행에서는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라며 신사임당을 5만 원 권 도안 인물로 선정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신사임당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유정은, 『사임당 평전』, 리베르, 2016.&lt;br /&gt;
|참고문헌2=정해은, 『신사임당 전』, 새문사, 2017.&lt;br /&gt;
}}&lt;br /&gt;
'''『사임당 평전』'''은 사임당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말로 현모양처라는 전형적인 틀에 박혀 살았던 인물인지, 아니면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선구자적인 삶을 살아간 여성이었는지, 그 본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저자는 조선이라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임당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녀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진정한 ‘인간 사임당’을 만난다. 사임당이 남긴 예술 작품들을 풍부한 문헌 자료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고찰하는 과정에서 예술가 신사임당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신사임당 전』'''에서 저자는 사임당이 어떤 여성이었는지 규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신사임당을 알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16세기를 막 시작하는 1504년에 태어나 16세기 중반 무렵까지 살다간 사임당을 그 시대 안에서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예술가’ 또는 ‘이이의 어머니’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그 삶에 집중하였다. ‘사료로 만나는 신사임당, 역사 속 신사임당 그녀는 누구인지’, 이 책이 사임당의 진면목을 밝히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한 걸음 보탬이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율곡의 어머니로서의 신사임당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노유진, 『신사임당의 어머니 리더십』, W미디어, 2009.&lt;br /&gt;
}}&lt;br /&gt;
'''『신사임당의 어머니 리더십』'''은 단순 위인전기로 그녀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 리더로서의 신사임당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가족을 위해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가꾸었던 그녀를 통해 리더십의 참모습을 발견해본다. 본문은 크게 5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에서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함을, 2장에서는 성격 유형에 따라 상대방을 아는 방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3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3장에서는 ‘내 아이와 통하는 눈높이 대화법, 내 남편 기 살리는 대화법’ 등 아내이자 어머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은 가정 설계, 인간관계, 스피치 등에서 신사임당이 발휘한 리더십을 소개한다. 마지막 5장은 어머니 리더십을 통해 당당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선사역사연구소, 『신사임당: 뜻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다』, 아토북, 2016.&lt;br /&gt;
|참고문헌2=강석진,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 레몬북스, 2017.&lt;br /&gt;
}}&lt;br /&gt;
'''『신사임당: 뜻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다』'''는 조선 최고의 문인이자 서화가로 활동한 신사임당에 대해 다룬 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료를 중심으로 그녀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면밀하게 살펴본다. 삶의 궤적과 함께 작품세계를 따라가 보면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그녀가 어떤 경로 혹은 과정을 통해 시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신사임당이 탄생한 1504년은 바로 갑자사화가 벌어진 해였다.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 내내 정치적으로 불안한 정국이었으며 결혼한 이후에도 당쟁의 소용돌이를 직간접적으로 몸소 겪었다. 오랫동안 정치와 학문으로 다져진 사대부들이 혼란기의 격랑을 넘지 못하고 당쟁의 제물로 바쳐지거나 유배지의 낭인으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은근히 천시되던 여성의 지위를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뒤바꿔 놓았는가 하면, 역사의 뒤안길에 나앉아 있던 여류 학자나 문인, 여류 예술가의 이미지를 단숨에 당당한 반열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lt;br /&gt;
&lt;br /&gt;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에서는 1500년대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조선사회와 그 속에서 꽃피운 신사임당의 예술 세계를 한눈에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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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사임당: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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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32: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Joseon's Most Revered Female Artist, Sin Saimdang&lt;br /&gt;
}}&lt;br /&gt;
=='''신사임당: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lt;br /&gt;
===독립적 인간으로 산 사임당===&lt;br /&gt;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시 · 그림 · 글씨에 뛰어났던 조선 시대 여성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이름이 아닌 당호이다. 당호는 그 사람이 머무는 집의 이름으로 이름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지체 있거나 양반의 부녀자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여 당호를 부르는 일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남편은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 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李珥)가 그녀의 아들이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남편과 가정을 이끌었던 능동적인 여성이었고 자식들에게도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던 적극적인 어머니였다. 사임당은 자녀들을 지도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공부하여 이해한 다음에 가르쳤고 자식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었다.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현숙한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사임당은 조선 사회가 요구한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처럼 여겨 결혼한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그래서 사임당도 외가에서 자라났다. 19세에 결혼한 사임당은 처음에는 시집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사임당은 이따금 강릉의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친정에서 낳았다.&lt;br /&gt;
  &lt;br /&gt;
===친정의 영향을 받은 예술적 감수성===&lt;br /&gt;
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게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 7세에 이미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배웠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 등은 그녀가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외할아버지의 예술과 학문 세계가 신중하고 어진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어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 고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사임당이 강릉 친정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는 그녀가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깊고 절절한 애정을 가졌는가를 보여주고 어머니가 사임당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다음은 1537년 사임당이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 대관령 고개에서  멀리 있는 친정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의 전문이다. &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慈親鶴髮在臨瀛(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lt;br /&gt;
身向長安獨去情(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lt;br /&gt;
回首北村時一望(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lt;br /&gt;
白雲飛下暮山靑(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조선의 최고 여류화가===&lt;br /&gt;
사임당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매화 · 난초 · 산수, 물고기나 새 등을 주된 화제(畫題)로 삼아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 ‘포도도’는 채 영글지 않은 포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세련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아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이 담긴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있는데 포도 그림만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자랑했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평소 자녀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하여 “그림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그릴 수 없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실체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려도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실제로 그녀는 잎사귀와 줄기의 느낌 하나하나, 벌레의 다리 끝까지도 꼼꼼하게 그려냈고, 그림 속 물체의 색과 재질까지 특성에 맞게 잘 표현했다. 사임당의 그림은 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볕에 말리려 하자 산 풀벌레인 줄 알고 닭이 쪼아서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일화도 전한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5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가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다. 여기에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 병풍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신사임당은 현재까지도 현모양처, 훌륭한 여성 작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한국은행에서는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라며 신사임당을 5만 원 권 도안 인물로 선정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신사임당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유정은, 『사임당 평전』, 리베르, 2016.&lt;br /&gt;
|참고문헌2=정해은, 『신사임당 전』, 새문사, 2017.&lt;br /&gt;
}}&lt;br /&gt;
'''『사임당 평전』'''은 사임당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말로 현모양처라는 전형적인 틀에 박혀 살았던 인물인지, 아니면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선구자적인 삶을 살아간 여성이었는지, 그 본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저자는 조선이라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임당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녀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진정한 ‘인간 사임당’을 만난다. 사임당이 남긴 예술 작품들을 풍부한 문헌 자료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고찰하는 과정에서 예술가 신사임당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신사임당 전』'''에서 저자는 사임당이 어떤 여성이었는지 규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신사임당을 알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16세기를 막 시작하는 1504년에 태어나 16세기 중반 무렵까지 살다간 사임당을 그 시대 안에서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예술가’ 또는 ‘이이의 어머니’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그 삶에 집중하였다. ‘사료로 만나는 신사임당, 역사 속 신사임당 그녀는 누구인지’, 이 책이 사임당의 진면목을 밝히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한 걸음 보탬이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율곡의 어머니로서의 신사임당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노유진, 『신사임당의 어머니 리더십』, W미디어, 2009.&lt;br /&gt;
}}&lt;br /&gt;
'''『신사임당의 어머니 리더십』'''은 단순 위인전기로 그녀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 리더로서의 신사임당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가족을 위해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가꾸었던 그녀를 통해 리더십의 참모습을 발견해본다. 본문은 크게 5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에서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함을, 2장에서는 성격 유형에 따라 상대방을 아는 방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3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3장에서는 ‘내 아이와 통하는 눈높이 대화법, 내 남편 기 살리는 대화법’ 등 아내이자 어머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은 가정 설계, 인간관계, 스피치 등에서 신사임당이 발휘한 리더십을 소개한다. 마지막 5장은 어머니 리더십을 통해 당당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선사역사연구소, 『신사임당: 뜻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다』, 아토북, 2016.&lt;br /&gt;
|참고문헌2=강석진,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 레몬북스, 2017.&lt;br /&gt;
}}&lt;br /&gt;
'''『신사임당: 뜻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다』'''는 조선 최고의 문인이자 서화가로 활동한 신사임당에 대해 다룬 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료를 중심으로 그녀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면밀하게 살펴본다. 삶의 궤적과 함께 작품세계를 따라가 보면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그녀가 어떤 경로 혹은 과정을 통해 시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신사임당이 탄생한 1504년은 바로 갑자사화가 벌어진 해였다.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 내내 정치적으로 불안한 정국이었으며 결혼한 이후에도 당쟁의 소용돌이를 직간접적으로 몸소 겪었다. 오랫동안 정치와 학문으로 다져진 사대부들이 혼란기의 격랑을 넘지 못하고 당쟁의 제물로 바쳐지거나 유배지의 낭인으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은근히 천시되던 여성의 지위를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뒤바꿔 놓았는가 하면, 역사의 뒤안길에 나앉아 있던 여류 학자나 문인, 여류 예술가의 이미지를 단숨에 당당한 반열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lt;br /&gt;
&lt;br /&gt;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에서는 1500년대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조선사회와 그 속에서 꽃피운 신사임당의 예술 세계를 한눈에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E%A5%EC%98%81%EC%8B%A4:_%EB%8F%85%EC%B0%BD%EC%A0%81%EC%9D%B8_%EB%AC%BC%EC%8B%9C%EA%B3%84%EB%A5%BC_%EB%A7%8C%EB%93%A4%EB%8B%A4&amp;diff=4711</id>
		<title>장영실: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들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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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21: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rom Slave to Prolific Scientific Inventor - Jang Yeong-sil&lt;br /&gt;
}}&lt;br /&gt;
=='''장영실: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들다'''==&lt;br /&gt;
===관노를 등용한 세종===&lt;br /&gt;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세종이 천문 기기를 만들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기후 상황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파종과 추수의 시기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이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과정에 적합한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시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해 그림자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해나 별을 볼 수 없는 흐린 날에는 시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과학으로 완성한 자격루와 옥루===&lt;br /&gt;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amp;lt;세종실록&amp;gt;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이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lt;br /&gt;
&lt;br /&gt;
1438년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독창적인 천상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기계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농사일에 따른 절기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옥루의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였다. &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문화유산채널 - 세계 최초의 우량계 측우기(문화재청)'''&amp;gt;https://www.youtube.com/watch?v=2yWAfEKUpmY&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 세종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구만옥,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들녘, 2016.&lt;br /&gt;
|참고문헌2=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세종문화사대계 2:과학(한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lt;br /&gt;
}}&lt;br /&gt;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유교ㆍ주자학의 정치사상적 필요에 따라 추진된 과학정책이라는 한 측면과 집권체제의 사회경제적 요청에 따라 시행된 각종 과학기술정책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세종대의 과학기술정책 기조와 그 성과를 정리했다. 동아시아 세계질서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중심부-주변부 문제, 중화문명-조선문명의 상호관계 등을 염두에 두면서 당대의 사회적ㆍ지적ㆍ정치사상적 맥락에서 전통과학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그로써 세종대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해석하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세종문화사대계 2:과학(한글)』'''은 그동안 한글의 창제와 그와 관련된 학문과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온 세종학 연구이다. 이 책은 세종 시대 과학 기술의 발전 상황을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세계 과학 기술의 역사에서 이슬람 과학과 서유럽 근대 과학 사이의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는 창조적 동아시아 과학의 업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1장에는 천문 기상학, 2장은 인쇄 출판, 3장은 의학, 4장은 농업 기술, 5장은 산업 기술, 6장은 지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세종대의 인재등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 2002.&lt;br /&gt;
}}&lt;br /&gt;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이 있었던 세종대왕에 대해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7장으로 세종대의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정초와 장영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장영실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선사역사연구소,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아토북, 2016.&lt;br /&gt;
|참고문헌2=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타고난 천재이자 노력가인 장영실은 '노비'로 태어나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고 15세기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됐다.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는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공고해지는 격동의 시기, 신분의 벽을 극복하고 정3품관 상호군 관직에 이르기까지 짧고 강렬했던 삶을 살다간 장영실의 일대기를 다룬다. 더불어 21세기에 장영실의 면모와 업적을 살펴야 하는 까닭도 알아본다.&lt;br /&gt;
&lt;br /&gt;
'''『장영실과 자격루』'''는 우리의 전통과학기술, 한국학, 시계공학, 천문과학, 자동화 기술, 발명과 이노베이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학생과 일반인에게 많은 흥미를 제공할 것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기술이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발전시켜 온 하나의 원동력으로 우리의 삶에 진하게 녹아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통과학기술문화야말로 21세기 문화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추진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B%8F%84%EC%A0%84:_%EC%A1%B0%EC%84%A0%EC%9D%98_%EC%82%AC%EC%83%81%EC%A0%81_%EA%B8%B0%EC%B4%88%EB%A5%BC_%EC%9D%B4%EB%A4%84%EB%82%B4%EB%8B%A4&amp;diff=4710</id>
		<title>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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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11: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rchitect of the Joseon Dynasty, Jeong Do-jeon&lt;br /&gt;
}}&lt;br /&gt;
=='''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lt;br /&gt;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조선 개국의 1등 공신===&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lt;br /&gt;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lt;br /&gt;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lt;br /&gt;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lt;br /&gt;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도전의 생애과 개혁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lt;br /&gt;
|참고문헌2=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lt;br /&gt;
|참고문헌3=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쓴 전기이다. 정도전의 출세부터 3년간의 나주 귀양, 6년간의 유랑생활, 태조 원년 정치적 실권 장악, 한양의 방명을 짓다, 정도전에 대한 사후 평가 등을 싣고 그의 저술과 사회, 정치, 경제사상을 탐구했다.&lt;br /&gt;
&lt;br /&gt;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은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lt;br /&gt;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는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하고 지금의 정도전을 있게 한 역사적인 세 인물,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또한, 민본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도전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며, 철인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열태,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이북이십사, 2014.&lt;br /&gt;
|참고문헌2=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lt;br /&gt;
}}&lt;br /&gt;
조선건국사는 바꾸어 말하면 고려 멸망사가 된다.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암수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목적을 이루어 냈다.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이 사건과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사』'''는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왕조별로 정리하였으며, 자연 정치사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을 서술하였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장과 2장으로 개국전야와 건국 초기의 사건들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도전의 저술과 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도전 지음, 김병환 옮김, 『불씨잡변』, 아카넷, 2013.&lt;br /&gt;
|참고문헌2=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조선경국전』, 올재클래식스, 2014.&lt;br /&gt;
|참고문헌3=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lt;br /&gt;
}}&lt;br /&gt;
'''『불씨잡변』'''은 1398년(태조 7), 삼봉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정도전이 보지 못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삼봉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건국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아 태조에게 바친 역저이다. 그의 붓은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어 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는 그를 ‘조선의 설계자’라 칭한다.&lt;br /&gt;
&lt;br /&gt;
'''『정도전사상의 연구』'''에서는 고려말 조선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왕조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의 생애와 저술을 심도 있게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을 철학·윤리, 사회·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B%8F%84%EC%A0%84:_%EC%A1%B0%EC%84%A0%EC%9D%98_%EC%82%AC%EC%83%81%EC%A0%81_%EA%B8%B0%EC%B4%88%EB%A5%BC_%EC%9D%B4%EB%A4%84%EB%82%B4%EB%8B%A4&amp;diff=4709</id>
		<title>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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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10: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rchitect of the Joseon Dynasty, Jeong Do-jeon&lt;br /&gt;
}}&lt;br /&gt;
=='''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lt;br /&gt;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조선 개국의 1등 공신===&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lt;br /&gt;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lt;br /&gt;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lt;br /&gt;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lt;br /&gt;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도전의 생애과 개혁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lt;br /&gt;
|참고문헌2=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lt;br /&gt;
|참고문헌3=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쓴 전기이다. 정도전의 출세부터 3년간의 나주 귀양, 6년간의 유랑생활, 태조 원년 정치적 실권 장악, 한양의 방명을 짓다, 정도전에 대한 사후 평가 등을 싣고 그의 저술과 사회, 정치, 경제사상을 탐구했다.&lt;br /&gt;
&lt;br /&gt;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은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lt;br /&gt;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는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하고 지금의 정도전을 있게 한 역사적인 세 인물,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또한, 민본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도전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며, 철인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열태,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이북이십사, 2014.&lt;br /&gt;
|참고문헌2=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lt;br /&gt;
}}&lt;br /&gt;
조선건국사는 바꾸어 말하면 고려 멸망사가 된다.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암수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목적을 이루어 냈다.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이 사건과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사』'''는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왕조별로 정리하였으며, 자연 정치사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을 서술하였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장과 2장으로 개국전야와 건국 초기의 사건들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도전의 저술과 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도전 지음, 김병환 옮김, 『불씨잡변』, 아카넷, 2013.&lt;br /&gt;
|참고문헌2=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조선경국전』, 올재클래식스, 2014.&lt;br /&gt;
|참고문헌3=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lt;br /&gt;
}}&lt;br /&gt;
'''『불씨잡변』'''은 1398년(태조 7), 삼봉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정도전이 보지 못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삼봉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건국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아 태조에게 바친 역저이다. 그의 붓은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어 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는 그를 ‘조선의 설계자’라 칭한다.&lt;br /&gt;
&lt;br /&gt;
'''『정도전사상의 연구』'''에서는 고려말 조선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왕조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의 생애와 저술을 심도 있게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을 철학·윤리, 사회·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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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08: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rchitect of the Joseon Dynasty, Jeong Do-jeon&lt;br /&gt;
}}&lt;br /&gt;
=='''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lt;br /&gt;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조선 개국의 1등 공신===&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lt;br /&gt;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lt;br /&gt;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lt;br /&gt;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lt;br /&gt;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도전의 생애과 개혁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lt;br /&gt;
|참고문헌2=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lt;br /&gt;
|참고문헌3=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쓴 전기이다. 정도전의 출세부터 3년간의 나주 귀양, 6년간의 유랑생활, 태조 원년 정치적 실권 장악, 한양의 방명을 짓다, 정도전에 대한 사후 평가 등을 싣고 그의 저술과 사회, 정치, 경제사상을 탐구했다.&lt;br /&gt;
&lt;br /&gt;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은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lt;br /&gt;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는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하고 지금의 정도전을 있게 한 역사적인 세 인물,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또한, 민본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도전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며, 철인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열태,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이북이십사, 2014.&lt;br /&gt;
|참고문헌2=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lt;br /&gt;
}}&lt;br /&gt;
조선건국사는 바꾸어 말하면 고려 멸망사가 된다.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암수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목적을 이루어 냈다.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이 사건과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사』'''는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왕조별로 정리하였으며, 자연 정치사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을 서술하였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장과 2장으로 개국전야와 건국 초기의 사건들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도전의 저술과 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도전 지음, 김병환 옮김, 『불씨잡변』, 아카넷, 2013.&lt;br /&gt;
|참고문헌2=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조선경국전』, 올재클래식스, 2014.&lt;br /&gt;
|참고문헌3=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lt;br /&gt;
}}&lt;br /&gt;
'''『불씨잡변』'''은 1398년(태조 7), 삼봉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정도전이 보지 못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삼봉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건국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아 태조에게 바친 역저이다. 그의 붓은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어 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는 그를 ‘조선의 설계자’라 칭한다.&lt;br /&gt;
&lt;br /&gt;
'''『정도전사상의 연구』'''에서는 고려말 조선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왕조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의 생애와 저술을 심도 있게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을 철학·윤리, 사회·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B%8F%84%EC%A0%84:_%EC%A1%B0%EC%84%A0%EC%9D%98_%EC%82%AC%EC%83%81%EC%A0%81_%EA%B8%B0%EC%B4%88%EB%A5%BC_%EC%9D%B4%EB%A4%84%EB%82%B4%EB%8B%A4&amp;diff=4707</id>
		<title>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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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4:07: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rchitect of the Joseon Dynasty, Jeong Do-jeon&lt;br /&gt;
}}&lt;br /&gt;
=='''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lt;br /&gt;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조선 개국의 1등 공신===&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lt;br /&gt;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lt;br /&gt;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lt;br /&gt;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lt;br /&gt;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도전의 생애과 개혁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lt;br /&gt;
|참고문헌2=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lt;br /&gt;
|참고문헌3=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쓴 전기이다. 정도전의 출세부터 3년간의 나주 귀양, 6년간의 유랑생활, 태조 원년 정치적 실권 장악, 한양의 방명을 짓다, 정도전에 대한 사후 평가 등을 싣고 그의 저술과 사회, 정치, 경제사상을 탐구했다.&lt;br /&gt;
&lt;br /&gt;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은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lt;br /&gt;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는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하고 지금의 정도전을 있게 한 역사적인 세 인물,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또한, 민본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도전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며, 철인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열태,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이북이십사, 2014.&lt;br /&gt;
|참고문헌2=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lt;br /&gt;
}}&lt;br /&gt;
조선건국사는 바꾸어 말하면 고려 멸망사가 된다.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암수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목적을 이루어 냈다.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이 사건과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사』'''는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왕조별로 정리하였으며, 자연 정치사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을 서술하였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장과 2장으로 개국전야와 건국 초기의 사건들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도전의 저술과 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정도전 지음, 김병환 옮김, 『불씨잡변』, 아카넷, 2013.&lt;br /&gt;
|참고문헌2=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조선경국전』, 올재클래식스, 2014.&lt;br /&gt;
|참고문헌3=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lt;br /&gt;
}}&lt;br /&gt;
'''『불씨잡변』'''은 1398년(태조 7), 삼봉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정도전이 보지 못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삼봉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건국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아 태조에게 바친 역저이다. 그의 붓은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어 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는 그를 ‘조선의 설계자’라 칭한다.&lt;br /&gt;
&lt;br /&gt;
'''『정도전사상의 연구』'''에서는 고려말 조선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왕조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의 생애와 저술을 심도 있게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을 철학·윤리, 사회·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B%8F%84%EC%A0%84:_%EC%A1%B0%EC%84%A0%EC%9D%98_%EC%82%AC%EC%83%81%EC%A0%81_%EA%B8%B0%EC%B4%88%EB%A5%BC_%EC%9D%B4%EB%A4%84%EB%82%B4%EB%8B%A4&amp;diff=4706</id>
		<title>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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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53: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rchitect of the Joseon Dynasty, Jeong Do-jeon&lt;br /&gt;
}}&lt;br /&gt;
=='''정도전: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내다'''==&lt;br /&gt;
===백성의 삶을 보며 피워낸 개혁 의지===&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lt;br /&gt;
&lt;br /&gt;
===조선 개국의 1등 공신===&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이 그를 탄핵하여 옥에 갇혔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대로 되었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amp;lt;시경(詩經)&amp;gt;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민본사상으로 다진 조선경국전===&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배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모함으로 얼룩진 평가===&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며 왕실 종친을 모함하여 해쳤다고 누명을 씌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정도전이 죽기 전에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에 남긴 시를 보면 그 기록은 이방원의 의도적인 폄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lt;br /&gt;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lt;br /&gt;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lt;br /&gt;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lt;br /&gt;
 (정도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 이이화의 인물한국사)&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정도전의 생애과 개혁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한영우,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lt;br /&gt;
●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lt;br /&gt;
●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쓴 전기이다. 정도전의 출세부터 3년간의 나주 귀양, 6년간의 유랑생활, 태조 원년 정치적 실권 장악, 한양의 방명을 짓다, 정도전에 대한 사후 평가 등을 싣고 그의 저술과 사회, 정치, 경제사상을 탐구했다.&lt;br /&gt;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은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lt;br /&gt;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는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하고 지금의 정도전을 있게 한 역사적인 세 인물,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또한, 민본주의와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도전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며, 철인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2. 조선의 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조열태,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이북이십사, 2014.&lt;br /&gt;
●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lt;br /&gt;
&lt;br /&gt;
조선건국사는 바꾸어 말하면 고려 멸망사가 된다. 피를 흘리지 않았을 뿐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암수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목적을 이루어 냈다.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이 사건과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lt;br /&gt;
『조선왕조사』는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왕조별로 정리하였으며, 자연 정치사를 중심으로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을 서술하였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장과 2장으로 개국전야와 건국 초기의 사건들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3. 정도전의 저술과 사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정도전 지음, 김병환 옮김, 󰡔불씨잡변󰡕, 아카넷, 2013.&lt;br /&gt;
●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조선경국전󰡕, 올재클래식스, 2014.&lt;br /&gt;
●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lt;br /&gt;
&lt;br /&gt;
『불씨잡변』은 1398년(태조 7), 삼봉 정도전이 죽기 몇 달 전에 저술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정도전이 보지 못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삼봉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lt;br /&gt;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건국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아 태조에게 바친 역저이다. 그의 붓은 문명 개혁의 고전을 만들어 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삼봉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는 그를 ‘조선의 설계자’라 칭한다.&lt;br /&gt;
󰡔정도전사상의 연구󰡕에서는 고려말 조선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왕조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의 생애와 저술을 심도 있게 고찰해보고, 그의 사상을 철학·윤리, 사회·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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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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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51: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하였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서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계속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 추방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704</id>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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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43: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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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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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42: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702</id>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702"/>
				<updated>2018-02-20T13:41: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701</id>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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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41: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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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40: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699</id>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699"/>
				<updated>2018-02-20T13:38: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파란만장 정치 역정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8C%80%EC%A4%91:_%EA%B3%A0%EB%82%9C%EC%9D%84_%EC%9D%B4%EA%B2%A8%EB%82%B4%EA%B3%A0_%EB%8C%80%ED%86%B5%EB%A0%B9%EC%9D%B4_%EB%90%98%EB%8B%A4&amp;diff=4698</id>
		<title>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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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36: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nti-Authoritarian Opposition Leader and Nobel Peace Prize Winner, President Kim Dae-jung&lt;br /&gt;
}}&lt;br /&gt;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lt;br /&gt;
===김대중 납치 사건===&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파란만장 정치 역정===&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국민의 정부 대통령===&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lt;br /&gt;
|참고문헌2=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미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해 내고 있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써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시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일정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lt;br /&gt;
|참고문헌2=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lt;br /&gt;
}}&lt;br /&gt;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lt;br /&gt;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의 추방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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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20T13:17: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uthor of the Oldest Extant Korean History, Kim Bu-sik&lt;br /&gt;
}}&lt;br /&gt;
=='''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 '''==&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 &lt;br /&gt;
&lt;br /&gt;
그는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묘청의 난 평정===&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을 개경파와 서경파, 불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로 보았다. 그는 묘청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145년에  &amp;lt;삼국사기&amp;gt; 50권을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기전체로 집필되었다. 전체는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송나라 왕응린의 책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부식과 묘청의 난(서경천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정출헌, 『김부식과 일연의 왜』, 한겨레출판사, 2012.&lt;br /&gt;
|참고문헌2=김정권, 『묘청란 묘청란 연구』, 충남대학교출판부, 2007.&lt;br /&gt;
|참고문헌3=김창현,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구다』, 경인문화사, 2008.&lt;br /&gt;
}}&lt;br /&gt;
'''『김부식과 일연은 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나란히 놓고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필자의 관점을 비교한 책이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혹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선별하여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며 김부식과 일연의 시각차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얼마나 다르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남성의 시선을 아우르며 다양한 시각으로 표현된 옛이야기를 통해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부로, 유학자인 김부식과 탈속 승려인 일연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비교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묘청란 묘청란 연구』'''은 고려 인종 시기 김부식과 대립을 하며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던 묘청과 묘청란에 대한 연구서이다. 신채호를 기점으로 한 그동안의 묘청란 연구는 다분히 합리적 선택론이라는 역사 인식론적 토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필자는 연구과정에서 일종의 획정의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통합적이고도 연합적인 성격의 '정치세대'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중기 인종대를 유신정치의 시대로 상정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정치질서 형성의 다이내믹스를 살필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는 천하를 꿈꾼 윤관과 묘청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의 역사를 조명한다. 고려 중기의 역사는 귀족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파탄에 이른 결과 이자겸 난, 묘청 정변, 무신정변이 연이어 발생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서 탈피한 시점으로 그려졌다. 변화와 발전의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삼국사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신형식,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 경인문화사, 2011.&lt;br /&gt;
|참고문헌2=정구복,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lt;br /&gt;
}}&lt;br /&gt;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는 『삼국사기』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책으로, 『삼국사기』를 항목별로 분석했다. 이 책은 삼국사회의 종합적 이해를 돕고, 신문화사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고대사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삼국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 등을 『삼국사기』라는 창구를 통해 정리한다.&lt;br /&gt;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는 『삼국사기』를 현대적으로 분석한 안내서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가 다루고 있는 삼국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단군조선으로부터의 역사 과정, 삼국 멸망 후 고려조의 역사 과정과 배경, 편찬자와 편찬 목적, 영향, 평가 등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의 폭과 시각에 따라 다른 견해와 주장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전해준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B6%80%EC%8B%9D:_%ED%95%9C%EA%B5%AD%EC%9D%98_%EA%B0%80%EC%9E%A5_%EC%98%A4%EB%9E%98%EB%90%9C_%EC%97%AD%EC%82%AC%EC%84%9C%EB%A5%BC_%EC%93%B0%EB%8B%A4&amp;diff=4696</id>
		<title>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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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4:23: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uthor of the Oldest Extant Korean History, Kim Bu-sik&lt;br /&gt;
}}&lt;br /&gt;
=='''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 '''==&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 &lt;br /&gt;
&lt;br /&gt;
그는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묘청의 난 평정===&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을 개경파와 서경파, 불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로 보았다. 그는 묘청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145년에  &amp;lt;삼국사기&amp;gt; 50권을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기전체로 집필되었다. 전체는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송나라 왕응린의 책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부식과 묘청의 난(서경천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정출헌, 『김부식과 일연의 왜』, 한겨레출판사, 2012.&lt;br /&gt;
|참고문헌2=김정권, 『묘청란 묘청란 연구』, 충남대학교출판부, 2007.&lt;br /&gt;
|참고문헌3=김창현,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구다』, 경인문화사, 2008.&lt;br /&gt;
}}&lt;br /&gt;
'''『김부식과 일연은 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나란히 놓고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필자의 관점을 비교한 책이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혹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선별하여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며 김부식과 일연의 시각차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얼마나 다르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남성의 시선을 아우르며 다양한 시각으로 표현된 옛이야기를 통해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부로, 유학자인 김부식과 탈속 승려인 일연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비교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묘청란 묘청란 연구』'''은 고려 인종 시기 김부식과 대립을 하며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던 묘청과 묘청란에 대한 연구서이다. 신채호를 기점으로 한 그동안의 묘청란 연구는 다분히 합리적 선택론이라는 역사 인식론적 토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필자는 연구과정에서 일종의 획정의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통합적이고도 연합적인 성격의 '정치세대'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중기 인종대를 유신정치의 시대로 상정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정치질서 형성의 다이내믹스를 살필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는 천하를 꿈꾼 윤관과 묘청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의 역사를 조명한다. 고려 중기의 역사는 귀족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파탄에 이른 결과 이자겸 난, 묘청 정변, 무신정변이 연이어 발생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서 탈피한 시점으로 그려졌다. 변화와 발전의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삼국사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신형식,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 경인문화사, 2011.&lt;br /&gt;
|참고문헌2=정구복,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lt;br /&gt;
}}&lt;br /&gt;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는 『삼국사기』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책으로, 『삼국사기』를 항목별로 분석했다. 이 책은 삼국사회의 종합적 이해를 돕고, 신문화사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고대사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삼국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 등을 『삼국사기』라는 창구를 통해 정리한다.&lt;br /&gt;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는 『삼국사기』를 현대적으로 분석한 안내서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가 다루고 있는 삼국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단군조선으로부터의 역사 과정, 삼국 멸망 후 고려조의 역사 과정과 배경, 편찬자와 편찬 목적, 영향, 평가 등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의 폭과 시각에 따라 다른 견해와 주장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전해준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9%80%EB%B6%80%EC%8B%9D:_%ED%95%9C%EA%B5%AD%EC%9D%98_%EA%B0%80%EC%9E%A5_%EC%98%A4%EB%9E%98%EB%90%9C_%EC%97%AD%EC%82%AC%EC%84%9C%EB%A5%BC_%EC%93%B0%EB%8B%A4&amp;diff=4695</id>
		<title>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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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4:22: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uthor of the Oldest Extant Korean History, Kim Bu-sik&lt;br /&gt;
}}&lt;br /&gt;
=='''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 '''==&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 &lt;br /&gt;
&lt;br /&gt;
그는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묘청의 난 평정===&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을 개경파와 서경파, 불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로 보았다. 그는 묘청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145년에  &amp;lt;삼국사기&amp;gt; 50권을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기전체로 집필되었다. 전체는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송나라 왕응린의 책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부식과 묘청의 난(서경천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정출헌, 『김부식과 일연의 왜』, 한겨레출판사, 2012.&lt;br /&gt;
|참고문헌2=김정권, 『묘청란 묘청란 연구』, 충남대학교출판부, 2007.&lt;br /&gt;
|참고문헌3=김창현,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구다』, 경인문화사, 2008.&lt;br /&gt;
}}&lt;br /&gt;
'''&lt;br /&gt;
『김부식과 일연은 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나란히 놓고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필자의 관점을 비교한 책이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혹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선별하여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며 김부식과 일연의 시각차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얼마나 다르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남성의 시선을 아우르며 다양한 시각으로 표현된 옛이야기를 통해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부로, 유학자인 김부식과 탈속 승려인 일연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비교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묘청란 묘청란 연구』'''은 고려 인종 시기 김부식과 대립을 하며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던 묘청과 묘청란에 대한 연구서이다. 신채호를 기점으로 한 그동안의 묘청란 연구는 다분히 합리적 선택론이라는 역사 인식론적 토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필자는 연구과정에서 일종의 획정의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통합적이고도 연합적인 성격의 '정치세대'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중기 인종대를 유신정치의 시대로 상정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정치질서 형성의 다이내믹스를 살필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는 천하를 꿈꾼 윤관과 묘청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의 역사를 조명한다. 고려 중기의 역사는 귀족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파탄에 이른 결과 이자겸 난, 묘청 정변, 무신정변이 연이어 발생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서 탈피한 시점으로 그려졌다. 변화와 발전의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삼국사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신형식,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 경인문화사, 2011.&lt;br /&gt;
|참고문헌2=정구복,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lt;br /&gt;
}}&lt;br /&gt;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는 『삼국사기』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책으로, 『삼국사기』를 항목별로 분석했다. 이 책은 삼국사회의 종합적 이해를 돕고, 신문화사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고대사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삼국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 등을 『삼국사기』라는 창구를 통해 정리한다.&lt;br /&gt;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는 『삼국사기』를 현대적으로 분석한 안내서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가 다루고 있는 삼국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단군조선으로부터의 역사 과정, 삼국 멸망 후 고려조의 역사 과정과 배경, 편찬자와 편찬 목적, 영향, 평가 등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의 폭과 시각에 따라 다른 견해와 주장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전해준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4%9C%ED%9D%AC:_%EB%8B%B4%ED%8C%90%EC%9C%BC%EB%A1%9C_%EA%B1%B0%EB%9E%80%EC%9D%84_%EB%AC%BC%EB%A6%AC%EC%B9%98%EB%8B%A4&amp;diff=4694</id>
		<title>서희: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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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4:07: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Goryeo's Most Well-known Negotiator and Diplomat, Seo Hui&lt;br /&gt;
}}&lt;br /&gt;
=='''서희: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치다'''==&lt;br /&gt;
===적의 위협에서 속셈을 알아채다===&lt;br /&gt;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82년에는 송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단절되었던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나타냈다. 그의 가장 뚜렷한 업적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일이다.  &lt;br /&gt;
&lt;br /&gt;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lt;br /&gt;
&lt;br /&gt;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 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lt;br /&gt;
&lt;br /&gt;
이에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의 장수를 말로 물리치다===&lt;br /&gt;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lt;br /&gt;
&lt;br /&gt;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 : 서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나라에 들어가니 어찌 침해라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영토 안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lt;br /&gt;
&lt;br /&gt;
서희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함을 밝힌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와 거란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여진족 평정 문제까지 들고 나온 것이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lt;br /&gt;
&lt;br /&gt;
그 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와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재만, 『거란 고려관계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9.&lt;br /&gt;
|참고문헌2=안주섭, 『고려 거란 전쟁』, 경인문화사, 2003.&lt;br /&gt;
}}&lt;br /&gt;
'''『거란 고려관계사 연구』'''는 907년에 건국된 거란과 918년에 건국된 고려의 외교와 정치 관계를 고찰한 연구서이다. 거란과 고려의 국교전사, 거란 성종의 고려침략과 동북아시아 국제공세의 변추, 거란 흥종 시대 양국관계 등 6개 장으로 나누어 설명했다.&lt;br /&gt;
&lt;br /&gt;
'''『고려 거란 전쟁』'''은 각 분야에서 이루어진 분산적 연구를 유기적으로 종합하고 군사적 관점을 도입하여 고려·거란 전쟁을 재조명했다. 전쟁의 역사적 배경은 고려 내부의 정세와 국제 정세를 종합하여 접근했고, 전쟁의 실체는 기존에 간과되었던 군사적 관점을 도입하여 접근했다. 특히 고려·거란 전쟁의 군사적 분석에 초점을 두었다. 거란군의 공격 전술과 고려군의 성 단위 방어 전술을 기초로 양국을 대등한 입장에서 분석하여 6차례 전쟁마다의 전쟁 목적, 원정 형태, 적용 전술, 전쟁 특징을 추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희의 생애와 외교협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장철균,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lt;br /&gt;
|참고문헌2=신복룡 외, 『고려 실용외교의 중심 서희 최고의 협상 리더십을 만나다』, 서해문집, 2010.&lt;br /&gt;
}}&lt;br /&gt;
'''『서희의 외교담판』'''은 서희의 활약과 업적을 역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측면에서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희의 외교 담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현재 우리의 외교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1장에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고, 2장에서는 고려의 북방정책을 다루었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서희의 외교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4장에서는 이후의 영토분쟁과 협상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고려 실용외교의 중심 서희 최고의 협상 리더십을 만나다』'''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서희의 삶과 협상 리더십을 살펴본다.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담판으로 전쟁을 막고, 강동6주를 되찾은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서희의 업적이다. 이 책은 이미 알려진 ‘서희의 외교업적’은 물론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사로서 ‘인간 서희’까지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종합적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특히 한미 FTA협상, 한일 어업협정, 쇠고기 시장개방 협상,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정 등 국가 간 협상이 중요해진 요즘, 서희의 협상 리더십을 되새겨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4%9C%ED%9D%AC:_%EB%8B%B4%ED%8C%90%EC%9C%BC%EB%A1%9C_%EA%B1%B0%EB%9E%80%EC%9D%84_%EB%AC%BC%EB%A6%AC%EC%B9%98%EB%8B%A4&amp;diff=4693</id>
		<title>서희: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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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4:06: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Goryeo's Most Well-known Negotiator and Diplomat, Seo Hui&lt;br /&gt;
}}&lt;br /&gt;
=='''서희: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치다'''==&lt;br /&gt;
===적의 위협에서 속셈을 알아채다===&lt;br /&gt;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82년에는 송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단절되었던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나타냈다. 그의 가장 뚜렷한 업적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일이다.  &lt;br /&gt;
&lt;br /&gt;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lt;br /&gt;
&lt;br /&gt;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 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lt;br /&gt;
&lt;br /&gt;
이에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의 장수를 말로 물리치다===&lt;br /&gt;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lt;br /&gt;
&lt;br /&gt;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 : 서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나라에 들어가니 어찌 침해라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영토 안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lt;br /&gt;
&lt;br /&gt;
서희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함을 밝힌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와 거란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여진족 평정 문제까지 들고 나온 것이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lt;br /&gt;
&lt;br /&gt;
그 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와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재만, 『거란 고려관계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9.&lt;br /&gt;
|참고문헌2=안주섭, 『고려 거란 전쟁』, 경인문화사, 2003.&lt;br /&gt;
&lt;br /&gt;
'''『거란 고려관계사 연구』'''는 907년에 건국된 거란과 918년에 건국된 고려의 외교와 정치 관계를 고찰한 연구서이다. 거란과 고려의 국교전사, 거란 성종의 고려침략과 동북아시아 국제공세의 변추, 거란 흥종 시대 양국관계 등 6개 장으로 나누어 설명했다.&lt;br /&gt;
&lt;br /&gt;
'''『고려 거란 전쟁』'''은 각 분야에서 이루어진 분산적 연구를 유기적으로 종합하고 군사적 관점을 도입하여 고려·거란 전쟁을 재조명했다. 전쟁의 역사적 배경은 고려 내부의 정세와 국제 정세를 종합하여 접근했고, 전쟁의 실체는 기존에 간과되었던 군사적 관점을 도입하여 접근했다. 특히 고려·거란 전쟁의 군사적 분석에 초점을 두었다. 거란군의 공격 전술과 고려군의 성 단위 방어 전술을 기초로 양국을 대등한 입장에서 분석하여 6차례 전쟁마다의 전쟁 목적, 원정 형태, 적용 전술, 전쟁 특징을 추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희의 생애와 외교협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장철균,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lt;br /&gt;
|참고문헌2=신복룡 외, 『고려 실용외교의 중심 서희 최고의 협상 리더십을 만나다』, 서해문집, 2010.&lt;br /&gt;
&lt;br /&gt;
'''『서희의 외교담판』'''은 서희의 활약과 업적을 역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측면에서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희의 외교 담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현재 우리의 외교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1장에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고, 2장에서는 고려의 북방정책을 다루었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서희의 외교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4장에서는 이후의 영토분쟁과 협상을 다루었다.&lt;br /&gt;
&lt;br /&gt;
'''『고려 실용외교의 중심 서희 최고의 협상 리더십을 만나다』'''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서희의 삶과 협상 리더십을 살펴본다.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담판으로 전쟁을 막고, 강동6주를 되찾은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서희의 업적이다. 이 책은 이미 알려진 ‘서희의 외교업적’은 물론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사로서 ‘인간 서희’까지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종합적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특히 한미 FTA협상, 한일 어업협정, 쇠고기 시장개방 협상,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정 등 국가 간 협상이 중요해진 요즘, 서희의 협상 리더십을 되새겨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_%EB%93%9C%EB%84%93%EC%9D%80_%EC%98%81%ED%86%A0%EB%A5%BC_%EC%B0%A8%EC%A7%80%ED%95%98%EB%8B%A4&amp;diff=4692</id>
		<title>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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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Expander and Opener of Goguryeo's Territory, King Gwanggaeto&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lt;br /&gt;
[[파일:광개토대왕_일러스트.jpg|180px|thumb|left|광개토대왕 일러스트]]&lt;br /&gt;
===백제, 신라, 가야 공략===&lt;br /&gt;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lt;br /&gt;
&lt;br /&gt;
이름 그대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lt;br /&gt;
&lt;br /&gt;
===거란, 후연, 부여 함락===&lt;br /&gt;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전략·전술가이자 정치가===&lt;br /&gt;
[[파일:이종상-후연정벌(광개토대왕)-1975s.jpg|400px|thumb|center|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장면을 그린 민족기록화(이종상作, 1975년)]]&lt;br /&gt;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 중심이었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내정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이러한 상황을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기록했다.&lt;br /&gt;
&lt;br /&gt;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4면비이다. 4면 전체에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고구려]]&lt;br /&gt;
*[[광개토대왕릉비]]&lt;br /&gt;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광개토대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다케미쓰 마코토, 『고구려 광개토대왕』, 범우, 2009.&lt;br /&gt;
|참고문헌2=고구려연구회,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학연문화사, 2002.&lt;br /&gt;
|참고문헌3=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항아리,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전편·중편·후편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편에서는 광개토왕의 생애가 이해하기 쉽게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생각에 의해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여러 장면의 상황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중편에서는 주로 광개토왕의 시대, 후편에서는 해모수와 주몽이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왕 전후의 역사적 흐름이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amp;quot;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동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료편에는 광개토태왕 관계 연구문헌 종합목록과 그 논저목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사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도학,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lt;br /&gt;
|참고문헌2=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앤씨,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20년간에 걸쳐 연구하고 발표했던 20편의 고구려사 논문들을 담은 연구서로, 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상을 온전하게 구명하고자 했다.&lt;br /&gt;
&lt;br /&gt;
'''『광개토왕비문의 세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사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비문」을 텍스트로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비문」은 1800여 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화적인 제1부, 광개토대왕의 훈적이 기록된 제2부, 조상 숭배를 내용으로 하는 제3부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건국신화가 제1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을 기축으로 하여 「비문」 전체를 통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4%A0%EB%8D%95%EC%97%AC%EC%99%95:_%ED%95%9C%EA%B5%AD_%EC%B5%9C%EC%B4%88%EC%9D%98_%EC%97%AC%EC%99%95&amp;diff=4691</id>
		<title>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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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4:00: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Korea's First Female Ruler, Queen Seondeok of Silla&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lt;br /&gt;
===골품제 때문에 왕이 된 여성===&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화백|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lt;br /&gt;
&lt;br /&gt;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lt;br /&gt;
  &lt;br /&gt;
===여왕으로서의 고난===&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무례하게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지혜와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아 장지를 스스로 정하여 지시했다고도 한다. &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선덕여왕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 이적,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 어문학사, 2009.&lt;br /&gt;
|참고문헌2=김용희,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초당, 2009.&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역추적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진위 여부가 논쟁 중인 화랑세기의 자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기록과 설화만으로 선덕여왕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료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선덕여왕과 여왕의 시대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더불어 선덕여왕의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사찰과 탑 등 고대 유물, 유적을 더듬는 작업을 덧붙인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이 그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다. 풍성한 유물 사진과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함께 엮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lt;br /&gt;
&lt;br /&gt;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을 그려낸 역사서이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신라에서 여왕이 되었던 선덕.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선덕여왕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통치를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했고 당 태종 이세민 역시 선덕 여왕 대신 자신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여성 군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이 반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 주역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적 추론을 통해 선덕 여왕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덕여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 특유의 포용의 정치와 문화의 정치를 폈던 그녀의 업적을 재평가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룡사 9층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양정석,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서경문화사, 2004.&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사에서의 여왕의 지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여왕의 시대』는 여왕의 시대가 탄생하게 된 당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드러움과 통합이라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조명한다. 또한 여왕의 시대를 함께 조력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여왕들이 이들 인재를 활용했던 방식을 분석한다. 나아가 여왕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 여성적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어떠한 실책이 그러한 리더십의 발현에 한계를 지었는지 예리하게 파헤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4%A0%EB%8D%95%EC%97%AC%EC%99%95:_%ED%95%9C%EA%B5%AD_%EC%B5%9C%EC%B4%88%EC%9D%98_%EC%97%AC%EC%99%95&amp;diff=4690</id>
		<title>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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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3:26: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Korea's First Female Ruler, Queen Seondeok of Silla&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lt;br /&gt;
===골품제 때문에 왕이 된 여성===&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화백|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lt;br /&gt;
&lt;br /&gt;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lt;br /&gt;
  &lt;br /&gt;
===여왕으로서의 고난===&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무례하게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지혜와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아 장지를 스스로 정하여 지시했다고도 한다. &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선덕여왕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 이적,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 어문학사, 2009.&lt;br /&gt;
|참고문헌2=김용희,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초당, 2009.&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역추적 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진위 여부가 논쟁 중인 화랑세기의 자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기록과 설화만으로 선덕여왕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료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선덕여왕과 여왕의 시대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더불어 선덕여왕의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사찰과 탑 등 고대 유물, 유적을 더듬는 작업을 덧붙인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이 그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다. 풍성한 유물 사진과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함께 엮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lt;br /&gt;
&lt;br /&gt;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을 그려낸 역사서이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신라에서 여왕이 되었던 선덕.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선덕여왕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통치를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했고 당 태종 이세민 역시 선덕 여왕 대신 자신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롱했을 정도. 그러나 이 책은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여성 군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이 반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 주역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 저자는 역사적 추론을 통해 선덕 여왕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덕여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 특유의 포용의 정치와 문화의 정치를 폈던 그녀의 업적을 재평가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황룡사 9층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양정석,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서경문화사, 2004.&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사에서의 여왕의 지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여왕의 시대󰡕는 여왕의 시대가 탄생하게 된 당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드러움과 통합이라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조명한다. 또한 여왕의 시대를 함께 조력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여왕들이 이들 인재를 활용했던 방식을 분석한다. 나아가 여왕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 여성적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어떠한 실책이 그러한 리더십의 발현에 한계를 지었는지 예리하게 파헤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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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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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3:26:2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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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Korea's First Female Ruler, Queen Seondeok of Silla&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lt;br /&gt;
===골품제 때문에 왕이 된 여성===&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화백|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lt;br /&gt;
&lt;br /&gt;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lt;br /&gt;
  &lt;br /&gt;
===여왕으로서의 고난===&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무례하게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지혜와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아 장지를 스스로 정하여 지시했다고도 한다. &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선덕여왕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 이적,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 어문학사, 2009.&lt;br /&gt;
|참고문헌2=김용희,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초당, 2009.&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역추적 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진위 여부가 논쟁 중인 화랑세기의 자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기록과 설화만으로 선덕여왕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료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선덕여왕과 여왕의 시대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더불어 선덕여왕의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사찰과 탑 등 고대 유물, 유적을 더듬는 작업을 덧붙인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이 그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다. 풍성한 유물 사진과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함께 엮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lt;br /&gt;
&lt;br /&gt;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을 그려낸 역사서이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신라에서 여왕이 되었던 선덕.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선덕여왕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통치를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했고 당 태종 이세민 역시 선덕 여왕 대신 자신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롱했을 정도. 그러나 이 책은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여성 군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이 반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 주역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 저자는 역사적 추론을 통해 선덕 여왕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덕여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 특유의 포용의 정치와 문화의 정치를 폈던 그녀의 업적을 재평가한다.&lt;br /&gt;
&lt;br /&gt;
*'''황룡사 9층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양정석,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서경문화사, 2004.&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사에서의 여왕의 지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여왕의 시대󰡕는 여왕의 시대가 탄생하게 된 당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드러움과 통합이라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조명한다. 또한 여왕의 시대를 함께 조력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여왕들이 이들 인재를 활용했던 방식을 분석한다. 나아가 여왕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 여성적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어떠한 실책이 그러한 리더십의 발현에 한계를 지었는지 예리하게 파헤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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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초고왕: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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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2-19T13:26: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Wlghkwk: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Consolidator of Baekje, King Geunchogo&lt;br /&gt;
}}&lt;br /&gt;
=='''근초고왕: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다'''==&lt;br /&gt;
[[파일:근초고왕_일러스트.jpg|180px|thumb|left|근초고왕 일러스트]]&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 ?∼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고-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lt;br /&gt;
&lt;br /&gt;
===백제 최고 전성기의 왕===&lt;br /&gt;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lt;br /&gt;
&lt;br /&gt;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lt;br /&gt;
&lt;br /&gt;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lt;br /&gt;
&lt;br /&gt;
===활발했던 해상 무역===&lt;br /&gt;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 차지가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일본에 전한 유학===&lt;br /&gt;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왕인(王仁)]]과 [[아직기|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천자문(千字文)]]』과 『[[논어|논어(論語)]]』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lt;br /&gt;
&lt;br /&gt;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안타깝게도 『[[서기]]』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백제]]&lt;br /&gt;
*[[칠지도]]&lt;br /&gt;
*『[[서기|서기(書記)]]』&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근초고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성백제박물관,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한성백제박물관, 2014.&lt;br /&gt;
|참고문헌2=이희진,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가람기획, 2011.&lt;br /&gt;
|참고문헌3=김기섭,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2000.&lt;br /&gt;
}}&lt;br /&gt;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는 쟁점백제사 집중토론 학술대회의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백제의 동북방면 진출의 문헌적·고고학적 측면, 백제의 서남방면 진출의 문헌적·고고학적 측면 등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근초고왕을 고백하다』'''는 백제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13대 근초고왕과 백제 중흥기의 중심에 있었던 26대 성왕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당시 주변정세를 토대로 백제의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고, 고구려, 신라를 비롯 가야, 왜 등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두 왕의 업적을 자세히 풀어냈다. 지도자다운 전략가의 면모를 보인 근초고왕과 동아시아 남부의 맹주 자리를 원했던 성왕의 실제 업적을 백제사를 통해 꼼꼼히 살펴보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근초고왕』'''은 근초고왕이 활동한 4세기를 중심으로 백제의 국가 성장과정을 고찰한 책이다. 백제의 13번째 왕인 근초고왕의 출생과 성장, 즉위와 군사활동, 정치활동 등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근초고왕의 시대와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2002.&lt;br /&gt;
|참고문헌2=임동권, 『일본 안의 백제문화』, 민속원, 2005.&lt;br /&gt;
}}&lt;br /&gt;
일본인들은 고대에 자신들이 이백여 년 동안이나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가르쳤고 우리도 일본의 고대문화는 무엇이든 백제가 전해주었다든가 천황가는 백제에서 건너갔다고 배웠다. 이런 역사교육이 왜곡된 우월의식을 낳았고 그것은 양국관계를 잘못 이끌고 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에서는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백제왕실과 일본 황실에 관계, 우리 조상들은 왜 일본에 갔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임나일본부설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김춘추는 왜 일본에 갔고 백촌강 싸움에 일본은 왜 대군을 보냈는지 등을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가능한 한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다.&lt;br /&gt;
&lt;br /&gt;
'''『일본 안의 백제문화』'''는 일본 안에서 발견되는 백제의 문화를 연구한 책이다. 일본 현지조사를 토대로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를 알아보고 있다. 고대에 한국에서 일본에 전파한 문화는 없는지, 있으면 전파 후에 어떠한 변이가 있었는지 그 전파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Wlghkwk</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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