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Korea100/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C%9D%B4%ED%98%9C%EC%98%81</id>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C%9D%B4%ED%98%9C%EC%98%81"/>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ED%8A%B9%EC%88%98:%EA%B8%B0%EC%97%AC/%EC%9D%B4%ED%98%9C%EC%98%81"/>
		<updated>2026-04-30T19:29:32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7.3</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4%9B%EB%B6%88_%EB%AF%BC%EC%A3%BC%EC%A3%BC%EC%9D%98&amp;diff=434</id>
		<title>Draft 촛불 민주주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4%9B%EB%B6%88_%EB%AF%BC%EC%A3%BC%EC%A3%BC%EC%9D%98&amp;diff=434"/>
				<updated>2017-07-30T10:37: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촛불 민주주의&lt;br /&gt;
|집필자=임미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최순실, [[박근혜]], 정유라, 우병우, 문고리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안종범, 이재용,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헌법재판소]], [[국회]]&lt;br /&gt;
|장소/공간=[[광화문광장]], [[청와대]], [[서울광장]], [[청계광장]], [[경복궁역]],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신교동 로터리&lt;br /&gt;
|사건=[[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미선-효순이 사건),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건]], [[최순실 게이트]]&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촛불집회]](candlelight vigil), [[민중총궐기]], 대통령 탄핵소추, [[특검]], 탄핵심판, 직접민주주의, 촛불문화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촛불집회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주요방식으로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촛불문화제’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집회·시위 문화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으로 수용되면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촛불집회는 1960년대 말 미국의 반전운동 과정에서 나타났으나 한국에서 문화제 성격으로 개최된 것은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한국에서 촛불집회의 첫 번째 사례는 1992년 온라인 서비스인 코텔의 유료화에 반대하기 위해 온라인 사용자들이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11월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두 여중생의 추모집회가 열리면서 평화적 시위문화를 이끌었다. 또 2004년 3월에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촛불집회는 야간시위의 주요방식으로 정착하면서 2004년 말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항의시위와 2004년 말에서 2005년 2월까지의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가 촛불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다.&lt;br /&gt;
&lt;br /&gt;
촛불집회가 장기화·대규모화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소위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서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내용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의 모임에서 출발하여 100일 이상 계속되었고, 약 2개월간은 연일 수백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했으며 7월 이후에는 주말집회가 지속되었다. 집회가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요구는  4대강 운하 반대, 공기업민영화, 정권퇴진 등의 이슈로 확대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진 운동으로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lt;br /&gt;
&lt;br /&gt;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으나 그간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또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으며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려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lt;br /&gt;
&lt;br /&gt;
2016년 촛불집회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촛불집회는 최초의 사례가 코텔 유료화 반대집회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인터넷 세대의 대두와 맥을 같이 한다.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을 통해 작동하던 PC통신 시절 소수의 사용자들이 1992년 촛불집회를 주도했다면 김대중 정부 시절 초고속인터넷망의 보급으로 사용자층이 확대되면서 2002년에는 여중생 추모시위는 중학생들이 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2008년 미국소 수입반대시위는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삼국카페’로 불린 소울드레서, 쌍코, 화장발과 안티MB카페 등 다양한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초기 집회를 주도했다. &lt;br /&gt;
&lt;br /&gt;
연인원 1천만명이 넘는 규모로 전개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관련한 촛불집회는 SNS((Social Network Services)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사용자들은 실시간으로 집회상황을 공유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으며 집회과정상의 문제점들이 SNS를 통해 공유되면서 해결책을 집단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촛불집회는 기존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일반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비폭력시위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비폭력 대 폭력의 논쟁이 매번의 집회 때마다 이어졌지만 주부들이 유모차를 끌고나오고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비폭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수 시민들이 폭력적이라 지칭한 내용들이 사실은 경찰의 불법적인 집회 방해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행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평화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찬사를 얻었지만 논란도 적지 않았다. 촛불집회로 표현된 ‘광장정치’의 승리는 거꾸로 정당정치의 실패로 해석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수용되기도 했다. 이에 민심을 수렴하는 창구가 광장정치보다는 제도권 대의정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촛불집회의 요구와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는 대안정당의 건설이 제안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다양한 평가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음에 틀림없다. 촛불집회는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또한 촛불집회를 통해 해방감을 맛본 국민들은 이후 기존 체제의 모든 억압적 구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촛불집회는 단편적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시민의식의 성장에 따른 복합적 사회현상으로 주권자적 지위를 확인하는 일이었으며 국민의 역사적 체험이 전면화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시사매거진 2580」,  『촛불민심빅데이터』. 제 1014회. 12년 11월. MBC.&lt;br /&gt;
*이병천, 『촛불이 민주주의다』, 해피스토리, 2008.&lt;br /&gt;
*이정덕, 『21세기 한국의 문화혁명』, 살림, 2004.&lt;br /&gt;
* &amp;quot;[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amp;amp;MAS_IDX=101013000794411 촛불집회]&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두산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 (주)두산.&lt;br /&gt;
* 조대엽,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8925 촛불집회]&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글의 ‘기사 제목’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과 촛불 민주주의’로 정하였는데,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을 부각하기보다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과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촛불민주주의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현재의 글은 촛불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글이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첫째 분량이 지나치게 많으며, 둘째 한국의 민주화를 읽을 수 있는 주요 지점인 촛불민주주의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부터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박근혜 퇴진운동은 본 원고에서 제외하였으면 한다.  &lt;br /&gt;
원고의 앞부분 &amp;lt;기본 정보&amp;gt; 중 특히 ‘인물/기관/단체’에서도 촛불민주주의를 이해하기보다 박근혜 퇴진운동에 초점을 맞춘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어 이에 대한 조정도 필요할 것이다.&lt;br /&gt;
외국의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 촛불집회에 대해 보도된 적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이같은 내용도 본문에서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내용의 상당부분이 현재 재판 중에 있는 박근혜-최순실 관련 탄핵 촛불집회에 대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너무 자세하네요. 신문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예민한 문제로 구지 스토리텔링의 100가지 주제로 넣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촛불민주주의라는 주제보다 ‘한국의 정치 민주화’라는 내용으로 4·19 학생 의거를 위시하여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을 각 시대별 정치상황과 더불어 서술하고 그러한 서술 과정에서 촛불민주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3</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3"/>
				<updated>2017-07-30T10:30: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 [[설국열차]], [[올드보이]]&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가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중년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주인공 배용준(욘사마)를 일약 한류스타로 만들어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2003-4년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amp;lt;대장금&amp;gt;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만들어,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13-2014년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국가요는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2008년에는 가수 보아가, 2009년에는 원더걸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아이돌 가수 또는 그룹의 댄스 음악을 가리키는 K-pop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hith de Paris)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기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K-Pop 팬들로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화되었다. K-Pop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유튜부와 SNS의 일반화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는 K-Pop이 세계와 만나는 주요한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2012년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K-Pop이 되었고,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최근 유튜브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영화의 경우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amp;lt;올드보이&amp;gt;는 한국 영화의 우수한 작품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의 &amp;lt;디워&amp;gt;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한 도전 정신을 높게 평가할 만하며, 2012년 &amp;lt;도둑들&amp;gt;은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스토리로 아시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2013년 &amp;lt;설국열차&amp;gt;는 사상 최대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한류 영화로써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 영화 등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화권에서 호소력을 높이는 이유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정서적 공감대를 들 수 있으며, 아시아인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고 극단적인 부분이 강한 일본 문화보다는 서구의 세련됨과 한국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는 한국문화가 그들의 정서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예(禮) 문화에 의해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한국이 1970년대 경제발전이 목표였던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발전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동아시아인들은 그들도 한국처럼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용으로 승천한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한류 문화는 일방적인 문화 전파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반한류의 기류가 있으며, 문화 콘텐츠 중 드라마나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으나 다큐멘터리나 문학 등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특정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한류 열풍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획으로 대중의 문화욕구와 이목를 찾아내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다. 그것은 가치기준의 차이로 형성된 경험의 소산으로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사회의 문화와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다. 한류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확산되는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적 문화가치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 정부와 WIN-WIN 전략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간 쌍방향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별 시장 특성과 취향을 살리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며, 몇몇 스타의 인기몰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상품(소프트웨어)의 질을 높혀야 한다. 이제 다시 한류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류로 내세울 한국적인 것, 한국만이 가지는 것, 세계에서도 경쟁력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lt;br /&gt;
{|style=&amp;quot;margin: 0 auto;&amp;quot;&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1.png|섬네일|350px|핀란드 역사 교과서]]&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2.png|섬네일|350px|핀란드 역사 교과서 속의 싸이와 강남스타일]]&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 “한류”(http://www.edunet.net)&lt;br /&gt;
구사사(2013.). 「한류여풍의 파급효과 및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권석정 외,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 2015.&lt;br /&gt;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음악 산업백서』, 2016&lt;br /&gt;
* 박영웅 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 2015&lt;br /&gt;
* 유동길,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 2015&lt;br /&gt;
* 임진모,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 2014&lt;br /&gt;
* 장유정 · 서병기,『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 2015&lt;br /&gt;
* 정혜승,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 2014&lt;br /&gt;
* 최광식,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 2013&lt;br /&gt;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 2015&lt;br /&gt;
* 한국콘텐츠진흥원,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 2015&lt;br /&gt;
* Euny Hong 저, 정미현 역,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 2014&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 2015&lt;br /&gt;
* 『커뮤니케이션북스』, 온라인참조: &amp;quot;[http://terms.naver.com/list.nhn?cid=42219&amp;amp;categoryId=58567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네이버지식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2016. 5. 3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2</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2"/>
				<updated>2017-07-30T10:30: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 [[설국열차]], [[올드보이]]&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가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중년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주인공 배용준(욘사마)를 일약 한류스타로 만들어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2003-4년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amp;lt;대장금&amp;gt;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만들어,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13-2014년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국가요는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2008년에는 가수 보아가, 2009년에는 원더걸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아이돌 가수 또는 그룹의 댄스 음악을 가리키는 K-pop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hith de Paris)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기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K-Pop 팬들로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화되었다. K-Pop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유튜부와 SNS의 일반화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는 K-Pop이 세계와 만나는 주요한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2012년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K-Pop이 되었고,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최근 유튜브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영화의 경우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amp;lt;올드보이&amp;gt;는 한국 영화의 우수한 작품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의 &amp;lt;디워&amp;gt;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한 도전 정신을 높게 평가할 만하며, 2012년 &amp;lt;도둑들&amp;gt;은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스토리로 아시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2013년 &amp;lt;설국열차&amp;gt;는 사상 최대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한류 영화로써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 영화 등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화권에서 호소력을 높이는 이유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정서적 공감대를 들 수 있으며, 아시아인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고 극단적인 부분이 강한 일본 문화보다는 서구의 세련됨과 한국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는 한국문화가 그들의 정서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예(禮) 문화에 의해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한국이 1970년대 경제발전이 목표였던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발전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동아시아인들은 그들도 한국처럼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용으로 승천한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한류 문화는 일방적인 문화 전파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반한류의 기류가 있으며, 문화 콘텐츠 중 드라마나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으나 다큐멘터리나 문학 등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특정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한류 열풍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획으로 대중의 문화욕구와 이목를 찾아내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다. 그것은 가치기준의 차이로 형성된 경험의 소산으로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사회의 문화와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다. 한류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확산되는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적 문화가치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 정부와 WIN-WIN 전략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간 쌍방향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별 시장 특성과 취향을 살리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며, 몇몇 스타의 인기몰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상품(소프트웨어)의 질을 높혀야 한다. 이제 다시 한류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류로 내세울 한국적인 것, 한국만이 가지는 것, 세계에서도 경쟁력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lt;br /&gt;
{|style=&amp;quot;margin: 0 auto;&amp;quot;&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1.png|섬네일|350px|메타데이터]]&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2.png|섬네일|350px|메타데이터 작성양식]]&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 “한류”(http://www.edunet.net)&lt;br /&gt;
구사사(2013.). 「한류여풍의 파급효과 및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권석정 외,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 2015.&lt;br /&gt;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음악 산업백서』, 2016&lt;br /&gt;
* 박영웅 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 2015&lt;br /&gt;
* 유동길,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 2015&lt;br /&gt;
* 임진모,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 2014&lt;br /&gt;
* 장유정 · 서병기,『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 2015&lt;br /&gt;
* 정혜승,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 2014&lt;br /&gt;
* 최광식,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 2013&lt;br /&gt;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 2015&lt;br /&gt;
* 한국콘텐츠진흥원,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 2015&lt;br /&gt;
* Euny Hong 저, 정미현 역,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 2014&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 2015&lt;br /&gt;
* 『커뮤니케이션북스』, 온라인참조: &amp;quot;[http://terms.naver.com/list.nhn?cid=42219&amp;amp;categoryId=58567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네이버지식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2016. 5. 3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1</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1"/>
				<updated>2017-07-30T10:28: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 [[설국열차]], [[올드보이]]&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가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중년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주인공 배용준(욘사마)를 일약 한류스타로 만들어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2003-4년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amp;lt;대장금&amp;gt;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만들어,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13-2014년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국가요는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2008년에는 가수 보아가, 2009년에는 원더걸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아이돌 가수 또는 그룹의 댄스 음악을 가리키는 K-pop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hith de Paris)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기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K-Pop 팬들로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화되었다. K-Pop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유튜부와 SNS의 일반화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는 K-Pop이 세계와 만나는 주요한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2012년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K-Pop이 되었고,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최근 유튜브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영화의 경우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amp;lt;올드보이&amp;gt;는 한국 영화의 우수한 작품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의 &amp;lt;디워&amp;gt;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한 도전 정신을 높게 평가할 만하며, 2012년 &amp;lt;도둑들&amp;gt;은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스토리로 아시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2013년 &amp;lt;설국열차&amp;gt;는 사상 최대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한류 영화로써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 영화 등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화권에서 호소력을 높이는 이유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정서적 공감대를 들 수 있으며, 아시아인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고 극단적인 부분이 강한 일본 문화보다는 서구의 세련됨과 한국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는 한국문화가 그들의 정서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예(禮) 문화에 의해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한국이 1970년대 경제발전이 목표였던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발전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동아시아인들은 그들도 한국처럼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용으로 승천한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한류 문화는 일방적인 문화 전파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반한류의 기류가 있으며, 문화 콘텐츠 중 드라마나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으나 다큐멘터리나 문학 등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특정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한류 열풍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획으로 대중의 문화욕구와 이목를 찾아내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다. 그것은 가치기준의 차이로 형성된 경험의 소산으로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사회의 문화와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다. 한류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확산되는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적 문화가치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 정부와 WIN-WIN 전략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간 쌍방향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별 시장 특성과 취향을 살리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며, 몇몇 스타의 인기몰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상품(소프트웨어)의 질을 높혀야 한다. 이제 다시 한류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류로 내세울 한국적인 것, 한국만이 가지는 것, 세계에서도 경쟁력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1.png|섬네일|center]]&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2.png|섬네일|center]]&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 “한류”(http://www.edunet.net)&lt;br /&gt;
구사사(2013.). 「한류여풍의 파급효과 및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권석정 외,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 2015.&lt;br /&gt;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음악 산업백서』, 2016&lt;br /&gt;
* 박영웅 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 2015&lt;br /&gt;
* 유동길,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 2015&lt;br /&gt;
* 임진모,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 2014&lt;br /&gt;
* 장유정 · 서병기,『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 2015&lt;br /&gt;
* 정혜승,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 2014&lt;br /&gt;
* 최광식,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 2013&lt;br /&gt;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 2015&lt;br /&gt;
* 한국콘텐츠진흥원,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 2015&lt;br /&gt;
* Euny Hong 저, 정미현 역,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 2014&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 2015&lt;br /&gt;
* 『커뮤니케이션북스』, 온라인참조: &amp;quot;[http://terms.naver.com/list.nhn?cid=42219&amp;amp;categoryId=58567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네이버지식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2016. 5. 3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0</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30"/>
				<updated>2017-07-30T10:28: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 [[설국열차]], [[올드보이]]&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가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중년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주인공 배용준(욘사마)를 일약 한류스타로 만들어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2003-4년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amp;lt;대장금&amp;gt;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만들어,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13-2014년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국가요는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2008년에는 가수 보아가, 2009년에는 원더걸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아이돌 가수 또는 그룹의 댄스 음악을 가리키는 K-pop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hith de Paris)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기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K-Pop 팬들로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화되었다. K-Pop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유튜부와 SNS의 일반화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는 K-Pop이 세계와 만나는 주요한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2012년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K-Pop이 되었고,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최근 유튜브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영화의 경우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amp;lt;올드보이&amp;gt;는 한국 영화의 우수한 작품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의 &amp;lt;디워&amp;gt;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한 도전 정신을 높게 평가할 만하며, 2012년 &amp;lt;도둑들&amp;gt;은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스토리로 아시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2013년 &amp;lt;설국열차&amp;gt;는 사상 최대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한류 영화로써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 영화 등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화권에서 호소력을 높이는 이유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정서적 공감대를 들 수 있으며, 아시아인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고 극단적인 부분이 강한 일본 문화보다는 서구의 세련됨과 한국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는 한국문화가 그들의 정서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예(禮) 문화에 의해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한국이 1970년대 경제발전이 목표였던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발전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동아시아인들은 그들도 한국처럼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용으로 승천한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한류 문화는 일방적인 문화 전파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반한류의 기류가 있으며, 문화 콘텐츠 중 드라마나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으나 다큐멘터리나 문학 등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특정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한류 열풍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획으로 대중의 문화욕구와 이목를 찾아내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다. 그것은 가치기준의 차이로 형성된 경험의 소산으로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사회의 문화와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다. 한류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확산되는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적 문화가치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 정부와 WIN-WIN 전략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간 쌍방향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별 시장 특성과 취향을 살리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며, 몇몇 스타의 인기몰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상품(소프트웨어)의 질을 높혀야 한다. 이제 다시 한류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류로 내세울 한국적인 것, 한국만이 가지는 것, 세계에서도 경쟁력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1.png]]&lt;br /&gt;
[[File: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 핀란드 교과서02.png]]&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 “한류”(http://www.edunet.net)&lt;br /&gt;
구사사(2013.). 「한류여풍의 파급효과 및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권석정 외,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 2015.&lt;br /&gt;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음악 산업백서』, 2016&lt;br /&gt;
* 박영웅 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 2015&lt;br /&gt;
* 유동길,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 2015&lt;br /&gt;
* 임진모,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 2014&lt;br /&gt;
* 장유정 · 서병기,『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 2015&lt;br /&gt;
* 정혜승,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 2014&lt;br /&gt;
* 최광식,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 2013&lt;br /&gt;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 2015&lt;br /&gt;
* 한국콘텐츠진흥원,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 2015&lt;br /&gt;
* Euny Hong 저, 정미현 역,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 2014&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 2015&lt;br /&gt;
* 『커뮤니케이션북스』, 온라인참조: &amp;quot;[http://terms.naver.com/list.nhn?cid=42219&amp;amp;categoryId=58567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네이버지식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2016. 5. 3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27</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27"/>
				<updated>2017-07-30T10:25: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 [[설국열차]], [[올드보이]]&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가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중년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주인공 배용준(욘사마)를 일약 한류스타로 만들어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2003-4년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amp;lt;대장금&amp;gt;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만들어,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13-2014년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국가요는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2008년에는 가수 보아가, 2009년에는 원더걸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아이돌 가수 또는 그룹의 댄스 음악을 가리키는 K-pop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hith de Paris)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기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K-Pop 팬들로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화되었다. K-Pop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유튜부와 SNS의 일반화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는 K-Pop이 세계와 만나는 주요한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2012년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K-Pop이 되었고,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최근 유튜브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영화의 경우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amp;lt;올드보이&amp;gt;는 한국 영화의 우수한 작품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의 &amp;lt;디워&amp;gt;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한 도전 정신을 높게 평가할 만하며, 2012년 &amp;lt;도둑들&amp;gt;은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스토리로 아시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2013년 &amp;lt;설국열차&amp;gt;는 사상 최대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한류 영화로써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 영화 등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화권에서 호소력을 높이는 이유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정서적 공감대를 들 수 있으며, 아시아인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고 극단적인 부분이 강한 일본 문화보다는 서구의 세련됨과 한국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는 한국문화가 그들의 정서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예(禮) 문화에 의해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한국이 1970년대 경제발전이 목표였던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발전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동아시아인들은 그들도 한국처럼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용으로 승천한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한류 문화는 일방적인 문화 전파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반한류의 기류가 있으며, 문화 콘텐츠 중 드라마나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으나 다큐멘터리나 문학 등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특정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한류 열풍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획으로 대중의 문화욕구와 이목를 찾아내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다. 그것은 가치기준의 차이로 형성된 경험의 소산으로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사회의 문화와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다. 한류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확산되는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적 문화가치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 정부와 WIN-WIN 전략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간 쌍방향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별 시장 특성과 취향을 살리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며, 몇몇 스타의 인기몰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상품(소프트웨어)의 질을 높혀야 한다. 이제 다시 한류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류로 내세울 한국적인 것, 한국만이 가지는 것, 세계에서도 경쟁력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 “한류”(http://www.edunet.net)&lt;br /&gt;
구사사(2013.). 「한류여풍의 파급효과 및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권석정 외,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 2015.&lt;br /&gt;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음악 산업백서』, 2016&lt;br /&gt;
* 박영웅 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 2015&lt;br /&gt;
* 유동길,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 2015&lt;br /&gt;
* 임진모,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 2014&lt;br /&gt;
* 장유정 · 서병기,『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 2015&lt;br /&gt;
* 정혜승,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 2014&lt;br /&gt;
* 최광식,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 2013&lt;br /&gt;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 2015&lt;br /&gt;
* 한국콘텐츠진흥원,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 2015&lt;br /&gt;
* Euny Hong 저, 정미현 역,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 2014&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 2015&lt;br /&gt;
* 『커뮤니케이션북스』, 온라인참조: &amp;quot;[http://terms.naver.com/list.nhn?cid=42219&amp;amp;categoryId=58567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네이버지식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2016. 5. 3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26</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426"/>
				<updated>2017-07-30T10:24: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 [[설국열차]], [[올드보이]]&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가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3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중년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주인공 배용준(욘사마)를 일약 한류스타로 만들어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2003-4년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amp;lt;대장금&amp;gt;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만들어,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2013-2014년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국가요는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2008년에는 가수 보아가, 2009년에는 원더걸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아이돌 가수 또는 그룹의 댄스 음악을 가리키는 K-pop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르 제니트 드 파리(Le Zehith de Paris)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기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K-Pop 팬들로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화되었다. K-Pop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유튜부와 SNS의 일반화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는 K-Pop이 세계와 만나는 주요한 창구가 되기 시작했다. 2012년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K-Pop이 되었고,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최근 유튜브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영화의 경우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amp;lt;올드보이&amp;gt;는 한국 영화의 우수한 작품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2007년의 &amp;lt;디워&amp;gt;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한 도전 정신을 높게 평가할 만하며, 2012년 &amp;lt;도둑들&amp;gt;은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스토리로 아시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2013년 &amp;lt;설국열차&amp;gt;는 사상 최대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한류 영화로써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 영화 등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화권에서 호소력을 높이는 이유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정서적 공감대를 들 수 있으며, 아시아인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고 극단적인 부분이 강한 일본 문화보다는 서구의 세련됨과 한국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는 한국문화가 그들의 정서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예(禮) 문화에 의해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한국이 1970년대 경제발전이 목표였던 것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발전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동아시아인들은 그들도 한국처럼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용으로 승천한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lt;br /&gt;
2017년 현재 한류 문화는 일방적인 문화 전파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반한류의 기류가 있으며, 문화 콘텐츠 중 드라마나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으나 다큐멘터리나 문학 등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특정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한류 열풍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획으로 대중의 문화욕구와 이목를 찾아내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다. 그것은 가치기준의 차이로 형성된 경험의 소산으로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사회의 문화와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우가 많았다. 한류의 성장과 발전은 단순히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확산되는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적 문화가치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 정부와 WIN-WIN 전략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간 쌍방향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별 시장 특성과 취향을 살리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며, 몇몇 스타의 인기몰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상품(소프트웨어)의 질을 높혀야 한다. 이제 다시 한류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류로 내세울 한국적인 것, 한국만이 가지는 것, 세계에서도 경쟁력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 “한류”(http://www.edunet.net)&lt;br /&gt;
구사사(2013.). 「한류여풍의 파급효과 및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순천향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권석정 외,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 2015.&lt;br /&gt;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음악 산업백서』, 2016&lt;br /&gt;
* 박영웅 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 2015&lt;br /&gt;
* 유동길,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 2015&lt;br /&gt;
* 임진모,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 2014&lt;br /&gt;
* 장유정 · 서병기,『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 2015&lt;br /&gt;
* 정혜승,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 2014&lt;br /&gt;
* 최광식,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 2013&lt;br /&gt;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 2015&lt;br /&gt;
* 한국콘텐츠진흥원,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 2015&lt;br /&gt;
* Euny Hong 저, 정미현 역,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 2014&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 2015&lt;br /&gt;
* 『커뮤니케이션북스』, 온라인참조: &amp;quot;[http://terms.naver.com/list.nhn?cid=42219&amp;amp;categoryId=58567 한류 20년, 대한민국 빅 콘텐츠]&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네이버지식백과』&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2016. 5. 3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425</id>
		<title>Draft 2002 한일월드컵</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425"/>
				<updated>2017-07-30T10:16: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2002년 월드컵대회&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붉은 악마]], [[FIFA]], [[거스 히딩크]]&lt;br /&gt;
|장소/공간=[[취리히]], [[부산]], 프랑스, 요코하마, [[광화문]], [[서울 광장]]&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월드컵]], 조 추첨, 길거리 응원, 프랑스 월드컵,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붉은 악령(Red Furies)]], 빨간색 티셔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된 제17회 월드컵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주최국으로 결정된 것은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축구연맹 본부에서 열린 FIFA 집행위원회에서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였으며,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였다.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며 대회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2000년 3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대륙별 지역 예선이 실시되었고, 2001년 12월 1일 부산에서 29개 본선 진출 팀과 개최국(한국과 일본), 지난 대회 우승국(프랑스) 등을 포함한 총 32개 팀이 조 추첨을 했다. 추첨 결과에 따른 본선 조별 리그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64경기가 펼쳐졌다. 양국의 합의에 따라 개막식 및 개막전은 2002년 5월 31일 서울에서, 결승전은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르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고,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한국이 4위를 차지하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은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루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 특히 세계인의 눈길은 끈 것은 한국의 응원 문화이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많은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전국에서 길거리 응원을 펼쳤다. 이 길거리 응원은 ‘붉은 악마’라는 단체가 주도하였다.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 국가 대표 선수들을 조직적으로 응원하고자 만들어진, 비상업적 · 비정치적 활동을 지향하는 민간 단체이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팀을 현지 언론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적극적 참여를 통해 축구를 즐기려는 축구팬들에 의해 구성된 단체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 활동 원칙을 중시하고 폭력적 응원 문화로 변질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규모 동호회와도 같은 성격의 붉은 악마는 축구 관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국민의 염원을 한 데 모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해왔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서울 시청 앞 광장(서울 광장)이나 광화문과 같이 인파가 많이 모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조직적으로 응원을 주도하였다. 길거리 응원의 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서울광장, 광화문, 대학로는 물론, 전국의 체육관이나 학교 운동장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장소에 모였다. 그곳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lt;br /&gt;
&lt;br /&gt;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시작할 무렵 응원단은 5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 팀이 계속 승리하고 선전을 거듭하자 마지막에는 전 국민의 20%인 700만 명까지 응원에 참여하였다. 결국 2002년 월드컵은 국민 대부분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참여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길거리 응원으로 월드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함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 행사가 될 수 있었다. 길거리 응원은 현재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응원을 상징하는 고유 문화로 자리잡았다. &lt;br /&gt;
&lt;br /&gt;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로 한국은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4강 신화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렬한 응원은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한국 국민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이순형, 『붉은악마와 월드컵』,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lt;br /&gt;
*박보현,「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정치사회적 담론: 19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2002 월드컵의 주역 선수들 몇몇 이름 적어주면 어떨까?&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424</id>
		<title>Draft 2002 한일월드컵</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424"/>
				<updated>2017-07-30T10:16: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2002년 월드컵대회&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붉은 악마]], [[FIFA]], [[거스 히딩크]]&lt;br /&gt;
|장소/공간=[[취리히]], [[부산]], 프랑스, 요코하마, [[광화문]], [[서울 광장]]&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월드컵]], 조 추첨, 길거리 응원, 프랑스 월드컵,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붉은 악령(Red Furies)]], 빨간색 티셔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된 제17회 월드컵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주최국으로 결정된 것은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축구연맹 본부에서 열린 FIFA 집행위원회에서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였으며,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였다.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며 대회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2000년 3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대륙별 지역 예선이 실시되었고, 2001년 12월 1일 부산에서 29개 본선 진출 팀과 개최국(한국과 일본), 지난 대회 우승국(프랑스) 등을 포함한 총 32개 팀이 조 추첨을 했다. 추첨 결과에 따른 본선 조별 리그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64경기가 펼쳐졌다. 양국의 합의에 따라 개막식 및 개막전은 2002년 5월 31일 서울에서, 결승전은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르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고,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한국이 4위를 차지하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은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루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 특히 세계인의 눈길은 끈 것은 한국의 응원 문화이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많은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전국에서 길거리 응원을 펼쳤다. 이 길거리 응원은 ‘붉은 악마’라는 단체가 주도하였다.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 국가 대표 선수들을 조직적으로 응원하고자 만들어진, 비상업적 · 비정치적 활동을 지향하는 민간 단체이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팀을 현지 언론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적극적 참여를 통해 축구를 즐기려는 축구팬들에 의해 구성된 단체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 활동 원칙을 중시하고 폭력적 응원 문화로 변질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규모 동호회와도 같은 성격의 붉은 악마는 축구 관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국민의 염원을 한 데 모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해왔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서울 시청 앞 광장(서울 광장)이나 광화문과 같이 인파가 많이 모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조직적으로 응원을 주도하였다. 길거리 응원의 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서울광장, 광화문, 대학로는 물론, 전국의 체육관이나 학교 운동장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장소에 모였다. 그곳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lt;br /&gt;
&lt;br /&gt;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시작할 무렵 응원단은 5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 팀이 계속 승리하고 선전을 거듭하자 마지막에는 전 국민의 20%인 700만 명까지 응원에 참여하였다. 결국 2002년 월드컵은 국민 대부분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참여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길거리 응원으로 월드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함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 행사가 될 수 있었다. 길거리 응원은 현재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응원을 상징하는 고유 문화로 자리잡았다. &lt;br /&gt;
&lt;br /&gt;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로 한국은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4강 신화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렬한 응원은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한국 국민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이순형, 『붉은악마와 월드컵』,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lt;br /&gt;
*박보현,「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정치사회적 담론: 19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2002 월드컵의 주역 선수들 몇몇 이름 적어주면 어떨까?&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423</id>
		<title>Draft 2002 한일월드컵</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423"/>
				<updated>2017-07-30T10:16: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2002년 월드컵대회&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붉은 악마]], [[FIFA]], [[거스 히딩크]]&lt;br /&gt;
|장소/공간=[[취리히]], [[부산]], 프랑스, 요코하마, [[광화문]], [[서울 광장]]&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월드컵]], 조 추첨, 길거리 응원, 프랑스 월드컵,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붉은 악령(Red Furies)]], 빨간색 티셔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된 제17회 월드컵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주최국으로 결정된 것은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축구연맹 본부에서 열린 FIFA 집행위원회에서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였으며,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였다.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며 대회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2000년 3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대륙별 지역 예선이 실시되었고, 2001년 12월 1일 부산에서 29개 본선 진출 팀과 개최국(한국과 일본), 지난 대회 우승국(프랑스) 등을 포함한 총 32개 팀이 조 추첨을 했다. 추첨 결과에 따른 본선 조별 리그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64경기가 펼쳐졌다. 양국의 합의에 따라 개막식 및 개막전은 2002년 5월 31일 서울에서, 결승전은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르게 되었다. &lt;br /&gt;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고,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한국이 4위를 차지하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은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루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 특히 세계인의 눈길은 끈 것은 한국의 응원 문화이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많은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전국에서 길거리 응원을 펼쳤다. 이 길거리 응원은 ‘붉은 악마’라는 단체가 주도하였다.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 국가 대표 선수들을 조직적으로 응원하고자 만들어진, 비상업적 · 비정치적 활동을 지향하는 민간 단체이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팀을 현지 언론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적극적 참여를 통해 축구를 즐기려는 축구팬들에 의해 구성된 단체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 활동 원칙을 중시하고 폭력적 응원 문화로 변질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규모 동호회와도 같은 성격의 붉은 악마는 축구 관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국민의 염원을 한 데 모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해왔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서울 시청 앞 광장(서울 광장)이나 광화문과 같이 인파가 많이 모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조직적으로 응원을 주도하였다. 길거리 응원의 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서울광장, 광화문, 대학로는 물론, 전국의 체육관이나 학교 운동장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장소에 모였다. 그곳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lt;br /&gt;
&lt;br /&gt;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시작할 무렵 응원단은 5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 팀이 계속 승리하고 선전을 거듭하자 마지막에는 전 국민의 20%인 700만 명까지 응원에 참여하였다. 결국 2002년 월드컵은 국민 대부분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참여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길거리 응원으로 월드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함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 행사가 될 수 있었다. 길거리 응원은 현재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응원을 상징하는 고유 문화로 자리잡았다. &lt;br /&gt;
&lt;br /&gt;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로 한국은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4강 신화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렬한 응원은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한국 국민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이순형, 『붉은악마와 월드컵』,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lt;br /&gt;
*박보현,「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정치사회적 담론: 19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2002 월드컵의 주역 선수들 몇몇 이름 적어주면 어떨까?&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IMF_%EA%B2%BD%EC%A0%9C%EC%9C%84%EA%B8%B0%EC%99%80_%EA%B8%88%EB%AA%A8%EC%9C%BC%EA%B8%B0%EC%9A%B4%EB%8F%99&amp;diff=422</id>
		<title>Draft IMF 경제위기와 금모으기운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IMF_%EA%B2%BD%EC%A0%9C%EC%9C%84%EA%B8%B0%EC%99%80_%EA%B8%88%EB%AA%A8%EC%9C%BC%EA%B8%B0%EC%9A%B4%EB%8F%99&amp;diff=422"/>
				<updated>2017-07-30T10:14: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1997 아시아 금융위기와 금모으기운동&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새마을운동]], [[국채보상운동]]&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각국으로 연쇄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아시아경제의 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이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국가가 부도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애국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민들은 나라를 경제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 대한제국 말기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대한제국이 외국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기부금을 모으는 켐페인을 벌였다. 많은 국민들이 담배와 술을 끊고 모은 돈과 귀금속을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lt;br /&gt;
&lt;br /&gt;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lt;br /&gt;
&lt;br /&gt;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lt;br /&gt;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lt;br /&gt;
&lt;br /&gt;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amp;quot;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lt;br /&gt;
&lt;br /&gt;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lt;br /&gt;
&lt;br /&gt;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단시일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lt;br /&gt;
 &lt;br /&gt;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두산백과&lt;br /&gt;
*위키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민의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므로 이 문단의 내용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인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의 문단을 맨 마지막 문단과 같이 묶어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글을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IMF_%EA%B2%BD%EC%A0%9C%EC%9C%84%EA%B8%B0%EC%99%80_%EA%B8%88%EB%AA%A8%EC%9C%BC%EA%B8%B0%EC%9A%B4%EB%8F%99&amp;diff=421</id>
		<title>Draft IMF 경제위기와 금모으기운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IMF_%EA%B2%BD%EC%A0%9C%EC%9C%84%EA%B8%B0%EC%99%80_%EA%B8%88%EB%AA%A8%EC%9C%BC%EA%B8%B0%EC%9A%B4%EB%8F%99&amp;diff=421"/>
				<updated>2017-07-30T10:14: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1997 아시아 금융위기와 금모으기운동&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새마을운동]], [[국채보상운동]]&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각국으로 연쇄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아시아경제의 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이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국가가 부도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애국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민들은 나라를 경제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 대한제국 말기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대한제국이 외국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기부금을 모으는 켐페인을 벌였다. 많은 국민들이 담배와 술을 끊고 모은 돈과 귀금속을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lt;br /&gt;
&lt;br /&gt;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lt;br /&gt;
&lt;br /&gt;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lt;br /&gt;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lt;br /&gt;
&lt;br /&gt;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amp;quot;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lt;br /&gt;
&lt;br /&gt;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lt;br /&gt;
&lt;br /&gt;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단시일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lt;br /&gt;
 &lt;br /&gt;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두산백과&lt;br /&gt;
*위키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민의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므로 이 문단의 내용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인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의 문단을 맨 마지막 문단과 같이 묶어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글을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420</id>
		<title>Draft 88 서울올림픽</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420"/>
				<updated>2017-07-30T10:12: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우]], [[UN총회]] &lt;br /&gt;
|장소/공간= [[바덴바덴]], [[모스크바]], [[소련]], [[로스앤젤레스]], [[동유럽]], [[멕시코]], [[헝가리]],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 [[중국]]&lt;br /&gt;
|사건=아프가니스탄 침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화합과 전진, [[냉전]], 분단 국가, 선진국, 후진국, 개발도상국, 정식 종목, 시범 종목, 전시 종목&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lt;br /&gt;
&lt;br /&gt;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첫째,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냉전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이 반쪽짜리 올림픽들을 지켜본 세계인은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버렸다고 우려했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24회 대회가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lt;br /&gt;
&lt;br /&gt;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은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 한국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서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기록되었다. 탁구와 테니스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고 태권도는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동독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던 크리스티나 루딩-로텐부르거는 1988년 초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사이클로 종목을 바꿔 그 해 하계 올림픽인 서울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이 선수는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딴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 남자 100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캐나다의 벤 존슨은 도핑 테스트 결과 금지 약물 복용이 밝혀져 실격 처리되었다. 2위로 들어온 미국의 칼 루이스가 금메달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1984년 올림픽에 이어 이 종목에서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한편 서울올림픽은 소련과 동독 ‧ 서독, 북예멘 ‧ 남예멘 등의 나라가 별도로 참가한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1992년 올림픽인 바르셀로나 대회 이전에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과 예멘은 동서 및 남북 통일을 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서울올림픽 덕분에 그 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던 공산 국가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특히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후 헝가리와 폴란드 등의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임자 올림픽 한 번 해보지』,  2013&lt;br /&gt;
*전상진, 『서울 올림픽 성공스토리』,  홍진,  2011&lt;br /&gt;
*리처드 W. 파운드 저·최보은 역, 『88서울올림픽 그 성공비화』,  예음,  1995&lt;br /&gt;
*박세직,『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   고려서적, 1991&lt;br /&gt;
*김종기, 『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정책보고 89-01,  한국개발연구원, 1989&lt;br /&gt;
*서상목,  『서울올림픽의 국가발전적 의의』정책보고 87-01, 한국개발연구원, 1987&lt;br /&gt;
*김명섭·양준석,  「서울올림픽 유치의 정치외교사」,『국제정치논총』54-4,  2014&lt;br /&gt;
*박경호·옥광·박장규, 「한국 스포츠외교의 태동: 서울올림픽 유치의 유산」, 『한국체육사학회지』16-2,  2011&lt;br /&gt;
*김종해,「국가 도약의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 『국회보』, 2010&lt;br /&gt;
*이윤근·김명수,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 『한국교육문제연구』6, 199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이므로 재집필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은 88올림픽의 의미로 맨 뒤에 서술해도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6%EC%9B%94_%ED%95%AD%EC%9F%81%EA%B3%BC_%ED%95%9C%EA%B5%AD%EC%9D%98_%EB%AF%BC%EC%A3%BC%ED%99%94&amp;diff=419</id>
		<title>Draft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6%EC%9B%94_%ED%95%AD%EC%9F%81%EA%B3%BC_%ED%95%9C%EA%B5%AD%EC%9D%98_%EB%AF%BC%EC%A3%BC%ED%99%94&amp;diff=419"/>
				<updated>2017-07-30T10:06: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국민의 권리 되찾은 민주주의 운동 &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공화당]], [[통일주체국민회의]], [[중앙정보부]], [[김재규]],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박종철]], [[이한열]], [[국민운동본부]], [[민정당]], [[노태우]]&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유신 헌법]], [[4․13 호헌 조치]], [[넥타이 부대]], [[6․29선언]], [[제6공화국]]&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4․19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원리가 어떤 것인지 국민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새겨 넣은 민주 혁명이었다.  &lt;br /&gt;
&lt;br /&gt;
4.19는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이뤄진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다. 3월 15일  부정 선거가 이루어졌고 이날 마산에서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도중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였지만 경찰은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이를 계기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대통령 ‧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다. &lt;br /&gt;
&lt;br /&gt;
4월 19일 대학생은 물론 중 ‧ 고등학생까지를 포함한 시위대 2천여 명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그런데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고 거기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lt;br /&gt;
 &lt;br /&gt;
정부는 그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학생 데모는 그치지 않았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의 하야 권고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대학 교수들도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은 27일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1987년의 6월 항쟁은 4.19혁명의 맥을 잇는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의 배경에는 10월 유신으로 만들어진 헌법에 대한 저항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1972년 11월,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은 어떤 국가 기구에도 통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중임을 제한하는 조항도 없어졌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전체의 1/3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웬만하면 대통령의 추천에 동의하여 국회의원을 임명하였으므로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직접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lt;br /&gt;
&lt;br /&gt;
유신 헌법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한국의 최고 주권 기관이었다. 한국 국민은 이 회의를 구성하는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를 했다. 대통령 선거가,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뽑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로 바뀌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한국 국민은 여섯 번이나 스스로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그래서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중순, 야당과 국민들의 분노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부산, 마산 등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는데 일반 시민들까지 가담하는 소요 사태로 커지게 되었다. 그곳 시위 현장을 둘러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민심이 이미 유신 체제에서 떠났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 7년이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유신 체제가 끝났는데도 유신 헌법에서의 대통령 선거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7년 임기 내내 국민들은 헌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기 만료는 10개월 앞둔 1987년 4월, 그는 헌법을 바꾸지 않고 다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4․13 호헌 조치)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된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이 연합 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이 구성한 국민운동본부에 운동권 학생들도 참여했다. &lt;br /&gt;
&lt;br /&gt;
그 해 5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에서 고문당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부와 경찰은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 야당과 재야 운동권은 정부와 경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6월에는 대학가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이때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lt;br /&gt;
&lt;br /&gt;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직장인들까지 대거 참여했다. 박종철 ‧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 유린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1987년 6월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한 국민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lt;br /&gt;
&lt;br /&gt;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던 집권 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야당의 요구 사항을 대폭 수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6․29선언이라 한다. 이 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 임기를 단임 5년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크게 개선한 제9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에 투철한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출처====&lt;br /&gt;
* 김원, 『87년 6월항쟁』,  책세상, 2009&lt;br /&gt;
* 정진상, 「6월항쟁과 한국의 변혁운동」, 『역사비평』38, 1997&lt;br /&gt;
* 여현덕, 「신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정치갈등」, 『한국정치동태론』, 오름, 1996.&lt;br /&gt;
* 이경재, 「민중의 승리: 5·17에서 6·29까지」, 신동아, 1987년 8월&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 자체에 대한 내용은 매우 부족하다. 다른 나라 민주화 운동과 비교하거나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서술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한국 민주화 과정을 4·19학생 의거,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한국인들이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국민이 직접 나서서 변화를 이끈 내용을 각각 간단하게 설명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민주화 운동의 배경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도 될 듯&amp;lt;br/&amp;gt;&lt;br /&gt;
- 박종철, 이한열 등에 대한 구체적 설명보다는 ~~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가 희생되기도 하였다 정도로 서술해도 괜찮을 듯&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6%EC%9B%94_%ED%95%AD%EC%9F%81%EA%B3%BC_%ED%95%9C%EA%B5%AD%EC%9D%98_%EB%AF%BC%EC%A3%BC%ED%99%94&amp;diff=418</id>
		<title>Draft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6%EC%9B%94_%ED%95%AD%EC%9F%81%EA%B3%BC_%ED%95%9C%EA%B5%AD%EC%9D%98_%EB%AF%BC%EC%A3%BC%ED%99%94&amp;diff=418"/>
				<updated>2017-07-30T10:05: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국민의 권리 되찾은 민주주의 운동 6월 항쟁&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공화당]], [[통일주체국민회의]], [[중앙정보부]], [[김재규]],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박종철]], [[이한열]], [[국민운동본부]], [[민정당]], [[노태우]]&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유신 헌법]], [[4․13 호헌 조치]], [[넥타이 부대]], [[6․29선언]], [[제6공화국]]&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72년 11월,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이 확정되었다. 이 헌법이 유신 헌법이다.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은, 어떤 국가 기구에도 통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중임을 제한하는 조항도 없어졌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전체의 1/3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웬만하면 대통령의 추천에 동의하여 국회의원을 임명하였으므로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직접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lt;br /&gt;
 &lt;br /&gt;
유신 헌법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한국의 최고 주권 기관이었다. 한국 국민은 이 회의를 구성하는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를 했다. 대통령 선거가,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뽑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로 바뀌었다.&lt;br /&gt;
&lt;br /&gt;
유신 체제는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안고 시작되었다. 우선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한국 국민은 여섯 번이나 스스로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그래서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국민의 불만은 1973년에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39%의 표를 얻었을 뿐이다. &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중순, 야당과 국민들의 분노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부산, 마산 등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는데 일반 시민들까지 가담하는 소요 사태로 커지게 되었다. 그곳 시위 현장을 둘러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민심이 이미 유신 체제에서 떠났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 7년이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유신 체제가 끝났는데도 유신 헌법에서의 대통령 선거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뽑는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7년 임기 내내 국민들은 헌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기 만료는 10개월 앞둔 1987년 4월, 그는 헌법을 바꾸지 않고 다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4 ․ 13 호헌 조치)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된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이 연합 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이 구성한 국민운동본부에 운동권 학생들도 참여했다. &lt;br /&gt;
&lt;br /&gt;
그 해 5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에서 고문당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부와 경찰은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 야당과 재야 운동권은 정부와 경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6월에는 대학가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이때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lt;br /&gt;
&lt;br /&gt;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직장인들까지 대거 참여했다. 박종철 ‧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 유린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1987년 6월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한 국민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lt;br /&gt;
&lt;br /&gt;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던 집권 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야당의 요구 사항을 대폭 수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6․29선언이라 한다. 이 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 임기를 단임 5년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크게 개선한 제9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lt;br /&gt;
&lt;br /&gt;
12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힘을 합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는 분열하여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1988년 2월 노태우는 직접 선거, 보통 선거라는 정당한 절차에 의해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이 출범하였다.&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출처====&lt;br /&gt;
* 김원, 『87년 6월항쟁』,  책세상, 2009&lt;br /&gt;
* 정진상, 「6월항쟁과 한국의 변혁운동」, 『역사비평』38, 1997&lt;br /&gt;
* 여현덕, 「신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정치갈등」, 『한국정치동태론』, 오름, 1996.&lt;br /&gt;
* 이경재, 「민중의 승리: 5·17에서 6·29까지」, 신동아, 1987년 8월&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 자체에 대한 내용은 매우 부족하다. 다른 나라 민주화 운동과 비교하거나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서술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한국 민주화 과정을 4·19학생 의거,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한국인들이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국민이 직접 나서서 변화를 이끈 내용을 각각 간단하게 설명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민주화 운동의 배경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도 될 듯&amp;lt;br/&amp;gt;&lt;br /&gt;
- 박종철, 이한열 등에 대한 구체적 설명보다는 ~~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가 희생되기도 하였다 정도로 서술해도 괜찮을 듯&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C%82%B0%EA%B0%80%EC%A1%B1%EC%B0%BE%EA%B8%B0_%EC%BA%A0%ED%8E%98%EC%9D%B8&amp;diff=417</id>
		<title>Draft 이산가족찾기 캠페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C%82%B0%EA%B0%80%EC%A1%B1%EC%B0%BE%EA%B8%B0_%EC%BA%A0%ED%8E%98%EC%9D%B8&amp;diff=417"/>
				<updated>2017-07-30T10:05: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분단국의 이산가족찾기 캠페인&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한국방송공사]]&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남북이 분단되고,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한국전쟁(1950-1953)을 겪었다. 1945년 북위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동서 냉전의 첨예한 대립지역이 되었다. 북쪽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수백만의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미처 남하를 못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남으로 내려왔다. &lt;br /&gt;
&lt;br /&gt;
이 과정에서 남과 북으로 헤어진 가족, 남으로 내려왔지만 가족과 친척을 못 찾은 사람 등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lt;br /&gt;
&lt;br /&gt;
이후 남북한은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오랜 세월 교통, 통신, 인적 물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왔다. 지구상에 냉전을 겪은 지역이 많지만 이런 완전한 단절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과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지만, 냉전체제아래서 이를 실현할 길이 없었다.  &lt;br /&gt;
&lt;br /&gt;
남한에 정착한 피난민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운 가족이나 친척들과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었다.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는 상봉을 기대할 수 없지만, 남한에 내려온 가족 친척들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있었으나 그 실적은 미미한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1983년 전쟁 휴전 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국영방송 KBS는 텔레비전 전국망을 동원한 연속특별생방송으로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벌였다. 우선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lt;br /&gt;
&lt;br /&gt;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캠페인은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마라톤으로 진행된 캠페인을 통해 총 10만 건의 신청을 받고 이중 5만여 건의 사례가 방송에 소개되어 약 1만 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lt;br /&gt;
&lt;br /&gt;
캠페인 연속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의 호응을 얻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연일 화제들을 낳았다. 전국민이 텔레비전에 모여들어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여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lt;br /&gt;
&lt;br /&gt;
KBS본사 사옥이 있는 여의도에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찾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은 피케트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방송 3일째부터는 학생·주부·일반시민들 주축으로 안내, 의료봉사, 신청서 대필 등의 자원봉사가 시작되었고, 컬러TV, 공중전화, 이동화장실, 기차표, 생수, 빵, 라면, 부채, 수건 등을 기탁하는 개인과 기업체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각 기업체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자에게는 특별휴가가 부여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해외의 언론도 이 캠페인 방송에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였다. KBS 본관 중앙홀에 마련된 기자실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동서냉전이 사람들에게 내면적으로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 이산가족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lt;br /&gt;
&lt;br /&gt;
캠페인이 진행되던 시기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에게 “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lt;br /&gt;
&lt;br /&gt;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북한이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  &lt;br /&gt;
&lt;br /&gt;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1983.11)에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lt;br /&gt;
&lt;br /&gt;
이런 노력의 결과, 이산가족찾기 방송 2년 후에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KBS를 방문(1985.5)했고, 역사적인 남북한 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이루어졌다. &lt;br /&gt;
&lt;br /&gt;
이후 2014년까지 남북한은 적십자사의 중개로 남북 이산가족 18,523명이 상봉했다. &lt;br /&gt;
&lt;br /&gt;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http://family.kbsarchive.com KBS 이산가족 찾기],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KBS 아카이브』&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KBS&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유네스코와 유산”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과 일치하므로 재집필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family.kbsarchive.com, 백과사전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family.kbsarchive.com,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이산가족찾기 캠페인은 한국전쟁을 겪고 이를 극복한 한국인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으로 이에 대한 내용을 추가 집필할 필요가 있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기술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C%82%B0%EA%B0%80%EC%A1%B1%EC%B0%BE%EA%B8%B0_%EC%BA%A0%ED%8E%98%EC%9D%B8&amp;diff=416</id>
		<title>Draft 이산가족찾기 캠페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C%82%B0%EA%B0%80%EC%A1%B1%EC%B0%BE%EA%B8%B0_%EC%BA%A0%ED%8E%98%EC%9D%B8&amp;diff=416"/>
				<updated>2017-07-30T10:05: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분단국의 이산가족찾기 캠페인&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 [[한국방송공사]]&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남북이 분단되고,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한국전쟁(1950-1953)을 겪었다. 1945년 북위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동서 냉전의 첨예한 대립지역이 되었다. 북쪽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수백만의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미처 남하를 못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남으로 내려왔다. &lt;br /&gt;
&lt;br /&gt;
이 과정에서 남과 북으로 헤어진 가족, 남으로 내려왔지만 가족과 친척을 못 찾은 사람 등 약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lt;br /&gt;
&lt;br /&gt;
이후 남북한은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오랜 세월 교통, 통신, 인적 물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왔다. 지구상에 냉전을 겪은 지역이 많지만 이런 완전한 단절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과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지만, 냉전체제아래서 이를 실현할 길이 없었다.  &lt;br /&gt;
&lt;br /&gt;
남한에 정착한 피난민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운 가족이나 친척들과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었다.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는 상봉을 기대할 수 없지만, 남한에 내려온 가족 친척들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있었으나 그 실적은 미미한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1983년 전쟁 휴전 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국영방송 KBS는 텔레비전 전국망을 동원한 연속특별생방송으로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을 벌였다. 우선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lt;br /&gt;
&lt;br /&gt;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캠페인은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마라톤으로 진행된 캠페인을 통해 총 10만 건의 신청을 받고 이중 5만여 건의 사례가 방송에 소개되어 약 1만 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lt;br /&gt;
&lt;br /&gt;
캠페인 연속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의 호응을 얻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연일 화제들을 낳았다. 전국민이 텔레비전에 모여들어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여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lt;br /&gt;
&lt;br /&gt;
KBS본사 사옥이 있는 여의도에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찾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은 피케트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방송 3일째부터는 학생·주부·일반시민들 주축으로 안내, 의료봉사, 신청서 대필 등의 자원봉사가 시작되었고, 컬러TV, 공중전화, 이동화장실, 기차표, 생수, 빵, 라면, 부채, 수건 등을 기탁하는 개인과 기업체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각 기업체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자에게는 특별휴가가 부여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해외의 언론도 이 캠페인 방송에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였다. KBS 본관 중앙홀에 마련된 기자실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동서냉전이 사람들에게 내면적으로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 이산가족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lt;br /&gt;
&lt;br /&gt;
캠페인이 진행되던 시기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에게 “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lt;br /&gt;
&lt;br /&gt;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북한이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  &lt;br /&gt;
&lt;br /&gt;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1983.11)에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lt;br /&gt;
&lt;br /&gt;
이런 노력의 결과, 이산가족찾기 방송 2년 후에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KBS를 방문(1985.5)했고, 역사적인 남북한 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이루어졌다. &lt;br /&gt;
&lt;br /&gt;
이후 2014년까지 남북한은 적십자사의 중개로 남북 이산가족 18,523명이 상봉했다. &lt;br /&gt;
&lt;br /&gt;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http://family.kbsarchive.com KBS 이산가족 찾기],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KBS 아카이브』&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KBS&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유네스코와 유산”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과 일치하므로 재집필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family.kbsarchive.com, 백과사전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family.kbsarchive.com,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이산가족찾기 캠페인은 한국전쟁을 겪고 이를 극복한 한국인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으로 이에 대한 내용을 추가 집필할 필요가 있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 관련 기록물 20.522건이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기술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B8_%EC%9D%B4%EB%AF%BC%EC%82%AC:_%EB%AA%A8%EA%B5%AD%EC%9D%84_%EB%96%A0%EB%82%9C_%EC%9D%B4%EB%93%A4&amp;diff=415</id>
		<title>Draft 한국인 이민사: 모국을 떠난 이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B8_%EC%9D%B4%EB%AF%BC%EC%82%AC:_%EB%AA%A8%EA%B5%AD%EC%9D%84_%EB%96%A0%EB%82%9C_%EC%9D%B4%EB%93%A4&amp;diff=415"/>
				<updated>2017-07-30T10:04: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인 이민사 – 모국을 떠난 사람들&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캐나다]], [[하와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호주]], [[뉴질랜드]] &lt;br /&gt;
|사건= [[대한제국강제합병]], [[고려인강제이주]], [[서독 광부 간호원파견]], 남미이민&lt;br /&gt;
|기록물= 한국 이민사 박물관(http://mkeh.incheon.go.kr/)&lt;br /&gt;
|개념용어= [[재외동포]], [[재외국민]]&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외교부의 2015년 집계에 의하면 전세계 175개국에 718만 명의 한국인들이 퍼져 살고 있다.  이중 한국 국적을 가진 재외국민은 약 247만 명, 외국국적을 취득한 재외동포가 471만 명이다. 남북한 인구의 거의 10%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lt;br /&gt;
&lt;br /&gt;
지역별로는 중국이 258만 명, 미국이 224만 명, 일본이 86만 명,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구 소련지역이 50만,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가 포함된 남아시아태평양 지역이 51만 명, 캐나다 22만, 남미가 10만 명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이민사는 19세기 중엽 조선왕조 말 북부지방의 한국인들이 중국 동삼성의 북간도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면서 많은 애국지사와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동삼성과 러시아 원동지방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오랫동안 한국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lt;br /&gt;
&lt;br /&gt;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생계를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매년 8만~15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5년엔 62만 명을 넘었다. 1938년부터는 강제징용, 강제징병으로 수많은 한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들이 전후 일본의 한인사회를 이루어 살면서 재일교포 1세대를 형성했다.&lt;br /&gt;
&lt;br /&gt;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에는 조선인들의 영농개척이주가 장려되어 한반도 남쪽의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날 때 만주에는 거의 2백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현지에 남아 조선족 자치구를 이루며 살았다. &lt;br /&gt;
&lt;br /&gt;
소련 스탈린 정부는 1937년 겨울 독립운동을 하거나 일본인과 접촉한다는 등의 이유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7만여 명을 화물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많은 사람이 이주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목숨을 잃었다. 소련이 붕괴되자 고려인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서로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국적 고려인이 5만여 명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고려인 강제이주 60주년을 맞은 2007년부터 무국적 고려인 지원사업에 나서 현지 국적취득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재외 한국인의 30%를 차지 하는 미주 한인들의 이주사는 1903-05년 사탕수수농장의 계약노동자로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하기 이전에 유학생, 상인 등168명의 한인이 미국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과 같은 한국개화의 초석을 다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선각자들이 있다.&lt;br /&gt;
&lt;br /&gt;
1950-53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5년 사이에는 전쟁고아와 미군과 결혼한 여성, 그리고 유학생, 연구원, 간호사, 의사 등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학생과 연구원들 중 상당 수가 학업과 훈련을 마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lt;br /&gt;
&lt;br /&gt;
1965년 미국 이민법이 년 대폭 개정되어 문호가 활짝 열리면서 한국인의 가족이민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어 진행된 한인 이민은 매년 수 만 명씩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은 공식적으로 1백9만에 이른다. &lt;br /&gt;
&lt;br /&gt;
1967년에는 캐나다의 이민문호가 한인에게 열리면서 한국에서 직접 이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14년 말 캐나다의 재외국민은 22만 명에 이른다. &lt;br /&gt;
&lt;br /&gt;
1960년대에는 정부주도아래 계획이민이 추진되어 많은 사람들이 남미로 이민을 갔다. 이중 상당수는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서독에 광부와 간호원으로 일하러 갔다가 현지에서 정착한 사람도 많다.  &lt;br /&gt;
&lt;br /&gt;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하여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주로 대기업의 해외주재, 유학과 연수, 해외취업 등의 목적으로 해외로 나가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국제결혼과 취업을 위해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고 있다. 법무부의 2015년 통계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국내 체류외국인은 1,899,519명이며, 최근 5년간 매년 8.6%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적별로는 중국이 955,871명(50.3%)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 138,660명(7.3%), 베트남136,758명(7.2%), 타이 93,348명(4.9%), 필리핀 54,977명(2.9%), 일본 47,909(2.5%)순이다. &lt;br /&gt;
 &lt;br /&gt;
체류목적별로 살펴보면, 방문취업자 등 취업자격 체류외국인 625,129, 재외동포 328,187명(17.3%), 결혼이민자 151,608명(8.0%), 영주 123,255명(6.5%)등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재외동포현황(외교부)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lt;br /&gt;
추가 자료로 한국 이민사 박물관(http://mkeh.incheon.go.kr/) 제시될 수 있다. 시기별 이민역사도 중요하지만, 1980년대 이전 생존을 위해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이 미국, 캐나다, 남미 등의 국가로의 이민역사를 통해 어떻게 정착에 성공했는지에 대한 내용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능하다면 초창기의 생존을 위해 떠난 한국의 이민성격이 1980년대 이민의 성격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1980년대 이후 한국이 이민 송출국에서 이민 수용국으로 변모한 점과 그 원인에 대해서도 보완되었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재외국민의 집계를 2014년 말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이왕이면 2016년 통계를 사용하였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1950-53년 ~~ 전쟁고아(와 혼혈아의 미국 입양)와 미군과 결혼한 여성 ~~&amp;lt;br/&amp;gt;&lt;br /&gt;
- 캐나다 이주 이전에 남미 이주부터 썼으면 좋겠고, 남미 이민에 대한 이야기는 1905년 멕시코 애니깽 농장 이민으로 시작해야 한다. 미국 이민을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시작한 것처럼.&amp;lt;br/&amp;gt;&lt;br /&gt;
- 남미와 별도로 유럽에 정착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럽 전체 이민자 수와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 입양관련 내용, 서독 광부와 간호원, 유학과 취직 이후 정착 등의 이민자 구분을 해서 각 지역별 이민자 숫자도 제시하여 주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2%98%EB%9D%BC_%EC%82%B4%EB%A6%AC%EA%B8%B0:_%ED%8C%8C%EB%8F%85_%EA%B4%91%EB%B6%80%EC%99%80_%EA%B0%84%ED%98%B8%EC%9B%90&amp;diff=414</id>
		<title>Draft 나라 살리기: 파독 광부와 간호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2%98%EB%9D%BC_%EC%82%B4%EB%A6%AC%EA%B8%B0:_%ED%8C%8C%EB%8F%85_%EA%B4%91%EB%B6%80%EC%99%80_%EA%B0%84%ED%98%B8%EC%9B%90&amp;diff=414"/>
				<updated>2017-07-30T10:02: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나라 살리기: 광부와 간호원의 독일취업 &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60년대 초, 한국은 한국전쟁의 피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였다. 1962년도 인당 GNP는 87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했다. 실업률은 30%에 육박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한국은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상품을 수출할 수는 없었지만 노동력은 수출할 수 있었다. 취업을 위해 독일에 간 간호원과 광부들이 노동력 수출의 문호를 열었다. &lt;br /&gt;
&lt;br /&gt;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로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으나 외자의 부족으로 착수를 못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남북한간의 대치, 4.19혁명과 5.16쿠데타 등 정정불안을 겪고 있는 한국은 외국투자가들에게 그리 매력 있는 투자처가 못되었다. 이웃 일본과는 아직 국교가 정상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lt;br /&gt;
&lt;br /&gt;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 어려워지자 군사정부는 같은 분단국인 서독으로 눈을 돌렸다. 서독에 파견된 한국의 차관 교섭단은 1억5천 만 마르크의 상업차관 도입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이때 서독 측이 제의한 것이 한국인 광부 5천명과 간호인력 2000명을 서독 파견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부족으로 해외에서 인력을 수입하고 있었다. 특히 광부 일은 고되고 힘들어서 서독 노동자들이 꺼리기 때문에 인력부족이 심각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하여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하였고, 1963년 12월 양국간에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독일이 유럽권 밖의 국가에서 노동력을 들여오는 최초의 협정이었다. 또한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첫 노동력 해외수출이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취업이 어려웠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서독파견 광부 모집에 대거 몰려들었다. 경쟁률이 8대1이나 되었고, 중학교졸업자 이상을 자격으로 했는데 대학교 졸업자가 20% 이상이었다. 2천명을 뽑는 첫 간호사 모집에는 2만 명이 응모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8천명의 광부가 서독으로 건너갔다. &lt;br /&gt;
&lt;br /&gt;
광부들의 월급은 164달러로 당시 한국의 기준으로는 많은 편이었다. 광부들은 생활비를 아껴 쓰고 남는 돈을 고국에 송금했다. 파독 근로자들은 약 10년에 걸쳐 한국에 총 1억164만 달러를 송금하였다. 1965년 한국의 연간 총 수출액이 1억 7508만 달러였던 걸 감안하면 큰 금액이었다.&lt;br /&gt;
&lt;br /&gt;
독일에 파견된 한국인 광부 중에는 계약기간이 끝난 후 학업을 계속하여 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사람도 있고,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은 은퇴하여 연금으로 살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은 독일의 여러 수도회와 한국 내 독일 가톨릭 교회의 중개로 1950년대 말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부협정에 상응하는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관한 공식 협정이 체결되어 대량파견이 이루어졌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모두 1만1천명이다.&lt;br /&gt;
&lt;br /&gt;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근면과 성실성으로 현지 업체와 병원의 인정을 받았다. 이들이 아껴서 송금한 돈은 외환이 부족한 고국의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간호사들은 대부분 고용계약이 연장되어 장기간 근무했다. 일부 간호사들은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하여 독일에 정주했다. 독일인과 결혼한 여성도 많다. 파독 한국 간호사의 절반 이상은  독일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루르 지역이나 라인란트 지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독일 최대이자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 교민사회를 이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1964년12월, 선거에 의해 민정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서독을 국빈으로 방문하였을 때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그들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lt;br /&gt;
&lt;br /&gt;
광부와 간호사가 연 노동력 수출은 그 후 베트남전쟁 용역시장 진출, 중동건설시장 인력진출, 원양어업 진출 등으로 이어져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 백영훈,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 , KID, 2001&lt;br /&gt;
*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박정희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보다는 한독 양국의 최초의 합의 인정, 한독 양자 간의 경제적 이해에 부합했다는 점,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라인강의 기적에 일조했다는 점을 강조, 이들로 인하여 한국의 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였다는 데 일조하였다는 점, 이들이 한독 우호관계의 주축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남해독일마을과 같이 사례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amp;lt;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amp;gt;,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 백과사전으로 제시되어 있다. &amp;lt;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amp;gt;,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amp;gt;,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맨 마지막 문단 “1964년 12월~~”을 “광부들의 월급은 164달러로 ~~”의 문단 다음으로 넣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본 주제의 마지막 글은 “한강의 기적은~~”으로 끝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amp;lt;br/&amp;gt;&lt;br /&gt;
- 현재 경상남도 남해에 ‘독일마을’이라고 불리는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도 좋을 듯.&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2%98%EB%9D%BC_%EC%82%B4%EB%A6%AC%EA%B8%B0:_%ED%8C%8C%EB%8F%85_%EA%B4%91%EB%B6%80%EC%99%80_%EA%B0%84%ED%98%B8%EC%9B%90&amp;diff=413</id>
		<title>Draft 나라 살리기: 파독 광부와 간호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2%98%EB%9D%BC_%EC%82%B4%EB%A6%AC%EA%B8%B0:_%ED%8C%8C%EB%8F%85_%EA%B4%91%EB%B6%80%EC%99%80_%EA%B0%84%ED%98%B8%EC%9B%90&amp;diff=413"/>
				<updated>2017-07-30T10:02: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나라 살리기: 광부와 간호원의 독일취업 &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60년대 초, 한국은 한국전쟁의 피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였다. 1962년도 인당 GNP는 87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했다. 실업률은 30%에 육박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한국은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상품을 수출할 수는 없었지만 노동력은 수출할 수 있었다. 취업을 위해 독일에 간 간호원과 광부들이 노동력 수출의 문호를 열었다. &lt;br /&gt;
&lt;br /&gt;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로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으나 외자의 부족으로 착수를 못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남북한간의 대치, 4.19혁명과 5.16쿠데타 등 정정불안을 겪고 있는 한국은 외국투자가들에게 그리 매력 있는 투자처가 못되었다. 이웃 일본과는 아직 국교가 정상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lt;br /&gt;
&lt;br /&gt;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 어려워지자 군사정부는 같은 분단국인 서독으로 눈을 돌렸다. 서독에 파견된 한국의 차관 교섭단은 1억5천 만 마르크의 상업차관 도입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이때 서독 측이 제의한 것이 한국인 광부 5천명과 간호인력 2000명을 서독 파견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부족으로 해외에서 인력을 수입하고 있었다. 특히 광부 일은 고되고 힘들어서 서독 노동자들이 꺼리기 때문에 인력부족이 심각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하여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하였고, 1963년 12월 양국간에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독일이 유럽권 밖의 국가에서 노동력을 들여오는 최초의 협정이었다. 또한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첫 노동력 해외수출이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취업이 어려웠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서독파견 광부 모집에 대거 몰려들었다. 경쟁률이 8대1이나 되었고, 중학교졸업자 이상을 자격으로 했는데 대학교 졸업자가 20% 이상이었다. 2천명을 뽑는 첫 간호사 모집에는 2만 명이 응모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8천명의 광부가 서독으로 건너갔다. &lt;br /&gt;
&lt;br /&gt;
광부들의 월급은 164달러로 당시 한국의 기준으로는 많은 편이었다. 광부들은 생활비를 아껴 쓰고 남는 돈을 고국에 송금했다. 파독 근로자들은 약 10년에 걸쳐 한국에 총 1억164만 달러를 송금하였다. 1965년 한국의 연간 총 수출액이 1억 7508만 달러였던 걸 감안하면 큰 금액이었다.&lt;br /&gt;
&lt;br /&gt;
독일에 파견된 한국인 광부 중에는 계약기간이 끝난 후 학업을 계속하여 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사람도 있고,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은 은퇴하여 연금으로 살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은 독일의 여러 수도회와 한국 내 독일 가톨릭 교회의 중개로 1950년대 말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부협정에 상응하는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관한 공식 협정이 체결되어 대량파견이 이루어졌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모두 1만1천명이다.&lt;br /&gt;
&lt;br /&gt;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근면과 성실성으로 현지 업체와 병원의 인정을 받았다. 이들이 아껴서 송금한 돈은 외환이 부족한 고국의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간호사들은 대부분 고용계약이 연장되어 장기간 근무했다. 일부 간호사들은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하여 독일에 정주했다. 독일인과 결혼한 여성도 많다. 파독 한국 간호사의 절반 이상은  독일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루르 지역이나 라인란트 지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독일 최대이자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 교민사회를 이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1964년12월, 선거에 의해 민정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서독을 국빈으로 방문하였을 때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그들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lt;br /&gt;
&lt;br /&gt;
광부와 간호사가 연 노동력 수출은 그 후 베트남전쟁 용역시장 진출, 중동건설시장 인력진출, 원양어업 진출 등으로 이어져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 백영훈,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 , KID, 2001&lt;br /&gt;
*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박정희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보다는 한독 양국의 최초의 합의 인정, 한독 양자 간의 경제적 이해에 부합했다는 점,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라인강의 기적에 일조했다는 점을 강조, 이들로 인하여 한국의 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였다는 데 일조하였다는 점, 이들이 한독 우호관계의 주축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남해독일마을과 같이 사례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amp;lt;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amp;gt;,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 백과사전으로 제시되어 있다. &amp;lt;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amp;gt;,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amp;gt;, 주한독일대사관 웹사이트,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맨 마지막 문단 “1964년 12월~~”을 “광부들의 월급은 164달러로 ~~”의 문단 다음으로 넣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본 주제의 마지막 글은 “한강의 기적은~~”으로 끝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amp;lt;br/&amp;gt;&lt;br /&gt;
- 현재 경상남도 남해에 ‘독일마을’이라고 불리는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도 좋을 듯.&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4%91%EB%8F%99%EA%B1%B4%EC%84%A4%EC%97%85%EC%A7%84%EC%B6%9C&amp;diff=412</id>
		<title>Draft 중동건설업진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4%91%EB%8F%99%EA%B1%B4%EC%84%A4%EC%97%85%EC%A7%84%EC%B6%9C&amp;diff=412"/>
				<updated>2017-07-30T10:01: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중동건설진출&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 [[현대건설]], [[삼성건설]]&lt;br /&gt;
|장소/공간=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두바이]], [[인도네시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73년의 1차 오일쇼크로 한국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원유가격이 한꺼번에 4배나 오르자 국내 물가는 두 배로 올랐다. 국제적 경기침체로 수출이 줄자 달러 유입은 줄고 해외에 지불해야 할 원유대금은 급증하면서 외환위기마저 겪게 되었다. 반면 산유국들은 고유가에 힘입어 오일머니가 쌓이게 되자 이 돈을 경제건설과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lt;br /&gt;
&lt;br /&gt;
박정희 정부는 원유대금으로 중동으로 빠져나간 달러를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되찾아 오자는 역발상을 했다. 마침 이란이 한국에 건설인력을 요청했다. 이 정책은 적중했고,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중동건설시장에서 벌어드린 오일머니로 한국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80년대와 90년대 고도성장을 이룰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건설업체는 초기에는 공사전체를 맡은 해외유명회사의 하청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신용과 기술을 축적하면서 독자적으로 대형공사들을 맡게 되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한국건설업체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lt;br /&gt;
&lt;br /&gt;
중동 진출 첫해인 1974년 수주액은 2억6000만 달러였으나 다음해에는 그 세배인 7억5000만 달러였고, 1980년에는 다시 10배 이상으로 늘어 82억 달러가 되었다. 1975-1980 기간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가 중동건설에서 번 달러였다. 1981년과 1982년 해외건설 수주 총액은 각각 137억 달러와 133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lt;br /&gt;
&lt;br /&gt;
파견 근로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 10만 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 명에 달했다. 성취욕이 강하고 근로기강이 엄정한 한국 근로자들은 해외 건설업체와 중동 현지인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 한국의 건설 업체는 공기(工期)를 맞추는 데 만족하지 않고 늘 완공 일정을 단축해 명성을 쌓았다. &lt;br /&gt;
&lt;br /&gt;
해외건설은 수입 유발 효과가 거의 없으므로 외화 가득률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한국은 인건비가 낮아서 한국인 근로자를 많이 고용했기 때문에, 시공 관리 수익뿐만 아니라 노무 인건비도 고스란히 국내에 유입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동에서 벌어온 오일머니 덕분에 오일쇼크로 위축되었던 한국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았다.  수출입국을 국가적 목표로 추진해온 한국은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했다. 내수시장도 활성화되어 자동차 냉장고 등 고가 소비재 수요가 크게 늘었고, 주택시장도 활기를 띄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중동 특수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 현대건설이다. 현대는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다.. 76년에는 기술적으로 난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현대는 이런 공사에 필요한 초대형 철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대형 바지선에 실어 대양을 항해하여 현지로 보냈다. &lt;br /&gt;
&lt;br /&gt;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리비아의 물문제 해결을 위해 동아건설이 시공한 대수로 사업은 그 공사 규모와 수주액이 전설적이었다. 동아건설은 이 사업의 1단계 1,874km를 39억달러에, 2단계 1730km을 102억 달러에 수주하여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lt;br /&gt;
&lt;br /&gt;
중동건설시장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는 이 지역의 전쟁과 정정불안으로 침체기를 겪었다. 한국의 업체들은 동남아지역으로 진출을 모색하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각종 공사를 수주했다. &lt;br /&gt;
&lt;br /&gt;
초기의 중동건설진출에는 한국의 건설근로자가 대거 참여했으나 90년대부터는 동남아와 서남아 지역의 근로자를 쓰고 있다. 수주내역도 초기의 단순건설에서 이제는 원자력발전소, 대형교량, 댐, 초고층빌딩, 지하철, 복합주택단지, 항만과 물류센터 등 기술적으로 고도화되고 규모에서 대형화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그 실례로, 삼성건설은 세계 최고층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할리파(높이 829m)를 시공했으며, 현대건설은 세계최장 교량인 말레이지아의 페낭대교를 건설했다. &lt;br /&gt;
&lt;br /&gt;
2000년 이후 중동시장의 건설경기도 서서히 회복되어 매년 수십억 달러 수준의 수주를 받고 있다. 2016년 해외건설 수주액은 중동이 107억 달러, 동남아는 127억 달러로 동남아의 비중이 더 높았다.   &lt;br /&gt;
&lt;br /&gt;
석유파동으로 잃은 돈을 산유국에 가서 다시 벌어 오자는 발상을 한 정부의 적극성과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열사의 사막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화벌이에 나선 국민이 힘을 합쳐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오원철 ,2006&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중동시장진출에 따라 오일쇼크로 받은 반사이익을 거두어들여 경제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재원을 확보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이 건설강국이 되기까지 국민적 합의와 희생이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인건비가 낮아서 한국인 근로자를 많이 채용하였으나 중동진출 성공은 강인한 한국인의 근성에 근거한 것이다. 한국인의 국민성을 해외에 알리는 기회였고, 기업과 근로자들이 해외 진출에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객관적 사실과 함께 스토리텔링으로 엮을 필요가 있다.&lt;br /&gt;
&amp;lt;br/&amp;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amp;lt;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amp;gt; 만 제시되어 있다. &amp;lt;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amp;gt; 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amp;lt;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amp;gt; 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의견2=&lt;br /&gt;
- 국내의 기술로 건설한 세계적인 건축물 1-2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이는 것도 좋겠다. &amp;lt;br/&amp;gt;&lt;br /&gt;
- 맨 마지막 멘트에 석유파동, 외화벌이, 한강의 기적에 더하여 현재 한국의 첨단 건설 기술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면 한다. &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2%A0%ED%8A%B8%EB%82%A8%EC%A0%84(1955-1975)%EA%B3%BC_%ED%8C%8C%EB%B3%91&amp;diff=411</id>
		<title>Draft 베트남전(1955-1975)과 파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2%A0%ED%8A%B8%EB%82%A8%EC%A0%84(1955-1975)%EA%B3%BC_%ED%8C%8C%EB%B3%91&amp;diff=411"/>
				<updated>2017-07-30T10:00: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군의 베트남전(1955-1975) 참전&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4차례 국회동의를 거쳐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32만 명이다. &lt;br /&gt;
&lt;br /&gt;
베트남은 한국과 더불어 동서냉전으로 남북이 분단된 나라였다. 스탈린의 승인아래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을 때 한국은 미국 등 16개국 연합군의 도움으로 침략을 물리쳤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은 처지가 같은 월남에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전선은 한국전선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월남 지원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화하고, 한반도 전쟁억지력의 중추인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으로 방안이라고 믿었다. &lt;br /&gt;
&lt;br /&gt;
미국과 월남 정부가 공식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해오자 한국정부는 국회동의를 얻어 1차로 이동외과병원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을 보냈다. 뒤이어 2차파병 요청이 있었고, 한국은 국회동의를 얻어 후방지원과 건설지원임무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했다&lt;br /&gt;
&lt;br /&gt;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부터 베트남 전황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다시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해왔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의 일부를 베트남전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주한 미군 2개 사단도 언제 월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lt;br /&gt;
&lt;br /&gt;
전투부대의 파병이 거론되자 한국 내 야당과 지식인들이 강력한 반대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판단아래 8월 13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lt;br /&gt;
&lt;br /&gt;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전투병력 부족으로 애로를 겪고 있던 미국정부는 월남의 작전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군 전투 병력의 증파를 다시 요청하였다. 한국정부에서도 “5만 명 선 까지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 제26연대와 제9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lt;br /&gt;
&lt;br /&gt;
1969년 1월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을 내 걸고 월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계획을 발표했다. 그 무렵 월남의 한국군의 병력은 47,860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은 1단계로 1972년까지 약 1만 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2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투병력(37,000여 명)은 1973년 초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 남아있었다. 월남의 한국군 병력규모는 1972년 후반기부터 미국의 지상군 규모를 능가하였다. &lt;br /&gt;
&lt;br /&gt;
9년 동안의 참전에서 한국군은 5099명이 전사하고, 11,232명이 부상을 당했다. 참전 한국군 중 다수가 고엽제 피해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에서 시작되었지만, 한반도의 안보이익과도 직결된 것이었다. 당시 남북한의 무력균형은 북의 우세로 기울어져 있었고, 북한은 1968년부터 청와대 무장특공대 기습사건, 대규모 게릴라부대 후방침투(북평삼척무장공비사건), 미해군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 무력도발을 잇달아 벌이고 있어서 한국은 안보를 위해 주한미군의 전쟁억지력이 절실할 때였다.  월남전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은 한국전쟁 이래 가장 위험했던 안보위기를 극복하고 자주국방태세를 위한 중화학공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여 무력균형에서 북한 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월남전은 경제적으로도 한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장병들의 고국 송금과 한국기업들의 현지 진출등으로 부족한 외환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참전군인과 기업들의 해외경험은 그 후 중동건설시장 진출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lt;br /&gt;
&lt;br /&gt;
월남 패망과 함께 끊겼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1992년 국교를 재개했다. 1993년 포 반 키엣 수상이 방한하였으며,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8월에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했을 때 &amp;quot;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amp;quot;라고 공식 사과 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도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amp;quot;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amp;quot;고 하였다.&lt;br /&gt;
&lt;br /&gt;
수교 이후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관계는 크게 발전하였다. 2015년 기준 베트남은 한국의 4번째 주요 수출국이 되었으며, 베트남에 세워진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시설은 수만의 일자리를 만들고, 베트남의 국제수지를 흑자로 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했던 사건으로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도 “한국군의~ 중요한 사건이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만큼 구체적으로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한국사회의 모습을 바꾸어놓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기술할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 위키)만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아시아공산주의 세력(의)이 확산을 막고 / 전략적(인)으로 방안이라고 믿고 &amp;lt;br/&amp;gt;&lt;br /&gt;
- 베트남전 파병을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 한국전에 참전한 자유우방에 대한 보답이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베트남전 파병의 이유는 한국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 및 시장 개척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확인하고 베트남전 파병을 정치 군사 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과도 연결시켜 서술했으면 합니다&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3%88%EB%A7%88%EC%9D%84%EC%9A%B4%EB%8F%99%EA%B3%BC_%EB%B0%95%EC%A0%95%ED%9D%AC%EC%9D%98_%EC%A1%B0%EA%B5%AD_%EA%B7%BC%EB%8C%80%ED%99%94&amp;diff=410</id>
		<title>Draft 새마을운동과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3%88%EB%A7%88%EC%9D%84%EC%9A%B4%EB%8F%99%EA%B3%BC_%EB%B0%95%EC%A0%95%ED%9D%AC%EC%9D%98_%EC%A1%B0%EA%B5%AD_%EA%B7%BC%EB%8C%80%ED%99%94&amp;diff=410"/>
				<updated>2017-07-30T09:59: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 &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박정희]]&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 [[도시새마을운동]], [[직장새마을운동]]&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새마을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발의로 시작된 농촌종합개발운동이다. 그는 근면·자조·협동을 이 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제시했다. 나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나서고 이웃과 협력하여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당시 한국의 농촌은 산업화가 진척된 도시에 비해 소득이 크게 뒤져있었다. 왕조시대와 일제강점기 등 오랜 세월을 억눌려 살아온 농민은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며 체념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새마을 운동은 먼저 농민들의 자세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꾸고, ‘우리도 할 수 있다’ (can-do spirit)는 의식을 계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마을의 협동 체제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지런한 농민’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변화의 촉매제가 될 활동으로 먼저 마을환경개선사업을 제시했다. &lt;br /&gt;
&lt;br /&gt;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주민 주도아래 마을환경개선사업을 하도록 전국의 3만 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했다. 각 마을은 사업 추진기구로 주민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 사업을 결정하고 주민의 협동으로 이를 추진했다. 마을 안 길을 포장하거나 다리를 놓고, 담장 바로잡기, 지붕을 볏짚 대신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바꾸는 것 등이 그 사업내용이었다. 실천적이고 가시적인 사업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1972년부터는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갈 주민지도자의 발굴과 훈련, 이들의 활동지원에 역점을 두면서 사업내용도 물리적인 환경개선, 생활개선, 영농기반조성과 함께, 주민들의 의식계발사업과 소득증대사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종자개량, 경지정리, 농업기계화, 선진영농법 도입 등에 새마을운동 조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lt;br /&gt;
&lt;br /&gt;
정부는 사업이 부진한 마을을 돕는 대신 성과가 좋은 마을에게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줌으로써 마을간의 경쟁과 분발을 촉진하는 시책을 썼다. 1973년 정부는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있는지에 따라 전국 3만5천 개 마을을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로 나누었다. 기초 마을은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없는 마을이다. 이 마을들에는 그 등급에 맞게 적합한 사업 과제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제공되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등급이 나뉘고 승급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갔다. 마을 사이에 경쟁심이 자극된 것이다. 1979년까지 전국 3만5천 개 마을 중 97%가 자립 마을로 승격했고 기초 마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lt;br /&gt;
좋은 성과를 낸 마을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참석한 새마을지도자 회의에서 성공사례발표를 하여 다른 마을에게 노우하우를 전수하고 경쟁심에 불을 당겼다. 성공사례로 뽑힌 마을에는 전국의 농촌지도자들이 견학을 가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농촌지역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둔 새마을 운동은 그 후 도시, 직장, 공장 등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시새마을운동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오물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lt;br /&gt;
&lt;br /&gt;
1980년에는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민간주도의 추진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과 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담당했다. &lt;br /&gt;
&lt;br /&gt;
새마을운동 제창 41년 후인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lt;br /&gt;
&lt;br /&gt;
새마을운동은 수 천 년을 이어온 한국농민의 수동성과 농촌의 빈곤을 타파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독창적인 지역사회개발 모델이지만 사정이 발전단계가 비슷한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해 볼만한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 국가원수들이 이 모델을 도입하고 싶어했다. &lt;br /&gt;
&lt;br /&gt;
한국정부도 새마을운동의 해외 전수에 적극 나섰다.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한국에서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다. 또한 한국해외협력단(KOICA)가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해외협력단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전수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lt;br /&gt;
&lt;br /&gt;
1970-1979기간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 새마을운동중앙회웹사이트&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새마을 운동의 직접적인 성공요인은 정부의 적절한 지원역할과 효율적인 추진전략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왕조시대와 일제강점기 등 오랜 세월 (중략)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 부분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사실에 근거하여 재집필될 필요가 있다.&amp;lt;br/&amp;gt; &lt;br /&gt;
이외에도 1970년대 농촌이 도시에 비하여 소득이 낮았던 이유는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략이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보다 많았으나 1970년대에 들어,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소득의 70%선으로 급락하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에 대한 배경, 정신 및 성과에 대한 내용은 있으나 새마을운동이 무엇인지 개념에 대한 서술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부분에 기술된 새마을운동의 세계화에 대한 내용에 대해 보다 강조하여 서술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 위키백과) 및 새마을운동중앙회웹사이트로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과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도시시새마을운동은..&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새마을운동 노래에 대해 설명하고, 그 가사의 내용을 예로 들면서 서술하면 좋겠다. 새마을운동 노래는 당시 동네 회관 스피커, 이른 새벽 골목골목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노래로 현재 40세 이상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노래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새마을운동 상징물인 ‘새마을기’는 새마을운동 전파와 홍보를 위해 제작된 것인데 당시 관공서와 기업체의 국기 게양대마다 태극기와 함께 의무적으로 게양되었다고 한다. 새마을기에서 상징하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지향점을 정리하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B%B6%84%EB%8B%A8%EA%B3%BC_%ED%95%9C%EA%B5%AD%EC%A0%84%EC%9F%81&amp;diff=409</id>
		<title>Draft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B%B6%84%EB%8B%A8%EA%B3%BC_%ED%95%9C%EA%B5%AD%EC%A0%84%EC%9F%81&amp;diff=409"/>
				<updated>2017-07-30T09:56: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6.25전쟁&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안전보장이사회]], [[맥아더]], [[이승만]], [[아이젠하워]]&lt;br /&gt;
|장소/공간= 한반도, 낙동강 전선, [[판문점]]&lt;br /&gt;
|사건=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군의 참전, [[1.4 후퇴]], [[휴전 회담]], 반공 포로 석방&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북위 38도선,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 [[정전 협정]], [[한‧미 상호 방위 조약]], 경제 원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8월 11일이었지만 소련은 8일부터 한반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도 서둘러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소련군은 미군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 다급해진 미군은 소련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8월 27일까지 38선 이북의 북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미군은 9월 8일에야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바로 38선을 통제하였다. 8월 말, 남북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모두 막았다. 9월 6일에는 통신을 끊고 우편물이 오고가는 것도 금지했다. 원래 38선은 미소 연합국이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남한과 북한을 분단시키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해왔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남한보다 훨씬 뛰어났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유엔은 바로 다음 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게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lt;br /&gt;
&lt;br /&gt;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다. 그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였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고 11월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은 후 38선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38선 근처에서는 양쪽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을 계속해봤자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현재 형성된 전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제안이 만들어졌고 회담이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휴전 회담은 2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싸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전 협정에 반대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무시된 채, 공산 국가로 돌아가기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이 휴전 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6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중단되었다.  &lt;br /&gt;
&lt;br /&gt;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다.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받아들였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 조인이 이뤄졌다. &lt;br /&gt;
&lt;br /&gt;
휴전은 했지만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국군과 유엔군 119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부상당하였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남북한의 인명 피해 규모는 50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거의 전국이 다 전쟁터였기 때문에 건물은 물론 도로, 철도, 항만과 산업 시설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피해는 같은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이효재, 『분단시대의 사회학』, 한길사, 1985&lt;br /&gt;
*『한국전쟁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67&lt;br /&gt;
*『6·25사변사』,육군본부, 1959&lt;br /&gt;
*『한국동란』 일년지∼삼년지, 국방부정훈국전사편찬위원회, 1951∼1954&lt;br /&gt;
*『6·25사변육군전사』,육군본부, 1952&lt;br /&gt;
* 이대근,「6·25사변의 국민경제적 귀결」,  『한국경제』 10, 성균관대학교 한국산업연구소, 1982&lt;br /&gt;
* 김학준, 진덕규외,「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1950년대의 인식』, 한길사, 198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글은 한국전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글의 대상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만큼 좀 더 객관적 기술이 필요하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당황한 미국~’ 등의 표현은 지양되어야 하겠다. &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남북한이 각각 독립국가 형성 과정 설명해야.&lt;br /&gt;
- 6·25전쟁 과정 간단하게 축소하여 정리할 것&lt;br /&gt;
- 통일을 위한 노력도 간단하게 서술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 주제인 분단과 6.25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함.&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B%B6%84%EB%8B%A8%EA%B3%BC_%ED%95%9C%EA%B5%AD%EC%A0%84%EC%9F%81&amp;diff=408</id>
		<title>Draft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B%B6%84%EB%8B%A8%EA%B3%BC_%ED%95%9C%EA%B5%AD%EC%A0%84%EC%9F%81&amp;diff=408"/>
				<updated>2017-07-30T09:56: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6.25전쟁&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안전보장이사회]], [[맥아더]], [[이승만]], [[아이젠하워]]&lt;br /&gt;
|장소/공간= 한반도, 낙동강 전선, [[판문점]]&lt;br /&gt;
|사건=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군의 참전, [[1.4 후퇴]], [[휴전 회담]], 반공 포로 석방&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북위 38도선,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 [[정전 협정]], [[한‧미 상호 방위 조약]], 경제 원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8월 11일이었지만 소련은 8일부터 한반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도 서둘러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소련군은 미군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 다급해진 미군은 소련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8월 27일까지 38선 이북의 북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미군은 9월 8일에야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바로 38선을 통제하였다. 8월 말, 남북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모두 막았다. 9월 6일에는 통신을 끊고 우편물이 오고가는 것도 금지했다. 원래 38선은 미소 연합국이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남한과 북한을 분단시키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해왔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남한보다 훨씬 뛰어났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유엔은 바로 다음 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게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lt;br /&gt;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다. 그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였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고 11월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은 후 38선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38선 근처에서는 양쪽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을 계속해봤자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현재 형성된 전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제안이 만들어졌고 회담이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휴전 회담은 2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싸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전 협정에 반대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무시된 채, 공산 국가로 돌아가기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이 휴전 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6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중단되었다.  &lt;br /&gt;
&lt;br /&gt;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다.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받아들였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 조인이 이뤄졌다. &lt;br /&gt;
&lt;br /&gt;
휴전은 했지만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국군과 유엔군 119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부상당하였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남북한의 인명 피해 규모는 50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거의 전국이 다 전쟁터였기 때문에 건물은 물론 도로, 철도, 항만과 산업 시설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피해는 같은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이효재, 『분단시대의 사회학』, 한길사, 1985&lt;br /&gt;
*『한국전쟁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67&lt;br /&gt;
*『6·25사변사』,육군본부, 1959&lt;br /&gt;
*『한국동란』 일년지∼삼년지, 국방부정훈국전사편찬위원회, 1951∼1954&lt;br /&gt;
*『6·25사변육군전사』,육군본부, 1952&lt;br /&gt;
* 이대근,「6·25사변의 국민경제적 귀결」,  『한국경제』 10, 성균관대학교 한국산업연구소, 1982&lt;br /&gt;
* 김학준, 진덕규외,「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1950년대의 인식』, 한길사, 198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글은 한국전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글의 대상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만큼 좀 더 객관적 기술이 필요하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당황한 미국~’ 등의 표현은 지양되어야 하겠다. &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남북한이 각각 독립국가 형성 과정 설명해야.&lt;br /&gt;
- 6·25전쟁 과정 간단하게 축소하여 정리할 것&lt;br /&gt;
- 통일을 위한 노력도 간단하게 서술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 주제인 분단과 6.25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함.&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D%95%B4%EB%B0%A9&amp;diff=407</id>
		<title>Draft 독립운동과 해방</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D%95%B4%EB%B0%A9&amp;diff=407"/>
				<updated>2017-07-30T09:54: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독립 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안창호]], 한민족,[[조선총독부]], [[임시 정부]], [[김구]], [[이봉창]], [[윤봉길]], 광복군, [[이승만]], 주미 외교위원회, [[루스벨트]], [[트루먼]]&lt;br /&gt;
|장소/공간= [[훙커우 공원]], [[상하이]], [[소련]], [[카이로]], [[얄타]], [[포츠담]], [[히로시마]], [[나가사키]]&lt;br /&gt;
|사건= [[이봉창의 의거]], 일본군 전승 기념식, [[윤봉길의 의거]],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히로시마 원폭 투하&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한일병합조약]], 무실·역행·충의·용감, 한국의 신탁 통치 안&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lt;br /&gt;
&lt;br /&gt;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주역은 안창호였고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 &lt;br /&gt;
&lt;br /&gt;
안창호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자기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무실’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천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다.  &lt;br /&gt;
&lt;br /&gt;
중국에 세워진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또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는 독립군 부대가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좌진 · 김규식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청산리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lt;br /&gt;
&lt;br /&gt;
독립 운동은 미주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해방을 전후한 때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lt;br /&gt;
&lt;br /&gt;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며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한민족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군의 활약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자료대한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0&lt;br /&gt;
* 송남헌, 『해방삼십년사』Ⅰ, 한국사료연구소, 1976&lt;br /&gt;
*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lt;br /&gt;
* 『한국현대사』, 국사편찬위원회편, 1982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대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적고 있는데, 국내 계몽단체의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도 보완되었으면 한다.&amp;lt;br/&amp;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독립운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으면... 그것만으로도 분량 충분&amp;lt;br/&amp;gt;&lt;br /&gt;
- 독립운동의 변천 과정을 국내외 정세와 연결하여 정리&amp;lt;br/&amp;gt;&lt;br /&gt;
- 시기별, 지역별 주요 인물과 사건 몇몇을 선정하여 설명하였으면 : 유관순, 김마리아, 안중군, 청산대첩, 봉오동전투, 임시정부, 중국과 러시아 지역 등의 독립군 등&amp;lt;br/&amp;gt;&lt;br /&gt;
- 해방은 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국내외에서의 노력의 결과였음도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C%84%B1%ED%99%A9%ED%9B%84_%EC%8B%9C%ED%95%B4&amp;diff=406</id>
		<title>Draft 명성황후 시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C%84%B1%ED%99%A9%ED%9B%84_%EC%8B%9C%ED%95%B4&amp;diff=406"/>
				<updated>2017-07-30T09:52: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일본, 조선의 황후를 살해하다&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고종]], [[조선]], [[대한제국]], [[명성황후]], [[청나라]], [[개화당]], [[친러파]], [[흥선대원군]]&lt;br /&gt;
|장소/공간= [[요동반도]], [[경복궁]], [[건천궁 장안당]], [[녹산]], [[러시아 공사관]]&lt;br /&gt;
|사건= 개항, [[을미사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삼국 간섭]]&lt;br /&gt;
|기록물= 대한민국역사박물관(http://muchkorea.tistory.com/412)&lt;br /&gt;
|개념용어= [[톈진조약]], 친러 내각, ‘여우 사냥’&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세워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개항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그 시기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된 사건이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을미사변(1895)이라 불리는 이 사건 뒤에는 복잡다단한 배경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여러 가지로 혼란해지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점점 강해졌다. 청나라 세력이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개화당이 쿠데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lt;br /&gt;
&lt;br /&gt;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1894)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두 나라 군대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전리품으로 챙기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이에 간섭을 하였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여긴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방법과 러시아의 협조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을 실천에 옮겼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떠넘기려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죽인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폭도는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의 칼등에 맞아 실신했다.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칼로 찔러 죽이고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건청궁 옆 녹산으로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신문 특파원 등 지식인들이었다. 또 일본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lt;br /&gt;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슬픔과 암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왕비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황후의 예우로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 대신 손가락 뼈 조각과 입었던 옷가지를 넣어 왕비릉을 조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고종실록(高宗實錄)』&lt;br /&gt;
*『매천야록(梅泉野錄)』&lt;br /&gt;
* 진단학회, 『한국사: 현대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3&lt;br /&gt;
* 角田房子 저, 김은숙 역, 『민비암살』, 조선일보사&lt;br /&gt;
* 이민원, 「아관파천 전후의 한로관계」 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을미사변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이 글의 대상이 외국인 집필자나 한국학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글의 내용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여러 근거와 시각적 자료를 제시해 객관적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 또한 명성황후가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는 만큼 창작 뮤지컬 &amp;lt;명성황후&amp;gt; 또는 이문열의 &amp;lt;여우사냥&amp;gt; 등을 추가 자료로 제시하여 이야기적 요소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도 필요하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명성황후 자체에 대한 소개 및 명성황후의 서양 세력, 서구 문물, 제도 등에 대한 생각 서술&amp;lt;br/&amp;gt;&lt;br /&gt;
- 1894년 조선을 둘러싼 내외 정세와 일본의 위기감 설명&amp;lt;br/&amp;gt;&lt;br /&gt;
- 일본의 비인도적, 야만적 행동에 대한 입장과 이에 대한 비판&amp;lt;br/&amp;gt;&lt;br /&gt;
- 현재 한국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 문화콘텐츠로서의 소재가 된 것을 소개&lt;br /&gt;
|의견3=&lt;br /&gt;
* 어떤 점이 감정적인지 잘 모르겠음. ‘비극적’이라든가 ‘덮어씌우려고’ 등의 어휘에서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정함. 창작 뮤지컬 &amp;lt;명성황후&amp;gt; 또는 이문열의 &amp;lt;여우사냥&amp;gt; 등은 더욱 감정적이고 편파적인 자료임&amp;lt;br/&amp;gt;&lt;br /&gt;
* 명성황후 자체에 대한 소개와 서양 세력, 서구 문물, 제도 등에 대한 생각 등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느 쪽이든 편파적인 내용을 실어야 하니 거론치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함. &amp;lt;br/&amp;gt;  &lt;br /&gt;
- 1894년 조선을 둘러싼 내외 정세와 일본의 위기감 설명되어 있음.&amp;lt;br/&amp;gt;&lt;br /&gt;
- 일본의 비인도적, 야만적 행동에 대한 입장과 이에 대한 비판은 감정적이지 말라고 하여 이 정도에서 그침(의견1과 2가 상반됨)&amp;lt;br/&amp;gt;&lt;br /&gt;
- 현재 한국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 문화콘텐츠로서의 소재가 된 것을 소개 :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D%98_%EA%B0%9C%ED%95%AD&amp;diff=405</id>
		<title>Draft 조선의 개항</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D%98_%EA%B0%9C%ED%95%AD&amp;diff=405"/>
				<updated>2017-07-30T09:51: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강화도조약으로 이뤄진 조선의 개항&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흥선대원군]], [[박지원]], [[정조]], [[박제가]], [[정약용]], [[고종]], [[신헌]], [[구로다 기요타카]]&lt;br /&gt;
|장소/공간= [[부산항]],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진, [[강화 연무당]], [[원산]], [[인천]]&lt;br /&gt;
|사건= 강화도조약의 체결, [[메이지유신]], [[운요호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위정척사]], [[성리학]], [[북학]], [[서학]], [[역산|역산(曆算)]], [[농상|농상(農桑)]], [[조함|조함(造艦)]], [[조일수호조규]], [[치외법권]]&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개항’은 특정한 항구를 열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를 역사적 의미로 보면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상황을 말한다. 1876년 이전까지 조선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양 사람들을 오랑캐라 업신여기고 배척하였다. 이런 주장을 주도한 사람들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위정척사 세력이었다. 원래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위정척사 세력은 성리학에 근거한 질서를 바른 것으로, 서양의 사상을 옳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lt;br /&gt;
&lt;br /&gt;
그런 조선이 처음 개항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일본의 무력 침략에 의한 강화도조약의 체결이다. 강화도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며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조선의 개항이 일본의 무력적 협박에 의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조선의 사회 내에서는 대외 개방의 열망이 싹트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개항에 앞선 개방의 열망은 조선의 북학론자(北學論者)와 서학도(西學徒) 사이에서 싹트고 있었다. 북학은 중국에서 들어온 선진 학문을 말하고 서학은 천주교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양의 학문을 말한다. 대표적인 북학론자인 박지원은 이미 정조 때 북학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박제가는 역산(曆算) · 농상(農桑) · 의약 · 건축 · 조함(造艦)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서양인을 초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도 기술 문화와 서구 세계와의 연계를 적극 주장하였다. 한편 박해와 탄압을 받은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구의 입김이 조선에 작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의 왕비를 중심으로 민씨 정권이 집권했을 때에 이르러서야 정부에 받아들여졌다.  &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조선과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섭해 왔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거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국내에서 자라온 개화 세력은 대외 개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일본은 군함 세 척을 부산항에 보내 함포 사격 연습을 한다는 구실로 조선에 위협을 가했다. 또 서울과 가까운 강화도에 운요호[雲揚號]를 출동시켜 조선의 수비병들이 포격을 하게끔 유도하였다. 운요호는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진에 함포를 쏘며 상륙했고 그를 막으려던 조선 수비병은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방화 · 살육 · 약탈을 자행하고 물러갔는데 이것이 운요호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자신들이 먼저 도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 조선이 사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사죄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조선 영해의 자유 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내세웠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기회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교섭을 요구해왔다. 결국 1876년 2월 3일(음력)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特命全權辦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사이에 12조로 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lt;br /&gt;
&lt;br /&gt;
강화도조약의 주요 내용은, 제1조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 한다, 제7조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제11조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등이다. &lt;br /&gt;
&lt;br /&gt;
제1조는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의도로 보이고 제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하여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 · 군사적으로 침략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또 제7조는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침략을 쉽게 한 조항이었고 제10조는 치외법권을 인정한 조항이었다. 이렇게 강화도조약은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lt;br /&gt;
&lt;br /&gt;
개항 이후 민씨 정권은 일본과 청나라에 각각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적극적으로 문호 개방에 힘썼다. 그런데 불평등조약에 의해 일본과의 무관세(無關稅) 무역이 실시되어 서양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에 대한 대가로 국내의 곡물과 금·은이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무관세로 들어온 서양의 물건들은 조선의 수공업자층을 몰락시켰고 곡물과 금은의 유출은 물가를 급등시켰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소작농민 · 중소상인 · 수공업자 계층이 몰락해갔다. 특히 쌀의 수출은 농민층의 몰락을 초래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렇게 개항 이후 사회적 모순이 심해지면서 서민은 더욱 살기 어려워졌고 개항 이전부터 있었던 봉건 지주 계급과의 갈등 역시 심화되었다. 이 갈등은 사회 개혁의 요구로 드러났고 이는 다시 농민 항쟁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항은 국내 학자들의 꾸준한 요청에 의한 조정의 호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항 자체에 결정적 역할은 한 것은 일본의 침략적 군사 외교라는 외부적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이뤄진 불평등한 조약은 사회 경제적으로 조선 사회의 뿌리를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다시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의 개국과 국제관계』(동덕모, 서울대학교출판부, 1980)&lt;br /&gt;
* 이종택, 「근세조선개국외교사-쇄국정책과 개국의 경위-」,『법정논총』 1, 중앙대학교, 1955&lt;br /&gt;
* 김영호,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문제」 『한국사연구』 8, 1972&lt;br /&gt;
* 이현종, 「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개항장」, 『한국개항장연구』, 일조각, 1975&lt;br /&gt;
* 김경태,「개항초기의 정치사상상황」, 『이대사원』 15, 1978&lt;br /&gt;
* 이원순, 「한국근대문화의 서구적기초」, 『한국사학』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개항이 가져 온 조선의 경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개항 당시 중국, 일본의 정세&amp;lt;br/&amp;gt;&lt;br /&gt;
- 당시 한국사회의 개항에 대한 찬반 이론&amp;lt;br/&amp;gt;&lt;br /&gt;
- 운요호 사건을 일본 정계와 연계하여 설명&amp;lt;br/&amp;gt;&lt;br /&gt;
- 메이지유신은 1865년이 아니고 1868년&amp;lt;br/&amp;gt;&lt;br /&gt;
-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성 서술&amp;lt;br/&amp;gt;&lt;br /&gt;
- 개항을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 ‘한국 근대사에 치명적인 독소 역할’이라는 부정적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정세에서 개항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과 제국주의 침탈에 대해 자주독립하고자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하였던 당시 위정자의 생각, 노력을 구체화한 시발점도 된다는 것을 서술하였으면.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8%EB%A9%9C%EC%9D%98_%ED%95%9C%EA%B5%AD%EA%B8%B0%ED%96%89&amp;diff=404</id>
		<title>Draft 하멜의 한국기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8%EB%A9%9C%EC%9D%98_%ED%95%9C%EA%B5%AD%EA%B8%B0%ED%96%89&amp;diff=404"/>
				<updated>2017-07-30T09:50: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서양에 조선을 알린 최초의 기록, &amp;lt;하멜 표류기&amp;gt;&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스페로 호크 호]], [[헨드릭 하멜]], [[포겔 스트루이스 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벨테브레]]&lt;br /&gt;
|장소/공간= [[제주도 산방산]], [[타이완]], [[나가사키]], [[전라도]], [[암스테르담]], [[훈련도감]], [[자바 섬 바다비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홍이포]], 군역 · 태형 · 유형, [[여수 좌수영]], [[조선 왕국기]], [[하멜 기념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호가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표류해온 때는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 때인 1653년이었다. 심한 풍랑으로 배는 크게 부서지고 선원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중 8명이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돌아간 선원 중 헨드릭 하멜(Hamel,H.)은 조선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이 &amp;lt;하멜 표류기&amp;gt;이다.   &lt;br /&gt;
&lt;br /&gt;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조선으로 오게 된 경위와 조선에서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1653년 1월 하멜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 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 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스페로 호크 호를 타고 타이완[臺灣]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임 총독을 임지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에 도착한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 말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한 스페로 호크 호는 심한 풍랑으로 보름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서 헤매야 했다. 표류하던 그들이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제주도 남해안이었다.&lt;br /&gt;
&lt;br /&gt;
정박하는 과정에도 심한 풍랑이 몰아쳐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그래서 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은 목숨을 잃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제주도와 서울, 전라도 등지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20명이 죽었고 최종 생존자는 16명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들보다 앞선 1628년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Weltevree, 朴燕)가 표류해왔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 · 조종법을 지도하는 등 서양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전해주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벨테브레는 직접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에서는 하멜 일행에 대해 벨테브레와 같은 효용 가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잡역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대부분 10대 후반의 소년들로 배에서 단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 · 감금 · 태형 · 유형 등 모진 풍상을 다 겪었고 지방관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경우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당시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경험과 관찰이 &amp;lt;하멜 표류기&amp;gt;의 근간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탈출 직전의 생존자 16명이 억류되었던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인근의 섬들을 다니면서 조수와 풍향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배에 대한 감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배가 잘 노출되도록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666년 9월, 16명 중 8명만이 탈출을 시도했다.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lt;br /&gt;
&lt;br /&gt;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 회사에 요구했는데 이때 표류의 증거로 써서 제출한 것이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다. &lt;br /&gt;
&lt;br /&gt;
&amp;lt;하멜 표류기&amp;gt;는 1668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세 군데에서 동시에 출간되었고 이후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앞 다투어 번역하여 펴냈다. 책의 내용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난파와 표류에 관해 썼고, 2부에서는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지리 · 정치 · 군사 · 풍속 · 교육 등을 소개했다. 조선 왕국기에는 하멜이 잘못 알고 있는 쓴 내용도 많다. 하지만 우리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17세기 조선의 사회 실상과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상 생활, 풍속, 관습 등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유럽 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며 현대 한국인에게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lt;br /&gt;
&lt;br /&gt;
또 &amp;lt;하멜 표류기&amp;gt;는 17세기 국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에 표기된 발음을 통해 지금은 쓰이지 않고 글자로만 남아 있던 ‘ㅅㄷ’ 등 17세기 국어의 발음을 일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1980년 10월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난파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 기념비를 세웠다.&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효종실록(孝宗實錄)』 &lt;br /&gt;
*『현종실록(顯宗實錄)』&lt;br /&gt;
*『하멜표류기』, 일조각, 1954&lt;br /&gt;
* 이병도 역, 「하멜표류기」, 『진단학보』 1∼3, 193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하멜표류기 책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해야 한다. 백과사전 수준의 하멜이 표류되는 과정, 한국에서의 억류생활 등 하멜에 대한 이야기보다 &amp;lt;하멜표류기&amp;gt;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하멜의 조선 탈출만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하멜이 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기술되지 않고 있어 이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도입부분 서술: 하멜의 표류가 왜 한국의 중요사건으로 말할 수 있는지 설명할 것&lt;br /&gt;
- 하멜이 한국에 표류한 1653년은 어느 임금 때인지 서술&lt;br /&gt;
- 하멜표류기 내용 중 흥미있는 내용 하나 정도 소개&lt;br /&gt;
|의견3=&lt;br /&gt;
* 하멜이 표류되는 과정, 한국에서의 억류 생활, 탈출 등이 &amp;lt;하멜 표류기&amp;gt; 1부의 내용임. 그게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겠어요?&lt;br /&gt;
* 하멜은 눈에 보이는 대로 객관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기술은 한 마디로 찾기 어려움. 케이스에 따라 다르게 기술했음.&lt;br /&gt;
예를 들어 조선인의 기질에 대해 &lt;br /&gt;
*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강한데, 거래를 하다가 속았다고 생각되면 취소할 수 있음&lt;br /&gt;
* 성품이 온순하며 신앙심이 매우 두텁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다. 낯선 사람들, 특히 승려들에게 호의적임&lt;br /&gt;
* 그들의 마음은 여자처럼 여리다. 박연이 알려준 사실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가 침략했을 때 숲속에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는 자살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함&lt;br /&gt;
&lt;br /&gt;
이렇게 써다가 교육에는 &lt;br /&gt;
* 양반과 평민들은 자식을 아주 잘 교육시키려 함&lt;br /&gt;
이라고 쓰기도 했음. 이렇게 오락가락하는데 그 중 무엇을 취해야 할지...&lt;br /&gt;
*또 하멜은 많이 배운 고급 인력도 아니고 그의 주관적 평가를 여기에 내놓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필자가 아니었음. 그냥 이런 기록을 전했다는 데 의의를 두는 게 나을 듯함.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8%EB%A9%9C%EC%9D%98_%ED%95%9C%EA%B5%AD%EA%B8%B0%ED%96%89&amp;diff=403</id>
		<title>Draft 하멜의 한국기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8%EB%A9%9C%EC%9D%98_%ED%95%9C%EA%B5%AD%EA%B8%B0%ED%96%89&amp;diff=403"/>
				<updated>2017-07-30T09:49: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서양에 조선을 알린 최초의 기록, &amp;lt;하멜 표류기&amp;gt;&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스페로 호크 호]], [[헨드릭 하멜]], [[포겔 스트루이스 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벨테브레]]&lt;br /&gt;
|장소/공간= [[제주도 산방산]], [[타이완]], [[나가사키]], [[전라도]], [[암스테르담]], [[훈련도감]], [[자바 섬 바다비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홍이포]], 군역 · 태형 · 유형, [[여수 좌수영]], [[조선 왕국기]], [[하멜 기념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호가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표류해온 때는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 때인 1653년이었다. 심한 풍랑으로 배는 크게 부서지고 선원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중 8명이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돌아간 선원 중 헨드릭 하멜(Hamel,H.)은 조선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이 &amp;lt;하멜 표류기&amp;gt;이다.   &lt;br /&gt;
&lt;br /&gt;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조선으로 오게 된 경위와 조선에서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1653년 1월 하멜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 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 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스페로 호크 호를 타고 타이완[臺灣]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임 총독을 임지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에 도착한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 말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한 스페로 호크 호는 심한 풍랑으로 보름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서 헤매야 했다. 표류하던 그들이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제주도 남해안이었다.&lt;br /&gt;
&lt;br /&gt;
정박하는 과정에도 심한 풍랑이 몰아쳐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그래서 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은 목숨을 잃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제주도와 서울, 전라도 등지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20명이 죽었고 최종 생존자는 16명이었다. &lt;br /&gt;
&lt;br /&gt;
이들보다 앞선 1628년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Weltevree, 朴燕)가 표류해왔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 · 조종법을 지도하는 등 서양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전해주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벨테브레는 직접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에서는 하멜 일행에 대해 벨테브레와 같은 효용 가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잡역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대부분 10대 후반의 소년들로 배에서 단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 · 감금 · 태형 · 유형 등 모진 풍상을 다 겪었고 지방관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경우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당시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경험과 관찰이 &amp;lt;하멜 표류기&amp;gt;의 근간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탈출 직전의 생존자 16명이 억류되었던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인근의 섬들을 다니면서 조수와 풍향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배에 대한 감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배가 잘 노출되도록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666년 9월, 16명 중 8명만이 탈출을 시도했다.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lt;br /&gt;
&lt;br /&gt;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 회사에 요구했는데 이때 표류의 증거로 써서 제출한 것이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다. &lt;br /&gt;
&lt;br /&gt;
&amp;lt;하멜 표류기&amp;gt;는 1668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세 군데에서 동시에 출간되었고 이후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앞 다투어 번역하여 펴냈다. 책의 내용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난파와 표류에 관해 썼고, 2부에서는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지리 · 정치 · 군사 · 풍속 · 교육 등을 소개했다. 조선 왕국기에는 하멜이 잘못 알고 있는 쓴 내용도 많다. 하지만 우리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17세기 조선의 사회 실상과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상 생활, 풍속, 관습 등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유럽 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며 현대 한국인에게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lt;br /&gt;
&lt;br /&gt;
또 &amp;lt;하멜 표류기&amp;gt;는 17세기 국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에 표기된 발음을 통해 지금은 쓰이지 않고 글자로만 남아 있던 ‘ㅅㄷ’ 등 17세기 국어의 발음을 일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1980년 10월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난파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 기념비를 세웠다.&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효종실록(孝宗實錄)』 &lt;br /&gt;
*『현종실록(顯宗實錄)』&lt;br /&gt;
*『하멜표류기』, 일조각, 1954&lt;br /&gt;
* 이병도 역, 「하멜표류기」, 『진단학보』 1∼3, 193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하멜표류기 책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해야 한다. 백과사전 수준의 하멜이 표류되는 과정, 한국에서의 억류생활 등 하멜에 대한 이야기보다 &amp;lt;하멜표류기&amp;gt;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하멜의 조선 탈출만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하멜이 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기술되지 않고 있어 이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도입부분 서술: 하멜의 표류가 왜 한국의 중요사건으로 말할 수 있는지 설명할 것&lt;br /&gt;
- 하멜이 한국에 표류한 1653년은 어느 임금 때인지 서술&lt;br /&gt;
- 하멜표류기 내용 중 흥미있는 내용 하나 정도 소개&lt;br /&gt;
|의견3=&lt;br /&gt;
* 하멜이 표류되는 과정, 한국에서의 억류 생활, 탈출 등이 &amp;lt;하멜 표류기&amp;gt; 1부의 내용임. 그게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겠어요?&lt;br /&gt;
* 하멜은 눈에 보이는 대로 객관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기술은 한 마디로 찾기 어려움. 케이스에 따라 다르게 기술했음.&lt;br /&gt;
예를 들어 조선인의 기질에 대해 &lt;br /&gt;
*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강한데, 거래를 하다가 속았다고 생각되면 취소할 수 있음&lt;br /&gt;
* 성품이 온순하며 신앙심이 매우 두텁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다. 낯선 사람들, 특히 승려들에게 호의적임&lt;br /&gt;
* 그들의 마음은 여자처럼 여리다. 박연이 알려준 사실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가 침략했을 때 숲속에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는 자살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함&lt;br /&gt;
&lt;br /&gt;
이렇게 써다가 교육에는 &lt;br /&gt;
* 양반과 평민들은 자식을 아주 잘 교육시키려 함&lt;br /&gt;
이라고 쓰기도 했음. 이렇게 오락가락하는데 그 중 무엇을 취해야 할지...&lt;br /&gt;
*또 하멜은 많이 배운 고급 인력도 아니고 그의 주관적 평가를 여기에 내놓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필자가 아니었음. 그냥 이런 기록을 전했다는 데 의의를 두는 게 나을 듯함.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99%EC%9D%98%EB%B3%B4%EA%B0%90%EC%9D%98_%EA%B0%84%ED%96%89&amp;diff=402</id>
		<title>Draft 동의보감의 간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99%EC%9D%98%EB%B3%B4%EA%B0%90%EC%9D%98_%EA%B0%84%ED%96%89&amp;diff=402"/>
				<updated>2017-07-30T09:46: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조선 의학의 표준, &amp;lt;동의보감&amp;gt;&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lt;br /&gt;
|인물/기관/단체= [[허준|허준(許浚)]], [[조선 선조|선조]], [[정작|정작(鄭碏)]], [[이원명|이명원(李命源)]], [[양예수|양예수(楊禮壽)]], [[김응탁|김응탁(金應鐸)]], [[정예남|정예남(鄭禮男)]], [[조선 광해군|광해군]]&lt;br /&gt;
|장소/공간=[[의주]]&lt;br /&gt;
|사건=[[임진왜란]], [[정유재란]]&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목활자]], [[내의원]], [[침]], [[뜸]], [[양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동의보감(東醫寶鑑)&amp;gt;은 1610년에 완성하여 1613년 목활자로 인쇄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이다. 이 책의 대표 저자는 허준(許浚, 1539〜1615)이라는 의원이다. 책 제목의 ‘동의’는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전통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쪽의 의학 전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조선의 의학 전통을 말한다. ‘보감’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모범이 될 만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허준은 조선의 의학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과 조선 의학의 표준을 세웠다는 뜻으로 &amp;lt;동의보감&amp;g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의 편찬 사업은 선조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전쟁 피해의 복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선조는 1596년 의원 허준에게 새 의학 서적의 편찬을 지시했다. 민간에서 이용되던 의학 서적들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허준을 비롯하여 정작(鄭碏), 이명원(李命源),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정예남(鄭禮男) 등 여섯 명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끝내는 허준이 혼자 집필하여 14년 만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 완성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목차가 겨우 만들어졌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 전쟁 때문에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려 &amp;lt;동의보감&amp;gt;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1601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금의 의서 500여 권을 내주면서 혼자서라도 &amp;lt;동의보감&amp;gt;을 완성하라고 명령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내의원 일이 바빴던 허준은 선조가 세상을 떠난 1608년까지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허준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문책으로 의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amp;lt;동의보감&amp;gt; 집필에 전념했다. 1609년 말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이듬해 8월 &amp;lt;동의보감&amp;gt;을 완성하여 광해군에 바쳤다. 하지만 전쟁 직후라 출판할 사정이 되지 않았고 3년이 지난 1613년에야 인쇄본이 출판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은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학 내용은 ‘내경편(內景篇)’, ‘외형편(外形篇)’, ‘잡병편(雜病篇)’, ‘탕액편(湯液篇)’, ‘침구편(鍼灸篇)’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내경편’에는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는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잡병편’에는 신체 관련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병 이론과 구체적인 병 내용이 담겨 있다. ‘탕액편’은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이, ‘침구편’에는 침 · 뜸에 대한 이론과 실재 사용 방법이 실려 있다. 침을 놓는 데 필요한 경혈(徑穴)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고 침을 놓아 병을 고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병 증상에 따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허준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병 증세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쉬운 치료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허준은 증상에 따른 치료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치료 근거가 되는 여러 가지 문헌을 들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편찬되거나 중국에서 수입된 의서는 물론, 민간에 전하는 속방(俗方)의 치료 방법과 허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비방까지 포함되어 있다. 내용의 충실성은 물론 민간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어려서 서자로 자라며 서민들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했던 허준은 왕족이나 양반 사대부들의 치료는 물론 가난한 민중을 병마에서 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 예로 &amp;lt;언해두창집요〉·〈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 등 우리말로 된 의서를 간행한 점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이 한국인에게 주는 가장 큰 의의는 이 책이 한민족에게 맞게 만들어진 의서라는 점이다. 당시에도 이미 많은 의서가 중국에서 수입되었지만 그 책들은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은 자연 환경, 서식하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이 달라 중국의 의학을 그대로 한민족에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허준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한민족에 맞는 새로운 의서 &amp;lt;동의보감&amp;gt;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국의 의서를 참고할 때도 우리 현실에 맞는 부분만 골랐고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록 약초 이름은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라는 집필 원칙을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amp;lt;동의보감&amp;gt;은 2009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2000&lt;br /&gt;
*김두종, 『조선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66&lt;br /&gt;
*윤병태, 「동의보감해제」, 『도서관』106, 1966&lt;br /&gt;
*[http://www.cha.go.kr 문화재청]&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중연의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의 내용과 동일하여. 새로운 집필로 볼 수 없다.&lt;br /&gt;
&lt;br /&gt;
동의보감의 편찬과정에만 치중되어 있음. 동의보감이 당시 서민들에게 어떻게 확산되고 활용되었는지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lt;br /&gt;
- &amp;lt;동의보감&amp;gt; 집필 원칙과 주요 특징을 함께 연관지어 서술하면 좋을 듯, 반복되는 느낌있음&lt;br /&gt;
-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사명감, 능력 관련 에피소드 첨가했으면.&lt;br /&gt;
- 현재 &amp;lt;동의보감&amp;gt; 활용 상황을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 허준 개인의 이야기나 에피소드 등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아 이런 공식적인 내용에 담기가 위험함. &amp;lt;br/&amp;gt;&lt;br /&gt;
- 집필 원칙이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민족문화대백과가 아니라 어떤 책이라도 같은 내용일 것임. 중복된 것이 문제라면 빼는 수밖에 없어서 일부만 남기고 삭제.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99%EC%9D%98%EB%B3%B4%EA%B0%90%EC%9D%98_%EA%B0%84%ED%96%89&amp;diff=401</id>
		<title>Draft 동의보감의 간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99%EC%9D%98%EB%B3%B4%EA%B0%90%EC%9D%98_%EA%B0%84%ED%96%89&amp;diff=401"/>
				<updated>2017-07-30T09:45: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조선 의학의 표준, &amp;lt;동의보감&amp;gt;&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허준|허준(許浚)]], [[조선 선조|선조]], [[정작|정작(鄭碏)]], [[이원명|이명원(李命源)]], [[양예수|양예수(楊禮壽)]], [[김응탁|김응탁(金應鐸)]], [[정예남|정예남(鄭禮男)]], [[조선 광해군|광해군]]&lt;br /&gt;
|장소/공간=[[의주]]&lt;br /&gt;
|사건=[[임진왜란]], [[정유재란]]&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목활자]], [[내의원]], [[침]], [[뜸]], [[양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교열자=&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동의보감(東醫寶鑑)&amp;gt;은 1610년에 완성하여 1613년 목활자로 인쇄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이다. 이 책의 대표 저자는 허준(許浚, 1539〜1615)이라는 의원이다. 책 제목의 ‘동의’는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전통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쪽의 의학 전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조선의 의학 전통을 말한다. ‘보감’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모범이 될 만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허준은 조선의 의학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과 조선 의학의 표준을 세웠다는 뜻으로 &amp;lt;동의보감&amp;g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의 편찬 사업은 선조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전쟁 피해의 복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선조는 1596년 의원 허준에게 새 의학 서적의 편찬을 지시했다. 민간에서 이용되던 의학 서적들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허준을 비롯하여 정작(鄭碏), 이명원(李命源),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정예남(鄭禮男) 등 여섯 명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끝내는 허준이 혼자 집필하여 14년 만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 완성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목차가 겨우 만들어졌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 전쟁 때문에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려 &amp;lt;동의보감&amp;gt;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1601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금의 의서 500여 권을 내주면서 혼자서라도 &amp;lt;동의보감&amp;gt;을 완성하라고 명령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내의원 일이 바빴던 허준은 선조가 세상을 떠난 1608년까지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허준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문책으로 의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amp;lt;동의보감&amp;gt; 집필에 전념했다. 1609년 말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이듬해 8월 &amp;lt;동의보감&amp;gt;을 완성하여 광해군에 바쳤다. 하지만 전쟁 직후라 출판할 사정이 되지 않았고 3년이 지난 1613년에야 인쇄본이 출판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은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학 내용은 ‘내경편(內景篇)’, ‘외형편(外形篇)’, ‘잡병편(雜病篇)’, ‘탕액편(湯液篇)’, ‘침구편(鍼灸篇)’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내경편’에는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는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잡병편’에는 신체 관련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병 이론과 구체적인 병 내용이 담겨 있다. ‘탕액편’은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이, ‘침구편’에는 침 · 뜸에 대한 이론과 실재 사용 방법이 실려 있다. 침을 놓는 데 필요한 경혈(徑穴)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고 침을 놓아 병을 고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병 증상에 따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허준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병 증세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쉬운 치료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허준은 증상에 따른 치료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치료 근거가 되는 여러 가지 문헌을 들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편찬되거나 중국에서 수입된 의서는 물론, 민간에 전하는 속방(俗方)의 치료 방법과 허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비방까지 포함되어 있다. 내용의 충실성은 물론 민간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어려서 서자로 자라며 서민들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했던 허준은 왕족이나 양반 사대부들의 치료는 물론 가난한 민중을 병마에서 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 예로 &amp;lt;언해두창집요〉·〈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 등 우리말로 된 의서를 간행한 점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이 한국인에게 주는 가장 큰 의의는 이 책이 한민족에게 맞게 만들어진 의서라는 점이다. 당시에도 이미 많은 의서가 중국에서 수입되었지만 그 책들은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은 자연 환경, 서식하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이 달라 중국의 의학을 그대로 한민족에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허준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한민족에 맞는 새로운 의서 &amp;lt;동의보감&amp;gt;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국의 의서를 참고할 때도 우리 현실에 맞는 부분만 골랐고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록 약초 이름은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라는 집필 원칙을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amp;lt;동의보감&amp;gt;은 2009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2000&lt;br /&gt;
*김두종, 『조선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66&lt;br /&gt;
*윤병태, 「동의보감해제」, 『도서관』106, 1966&lt;br /&gt;
*[http://www.cha.go.kr 문화재청]&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중연의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의 내용과 동일하여. 새로운 집필로 볼 수 없다.&lt;br /&gt;
&lt;br /&gt;
동의보감의 편찬과정에만 치중되어 있음. 동의보감이 당시 서민들에게 어떻게 확산되고 활용되었는지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lt;br /&gt;
- &amp;lt;동의보감&amp;gt; 집필 원칙과 주요 특징을 함께 연관지어 서술하면 좋을 듯, 반복되는 느낌있음&lt;br /&gt;
-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사명감, 능력 관련 에피소드 첨가했으면.&lt;br /&gt;
- 현재 &amp;lt;동의보감&amp;gt; 활용 상황을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 허준 개인의 이야기나 에피소드 등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아 이런 공식적인 내용에 담기가 위험함. &amp;lt;br/&amp;gt;&lt;br /&gt;
- 집필 원칙이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민족문화대백과가 아니라 어떤 책이라도 같은 내용일 것임. 중복된 것이 문제라면 빼는 수밖에 없어서 일부만 남기고 삭제.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99%EC%9D%98%EB%B3%B4%EA%B0%90%EC%9D%98_%EA%B0%84%ED%96%89&amp;diff=400</id>
		<title>Draft 동의보감의 간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99%EC%9D%98%EB%B3%B4%EA%B0%90%EC%9D%98_%EA%B0%84%ED%96%89&amp;diff=400"/>
				<updated>2017-07-30T09:44: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조선 의학의 표준, &amp;lt;동의보감&amp;gt;&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허준|허준(許浚)]], [[조선 선조|선조]], [[정작|정작(鄭碏)]], [[이원명|이명원(李命源)]], [[양예수|양예수(楊禮壽)]], [[김응탁|김응탁(金應鐸)]], [[정예남|정예남(鄭禮男)]], [[조선 광해군|광해군]]&lt;br /&gt;
|장소/공간=[[의주]]&lt;br /&gt;
|사건=[[임진왜란]], [[정유재란]]&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목활자]], [[내의원]], [[침]], [[뜸]], [[양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교열자=&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동의보감(東醫寶鑑)&amp;gt;은 1610년에 완성하여 1613년 목활자로 인쇄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이다. 이 책의 대표 저자는 허준(許浚, 1539〜1615)이라는 의원이다. 책 제목의 ‘동의’는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전통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쪽의 의학 전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조선의 의학 전통을 말한다. ‘보감’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모범이 될 만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허준은 조선의 의학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과 조선 의학의 표준을 세웠다는 뜻으로 &amp;lt;동의보감&amp;g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의 편찬 사업은 선조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전쟁 피해의 복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선조는 1596년 의원 허준에게 새 의학 서적의 편찬을 지시했다. 민간에서 이용되던 의학 서적들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허준을 비롯하여 정작(鄭碏), 이명원(李命源),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정예남(鄭禮男) 등 여섯 명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끝내는 허준이 혼자 집필하여 14년 만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 완성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목차가 겨우 만들어졌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 전쟁 때문에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려 &amp;lt;동의보감&amp;gt;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1601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금의 의서 500여 권을 내주면서 혼자서라도 &amp;lt;동의보감&amp;gt;을 완성하라고 명령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내의원 일이 바빴던 허준은 선조가 세상을 떠난 1608년까지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허준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문책으로 의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amp;lt;동의보감&amp;gt; 집필에 전념했다. 1609년 말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이듬해 8월 &amp;lt;동의보감&amp;gt;을 완성하여 광해군에 바쳤다. 하지만 전쟁 직후라 출판할 사정이 되지 않았고 3년이 지난 1613년에야 인쇄본이 출판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은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학 내용은 ‘내경편(內景篇)’, ‘외형편(外形篇)’, ‘잡병편(雜病篇)’, ‘탕액편(湯液篇)’, ‘침구편(鍼灸篇)’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내경편’에는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는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잡병편’에는 신체 관련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병 이론과 구체적인 병 내용이 담겨 있다. ‘탕액편’은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이, ‘침구편’에는 침 · 뜸에 대한 이론과 실재 사용 방법이 실려 있다. 침을 놓는 데 필요한 경혈(徑穴)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고 침을 놓아 병을 고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병 증상에 따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허준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병 증세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쉬운 치료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허준은 증상에 따른 치료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치료 근거가 되는 여러 가지 문헌을 들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편찬되거나 중국에서 수입된 의서는 물론, 민간에 전하는 속방(俗方)의 치료 방법과 허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비방까지 포함되어 있다. 내용의 충실성은 물론 민간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어려서 서자로 자라며 서민들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했던 허준은 왕족이나 양반 사대부들의 치료는 물론 가난한 민중을 병마에서 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 예로 &amp;lt;언해두창집요〉·〈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 등 우리말로 된 의서를 간행한 점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amp;lt;동의보감&amp;gt;이 한국인에게 주는 가장 큰 의의는 이 책이 한민족에게 맞게 만들어진 의서라는 점이다. 당시에도 이미 많은 의서가 중국에서 수입되었지만 그 책들은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은 자연 환경, 서식하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이 달라 중국의 의학을 그대로 한민족에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허준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한민족에 맞는 새로운 의서 &amp;lt;동의보감&amp;gt;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국의 의서를 참고할 때도 우리 현실에 맞는 부분만 골랐고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록 약초 이름은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라는 집필 원칙을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amp;lt;동의보감&amp;gt;은 2009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2000&lt;br /&gt;
*김두종, 『조선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66&lt;br /&gt;
*윤병태, 「동의보감해제」, 『도서관』106, 1966&lt;br /&gt;
*[http://www.cha.go.kr 문화재청]&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중연의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의 내용과 동일하여. 새로운 집필로 볼 수 없다.&lt;br /&gt;
&lt;br /&gt;
동의보감의 편찬과정에만 치중되어 있음. 동의보감이 당시 서민들에게 어떻게 확산되고 활용되었는지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lt;br /&gt;
- &amp;lt;동의보감&amp;gt; 집필 원칙과 주요 특징을 함께 연관지어 서술하면 좋을 듯, 반복되는 느낌있음&lt;br /&gt;
-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사명감, 능력 관련 에피소드 첨가했으면.&lt;br /&gt;
- 현재 &amp;lt;동의보감&amp;gt; 활용 상황을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 허준 개인의 이야기나 에피소드 등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아 이런 공식적인 내용에 담기가 위험함. &amp;lt;br/&amp;gt;&lt;br /&gt;
- 집필 원칙이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민족문화대백과가 아니라 어떤 책이라도 같은 내용일 것임. 중복된 것이 문제라면 빼는 수밖에 없어서 일부만 남기고 삭제.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B%9F%89%ED%95%B4%EC%A0%84%EA%B3%BC_%EC%9D%B4%EC%88%9C%EC%8B%A0&amp;diff=399</id>
		<title>Draft 명량해전과 이순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B%9F%89%ED%95%B4%EC%A0%84%EA%B3%BC_%EC%9D%B4%EC%88%9C%EC%8B%A0&amp;diff=399"/>
				<updated>2017-07-30T09:40: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유성룡]], [[원균|원균(元均)]], [[정탁|정탁(鄭琢)]], [[권율|권율(權慄)]], [[발라드 제독|발라드(G. A. Ballard) 제독]], [[넬슨 제독]]&lt;br /&gt;
|장소/공간= [[아산]], [[서울 건천동]], [[좌수영]], [[부산 동래]], [[옥포]], [[당포]], [[당항포]], [[안골포]], [[한산도]], [[거제 칠천량]], [[노량]], [[명량]]&lt;br /&gt;
|사건=[[임진왜란]], [[옥포대첩]], [[노량해전]], [[한산도 대첩]], [[칠천량 해전]], [[명량해전]] &lt;br /&gt;
|기록물= &lt;br /&gt;
|개념용어= [[징비록]], 식년 무과 병과, [[권지훈련원 봉사]], [[명나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거북선]], [[판옥선]], [[학익진]], [[삼도수군통제사]], [[경상우수사]], [[백의종군]], [[우의정]], [[도원수]], [[난중일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교열자=&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 당하다시피 했던 임진왜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명장이 바로 이순신이다.  &lt;br /&gt;
&lt;br /&gt;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가 태어난 서울 건천동 집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amp;lt;징비록(懲毖錄)&amp;gt;에 적었다.  &lt;br /&gt;
&lt;br /&gt;
32세 되던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뒤늦게 관직에 나갔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쟁을 위한 배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조선의 전선(戰船)은 대부분, 배 위 갑판을 덮고 그 위에 누각 등을 세운 판옥선이었다.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도록 만든 배였다.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다시 철갑 덮개를 씌워 거북이 모양처럼 만든 배로, 등에는 칼과 송곳 등을 꽂아 적이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또 용의 머리처럼 만든 앞부분에는 총 구멍을 내서 마치 용의 입에서 불을 뿜는 듯한 모습을 나타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들은 적의 배들 사이를 다니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에게는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가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여러 장수가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손에 넣었다.&lt;br /&gt;
&lt;br /&gt;
이에 이순신은 즉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옥포(玉浦) 앞바다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선 26척을 부수고 많은 왜병을 물리쳤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이다.&lt;br /&gt;
&lt;br /&gt;
그 후 노량(露梁) 앞바다에서도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 처음으로 출동한 거북선은 그 위력을 확고하게 인정받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唐浦), 당항포, 안골포(安骨浦),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몇 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도 대첩이다. 한산도 대첩은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 ·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다. 이 대첩은 육지에서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조선군에 용기를 되찾게 해주었다.&lt;br /&gt;
&lt;br /&gt;
1593년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뒷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등에 힘썼다.&lt;br /&gt;
&lt;br /&gt;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이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왜군의 모략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서 사병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가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에 선조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lt;br /&gt;
&lt;br /&gt;
그 때 조선 수군에 남은 군사는 120여 명, 병선은 고작 열두 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했다. 그는 이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으로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의욕을 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선두(船頭)에 서 있던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는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왜군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amp;lt;난중일기(亂中日記)&amp;gt;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lt;br /&gt;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lt;br /&gt;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lt;br /&gt;
*『징비록(懲毖錄)』 &lt;br /&gt;
* 천관우, 「성웅이충무공론」, 『한국사의 재발견』, 일조각, 1974&lt;br /&gt;
* 최영희, 「이순신」,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73&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글에서 “해전사연구가~평가하였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후대에 이순신이 왜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보충되어야 한다. 이순신의 리더십, 지형, 조류 등의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한 전략, 전술, 거북선의 활용 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순신의 군사전략가로서의 가치 등이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제목을 꼭 명량해전이라고 해야 하나? 임진왜란과 이순신하면 어떨까? 내용도 명량해전에 국한된 것도 아니므로.&lt;br /&gt;
&lt;br /&gt;
- 도입 : 세계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대첩, 넬슨제독과 비견되는 이순신...&lt;br /&gt;
&lt;br /&gt;
- 임진왜란 이후 한국 및 중국, 일본 정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서술하면 임진왜란의 중요성이 정리될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B%9F%89%ED%95%B4%EC%A0%84%EA%B3%BC_%EC%9D%B4%EC%88%9C%EC%8B%A0&amp;diff=398</id>
		<title>Draft 명량해전과 이순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B%9F%89%ED%95%B4%EC%A0%84%EA%B3%BC_%EC%9D%B4%EC%88%9C%EC%8B%A0&amp;diff=398"/>
				<updated>2017-07-30T09:39: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유성룡]], [[원균|원균(元均)]], [[정탁|정탁(鄭琢)]], [[권율|권율(權慄)]], [[발라드 제독|발라드(G. A. Ballard) 제독]], [[넬슨 제독]]&lt;br /&gt;
|장소/공간= [[아산]], [[서울 건천동]], [[좌수영]], [[부산 동래]], [[옥포]], [[당포]], [[당항포]], [[안골포]], [[한산도]], [[거제 칠천량]], [[노량]], [[명량]]&lt;br /&gt;
|사건=[[임진왜란]], [[옥포대첩]], [[노량해전]], [[한산도 대첩]], [[칠천량 해전]], [[명량해전]] &lt;br /&gt;
|기록물= &lt;br /&gt;
|개념용어= [[징비록]], 식년 무과 병과, [[권지훈련원 봉사]], [[명나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거북선]], [[판옥선]], [[학익진]], [[삼도수군통제사]], [[경상우수사]], [[백의종군]], [[우의정]], [[도원수]], [[난중일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교열자=&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 당하다시피 했던 임진왜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명장이 바로 이순신이다.  &lt;br /&gt;
&lt;br /&gt;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가 태어난 서울 건천동 집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amp;lt;징비록(懲毖錄)&amp;gt;에 적었다.    &lt;br /&gt;
 32세 되던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뒤늦게 관직에 나갔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쟁을 위한 배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lt;br /&gt;
 당시 조선의 전선(戰船)은 대부분, 배 위 갑판을 덮고 그 위에 누각 등을 세운 판옥선이었다.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도록 만든 배였다.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다시 철갑 덮개를 씌워 거북이 모양처럼 만든 배로, 등에는 칼과 송곳 등을 꽂아 적이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또 용의 머리처럼 만든 앞부분에는 총 구멍을 내서 마치 용의 입에서 불을 뿜는 듯한 모습을 나타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들은 적의 배들 사이를 다니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에게는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가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여러 장수가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손에 넣었다.&lt;br /&gt;
&lt;br /&gt;
 이에 이순신은 즉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옥포(玉浦) 앞바다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선 26척을 부수고 많은 왜병을 물리쳤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이다.&lt;br /&gt;
&lt;br /&gt;
 그 후 노량(露梁) 앞바다에서도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 처음으로 출동한 거북선은 그 위력을 확고하게 인정받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唐浦), 당항포, 안골포(安骨浦),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몇 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도 대첩이다. 한산도 대첩은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 ·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다. 이 대첩은 육지에서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조선군에 용기를 되찾게 해주었다.&lt;br /&gt;
&lt;br /&gt;
 1593년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뒷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등에 힘썼다.&lt;br /&gt;
&lt;br /&gt;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이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왜군의 모략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서 사병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가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에 선조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lt;br /&gt;
&lt;br /&gt;
 그 때 조선 수군에 남은 군사는 120여 명, 병선은 고작 열두 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했다. 그는 이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으로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의욕을 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선두(船頭)에 서 있던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는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왜군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amp;lt;난중일기(亂中日記)&amp;gt;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lt;br /&gt;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lt;br /&gt;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lt;br /&gt;
*『징비록(懲毖錄)』 &lt;br /&gt;
* 천관우, 「성웅이충무공론」, 『한국사의 재발견』, 일조각, 1974&lt;br /&gt;
* 최영희, 「이순신」,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73&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글에서 “해전사연구가~평가하였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후대에 이순신이 왜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보충되어야 한다. 이순신의 리더십, 지형, 조류 등의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한 전략, 전술, 거북선의 활용 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순신의 군사전략가로서의 가치 등이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제목을 꼭 명량해전이라고 해야 하나? 임진왜란과 이순신하면 어떨까? 내용도 명량해전에 국한된 것도 아니므로.&lt;br /&gt;
&lt;br /&gt;
- 도입 : 세계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대첩, 넬슨제독과 비견되는 이순신...&lt;br /&gt;
&lt;br /&gt;
- 임진왜란 이후 한국 및 중국, 일본 정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서술하면 임진왜란의 중요성이 정리될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8C%94%EB%A7%8C%EB%8C%80%EC%9E%A5%EA%B2%BD%ED%8C%90%EC%9D%98_%EC%A1%B0%EC%84%B1&amp;diff=397</id>
		<title>Draft 팔만대장경판의 조성</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8C%94%EB%A7%8C%EB%8C%80%EC%9E%A5%EA%B2%BD%ED%8C%90%EC%9D%98_%EC%A1%B0%EC%84%B1&amp;diff=397"/>
				<updated>2017-07-30T09:37: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고려 팔만대장경판의 조성&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합천 해인사]],장경판전, [[강화도]], [[남해도]]&lt;br /&gt;
|사건= 몽골의 침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대장경]], [[대장경판]], [[초조대장경]], [[장경판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대한민국 합천 해인사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8만여 개 대장경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한국의 국보 32호이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매수가 8만여 개 이기 때문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lt;br /&gt;
&lt;br /&gt;
대장경은 부처님의 설법(經)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律), 그리고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한 논술(論)을 모은 것이며, 한자로 씌어졌다. 대장경판은 대장경을 인쇄하기 위해 목판에 양각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lt;br /&gt;
&lt;br /&gt;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팔만대장경이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하며,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장경판을 보관해온 건물 장경판전도 보존기술의 과학적 탁월성이 인정되어 이보다 앞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lt;br /&gt;
&lt;br /&gt;
고려는 불교국가였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인 대장경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고려에는 이미 대장경이 있었고, 처음 새겨진 것이라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불렀다. 1232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이 초조대장경이 모두 불타서 없어졌다. &lt;br /&gt;
&lt;br /&gt;
고려는 몽골이 침략한 나라들 중 가장 오래 저항을 한 나라이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8년간 9차례의 침략을 받았으나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을 하였다. 몽고와 전쟁을 하는 기간에 왕실과 귀족들은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데 마음을 모으고, 대장경을 새로 만들기로 하였다. 1236년 그 작업이 시작되어 1251년 16년 만에 끝났다.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강화의 분사(分司)대장도감이 이 일을 나누어 해냈다. &lt;br /&gt;
&lt;br /&gt;
새로 만든 대장경판은 인쇄된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하고 동아시아의 이웃나라에서 추가로 찾아낸 자료를 보충했다. 따라서 새 대장경을 통해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에 포함된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경판을 새기기 위해서는 먼저 산지에서 나무를 베어 진을 빼고 판각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는다. 이어 목판을 만들고, 거기에 새길 글자를 쓴 종이를 붙이는 판하본 작업을 하고 마지막으로 각수가 글자를 새겼다. &lt;br /&gt;
&lt;br /&gt;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혹은 78센티미터이며 폭은 약 24센티미터, 두께는 2.7~3.3센티미터이다. 각 판에는 23행 14자씩 새겨져 있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킬로그램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킬로그램 정도이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수는 81,352장이다. 목판의 재질은 주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되어있다. &lt;br /&gt;
대장경판의 판각이 끝나자 인쇄를 해서 보급했다. 1381년에 인출한 것이 신륵사에 봉안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는 1393, 1458년, 1500년에 인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는 1865년, 1899년에 각 2부와 4부를 인쇄했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일본은 대장경에 큰 관심을 보이고 83회나 인쇄본을 청해왔다. 그 때 인출된 대장경 63부가 일본으로 전해졌다. &lt;br /&gt;
&lt;br /&gt;
그 뒤 1935년 현 동국대학교 전신이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비치하고자 한부를 아울러 인출, 지금까지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는 1953년부터 시작하여 1976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였다. 모두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국의 유명도서관에 보냈다. &lt;br /&gt;
&lt;br /&gt;
팔만대장경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디지털화 사업과 동판으로 제작하는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해석한 논술(論述)을 모두 모은 것이다. &lt;br /&gt;
-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 경, 율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좋겠다.&lt;br /&gt;
- ‘한자로 씌어졌다’는 것은 팔만대장경에 대한 설명글에 넣었으면 한다.&lt;br /&gt;
- 몽골군이 → 몽고군이 / 산벚나나무→산벚나무&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96</id>
		<title>Draft 혜초의 천축기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96"/>
				<updated>2017-07-30T09:35: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8세기 혜초의 인도여행이야기 (천축기행)&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혜초]], [[현장]], [[금강지]], [[펠리오]]&lt;br /&gt;
|장소/공간= [[당]] ,[[인도]], [[중앙아시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혜초(704-787)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승려로 CE 723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육로와 해로로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남아있는 것은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간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lt;br /&gt;
&lt;br /&gt;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lt;br /&gt;
&lt;br /&gt;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8대 성지를 모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혜초의 ‘천축기행’은 한국의 고대문명교류사를 보여주는 저술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혜초의 ‘천축기행’은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천축기행’의 문화사적 가치 에 대해서 좀 더 기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사적 가치 이외에도 ‘천축기행’은 8세기 한국의 고대 문명교류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점, 한반도의 경주에서 출발해 육로와 해로를 거쳐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여행하면서 당시 한국인이 본 세계상을 소개한 점 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해로)경주-&amp;gt;광저우-&amp;gt;인도/(육로)페르시아-&amp;gt;중앙아시아-&amp;gt;창안으로의 혜초가 지나온 길을 이미지 자료로 제시해 글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혜초는 통일신라 시기 승려로, 혜초가 당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서술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혜초가 당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분, 지위를 가졌는지 등 개인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amp;lt;왕오천축국전&amp;gt;이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내용이 혜초가 다녔던 지역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다녔던 곳을 기록한 지도를 자료로 함께 제시하였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amp;lt;br/&amp;gt;&lt;br /&gt;
- 내용이 혜초가 다녔던 지역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다녔던 곳을 기록한 지도를 자료로 함께 제시하였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lt;br /&gt;
-&amp;gt; 영상자료 준비팀이 담당할 일.  맨 앞 메타데이터 박스에 넣으면 되겠슴&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2%A0%ED%8A%B8%EB%82%A8%EC%A0%84(1955-1975)%EA%B3%BC_%ED%8C%8C%EB%B3%91&amp;diff=362</id>
		<title>Draft 베트남전(1955-1975)과 파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2%A0%ED%8A%B8%EB%82%A8%EC%A0%84(1955-1975)%EA%B3%BC_%ED%8C%8C%EB%B3%91&amp;diff=362"/>
				<updated>2017-07-29T05:46: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베트남전(1955-1975)과 파병&lt;br /&gt;
|집필자= 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4차례 국회동의를 거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타일랜드도 연합군의 일부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지만, 참전 연인원 32만 명인 한국군의 파병 규모는 미군 다음으로 컸다. &lt;br /&gt;
&lt;br /&gt;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은 처지가 같은 월남에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더불어 냉전으로 남북이 분단된 나라였다. 남북간의 전쟁은 한국이 먼저 겪었지만, 미군을 주축으로 한 16개국 자유우방의 개입으로 침략을 물리쳤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반공우방인 월남을 군사적으로 돕는 것은 아시아공산주의 세력이 확산을 막고 한국전에 참전하여 한국을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구해 준 자유우방에 보답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전선은 한국전선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월남 지원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화하고, 한반도 전쟁억지력의 중추인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으로 방안이라고 믿고 미국의 제의가 있기 전부터 월남파병을 미국에 제안했었다. &lt;br /&gt;
&lt;br /&gt;
미국과 월남 정부가 마침내 공식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해오자 한국정부는 국회동의를 얻어 이동외과병원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을 보냈다. 뒤이어 2차파병 요청이 있었고, 한국은 국회동의를 얻어 후방지원과 건설지원임무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했다&lt;br /&gt;
&lt;br /&gt;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부터 베트남 전황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다시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해왔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의 일부를 베트남전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주한 미군 2개 사단도 언제 월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lt;br /&gt;
&lt;br /&gt;
전투부대의 파병이 거론되자 한국 내 야당과 지식인들이 강력한 반대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판단아래 8월 13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lt;br /&gt;
&lt;br /&gt;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전투병력 부족으로 애로를 겪고 있던 미국정부는 월남의 작전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군 전투 병력의 증파를 다시 요청하였다. 한국정부에서도 “5만 명 선 까지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 제26연대와 제9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lt;br /&gt;
&lt;br /&gt;
1969년 1월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을 내 걸고 월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계획을 발표했다. 그 무렵 월남의 한국군의 병력은 47,860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은 1단계로 1972년까지 약 1만 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2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투병력(37,000여 명)은 1973년 초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 남아있었다. 월남의 한국군 병력규모는 1972년 후반기부터 미국의 지상군 규모를 능가하였다. &lt;br /&gt;
&lt;br /&gt;
9년 동안 월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연32만명이었다. 이중 5099명이 전사했고, 11,232명이 부상을 당했다. 참전 한국군 중 다수가 고엽제 피해로 우유증을 앓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국군의 남베트남 파병은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당시의 시각에서 볼 때 베트남전쟁은 한반도의 안보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파병은 당시의 한국정부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한 국가의 생존 및 발전 전략으로써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월남 패망과 함께 끊겼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1992년 국교를 재개했다. 1993년 포 반 키엣 수상이 방한하였으며,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8월에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했을 때 &amp;quot;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amp;quot;라고 공식 사과 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도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amp;quot;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amp;quot;고 하였다.&lt;br /&gt;
&lt;br /&gt;
수교 이후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관계는 크게 발전하였다. 2015년 기준 베트남은 한국의 4번째 주요 수출국이 되었으며, 베트남에 세워진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시설은 수만의 일자리를 만들고, 베트남의 국제수지를 흑자로 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두산백과&lt;br /&gt;
* 위키백과&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했던 사건으로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도 “한국군의~ 중요한 사건이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만큼 구체적으로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한국사회의 모습을 바꾸어놓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기술할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 위키)만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아시아공산주의 세력(의)이 확산을 막고 / 전략적(인)으로 방안이라고 믿고 &amp;lt;br/&amp;gt;&lt;br /&gt;
- 베트남전 파병을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 한국전에 참전한 자유우방에 대한 보답이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베트남전 파병의 이유는 한국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 및 시장 개척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확인하고 베트남전 파병을 정치 군사 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과도 연결시켜 서술했으면 합니다&lt;br /&gt;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D%95%B4%EB%B0%A9&amp;diff=361</id>
		<title>Draft 독립운동과 해방</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D%95%B4%EB%B0%A9&amp;diff=361"/>
				<updated>2017-07-29T05:44: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독립 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한민족,[[조선총독부]], [[임시 정부]], [[김구]], [[이봉창]], [[윤봉길]], 광복군, [[이승만]], 주미 외교위원회, [[루스벨트]], [[트루먼]]&lt;br /&gt;
|장소/공간= [[훙커우 공원]], [[상하이]], [[소련]], [[카이로]], [[얄타]], [[포츠담]], [[히로시마]], [[나가사키]]&lt;br /&gt;
|사건= [[이봉창의 의거]], 일본군 전승 기념식, [[윤봉길의 의거]],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히로시마 원폭 투하&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한일병합조약]], 한국의 신탁 통치 안&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lt;br /&gt;
&lt;br /&gt;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를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 &lt;br /&gt;
&lt;br /&gt;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좌우의 인사들이 손을 잡고 해방을 위해 힘을 모았다. 또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해방을 전후한 때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무릅쓰고 한국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lt;br /&gt;
&lt;br /&gt;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미국에 경고했다.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국 등 강대국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일어날 여러 가지 문제는 논의하기 위해 자주 회의를 했다. 그때마다 한국의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신탁 통치 안을 내놓았다. 함께 회의를 하던 영국, 중국의 정상들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한국의 신탁 통치 안은 1945년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이 참석한 얄타회담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lt;br /&gt;
&lt;br /&gt;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이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을 들은 독립 운동가들은 이를 반대했다. 임시 정부 지도자들은 크게 화를 내며 미국과 중국 정부에 카이로 선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임시 정부의 요구를 묵살했다. 임시 정부는 일본이 망하더라도 신탁 통치에 대해서 반대할 뜻을 밝혔다.  &lt;br /&gt;
&lt;br /&gt;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소련 없이 미국 혼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로 하였다.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한민족은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자료대한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0&lt;br /&gt;
* 송남헌, 『해방삼십년사』Ⅰ, 한국사료연구소, 1976&lt;br /&gt;
*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lt;br /&gt;
* 『한국현대사』, 국사편찬위원회편, 1982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대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적고 있는데, 국내 계몽단체의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도 보완되었으면 한다.&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독립운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으면... 그것만으로도 분량 충분&amp;lt;br/&amp;gt;&lt;br /&gt;
- 독립운동의 변천 과정을 국내외 정세와 연결하여 정리&amp;lt;br/&amp;gt;&lt;br /&gt;
- 시기별, 지역별 주요 인물과 사건 몇몇을 선정하여 설명하였으면 : 유관순, 김마리아, 안중군, 청산대첩, 봉오동전투, 임시정부, 중국과 러시아 지역 등의 독립군 등&amp;lt;br/&amp;gt;&lt;br /&gt;
- 해방은 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국내외에서의 노력의 결과였음도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C%84%B1%ED%99%A9%ED%9B%84_%EC%8B%9C%ED%95%B4&amp;diff=360</id>
		<title>Draft 명성황후 시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C%84%B1%ED%99%A9%ED%9B%84_%EC%8B%9C%ED%95%B4&amp;diff=360"/>
				<updated>2017-07-29T05:43: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일본, 조선의 황후를 살해하다&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고종]], [[조선]], [[대한제국]], [[명성황후]], [[청나라]], [[개화당]], [[친러파]], [[흥선대원군]]&lt;br /&gt;
|장소/공간= [[요동반도]], [[경복궁]], [[건천궁 장안당]], [[녹산]], [[러시아 공사관]]&lt;br /&gt;
|사건= 개항, [[을미사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삼국 간섭]]&lt;br /&gt;
|기록물= 대한민국역사박물관(http://muchkorea.tistory.com/412)&lt;br /&gt;
|개념용어= [[톈진조약]], 친러 내각, ‘여우 사냥’&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세워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개항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그 중 조선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을미사변(1895)이라 불리는 이 사건 뒤에는 복잡다단한 배경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여러 가지로 혼란해지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점점 강해졌다. 청나라 세력이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개화당이 쿠데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lt;br /&gt;
&lt;br /&gt;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1894)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두 나라 군대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라는 전리품을 챙기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이에 간섭을 하였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여긴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방법과 러시아의 협조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을 실천에 옮겼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끝내 죽였다고, 천륜을 거역한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폭도는 잔인무도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의 칼등에 맞아 실신하기까지 했다.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폭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칼로 찔러 죽이고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건청궁 옆 녹산으로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신문 특파원 등 지식인들이었다. 또 일본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lt;br /&gt;
&lt;br /&gt;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슬픔과 암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왕비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황후의 예우로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 대신 단지 손가락 뼈 조각과 입었던 옷가지를 넣어 왕비릉을 조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고종실록(高宗實錄)』&lt;br /&gt;
*『매천야록(梅泉野錄)』&lt;br /&gt;
* 진단학회, 『한국사: 현대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3&lt;br /&gt;
* 角田房子 저, 김은숙 역, 『민비암살』, 조선일보사&lt;br /&gt;
* 이민원, 「아관파천 전후의 한로관계」 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을미사변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이 글의 대상이 외국인 집필자나 한국학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글의 내용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여러 근거와 시각적 자료를 제시해 객관적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 또한 명성황후가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는 만큼 창작 뮤지컬 &amp;lt;명성황후&amp;gt; 또는 이문열의 &amp;lt;여우사냥&amp;gt; 등을 추가 자료로 제시하여 이야기적 요소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도 필요하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명성황후 자체에 대한 소개 및 명성황후의 서양 세력, 서구 문물, 제도 등에 대한 생각 서술&amp;lt;br/&amp;gt;&lt;br /&gt;
- 1894년 조선을 둘러싼 내외 정세와 일본의 위기감 설명&amp;lt;br/&amp;gt;&lt;br /&gt;
- 일본의 비인도적, 야만적 행동에 대한 입장과 이에 대한 비판&amp;lt;br/&amp;gt;&lt;br /&gt;
- 현재 한국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 문화콘텐츠로서의 소재가 된 것을 소개&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D%98_%EA%B0%9C%ED%95%AD&amp;diff=359</id>
		<title>Draft 조선의 개항</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D%98_%EA%B0%9C%ED%95%AD&amp;diff=359"/>
				<updated>2017-07-29T05:42: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강화도조약으로 이뤄진 조선의 개항&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흥선대원군]], [[박지원]], [[정조]], [[박제가]], [[정약용]], [[고종]], [[신헌]], [[구로다 기요타카]]&lt;br /&gt;
|장소/공간= [[부산항]],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진, [[강화 연무당]], [[원산]], [[인천]]&lt;br /&gt;
|사건= 강화도조약의 체결, [[메이지유신]], [[운요호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위정척사]], [[성리학]], [[북학]], [[서학]], [[역산|역산(曆算)]], [[농상|농상(農桑)]], [[조함|조함(造艦)]], [[조일수호조규]], [[치외법권]]&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개항’은 특정한 항구를 열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를 역사적 의미로 보면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상황을 말한다. 1876년 이전까지 조선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양 사람들을 오랑캐라 업신여기고 배척하였다. 이런 주장을 주도한 사람들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위정척사 세력이었다. 원래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위정척사 세력은 성리학에 근거한 질서를 바른 것으로, 서양의 사상을 옳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lt;br /&gt;
&lt;br /&gt;
그런 조선이 처음 개항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일본의 무력 침략에 의한 강화도조약의 체결이다. 강화도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며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조선의 개항이 일본의 무력적 협박에 의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조선의 사회 내에서는 대외 개방의 열망이 싹트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개항에 앞선 개방의 열망은 조선의 북학론자(北學論者)와 서학도(西學徒) 사이에서 싹트고 있었다. 북학은 중국에서 들어온 선진 학문을 말하고 서학은 천주교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양의 학문을 말한다. 대표적인 북학론자인 박지원은 이미 정조 때 북학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박제가는 역산(曆算) · 농상(農桑) · 의약 · 건축 · 조함(造艦)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서양인을 초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도 기술 문화와 서구 세계와의 연계를 적극 주장하였다. 한편 박해와 탄압을 받은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구의 입김이 조선에 작용하기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대외 개방 주장이 조선 정부에 작용된 것은 고종 재위 초에 이르러서였다. &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일본은, 1865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조선과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섭해 왔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거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국내에서 자라온 개화 세력은 대외 개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일본은 군함 세 척을 부산항에 보내 함포 사격 연습을 한다는 구실로 조선에 위협을 가했다. 또 서울과 가까운 강화도에 운요호[雲揚號]를 출동시켜 조선의 수비병들이 포격을 하게끔 유도하였다. 운요호는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진에 함포를 쏘며 상륙했고 그를 막으려던 조선 수비병은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방화 · 살육 · 약탈을 자행하고 물러갔는데 이것이 운요호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자신들이 먼저 도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 조선이 사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사죄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조선 영해의 자유 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내세웠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기회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교섭을 요구해왔다. 결국 1876년 2월 3일(음력)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特命全權辦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사이에 12조로 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lt;br /&gt;
&lt;br /&gt;
강화도조약의 주요 내용은, 제1조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 한다, 제7조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제11조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등이다. &lt;br /&gt;
&lt;br /&gt;
제1조는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의도로 보이고 제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하여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 · 군사적으로 침략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또 제7조는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침략을 쉽게 한 조항이었고 제10조는 치외법권을 인정한 조항이었다. 이렇게 강화도조약은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개항에는 개화론자들의 인식도 작용했지만 일본의 침략적 군사 외교라는 외부적 상황이 더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또 그로 인해 불평등한 조약이 이뤄졌기 때문에 조선의 개항은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고 한국 근대사에 치명적인 독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의 개국과 국제관계』(동덕모, 서울대학교출판부, 1980)&lt;br /&gt;
* 이종택, 「근세조선개국외교사-쇄국정책과 개국의 경위-」,『법정논총』 1, 중앙대학교, 1955&lt;br /&gt;
* 김영호,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문제」 『한국사연구』 8, 1972&lt;br /&gt;
* 이현종, 「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개항장」, 『한국개항장연구』, 일조각, 1975&lt;br /&gt;
* 김경태,「개항초기의 정치사상상황」, 『이대사원』 15, 1978&lt;br /&gt;
* 이원순, 「한국근대문화의 서구적기초」, 『한국사학』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개항이 가져 온 조선의 경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개항 당시 중국, 일본의 정세&amp;lt;br/&amp;gt;&lt;br /&gt;
- 당시 한국사회의 개항에 대한 찬반 이론&amp;lt;br/&amp;gt;&lt;br /&gt;
- 운요호 사건을 일본 정계와 연계하여 설명&amp;lt;br/&amp;gt;&lt;br /&gt;
- 메이지유신은 1865년이 아니고 1868년&amp;lt;br/&amp;gt;&lt;br /&gt;
-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성 서술&amp;lt;br/&amp;gt;&lt;br /&gt;
- 개항을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 ‘한국 근대사에 치명적인 독소 역할’이라는 부정적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정세에서 개항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과 제국주의 침탈에 대해 자주독립하고자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하였던 당시 위정자의 생각, 노력을 구체화한 시발점도 된다는 것을 서술하였으면.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B%9F%89%ED%95%B4%EC%A0%84%EA%B3%BC_%EC%9D%B4%EC%88%9C%EC%8B%A0&amp;diff=358</id>
		<title>Draft 명량해전과 이순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A%85%EB%9F%89%ED%95%B4%EC%A0%84%EA%B3%BC_%EC%9D%B4%EC%88%9C%EC%8B%A0&amp;diff=358"/>
				<updated>2017-07-29T05:40: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1대 10의 전쟁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유성룡]], [[원균|원균(元均)]], [[정탁|정탁(鄭琢)]], [[권율|권율(權慄)]], [[발라드 제독|발라드(G. A. Ballard) 제독]], [[넬슨 제독]]&lt;br /&gt;
|장소/공간= [[아산]], [[서울 건천동]], [[좌수영]], [[부산 동래]], [[옥포]], [[당포]], [[당항포]], [[안골포]], [[한산도]], [[거제 칠천량]], [[노량]], [[명량]]&lt;br /&gt;
|사건=[[임진왜란]], [[옥포대첩]], [[노량해전]], [[한산도 대첩]], [[칠천량 해전]], [[명량해전]] &lt;br /&gt;
|기록물= &lt;br /&gt;
|개념용어= [[징비록]], 식년 무과 병과, [[권지훈련원 봉사]], [[명나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거북선]], [[판옥선]], [[학익진]], [[삼도수군통제사]], [[경상우수사]], [[백의종군]], [[우의정]], [[도원수]], [[난중일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 당하다시피 했던 임진왜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명장이 바로 이순신이다.&lt;br /&gt;
  &lt;br /&gt;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가 태어난 서울 건천동 집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amp;lt;징비록(懲毖錄)&amp;gt;에 적었다.    &lt;br /&gt;
&lt;br /&gt;
32세 되던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뒤늦게 관직에 나갔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쟁을 위한 배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 다음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가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여러 장수가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손에 넣었다.&lt;br /&gt;
&lt;br /&gt;
이에 이순신은 즉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옥포(玉浦) 앞바다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선 26척을 부수고 많은 왜병을 물리쳤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이다.&lt;br /&gt;
&lt;br /&gt;
그 후 노량(露梁) 앞바다에서도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 처음으로 출동한 거북선은 그 위력을 확고하게 인정받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唐浦), 당항포, 안골포(安骨浦),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몇 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도 대첩이다. 1593년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이듬해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뒷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등에 힘썼다.&lt;br /&gt;
&lt;br /&gt;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이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왜군의 모략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서 사병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가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에 선조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lt;br /&gt;
&lt;br /&gt;
그 때 조선 수군에 남은 군사는 120여 명, 병선은 고작 열두 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했다. 그는 이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으로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의욕을 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선두(船頭)에 서 있던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는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왜군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이 영국의 넬슨 제독과 어깨를 겨룰만한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amp;lt;난중일기(亂中日記)&amp;gt;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lt;br /&gt;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lt;br /&gt;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lt;br /&gt;
*『징비록(懲毖錄)』 &lt;br /&gt;
* 천관우, 「성웅이충무공론」, 『한국사의 재발견』, 일조각, 1974&lt;br /&gt;
* 최영희, 「이순신」,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73&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글에서 “해전사연구가~평가하였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후대에 이순신이 왜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보충되어야 한다. 이순신의 리더십, 지형, 조류 등의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한 전략, 전술, 거북선의 활용 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순신의 군사전략가로서의 가치 등이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 제목을 꼭 명량해전이라고 해야 하나? 임진왜란과 이순신하면 어떨까? 내용도 명량해전에 국한된 것도 아니므로.&lt;br /&gt;
&lt;br /&gt;
- 도입 : 세계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대첩, 넬슨제독과 비견되는 이순신...&lt;br /&gt;
&lt;br /&gt;
- 임진왜란 이후 한국 및 중국, 일본 정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서술하면 임진왜란의 중요성이 정리될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57</id>
		<title>Draft 혜초의 천축기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57"/>
				<updated>2017-07-29T05:39: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출처 및 관련자료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혜초의 천축기행&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혜초]], [[현장]], [[금강지]], [[펠리오]]&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혜초(704-787)는 신라의 불교승려로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삼장602-664)보다 약 한 세기 뒤 사람이다. &lt;br /&gt;
&lt;br /&gt;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lt;br /&gt;
&lt;br /&gt;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lt;br /&gt;
&lt;br /&gt;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lt;br /&gt;
&lt;br /&gt;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혜초의 ‘천축기행’은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천축기행’의 문화사적 가치 에 대해서 좀 더 기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사적 가치 이외에도 ‘천축기행’은 8세기 한국의 고대 문명교류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점, 한반도의 경주에서 출발해 육로와 해로를 거쳐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여행하면서 당시 한국인이 본 세계상을 소개한 점 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해로)경주-&amp;gt;광저우-&amp;gt;인도/(육로)페르시아-&amp;gt;중앙아시아-&amp;gt;창안으로의 혜초가 지나온 길을 이미지 자료로 제시해 글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혜초는 통일신라 시기 승려로, 혜초가 당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서술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혜초가 당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분, 지위를 가졌는지 등 개인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amp;lt;왕오천축국전&amp;gt;이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내용이 혜초가 다녔던 지역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다녔던 곳을 기록한 지도를 자료로 함께 제시하였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56</id>
		<title>Draft 혜초의 천축기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56"/>
				<updated>2017-07-29T05:38: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혜초의 천축기행&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혜초]], [[현장]], [[금강지]], [[펠리오]]&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혜초(704-787)는 신라의 불교승려로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삼장602-664)보다 약 한 세기 뒤 사람이다. &lt;br /&gt;
&lt;br /&gt;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lt;br /&gt;
&lt;br /&gt;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lt;br /&gt;
&lt;br /&gt;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lt;br /&gt;
&lt;br /&gt;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혜초의 ‘천축기행’은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천축기행’의 문화사적 가치 에 대해서 좀 더 기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사적 가치 이외에도 ‘천축기행’은 8세기 한국의 고대 문명교류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점, 한반도의 경주에서 출발해 육로와 해로를 거쳐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여행하면서 당시 한국인이 본 세계상을 소개한 점 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해로)경주-&amp;gt;광저우-&amp;gt;인도/(육로)페르시아-&amp;gt;중앙아시아-&amp;gt;창안으로의 혜초가 지나온 길을 이미지 자료로 제시해 글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혜초는 통일신라 시기 승려로, 혜초가 당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서술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혜초가 당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분, 지위를 가졌는지 등 개인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amp;lt;왕오천축국전&amp;gt;이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내용이 혜초가 다녔던 지역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다녔던 곳을 기록한 지도를 자료로 함께 제시하였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55</id>
		<title>Draft 혜초의 천축기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9C%EC%B4%88%EC%9D%98_%EC%B2%9C%EC%B6%95%EA%B8%B0%ED%96%89&amp;diff=355"/>
				<updated>2017-07-29T05:38: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혜초의 천축기행&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혜초]], [[현장]], [[금강지]], [[펠리오]]&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혜초(704-787)는 신라의 불교승려로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삼장602-664)보다 약 한 세기 뒤 사람이다. &lt;br /&gt;
&lt;br /&gt;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lt;br /&gt;
&lt;br /&gt;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lt;br /&gt;
&lt;br /&gt;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lt;br /&gt;
&lt;br /&gt;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lt;br /&gt;
&lt;br /&gt;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혜초의 ‘천축기행’은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천축기행’의 문화사적 가치 에 대해서 좀 더 기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사적 가치 이외에도 ‘천축기행’은 8세기 한국의 고대 문명교류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점, 한반도의 경주에서 출발해 육로와 해로를 거쳐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여행하면서 당시 한국인이 본 세계상을 소개한 점 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해로)경주-&amp;gt;광저우-&amp;gt;인도/(육로)페르시아-&amp;gt;중앙아시아-&amp;gt;창안으로의 혜초가 지나온 길을 이미지 자료로 제시해 글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amp;lt;br/&amp;gt;&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lt;br /&gt;
|의견2=&lt;br /&gt;
-혜초는 통일신라 시기 승려로, 혜초가 당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서술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혜초가 당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분, 지위를 가졌는지 등 개인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amp;lt;왕오천축국전&amp;gt;이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내용이 혜초가 다녔던 지역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다녔던 곳을 기록한 지도를 자료로 함께 제시하였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354</id>
		<title>Draft 스마트폰과 인터넷</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354"/>
				<updated>2017-07-29T05:32: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미래창조과학부&lt;br /&gt;
|장소/공간=가정&lt;br /&gt;
|사건= 은행 감소, 전화로 가정생활&lt;br /&gt;
|기록물= 한국통계연감, 전전자 교환기(Electronic Switching System)의 탄생&lt;br /&gt;
|개념용어= 스몸비, 홈오토매틱, 온라인 결제, 스마트폰 중독&lt;br /&gt;
|물품/도구/유물= 스마트폰, 유선전화,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인이 가진 휴대전화기가 6천만대를 넘어서 한국의 총인구수를 훌쩍 넘어섰다. 휴대전화기수는 2010년 5천만대를 넘어선 이후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특히 스마트 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금융권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은 지점수를 80% 줄이고 인력을 전화 상담과 온라인 업무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30대 이하 젊은 층은 은행에 가는 것보다 스마트폰과 온라인으로 금융결제를 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더욱 급속하게 확장돼 20년 이내에 모든 결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lt;br /&gt;
&lt;br /&gt;
국가의 행정전산망을 이용한 국민생활 변화도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하다. 각종 정부 서류를 집에서 발급받고, 각종 통계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은 시장에 가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생필품을 주문하고 집에서 받는다. 홈오토메틱이 가능해진 것도 큰 변화다. 집안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조정하고 통제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여가와 오락을 즐길 수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의 보급 증가에 따른 부작용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몸비(Smombie)&amp;lt;ref&amp;gt;스마트 폰(smart phon)과 좀비(zombie)의 합성어이다. 스마트 폰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한다. 스마트 폰에 집중해 주변 환경을 빨리 인지하기 어려워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거나 자동차 등의 교통수단으로 인한 사고 위험이 높다. &amp;lt;/ref&amp;gt;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10대와 20대는 45%, 30대와 40대는 41%가 스마트폰을 보며 걸었다. 이를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한국인의 1/4이 스몸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보험회사 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총인구의 1/3 이상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스몸비와 몸을 부딪쳤다는 통계도 있다.&lt;br /&gt;
&lt;br /&gt;
‘어깨빵’이라는 말도 새로 생겼다. 스마트 폰을 보며 걷느라 다른 이가 오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치는 경우를 말한다. 외국인들은 이 말을 ‘코리안 범프’라고 설명한다. 한국인(korean)과 범프(bump)를 합친 말이다. 또 폰딧불(스마트폰+반딧불이)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한다. 공연장 등 어두운 곳에서 스마트폰 불빛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lt;br /&gt;
&lt;br /&gt;
나이든 사람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자리에 한 번 앉으면 양보할 줄을 모른다”고 비난한다. 한국에서는 노인이나 임산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차에 타면 짐을 들어주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졌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이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과거의 좋은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들고 남의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문간에 서 있는 젊은 스몸비 때문에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차량 안쪽이 텅텅 비어 있어도 문간에 기대서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중독도 심각하다. 스마트폰 중독은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병적으로 길어 정신·육체·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받을 만큼 심각한 것을 말한다.&lt;br /&gt;
&lt;br /&gt;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스마트폰을 점점 더 많은 시간 이용해야만 만족하고, 중단하면 불안감을 느껴 공격적이 되는 등 가정  생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8세 이상 한국인의 5%가 스마트폰 중독에 가까울 만큼 스마트폰 사용이 많다. 특히 18세에서 29세 사이에서는 18.2%가 이에 해당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선전화 보유수는 상대적으로 매년 감소, 2010년 2천만대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제 1,634만대로 줄었다. 1986년 한국형 전전자교환기가 생산되어 유선전화 적체가 해소된 지 30년 만에 일어난 변화이다.&lt;br /&gt;
&lt;br /&gt;
한 때 기업이 재무제표를 공개하면 유선 전화기가 당당하게 독립계정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고, 전화기를 보유한 가정은 부잣집으로 상징되었다. 이제 각 가정의 유선전화는 통화용으로보다는 인터넷 등 부가서비스를 위한 선로로 이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1960년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다.&lt;br /&gt;
&lt;br /&gt;
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최고다. 경제개발협력기구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유·무선을 포함해 98%에 이른다. 하지만 데스크 탑, 노트북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가구 비율은 80%에 달한다. 컴퓨터 보급률은 스마트기기 보급률 증가와 반비례하여 점차 감소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lt;br /&gt;
&lt;br /&gt;
가구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비된 가구비율은 85%이다. 이 분야 세계 최고가 된 것은 반도체 산업 발전이 컴퓨터 산업을 뒷받침 했고, 도시 밀집도가 높아 인터넷 선로 구축비용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오랫동안 지속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보건복지부 통계&lt;br /&gt;
*통계청 통계연감&lt;br /&gt;
*조선일보&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주제는 세계에서 IT 강국으로의 면모와 정보기기로 인한 한국인의 생활의 변화이다. 세계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모습을 서술해야하는데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만을 한 페이지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과 관련한 내용을 줄이고, 가상현실 도입, 사물 인터넷(IOT), 로봇, 웨어러블 기기 등 한국인의 생활변화에 중점을 두고 서술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제시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인터넷 기능을 핸드폰에 넣어 스마트폰이 된 것이니까.&lt;br /&gt;
-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배경과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인터넷 기능이 핸드폰에 포함되어 특정 장소가 아닌 어느 장소에서나 인터넷으로 업무, 정보수집, 가정의 전자제품 작동 등이 가능해진 내용 등을 서술하여 과거의 생활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본 원고의 글이 몇 년 후에도 읽힐 것을 대비하여, 특정 내용에 대해서는 년도를 밝혀주었으면 한다. 휴대전화기 6천만대를 넘어선 시점, 외국계 은행의 발표 시기, 금융경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시점 등등&amp;lt;br/&amp;gt;&lt;br /&gt;
- 글의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으로 인한 폐해를 다루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의 폐해도 다루어야 하지만 인터넷 강국인 한국이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긍정적으로 변화한 장점도 서술해주었으면 한다. 스몸비, 어깨빵, 폰딧불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면 좋겠다. 본 주제에서 구지 3문단씩 할애할 필요가 없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353</id>
		<title>Draft 스마트폰과 인터넷</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353"/>
				<updated>2017-07-29T05:29: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미래창조과학부&lt;br /&gt;
|장소/공간=가정&lt;br /&gt;
|사건= 은행 감소, 전화로 가정생활&lt;br /&gt;
|기록물= 한국통계연감, 전전자 교환기(Electronic Switching System)의 탄생&lt;br /&gt;
|개념용어= 스몸비, 홈오토매틱, 온라인 결제, 스마트폰 중독&lt;br /&gt;
|물품/도구/유물= 스마트폰, 유선전화,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인이 가진 휴대전화기가 6천만대를 넘어서 한국의 총인구수를 훌쩍 넘어섰다. 휴대전화기수는 2010년 5천만대를 넘어선 이후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특히 스마트 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금융권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은 지점수를 80% 줄이고 인력을 전화 상담과 온라인 업무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30대 이하 젊은 층은 은행에 가는 것보다 스마트폰과 온라인으로 금융결제를 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더욱 급속하게 확장돼 20년 이내에 모든 결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lt;br /&gt;
&lt;br /&gt;
국가의 행정전산망을 이용한 국민생활 변화도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하다. 각종 정부 서류를 집에서 발급받고, 각종 통계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은 시장에 가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생필품을 주문하고 집에서 받는다. 홈오토메틱이 가능해진 것도 큰 변화다. 집안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조정하고 통제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여가와 오락을 즐길 수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의 보급 증가에 따른 부작용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몸비(Smombie)&amp;lt;ref&amp;gt;스마트 폰(smart phon)과 좀비(zombie)의 합성어이다. 스마트 폰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한다. 스마트 폰에 집중해 주변 환경을 빨리 인지하기 어려워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거나 자동차 등의 교통수단으로 인한 사고 위험이 높다. &amp;lt;/ref&amp;gt;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10대와 20대는 45%, 30대와 40대는 41%가 스마트폰을 보며 걸었다. 이를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한국인의 1/4이 스몸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보험회사 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총인구의 1/3 이상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스몸비와 몸을 부딪쳤다는 통계도 있다.&lt;br /&gt;
&lt;br /&gt;
‘어깨빵’이라는 말도 새로 생겼다. 스마트 폰을 보며 걷느라 다른 이가 오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치는 경우를 말한다. 외국인들은 이 말을 ‘코리안 범프’라고 설명한다. 한국인(korean)과 범프(bump)를 합친 말이다. 또 폰딧불(스마트폰+반딧불이)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한다. 공연장 등 어두운 곳에서 스마트폰 불빛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lt;br /&gt;
&lt;br /&gt;
나이든 사람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자리에 한 번 앉으면 양보할 줄을 모른다”고 비난한다. 한국에서는 노인이나 임산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차에 타면 짐을 들어주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졌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이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과거의 좋은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들고 남의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문간에 서 있는 젊은 스몸비 때문에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차량 안쪽이 텅텅 비어 있어도 문간에 기대서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중독도 심각하다. 스마트폰 중독은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병적으로 길어 정신·육체·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받을 만큼 심각한 것을 말한다.&lt;br /&gt;
&lt;br /&gt;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스마트폰을 점점 더 많은 시간 이용해야만 만족하고, 중단하면 불안감을 느껴 공격적이 되는 등 가정  생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8세 이상 한국인의 5%가 스마트폰 중독에 가까울 만큼 스마트폰 사용이 많다. 특히 18세에서 29세 사이에서는 18.2%가 이에 해당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선전화 보유수는 상대적으로 매년 감소, 2010년 2천만대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제 1,634만대로 줄었다. 1986년 한국형 전전자교환기가 생산되어 유선전화 적체가 해소된 지 30년 만에 일어난 변화이다.&lt;br /&gt;
&lt;br /&gt;
한 때 기업이 재무제표를 공개하면 유선 전화기가 당당하게 독립계정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고, 전화기를 보유한 가정은 부잣집으로 상징되었다. 이제 각 가정의 유선전화는 통화용으로보다는 인터넷 등 부가서비스를 위한 선로로 이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1960년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다.&lt;br /&gt;
&lt;br /&gt;
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최고다. 경제개발협력기구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유·무선을 포함해 98%에 이른다. 하지만 데스크 탑, 노트북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가구 비율은 80%에 달한다. 컴퓨터 보급률은 스마트기기 보급률 증가와 반비례하여 점차 감소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lt;br /&gt;
&lt;br /&gt;
가구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비된 가구비율은 85%이다. 이 분야 세계 최고가 된 것은 반도체 산업 발전이 컴퓨터 산업을 뒷받침 했고, 도시 밀집도가 높아 인터넷 선로 구축비용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오랫동안 지속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보건복지부 통계&lt;br /&gt;
*통계청 통계연감&lt;br /&gt;
*조선일보&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주제는 세계에서 IT 강국으로의 면모와 정보기기로 인한 한국인의 생활의 변화이다. 세계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모습을 서술해야하는데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만을 한 페이지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과 관련한 내용을 줄이고, 가상현실 도입, 사물 인터넷(IOT), 로봇, 웨어러블 기기 등 한국인의 생활변화에 중점을 두고 서술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제시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인터넷 기능을 핸드폰에 넣어 스마트폰이 된 것이니까.&lt;br /&gt;
-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배경과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인터넷 기능이 핸드폰에 포함되어 특정 장소가 아닌 어느 장소에서나 인터넷으로 업무, 정보수집, 가정의 전자제품 작동 등이 가능해진 내용 등을 서술하여 과거의 생활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본 원고의 글이 몇 년 후에도 읽힐 것을 대비하여, 특정 내용에 대해서는 년도를 밝혀주었으면 한다. 휴대전화기 6천만대를 넘어선 시점, 외국계 은행의 발표 시기, 금융경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시점 등등&amp;lt;br/&amp;gt;&lt;br /&gt;
- 글의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으로 인한 폐해를 다루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의 폐해도 다루어야 하지만 인터넷 강국인 한국이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긍정적으로 변화한 장점도 서술해주었으면 한다. 스몸비, 어깨빵, 폰딧불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면 좋겠다. 본 주제에서 구지 3문단씩 할애할 필요가 없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352</id>
		<title>Draft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352"/>
				<updated>2017-07-29T05:23: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2개의 원고 중 황인희 집필 원고가 내용이 더 충실하다. 황인희 원고를 중심으로 황정욱 원고 중 일부를 포함하여 보완하면 좋을 듯하다.&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 원고 보완 및 수정할 내용&amp;lt;br/&amp;gt;&lt;br /&gt;
①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 궁궐에서 주요한 대부분의 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 왕릉에 참배 또는 능행으로 고칠 것, &amp;lt;br/&amp;gt;&lt;br /&gt;
②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 세조 임금은 제7왕 &amp;lt;br/&amp;gt;&lt;br /&gt;
③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인 경우가 많다.&amp;lt;br/&amp;gt;&lt;br /&gt;
④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덕수궁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공식명칭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에서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는 것 정도는 포함시키면 궁궐로서의 위상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amp;lt;br/&amp;gt;&lt;br /&gt;
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국권을 빼앗았다.&amp;lt;br/&amp;gt;&lt;br /&gt;
⑥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 소속된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⑦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 덕수궁의 명칭은 일제가 ‘경운궁’의 품위를 깍으려고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사실이면 이 부분은 없애도 될 것 같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⑧ 경희궁은 조선후기 이궐로 많은 왕들이 즉위를 하고 집무를 보았던 왕궁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궁궐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너무 내용이 약소합니다. 좀 더 보충했으면 합니다. &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 원고에서 내용을 요약, 축소했으면 하는 내용 :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고종은 (1896년)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amp;lt;br/&amp;gt;&lt;br /&gt;
①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6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의식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외전, 관료들이 일하는 궐내각사,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전, 세자와 세자빈이 사는 동궁, 왕실가족과 후궁, 상궁, 궁녀 등이 생활하는 공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이다. &amp;lt;br/&amp;gt;&lt;br /&gt;
②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amp;lt;br/&amp;gt;&lt;br /&gt;
③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국왕 집무실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광화문도 2차례의 중건을 통해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351</id>
		<title>Draft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351"/>
				<updated>2017-07-29T05:22: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2개의 원고 중 황인희 집필 원고가 내용이 더 충실하다. 황인희 원고를 중심으로 황정욱 원고 중 일부를 포함하여 보완하면 좋을 듯하다.&lt;br /&gt;
- 황인희 원고 보완 및 수정할 내용&lt;br /&gt;
①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 궁궐에서 주요한 대부분의 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 왕릉에 참배 또는 능행으로 고칠 것, &lt;br /&gt;
②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 세조 임금은 제7왕 &lt;br /&gt;
③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인 경우가 많다.&lt;br /&gt;
④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덕수궁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공식명칭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에서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는 것 정도는 포함시키면 궁궐로서의 위상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lt;br /&gt;
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국권을 빼앗았다.&lt;br /&gt;
⑥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 소속된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lt;br /&gt;
⑦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 덕수궁의 명칭은 일제가 ‘경운궁’의 품위를 깍으려고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사실이면 이 부분은 없애도 될 것 같습니다. &lt;br /&gt;
⑧ 경희궁은 조선후기 이궐로 많은 왕들이 즉위를 하고 집무를 보았던 왕궁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궁궐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너무 내용이 약소합니다. 좀 더 보충했으면 합니다. &lt;br /&gt;
- 황인희 원고에서 내용을 요약, 축소했으면 하는 내용 :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고종은 (1896년)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lt;br /&gt;
①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6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의식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외전, 관료들이 일하는 궐내각사,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전, 세자와 세자빈이 사는 동궁, 왕실가족과 후궁, 상궁, 궁녀 등이 생활하는 공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이다. &lt;br /&gt;
②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③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국왕 집무실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광화문도 2차례의 중건을 통해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6%EC%9B%94_%ED%95%AD%EC%9F%81%EA%B3%BC_%ED%95%9C%EA%B5%AD%EC%9D%98_%EB%AF%BC%EC%A3%BC%ED%99%94&amp;diff=294</id>
		<title>Draft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6%EC%9B%94_%ED%95%AD%EC%9F%81%EA%B3%BC_%ED%95%9C%EA%B5%AD%EC%9D%98_%EB%AF%BC%EC%A3%BC%ED%99%94&amp;diff=294"/>
				<updated>2017-07-27T17:09: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혜영: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국민의 권리 되찾은 민주주의 운동 6월 항쟁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공화당, 통일주체국민회의, 중앙...&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국민의 권리 되찾은 민주주의 운동 6월 항쟁&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공화당]], [[통일주체국민회의]], [[중앙정보부]], [[김재규]],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박종철]], [[이한열]], [[국민운동본부]], [[민정당]], [[노태우]]&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유신 헌법]], [[4․13 호헌 조치]], [[넥타이 부대]], [[6․29선언]], [[제6공화국]]&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72년 11월,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이 확정되었다. 이 헌법이 유신 헌법이다.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은, 어떤 국가 기구에도 통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중임을 제한하는 조항도 없어졌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전체의 1/3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웬만하면 대통령의 추천에 동의하여 국회의원을 임명하였으므로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직접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lt;br /&gt;
 &lt;br /&gt;
유신 헌법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한국의 최고 주권 기관이었다. 한국 국민은 이 회의를 구성하는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를 했다. 대통령 선거가,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뽑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로 바뀌었다.&lt;br /&gt;
&lt;br /&gt;
유신 체제는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안고 시작되었다. 우선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한국 국민은 여섯 번이나 스스로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그래서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국민의 불만은 1973년에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39%의 표를 얻었을 뿐이다. &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중순, 야당과 국민들의 분노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부산, 마산 등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는데 일반 시민들까지 가담하는 소요 사태로 커지게 되었다. 그곳 시위 현장을 둘러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민심이 이미 유신 체제에서 떠났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 7년이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유신 체제가 끝났는데도 유신 헌법에서의 대통령 선거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뽑는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7년 임기 내내 국민들은 헌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기 만료는 10개월 앞둔 1987년 4월, 그는 헌법을 바꾸지 않고 다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4 ․ 13 호헌 조치)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된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이 연합 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이 구성한 국민운동본부에 운동권 학생들도 참여했다. &lt;br /&gt;
&lt;br /&gt;
그 해 5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에서 고문당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부와 경찰은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 야당과 재야 운동권은 정부와 경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6월에는 대학가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이때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lt;br /&gt;
&lt;br /&gt;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직장인들까지 대거 참여했다. 박종철 ‧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 유린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1987년 6월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한 국민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lt;br /&gt;
&lt;br /&gt;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던 집권 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야당의 요구 사항을 대폭 수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6․29선언이라 한다. 이 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 임기를 단임 5년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크게 개선한 제9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lt;br /&gt;
&lt;br /&gt;
12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힘을 합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는 분열하여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1988년 2월 노태우는 직접 선거, 보통 선거라는 정당한 절차에 의해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이 출범하였다.&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출처====&lt;br /&gt;
* 김원, 『87년 6월항쟁』,  책세상, 2009&lt;br /&gt;
* 정진상, 「6월항쟁과 한국의 변혁운동」, 『역사비평』38, 1997&lt;br /&gt;
* 여현덕, 「신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정치갈등」, 『한국정치동태론』, 오름, 1996.&lt;br /&gt;
* 이경재, 「민중의 승리: 5·17에서 6·29까지」, 신동아, 1987년 8월&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 자체에 대한 내용은 매우 부족하다. 다른 나라 민주화 운동과 비교하거나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서술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한국 민주화 과정을 4·19학생 의거,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한국인들이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국민이 직접 나서서 변화를 이끈 내용을 각각 간단하게 설명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민주화 운동의 배경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도 될 듯&amp;lt;br/&amp;gt;&lt;br /&gt;
- 박종철, 이한열 등에 대한 구체적 설명보다는 ~~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가 희생되기도 하였다 정도로 서술해도 괜찮을 듯&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이혜영</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