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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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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6%81%EC%A4%91%EC%9D%98_%EB%AC%B8%ED%99%94%EC%99%80_%EC%98%88%EB%B2%95%EC%9D%98_%EA%B8%B0%EB%A1%9D,_%EC%9D%98%EA%B6%A4&amp;diff=4141</id>
		<title>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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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7T02:50: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예절과 문화 역사의 결과물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Documenting Neo-Confucian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lt;br /&gt;
=='''예절과 문화 역사의 산물, 의궤'''==&lt;br /&gt;
===행사를 치루는 기준, 의궤===&lt;br /&gt;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lt;br /&gt;
&lt;br /&gt;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후대의 연구 자료가 되는 의궤===&lt;br /&gt;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lt;br /&gt;
&lt;br /&gt;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예조, 춘추관, 강화부(江華府),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lt;br /&gt;
&lt;br /&gt;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와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예절과 문화 역사의 결과물===&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는 2011년에 임대 형식으로 대한민국에 반환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파일:3-19.의궤_The_National_Museum_of_Korea_(2).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9.의궤_The_National_Museum_of_Korea_(3).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76.jpg|강화도 외규장각&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의궤, 조선의 패션을 말하다!(문화유산채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7FSKKbQOnp0&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의궤]]&lt;br /&gt;
*[[반차도]]&lt;br /&gt;
*[[외규장각]]&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시대 의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애, 『조선왕조 의궤』,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신병주,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lt;br /&gt;
}}&lt;br /&gt;
'''『조선왕조 의궤』'''는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정수인 의궤를 연구한 책이다. 의궤에 담긴 의례의 역사적 의미에 중심을 두고, 의궤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각 왕대별로 어떤 의례가 거행되어 어떤 의궤가 편찬되었으며, 그 의례가 갖는 정치적 의미와 문화적 의미, 그리고 의궤에 담긴 정보의 개략을 살펴본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1장인데, 의궤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는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왕실의 기록문화를 살펴보는 책이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을 말한다. 의궤의 기록은 조선시대사 연구, 특히 궁중생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책은 철저한 기록정신이 빚어낸 조선의 국정 보고서 의궤를 통해, 독특하고 다채로운 궁중 문화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풍부한 컬러 도판과 깊이 있는 해설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기록문화를 이해하고 기록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lt;br /&gt;
&lt;br /&gt;
&lt;br /&gt;
*'''의궤 환수와 관련하여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혜문, 『의궤 - 되찾은 조선의 보물』,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참고문헌2=국립중앙박물관,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국립중앙박물관, 2011.&lt;br /&gt;
}}&lt;br /&gt;
'''『의궤 - 되찾은 조선의 보물』'''은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환수운동을 실천 중인 혜문 스님의 저서이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강탈해 간 한국사에서 가장 슬픈 장례식의 기록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2011년 일본 왕실로부터 되찾아오기까지 민간단체의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환수운동에 관한 대국민 최종 보고서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의 탄생부터 4년간의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의 과정과 성과를 제1막과 제2막으로 나누어 펼쳐보이고 있다. 일제의 식민 통치로 일본 왕궁에 볼모처럼 잡혀 있던 조선 왕실 문서가 경술국치 100년을 지나면서 일본 총리의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의 의미를 담고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의미 있는 새로운 변화를 엿본다. &lt;br /&gt;
&lt;br /&gt;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 자료를 담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6%81%EC%A4%91%EC%9D%98_%EB%AC%B8%ED%99%94%EC%99%80_%EC%98%88%EB%B2%95%EC%9D%98_%EA%B8%B0%EB%A1%9D,_%EC%9D%98%EA%B6%A4&amp;diff=4135</id>
		<title>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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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7T02:27: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예절과 문화 역사의 결과물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Documenting Neo-Confucian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lt;br /&gt;
=='''예절과 문화 역사의 산물, 의궤'''==&lt;br /&gt;
===행사를 치루는 기준, 의궤===&lt;br /&gt;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lt;br /&gt;
&lt;br /&gt;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후대의 연구 자료가 되는 의궤===&lt;br /&gt;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lt;br /&gt;
&lt;br /&gt;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예조, 춘추관, 강화부(江華府),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lt;br /&gt;
&lt;br /&gt;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와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예절과 문화 역사의 결과물===&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파일:3-19.의궤_The_National_Museum_of_Korea_(2).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9.의궤_The_National_Museum_of_Korea_(3).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76.jpg|강화도 외규장각&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의궤, 조선의 패션을 말하다!(문화유산채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7FSKKbQOnp0&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의궤]]&lt;br /&gt;
*[[반차도]]&lt;br /&gt;
*[[외규장각]]&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시대 의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애, 『조선왕조 의궤』,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신병주,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lt;br /&gt;
}}&lt;br /&gt;
'''『조선왕조 의궤』'''는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정수인 의궤를 연구한 책이다. 의궤에 담긴 의례의 역사적 의미에 중심을 두고, 의궤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각 왕대별로 어떤 의례가 거행되어 어떤 의궤가 편찬되었으며, 그 의례가 갖는 정치적 의미와 문화적 의미, 그리고 의궤에 담긴 정보의 개략을 살펴본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1장인데, 의궤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는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왕실의 기록문화를 살펴보는 책이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을 말한다. 의궤의 기록은 조선시대사 연구, 특히 궁중생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책은 철저한 기록정신이 빚어낸 조선의 국정 보고서 의궤를 통해, 독특하고 다채로운 궁중 문화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풍부한 컬러 도판과 깊이 있는 해설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기록문화를 이해하고 기록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lt;br /&gt;
&lt;br /&gt;
&lt;br /&gt;
*'''의궤 환수와 관련하여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혜문, 『의궤 - 되찾은 조선의 보물』,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참고문헌2=국립중앙박물관,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국립중앙박물관, 2011.&lt;br /&gt;
}}&lt;br /&gt;
'''『의궤 - 되찾은 조선의 보물』'''은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환수운동을 실천 중인 혜문 스님의 저서이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강탈해 간 한국사에서 가장 슬픈 장례식의 기록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2011년 일본 왕실로부터 되찾아오기까지 민간단체의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환수운동에 관한 대국민 최종 보고서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의 탄생부터 4년간의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의 과정과 성과를 제1막과 제2막으로 나누어 펼쳐보이고 있다. 일제의 식민 통치로 일본 왕궁에 볼모처럼 잡혀 있던 조선 왕실 문서가 경술국치 100년을 지나면서 일본 총리의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의 의미를 담고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의미 있는 새로운 변화를 엿본다. &lt;br /&gt;
&lt;br /&gt;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 자료를 담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E%A5%EC%98%81%EC%8B%A4:_%EB%8F%85%EC%B0%BD%EC%A0%81%EC%9D%B8_%EB%AC%BC%EC%8B%9C%EA%B3%84%EB%A5%BC_%EB%A7%8C%EB%93%A4%EB%8B%A4&amp;diff=4133</id>
		<title>장영실: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들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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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6T14:55: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rom Slave to Prolific Scientific Inventor - Jang Yeong-sil&lt;br /&gt;
}}&lt;br /&gt;
=='''장영실: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들다'''==&lt;br /&gt;
===관노를 등용한 세종===&lt;br /&gt;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세종이 천문 기기를 만들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기후 상황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파종과 추수의 시기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이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과정에 적합한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시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해 그림자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해나 별을 볼 수 없는 흐린 날에는 시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과학으로 완성한 자격루와 옥루===&lt;br /&gt;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amp;lt;세종실록&amp;gt;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이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lt;br /&gt;
&lt;br /&gt;
1438년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독창적인 천상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기계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농사일에 따른 절기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옥루의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였다. &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문화유산채널 - 세계 최초의 우량계 측우기(문화재청)'''&amp;gt;https://www.youtube.com/watch?v=2yWAfEKUpmY&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조선 세종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구만옥,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들녘, 2016.&lt;br /&gt;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세종문화사대계 2:과학(한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lt;br /&gt;
&lt;br /&gt;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유교ㆍ주자학의 정치사상적 필요에 따라 추진된 과학정책이라는 한 측면과 집권체제의 사회경제적 요청에 따라 시행된 각종 과학기술정책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세종대의 과학기술정책 기조와 그 성과를 정리했다. 동아시아 세계질서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중심부-주변부 문제, 중화문명-조선문명의 상호관계 등을 염두에 두면서 당대의 사회적ㆍ지적ㆍ정치사상적 맥락에서 전통과학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그로써 세종대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해석하고자 했다.&lt;br /&gt;
󰡔세종문화사대계 2:과학(한글)󰡕은 그동안 한글의 창제와 그와 관련된 학문과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온 세종학 연구이다. 이 책은 세종 시대 과학 기술의 발전 상황을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세계 과학 기술의 역사에서 이슬람 과학과 서유럽 근대 과학 사이의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는 창조적 동아시아 과학의 업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1장에는 천문 기상학, 2장은 인쇄 출판, 3장은 의학, 4장은 농업 기술, 5장은 산업 기술, 6장은 지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2. 조선 세종대의 인재등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 2002.&lt;br /&gt;
&lt;br /&gt;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이 있었던 세종대왕에 대해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7장으로 세종대의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정초와 장영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3. 장영실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조선사역사연구소,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아토북, 2016.&lt;br /&gt;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타고난 천재이자 노력가인 장영실은 '노비'로 태어나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고 15세기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됐다.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는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공고해지는 격동의 시기, 신분의 벽을 극복하고 정3품관 상호군 관직에 이르기까지 짧고 강렬했던 삶을 살다간 장영실의 일대기를 다룬다. 더불어 21세기에 장영실의 면모와 업적을 살펴야 하는 까닭도 알아본다.&lt;br /&gt;
󰡔장영실과 자격루󰡕는 우리의 전통과학기술, 한국학, 시계공학, 천문과학, 자동화 기술, 발명과 이노베이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학생과 일반인에게 많은 흥미를 제공할 것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기술이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발전시켜 온 하나의 원동력으로 우리의 삶에 진하게 녹아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통과학기술문화야말로 21세기 문화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추진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9E%A5%EC%98%81%EC%8B%A4:_%EB%8F%85%EC%B0%BD%EC%A0%81%EC%9D%B8_%EB%AC%BC%EC%8B%9C%EA%B3%84%EB%A5%BC_%EB%A7%8C%EB%93%A4%EB%8B%A4&amp;diff=4132</id>
		<title>장영실: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들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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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6T14:55: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rom Slave to Prolific Scientific Inventor - Jang Yeong-sil&lt;br /&gt;
}}&lt;br /&gt;
=='''장영실: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들다'''==&lt;br /&gt;
===관노를 등용한 세종===&lt;br /&gt;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세종이 천문 기기를 만들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기후 상황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파종과 추수의 시기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이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과정에 적합한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시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해 그림자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해나 별을 볼 수 없는 흐린 날에는 시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과학으로 완성한 자격루와 옥루===&lt;br /&gt;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amp;lt;세종실록&amp;gt;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이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lt;br /&gt;
&lt;br /&gt;
1438년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독창적인 천상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기계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농사일에 따른 절기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옥루의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였다. &lt;br /&gt;
&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문화유산채널]세계 최초의 우량계 측우기(문화재청)'''&amp;gt;https://www.youtube.com/watch?v=2yWAfEKUpmY&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조선 세종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구만옥,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들녘, 2016.&lt;br /&gt;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세종문화사대계 2:과학(한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lt;br /&gt;
&lt;br /&gt;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유교ㆍ주자학의 정치사상적 필요에 따라 추진된 과학정책이라는 한 측면과 집권체제의 사회경제적 요청에 따라 시행된 각종 과학기술정책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세종대의 과학기술정책 기조와 그 성과를 정리했다. 동아시아 세계질서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중심부-주변부 문제, 중화문명-조선문명의 상호관계 등을 염두에 두면서 당대의 사회적ㆍ지적ㆍ정치사상적 맥락에서 전통과학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그로써 세종대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해석하고자 했다.&lt;br /&gt;
󰡔세종문화사대계 2:과학(한글)󰡕은 그동안 한글의 창제와 그와 관련된 학문과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온 세종학 연구이다. 이 책은 세종 시대 과학 기술의 발전 상황을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세계 과학 기술의 역사에서 이슬람 과학과 서유럽 근대 과학 사이의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는 창조적 동아시아 과학의 업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1장에는 천문 기상학, 2장은 인쇄 출판, 3장은 의학, 4장은 농업 기술, 5장은 산업 기술, 6장은 지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2. 조선 세종대의 인재등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 2002.&lt;br /&gt;
&lt;br /&gt;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이 있었던 세종대왕에 대해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7장으로 세종대의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정초와 장영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3. 장영실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조선사역사연구소,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아토북, 2016.&lt;br /&gt;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타고난 천재이자 노력가인 장영실은 '노비'로 태어나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고 15세기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됐다.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는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공고해지는 격동의 시기, 신분의 벽을 극복하고 정3품관 상호군 관직에 이르기까지 짧고 강렬했던 삶을 살다간 장영실의 일대기를 다룬다. 더불어 21세기에 장영실의 면모와 업적을 살펴야 하는 까닭도 알아본다.&lt;br /&gt;
󰡔장영실과 자격루󰡕는 우리의 전통과학기술, 한국학, 시계공학, 천문과학, 자동화 기술, 발명과 이노베이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학생과 일반인에게 많은 흥미를 제공할 것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기술이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발전시켜 온 하나의 원동력으로 우리의 삶에 진하게 녹아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통과학기술문화야말로 21세기 문화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추진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2000%EB%85%84_%EB%90%9C_%EB%AC%B8%ED%99%94%EC%99%80_%EC%A0%84%ED%86%B5%EC%9D%98_%EC%84%9C%EC%9A%B8,_%EB%AF%B8%EB%9E%98%EB%A1%9C_%ED%96%A5%ED%95%98%EB%8B%A4&amp;diff=4129</id>
		<title>2000년 된 문화와 전통의 서울, 미래로 향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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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6T14:47: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Seoul, the Heart of Asia - Past and Future&lt;br /&gt;
}}&lt;br /&gt;
=='''2000년 된 문화와 전통의 서울, 미래로 향하다'''==&lt;br /&gt;
===한국 역사의 중심 도시 서울===&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서기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후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전쟁터가 조용해진 것은 통일 신라 이후부터였다.&lt;br /&gt;
&lt;br /&gt;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건국 2년 뒤인 1394년 개경(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수도를 옮겼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 두 곳을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인데,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조상의 음덕으로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이곳에서 독창적인 제사방법과 제례음악 등으로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써 장엄하게 종묘대례를 거행한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계획도시로 만들고,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곽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근본 교리인 인의예지에서 한 글자씩 인용해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등으로 이름을 지었다.&lt;br /&gt;
&lt;br /&gt;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 어렵게 개조했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 &lt;br /&gt;
&lt;br /&gt;
지금은 사대문으로 궁궐과 종묘 사직을 품은 성곽길이 많은 사람들의 역사 탐방 산책로가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문화가 꽃피는 서울===&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된 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에 집약되었던 중심축 역할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확장되었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용산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또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박물관과 같은 구내에 있다. 현재 서울에는 여러 종류의 박물관 109곳이 있다.&lt;br /&gt;
&lt;br /&gt;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진 서울의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는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이태원, 삼성역과 강남역 부근 그리고 동대문 쇼핑몰을 들 수 있다. 이 부근에는 러시아인 거리, 중국인 거리, 몽골촌 등이 생겨날 정도로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lt;br /&gt;
&lt;br /&gt;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 전통음악과 난타 k-pop 등을 공연하는 한류 전용공연장은 대학로, 신촌, 홍대입구 등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충무 아트홀 등 공연장과 서울올림픽 경기장,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에서 열리는 대규모 한류공연에는 전 세계에서 팬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룬다. 유명한 한류스타들이나 그룹들의 공연은 표를 판매한 지 10분 만에 매진돼, 한국에서 표를 사는 것보다 외국에서 그 나라 팬들을 위해 할당된 표를 사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경제 활동의 심장부===&lt;br /&gt;
서울에는 또 KBS 등 각종 방송국과 조선일보 등 주요언론사들의 본사가 몰려있다. 방송국의 공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을 보기 위해 방청객들이 3~4일 전부터 방송국 앞에서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주요기업 본사가 다 몰려 있는 곳 역시 서울이다. 삼성전자, 현대 자동차, LG, 한화, 두산, 효성 등이 서울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서울은 또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무역진흥공사,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각종 경제단체가 몰려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국제회의와 전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지하철 삼성역 부근의 한국종합무역센터의 코엑스와 학여울역의 SETEC 등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코엑스에서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OECD 국제워크숍 등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으며 매년 주요전시회도 열린다. 코엑스 부근에 현대자동차 회사가 대규모 사옥을 건설하고, 한국 정부와 서울시가 교통과 무역 등을 총망라하는 대표지역으로 개발을 마치면 이곳은 서울의 새로운 심장부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lt;br /&gt;
&lt;br /&gt;
2017년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곧바로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이나믹한 도시 생활에 매료된다. 모든 상품을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배달제도는 인구 밀집도가 높았기에 가능했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범죄율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낮아 비교적 안전하게 살 수 있다.&lt;br /&gt;
&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과 2002년의 월드컵 개최로 서울은 세계 속의 서울로 거듭났다. 2002년 시작된 ‘거리응원’이라는 독특한 문화는 한류와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lt;br /&gt;
&lt;br /&gt;
미래학자들은 조만간 한반도가 통일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 후 서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로 및 철도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또 해양으로 뻗어나갈 인천과 평택 부산 등으로 고속철도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인프라를 기반으로 서울은 극동지역의 문화와 정치 경제의 중개역할을 조화롭게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3-27.대한민국박물관-ESC_8167.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7.강남_야경_Nightscape_of_Gangnam.jpg|서울 강남의 야경 / 사진제공(김미숙)-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7.강남거리_Gangnam_Station_Street.jpg|서울 강남 거리 / 사진제공(김학리)-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8.명동_Myeong-dong_Street.jpg|서울 명동 거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8.아파트촌_Complete_View_of_Seoul.jpg|서울의 아파트촌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파일:047(K).jpg|thumb|500px|center|서울 행정구역의 확장]]&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서울의 역사유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만나다』, 서울역사편찬원, 2017.&lt;br /&gt;
|참고문헌2=박경룡, 『역사문화의 도시, 서울』, 수서원, 2015.&lt;br /&gt;
|참고문헌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문화재』, 서울특별시, 2003.&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만나다』'''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 분포하고 있는 많은 유적지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의 면면들을 소개하고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조선시대 유적지가 대부분이지만, 제11장에서는 백제 왕도 유적, 제13장에서는 용산미군기지와 같이 고대와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유적지들이 소개되고 있고 제4장에서는 ‘종묘제의’와 같은 무형유산도 함께 소개되었다.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역사유적에 대한 상세한 사실과 내용을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역사문화의 도시 서울』'''은 서울을 공간으로 자리 잡은 여러 문화유적들을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의미들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문화 유적지 자체를 설명하기 보다는 해당 유적지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적지가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그 무대가 되는 서울의 역사 유적지를 소개하는 방식은 해당 유적에 대한 이해와 정보 습득을 더욱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몰입감을 더해 준다. 서울에 산재한 문화유적에 대한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을 원하는 독자에게 훌륭한 이야기 꺼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서울의 문화재』'''는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소재 문화유산 전체를 담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으로 제작한 책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직접 조사하고 정리해 출판한 만큼 소재 문화유적의 분포나 소개가 가장 잘 정돈되어 제시되고 있다고 평가할 만 하다. 특히 그 구성이 명료하고 돋보이는데, 제1장에서는 궁궐과 관아를, 제2장에서는 단과 묘, 사당을, 제3장에서는 성곽, 제4장에서는 주거와 누정을, 제5장에서는 선사유적을, 제6장에서는 능·원·묘를, 제7장에서는 유적지와 명승을, 제8장에서는 석물을, 제9장에서는 근대건축을 소개하였다. 서울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의 기본적인 정보를 쉽고 명료하게 확인하고자 할 때 가장 유용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시행된 세계적 행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정현철, 『송파에 담긴 88서울올림픽 20년 :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송파, 스물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서울동부신문, 2008. &lt;br /&gt;
|참고문헌2=이태영, 『올림픽을 말한다 : 서울올림픽20주년 칼럼집』, 서울특별시체육회, 2008. &lt;br /&gt;
|참고문헌3=안민석,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 한울, 2002. &lt;br /&gt;
}}&lt;br /&gt;
'''『송파에 담긴 88서울올림픽 20년 :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송파, 스물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는 서울올림픽 개최 20주년을 기념하여 이를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서울올림픽의 주무대가 되었던 송파구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억과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 독특하다. 이 책은 서울올림픽의 내용을 세밀하게 재구성하기 보다는 서울올림픽의 옛 기억을 발굴하고, 그 공간으로써 송파라는 지역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텔링을 전개하고 있어 올림픽과 지역사회의 두 가지 시선을 함께 만족시켜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올림픽을 말한다 : 서울올림픽20주년 칼럼집』'''은 역시 서울올림픽 개최 20주년을 기념하여 올림픽과 관련한 칼럼들을 모아 수록한 책이다. 단순히 올림픽에 대한 기억이나 정보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올림픽에 담긴 이슈들이나 저널리즘적 시선을 통해 평가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록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서울올림픽은 흔히 한민족이 세계에 국력을 뽐낸 최초의 국제 행사였으며, 이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려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이 책에서는 그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면이나 평가나 비판이 필요한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견해들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서울올림픽의 실과 허, 명과 암을 함께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은 2002년에 개최된 한일 월드컵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평한 책이다. 한일월드컵은 단순히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다시 한번 개최한 국제규모의 대형 축제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4강에까지 올라 깜짝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것은 비단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한국인 스스로도 매우 놀랍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으므로, 그 흥분과 열기가 집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이른바 광장응원을 낳으며, 매 경기마다 서울시청 앞에 수백만명이 모여 어우러지게 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하였다. 한일 월드컵이 야기한 사회적 충격과, 그것이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여러 결과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울의 개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권용석 외 공저, 『개발제한구역』, 커뮤니케이션스북스, 2017. &lt;br /&gt;
|참고문헌2=한종수,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lt;br /&gt;
|참고문헌3=조우현, 『한국의 주택정책 : 어제 그리고 오늘』, 지식공감, 2012. &lt;br /&gt;
}}&lt;br /&gt;
'''『개발제한구역』'''은 수도 서울의 과밀화와 무분별한 확장을 막기 위해 시행된 정책으로 한동안 서울의 번영과 발전을 상징하는 단어와 같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 책은 개발제한구역이라는 정책의 개념에서부터 그 유래와 변천과정, 그 내용과 특징, 그리고 개발제한구역의 해외 사례 등을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정책적 관리수단이나 지정 등 운용 방안에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지역의 발전 문제, 미래상과 같이 그 결과를 예상하고 기대할 만한 요소들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서울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고 밑거름을 그리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lt;br /&gt;
&lt;br /&gt;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는 70년대 서울의 주택문제 해소와 규모의 확대를 위해 추진된 강남 개발의 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현재 서울에서 부와 특권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강남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책은 강남의 개발이 착수되는 시점부터 2000년대 들어와 점차 첨단화 고도화 되고 있는 강남지역의 개발 성과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지난날의 그늘이 만들어 낸 결과임을 말하고자 하였다. 또 강남 개발에 준하여 서울 내 성공한 강남과 실패한 강남의 사례로 목동과 노원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이면의 의미까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단순한 서울의 주택정책과 개발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변혁의 성격으로까지 보아야 할 서울의 개발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주택정책 : 어제 그리고 오늘』'''은 한국의 주택정책의 시행 내용과 그 과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본격적인 이촌향도, 즉 도시로의 인구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으며, 주로 서울을 위시하여 1990년대 이후 수도권으로 확장하여 전개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신도시 정책 이전 주택정책의 초점은 수도 서울에 있었으며, 서울로 몰려든 도시 노동자 계층과 급증하는 유입인구의 주택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였는지 그 추이와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2000%EB%85%84_%EB%90%9C_%EB%AC%B8%ED%99%94%EC%99%80_%EC%A0%84%ED%86%B5%EC%9D%98_%EC%84%9C%EC%9A%B8,_%EB%AF%B8%EB%9E%98%EB%A1%9C_%ED%96%A5%ED%95%98%EB%8B%A4&amp;diff=4128</id>
		<title>2000년 된 문화와 전통의 서울, 미래로 향하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2000%EB%85%84_%EB%90%9C_%EB%AC%B8%ED%99%94%EC%99%80_%EC%A0%84%ED%86%B5%EC%9D%98_%EC%84%9C%EC%9A%B8,_%EB%AF%B8%EB%9E%98%EB%A1%9C_%ED%96%A5%ED%95%98%EB%8B%A4&amp;diff=4128"/>
				<updated>2017-12-26T14:45: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Seoul, the Heart of Asia - Past and Future&lt;br /&gt;
}}&lt;br /&gt;
=='''2000년 된 문화와 전통의 서울, 미래로 향하다'''==&lt;br /&gt;
===한국 역사의 중심 도시 서울===&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서기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후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전쟁터가 조용해진 것은 통일 신라 이후부터였다.&lt;br /&gt;
&lt;br /&gt;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건국 2년 뒤인 1394년 개경(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수도를 옮겼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 두 곳을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인데,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조상의 음덕으로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이곳에서 독창적인 제사방법과 제례음악 등으로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써 장엄하게 종묘대례를 거행한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계획도시로 만들고,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곽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근본 교리인 인의예지에서 한 글자씩 인용해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등으로 이름을 지었다.&lt;br /&gt;
&lt;br /&gt;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 어렵게 개조했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 &lt;br /&gt;
&lt;br /&gt;
지금은 사대문으로 궁궐과 종묘 사직을 품은 성곽길이 많은 사람들의 역사 탐방 산책로가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문화가 꽃피는 서울===&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된 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에 집약되었던 중심축 역할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확장되었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용산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또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박물관과 같은 구내에 있다. 현재 서울에는 여러 종류의 박물관 109곳이 있다.&lt;br /&gt;
&lt;br /&gt;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진 서울의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는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이태원, 삼성역과 강남역 부근 그리고 동대문 쇼핑몰을 들 수 있다. 이 부근에는 러시아인 거리, 중국인 거리, 몽골촌 등이 생겨날 정도로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lt;br /&gt;
&lt;br /&gt;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 전통음악과 난타 k-pop 등을 공연하는 한류 전용공연장은 대학로, 신촌, 홍대입구 등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충무 아트홀 등 공연장과 서울올림픽 경기장,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에서 열리는 대규모 한류공연에는 전 세계에서 팬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룬다. 유명한 한류스타들이나 그룹들의 공연은 표를 판매한 지 10분 만에 매진돼, 한국에서 표를 사는 것보다 외국에서 그 나라 팬들을 위해 할당된 표를 사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경제 활동의 심장부===&lt;br /&gt;
서울에는 또 KBS 등 각종 방송국과 조선일보 등 주요언론사들의 본사가 몰려있다. 방송국의 공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을 보기 위해 방청객들이 3~4일 전부터 방송국 앞에서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주요기업 본사가 다 몰려 있는 곳 역시 서울이다. 삼성전자, 현대 자동차, LG, 한화, 두산, 효성 등이 서울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서울은 또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무역진흥공사,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각종 경제단체가 몰려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국제회의와 전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지하철 삼성역 부근의 한국종합무역센터의 코엑스와 학여울역의 SETEC 등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코엑스에서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OECD 국제워크숍 등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으며 매년 주요전시회도 열린다. 코엑스 부근에 현대자동차 회사가 대규모 사옥을 건설하고, 한국 정부와 서울시가 교통과 무역 등을 총망라하는 대표지역으로 개발을 마치면 이곳은 서울의 새로운 심장부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lt;br /&gt;
&lt;br /&gt;
2017년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곧바로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이나믹한 도시 생활에 매료된다. 모든 상품을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배달제도는 인구 밀집도가 높았기에 가능했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범죄율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낮아 비교적 안전하게 살 수 있다.&lt;br /&gt;
&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과 2002년의 월드컵 개최로 서울은 세계 속의 서울로 거듭났다. 2002년 시작된 ‘거리응원’이라는 독특한 문화는 한류와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lt;br /&gt;
&lt;br /&gt;
미래학자들은 조만간 한반도가 통일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 후 서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로 및 철도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또 해양으로 뻗어나갈 인천과 평택 부산 등으로 고속철도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인프라를 기반으로 서울은 극동지역의 문화와 정치 경제의 중개역할을 조화롭게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3-27.대한민국박물관-ESC_8167.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7.강남_야경_Nightscape_of_Gangnam.jpg|서울 강남의 야경 / 사진제공(김미숙)-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7.강남거리_Gangnam_Station_Street.jpg|서울 강남 거리 / 사진제공(김학리)-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8.명동_Myeong-dong_Street.jpg|서울 명동 거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8.아파트촌_Complete_View_of_Seoul.jpg|서울의 아파트촌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파일:047(K).jpg|200px|thumb|center|서울 행정구역의 확장]]&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서울의 역사유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만나다』, 서울역사편찬원, 2017.&lt;br /&gt;
|참고문헌2=박경룡, 『역사문화의 도시, 서울』, 수서원, 2015.&lt;br /&gt;
|참고문헌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문화재』, 서울특별시, 2003.&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만나다』'''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 분포하고 있는 많은 유적지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의 면면들을 소개하고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조선시대 유적지가 대부분이지만, 제11장에서는 백제 왕도 유적, 제13장에서는 용산미군기지와 같이 고대와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유적지들이 소개되고 있고 제4장에서는 ‘종묘제의’와 같은 무형유산도 함께 소개되었다.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역사유적에 대한 상세한 사실과 내용을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역사문화의 도시 서울』'''은 서울을 공간으로 자리 잡은 여러 문화유적들을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의미들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문화 유적지 자체를 설명하기 보다는 해당 유적지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적지가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그 무대가 되는 서울의 역사 유적지를 소개하는 방식은 해당 유적에 대한 이해와 정보 습득을 더욱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몰입감을 더해 준다. 서울에 산재한 문화유적에 대한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을 원하는 독자에게 훌륭한 이야기 꺼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서울의 문화재』'''는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소재 문화유산 전체를 담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으로 제작한 책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직접 조사하고 정리해 출판한 만큼 소재 문화유적의 분포나 소개가 가장 잘 정돈되어 제시되고 있다고 평가할 만 하다. 특히 그 구성이 명료하고 돋보이는데, 제1장에서는 궁궐과 관아를, 제2장에서는 단과 묘, 사당을, 제3장에서는 성곽, 제4장에서는 주거와 누정을, 제5장에서는 선사유적을, 제6장에서는 능·원·묘를, 제7장에서는 유적지와 명승을, 제8장에서는 석물을, 제9장에서는 근대건축을 소개하였다. 서울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의 기본적인 정보를 쉽고 명료하게 확인하고자 할 때 가장 유용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시행된 세계적 행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정현철, 『송파에 담긴 88서울올림픽 20년 :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송파, 스물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서울동부신문, 2008. &lt;br /&gt;
|참고문헌2=이태영, 『올림픽을 말한다 : 서울올림픽20주년 칼럼집』, 서울특별시체육회, 2008. &lt;br /&gt;
|참고문헌3=안민석,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 한울, 2002. &lt;br /&gt;
}}&lt;br /&gt;
'''『송파에 담긴 88서울올림픽 20년 :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송파, 스물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는 서울올림픽 개최 20주년을 기념하여 이를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서울올림픽의 주무대가 되었던 송파구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억과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 독특하다. 이 책은 서울올림픽의 내용을 세밀하게 재구성하기 보다는 서울올림픽의 옛 기억을 발굴하고, 그 공간으로써 송파라는 지역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텔링을 전개하고 있어 올림픽과 지역사회의 두 가지 시선을 함께 만족시켜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올림픽을 말한다 : 서울올림픽20주년 칼럼집』'''은 역시 서울올림픽 개최 20주년을 기념하여 올림픽과 관련한 칼럼들을 모아 수록한 책이다. 단순히 올림픽에 대한 기억이나 정보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올림픽에 담긴 이슈들이나 저널리즘적 시선을 통해 평가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록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서울올림픽은 흔히 한민족이 세계에 국력을 뽐낸 최초의 국제 행사였으며, 이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려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이 책에서는 그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면이나 평가나 비판이 필요한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견해들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서울올림픽의 실과 허, 명과 암을 함께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은 2002년에 개최된 한일 월드컵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평한 책이다. 한일월드컵은 단순히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다시 한번 개최한 국제규모의 대형 축제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4강에까지 올라 깜짝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것은 비단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한국인 스스로도 매우 놀랍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으므로, 그 흥분과 열기가 집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이른바 광장응원을 낳으며, 매 경기마다 서울시청 앞에 수백만명이 모여 어우러지게 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하였다. 한일 월드컵이 야기한 사회적 충격과, 그것이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여러 결과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울의 개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권용석 외 공저, 『개발제한구역』, 커뮤니케이션스북스, 2017. &lt;br /&gt;
|참고문헌2=한종수,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lt;br /&gt;
|참고문헌3=조우현, 『한국의 주택정책 : 어제 그리고 오늘』, 지식공감, 2012. &lt;br /&gt;
}}&lt;br /&gt;
'''『개발제한구역』'''은 수도 서울의 과밀화와 무분별한 확장을 막기 위해 시행된 정책으로 한동안 서울의 번영과 발전을 상징하는 단어와 같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 책은 개발제한구역이라는 정책의 개념에서부터 그 유래와 변천과정, 그 내용과 특징, 그리고 개발제한구역의 해외 사례 등을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정책적 관리수단이나 지정 등 운용 방안에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지역의 발전 문제, 미래상과 같이 그 결과를 예상하고 기대할 만한 요소들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서울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고 밑거름을 그리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lt;br /&gt;
&lt;br /&gt;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는 70년대 서울의 주택문제 해소와 규모의 확대를 위해 추진된 강남 개발의 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현재 서울에서 부와 특권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강남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책은 강남의 개발이 착수되는 시점부터 2000년대 들어와 점차 첨단화 고도화 되고 있는 강남지역의 개발 성과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지난날의 그늘이 만들어 낸 결과임을 말하고자 하였다. 또 강남 개발에 준하여 서울 내 성공한 강남과 실패한 강남의 사례로 목동과 노원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이면의 의미까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단순한 서울의 주택정책과 개발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변혁의 성격으로까지 보아야 할 서울의 개발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주택정책 : 어제 그리고 오늘』'''은 한국의 주택정책의 시행 내용과 그 과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본격적인 이촌향도, 즉 도시로의 인구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으며, 주로 서울을 위시하여 1990년대 이후 수도권으로 확장하여 전개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신도시 정책 이전 주택정책의 초점은 수도 서울에 있었으며, 서울로 몰려든 도시 노동자 계층과 급증하는 유입인구의 주택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였는지 그 추이와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2000%EB%85%84_%EB%90%9C_%EB%AC%B8%ED%99%94%EC%99%80_%EC%A0%84%ED%86%B5%EC%9D%98_%EC%84%9C%EC%9A%B8,_%EB%AF%B8%EB%9E%98%EB%A1%9C_%ED%96%A5%ED%95%98%EB%8B%A4&amp;diff=4127</id>
		<title>2000년 된 문화와 전통의 서울, 미래로 향하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2000%EB%85%84_%EB%90%9C_%EB%AC%B8%ED%99%94%EC%99%80_%EC%A0%84%ED%86%B5%EC%9D%98_%EC%84%9C%EC%9A%B8,_%EB%AF%B8%EB%9E%98%EB%A1%9C_%ED%96%A5%ED%95%98%EB%8B%A4&amp;diff=4127"/>
				<updated>2017-12-26T14:44: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경제 활동의 심장부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Seoul, the Heart of Asia - Past and Future&lt;br /&gt;
}}&lt;br /&gt;
=='''2000년 된 문화와 전통의 서울, 미래로 향하다'''==&lt;br /&gt;
===한국 역사의 중심 도시 서울===&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서기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후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전쟁터가 조용해진 것은 통일 신라 이후부터였다.&lt;br /&gt;
&lt;br /&gt;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건국 2년 뒤인 1394년 개경(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수도를 옮겼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 두 곳을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인데,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조상의 음덕으로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이곳에서 독창적인 제사방법과 제례음악 등으로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써 장엄하게 종묘대례를 거행한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계획도시로 만들고,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곽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근본 교리인 인의예지에서 한 글자씩 인용해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등으로 이름을 지었다.&lt;br /&gt;
&lt;br /&gt;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 어렵게 개조했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 &lt;br /&gt;
&lt;br /&gt;
지금은 사대문으로 궁궐과 종묘 사직을 품은 성곽길이 많은 사람들의 역사 탐방 산책로가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문화가 꽃피는 서울===&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된 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에 집약되었던 중심축 역할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확장되었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용산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또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박물관과 같은 구내에 있다. 현재 서울에는 여러 종류의 박물관 109곳이 있다.&lt;br /&gt;
&lt;br /&gt;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진 서울의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는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이태원, 삼성역과 강남역 부근 그리고 동대문 쇼핑몰을 들 수 있다. 이 부근에는 러시아인 거리, 중국인 거리, 몽골촌 등이 생겨날 정도로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lt;br /&gt;
&lt;br /&gt;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 전통음악과 난타 k-pop 등을 공연하는 한류 전용공연장은 대학로, 신촌, 홍대입구 등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충무 아트홀 등 공연장과 서울올림픽 경기장,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에서 열리는 대규모 한류공연에는 전 세계에서 팬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룬다. 유명한 한류스타들이나 그룹들의 공연은 표를 판매한 지 10분 만에 매진돼, 한국에서 표를 사는 것보다 외국에서 그 나라 팬들을 위해 할당된 표를 사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경제 활동의 심장부===&lt;br /&gt;
서울에는 또 KBS 등 각종 방송국과 조선일보 등 주요언론사들의 본사가 몰려있다. 방송국의 공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을 보기 위해 방청객들이 3~4일 전부터 방송국 앞에서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주요기업 본사가 다 몰려 있는 곳 역시 서울이다. 삼성전자, 현대 자동차, LG, 한화, 두산, 효성 등이 서울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서울은 또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무역진흥공사,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각종 경제단체가 몰려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국제회의와 전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지하철 삼성역 부근의 한국종합무역센터의 코엑스와 학여울역의 SETEC 등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코엑스에서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OECD 국제워크숍 등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으며 매년 주요전시회도 열린다. 코엑스 부근에 현대자동차 회사가 대규모 사옥을 건설하고, 한국 정부와 서울시가 교통과 무역 등을 총망라하는 대표지역으로 개발을 마치면 이곳은 서울의 새로운 심장부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lt;br /&gt;
&lt;br /&gt;
2017년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곧바로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이나믹한 도시 생활에 매료된다. 모든 상품을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배달제도는 인구 밀집도가 높았기에 가능했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범죄율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낮아 비교적 안전하게 살 수 있다.&lt;br /&gt;
&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과 2002년의 월드컵 개최로 서울은 세계 속의 서울로 거듭났다. 2002년 시작된 ‘거리응원’이라는 독특한 문화는 한류와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lt;br /&gt;
&lt;br /&gt;
미래학자들은 조만간 한반도가 통일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 후 서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로 및 철도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또 해양으로 뻗어나갈 인천과 평택 부산 등으로 고속철도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인프라를 기반으로 서울은 극동지역의 문화와 정치 경제의 중개역할을 조화롭게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3-27.대한민국박물관-ESC_8167.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7.강남_야경_Nightscape_of_Gangnam.jpg|서울 강남의 야경 / 사진제공(김미숙)-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7.강남거리_Gangnam_Station_Street.jpg|서울 강남 거리 / 사진제공(김학리)-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8.명동_Myeong-dong_Street.jpg|서울 명동 거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8.아파트촌_Complete_View_of_Seoul.jpg|서울의 아파트촌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파일:047(K).jpg|100px|frame|center|서울 행정구역의 확장]]&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서울의 역사유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만나다』, 서울역사편찬원, 2017.&lt;br /&gt;
|참고문헌2=박경룡, 『역사문화의 도시, 서울』, 수서원, 2015.&lt;br /&gt;
|참고문헌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문화재』, 서울특별시, 2003.&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만나다』'''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 분포하고 있는 많은 유적지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의 면면들을 소개하고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조선시대 유적지가 대부분이지만, 제11장에서는 백제 왕도 유적, 제13장에서는 용산미군기지와 같이 고대와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유적지들이 소개되고 있고 제4장에서는 ‘종묘제의’와 같은 무형유산도 함께 소개되었다.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역사유적에 대한 상세한 사실과 내용을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역사문화의 도시 서울』'''은 서울을 공간으로 자리 잡은 여러 문화유적들을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의미들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문화 유적지 자체를 설명하기 보다는 해당 유적지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적지가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그 무대가 되는 서울의 역사 유적지를 소개하는 방식은 해당 유적에 대한 이해와 정보 습득을 더욱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몰입감을 더해 준다. 서울에 산재한 문화유적에 대한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을 원하는 독자에게 훌륭한 이야기 꺼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서울의 문화재』'''는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소재 문화유산 전체를 담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으로 제작한 책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직접 조사하고 정리해 출판한 만큼 소재 문화유적의 분포나 소개가 가장 잘 정돈되어 제시되고 있다고 평가할 만 하다. 특히 그 구성이 명료하고 돋보이는데, 제1장에서는 궁궐과 관아를, 제2장에서는 단과 묘, 사당을, 제3장에서는 성곽, 제4장에서는 주거와 누정을, 제5장에서는 선사유적을, 제6장에서는 능·원·묘를, 제7장에서는 유적지와 명승을, 제8장에서는 석물을, 제9장에서는 근대건축을 소개하였다. 서울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의 기본적인 정보를 쉽고 명료하게 확인하고자 할 때 가장 유용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시행된 세계적 행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정현철, 『송파에 담긴 88서울올림픽 20년 :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송파, 스물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서울동부신문, 2008. &lt;br /&gt;
|참고문헌2=이태영, 『올림픽을 말한다 : 서울올림픽20주년 칼럼집』, 서울특별시체육회, 2008. &lt;br /&gt;
|참고문헌3=안민석,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 한울, 2002. &lt;br /&gt;
}}&lt;br /&gt;
'''『송파에 담긴 88서울올림픽 20년 :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송파, 스물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는 서울올림픽 개최 20주년을 기념하여 이를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서울올림픽의 주무대가 되었던 송파구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억과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 독특하다. 이 책은 서울올림픽의 내용을 세밀하게 재구성하기 보다는 서울올림픽의 옛 기억을 발굴하고, 그 공간으로써 송파라는 지역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텔링을 전개하고 있어 올림픽과 지역사회의 두 가지 시선을 함께 만족시켜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올림픽을 말한다 : 서울올림픽20주년 칼럼집』'''은 역시 서울올림픽 개최 20주년을 기념하여 올림픽과 관련한 칼럼들을 모아 수록한 책이다. 단순히 올림픽에 대한 기억이나 정보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올림픽에 담긴 이슈들이나 저널리즘적 시선을 통해 평가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록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서울올림픽은 흔히 한민족이 세계에 국력을 뽐낸 최초의 국제 행사였으며, 이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려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이 책에서는 그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면이나 평가나 비판이 필요한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견해들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서울올림픽의 실과 허, 명과 암을 함께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은 2002년에 개최된 한일 월드컵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평한 책이다. 한일월드컵은 단순히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다시 한번 개최한 국제규모의 대형 축제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4강에까지 올라 깜짝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것은 비단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한국인 스스로도 매우 놀랍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으므로, 그 흥분과 열기가 집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이른바 광장응원을 낳으며, 매 경기마다 서울시청 앞에 수백만명이 모여 어우러지게 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하였다. 한일 월드컵이 야기한 사회적 충격과, 그것이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여러 결과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울의 개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권용석 외 공저, 『개발제한구역』, 커뮤니케이션스북스, 2017. &lt;br /&gt;
|참고문헌2=한종수,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lt;br /&gt;
|참고문헌3=조우현, 『한국의 주택정책 : 어제 그리고 오늘』, 지식공감, 2012. &lt;br /&gt;
}}&lt;br /&gt;
'''『개발제한구역』'''은 수도 서울의 과밀화와 무분별한 확장을 막기 위해 시행된 정책으로 한동안 서울의 번영과 발전을 상징하는 단어와 같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 책은 개발제한구역이라는 정책의 개념에서부터 그 유래와 변천과정, 그 내용과 특징, 그리고 개발제한구역의 해외 사례 등을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정책적 관리수단이나 지정 등 운용 방안에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지역의 발전 문제, 미래상과 같이 그 결과를 예상하고 기대할 만한 요소들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서울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고 밑거름을 그리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lt;br /&gt;
&lt;br /&gt;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는 70년대 서울의 주택문제 해소와 규모의 확대를 위해 추진된 강남 개발의 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현재 서울에서 부와 특권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강남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책은 강남의 개발이 착수되는 시점부터 2000년대 들어와 점차 첨단화 고도화 되고 있는 강남지역의 개발 성과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지난날의 그늘이 만들어 낸 결과임을 말하고자 하였다. 또 강남 개발에 준하여 서울 내 성공한 강남과 실패한 강남의 사례로 목동과 노원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이면의 의미까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단순한 서울의 주택정책과 개발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변혁의 성격으로까지 보아야 할 서울의 개발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주택정책 : 어제 그리고 오늘』'''은 한국의 주택정책의 시행 내용과 그 과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본격적인 이촌향도, 즉 도시로의 인구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으며, 주로 서울을 위시하여 1990년대 이후 수도권으로 확장하여 전개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신도시 정책 이전 주택정책의 초점은 수도 서울에 있었으며, 서울로 몰려든 도시 노동자 계층과 급증하는 유입인구의 주택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였는지 그 추이와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3%A0%EB%A0%B9%ED%99%94_%EC%82%AC%ED%9A%8C%EB%A1%9C_%EB%B3%80%EB%AA%A8%ED%95%98%EB%8A%94_%ED%95%9C%EA%B5%AD%EC%82%AC%ED%9A%8C&amp;diff=4125</id>
		<title>고령화 사회로 변모하는 한국사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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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6T14:38: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Low Birth Rates, an Aging Society, and Economic Stagnation&lt;br /&gt;
}}&lt;br /&gt;
=='''고령화 사회로 변모하는 한국사회'''==&lt;br /&gt;
&lt;br /&gt;
===출산율이 급감하고 있다===&lt;br /&gt;
1960년대 초까지 한국은 인구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정책목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시작하며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소라 여겼다. 교육, 주택, 도시기반 시설 확충 등에 투자하는 것을 비용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당시 정부는 “아들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이후에도 장기적인 인구 계획보다는 당장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산아제한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1980년 국가는 경제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정책적으로 산아 제한을 하지 않아도 출산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높은 교육열은 대졸자를 양산했고 비싼 등록금 때문에 그들은 사회에 나올 때부터 부채를 안고 있었다. 거기다 대학 졸업자가 선호하는 사무직의 고소득 일자리는 한정적이어서 취업 시장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소득 수준 향상 욕구와 현실 사이에서 3포(취업, 결혼, 출산 포기)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들어 1.25명 이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출산율 하락이 가속화된 것은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맞물려 있다. 성장률 둔화에 따른 기업의 투자 감소와 잦은 구조조정으로 고용의 질은 하락하고 취업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거기에 치솟는 주거비용과 높은 사교육비는 결혼과 출산을 막는 장애 요소가 되고 있다. 급기야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현재의 한국을 나타내는 자조적인 비유로 쓰이는 실정이다.&lt;br /&gt;
&lt;br /&gt;
===빠르게 늙어가는 한국===&lt;br /&gt;
인간의 수명 연장은 발전의 상징이었다. 한국도 선진 각국처럼 의학기술발달과 의료보험 혜택 증가, 위생시설 확장, 영양상태 증진 등에 투자를 확대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노령인구가 출산율 저하와는 역으로 급속하게 증가, 인구구성이 빠르게 고령사회로 접근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0년에 총인구의 7.2%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로 들어섰으며,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에,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노인 문제도 저출산 문제만큼이나 심각하다. 자살, 빈곤, 질병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그중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으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2007년 기준 10만 명당 64.9명)과 노인(65세 이상) 인구 13.8%도 우울한 지표다.&lt;br /&gt;
&lt;br /&gt;
영국의 BBC 방송은 2017년 2월 “2030년에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성도 80대 후반에 도달할 것으로 보여 한국의 노인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비도시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 18세 이하의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41.1%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84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경제성장 0%인 미래===&lt;br /&gt;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에 의하면 2045년 한국 가구의 71.3%가 2인 이하 가구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 36.3%인 1인 가구가  한국의 대표 가구형태가 될 것이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행복함보다는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는 미혼 가구가 늘어나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한국의 인구성장률은 1970년대만 해도 2.18%였던 것이 1980년대 말 1%로 급격하게 내려갔고, 2000년대에는 급기야 0.5%이하가 되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증가가 2040년에는 –0.32%, 2060년에는 –0.97%로 예상된다며 우려를 나타낸다.   저출산과 노령화가 종국에는 경제활동 인구 감축으로 이어져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고, 시장도 위축되면서 곧바로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지금처럼 출산률이 받쳐주지 못한 채 급속하게 인구가 고령화된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이 10년 후에는 0%대로 내려갈 수 있다고 예측했다.&amp;lt;ref&amp;gt;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인구고령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 2017.&amp;lt;/ref&amp;gt; 이런 추세라면 경제성장률은 2000~2015년 3.9%성장에서 2016~2025년에는 1.9%로 내려갈 전망이다. 2026~2035년에는 0.4%까지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36년에는 생산가능인구비중이 하락하고, 인구증가율 하락에 따른 효과까지 감안하면 성장률 0%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5%~11.7%까지였던 것과 비교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200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을 넘나들 만큼 성장했지만 근래 들어 성장률은 2%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부와 국민이 함께 해결할 문제===&lt;br /&gt;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발족했다.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예측하고 국민의 삶의 질 개선 및 지속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5개년 기본계획, 연도별 시행계획)의 수립과 평가를 심위하기 위해 2005년 6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으며 이에 따라 기구가 설립됐다.&lt;br /&gt;
&lt;br /&gt;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2012년에는 이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했다. 여기에는 출산분야, 고령사회분야, 경제분야 등 3개 분야에 걸쳐 인구경쟁력유지 분과, 일과 가정양립지원 분과, 모자보건증진 분과 등 모두 10개의 분과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2020년까지 합계출산율을 현재 1.19명에서 1.4명으로 올리기 위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을 마련, 시행중이다.&lt;br /&gt;
&lt;br /&gt;
또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 노인 빈곤 문제를 위해서 정부와 기업이 연계하여 노인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들도 장단기 고령화 및 고령사회 마스터플랜, 고령사회조례 등을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은행은 OECD 회원국의 사례를 분석한 ‘고령화의 원인과 특징’ 보고서에서 저출산을 원인으로 보고 그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2~2012년 32개 회원국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고, 남녀 간 임금격차가 작을수록 출산율이 높았다. 양육수당 등 가족복지 뿐만 아니라 공적연금으로 은퇴 후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도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고, 주택가격상승률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lt;br /&gt;
&lt;br /&gt;
이 자료에 따르면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1%p 늘면 출산율은 0.31%p 증가했다. 남녀임금격차가 1%p 감소하면 출산율은 0.05%p 늘었다. 복지 지출도 출산율을 높이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보육수당, 출산·휴직 급여, 출산지원금 등이 1%p 높을수록 출산율도 0.05%p 늘었다. 공적연금 지출이 1%p 늘면 출산율이 0.02%p 높아졌다. &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이 문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하며 국민들도 이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외의 저출산 대책과 정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NHK스페셜 ‘지금부터 우리는’ 취재반, 『저출산 무엇이 문제인가』, 지식과 감성, 2017. &lt;br /&gt;
|참고문헌2=김범수 외 공저, 『경제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 고려대학교출판부, 2017. &lt;br /&gt;
|참고문헌3=김양희, 『주요국의 저출산ㆍ고령화 대비 성장전략 연구와 정책시사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0.&lt;br /&gt;
}}&lt;br /&gt;
'''『저출산 무엇이 문제인가』'''는 저출산 문제는 우리나라도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보다 먼저 저출산을 경험한 일본의 대책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체 그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한 ‘재원’은 어디에서 조달했는가? 어떻게 ‘합의’를 이끌어 냈는가?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6년 제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부터 올해까지 80조 원 이상 투입했지만, 성과는 제한적이다. 게다가 갈수록 혼인율과 출산율이 하락하고 있다. 통계청은 지난해 혼인율이 인구 1천 명당 5.9명으로 2011년 이후 매년 하락세라고 발표했다.지난해 10월 출생아 수는 3만 1천600명으로 전년 대비 13.9%나 감소하여 200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오는 2030~2040년 생산가능인구가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하고 있다. 일본도 고령화와 저출산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NHK는 그 배경과 지금까지의 정책 및 대응과정을 짚어보며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분석하고 구체적인 처방책을 제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경제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이 책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을 분석하고, 인구변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과 저출산·저성장 경제에서 재정지속가능성을 평가한다. 제1부에서는 OECD 18개국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미래 GDP 성장에 미치는 결과를 예측(projection)하고, 노동공급, 소비, 저축, 투자의 변화를 분석한다. 그리고 저출산·저성장 경제는 국가채무 비율이 하락하여 정부의 상환능력이 떨어지므로, 이에 대한 개선방안으로 소비세율을 인상하는 정책을 모의실험을 통해 최적 소비와 저축, 노동 공급을 측정하고, 세대별 생애순 부담을 측정하였다. 제2부에서는 저출산·고령화 과제의 하부주제들을 다루었다. 고령화와 국민 의료비, 주택연금 수요 예측, 교통부분 불평등, 고령사회의 노인 돌봄에 대한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저출산 및 인구고령화에 대비한 중·장기 정책추진 방향의 5개년 계획에 따라 주요 정책과제를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주요국의 저출산ㆍ고령화 대비 성장전략 연구와 정책시사점』'''은 해외의 저출산과 고령화에 대비한 성장 전략을 정리한 것으로 한국보다 일찍 저출산과 고령화 단계에 진입한 서구 선진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고민의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일본의 사례 속에 그 실태와 전망을 살펴보고, 그에 따른 각국의 가족, 재정, 노동, 이민정책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각 나라에서 나타난 성과와 결과들을 도출해 낼 수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나라의 저출산ㆍ고령화 문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노인복지 선진국의 정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양석원, 『G-7 국가의 노인복지정책』, 한국학술정보, 2012. &lt;br /&gt;
}}&lt;br /&gt;
'''『G-7 국가의 노인복지정책』'''은 서방 선진국가 7개국의 노인복지정책을 살펴보고 그 내용을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노인복지에는 건강과 요양뿐만 아니라 고용과 기타 다양한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매우 복잡한 설계와 구조 속에서 작동되고 있다. 따라서 이미 노인복지의 여러 경험과 사례를 축적하고 있는 서방 선진국가들의 복지정책과 그 내용을 비교 검토해 봄으로써 한국 사회의 노인문제에 대한 이해와 그 대안의 모색에 많은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미래 성장산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차두원, 『4차 산업혁명과 빅뱅 파괴의 시대 : 15인의 전문가가 말하는 미래 한국의 성장 조건』, 한스미디어, 2017. &lt;br /&gt;
}}&lt;br /&gt;
'''『4차 산업혁명과 빅뱅 파괴의 시대 : 15인의 전문가가 말하는 미래 한국의 성장 조건』'''은 새로운 산업의 틀로 재편되어 가는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맞추어 미래 한국의 성장 동력과 산업의 창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15명의 공저자의 견해로 구성된 이 책은 모두 빠르게 변모해가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양상을 산업에 적용하는 문제가 미래 한국의 성장을 위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입을 모으고 있다. 다양한 전문용어와 새로운 분야와 개념에 대한 소개가 이해되기 쉽지 않겠지만, 전반적인 미래상과 산업전반의 재편을 이해하고 그려내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4122</id>
		<title>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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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6T14:31: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다문화 가정을 위한 활발한 정책 시행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South Korea’s Burgeoning Multi-cultural Families&lt;br /&gt;
}}&lt;br /&gt;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lt;br /&gt;
===빠르게 증가하는 체류 외국인 수===&lt;br /&gt;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 명(전체 인구의 4.0%)을 넘어섰다. 2007년의 100만 명(인구 대비 2.2%)을 넘어선 지 9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중국인이 1,016,607명(49.6%)으로 가장 많고, 베트남 149,384명(7.3%), 미국 140,222명(6.8%), 태국 100.860명(4.9%), 필리핀 56,980명(2.8%), 우즈베키스탄 54,490명(2.7%) 순이다.&lt;br /&gt;
&lt;br /&gt;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는 2013년 이후 매년 0.2%p~0.4%p씩 증가하였다. 전체 인구에 대한 외국인 체류자의 수가 1%p 증가하는 데 4년 정도 걸려, 이 같은 증가 추세라면 늦어도 2024년이면 체류 외국인이 인구의 10%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정부도 단순히 그들의 국내 정착을 돕는 데서 나아가 그들이 본격적인 역량을 발휘하도록 방향을 바꾸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및 사회 각 층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다문화 가정을 위한 활발한 정책 시행===&lt;br /&gt;
최근 결혼 이민자의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결혼 이민자의 수는 2011년 144,681명이던 것이 2015년에는 151,608명으로 매년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 이들 중 84.6%가 여성으로, 한국 남성들이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인 것이다. 한국 여성이 외국인 남성을 신랑으로 맞아들인 것은 15.4%로 남성에 비해 월등하게 적다. 이들로 구성된 다문화&amp;lt;ref&amp;gt;김문희 문영숙 김병희, 「텔레비전 광고 콘텐츠에 묘사된 외국인 모델의 특성 분석」, 『광고학연구』 Vol.23 No.8, 한국광고학회, 2012, 9쪽.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사용되었지만, 지난 2005년 정부 차원에서 급증하는 이주노동자 대책을 모색하면서 급부상되었다.&amp;lt;/ref&amp;gt;  가구가 전체 가구의 1.5%인 299,241가구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들 가구와 가족 구성원수가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늘었다. 대표적인 문제가 가족 간에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원활하게 소통되지 않는 점이다. 이에 따라 태어난 아이들의 교육과 사회적응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8년부터 다문화가정 기본계획을 수립, 시행해오고 있으며 2017년에는 다문화 가족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주무부서인 여성가족부는 ‘다재다능 프로그램’ 운영기관을 105개로 늘렸다. 총 1,506억 원의 예산을 들여 가족관계 개선, 정체성 형성, 사회성 발달, 미래설계 등을 지원하고, 이중 언어 가족 환경 조성사업 등을 도울 계획이다.&lt;br /&gt;
&lt;br /&gt;
또 결혼이민자의 안정적인 가족생활과 사회경제적 진출 확대를 위해, 한국생활 정보를 담은 휴대용 안내서를 배포하고, ‘다누리 포털’(www.liveinkorea.kr)을 확장하였다.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하여 취업 지원을 강화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인력을 대폭 늘리고 있다. 결혼이민자의 국내 거주기간이 장기화됨에 따라 ‘결혼이민자 정착단계별 지원 패키지 프로그램’을 100개 이상으로 확대하는 중이다.&lt;br /&gt;
&lt;br /&gt;
다문화교육을 위한 ‘다누리배움터’(www.danurischool.kr)에 유아용 콘텐츠를 개발하여, 다문화 아동들의 다문화교육, 다문화교육자료, 온라인학습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 caption='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amp;gt;&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0.jpg&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7.jpg&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8.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다===&lt;br /&gt;
각 방송과 기업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KBS, MBC, EBS 등 각 방송사는 한류 드라마에 다문화를 포함하고, 때로는 그들을 주연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또 삼성, 현대, LG U+, 하나금융그룹 등은 공익광고를 통해서 다문화의 유리함과 우수성을 지원하자고 광고한다. 한 기업광고에서는 놀이터에서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의 모습과 함께 “베트남 엄마를 두었지만 당신처럼 이 아이는 한국인입니다”라는 카피가 흘러나오며, 아이가 밥을 먹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독도를 우리 땅이라 생각합니다. 축구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외칩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군대에 갈 것이고,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할 것입니다. 당신처럼!”&amp;lt;ref&amp;gt;하나금융그룹 공익광고.&amp;lt;/ref&amp;gt;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다문화 가정을 다르게 보지 말고 지원하자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온 유학생도 10만 명에 가깝다. 2015년 한 해에만 세계 160개국 이상에서  91,332명이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다. 특히 기술 분야와 한국어, 한국 역사, 한류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중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인력이 부족하자 정부는 1991년부터 산업연수생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들이도록 제도화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연수시키는 동시에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lt;br /&gt;
 &lt;br /&gt;
===다양하고 국제적인 사회로...===&lt;br /&gt;
한국이 이처럼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가 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20세기만 해도 그들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말을 순수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썼고, 때로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외국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외국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네덜란드 영국 등에 산재해 있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에 등장하는 남자도 외국인이며, 고려 시대 ‘쌍화점’에는 아예 색목인으로 못 박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급증한 시기는 한국 경제가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 시기와 맞물린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쫓겨 나가 살던 동포들이 돌아왔고, 그 나라 사람들이 함께 묻어 왔다. 산업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한국에 정착했고, 국적까지 취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외국에서 온 이주 근로자들은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하듯 한국인들이 꺼리던 육체노동 분야로 파고들었고, 지금은 그 분야의 대세를 이루었다. &lt;br /&gt;
&lt;br /&gt;
한국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를 포함한 국가가 될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향후 한국 사회는 보다 더 다양하고 국제적인 사회로 나가는 장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과 해외의 다문화 정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경혜영, 『다문화정책의 이해』, 한결, 2015.&lt;br /&gt;
|참고문헌2=최진숙, 『EU의 다문화사회정책』, 영한, 2012. &lt;br /&gt;
|참고문헌3=충북개발연구원, 『충북 다문화 정책 발전 방안 연구 : 한·미·일 지방정부의 다문화 정책 비교』, 충북개발연구원 인적자원개발지원센터, 2010.&lt;br /&gt;
}}&lt;br /&gt;
'''『다문화정책의 이해』'''는 조선후기 조선으로 유입된 외부인으로써 향화인과 황조인, 표류인들에 대한 처우와 정책들을 살피면서 17세기 조선의 다문화 가정의 실태와 내용들을 추출해 규명하고자 한 책이다. 다문화 현상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이질적인 외부집단의 유입과 그에 대한 갈등과 혼란의 양상으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으며, 이는 종종 한국의 단일민족 신드롬의 결과인 것으로 설명되곤 하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대외적 교류와 교섭이 극히 드물었던 조선후기 사회의 사례를 살핌으로써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다문화의 고민과 그 해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EU의 다문화사회정책』'''은 일찍부터 이민과 이주를 통해 다문화사회에 진입한 유럽연합에서 추진했던, 혹은 추진 중인 다문화 정책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우선 이민자의 유입국과 유출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비용을 분석하여 그 의미를 도출해내는 한편, 불법이민이 가지고 올 사회적 비용과 편익은 또 어떠한지도 함께 살피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다문화의 문제에는 일방적인 편익만 고려할 뿐 그 기회비용과 사회적 비용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이 많다. 따라서 이 책은 그와 같은 인식과 시각에 일정한 기준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겠다. 또 프랑스와 영국 등 다양한 유럽 국가들의 실제 이민자 유입의 경험과 다문화사회로써의 여러 문제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충북 다문화 정책 발전 방안 연구 : 한·미·일 지방정부의 다문화 정책 비교』'''는 충북지역에 초점을 맞춰 다문화의 정책발전을 모색하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의 지방정부의 사례를 함께 비교함으로써 결과를 도출해 내고자 한 책이다. 지방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연구발표회의 자료집이지만, 실질적인 다문화의 현황과 정책문제 등이 다뤄지고 있어 다문화의 실체를 이해하고 접근하는데 유용하다. 특히 다문화 문제는 도시 노동력의 차원에서도 발생하지만, 농촌지역에서 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유입을 통해서도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농촌지역의 다문화 문제는 출산을 통해 향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고정되어 정착할 존재들이란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따라서 농촌지역 다문화의 현실을 지방정부의 관점과 문제의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주 여성의 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참고문헌1=정천석, 『국제결혼 이주여성, 한국사회에 적응하는가』, 한국학술정보, 2009.&lt;br /&gt;
|참고문헌2=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 여이연, 2009.&lt;br /&gt;
|참고문헌3=이선주 외 공저, 『세계화와 아시아에서의 여성 이주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2005. &lt;br /&gt;
}}&lt;br /&gt;
'''『국제결혼 이주여성, 한국사회에 적응하는가』'''는 한국으로 국제결혼을 통해 이주해온 여성들의 실태와 현황을 중심으로 집대성하여 정리한 책이다. 한국으로의 외국인 유입은 주로 노동인력의 유입과 동시에 결혼을 매개로 한 이주가 큰 줄기를 이룬다. 그 가운데 결혼 이주 외국인 여성은 2세를 출산하여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전제로 오는 만큼 그 영향과 의미는 더욱 크다. 이에 저자는 관련 현황과 데이터를 망라하여 그 정착과 적응의 여부를 분석해 내고, 다양한 모델과 표본을 추출해 제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은 이탈리아 로마와 미국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한 필리핀 여성 이주자의 삶과 현황 등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필리핀에서 로마와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해 가는 여성들은 대부분 가사노동자로 이주해 가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현실은 노동인권과 여성인권의 문제를 함께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상황임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이동은 결국 세계화의 범주 속에서 형성된 계급이동과 국제적 분업의 성격도 가지고 있으므로, 단순히 내셔널리즘의 관점으로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는 입장도 제시하고 있다. 필리핀 이주여성들의 현실은 흡사 과거의 하인들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개선은 시급한 실정이며, 그 바람직한 개선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놓인 현실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와 움직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세계화와 아시아에서의 여성 이주에 관한 연구』'''는 이주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 그 시야를 아시아로 넓혀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주여성 문제는 단순한 다문화의 의미를 넘어 이민자와 젠더의 복합적인 문제로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신매매의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의 여성 이주는 여성의 인권의 차원으로도 접근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현황과 실정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여성 이주 문제를 해결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협력과 협약의 틀 속에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한 국내 강력한 정책의 마련과 추진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다문화의 대상이 아닌 인권의 문제 차원에서 여성 이주의 문제를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외국인 혐오문제(포비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정은, 『다문화 사회와 철학 : 한국사회의 다문화시대를 위한 철학적 성찰』, 자유문고, 2017. &lt;br /&gt;
|참고문헌2=이소희 외 공저, 『다문화사회, 이주와 트랜스내셔널리즘』, 보고사, 2012. &lt;br /&gt;
|참고문헌3=빌 플레처 주니어 외 공저, 『정체성 싸움 : 서구의 인종주의』, 미세기, 2004.&lt;br /&gt;
}}&lt;br /&gt;
'''『다문화 사회와 철학』'''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이슈가 되고 있는 다문화 분위기 속 갈등과 혐오의 문제를 주제로 이에 대한 철학적 모색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사회를 위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이것이 소수 집단에 대한 다수의 시선과 권력의 행사에 관한 문제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는 다양성, 문화의 상대성과 등가치성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에 필요한 여러 철학적 이론과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분석해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다문화 관련 이해와 인식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다문화 사회, 이주와 트랜스내셔널리즘』'''은 다문화 사회에서 이주민의 정체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먼저 세계화의 흐름 속에 초국적의 사회가 마련되었음을 확인하면서 그에 걸맞는 초국적의 정체성이 발현되어야 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다문화 사회의 출현은 귀환하는 입양인, 결혼을 통한 이주여성, 노동 시장으로 유입된 경우 등 다양하지만, 그것이 마주하는 현실과 문제는 모두 동일하며, 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방법의 모색과 노력 역시 동일함을 확인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이 어색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국민정체성의 실체를 분석하는 한편, 다문화 교육의 방향과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 특히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의 교육의 중요함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그것과 함께 그들의 정착에 식생활 적응이 매우 중요함을 이야기 하면서 과거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의 사례와 기억들을 함께 제시하면서 현재 한국사회가 처한 다문화의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체성 싸움 : 서구의 인종주의』'''는 서구 유럽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의 실체와 그 원인들을 분석하고 실제 사례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에서는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인종문제와 이를 이용하는 정치현실을 지적하고 있고, 제2장에서는 북미지역에서 발생한 반세계화운동이 인종주의와 어떻게 구별되고 있는지도 살폈다. 제3장에서는 인종주의에 대응하는 각국의 노동당의 활동과 의미를 제시하는 한편, 제4장에서는 서유럽의 외국인 혐오의 실체를 정밀하게 분석하고자 하였다. 제5장은 비극적인 인종주의 전쟁으로 이어져 버린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소개하였고, 제6장은 과학의 발전과 인종의 상관 관계를 게놈 프로젝트와 함께 설명하고자 하였다. 실제적으로 이미 인종주의와 혐오(포비아)를 겪고 있는 서구의 사례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의 사례를 비교 검토하기에 적절하다.  &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4%B8%EA%B3%84%EB%AC%B8%ED%99%94%EC%9C%A0%EC%82%B0%EC%9C%BC%EB%A1%9C%EC%84%9C%EC%9D%98_%EC%A1%B0%EC%84%A0_%EC%99%95%EB%A6%89&amp;diff=4117</id>
		<title>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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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lt;br /&gt;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파일:045(K).jpg|150px|frame|center]]&lt;br /&gt;
===백 리 안의 명당에 자리한 왕릉===&lt;br /&gt;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lt;br /&gt;
&lt;br /&gt;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lt;br /&gt;
  &lt;br /&gt;
===신성하면서 예술적인 조형 공간===&lt;br /&gt;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lt;br /&gt;
&lt;br /&gt;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lt;br /&gt;
&lt;br /&gt;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를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검은 박석이 아름답게 놓인 길을 걸어 이르는 정자각은 절제된 건축 형태로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의 특징 중 눈에 띠는 것은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를 모은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lt;br /&gt;
  &lt;br /&gt;
===기록과 제례로 계승되는 문화유산===&lt;br /&gt;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적은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과 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3-20.건원릉(동구릉)-0138.jpg|동구릉 건원릉(경기 구리시)&lt;br /&gt;
파일:3-20.경릉-동구릉.jpg|동구릉 경릉(경기 구리시)&lt;br /&gt;
파일:3-20.광릉-석상.jpg|광릉 석상(경기 남양주시)&lt;br /&gt;
파일:3-20.목릉(동구릉)-_0113.jpg|동구릉 목릉(경기 구리시)&lt;br /&gt;
파일:3-20.선릉(선정릉(성종)-0049.jpg|선정릉 선릉(서울 강남구)&lt;br /&gt;
파일:3-20.수릉(동구릉)-DSC_0323.jpg|동구릉 수릉(경기 구리시)&lt;br /&gt;
파일:3-20.융릉-석상.jpg|융건릉 융릉(경기 화성시)&lt;br /&gt;
파일:3-20.의릉_0117.JPG|의릉(서울 성북구)&lt;br /&gt;
파일:3-20.창릉-서오릉.jpg|서오릉 창릉(경기 고양시)&lt;br /&gt;
파일:3-20.파주장릉-_GSC8668.jpg|파주 장릉(경기 파주시)&lt;br /&gt;
파일:3-20.파주장릉-1788.jpg|파주 장릉 제향(경기 파주시)&lt;br /&gt;
파일:3-20.헌릉1.jpg|헌인릉 헌릉(서울 서초구)&lt;br /&gt;
파일:3-20.현릉-동구릉.jpg|동구릉 현릉(경기 구리시)&lt;br /&gt;
파일:3-20.혜릉-석상.jpg|동구릉 혜릉 석상(경기 구리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왕릉 조성과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신병주, 『조선왕실의 왕릉 조성』, 세창출판사, 2017.&lt;br /&gt;
|참고문헌2=최낙기, 『왕릉 풍수 이야기』, 한국학술정보, 2014.&lt;br /&gt;
|참고문헌3=황인혁, 『조선 왕릉 산도』, 시간의물레, 2017.&lt;br /&gt;
|참고문헌4=김광호, 『잃어버린 왕조를 품다 조선 왕릉』, 혜성출판사, 2016.&lt;br /&gt;
}}&lt;br /&gt;
'''『조선왕실의 왕릉 조성』'''은 왕릉 조성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을 정리해 왕릉에 얽힌 정치사, 문화사를 풍부하게 전달하는 책이다. 단순히 왕의 무덤이라는 측면 이외에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왕릉에 얽힌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왕릉 풍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삼은 책이다. 조선의 왕족, 조선왕릉의 조성양식, 조선시대 주요사건을 먼저 살펴본 뒤 본격적인 왕릉 풍수를 풀어냈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산도를 산도·태실산도·산형도·형세도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지칭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산도는 왕과 왕비의 능을 대상으로 하는 왕릉산도와 왕의 태를 대상으로 하는 태실산도 그리고 왕실구성원 본 책에서 왕실구성원이란 전주이씨 시조인 사공공 이한(李翰)과 추존 4왕인 목조·익조·도조·환조, 그리고 태조 이성계에서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까지의 왕과 왕비를 의미하며, 이들의 직계자손까지를 포함한다. '''『조선 왕릉 산도』'''에서는 왕실산도를 왕실구성원의 능원묘(陵園墓)에 대한 산도와 태실산도 그리고 『선원보감』에 수록된 산도를 포함하여 지칭하였다. 이 책에서는 『선원보감』 산도를 체계적으로 비교·분석을 하였다.&lt;br /&gt;
&lt;br /&gt;
'''『잃어버린 왕조를 품다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독특 한 한국인의 장묘 문화가 유교와 토착신앙이 어우러진 것으로 연중 치러지는 제례 의식 또한 역사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조선왕릉 전부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잘 활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석물 등의 공간 배치는 빼어난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독특한 분묘의 형태는 사후 도굴을 의식해서인지 깊이 묻혀 진 시신 위로 매우 두꺼운 화강암이 가로막아 중국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매우 견고하다. 이것이 온전한 왕릉을 보존케 한 비법이고 조상의 지혜인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왕릉의 제도 및 석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은광준,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 민속원, 2010.&lt;br /&gt;
|참고문헌2=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 신구문화사, 2013.&lt;br /&gt;
}}&lt;br /&gt;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에서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 그리고 북한에 있는 제릉, 후릉과 희릉지, 유릉지, 희릉 및 연산묘, 광해묘와 추존왕릉 5기 등 왕릉 석상의 복식을 총망라하고 있다. 특히 각 석상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한 세밀화와 저자의 30여 년 연구를 상세하게 소개한다.&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제도 연구』'''는 조선왕릉제도 전반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경주의 신라왕릉, 공주·부여의 백제왕릉,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물론 여러 곳에 산재한 조선왕릉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하면서 각 시대마다 왕릉제도가 계승되고 변화·발전해 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치밀하게 검토하고 최근에 소개된 북한 소재 왕릉의 사진자료를 통해 고려왕릉제도를 정리하여 공민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 계승·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규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왕릉과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창환,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한숲, 2014.&lt;br /&gt;
}}&lt;br /&gt;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은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능역이 갖는 공간적 특성과 각종 건조물과 석물 등을 생생한 현장사진과 함께 순례형식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능원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통공간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축적한 연구 결과와 등재 과정에서 얻은 내용을 정리해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27대에 걸친 조선의 왕과 왕비에 대한 탄생과 왕실생활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 등에 대하여 고증을 통해 서술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4</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4"/>
				<updated>2017-12-26T12:01: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관련항목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파일:046(K).jpg|center|150px|frame]]&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조선 세조|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조선 고종|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고종|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선 고종|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경복궁&amp;gt;&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3-18.경복궁_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lt;br /&gt;
파일:3-18.경복궁_근정전_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 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0.사정전_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 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_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 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lt;br /&gt;
파일:3-18.경복궁_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조선 태종|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조선 순종|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에서 살았고 [[조선 순종|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조선 순종|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창덕궁 후원|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창덕궁&amp;gt;&lt;br /&gt;
파일:1-10.궁궐_인정전_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창덕궁_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lt;br /&gt;
파일:3-18.창덕궁_돈화문_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lt;br /&gt;
파일:3-18.창덕궁_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lt;br /&gt;
파일:3-18.창덕궁_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 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조선 선조|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 광해군|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조선 고종|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조선 고종|고종]]은 [[환구단|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조선 고종|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 고종|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조약|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조선 순종|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 순종|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덕수궁&amp;gt;&lt;br /&gt;
파일:1-11.중화전_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덕수궁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조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인조|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조선 인조|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대한제국]]&lt;br /&gt;
*[[경복궁]]&lt;br /&gt;
*[[경복궁 근정전]]&lt;br /&gt;
*[[창덕궁]]&lt;br /&gt;
*[[창덕궁 낙선재]]&lt;br /&gt;
*[[창덕궁 후원]]&lt;br /&gt;
*[[창경궁]]&lt;br /&gt;
*[[덕수궁]]&lt;br /&gt;
*[[덕수궁 중명전]]&lt;br /&gt;
*[[경희궁]]&lt;br /&gt;
*[[종묘]]&lt;br /&gt;
*[[사직]]&lt;br /&gt;
*[[문묘]]&lt;br /&gt;
*[[성균관]]&lt;br /&gt;
*[[조선 태조]]&lt;br /&gt;
*[[조선 태종]]&lt;br /&gt;
*[[조선 세조]]&lt;br /&gt;
*[[조선 고종]]&lt;br /&gt;
*[[조선 순종]]&lt;br /&gt;
*[[흥선대원군]]&lt;br /&gt;
*[[덕혜옹주]]&lt;br /&gt;
*[[임진왜란]]&lt;br /&gt;
*[[을미사변]]&lt;br /&gt;
*[[아관파천]]&lt;br /&gt;
*[[을사조약]]&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참고문헌2=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3=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4=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5=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참고문헌6=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참고문헌7=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2=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3=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참고문헌4=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3</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3"/>
				<updated>2017-12-26T12:01: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파일:046(K).jpg|center|150px|frame]]&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조선 세조|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조선 고종|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고종|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선 고종|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경복궁&amp;gt;&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3-18.경복궁_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lt;br /&gt;
파일:3-18.경복궁_근정전_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 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0.사정전_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 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_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 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lt;br /&gt;
파일:3-18.경복궁_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조선 태종|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조선 순종|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에서 살았고 [[조선 순종|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조선 순종|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창덕궁 후원|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창덕궁&amp;gt;&lt;br /&gt;
파일:1-10.궁궐_인정전_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창덕궁_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lt;br /&gt;
파일:3-18.창덕궁_돈화문_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lt;br /&gt;
파일:3-18.창덕궁_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lt;br /&gt;
파일:3-18.창덕궁_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 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조선 선조|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 광해군|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조선 고종|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조선 고종|고종]]은 [[환구단|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조선 고종|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 고종|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조약|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조선 순종|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 순종|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덕수궁&amp;gt;&lt;br /&gt;
파일:1-11.중화전_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덕수궁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조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인조|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조선 인조|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대한제국]]&lt;br /&gt;
*[[경복궁]]&lt;br /&gt;
[[경복궁 근정전]]&lt;br /&gt;
*[[창덕궁]]&lt;br /&gt;
*[[창덕궁 낙선재]]&lt;br /&gt;
*[[창덕궁 후원]]&lt;br /&gt;
*[[창경궁]]&lt;br /&gt;
*[[덕수궁]]&lt;br /&gt;
*[[덕수궁 중명전]]&lt;br /&gt;
*[[경희궁]]&lt;br /&gt;
*[[종묘]]&lt;br /&gt;
*[[사직]]&lt;br /&gt;
*[[문묘]]&lt;br /&gt;
*[[성균관]]&lt;br /&gt;
*[[조선 태조]]&lt;br /&gt;
*[[조선 태종]]&lt;br /&gt;
*[[조선 세조]]&lt;br /&gt;
*[[조선 고종]]&lt;br /&gt;
*[[조선 순종]]&lt;br /&gt;
*[[흥선대원군]]&lt;br /&gt;
*[[덕혜옹주]]&lt;br /&gt;
*[[임진왜란]]&lt;br /&gt;
*[[을미사변]]&lt;br /&gt;
*[[아관파천]]&lt;br /&gt;
*[[을사조약]]&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참고문헌2=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3=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4=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5=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참고문헌6=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참고문헌7=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2=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3=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참고문헌4=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2</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2"/>
				<updated>2017-12-26T12:00: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궁(宮)과 궐(闕)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파일:046(K).jpg|center|150px|frame]]&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조선 세조|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조선 고종|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고종|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선 고종|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경복궁'''&amp;gt;&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3-18.경복궁_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lt;br /&gt;
파일:3-18.경복궁_근정전_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 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0.사정전_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 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_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 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lt;br /&gt;
파일:3-18.경복궁_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조선 태종|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조선 순종|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에서 살았고 [[조선 순종|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조선 순종|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창덕궁 후원|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창덕궁'''&amp;gt;&lt;br /&gt;
파일:1-10.궁궐_인정전_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창덕궁_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lt;br /&gt;
파일:3-18.창덕궁_돈화문_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lt;br /&gt;
파일:3-18.창덕궁_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lt;br /&gt;
파일:3-18.창덕궁_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 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조선 선조|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 광해군|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조선 고종|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조선 고종|고종]]은 [[환구단|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조선 고종|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 고종|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조약|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조선 순종|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 순종|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덕수궁'''&amp;gt;&lt;br /&gt;
파일:1-11.중화전_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덕수궁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조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인조|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조선 인조|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대한제국]]&lt;br /&gt;
*[[경복궁]]&lt;br /&gt;
[[경복궁 근정전]]&lt;br /&gt;
*[[창덕궁]]&lt;br /&gt;
*[[창덕궁 낙선재]]&lt;br /&gt;
*[[창덕궁 후원]]&lt;br /&gt;
*[[창경궁]]&lt;br /&gt;
*[[덕수궁]]&lt;br /&gt;
*[[덕수궁 중명전]]&lt;br /&gt;
*[[경희궁]]&lt;br /&gt;
*[[종묘]]&lt;br /&gt;
*[[사직]]&lt;br /&gt;
*[[문묘]]&lt;br /&gt;
*[[성균관]]&lt;br /&gt;
*[[조선 태조]]&lt;br /&gt;
*[[조선 태종]]&lt;br /&gt;
*[[조선 세조]]&lt;br /&gt;
*[[조선 고종]]&lt;br /&gt;
*[[조선 순종]]&lt;br /&gt;
*[[흥선대원군]]&lt;br /&gt;
*[[덕혜옹주]]&lt;br /&gt;
*[[임진왜란]]&lt;br /&gt;
*[[을미사변]]&lt;br /&gt;
*[[아관파천]]&lt;br /&gt;
*[[을사조약]]&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참고문헌2=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3=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4=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5=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참고문헌6=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참고문헌7=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2=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3=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참고문헌4=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1</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111"/>
				<updated>2017-12-26T11:59: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궁(宮)과 궐(闕)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파일:046(K).jpg|center|300px|frame|서울의 5대 궁궐]]&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조선 세조|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조선 고종|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고종|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선 고종|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경복궁'''&amp;gt;&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3-18.경복궁_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lt;br /&gt;
파일:3-18.경복궁_근정전_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 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0.사정전_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 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_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 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lt;br /&gt;
파일:3-18.경복궁_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조선 태종|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조선 순종|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에서 살았고 [[조선 순종|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조선 순종|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창덕궁 후원|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창덕궁'''&amp;gt;&lt;br /&gt;
파일:1-10.궁궐_인정전_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창덕궁_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lt;br /&gt;
파일:3-18.창덕궁_돈화문_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lt;br /&gt;
파일:3-18.창덕궁_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lt;br /&gt;
파일:3-18.창덕궁_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 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조선 선조|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 광해군|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조선 고종|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조선 고종|고종]]은 [[환구단|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조선 고종|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 고종|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조약|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조선 순종|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 순종|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덕수궁'''&amp;gt;&lt;br /&gt;
파일:1-11.중화전_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덕수궁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조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인조|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조선 인조|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대한제국]]&lt;br /&gt;
*[[경복궁]]&lt;br /&gt;
[[경복궁 근정전]]&lt;br /&gt;
*[[창덕궁]]&lt;br /&gt;
*[[창덕궁 낙선재]]&lt;br /&gt;
*[[창덕궁 후원]]&lt;br /&gt;
*[[창경궁]]&lt;br /&gt;
*[[덕수궁]]&lt;br /&gt;
*[[덕수궁 중명전]]&lt;br /&gt;
*[[경희궁]]&lt;br /&gt;
*[[종묘]]&lt;br /&gt;
*[[사직]]&lt;br /&gt;
*[[문묘]]&lt;br /&gt;
*[[성균관]]&lt;br /&gt;
*[[조선 태조]]&lt;br /&gt;
*[[조선 태종]]&lt;br /&gt;
*[[조선 세조]]&lt;br /&gt;
*[[조선 고종]]&lt;br /&gt;
*[[조선 순종]]&lt;br /&gt;
*[[흥선대원군]]&lt;br /&gt;
*[[덕혜옹주]]&lt;br /&gt;
*[[임진왜란]]&lt;br /&gt;
*[[을미사변]]&lt;br /&gt;
*[[아관파천]]&lt;br /&gt;
*[[을사조약]]&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참고문헌2=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3=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4=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5=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참고문헌6=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참고문헌7=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2=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3=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참고문헌4=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7%80%EB%8F%84%EB%A1%9C_%EB%B3%B4%EB%8A%94_%ED%95%9C%EA%B5%AD_%EC%97%AD%EC%82%AC&amp;diff=4098</id>
		<title>지도로 보는 한국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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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Korean History as Seen through Maps&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본 지도들은 한반도에서 전개된 역사를 시대별로 나타낸 것으로 고조선,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 해군의 항전, 일제 강점기의 항일 투쟁, 세계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지도 등의 제시를 통해 한반도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 역사 시대별 지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01(K).jpg|고조선&lt;br /&gt;
File:002(K).jpg|삼국시대 초&lt;br /&gt;
File:003(K).jpg|삼국시대 4세기말~5세기초&lt;br /&gt;
File:004(K).jpg|삼국시대 5세기말~6세기초&lt;br /&gt;
File:005(K).jpg|삼국시대 6세기중~7세기초&lt;br /&gt;
File:006(K).jpg|남북시대&lt;br /&gt;
File:007(K).jpg|고려&lt;br /&gt;
File:008(K).jpg|조선&lt;br /&gt;
File:009(K).jpg|일제강점기&lt;br /&gt;
File:010(K).jpg|해방이후, 6.25전쟁&lt;br /&gt;
File:011(K).jpg|대한민국(남한)&lt;br /&gt;
File:012(K).jpg|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한국 주요 유적지 분포 지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13(K).jpg|동검 분포 지역&lt;br /&gt;
File:014(K).jpg|고인돌 분포 지역&lt;br /&gt;
File:015(K).jpg|주요 구석기 유적지&lt;br /&gt;
파일:022(K).jpg|고려시대 청자 가마터&lt;br /&gt;
파일:041(K).jpg|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터&lt;br /&gt;
파일:045(K).jpg|조선 왕릉의 위치&lt;br /&gt;
파일:046(K).jpg|서울의 5대 궁궐&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23(K).jpg|시기별 임진왜란 지도&lt;br /&gt;
File:023-2(K).jpg|일본의 주요 침략 경로&lt;br /&gt;
File:044(K).jpg|바다에서의 조선 해군의 항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지도로 보는 한국전쟁'''==&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18(K).jpg|북한의 남한 침략&lt;br /&gt;
File:019(K).jpg|UN군 참전&lt;br /&gt;
File:020(K).jpg|중공군의 개입&lt;br /&gt;
File:021(K).jpg|정전협정에 따른 군사분계선 설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지도로 보는 항일투쟁'''==&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032(K).jpg|3.1운동&lt;br /&gt;
File:032-2(K).jpg|3.1운동&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분류:멀티미디어로 보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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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의 지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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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Geography of Korea&lt;br /&gt;
}}&lt;br /&gt;
&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파일:011(K).jpg|400px]]&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한국(남한, 북한 포함)은 북위 33도에서 40도, 동경 124도에서 132도에 위치하며, 남한의 면적은 10만 295㎢이다. 한국의 이웃 국가로는 중국, 일본이 있다. 인구는 약 5천백 만 명이며 수도는 서울이다. 한국인은 그들의 고유한 언어인 한국어를 사용한다. 온대성 기후에 위치하여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겨울에는 춥고 건조하며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봄과 가을에는 맑고 건조한 날이 많다. 전 국토의 7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의 지리적 입지는 동아시아 전역에 대해 중요한 문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해왔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멀티미디어로 보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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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의 지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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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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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Geography of Korea&lt;br /&gt;
}}&lt;br /&gt;
&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파일:011(K).jpg|1000px]]&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한국(남한, 북한 포함)은 북위 33도에서 40도, 동경 124도에서 132도에 위치하며, 남한의 면적은 10만 295㎢이다. 한국의 이웃 국가로는 중국, 일본이 있다. 인구는 약 5천백 만 명이며 수도는 서울이다. 한국인은 그들의 고유한 언어인 한국어를 사용한다. 온대성 기후에 위치하여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겨울에는 춥고 건조하며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봄과 가을에는 맑고 건조한 날이 많다. 전 국토의 7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의 지리적 입지는 동아시아 전역에 대해 중요한 문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해왔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멀티미디어로 보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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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Geography of Korea&lt;br /&gt;
}}&lt;br /&gt;
&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파일:011(K).jpg]]&lt;br /&gt;
&lt;br /&gt;
한국(남한, 북한 포함)은 북위 33도에서 40도, 동경 124도에서 132도에 위치하며, 남한의 면적은 10만 295㎢이다. 한국의 이웃 국가로는 중국, 일본이 있다. 인구는 약 5천백 만 명이며 수도는 서울이다. 한국인은 그들의 고유한 언어인 한국어를 사용한다. 온대성 기후에 위치하여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겨울에는 춥고 건조하며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봄과 가을에는 맑고 건조한 날이 많다. 전 국토의 7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의 지리적 입지는 동아시아 전역에 대해 중요한 문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해왔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멀티미디어로 보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082</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082"/>
				<updated>2017-12-20T02:50: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참고문헌2=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3=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4=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5=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참고문헌6=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참고문헌7=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2=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3=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참고문헌4=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8B%80:%EC%B0%B8%EA%B3%A0%EB%AC%B8%ED%97%8C&amp;diff=4081</id>
		<title>틀:참고문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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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lt;br /&gt;
|참고문헌2=&lt;br /&gt;
|참고문헌3=&lt;br /&gt;
|참고문헌4=&lt;br /&gt;
|참고문헌5=&lt;br /&gt;
|참고문헌6=&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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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lt;br /&gt;
===입력===&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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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참고문헌2=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lt;br /&gt;
|참고문헌3=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lt;br /&gt;
|참고문헌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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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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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결과===&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참고문헌2=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lt;br /&gt;
|참고문헌3=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lt;br /&gt;
|참고문헌4=&lt;br /&gt;
|참고문헌5=&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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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noinclude&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7%BC%EC%B4%88%EA%B3%A0%EC%99%95:_%EB%B0%B1%EC%A0%9C_%EC%97%AD%EC%82%AC%EC%83%81_%EC%B5%9C%EA%B3%A0%EC%9D%98_%EC%A0%84%EC%84%B1%EA%B8%B0%EB%A5%BC_%EC%9D%B4%EB%A3%A9%ED%95%98%EB%8B%A4&amp;diff=4080</id>
		<title>근초고왕: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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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2:45: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Consolidator of Baekje, King Geunchogo&lt;br /&gt;
}}&lt;br /&gt;
=='''근초고왕: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다'''==&lt;br /&gt;
[[파일:근초고왕_일러스트.jpg|180px|thumb|left|근초고왕 일러스트]]&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 ?∼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고-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lt;br /&gt;
&lt;br /&gt;
===백제 최고 전성기의 왕===&lt;br /&gt;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lt;br /&gt;
&lt;br /&gt;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lt;br /&gt;
&lt;br /&gt;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lt;br /&gt;
&lt;br /&gt;
===활발했던 해상 무역===&lt;br /&gt;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 차지가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일본에 전한 유학===&lt;br /&gt;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왕인(王仁)]]과 [[아직기|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천자문(千字文)]]』과 『[[논어|논어(論語)]]』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lt;br /&gt;
&lt;br /&gt;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안타깝게도 『[[서기]]』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백제]]&lt;br /&gt;
*[[칠지도]]&lt;br /&gt;
*『[[서기|서기(書記)]]』&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근초고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성백제박물관,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한성백제박물관, 2014.&lt;br /&gt;
|참고문헌2=이희진,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가람기획, 2011.&lt;br /&gt;
|참고문헌3=김기섭,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2000.&lt;br /&gt;
}}&lt;br /&gt;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는 쟁점백제사 집중토론 학술대회의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백제의 동북방면 진출의 문헌적·고고학적 측면, 백제의 서남방면 진출의 문헌적·고고학적 측면 등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근초고왕을 고백하다』'''는 백제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13대 근초고왕과 백제 중흥기의 중심에 있었던 26대 성왕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당시 주변정세를 토대로 백제의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고, 고구려, 신라를 비롯 가야, 왜 등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두 왕의 업적을 자세히 풀어냈다. 지도자다운 전략가의 면모를 보인 근초고왕과 동아시아 남부의 맹주 자리를 원했던 성왕의 실제 업적을 백제사를 통해 꼼꼼히 살펴보았다.&lt;br /&gt;
&lt;br /&gt;
'''『백제와 근초고왕』'''은 근초고왕이 활동한 4세기를 중심으로 백제의 국가 성장과정을 고찰한 책이다. 백제의 13번째 왕인 근초고왕의 출생과 성장, 즉위와 군사활동, 정치활동 등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근초고왕의 시대와 문화에 대해도 언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2002.&lt;br /&gt;
|참고문헌2=임동권, 『일본 안의 백제문화』, 민속원, 2005.&lt;br /&gt;
}}&lt;br /&gt;
일본인들은 고대에 자신들이 이백여년 동안이나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가르쳤고 우리도 일본의 고대문화는 무엇이든 백제가 전해주었다든가 천황가는 백제에서 건너갔다고 배웠다. 이런 역사교육이 왜곡된 우월의식을 낳았고 그것은 양국관계를 잘못 이끌고 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에서는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백제왕실과 일본 황실에 관계, 우리 조상들은 왜 일본에 갔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임나일본부설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김춘추는 왜 일본에 갔고 백촌강 싸움에 일본은 왜 대군을 보냈는지 등을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가능한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다.&lt;br /&gt;
&lt;br /&gt;
'''『일본 안의 백제문화』'''는 일본 안에서 발견되는 백제의 문화를 연구한 책이다. 일본 현지조사를 토대로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를 알아보고 있다. 고대에 한국에서 일본에 전파한 문화는 없는지, 있으면 전파 후에 어떠한 변이가 있었는지 그 전파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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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077</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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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2:39: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 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 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2.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 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자상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076</id>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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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2:37: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 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 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2.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 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자상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C%99%95%EC%A1%B0%EC%82%AC%EA%B0%80_%EA%B3%A0%EC%8A%A4%EB%9E%80%ED%9E%88_%EB%8B%B4%EA%B8%B4_5%EB%8C%80_%EA%B6%81%EA%B6%90&amp;diff=4074</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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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2:22: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 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 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 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의 한 부분으로, 이런 건축에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 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상징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2.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 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 관념에 대한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자상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_%EB%93%9C%EB%84%93%EC%9D%80_%EC%98%81%ED%86%A0%EB%A5%BC_%EC%B0%A8%EC%A7%80%ED%95%98%EB%8B%A4&amp;diff=4073</id>
		<title>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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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2:16: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Expander and Opener of Goguryeo's Territory, King Gwanggaeto&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lt;br /&gt;
[[파일:광개토대왕_일러스트.jpg|180px|thumb|left|광개토대왕 일러스트]]&lt;br /&gt;
===백제, 신라, 가야 공략===&lt;br /&gt;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lt;br /&gt;
&lt;br /&gt;
이름 그대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lt;br /&gt;
 &lt;br /&gt;
===거란, 후연, 부여 함락===&lt;br /&gt;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전략·전술가이자 정치가===&lt;br /&gt;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이 중심이었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내정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기록했다.&lt;br /&gt;
&lt;br /&gt;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4면비이다. 4면 전체에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고구려]]&lt;br /&gt;
*[[광개토대왕릉비]]&lt;br /&gt;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광개토대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다케미쓰 마코토, 『고구려 광개토대왕』, 범우, 2009.&lt;br /&gt;
|참고문헌2=고구려연구회,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학연문화사, 2002.&lt;br /&gt;
|참고문헌3=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항아리,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전편·중편·후편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편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광개토왕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생각에 의해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여러 장면의 상황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중편에서는 주로 광개토왕의 시대, 후편에서는 해모수와 주몽이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왕 전후의 역사적 흐름이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amp;quot;하는 문제이다. 광개토태왕의 동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자료편에는 광개토태왕 관계 연구문헌 종합목록과 그 논저목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사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도학,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lt;br /&gt;
|참고문헌2=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앤씨,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20년간에 걸쳐 연구하고 발표했던 20편의 고구려사 논문들을 담은 연구서로, 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상을 온전하게 구명하고자 했다.&lt;br /&gt;
&lt;br /&gt;
'''『광개토왕비문의 세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사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비문」을 텍스트로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비문」은 1800여 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화적인 제1부, 광개토대왕의 훈적이 기록된 제2부, 조상 숭배를 내용으로 하는 제3부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건국신화가 제1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을 기축으로 하여 「비문」 전체를 통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_%EB%93%9C%EB%84%93%EC%9D%80_%EC%98%81%ED%86%A0%EB%A5%BC_%EC%B0%A8%EC%A7%80%ED%95%98%EB%8B%A4&amp;diff=4072</id>
		<title>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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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1:52: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Expander and Opener of Goguryeo's Territory, King Gwanggaeto&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lt;br /&gt;
[[파일:광개토대왕_일러스트.jpg|180px|thumb|left|광개토대왕 일러스트]]&lt;br /&gt;
===백제, 신라, 가야 공략===&lt;br /&gt;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lt;br /&gt;
&lt;br /&gt;
이름 그대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lt;br /&gt;
 &lt;br /&gt;
===거란, 후연, 부여 함락===&lt;br /&gt;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전략·전술가이자 정치가===&lt;br /&gt;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이 중심이었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내정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4면비이다. 4면 전체에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광개토대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다케미쓰 마코토, 󰡔고구려 광개토대왕󰡕, 범우, 2009.&lt;br /&gt;
● 고구려연구회,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학연문화사, 2002.&lt;br /&gt;
●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항아리,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전편·중편·후편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편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광개토왕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생각에 의해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여러 장면의 상황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중편에서는 주로 광개토왕의 시대, 후편에서는 해모수와 주몽이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왕 전후의 역사적 흐름이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amp;quot;하는 문제이다. 광개토태왕의 동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자료편에는 광개토태왕 관계 연구문헌 종합목록과 그 논저목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사를 실었다.&lt;br /&gt;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2.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도학,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lt;br /&gt;
● 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앤씨,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20년간에 걸쳐 연구하고 발표했던 20편의 고구려사 논문들을 담은 연구서로, 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상을 온전하게 구명하고자 했다.&lt;br /&gt;
󰡔광개토왕비문의 세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사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비문」을 텍스트로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비문」은 1800여 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화적인 제1부, 광개토대왕의 훈적이 기록된 제2부, 조상 숭배를 내용으로 하는 제3부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건국신화가 제1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을 기축으로 하여 「비문」 전체를 통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_%EB%93%9C%EB%84%93%EC%9D%80_%EC%98%81%ED%86%A0%EB%A5%BC_%EC%B0%A8%EC%A7%80%ED%95%98%EB%8B%A4&amp;diff=4071</id>
		<title>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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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20T01:51: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Expander and Opener of Goguryeo's Territory, King Gwanggaeto&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lt;br /&gt;
[[파일:광개토대왕_일러스트.jpg|left|광개토대왕 일러스트]]&lt;br /&gt;
===백제, 신라, 가야 공략===&lt;br /&gt;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lt;br /&gt;
&lt;br /&gt;
이름 그대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lt;br /&gt;
 &lt;br /&gt;
===거란, 후연, 부여 함락===&lt;br /&gt;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전략·전술가이자 정치가===&lt;br /&gt;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이 중심이었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내정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4면비이다. 4면 전체에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광개토대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다케미쓰 마코토, 󰡔고구려 광개토대왕󰡕, 범우, 2009.&lt;br /&gt;
● 고구려연구회,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학연문화사, 2002.&lt;br /&gt;
●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항아리,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전편·중편·후편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편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광개토왕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생각에 의해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여러 장면의 상황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중편에서는 주로 광개토왕의 시대, 후편에서는 해모수와 주몽이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왕 전후의 역사적 흐름이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amp;quot;하는 문제이다. 광개토태왕의 동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자료편에는 광개토태왕 관계 연구문헌 종합목록과 그 논저목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사를 실었다.&lt;br /&gt;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2.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도학,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lt;br /&gt;
● 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앤씨,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20년간에 걸쳐 연구하고 발표했던 20편의 고구려사 논문들을 담은 연구서로, 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상을 온전하게 구명하고자 했다.&lt;br /&gt;
󰡔광개토왕비문의 세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사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비문」을 텍스트로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비문」은 1800여 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화적인 제1부, 광개토대왕의 훈적이 기록된 제2부, 조상 숭배를 내용으로 하는 제3부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건국신화가 제1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을 기축으로 하여 「비문」 전체를 통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B%A8%EA%B5%B0&amp;diff=4069</id>
		<title>단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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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 관련항목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Dangun&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표제어정보&lt;br /&gt;
|대표명칭=단군&lt;br /&gt;
|한자표기=檀君&lt;br /&gt;
|영문명칭=Dangun&lt;br /&gt;
|이칭=&lt;br /&gt;
|유형=인물&lt;br /&gt;
|성격=&lt;br /&gt;
|시대=고대/초기국가&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한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고조선(古朝鮮: 檀君朝鮮)]]의 첫 국왕.&amp;lt;ref&amp;gt;김정배,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538 단군]&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역사시대의 문을 열다, 고조선]]&lt;br /&gt;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lt;br /&gt;
*[[고조선|고조선(古朝鮮)]]&lt;br /&gt;
&lt;br /&gt;
=='''갤러리'''==&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30px&amp;gt;&lt;br /&gt;
파일:1-단군 표준영정.jpg|단군 표준영정&amp;lt;ref&amp;gt;사진출처: &amp;quot;[http://www.kculture.or.kr/korean/portrait/portraitView.jsp?sp_seq=18 단군]&amp;quot;, 선현의 표준영정,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민족정보마당』&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문화정보원.&amp;lt;/ref&amp;gt;&lt;br /&gt;
파일:2-1. AKS 옥구향교 단군성묘.jpg|옥구향교 내 단군을 제향하는 단군성묘&amp;lt;ref&amp;gt;사진출처: 김호일,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8672 옥구향교]&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amp;lt;/ref&amp;gt;&lt;br /&gt;
파일:1-2.단군 동상_Dangun Statue.jpg|단군상(전남 고흥 익금해수욕장)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2.단군 영정_Dangun Seongjeon in Seoul.jpg|단군 영정(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2.단군 영정_Dangunseongjeon Shrine.jpg|단군 영정(강원 태백시 소도동 단군성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Glossary]]&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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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aft 조공제도(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이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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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나? 조공 외교의 진실&lt;br /&gt;
|집필자=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주원장]], [[조선 태조|이성계]], [[송시열]]&lt;br /&gt;
|장소/공간=[[동아시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공]], [[책봉]], [[소중화]]&lt;br /&gt;
|물품/도구/유물=[[독립문]]&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2017년 3월 미국의 국방장관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조공국가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조공과 책봉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국제질서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중국이 아직도 주변 국가들의 종주국이었던 전근대적인 외교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변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조공과 책봉은 중국 고대 주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조공책봉이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lt;br /&gt;
&lt;br /&gt;
외교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lt;br /&gt;
&lt;br /&gt;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국제무역이었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는 데 이르러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하사품 외에도 공식적인 사절단을 따라 온 상인들에 의해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lt;br /&gt;
&lt;br /&gt;
예를 들어 명나라와 조선 간의 조공 관계를 보면 명의 태조(주원장)은 3년에 1번 조공을 하면 된다고 하나 조선의 태조(이성계)는 1년에 3회 조공을 하겠다고 한다. 결국 조선은 2대 국왕 정종 때부터 하정사(새해를 축하하는 사절), 성절사(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 천추절사(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라는 이름으로 1년에 세차례 조공 사절단을 보내고, 후에는 동지사(동지에 보내는 사절)를 추가하여 1년에 4차례 조공을 하였다. 동지사는 12월에 떠나 다음해 3~4월에 돌아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하정사와 동지사를 합쳐서 보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사절단의 규모는 보통 250명 정도였는데, 500명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황제와 왕에게 보내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조공을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다. 조선에서는 주로 종이, 붓, 화문석, 인삼을 수출했고, 명나라로부터는 비단, 약재, 서적을 들여왔다. 또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lt;br /&gt;
&lt;br /&gt;
한편 조공책봉과는 별개로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명나라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때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 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 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삼전도의 굴욕 부조, 청에게 항복하는 조선의 왕을 묘사한 조각’ 그림은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 &lt;br /&gt;
|의견2=조선시대 조공의 예로 명과 조선은 어떤 상황에서 사신을 보냈으며, 사신을 보낼 때 어느 정도 규모의 사신들이 출발하였으며, 어떤 물건을 예물로 가지고 갔으며, 어떤 하사품을 가지고 왔는지, 같이 갔던 사람들은 가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경험을 하고 돌아왔으며, 이것은 이후 조선 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에 대해 서술한다면 조공을 단지 힘없는 속국이 강한 종주국에게 물건을 바쳐 독립,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2017년 3월 미국 국방장관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조공국가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조공과 책봉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국제질서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중국이 아직도 스스로를 주변 국가들의 종주국으로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외교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조공과 책봉-외교적 형식===&lt;br /&gt;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런 관계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에 귀족들에 대해서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lt;br /&gt;
&lt;br /&gt;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위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 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lt;br /&gt;
&lt;br /&gt;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국제 무역이었던 조공===&lt;br /&gt;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lt;br /&gt;
&lt;br /&gt;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국제무역이기도 했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로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과도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자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오히려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lt;br /&gt;
&lt;br /&gt;
하사품 외에도 공식적인 사절단을 따라 온 상인들을 통해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이는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lt;br /&gt;
&lt;br /&gt;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공식적으로 주고 받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이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 비중도 높았다. 또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lt;br /&gt;
    &lt;br /&gt;
===소중화사상===&lt;br /&gt;
중국에서 명이 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그 동안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 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lt;br /&gt;
&lt;br /&gt;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월감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 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 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BD%EA%B3%A8%EA%B3%BC_%EA%B3%A0%EB%A0%A4(%EB%AA%BD%EA%B3%A8_%EA%B3%A0%EB%A0%A4_%EC%A7%80%EB%B0%B0%EC%9D%98_%ED%8A%B9%EC%88%98%EC%84%B1)&amp;diff=621</id>
		<title>Draft 몽골과 고려(몽골 고려 지배의 특수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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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37: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몽골제국의 침략 속에서 자주성을 지켜낸 고려&lt;br /&gt;
|집필자=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징기즈칸]], [[오고타이]], [[쿠빌라이]], [[살리타이]], [[기황후]], [[고려 공민왕|공민왕]], [[김윤후]]&lt;br /&gt;
|장소/공간=[[중국]], [[개성]], [[강화도]], [[제주도]]&lt;br /&gt;
|사건=[[몽골의 고려침략]], [[처인성전투]], [[충주전투]], [[삼별초의 항쟁]], 팔만대장경 제작&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무신정권]], [[공녀]], [[정동행성]]&lt;br /&gt;
|물품/도구/유물=[[팔만대장경]]&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3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몽골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은 중앙아사아의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다. 순식간에 중앙이사아를 휩쓸고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를 정복하였고, 금나라와 남송을 무너뜨려 중국을 차지하였다. 유럽까지 쳐들어간 몽고군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짓밟았다. 세계를 휩쓰는 몽골의 폭풍에서 고려도 벗어날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몽골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218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충돌없이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돌아갔으나 1231년 8월,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장군 살리타이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국경 근처 몇 개의 성에서 살리타이의 공격을 버텨내자 살리타이는 성을 우회하여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였다. 당시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은 몽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로 수도를 강화도라는 섬으로 옮기고 계속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약 40년 가까이 고려는 몽골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lt;br /&gt;
&lt;br /&gt;
고려의 민중들은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처인성과 충주에서는 평민과 노비로 구성된 민중군이 몽골군대를 물리쳐 철수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40년 가까운 전쟁 기간동안 고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노비로 끌려갔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지로 주둔지를 옮기며 끝까지 몽골군에게 저항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는 몽골에게 결국 항복하였으나, 유래없는 저항의 대가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으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고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lt;br /&gt;
&lt;br /&gt;
몽골은 결국 중국의 지배자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을 차지하였다. 오늘날의 서아시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아우르게 되었는데, 각각 일한국, 킵차크한국, 오고타이한국, 차가타이한국, 원나라의 다섯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중국을 지배하는 원나라가 몽골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비록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하고 고려영토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원 황제의 말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말 산업이 발달해있다. 또한 공녀라는 이름으로 고려의 젊은 여성을 원나라에 보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공녀로 보내진 여성 중 기씨 성을 가진 여인은 원의 황후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녀의 아들이 원의 황제가 되었다. 보통 ‘기황후’로 불리고 있는데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 한편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겠다는 몽골의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를 몽골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거나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계속되었다.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1356년 마지막 몽골세력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그 고난으로 인해 남겨진 것도 있다.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8만 1천개가 넘은 경판의 규모도 놀랍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의 아름다움과 정확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목판인쇄물은 그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또한 고려인은 수십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연이은 수난으로 고통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이라는 다른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우리’라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고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한반도의 첫 지배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을 그 시조로 보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멸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나라의 아름을 ‘조선’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제국의 침략을 받아 항복을 했고, 100여 년간 그 지배권 내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기황후’라고 불리는 한 여성은 원제국의 황후가 되었는데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를 “원제국의 황후 중 기황후는 고려에서 보내진 공녀 중 한 명으로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이다.”로 수정할 수 있다.&lt;br /&gt;
|의견2=&lt;br /&gt;
- 몽골과 원의 관계 서술할 것 → 몽고가 중국을 정복하고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바꾸고... &lt;br /&gt;
- ‘기황후’에 대한 서술 - “공녀로 보내진 여성 중 기씨 성을 가진 여성이 원제국의 황후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녀를 ‘기황후’라고 불렀다.”&lt;br /&gt;
-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계속되었다. → 원 정부의 결정에 따라 고려왕이 실제로 바뀐 적이 있지 않았나요? &lt;br /&gt;
-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고, 공민왕대에 이르러 몽골이 불법적으로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몽골, 세계를 휩쓸다===&lt;br /&gt;
13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몽골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은 중앙아사아의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웠다.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다. 순식간에 중앙이사아를 휩쓸고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를 정복하였고, 금나라와 남송을 무너뜨려 중국을 차지하였다. 유럽까지 쳐들어간 몽고군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짓밟았다. 고려 또한 세계를 휩쓰는 몽골의 폭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몽골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218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충돌 없이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돌아갔으나 1231년 8월,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장군 살리타이를 앞세워 고려를 침략한다. 고려가 국경 근처에서 공격을 버텨내자 살리타이는 성을 우회하여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였다. 당시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은 몽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계속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이후 약 40년 가까이 고려는 몽골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난을 겪었다. 몽골은 1260년 국호를 대원대몽골국으로 바꾸면서 원나라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고려, 몽골에 굴복===&lt;br /&gt;
고려의 민중들은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처인성과 충주에서는 평민과 노비로 구성된 민군이 몽골군대를 물리쳐 철수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고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노비로 끌려갔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는 무신들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뭉쳤다. 그들은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지로 주둔지를 옮기며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게 진압될 때까지 몽골군에게 저항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는 몽골에게 결국 항복하였으나, 유례없는 저항의 대가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으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고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lt;br /&gt;
&lt;br /&gt;
===고려가 당한 굴욕===&lt;br /&gt;
비록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몽골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려는 몽골제국의 간접 지배 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고려왕들은 몽골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왕의 이름을 ‘충(忠)’으로 시작해야 했고, 몽골의 왕족들을 왕비로 맞아 사위 나라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 몽골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하고 고려영토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몽골황제의 말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말 산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고려의 젊은 여성을 공녀라는 이름으로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공녀 중 한 사람은 원나라 ‘기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원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민족 황후였다. &lt;br /&gt;
&lt;br /&gt;
한편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겠다는 몽골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를 몽골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거나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시도도 거듭되었다. 충선왕은 나라를 떠나 티벳 등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충렬왕은 강제로 왕위를 양도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고난 속에서 피어난 문화===&lt;br /&gt;
고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켜냈고 몽골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차례로 수복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1356년 몽골이 불법 점유해오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마지막 몽골세력을 고려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면서 고난을 겪었으나 그 고난으로 인해 남겨진 것도 있다. 불교의 힘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8만 1천개가 넘는 경판의 규모도 놀랍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의 아름다움과 정확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목판인쇄물은 그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또한 고려인은 수십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연이은 수난으로 고통 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이라는 다른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우리’라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고려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한반도의 첫 지배자였던 ‘고조선’의 ‘단군’을 그 시조로 보는 역사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멸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나라의 아름을 ‘조선’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침략을 받아 항복을 했고, 100여 년간 그 지배권 내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의 끈질긴 저항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9C%ED%95%B4(%ED%95%9C%EA%B5%AD%EA%B3%BC_%EC%A4%91%EA%B5%AD%EC%9D%B4_%EA%B3%B5%EC%9C%A0%ED%95%98%EB%8A%94_%EA%B3%A0%EB%8C%80_%EC%97%AD%EC%82%AC)&amp;diff=620</id>
		<title>Draft 발해(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고대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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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35: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발해 역사는 어느 나라의 것인가?&lt;br /&gt;
|집필자= 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 [[대조영]], [[문왕]], [[정혜공주]], [[고려 태조|왕건]], [[대도수]]&lt;br /&gt;
|장소/공간= [[동북아시아]], [[연해주]]&lt;br /&gt;
|사건= 발해의 건국, 발해의 멸망&lt;br /&gt;
|기록물= [[정효공주 묘비]]&lt;br /&gt;
|개념용어= [[동북공정]]&lt;br /&gt;
|물품/도구/유물=[[정효공주 묘]], 발해의 고분벽화, 발해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수많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는 발해가 한국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본 원고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① 발해가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을 보냈으며,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는 내용&amp;lt;br/&amp;gt;&lt;br /&gt;
② 발해가 황제와 황후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임을 드러냈던 사실은 발해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보여준다.&amp;lt;br/&amp;gt;&lt;br /&gt;
③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자 대광현은 수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amp;lt;br/&amp;gt;&lt;br /&gt;
④ 유득공의 발해고 내용 :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김씨와 대씨가 망한 다음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고는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한탄스럽다.”&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lt;br /&gt;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발해는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를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9C%ED%95%B4(%ED%95%9C%EA%B5%AD%EA%B3%BC_%EC%A4%91%EA%B5%AD%EC%9D%B4_%EA%B3%B5%EC%9C%A0%ED%95%98%EB%8A%94_%EA%B3%A0%EB%8C%80_%EC%97%AD%EC%82%AC)&amp;diff=619</id>
		<title>Draft 발해(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고대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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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34: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발해 역사는 어느 나라의 것인가?&lt;br /&gt;
|집필자= 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 [[대조영]], [[문왕]], [[정혜공주]], [[고려 태조|왕건]], [[대도수]]&lt;br /&gt;
|장소/공간= [[동북아시아]], [[연해주]]&lt;br /&gt;
|사건= 발해의 건국, 발해의 멸망&lt;br /&gt;
|기록물= [[정효공주 묘비]]&lt;br /&gt;
|개념용어= [[동북공정]]&lt;br /&gt;
|물품/도구/유물=[[정효공주 묘]], 발해의 고분벽화, 발해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수많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는 발해가 한국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본 원고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lt;br /&gt;
① 발해가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을 보냈으며,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는 내용&lt;br /&gt;
② 발해가 황제와 황후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임을 드러냈던 사실은 발해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보여준다.&lt;br /&gt;
③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자 대광현은 수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lt;br /&gt;
④ 유득공의 발해고 내용 :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김씨와 대씨가 망한 다음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고는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한탄스럽다.”&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lt;br /&gt;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발해는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를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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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aft 당과 신라(당 문화의 모방과 신라 문화의 고유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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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32:06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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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신라 문화의 독자성과 당나라의 영향&lt;br /&gt;
|집필자=남정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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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최치원]], [[혜초]], [[원효]], [[설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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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계원필경]], [[왕오천축국전]]&lt;br /&gt;
|개념용어=[[국학]], [[독서삼품과]], [[골품제]], [[화엄사상]], [[향가]], [[이두]]&lt;br /&gt;
|물품/도구/유물=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의 유리 제품&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고대 한반도의 정치세력은 직접·간접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동북아시아의 강자 고구려는 분열된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경쟁하였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당나라의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았다. 백제와 신라는 때로는 중국과 경쟁하며 때로는 중국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한때의 동지였던 당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두 나라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충돌하였고 결정적인 두 차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신라는 한반도의 첫 통일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는 한때는 연합국으로 또 한때는 적으로 오랜 시간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의 정치제도를 눈여겨보았다. 황제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펴온 당의 정치제도는 강력한 왕권으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라 왕실의 의도와 일치했기 때문에 신라는 적극적으로 당의 제도를 채용하였다. 당의 행정기구와 비슷하게 중앙정치제도를 정비했고, 유교 정치 이념을 강조하였다. 유학교육을 위해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이 익힌 유교 경전 지식에 따라 관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유학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신라의 많은 인재들이 유학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이러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르고 우수한 성적을 낸 유학생은 당나라의 관리로 채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인데, 최치원이 지은 시문집 ‘계원필경’은 당나라 문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유학자뿐 아니라 승려들 중에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왕족이었던 의상이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 승려들과 교류하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확립한 바 있다.&lt;br /&gt;
&lt;br /&gt;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비롯한 많은 중국 도시에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역인 ‘신라방’, 신라인을 위한 절 ‘신라원’, 신라인을 위한 숙소 ‘신라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당시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9세기에는 한반도 남쪽 바다에 ‘청해진’이라는 해상무역의 거점이 존재할 정도였다. ‘청해진’은 해적으로부터 상선을 보호하면서 당나라와 신라뿐 아니라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당시 당나라는 ‘비단길’을 통해 인도와 이슬람제국과도 교류하고 있었다. 신라도 당나라를 통해 이들 지역과 왕래를 하였다. 신라의 승려 ‘혜초’는 당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다녀와 생생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남겼고, 신라의 고분에서 페르시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종종 발견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신라의 문화가 중국 문화의 모방에 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해이며 오류이다. 신라인들은 당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적극적으로 들여왔지만, 그에 대한 신라 고유의 문화적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고, 신라의 지식인 중에는 당나라의 문화보다 신라 고유의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lt;br /&gt;
&lt;br /&gt;
예를 들어 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독서삼품과’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골품제는 혈연과 출생에 따라 개인의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의 범위를 규제하였는데, 관료의 승진도 골품에 따라 상한선이 정해져있었다. 8~9세기 최고의 신분인 ‘진골’ 귀족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고 제2신분인 ‘6두품’은 예술과 학문, 종교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lt;br /&gt;
&lt;br /&gt;
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승려 ‘원효’도 ‘6두품’출신으로 알려져있다. 원효는 자신의 독자적인 불교철학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원효는 세계 불교사에 큰 영향을 미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lt;br /&gt;
&lt;br /&gt;
원효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원효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어둠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모르고 마신 후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모르고 마셨을 때는 맛좋은 물이었는데 날이 밝은 후 자신이 마신 것이 해골에 담긴 물임을 알고 게워낸 후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수행을 계속하여 독자적인 불교철학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원효의 아들로 알려진 설총은 대표적인 유학자인데, 한자를 이용하여 고대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는 ‘이두’라는 문자 표기체계를 정리하였다. 신라는 독자적인 문자를 갖지 못하여 한자를 이용하여 글을 적었지만 한국어는 어순이나 발음, 표현 방식 등이 중국어와 다르기 때문에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한자를 활용하되 한국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향찰’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설총은 ‘향찰’의 표기방법을 집대성하여 ‘이두’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의 고유한 시 ‘향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원효와 설총 두 부자의 이야기는 신라의 문화가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독자성을 잃지 않고 풍부한 문화를 누렸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 신라와 당의 문화교류의 방법으로 유학생, 유학승, 문물교류 품목 등&lt;br /&gt;
- 당(중국)의 문화 또는 당을 거쳐 신라에 유입된 주요 문화(유교, 불교, 제도 등)&lt;br /&gt;
- 한국의 고유 제도를 유지하였거나, 유입된 문화를 신라 나름의 문화로 변형시켜 활용한 것&lt;br /&gt;
- 당과 구별되는 신라의 문화 성격에 대해 정리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한반도에 끼친 중국의 영향===&lt;br /&gt;
고대 한반도의 정치세력은 직접 간접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동북아시아의 강자 고구려는 분열된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경쟁하였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당나라의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았다. 백제와 신라는 때로는 중국과 경쟁하면서 중국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한때의 동지였던 당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두 나라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충돌하였고 결정적인 두 차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신라는 한반도의 첫 통일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와 당나라===&lt;br /&gt;
신라는 한때는 연합국으로 교류하고, 또 한때는 적으로 오랜 시간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의 정치제도를 눈여겨보았다. 통일 후 신라는 적극적으로 당의 제도를 채용하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당의 막강한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는 강력한 왕권으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라 왕실의 의도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당의 행정기구와 비슷하게 중앙정치제도를 정비했고, 유교 정치 이념을 강조하였다. 유학교육을 위해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이 익힌 유교 경전 지식에 따라 관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유학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신라의 많은 인재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당나라는 이러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르고 우수한 성적을 낸 유학생은 당나라의 관리로 채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으로, 그가 지은 시문집 ‘계원필경’은 당나라 문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lt;br /&gt;
&lt;br /&gt;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비롯한 많은 중국 도시에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역인 ‘신라방’, 신라인을 위한 절 ‘신라원’, 신라인을 위한 숙소 ‘신라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당시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9세기에는 한반도 남쪽 바다에 ‘청해진’이라는 해상무역의 거점이 존재할 정도였다. ‘청해진’은 해적으로부터 상선을 보호하면서 당나라와 신라뿐 아니라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당시 당나라는 ‘비단길’을 통해 인도와 이슬람제국과도 교류하고 있었다. 신라도 당나라를 통해 이들 지역과 왕래를 하였다. 신라의 승려 ‘혜초’는 당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다녀와 생생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남겼고, 신라의 고분에서 페르시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종종 발견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신라인들이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들여왔지만, 그에 대한 신라 고유의 문화적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신라의 지식인 중에는 신라만의 문화를 고집하는 경우도 많았다.&lt;br /&gt;
&lt;br /&gt;
한 예로 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독서삼품과’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골품제는 혈연과 출생에 따라 개인의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의 범위를 규제하였는데, 관료의 승진도 골품에 따라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8~9세기 최고의 신분인 ‘진골’ 귀족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고 제2신분인 ‘6두품’은 예술과 학문, 종교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lt;br /&gt;
&lt;br /&gt;
===원효와 설총===&lt;br /&gt;
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승려 ‘원효’도 ‘6두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불교철학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신라를 넘어서 세계 불교사에 큰 영향을 미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lt;br /&gt;
&lt;br /&gt;
원효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원효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어둠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모르고 마신 후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모르고 마셨을 때는 맛좋은 물이었는데 날이 밝은 후 자신이 마신 것이 해골에 담긴 물임을 알고 게워낸 후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수행을 계속하여 독자적인 불교철학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원효의 아들로 알려진 설총은 대표적인 유학자인데, 한자를 이용하여 고대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는 ‘이두’라는 문자 표기체계를 정리하였다. 신라는 독자적인 문자를 갖지 못하여 한자를 이용하여 글을 적었지만 한국어는 어순이나 발음, 표현 방식 등이 중국어와 다르기 때문에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한자를 활용하되 한국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향찰’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설총은 ‘향찰’의 표기방법을 집대성하여 ‘이두’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의 고유한 시 ‘향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원효와 설총 두 부자의 이야기는 신라의 문화가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독자성을 잃지 않고 풍부한 문화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A0%EB%8C%80%EC%9D%98_%ED%95%9C%EC%9D%BC%EA%B4%80%EA%B3%84&amp;diff=617</id>
		<title>Draft 고대의 한일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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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29: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가야|가야(加耶)]], [[임나|임나(任那)]], [[야마토왜|야마토왜(大和倭)]], [[진구황후|진구황후(神功皇后)]] &lt;br /&gt;
|장소/공간=한반도 남부 지방, 일본 긴키내(近畿內) 지방&lt;br /&gt;
|사건=고대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류&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일본서기|일본서기(日本書紀)]]&lt;br /&gt;
|개념용어=[[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식민사관]], [[타율성이론]]&lt;br /&gt;
|물품/도구/유물=[[광개토대왕릉비]]&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하지만 가야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외관계는 명확하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391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는 훼손된 문자)를 &amp;quot;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amp;quot;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 역시, 기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며 훼손된 문자를 무엇이라고 가정할지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무엇보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비석 내용의 주체는 고구려인들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측면에서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다. 한편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토왜가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4세기 경에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써 경영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lt;br /&gt;
&lt;br /&gt;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연구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호주나 필리핀 등 외국 교과서에서도 일본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서술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교과서 왜곡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로 발전하여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 조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 “사진 2”의 설명에서 ‘가라’는 오타로 보인다. &lt;br /&gt;
-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훼손, 문구 조작 내용 첨가&lt;br /&gt;
-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과 당시 상황과의 연계성 설명&lt;br /&gt;
-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에 의해 제기되고 유포된 시기 및 이유&lt;br /&gt;
- 일본교과서의 왜곡, 현재에도 외교적 문제 야기 상황 서술&lt;br /&gt;
- 첫 문단의 가야국에 대한 설명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서술하였으면.&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은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2%99%EB%9E%91:_%ED%95%9C%EB%B0%98%EB%8F%84%EC%97%90_%EB%82%A8%EC%9D%80_%ED%95%9C_%EC%A0%9C%EA%B5%AD%EC%9D%98_%EC%9C%A0%EC%82%B0&amp;diff=616</id>
		<title>Draft 낙랑: 한반도에 남은 한 제국의 유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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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26: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낙랑군의 역사적 성격&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한 무제|한 무제(武帝)]], [[우거|(고)조선왕 우거(右渠)]], [[낙랑공주|낙랑(樂浪) 공주]], [[호동왕자|호동(好童) 왕자]]&lt;br /&gt;
|장소/공간=한반도 중·북부 및 평양 일대, 요서지방&lt;br /&gt;
|사건=[[고조선의 멸망]], [[한사군의 설치]], [[낙랑군의 멸망]]&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사기|사기(史記)]], [[삼국지|삼국지(三國志)]], [[한서|한서(漢書)]], [[후한서|후한서(後漢書)]], [[진서|진서(晉書)]]&lt;br /&gt;
|개념용어=[[고조선]], [[낙랑군]], [[낙랑국]]&lt;br /&gt;
|물품/도구/유물=[[봉니|봉니(封泥)]]&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사군(漢四郡)과 낙랑군===&lt;br /&gt;
&lt;br /&gt;
한사군이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한(漢)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菟) 4개의 군현을 말한다. &lt;br /&gt;
&lt;br /&gt;
한나라가 설치한 4개의 군현 중 낙랑군을 제외한 3개의 군은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25년여에 걸처 순차적으로 사라졌으나, 한나라는 낙랑군을 중심으로 옛 고조선 일대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낙랑군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고, 지배계층이었던 한나라 출신의 주민들 역시 대개는 토착화되어 갔다. 기원후 313년에 한국의 고대 왕국인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400여년간, 낙랑군은 한반도의 고대인들과 중국 세력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에 있어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낙랑군의 역사적인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lt;br /&gt;
&lt;br /&gt;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군을 한사군이라는 용어로 묶어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삼기 위해, 조선의 역사가 외부의 침입과 이에 따른 영향으로 진행되는 타율적인 역사였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 측 역사서에서도 한사군의 존재를 강조하며, 이 시기의 한반도 전역이 한나라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으며, 역사적인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lt;br /&gt;
&lt;br /&gt;
군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행정단위이지만, 낙랑군의 경우 고조선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의 정치체제는 중국 왕조의 전형적인 군현체제와 원주민들의 국읍체제(國邑體制, 당시 한반도 내의 토착인 사회에서는 지역이나 종족, 주민에 따라 발전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어떤 지역은 국가나 다름없는 상태로 발전해 있었던 반면, 읍락의 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지역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읍체제란 국가와 읍락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던 여러 지역을 어우르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가 혼합된 형태였다. 군현 설치 이후에도 그 안에 토착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 지배체제가 존속하였고, 국읍에는 원주민 집단의 군장이 있어 토속적인 법률에 따라 집단을 통솔하였다. 즉 현지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낙랑 태수와 일부 중앙 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와 군인은 현지인들이었고, 낙랑군은 정치적인 지배보다는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소국 및 고대 일본의 소국들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요서 지방이었다는 소수의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본다. 북한의 평양 인근에서는 1900년대 이후 중국 세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고분과 토기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기원전 45년경 낙랑군의 가구 수와 인구 등을 기록한 목간(木簡)이 발견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인 호동(好童)왕자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하였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 自鳴角)가 있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보물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 달라고 요구한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게 도왔지만,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뒤이어 호동왕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lt;br /&gt;
&lt;br /&gt;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일종의 설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이야기 속의 낙랑을 한(漢)나라가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아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독립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 속에,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고대 국가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한반도 내의 중국계 세력을 몰아내면서 성장해 온 역사적 시간들이 은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믿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1. 논점을 먼저 서술&lt;br /&gt;
2. 한국학계의 기본 입장을 서술할 때, 이해하기 쉽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것-군현체제와 국읍체제&lt;br /&gt;
3. 낙랑군의 고분과 고구려 고분의 차이, 평양 인근의 고분이 낙랑군의 유적으로 보는 이유&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한사군(漢四郡)과 낙랑군===&lt;br /&gt;
&lt;br /&gt;
한사군이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한(漢)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菟) 등 4개의 군현을 말한다. &lt;br /&gt;
&lt;br /&gt;
이 가운데 낙랑군을 제외한 3개의 군은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25년여에 걸쳐 순차적으로 사라졌으나, 낙랑군은 약 400여년 동안 지속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낙랑군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다. 처음에는 지배계층이었던 한나라 출신의 주민들 역시 대개는 토착화되어 갔다. 기원 후 313년에 한국의 고대 왕국인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낙랑군은 한반도의 고대인들과 중국 세력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에 있어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개 군을 한사군이라는 용어로 묶어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삼기 위해, 조선의 역사가 외부세력의 침입에 따라 진행되는 수동적인 역사였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 측 역사서에서도 한사군의 존재를 강조하며, 이 시기의 한반도 전역이 한나라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으며, 역사적인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lt;br /&gt;
&lt;br /&gt;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lt;br /&gt;
&lt;br /&gt;
군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행정단위이지만, 낙랑군의 경우 고조선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의 정치체제는 중국 왕조의 전형적인 군현체제와 고조선 원주민들의 국읍체제(國邑體制)가 혼합된 형태였다. 국읍에는 원주민 집단의 대표인 군장이 있어 토속적인 법률에 따라 집단을 통솔하였다. 즉 현지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으로 낙랑 태수와 일부 중앙 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와 군인은 현지인들이었다.  낙랑군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소국 및 고대 일본의 소국들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낙랑군을 바라보는 역사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는 정치거점설이다. 낙랑을 한나라가 지배하는 여러 군현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다른 시각은 한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무역기지로 보는 교역거점설이다. 한의 식민지가 아닌, 한반도에 존재했던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요서 지방이었다는 소수의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본다.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인근에서 낙랑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봉니 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고분인 돌무지무덤(적석총)이나 굴식 돌방무덤과 뚜렷이 구별되는 덧널무덤(목곽분), 벽돌무덤(전축분)은 낙랑의 것으로서 낙랑군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인 호동(好童)왕자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하였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lt;br /&gt;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 自鳴角)가 있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보물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 달라고 요구한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게 도왔지만,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뒤이어 호동왕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lt;br /&gt;
&lt;br /&gt;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일종의 설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야기 속의 낙랑을 한(漢)나라가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아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독립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 속에,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고대 국가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한반도 내의 중국계 세력을 몰아내면서 성장해 온 역사적 시간들이 은유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믿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C%9E%90:_%ED%95%9C%EA%B5%AD_%EC%9C%A0%EA%B5%90_%EB%AC%B8%EB%AA%85%EC%9D%98_%EA%B8%B0%EC%9B%90%EB%A1%A0&amp;diff=615</id>
		<title>Draft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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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2T04:25: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교열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lt;br /&gt;
|집필자=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한국인은 기자를 모른다&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기자]], [[위만]]&lt;br /&gt;
|장소/공간=[[평양]], [[황하 유역]], [[강화도 첨성단]]&lt;br /&gt;
|사건=[[고조선 건국]], [[몽골의 침략]]&lt;br /&gt;
|기록물=[[삼국유사]], [[상서대전]], [[사기]], [[제왕운기]]&lt;br /&gt;
|개념용어=[[고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lt;br /&gt;
|물품/도구/유물=[[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고인돌]]&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lt;br /&gt;
&lt;br /&gt;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437&amp;amp;cid=46620&amp;amp;categoryId=46620&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고조선을 설명할 때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쓴 부분은 제외해도 괜찮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본 글의 제목 ‘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를 수정가능하다면, 어떤 제목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amp;lt;br/&amp;gt;&lt;br /&gt;
→ 유학은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이 경전에 근거한 후세 학자들의 체계적인 학문이고, 공자는 서기전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에 유학을 전해주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에 대한 근거를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단군의 나라 고조선===&lt;br /&gt;
&lt;br /&gt;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lt;br /&gt;
&lt;br /&gt;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자===&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lt;br /&gt;
&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Project_Management&amp;diff=614</id>
		<title>Project Management</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Project_Management&amp;diff=614"/>
				<updated>2017-08-02T02:17: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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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 3_16 || [[기독교]] &amp;amp;bull; [[Christianity]]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e599&amp;quot;|1차국문수정완 ||  ||  || 교수님 수정 예정&lt;br /&gt;
|-&lt;br /&gt;
| 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 3_17 || [[민간신앙]] &amp;amp;bull; [[Folk Belief]]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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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5 || [[이산가족찾기 캠페인]] &amp;amp;bull; [[The Finding Dispersed Families Campaign]]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지선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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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6 ||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amp;amp;bull; [[The June Democracy Movement and Korea's Democratizatio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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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7 || [[88 서울올림픽]] &amp;amp;bull; [[The 1988 Seoul Olympics]]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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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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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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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1 || [[김홍도, 신윤복]] &amp;amp;bull; [[Kim Hong-do and Sin Yun-bo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d9dd&amp;quot;|린지 예정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2 || [[윤동주]] &amp;amp;bull; [[Yun Dong-ju]]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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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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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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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8 || [[김대중]] &amp;amp;bull; [[Kim Dae-ju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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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프로젝트관리]]&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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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Project Managemen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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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4 || [[고구려]] &amp;amp;bull; [[Goguryeo]] ||  ||  || 린지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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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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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1 || [[대한제국]] &amp;amp;bull; [[Korean Empire]] ||  ||  || 린지 ||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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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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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amp;amp;bull; [[North Korea]] ||  ||  || 린지 ||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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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11 || [[식민 지배의 극복과 남겨진 과제(위안부)]] &amp;amp;bull; [[Overcoming Colonial Rule and Remaining Tasks (Comfort Women)]] || 김선옥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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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12 || [[독도 이야기]] &amp;amp;bull; [[About Dokdo Island]] || 주환석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lt;br /&gt;
|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13 || [[조선시대 신분의 이해]] &amp;amp;bull; [[Understanding the Social Classes of the Joseon Period]] || 박선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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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2 || [[팔만대장경판의 조성]] &amp;amp;bull; [[The Creation of the Tripitaka Koreana]]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지영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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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3 || [[명량해전과 이순신]] &amp;amp;bull; [[The Battle of Myeongnyang and Yi Sun-si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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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4 || [[서희]] &amp;amp;bull; [[Seo Hui]]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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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7 || [[백남준]] &amp;amp;bull; [[Baek Nam-ju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8 || [[김대중]] &amp;amp;bull; [[Kim Dae-ju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프로젝트관리]]&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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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Project Managemen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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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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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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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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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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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0 || [[조선]] &amp;amp;bull; [[Joseon]] ||  ||  || 린지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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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1 || [[대한제국]] &amp;amp;bull; [[Korean Empire]] ||  ||  || 린지 ||  ||&lt;br /&gt;
|-&lt;br /&gt;
|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2 || [[일제강점기]] &amp;amp;bull; [[Japanese Colonial Period]] ||  ||  || 린지 ||  ||&lt;br /&gt;
|-&lt;br /&gt;
|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3 || [[해방 이후]] &amp;amp;bull; [[Post-Liberation]] ||  ||  || 린지 ||  ||&lt;br /&gt;
|-&lt;br /&gt;
|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4 || [[대한민국]] &amp;amp;bull; [[South Korea]] ||  ||  || 린지 ||  ||&lt;br /&gt;
|-&lt;br /&gt;
| I. 한국사의 중요 흐름 || 1_1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amp;amp;bull; [[North Korea]] ||  ||  || 린지 ||  ||&lt;br /&gt;
|-&lt;br /&gt;
|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1 ||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 &amp;amp;bull; [[Gija: The Theory behind the Origin of Korea's Confucian Culture]] || 남정란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lt;br /&gt;
|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2 || [[낙랑: 한반도에 남은 한 제국의 유산]] &amp;amp;bull; [[Nangnang: A Remnant of the Han Empire on the Korean Peninsula]] || 주환석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lt;br /&gt;
|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3 || [[고대의 한일관계]](부: 임나일본부) &amp;amp;bull;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in Ancient Times]] || 주환석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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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6 || [[몽골과 고려(몽골 고려 지배의 특수성)]] &amp;amp;bull; [[Mongols and Goryeo: Unique Features of the Mongols' Rule of Goryeo]]  || 남정란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신보람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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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13 || [[조선시대 신분의 이해]] &amp;amp;bull; [[Understanding the Social Classes of the Joseon Period]] || 박선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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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 3_1 || [[한복]] &amp;amp;bull; [[Clothing]]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김지영 ||  || 린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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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 3_2 || [[한식]] &amp;amp;bull; [[Food]]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e599&amp;quot;|1차국문수정완 || 김지영 ||  || 린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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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 3_4 || [[국악]] &amp;amp;bull; [[Music]]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e599&amp;quot;|1차국문수정완 || 린지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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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43d&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4 ||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 &amp;amp;bull; [[Multicultural Society]]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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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43d&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6 ||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 &amp;amp;bull; [[Low Birth Rates, an Aging Society, and Economic Stagnation]]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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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43d&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7 ||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 &amp;amp;bull; [[Seoul, the Heart of Asia - Past and Future]]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43d&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8 || [[인구변동과 도시화]] &amp;amp;bull; [[Population Change and Urbanization]]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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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 || [[혜초의 천축기행]] &amp;amp;bull; [[Hyecho's Trip to India]]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지영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2 || [[팔만대장경판의 조성]] &amp;amp;bull; [[The Creation of the Tripitaka Koreana]]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지영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3 || [[명량해전과 이순신]] &amp;amp;bull; [[The Battle of Myeongnyang and Yi Sun-si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4 || [[동의보감의 간행]] &amp;amp;bull; [[The Publication of the Dongui Bogam]]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5 || [[하멜의 한국기행]] &amp;amp;bull; [[Hamel's Trip to Joseo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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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7 || [[명성황후 시해]] &amp;amp;bull; [[The Assassination of Empress Myeongseo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8 || [[독립운동과 해방]] &amp;amp;bull;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Liberatio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9 ||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 &amp;amp;bull; [[The Division of Korea and the Korean War]]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0 || [[새마을운동과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amp;amp;bull; [[The New Village Movement and Park Chung-Hee's Modernization of the Nation]]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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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1 || [[베트남전(1955-1975)과 파병]] &amp;amp;bull; [[The Vietnam War and Dispatched Troops]]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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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21 || [[촛불 민주주의]] &amp;amp;bull; [[Candlelight Democracy]] || 임미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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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 || [[광개토대왕]] &amp;amp;bull; [[King Gwanggaeto]]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2 || [[근초고왕]] &amp;amp;bull; [[King Geunchogo]]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3 || [[선덕여왕]] &amp;amp;bull; [[Queen Seondeo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4 || [[서희]] &amp;amp;bull; [[Seo Hui]]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5 || [[김부식]] &amp;amp;bull; [[Kim Bu-si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6 || [[정도전]] &amp;amp;bull; [[Jeong Do-jeo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7 || [[장영실]] &amp;amp;bull; [[Jang Yeong-sil]]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8 || [[신사임당]] &amp;amp;bull; [[Sin Saimda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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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1 || [[김홍도, 신윤복]] &amp;amp;bull; [[Kim Hong-do and Sin Yun-bo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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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6 || [[김환기]] &amp;amp;bull; [[Kim Hwang-gi]]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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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2 || [[낙랑: 한반도에 남은 한 제국의 유산]] &amp;amp;bull; [[Nangnang: A Remnant of the Han Empire on the Korean Peninsula]] || 주환석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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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3 || [[고대의 한일관계]](부: 임나일본부) &amp;amp;bull;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in Ancient Times]] || 주환석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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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한국에 대한 제논의 || 2_7 || [[조공제도(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이해)]] &amp;amp;bull; [[The Tribute System: Understanding East Asian Diplomacy]] || 남정란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9e2eb&amp;quot;|교열완 || 조윤정 ||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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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 3_22 || [[종묘제례]] &amp;amp;bull;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 Jongmyo Jerye]]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허정범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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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a0ab&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3 ||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 &amp;amp;bull; [[Women's Advancement and Social Change]]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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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a0ab&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4 ||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 &amp;amp;bull; [[Multicultural Society]]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a0ab&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5 || [[스마트폰과 인터넷]] &amp;amp;bull; [[Smart Phones and the Internet]]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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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a0ab&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6 ||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 &amp;amp;bull; [[Low Birth Rates, an Aging Society, and Economic Stagnation]]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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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a0ab&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7 ||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 &amp;amp;bull; [[Seoul, the Heart of Asia - Past and Future]]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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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background-color:#ffa0ab&amp;quot;|III.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3_28 || [[인구변동과 도시화]] &amp;amp;bull; [[Population Change and Urbanization]] || 신현덕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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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4 || [[동의보감의 간행]] &amp;amp;bull; [[The Publication of the Dongui Bogam]]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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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8 || [[IMF 경제위기와 금모으기운동]] &amp;amp;bull; [[The IMF Economic Crisis and Gold Collection Movement]] || 황정욱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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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19 || [[2002 한일월드컵]] &amp;amp;bull; [[The 2002 Korea-Japan World Cup]]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20 ||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amp;amp;bull; [[Gangnam Style and the Power of Hallyu]] || 정경란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IV. 한국의 중요 사건 || 4_21 || [[촛불 민주주의]] &amp;amp;bull; [[Candlelight Democracy]] || 임미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 || [[광개토대왕]] &amp;amp;bull; [[King Gwanggaeto]]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2 || [[근초고왕]] &amp;amp;bull; [[King Geunchogo]]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3 || [[선덕여왕]] &amp;amp;bull; [[Queen Seondeo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4 || [[서희]] &amp;amp;bull; [[Seo Hui]]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5 || [[김부식]] &amp;amp;bull; [[Kim Bu-si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6 || [[정도전]] &amp;amp;bull; [[Jeong Do-jeo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7 || [[장영실]] &amp;amp;bull; [[Jang Yeong-sil]]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8 || [[신사임당]] &amp;amp;bull; [[Sin Saimda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9 || [[이황]] &amp;amp;bull; [[Yi Hwa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0 || [[정조]] &amp;amp;bull; [[King Jeongjo]]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1 || [[김홍도, 신윤복]] &amp;amp;bull; [[Kim Hong-do and Sin Yun-bok]]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2 || [[윤동주]] &amp;amp;bull; [[Yun Dong-ju]]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3 || [[안중근]] &amp;amp;bull; [[An Jung-geu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이선용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4 || [[김구]] &amp;amp;bull; [[Kim Gu]]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5 || [[손기정]] &amp;amp;bull; [[Son Gi-jeo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6 || [[김환기]] &amp;amp;bull; [[Kim Hwang-gi]]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7 || [[백남준]] &amp;amp;bull; [[Baek Nam-jun]]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신보람 ||  ||&lt;br /&gt;
|-&lt;br /&gt;
| V. 한국의 중요 인물 || 5_18 || [[김대중]] &amp;amp;bull; [[Kim Dae-jung]] || 황인희 || style=&amp;quot;background-color:#b1daab&amp;quot;|2차검토완 || 김광수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프로젝트관리]]&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ebates_on_Korea&amp;diff=610</id>
		<title>Debates on Korea</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ebates_on_Korea&amp;diff=610"/>
				<updated>2017-08-01T10:14: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The section covers 13 controversial topics relating to Korean history, providing context, facts, and sources on each subject. &lt;br /&gt;
&lt;br /&gt;
# [[Gija: The Theory behind the Origin of Korea's Confucian Culture]] &lt;br /&gt;
# [[Nangnang: A Remnant of the Han Empire on the Korean Peninsula]] &lt;br /&gt;
#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in Ancient Times]]&lt;br /&gt;
# [[Tang and Silla: Imitation and Unique Characteristics]] &lt;br /&gt;
# [[Balhae: Shared History of Korea and China]] &lt;br /&gt;
# [[Mongols and Goryeo: Unique Features of the Mongols' Rule of Goryeo]] &lt;br /&gt;
# [[The Tribute System: Understanding East Asian Diplomacy]] &lt;br /&gt;
# [[Sino-Japanese and Russo-Japanese Wars: Foreign Powers Making the Korean Peninsula their Battleground]] &lt;br /&gt;
# [[A Sea with Two Names: The East Sea or the Sea of Japan?]] &lt;br /&gt;
# [[Koreans' Resistance to Japanese Imperialism]] &lt;br /&gt;
# [[Overcoming Colonial Rule and Remaining Tasks (Comfort Women)]] &lt;br /&gt;
# [[About Dokdo Island]] &lt;br /&gt;
# [[Understanding the Social Classes of the Joseon Period]]&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Key_Figures_of_Korea&amp;diff=609</id>
		<title>Key Figures of Korea</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Key_Figures_of_Korea&amp;diff=609"/>
				<updated>2017-08-01T09:56: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The section presents brief biographies of 19 historical figures of Korea.&lt;br /&gt;
&lt;br /&gt;
# [[King Gwanggaeto]]&lt;br /&gt;
# [[King Geunchogo]]&lt;br /&gt;
# [[Queen Seondeok]]&lt;br /&gt;
# [[Seo Hui]]&lt;br /&gt;
# [[Kim Bu-sik]]&lt;br /&gt;
# [[Jeong Do-jeon]]&lt;br /&gt;
# [[Jang Yeong-sil]]&lt;br /&gt;
# [[Sin Saimdang]]&lt;br /&gt;
# [[Yi Hwang]]&lt;br /&gt;
# [[King Jeongjo]]&lt;br /&gt;
#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 [[Yun Dong-ju]]&lt;br /&gt;
# [[An Jung-geun]]&lt;br /&gt;
# [[Kim Gu]]&lt;br /&gt;
# [[Son Gi-jeong]]&lt;br /&gt;
# [[Kim Hwang-gi]]&lt;br /&gt;
# [[Baek Nam-jun]]&lt;br /&gt;
# [[Kim Dae-jung]]&lt;br /&gt;
&lt;br /&gt;
===Possible Additions===&lt;br /&gt;
# [[Jeong Yak-yong]]&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Sin_Saimdang&amp;diff=608</id>
		<title>Draft Sin Saimda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Sin_Saimdang&amp;diff=608"/>
				<updated>2017-08-01T09:56: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Admin님이 Sinsaimdang 문서를 넘겨주기를 만들지 않고 Sin Saimdang 문서로 이동했습니다&lt;/p&gt;
&lt;hr /&gt;
&lt;div&gt;{{BasicInfo&lt;br /&gt;
|Title= Sinsaimdang&lt;br /&gt;
|Author=&lt;br /&gt;
|Actor=&lt;br /&gt;
|Place=&lt;br /&gt;
|Event=&lt;br /&gt;
|Record=&lt;br /&gt;
|Concept=&lt;br /&gt;
|Object=&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C%80%EB%AC%B8&amp;diff=606</id>
		<title>대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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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1T08:54: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 */&lt;/p&gt;
&lt;hr /&gt;
&lt;div&gt;=='''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lt;br /&gt;
{{Clickable button|[[Project Managemet|진행현황]]}}&lt;br /&gt;
==='''주제 Topics'''===&lt;br /&gt;
# [[한국사의 중요 흐름]] [[An Overview of Korean History]]&lt;br /&gt;
# [[한국에 대한 제논의]] [[Debates on Korea]]&lt;br /&gt;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Understanding Korea through Culture]]&lt;br /&gt;
# [[한국의 중요 사건]] [[Key Events of Korea]]&lt;br /&gt;
# [[한국의 중요 인물]] [[Key Figures of Korea]]&lt;br /&gt;
# [[지도로 보는 한국]] [[Korea as Seen through Maps]]&lt;br /&gt;
&lt;br /&gt;
&lt;br /&gt;
==='''집필의 목적 및 배경'''===&lt;br /&gt;
&lt;br /&gt;
현재 한국에는 한국의 역사 문화를 소개하는, 특히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시각만을 반영하거나, 텍스트 중심의 국문으로만 제작되어 있기도 하고, 근거자료가 미약한데도 재미만 추구하여 학교 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들이 많이 있다. 또한 번역 자료의 경우 한국어로 집필한 후, 이를 단순 번역함에 따라 한국학 및 한국문화에 대한 기초가 미약한 외국인들이 문화적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맥과 단어사용 등으로 한국역사문화에 입문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게 되는 제약요인들이 있다.&lt;br /&gt;
&lt;br /&gt;
본 연구에서는 국내외 학교 및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역사문화 이야기 자료를 개발하고, 각각의 주제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집필하며, 풍부한 시각자료와 동영상 자료를 포함시킴으로써 기존 자료와는 차별된 한국역사문화 이야기 자료를 개발하고자 한다. 특히 국내 학교 및 교육현장만을 겨냥한 이야기 자료 개발이 아니라, 해외의 학교 및 교육현장에서 한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계인의 시각에서 고려된 주제 설정, 집필 방식, 자료 개발 등의 기법들을 충분히 검토하여 본 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본 연구는 책자 간행뿐만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로도 개발하여 국내외의 학교 및 교양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한국역사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원고외의 시청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한국역사문화 이야기를 개발하고자 한다. 또한 해외에서 한국역사문화 교육을 위한 시청각 콘텐츠 확보가 어려운 상황(저작권 사용 허가 등의 문제)임을 고려하여, 이 연구를 통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저작권을 갖는 한국역사문화의 텍스트 및 시청각자료 콘텐츠를 확보함으로써 향후 국내외 학교, 출판사에서 학국학 교재 개발시 용이하게 활용될 수 있는 교육 자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자 한다.&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605</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605"/>
				<updated>2017-08-01T08:49: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 급증하는 1인 가구 /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으며,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갈 전망이다.&lt;br /&gt;
&lt;br /&gt;
표1) 인구 성장률 단위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성장율 || 0.52 || 0.50 || 0.77 || 0.53 || 046 || 0.63 || 0.53 || 0.45 || 0.39&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인구는 1955~1960년 사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세계적인 베이비붐 현상과 맞물려 이 기간 3.0%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1950년 시작된 전쟁으로 총체적인 혼란과 불확실, 경제 파탄에도 불구, 인구는 1960년까지 급격히 증가하였다.&lt;br /&gt;
&lt;br /&gt;
이는 8·15광복 이후 증가 요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혹은 강압에 의해 만주와 일본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국내로 돌아왔고, 전쟁 기간에 북한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전쟁으로 사망한 자연 감소분을 넘어섰다. 즉 사회적 증가였다. 둘째는 한국전쟁 후에 사람들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베이비붐을 이어갔고, 가족의 출산력도 크게 늘어나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 자연적 증가였다.&lt;br /&gt;
&lt;br /&gt;
그 이후 10년을 주기로 한국의 인구성장률을 보면 1970년 2.18%, 1980년 1.56%, 1990년 0.99%로 서서히 낮아졌다. 이러한 하락세는 출산력 감소 때문이다. 같은 시기 합계출산율은 4.53, 2.82, 1.57로 낮아졌는데, 이는 여성들이 평생 동안 낳은 아이의 수가 20년 사이에 3명가량 줄어든 것이다. 반면에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어나 조사사망률(인구 1,000명당)은 1970년 8.0, 1980년 7.3, 1990년 5.6로 감소하였다. 이처럼 출산율과 조사사망률이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자 사람들은 인구 감소를 실제로 느끼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서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8, 2010년 1.23, 2016년 1.17로 낮아졌으며, 그에 따라 인구성장률은 1996년 이후 꾸준히 1%를 밑돌았다. 최근에는 0.5% 내외로 심각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인구성장률이 낮아지고 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지는 않아 총인구는 8·15이후 계속 증가했다. 1949년 2,000만 명이 조금 넘었던 총인구는 2017년 5,100만 명을 넘어섰다. 통계분석에 따르면  총인구는 2031년 5,296만 명을 기록한 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표2) 총인구 단위 10,000명&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인구 || 4,906 || 4,931 || 4,955 || 4,994 || 5.020 || 5,043 || 5,075 || 5,102 || 5,125 || 5,145&lt;br /&gt;
|}&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전국의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lt;br /&gt;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달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lt;br /&gt;
한편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집중은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도시쏠림현상은 현재는 거의 정체 상태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지역&amp;lt;ref&amp;gt;도시지역기준 : 주거·상업·공업·녹지 지역&amp;lt;/ref&amp;gt;에 몰려 있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표3) 도시지역 인구 단위 10,000명, 비율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lt;br /&gt;
|-&lt;br /&gt;
| 도시지역인구 || 4593 || 4623 || 4638 || 4684 || 4705 || 4730&lt;br /&gt;
|-&lt;br /&gt;
| 비도시지역인구 || 458 || 450 || 457 || 430 || 428 || 423&lt;br /&gt;
|-&lt;br /&gt;
| 도시지역인구비율 || 90.9 || 91.1 || 91.0 || 91.6 || 91.7 || 91.8&lt;br /&gt;
|}&lt;br /&gt;
&lt;br /&gt;
첫째,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 수보다 많지만 도시지역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고, 신도시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신도시지역으로 서울 주위의 김포, 고양, 구리, 하남, 분당, 동탄, 용인, 판교 등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amp;lt;ref&amp;gt;일정금액을 주인에게 맡기고 살다가 이사 갈 때는 그 금액을 모두 돌려받는다. &amp;lt;/ref&amp;gt;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고 있는 중이다.&lt;br /&gt;
&lt;br /&gt;
다음은 교통문제다. 자가용 차량을 이용하는 이동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서울 주변을 거미줄처럼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건설했으나 자동차 증가율을 따르지 못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하여 해결하고 있다.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또 서울 주변에 5개 순환도로를 완성했으며 새 지하철 노선, 지하도로, 직행지하철 노선 등을 건설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육아시설 증설, 상하수도 개선, 더 많은 노인복지 시설의 신축과 개선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a&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1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주제인 ‘인구변동과 도시화’인데 글의 주요 내용은 주택문제, 도시와 농촌 간의 주택공급 불균형 등 주택문제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특징, 문제점, 정부의 해결방안 등 현재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현상과 극복을 위한 성공사례 제시를 희망한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인구변동과 도시화에 대해 통계자료를 본 원고에 적합한 표로 작성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lt;br /&gt;
- 인구변동에 대한 내용에는 어떤 내용을 서술할 것인지 먼저 생각하고 각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서술하였으면 합니다. 각 문단마다 다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어, 집필자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나,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으로 해방 이후 또는 남북 분단 이후 현재의 남한의 인구 증가율, 각 연령별, 성별 비율의 변동, 도시와 농어촌 인구 구성 추이를 각 사회 변동과 연계하여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도시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할 때, 도시에 대한 개념 설명을 간단하게 했으면 한다.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기준 및 시기를 제시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도시화의 문제는 주택문제 뿐 아니라 교통문제, 교육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가져왔다. 너무 주택문제에만 집중되어 서술하였다. 또한 각각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및 민간의 노력과 개선된 점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2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기사 제목 중 ‘인구 감소와 탈도시화’는 내용과 맞지 않는다. 제목이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이 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읽히지 않는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도시화율이 매우 높으며, 수도권 집중 현상도 심각한 편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 문제점, 개선하기 위한 정책 제시 등의 흐름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수도권 집중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행정중심 복합도시를 건설하는 등의 노력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lt;br /&gt;
|의견2=글의 내용을 다듬을 필요가 있음. 한국 인구변동과 도시화의 특징을 서술해 줄 필요가 있음. 현재 한국에서 탈도시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음. 또한 제목이 ‘인구 감소와 탈도시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한 내용은 보이지 않음.&lt;br /&gt;
한국은 사회, 정치, 경제구조의 변화와 함께 인구구조 변화의 영향을 받아서 도시화가 진행되어 왔음. 한국 도시화의 특징을 살펴보면 상술한 영향과 함께 인구감소 경향, 저출산 고령화 경향, 외국인 증가 경향 등의 인구구조적 요인들로 대도시권은 상대적으로 인구 증가율이 높고, 고령인구 비중이 낮으며 외국인 인구 비중이 높다. 소도시와 농촌지역은 이와 반대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음. &lt;br /&gt;
제목에 맞게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구조의 변화와 인구구조의 변화가 한국의 시기별 도시화와 어떻게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지 서술할 필요가 있음.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604</id>
		<title>Draft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604"/>
				<updated>2017-08-01T08:48: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모두 함께 사는 한국인 / 국가발전의 동반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혼혈아 향가 색목인 [[단일민족]] [[쇄국정책]] 세계화&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다문화 사회 외국인 거주자 200만 시대&lt;br /&gt;
모두가 함께 사는 한국인&lt;br /&gt;
&lt;br /&gt;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 명(전체 인구의 4.0%)을 넘어섰다. 2007년의 100만 명(인구 대비 2.2%)을 넘어선 지 9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중국인이 1,016,607명(49.6%)으로 가장 많고, 베트남 149,384명(7.3%), 미국 140,222명(6.8%), 타일란드 100.860명(4.9%), 필리핀 56,980명(2.8%), 우즈베키스탄 54,490명(2.7%) 순이다.&lt;br /&gt;
&lt;br /&gt;
외국인의 국내 체류자는 2013년 이후 매년 0.2%p~0.4%p씩 증가하여, 전체 인구에 대한 외국인 체류자의 수가 1%p 증가하는데 4년이 걸렸다. 이 같은 증가 추세라면 체류 외국인이 인구의 10%에 이르는 시점이 늦어도 2024년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정부도 이제는 그들의 국내 정착을 돕는데서, 그들이 본격적인 역량을 발휘하도록 방향을 바궜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사회 각 분야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그중 정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국제결혼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여성들이 미미하지만 매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 결혼 이민자의 수는 2011년 144,681명이던 것이 2015년에는 151,608명으로 매년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 이들 중 84.6%가 여성으로, 한국 남성들이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인 것이다. 여성이 외국인 남성을 신랑으로 맞아들인 것은 15.4%로 남성에 비해 월등하게 적다. 이들로 구성된 다문화&amp;lt;ref&amp;gt;김문희 문영숙 김병희,2012, 「텔레비전 광고 콘텐츠에 묘사된 외국인 모델의 특성 분석」, 광고학연구, Vol.23 No.8, p.9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사용되었지만, 지난 2005년 정부 차원에서 급증하는 이주노동자 대책을 모색하면서 급부상되었다&amp;lt;/ref&amp;gt; 가구가 전체 가구의 1.5%인 299,241가구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들 가구와 가족 구성원수가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도 늘었다. 대표적인 문제가 가족 간에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원활하게 소통되지 않는 점이다. 이에 따라 태어난 아이들의 교육과 사회적응 등 다방면의 문제를 낳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8년부터 다문화가정 기본계획을 수립, 시행해오고 있으며 2017년에는 다문화 가족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주무부서인 여성가족부는 총 1,506억 원의 예산을 들여 가족관계 개선, 정체성 형성, 사회성 발달, 미래설계 등을 지원하는 사업인 ‘다재다능 프로그램’ 운영기관을 105개로 늘리고, 이중언어 가족 환경 조성사업 등을 도울 계획이다.&lt;br /&gt;
&lt;br /&gt;
또 결혼이민자의 안정적인 가족생활과 사회경제적 진출 확대를 위해, 한국생활 정보를 담은 휴대용 안내서 배포하고, ‘다누리 포털’(www.liveinkorea.kr)을 확장한다.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하여 취업 지원을 강화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인력을 대폭 확충한다. 결혼이민자의 국내 거주기간이 장기화됨에 따라 ‘결혼이민자 정착단계별 지원 패키지 프로그램’을 100개 이상으로 확대한다.&lt;br /&gt;
&lt;br /&gt;
다문화교육을 위한 ‘다누리배움터’(www.danurischool.kr)에 유아용 콘텐츠를 개발하여, 다문화 아동들의 다문화교육, 다문화교육자료, 온라인학습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lt;br /&gt;
&lt;br /&gt;
각 방송과 기업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KBS, MBC 등 각 방송사는 한류 드라마에 다문화를 포함하고, 때로는 그들을 주연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또 삼성, 현대, LG U+, 하나금융그룹 등은 공익광고를 통해서도 다문화의 유리함과 우수성을 지원하자고 광고한다. 한 기업광고에서는 놀이터에서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의 모습과 함께 “베트남 엄마를 두었지만 당신처럼 이 아이는 한국인입니다”라는 카피가 흘러나오며, 아이가 밥을 먹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독도를 우리 땅이라 생각합니다. 축구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외칩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군대에 갈 것이고,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할 것입니다. 당신처럼!&amp;lt;ref&amp;gt;하나금융그룹 공익광고&amp;lt;/ref&amp;gt;”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자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온 유학생도 10만 명에 가깝다. 2015년 91,332명이 세계 160개국 이상에서 왔다. 이들의 전공은 다양하며 특히 기술 분야와 한국어, 한국 역사, 한류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중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인력이 부족하자 정부는 1991년부터 산업연수생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들이도록 제도화했고, 각 기업들은 외국의 우수한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근로자들을 필요로 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이 이처럼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가 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20세기만 해도 그들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말을 순수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썼고, 때로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때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외국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외국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네덜란드 영국 등에 산재해 있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에 등장하는 남자도 외국인이며, 고려 시대 ‘쌍화점’에는 아예 색목인으로 못 박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바꾸기 조금씩 허물어졌다. 한국전쟁에 16개 나라가 파병해 한국 국토와 자유와 인권을 지켰다. 그 후 남북이 분단되었고 대한민국은 섬나라처럼 외국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 했다. 그 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1980년대 문호를 활짝 열었다. 한국은  근로자, 무역상, 유학생, 서비스 산업 종사자 등이 해외로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몰려 왔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쫓겨 나가 살던 동포들이 돌아왔고, 뒤이어 그 나라 사람들이 묻어 왔다. 산업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 정착했고, 국적까지 취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외국에서 온 이주 근로자들은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하듯 한국인들이 꺼리던 육체노동분야로 파고들었고, 지금은 그 분야의 대세를 이루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정부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근로자의 입국을 허용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연수시키는 동시에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를 포함한 국가가 될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향후 한국 사회는 보다 더 성숙한 사회로 나가는 장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lt;br /&gt;
*표준국어대사전 &lt;br /&gt;
*조선왕조실록&lt;br /&gt;
*산업연수생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1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대상 독자는 외국인임을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혈통주의 비판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국제결혼 등으로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한 것은 불과 20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갖추어 나가고 있으므로 이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기사 제목으로 제시한 “같이 갑시다”는 다문화가 시작되던 초기에는 의미있게 통용될 수 있으나, 한국 사회는 오늘날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었으므로 다른 기사 제목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단일민족 및 다문화가정에 대한 과거의 생각, 현재 생각의 변화 및 정책에 대해서도 서술&amp;lt;br/&amp;gt;&lt;br /&gt;
- 현재 다문화사회가 되게 된 상황을 시대 순서별 그리고 상황별로 나누어 설명했으면. 외국인 유입에 대해 표를 만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lt;br /&gt;
- 농촌 총각들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이 2000년대에 들어와 확산되었나? 외국인과 결혼하는 비율은?&amp;lt;br/&amp;gt; &lt;br /&gt;
- 본 원고는 다문화사회에 대해 농촌 총각들의 결혼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는데, 그 외 시기별로 변화하는 다른 요소들도 정리하였으면 좋겠다. &lt;br /&gt;
- 다문화가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익광고 등을 현재 한국의 노력과 앞으로의 전망도 적어주었으면.&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2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문장의 뜻을 좀 더 명확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음.&lt;br /&gt;
예 1)&lt;br /&gt;
“한국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를 포함한 국가가 될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향후 한국 사회는 보다 더 성숙한 사회로 나가는 장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lt;br /&gt;
&lt;br /&gt;
예 2)&lt;br /&gt;
“이런 상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바꾸기 조금씩 허물어졌다. 한국전쟁에 16개 나라가 파병해 한국 국토와 자유와 인권을 지켰다. 그 후 남북이 분단되었고 대한민국은 섬나라처럼 외국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lt;br /&gt;
→ 한국의 다문화사회 형성과 한국전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한국의 이주노동은 1980년대 후반 들어 본격화된 것으로 알고 있고, 이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lt;br /&gt;
&lt;br /&gt;
예 3)&lt;br /&gt;
이후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몰려 왔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쫓겨 나가 살던 동포들이 돌아왔고, 뒤이어 그 나라 사람들이 묻어 왔다.&lt;br /&gt;
→ 한국의 다문화사회는 경제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의 소득급증과 1992년 중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예 4)&lt;br /&gt;
&amp;lt;del&amp;gt;“그중 정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국제결혼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여성들이 미미하지만 매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amp;lt;/del&amp;gt;을 삭제하고 “최근 결혼 이민자의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로 수정함.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603</id>
		<title>Draf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603"/>
				<updated>2017-08-01T08:46: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산아제한 포스터&lt;br /&gt;
|개념용어=평균기대수명, 경제성장률, 산아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lt;br /&gt;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lt;br /&gt;
1960년대 초까지 한국은 인구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정책목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시작하며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소라 여겼다. 교육, 주택, 도시기반 시설 확충 등에 투자하는 것을 비용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당시 정부는 “아들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이후에도 장기적인 인구 계획보다는 당장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산아제한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1980년 국가는 경제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lt;br /&gt;
&lt;br /&gt;
여기에다 산업화에 따라 도시로 몰려온 젊은 세대들의 개인주의에 가까운 의식 변화와 소득 수준 향상 욕구 등에 따라 출산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들어 1.25명 이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비도시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 18세 이하의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41.1%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84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에 의하면 2045년 한국 가구의 71.3%가 2인 이하의 가구가 된다. 이중 혼자 사는 가구가 36.3%로 한국의 대표 가구가 된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행복함보다는 문제를 떠않게 되었다. 이는 자식 없이 사는 미혼 가구가 늘어나고, 홀로된 사람이 재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한국의 인구성장률은 1970년대만 해도 2.18%였던 것이 1980년대 말 1%로 급격하게 내려갔고, 2000년대에는 급기야 0.5%이하가 되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증가가 2040년에는 –0.32%, 2060년에는 –0.97%로 예상된다며 우려한다.&lt;br /&gt;
&lt;br /&gt;
인간의 수명 연장은 발전의 상징이었다. 한국도 선진 각국의 예처럼 의학기술발달과 의료보험 혜택 증가, 위생시설 확장, 영양상태 증진 등에 투자를 확대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노령인구가 출산율 저하와는 역으로 급속하게 증가, 인구구성이 빠르게 고령사회로 접근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0년에 총인구의 7.2%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로 들어섰으며,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가,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노인 문제도 저출산 문제만큼이나 심각하다. 자살, 빈곤, 질병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그중 자살률은(10만 명당 25.8명) OECD 국가 중 가장 높으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10만 명당 64.9명)과 노인(65세 이상)인구 13.8%도 우울한 지표다.&lt;br /&gt;
&lt;br /&gt;
영국의 BBC 방송은 2017년 2월 “2030년에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성도 80대 후반에 도달할 것으로 보여 한국의 노인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으로 노후생활을 보장받기 시작했고, 예방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처럼 저출산과 노령화가 종국에는 경제활동 인구 감축으로 이어져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고, 시장도 위축되면서 곧바로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나쁜 사이클로 들어간다는 의미다.&lt;br /&gt;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지금처럼 급속하게 인구의 고령화가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이 10년 후 0%대로 내려갈 수 있다고 예측했다.&amp;lt;ref&amp;gt;한국은행 경제연구원, 2017,  「인구고령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amp;lt;/ref&amp;gt; 이런 추세라면 경제성장률은 2000~2015년 3.9%성장에서 2016~2025년에는 1.9%로 내려갈 전망이다. 이어 2026~2035년에는 0.4%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2036년에는 생산가능인구비중이 하락하고, 인구증가율 하락에 따른 효과까지 감안하면 성장률이 0%로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5%~11.7%까지였던 것과 비교하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을 넘나들 만큼 성장했으며, 성장률은 2%대를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했다. 정부는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예측하고 국민의 삶의 질 개선 및 지속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5개년 기본계획, 연도별 시행계획)의 수립과 평가를 심위하기 위해 2005년 6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으며 이에 따라 기구가 설립됐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 문제가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자 2012년 이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했다. 여기에는 출산분야, 고령사회분야, 경제분야 등 3개 분야에 걸쳐 인구경쟁력유지 분과, 일과 가정양립지원 분과, 모자보건증진 분과 등 모두 10개의 분과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2020년까지 합계출산율을 현재 1.19명에서 1.4명으로 올리기 위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을 마련, 시행중이다.&lt;br /&gt;
&lt;br /&gt;
또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도 장단기 고령화 및 고령사회 마스터플랜, 고령사회조례 등을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은행은 OECD 회원국의 사례를 분석한 ‘고령화의 원인과 특징’ 보고서에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2~2012년 32개 회원국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고, 남녀 간 임금격차가 작을수록 출산율이 높았다. 양육수당 등 가족복지 뿐만 아니라 공적연금으로 은퇴 후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도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고, 주택가격상승률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lt;br /&gt;
&lt;br /&gt;
이 자료에 따르면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1%p 늘면 출산율은 0.31%p 증가했다. 남녀임금격차가 1%p 감소하면 출산율은 0.05%p 늘었다. 복지 지출도 출산율을 높이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보육수당, 출산·휴직 급여, 출산지원금 등이 1%p 높을수록 출산율도 0.05%p 늘었다. 공적연금 지출이 1%p 늘면 출산율이 0.02%p 높아졌다. 가족복지뿐만 아니라 안정적 노후 소득 보장이 출산과 자녀 양육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주택 가격 상승률도 출산에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결론으로 이 문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하며 국민들도 이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참고문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BBC&lt;br /&gt;
*OECD&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lt;br /&gt;
*국무총리실&lt;br /&gt;
*통계청&lt;br /&gt;
*한국고용정보원&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1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주제는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성장인데 산아제한 정책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문제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핵가족화, 개인주의 생활방식, 노동시장 구조와 관련한 복합적인 문제이다. 자본투입의 한계 등을 상쇄할 만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처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급감까지 우려되는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료, 복지 등)에 대한 서술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에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면, 이에 대한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저출산 고령화의 내용은 인구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저성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고민되었다. 내용도 저출산 고령화에 맞추어 서술하였고, 경제저성장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 문단에만 나오므로 제목에서 빼는 것을 제안함&amp;lt;br/&amp;gt;&lt;br /&gt;
- 산아제한 표어 내용도 인구변동 주제와도 연관되는데.&amp;lt;br/&amp;gt;-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현재 정책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중요한 정책 2-3가지라도 설명하면 좋겠다. &amp;lt;br/&amp;gt;&lt;br /&gt;
- 고령화사회가 된 배경을 설명하고 고령화 사회가 되었을 때 우려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서술할 것. 본 원고에서는 노인 자살율만 문제로 제시하였고, 그 해결책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만을 설명하고 있는데,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보았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2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기사제목이 내용과 맞지 않음. “고령화 사회로 변모하는 한국사회, 대책마련을 위한 고군분투” 와 같이 수정해야 할 것 같음.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602</id>
		<title>Draft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602"/>
				<updated>2017-08-01T08:45: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왕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세자]], 문무백관, 종친, [[영의정]],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종]]&lt;br /&gt;
|장소/공간=[[종묘]], 정전, [[영녕전]] &lt;br /&gt;
|사건=[[일제강점기]], 광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실, 신위, 협실, 신주, 납일, 취위, 영신, 전폐, 신관례, 진찬,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 망료, [[종묘 제례악]], 정대업 · 보태평,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 구장면복, 중요무형문화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세계무형유산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종묘 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度’자는 ‘헤아릴 탁’이라는 음도 있어 탁조라고도 함.&lt;br /&gt;
● 영녕전 1991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가 모셔져서 총 34위임.(종묘 홈피 참조)&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위키백과&lt;br /&gt;
====관련자료====&lt;br /&gt;
*홀기해설(宗廟大祭笏記解說)』(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75)  &lt;br /&gt;
*[http://www.jongmyo.net/ 종묘제례 홈페이지]&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1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밑 줄 친 부분은 종묘 제례를 설명할 때 필요한 내용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설]부분의 내용과 일치한다. 게다가 집필된 원고의 전체 내용은 종묘제례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종묘제례를 설명하는 세부 내용과 글의 전개 방식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종묘제례의 설명과 차별성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일부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을 경우 이에 대한 출처 표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종묘제례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탁조가 아니고 도조입니다. &lt;br /&gt;
-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 서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기울기가 가팔라 → 다른 표현 없을까요? 기울기가 심해서?&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왕은 총 27명인데, 정전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 영녕전에는 16명의 왕과 17명의 왕비가 모셔졌는데, 각각 다른 전에 구별하여 모신 기준을 정리해주세요. 그리고 4대 선조는 어디에 모셨는지?&amp;lt;br/&amp;gt;&lt;br /&gt;
- 종묘 건축의 특징은 계속 증축되었다는 것, 그럼 언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지도 간략히 적어주었으면. &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황인희의 글은 영녕전에 33명의 신주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황정욱 글에는 34명의 신주가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서 수정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②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서거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amp;lt;br/&amp;gt;&lt;br /&gt;
③ 종묘의 위치 :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amp;lt;br/&amp;gt;&lt;br /&gt;
④ 황인희는 종묘제례의 순서를 자세히 썼는데, 황정욱은 이를 간략하게 3절차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다시 생각해서 정리하였으면 한다. &lt;br /&gt;
⑤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이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2차===&lt;br /&gt;
&amp;lt;참고자료&amp;gt;&lt;br /&gt;
'''8. 종묘와 종묘제례, 종묘제례악(유네스코 화보집 원고)'''&lt;br /&gt;
&lt;br /&gt;
종묘(宗廟)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왕실 사당이다. 종묘에서는 매년 종묘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제례[종묘제례]가 행해졌다. 제례가 행해질 때 기악(器樂)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거행되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록되어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 전체가 모여 종묘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에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고 함께 이 장에서 함께 다룬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이었다. 고려는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아 사원과 승려를 우대했다. 그 결과 고려 말에 이르면 사원이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여 국가 재정을 잠식했고, 승려들이 타락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불교의 폐해를 생생히 목격한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을 세우고 난 뒤 ‘억불숭유(抑佛崇儒)’를 내세웠다.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유교는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고려의 유학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의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운영했다.&lt;br /&gt;
&lt;br /&gt;
1392년 조선의 건국에 따라 왕조가 새로 개창된 만큼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수도 이전이 결정되었다. 계룡산(鷄龍山) 등 몇 몇 후보지 가운데 한양[오늘날 서울]이 새로운 수도로 정해졌고, 수도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한양은 고려시대 남경(南京)으로 불리며 새 도읍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을 만큼 지형이 좋았다. 그리고 국토의 한 가운데 있는데다가 산세가 좋아 외적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큰 강[한강]을 끼고 있어 조운(漕運)에도 유리했다.&lt;br /&gt;
&lt;br /&gt;
도성에서 맨 먼저 정해진 자리는 궁궐이었다. 그리하여 북악산(北岳山) 아래 자리 잡은 것이 경복궁(景福宮)이었다.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 쪽에 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또한 북악산, 낙산(駱山), 남산, 인왕산(仁王山)을 잇는 성곽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4대문과 4소문도 만들어졌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착공하고 이듬해 9월에 완공하여 태조의 4대조의 신주(神主)를 모셨다. 종묘제도는 중국 주(周)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의 태묘(太廟)에서는 태실(太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는 태실이 19칸이다. 종묘의 경내에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비롯하여 몇 개의 부속 건물이 있다. 종묘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재건하고, 다시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 역시 처음에는 6칸의 규모였는데, 현재는 16칸이다. 현재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49위)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 16실에는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34위)를 봉안하고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관련된 것으로 묘호(廟號)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였다. 세종대왕, 정조대왕 할 때 세종(世宗), 정조(正祖)가 묘호이다. 묘호로는 종(宗)과 조(祖)의 두 가지를 썼다. 묘호 사용의 최초 사례는 삼국시대 신라의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었지만, 유일한 사례로 끝났다. 이어 고려시대에는 태조만 조를 썼고, 이후 왕들에게는 종을 붙였다. 그러나 묘호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원간섭기에는 금지되었다가, 이후 조선왕조에서 부활되었다. 조나 종을 쓰는 데는 대체로, 조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국통(國統), 즉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 붙였다. 노산군(魯山君; 이후 단종[端宗]으로 추존됨), 연산군, 광해군처럼 왕위에서 쫓겨난 왕들에게는 조, 종의 묘호를 드리는 대신에 군으로 불렀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란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겨 제사를 특히 중시하였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크게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로 나뉜다. 정시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달과 섣달에 지냈으며,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냈다. 그밖에 계절에 따라 햇과일이나 곡식을 올리는 천신제(薦新祭)도 있었다. 현재는 전주리씨대종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이 행사를 주관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예절에서 모범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제례는 매우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종묘제례의 절차는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기악(樂)과 노래(歌)·춤(舞)을 말한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졌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세조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되면서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 진다. 일무는 가로, 세로 같은 수의 인원이 열을 지어 추는 춤으로 서열에 따라 8일무(64명), 6일무(36명), 4일무(16명), 2일무(4명) 등이 있다. 그 가운데 8일무는 천자의 뜰에서 추는 춤으로 공자를 기리는 문묘 제례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lt;br /&gt;
&lt;br /&gt;
문무는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 보태평에 맞추어 왼손에는 피리종류인 약(龠)을 오른손에는 깃털을 단 적(翟)을 들고, 무무는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정대업에 맞추어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들고 추는 춤이다. &lt;br /&gt;
&lt;br /&gt;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 종묘제례는 1462년에 정형화된 형식을 현재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lt;br /&gt;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amp;quot;세계무형유산걸작&amp;quot;으로 선정되었다.&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위 참고자료를 참고하여 교열할 필요가 있음.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amp;diff=601</id>
		<title>Draft 조선왕조실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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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1T08:43: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조, 철종, 순종, 실록청, 춘추관, 도청, 사관, 총재관, 도청 당상,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lt;br /&gt;
|장소/공간= 자하문, 차일암,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태인, 금산, 정읍 내장산 &lt;br /&gt;
|사건= 무오사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amp;lt;고종황제실록&amp;gt;, &amp;lt;순종황제실록&amp;gt;, 사초, &amp;lt;승정원일기&amp;gt;, &amp;lt;의정부등록&amp;gt;, &amp;lt;조보&amp;gt;, &amp;lt;비변사등록&amp;gt;, &amp;lt;일성록&amp;gt;, &amp;lt;선조수정실록&amp;gt;, &amp;lt;현종개수실록&amp;gt;, &amp;lt;경종개수실록&amp;gt;, &amp;lt;춘추관 시정기&amp;gt;, &amp;lt;태조실록&amp;gt;, &amp;lt;명종실록&amp;gt;, &amp;lt;태조실록&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한 1,893권의 책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amp;lt;승정원일기&amp;gt; &amp;lt;의정부등록&amp;gt;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amp;lt;조보(朝報)&amp;gt; &amp;lt;비변사등록&amp;gt; &amp;lt;일성록&amp;gt;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lt;br /&gt;
&lt;br /&gt;
사초는 전 왕 재위 시에 사관(史官)들이 작성해둔 기록으로 실록의 중심 자료가 되었다. 네 명의 전임 사관은 궁중에서 항상 임금 곁에 있다가 임금의 언행을 비롯하여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과 풍속의 미악(美惡)과 향토(鄕土)의 사정(邪正) 등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는 성격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필화(筆禍)를 막기 위해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하였다. 사초를 본 사관이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에도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엄하게 단속한 덕분에 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사초에 대한 비밀 유지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같은 변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에는 작성한 사관의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관은 자신이 써놓은 사초 때문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사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 또는 바꿔 쓰는 일이 간혹 있었다. 또 당쟁이 심할 때는 집권당의 사관이 자기 당파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여 공정성을 잃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다시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실록이 &amp;lt;선조수정실록&amp;gt; · &amp;lt;현종개수실록&amp;gt; · &amp;lt;경종개수실록&amp;gt; 등이다.&lt;br /&gt;
&lt;br /&gt;
실록 편찬은, 사초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실록청에 모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실록청의 구성원은 모두 춘추관의 관원이었는데, 다음의 세 단계를 거쳐서 실록을 완성하였다. 첫째 단계는, 셋에서 여섯 개로 나뉜 각 방에서 각종 자료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실을 골라내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심 부서인 도청에서 초고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간 원고를 작성하였다. 셋째, 실록청의 우두머리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간 원고의 잘못을 재수정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최종 원고를 만들어낸다.  &lt;br /&gt;
&lt;br /&gt;
실록이 완성되면 이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편찬에 이용한 기본 자료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고와 중간 원고는 서울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서 세초(洗草)하였다. 세초란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는 것인데 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amp;lt;태조실록&amp;gt;은 1413년에 편찬되었다. 이때 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등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 충주 · 성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고 이 전주 사고본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amp;lt;태조실록&amp;gt;부터 &amp;lt;명종실록&amp;gt;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제26대 고종과 제27대 순종 시대의 기록은 &amp;lt;고종황제실록&amp;gt; · &amp;lt;순종황제실록&amp;gt;으로 따로 분류한다. 이 두 황제 실록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27부터 1932년 사이에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황제와 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 왜곡이 많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 법률 · 경제 · 사회 · 풍속 · 천문 · 지리 · 과학 · 예술 · 학문 · 사상 · 윤리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조선왕조실록&amp;gt;은 원래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 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국역본이 413책이 완성되어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도 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lt;br /&gt;
* 『조선왕조실록』 1―범례―(신석호, 국사편찬위원회, 1955)&lt;br /&gt;
* 「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이성무, 『민족문화』 17, 1994)&lt;br /&gt;
*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정구복,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lt;br /&gt;
* 「조선전기 실록과 사론」(차장섭, 『국사관논총』 32, 1992)&lt;br /&gt;
*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한우근, 『진단학보』 66, 1988)&lt;br /&gt;
* 「조선전기의 사관」(차장섭, 『경북사학』 6, 1983)&lt;br /&gt;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태도와 사관의 역사의식」(차용걸, 『한국사론』 6, 국사편찬위원회, 1979)&lt;br /&gt;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신석호, 『사총』 5, 196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1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후세 → 후기&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의 실록은 1927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황제•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다.&amp;lt;br/&amp;gt;&lt;br /&gt;
②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여 413책으로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 제작되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2차===&lt;br /&gt;
&amp;lt;참고자료&amp;gt;&lt;br /&gt;
'''7. 조선왕조실록(유네스코 화보집 원고)'''&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로부터 제25대 철종(哲宗)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실록(實錄)은 국왕 사후(死後)에 국왕 재위 기간에 발생한 사실을 국가에서 주도하여 편년체(編年體)로 편찬한 관찬(官撰) 역사기록이다. 아울러 조선시대사 연구에 기초가 되는 자료이다.&lt;br /&gt;
&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新進) 사대부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에 침입한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인심과 신망을 얻었던 장군이었다. 신진사대부는 고려 후기 등장한 새로운 관료층이었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지주 또는 자영농민 출신으로서 유학(성리학)의 소양을 갖춘 학자적 관료(사: 학자 + 대부: 관료)였다. 이들은 문벌(門閥) 귀족과 불교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가 고려 사회의 개혁에 대한 뜻을 모으고 있을 때 계기가 찾아왔다. 중국에서 원(元)을 몰아내고 새로 등장한 명(明)이 과거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 지역을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했다. 이 지역은 고려가 무력을 동원하여 원으로부터 되찾은 곳이었다. 명의 요구를 부당하다고 생각한 고려는 명이 지배하고 있던 요동(遼東)지역 정벌을 결정했다. 정벌군의 총대장은 최영(崔瑩)이었고, 이성계는 부대장이었다. 최영은 국왕과 함께 수도인 개경에 남고, 이성계는 명령에 의해 군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향했다.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이성계는 명과 고려의 국경이었던 압록강에 있던 섬 위화동(威化島)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위화도 회군, 1388). 그리고 우왕(禑王)과 최영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lt;br /&gt;
&lt;br /&gt;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 함께 토지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토지개혁으로 문벌귀족과 사원이 소유하고 있던 막대한 농장이 몰수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새로 정권을 장악한 세력에 분배되기도 했고, 공전(公田)으로 편입되어 국가 재정을 개선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군사력, 정권, 경제력을 모두 장악한 이들은 마침내 공양왕(恭讓王)을 압박하여 왕위를 내놓게 하였다. 이어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고려왕조가 475년 만에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가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세워진 조선은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519년간 지속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외침(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분기점이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에 해당하는 약 200년의 시기와 외침 이후의 후기는 각각 그 사회적 성격이 판이했다.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두 세력으로 갈라졌다. 조선 왕조의 개창에 앞장서고, 조선 초기 여러 차례 정변에 참여하여 공신이 된 부류가 하나인데, 이들은 훈구파(勳舊派)라 불렸다. 또 한 세력은 조선왕조의 개국 무렵 고향에 내려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학자의 길을 간 사람들로서 이들은 사림파(士林派)라 불렸다. 조선 전기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끝에 끝내 사림파가 정권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가치관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집권세력이 된 사림이 분화되어 정권을 놓고 자체 경쟁을 벌였던 시기로서 사림파가 추구하던 성리학적 질서가 조선 사회에 확고히 뿌리내렸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7세기까지도 지속되고 있던 한국 고유의 전통이 유교적 질서로 대체되었다. 남아(男兒) 선호(남녀 차별), 재산 상속시 장자(長子) 우대 등의 관습이 고정된 것도 이 시기였다. 아울러 족보와 예학(禮學)이 강조되었다. 또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개항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으로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고, 이후 조선 사회는 근대사의 범주로 분류된다.&lt;br /&gt;
&lt;br /&gt;
오늘날 조선왕조의 역사를 잘 알 수 있게 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록은 국왕 재위 기간에 발생한 사실을 국가에서 주도하여 편년체로 편찬한 관찬 역사기록이다. 역대 왕들의 기록을 정리하고, 왕조사(정사)를 편찬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 정사로 기록한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고려시대의 실록을 자료로 하여 편찬된 것이었다. 고려왕조실록은 소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는다. &lt;br /&gt;
&lt;br /&gt;
실록은 국왕이 죽고 난 후에 실록청(實錄廳)이라는 임시기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실록청은 재상 급의 고위 관료가 총책임자가 되고, 사관(史官)들이 실무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실록청에서는 국왕 재임 시의 모든 기록을 수집,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 이용되는 자료는 정부 여러 기관의 문서인 시정기(時政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 일성록(日省錄) 등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lt;br /&gt;
&lt;br /&gt;
이 가운데 사초는 특히 중요한 것으로 사관들이 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처리과정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과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첨가하였다. 이러한 사초는 사관이외에는 국왕을 포함해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국왕 생전에 국왕과 국사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했고, 국왕 사후에는 실록 편찬의 실무를 담당했던 사관은 엄격하게 선발되었다. 본인의 실력과 성품 외에도 집안의 배경도 중요했다. 따라서 사관을 역임한 사람은 출세가 보장되었다.&lt;br /&gt;
&lt;br /&gt;
실록 편찬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사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찬 실무자가 1차 원고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추가와 삭제를 거쳐 2차 원고를 만들었다. 이어 총책임자 주도로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한편 실록으로 통칭하고 있지만,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처럼 정변을 통해 왕위에서 쫓겨난 왕의 것은 일기라고 부른다. 또한 조선의 제26대와 제27왕이었던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의 실록은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선총독부 주도로 편찬했다. 고종과 순종실록이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완성된 실록은 서울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이는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실록 소실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큰 도시에 보관되었는데,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된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 실록을 기준으로 다시 4부를 베끼고, 깊은 산속에 새로 세운 사고에 다시 보관시켰다.&lt;br /&gt;
사고에서의 실록 보관은 엄격했다. 사고 근처 사찰들로 하여금 사고 수비를 담당하게 하고, 사찰 주지를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또한 사고의 문을 열 때는 춘추관의 사관이 입회해야 했다. 아울러 습기나 곰팡이로부터 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제조한 상자에 보관했고, 정기적으로 햇볕에 말리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한일병합 이후 정족산(鼎足山, 강화도)과 태백산(太白山) 사고(경북 봉화)의 실록은 총독부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五臺山, 강원 평창) 사고의 실록은 일본이 반출하여 갔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적상산(赤裳山, 전북 무주)의 실록은 구황궁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실록은 남한과 북한에서 오랜 기간동안 번역되어 각각 ‘조선왕조실록’과 ‘리조실록’으로 출판되었다. 특히 남한의 실록은 CD-Rom으로도 제작되었다.&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위 참고자료를 참고하여 교열할 필요가 있음. 단 파란색 부분은 조선왕조실록과 직접적인관련은 없음.&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600</id>
		<title>Draft 궁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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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8-01T08:41: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인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1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2개의 원고 중 황인희 집필 원고가 내용이 더 충실하다. 황인희 원고를 중심으로 황정욱 원고 중 일부를 포함하여 보완하면 좋을 듯하다.&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 원고 보완 및 수정할 내용&amp;lt;br/&amp;gt;&lt;br /&gt;
①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 궁궐에서 주요한 대부분의 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 왕릉에 참배 또는 능행으로 고칠 것, &amp;lt;br/&amp;gt;&lt;br /&gt;
②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 세조 임금은 제7왕 &amp;lt;br/&amp;gt;&lt;br /&gt;
③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인 경우가 많다.&amp;lt;br/&amp;gt;&lt;br /&gt;
④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덕수궁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공식명칭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에서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는 것 정도는 포함시키면 궁궐로서의 위상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amp;lt;br/&amp;gt;&lt;br /&gt;
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국권을 빼앗았다.&amp;lt;br/&amp;gt;&lt;br /&gt;
⑥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 소속된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⑦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 덕수궁의 명칭은 일제가 ‘경운궁’의 품위를 깍으려고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사실이면 이 부분은 없애도 될 것 같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⑧ 경희궁은 조선후기 이궐로 많은 왕들이 즉위를 하고 집무를 보았던 왕궁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궁궐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너무 내용이 약소합니다. 좀 더 보충했으면 합니다. &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 원고에서 내용을 요약, 축소했으면 하는 내용 :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고종은 (1896년)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amp;lt;br/&amp;gt;&lt;br /&gt;
①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6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의식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외전, 관료들이 일하는 궐내각사,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전, 세자와 세자빈이 사는 동궁, 왕실가족과 후궁, 상궁, 궁녀 등이 생활하는 공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이다. &amp;lt;br/&amp;gt;&lt;br /&gt;
②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amp;lt;br/&amp;gt;&lt;br /&gt;
③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국왕 집무실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광화문도 2차례의 중건을 통해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2차===&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 조선 궁궐이 지금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곳 중 하나&amp;lt;br/&amp;gt;&lt;br /&gt;
- 궁궐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이벤트 소개 등 &amp;lt;br/&amp;gt;&lt;br /&gt;
- 궁궐의 단편적 나열보다는.. 경복궁 혹은 창덕궁을 중심으로 에피소드 등과 함께 재미있게 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 있음 &amp;lt;br/&amp;gt;&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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