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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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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395</id>
		<title>Draft 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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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53: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lt;br /&gt;
|사건= 순교&lt;br /&gt;
|기록물=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lt;br /&gt;
|개념용어=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lt;br /&gt;
|물품/도구/유물=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현재 한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을 달고 그 무렵 연등행진을 한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불교 신도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탑돌이와 같은 대규모 행사 중 하나이다.&lt;br /&gt;
&lt;br /&gt;
개인들이 불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며 불자의 실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도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사찰에서 외국어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의 예를 들면 “누구든 유서깊은 한국 문화를 배워 익히고 실참실수를 통해 한국의 정통선을 명철하게 체험하여 생사의 문제에 직면한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다”고 한다. &amp;lt;ref&amp;gt;&amp;quot;[http://www.hwagyesa.org/maha/kukjae/about_01.html 화계사 홈페이지 ]&amp;quot;&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살펴보자.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고, 정치적으로는 각국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늦었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인이 불법을 전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6부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겨우 불교를 공인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는 늦게 성행했으나,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lt;br /&gt;
이 무렵 해외에서의 불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혜초는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가 널리 알려진 「왕오천출국전」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문왕과 경덕왕의 왕자들은 불상 등을 일본에 전하거나 불사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원효 의상 자장 등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lt;br /&gt;
&lt;br /&gt;
신라인들은 교역과 유학 등의 명분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신라인들은 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을 세웠고, 거기에 신라 사찰인 신라원을 세웠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중국 산동성 적산에 중건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승려들에 의해 지어진 향가는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장르로 전해오고 있다. 또 고구려의 담징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남긴 것으로 『일본서기』가 전한다.&lt;br /&gt;
한국 불교는 고려에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정했고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또 후손에게 「훈요십조」를 내리면서 불교 신봉을 강조했고, 아들을 직접 출가시켰다. 이후 고려는 불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개념과 분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불교로 흥한 고려가 지나친 종교관련 행사와 인물들로 인해 망한 것은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lt;br /&gt;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서울을 현재 위치에 터 잡을 때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졌고, 임진왜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승병이 나서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궁궐 안에 절을 세우기도 했고, 법석을 벌였고,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lt;br /&gt;
&lt;br /&gt;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불교 사상도 존중했고, 훈민정음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lt;br /&gt;
지금도 불교 교리를 실천하는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불교신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돌아가신 조상을 극락에 가도록 비는 49재, 100일재 등 여러 종류의 천도재를 지낸다. 젊은이들이 중요한 시험이 100일이 남았다거나, 서로 사귄지 100일째가 되었을 때 파티를 하는 것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또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교리에 따라 짐승이나 가축 등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선을 하는 민간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또 불교 사찰이 보존해온 많은 문화재가 한국의 불교문화를 보전·전수하고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다보탑과 석가탑, 부석사 무량수전, 법주사 팔상전, 해인사 팔만대장경,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 등이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유산이다. 또 순천의 송광사에는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국사전 등 국보와 대반열반경소, 경질, 경패 등 총 12점의 보물 그리고 각종 지방 문화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울 봉원사 등에서 거행하는 영산재는 세계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한용운은 승려이었으며,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꽃피웠다.&lt;br /&gt;
한국 불교계는 활발하게 해외 선교를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스콘신 주 매디슨 등에 사찰을 설립했다. &lt;br /&gt;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에 신도는 7,619,332명이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 국세통계&lt;br /&gt;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lt;br /&gt;
* [http://www.llf.or.kr/bbs/content.php?co_id=history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영산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amp;lt;br/&amp;gt;&lt;br /&gt;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불교 유입 과정에 대한 내용 중 씨족이라는 말 대신 귀족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 주제에 유교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을 서술하였듯이 불교 역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도 서술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49제 등을 하는 것을 제시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도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자세함과 분량에 비해 고려에서 불교의 역할 및 행사, 조선에서 배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등 설명이 너무 간략하고 적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의 주요 사상가(스님)와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도 서술하면 어떨까요?&amp;lt;br/&amp;gt;&lt;br /&gt;
- 한국 불교만의 특징을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394</id>
		<title>Draft 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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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52: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lt;br /&gt;
|사건= 순교&lt;br /&gt;
|기록물=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lt;br /&gt;
|개념용어=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lt;br /&gt;
|물품/도구/유물=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현재 한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을 달고 그 무렵 연등행진을 한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불교 신도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탑돌이와 같은 대규모 행사 중 하나이다.&lt;br /&gt;
&lt;br /&gt;
개인들이 불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며 불자의 실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도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사찰에서 외국어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의 예를 들면 “누구든 유서깊은 한국 문화를 배워 익히고 실참실수를 통해 한국의 정통선을 명철하게 체험하여 생사의 문제에 직면한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다”고 한다. &amp;lt;ref&amp;gt;&amp;quot;[http://www.hwagyesa.org/maha/kukjae/about_01.html 화계사 홈페이지 ]&amp;quot;&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살펴보자.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고, 정치적으로는 각국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늦었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인이 불법을 전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6부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겨우 불교를 공인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는 늦게 성행했으나,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lt;br /&gt;
이 무렵 해외에서의 불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혜초는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가 널리 알려진 「왕오천출국전」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문왕과 경덕왕의 왕자들은 불상 등을 일본에 전하거나 불사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원효 의상 자장 등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lt;br /&gt;
&lt;br /&gt;
신라인들은 교역과 유학 등의 명분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신라인들은 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을 세웠고, 거기에 신라 사찰인 신라원을 세웠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중국 산동성 적산에 중건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승려들에 의해 지어진 향가는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장르로 전해오고 있다. 또 고구려의 담징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남긴 것으로 『일본서기』가 전한다.&lt;br /&gt;
한국 불교는 고려에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정했고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또 후손에게 「훈요십조」를 내리면서 불교 신봉을 강조했고, 아들을 직접 출가시켰다. 이후 고려는 불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개념과 분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불교로 흥한 고려가 지나친 종교관련 행사와 인물들로 인해 망한 것은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lt;br /&gt;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서울을 현재 위치에 터 잡을 때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졌고, 임진왜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승병이 나서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궁궐 안에 절을 세우기도 했고, 법석을 벌였고,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lt;br /&gt;
&lt;br /&gt;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불교 사상도 존중했고, 훈민정음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lt;br /&gt;
지금도 불교 교리를 실천하는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불교신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돌아가신 조상을 극락에 가도록 비는 49재, 100일재 등 여러 종류의 천도재를 지낸다. 젊은이들이 중요한 시험이 100일이 남았다거나, 서로 사귄지 100일째가 되었을 때 파티를 하는 것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또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교리에 따라 짐승이나 가축 등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선을 하는 민간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또 불교 사찰이 보존해온 많은 문화재가 한국의 불교문화를 보전·전수하고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다보탑과 석가탑, 부석사 무량수전, 법주사 팔상전, 해인사 팔만대장경,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 등이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유산이다. 또 순천의 송광사에는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국사전 등 국보와 대반열반경소, 경질, 경패 등 총 12점의 보물 그리고 각종 지방 문화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울 봉원사 등에서 거행하는 영산재는 세계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한용운은 승려이었으며,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꽃피웠다.&lt;br /&gt;
한국 불교계는 활발하게 해외 선교를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스콘신 주 매디슨 등에 사찰을 설립했다. &lt;br /&gt;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에 신도는 7,619,332명이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 국세통계&lt;br /&gt;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lt;br /&gt;
* [http://www.llf.or.kr/bbs/content.php?co_id=history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영산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amp;lt;br/&amp;gt;&lt;br /&gt;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불교 유입 과정에 대한 내용 중 씨족이라는 말 대신 귀족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 주제에 유교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을 서술하였듯이 불교 역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도 서술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49제 등을 하는 것을 제시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도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자세함과 분량에 비해 고려에서 불교의 역할 및 행사, 조선에서 배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등 설명이 너무 간략하고 적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의 주요 사상가(스님)와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도 서술하면 어떨까요?&amp;lt;br/&amp;gt;&lt;br /&gt;
- 한국 불교만의 특징을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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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aft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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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lt;br /&gt;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성균관&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amp;lt;/ref&amp;gt; 홈페이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즉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나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주요덕목이다.&lt;br /&gt;
&lt;br /&gt;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이들 모두가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lt;br /&gt;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에서는 특히 군왕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다.&lt;br /&gt;
&lt;br /&gt;
지금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인의예지이며, 많은 한국인은 과거 군왕의 덕치 개념을 현대의 위정자들도 발휘하기를 바란다.&lt;br /&gt;
유교는 그러나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lt;br /&gt;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종교로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6천여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lt;br /&gt;
&lt;br /&gt;
그 예로 가정에서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의 근본도리로써 가례를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성균관 전례위원회에 따르면 관혼상제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인간)이 되고(관례), 결혼하고(혼례), 죽으며(상례), 그 후에 행하는 제사(제례)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종묘 제례 때 사용되는 제례악은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교에 따르는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교가 어느 종교보다도 더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로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lt;br /&gt;
&lt;br /&gt;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육되었다.&lt;br /&gt;
&lt;br /&gt;
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lt;br /&gt;
[[파일:한국의 전통혼례 장면.png|섬네일|한국의 전통 혼례장면]]&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성균관, 무형문화재 제85호,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성균관(http://www.skk.or.kr)&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삼국사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lt;br /&gt;
|의견2=&lt;br /&gt;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amp;quot;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amp;quot;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amp;lt;br/&amp;gt; &lt;br /&gt;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0%EA%B5%90&amp;diff=392</id>
		<title>Draft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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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48: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lt;br /&gt;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성균관&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amp;lt;/ref&amp;gt; 홈페이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즉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나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주요덕목이다.&lt;br /&gt;
&lt;br /&gt;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이들 모두가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lt;br /&gt;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에서는 특히 군왕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다.&lt;br /&gt;
&lt;br /&gt;
지금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인의예지이며, 많은 한국인은 과거 군왕의 덕치 개념을 현대의 위정자들도 발휘하기를 바란다.&lt;br /&gt;
유교는 그러나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lt;br /&gt;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종교로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6천여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lt;br /&gt;
&lt;br /&gt;
그 예로 가정에서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의 근본도리로써 가례를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성균관 전례위원회에 따르면 관혼상제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인간)이 되고(관례), 결혼하고(혼례), 죽으며(상례), 그 후에 행하는 제사(제례)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종묘 제례 때 사용되는 제례악은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교에 따르는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교가 어느 종교보다도 더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로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lt;br /&gt;
&lt;br /&gt;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육되었다.&lt;br /&gt;
&lt;br /&gt;
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lt;br /&gt;
[[파일:한국의 전통 혼례장면.png|섬네일|한국의 전통 혼례장면]]&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성균관, 무형문화재 제85호,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성균관(http://www.skk.or.kr)&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삼국사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lt;br /&gt;
|의견2=&lt;br /&gt;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amp;quot;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amp;quot;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amp;lt;br/&amp;gt; &lt;br /&gt;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0%EA%B5%90&amp;diff=390</id>
		<title>Draft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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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34: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lt;br /&gt;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성균관&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amp;lt;/ref&amp;gt; 홈페이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즉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나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주요덕목이다.&lt;br /&gt;
&lt;br /&gt;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이들 모두가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lt;br /&gt;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에서는 특히 군왕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다.&lt;br /&gt;
&lt;br /&gt;
지금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인의예지이며, 많은 한국인은 과거 군왕의 덕치 개념을 현대의 위정자들도 발휘하기를 바란다.&lt;br /&gt;
유교는 그러나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lt;br /&gt;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종교로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6천여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lt;br /&gt;
&lt;br /&gt;
그 예로 가정에서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의 근본도리로써 가례를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성균관 전례위원회에 따르면 관혼상제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인간)이 되고(관례), 결혼하고(혼례), 죽으며(상례), 그 후에 행하는 제사(제례)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종묘 제례 때 사용되는 제례악은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교에 따르는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교가 어느 종교보다도 더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로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lt;br /&gt;
&lt;br /&gt;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육되었다.&lt;br /&gt;
&lt;br /&gt;
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성균관, 무형문화재 제85호,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성균관(http://www.skk.or.kr)&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삼국사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lt;br /&gt;
|의견2=&lt;br /&gt;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amp;quot;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amp;quot;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amp;lt;br/&amp;gt; &lt;br /&gt;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0%EA%B5%90&amp;diff=389</id>
		<title>Draft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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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34: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lt;br /&gt;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성균관&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amp;lt;/ref&amp;gt; 홈페이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즉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나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주요덕목이다.&lt;br /&gt;
&lt;br /&gt;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이들 모두가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lt;br /&gt;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에서는 특히 군왕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다.&lt;br /&gt;
&lt;br /&gt;
지금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인의예지이며, 많은 한국인은 과거 군왕의 덕치 개념을 현대의 위정자들도 발휘하기를 바란다.&lt;br /&gt;
유교는 그러나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lt;br /&gt;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종교로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6천여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lt;br /&gt;
&lt;br /&gt;
 그 예로 가정에서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의 근본도리로써 가례를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성균관 전례위원회에 따르면 관혼상제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인간)이 되고(관례), 결혼하고(혼례), 죽으며(상례), 그 후에 행하는 제사(제례)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종묘 제례 때 사용되는 제례악은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교에 따르는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교가 어느 종교보다도 더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로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lt;br /&gt;
&lt;br /&gt;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육되었다.&lt;br /&gt;
&lt;br /&gt;
끝으로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나 한반도에서 크게 발전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며 유학도 함께 전했다. 신라 최치원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했고, 고려의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도 걸출한 학자들이다.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고, 중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이기일원론을 확립한 이황의 학문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독일 등 유럽에서 퇴계학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이의 주기설은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다. 유학은 조선 개국에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나 말기에는 지나친 이론에 치우쳐 당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성균관, 무형문화재 제85호,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성균관(http://www.skk.or.kr)&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삼국사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lt;br /&gt;
|의견2=&lt;br /&gt;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amp;quot;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amp;quot;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amp;lt;br/&amp;gt; &lt;br /&gt;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8%84%EB%8C%80%EC%9D%98_%ED%95%9C%EA%B5%AD_%EA%B5%90%EC%9C%A1&amp;diff=388</id>
		<title>Draft 현대의 한국 교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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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32: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현대의 한국교육&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헌법, 교육법&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이 개발도상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힘이었다. 한국의 현대교육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학진학률과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우수 모델로 자주 언급할 정도로 최상위권의 학업성취도를 이룩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한국은 교육과 학습을 매우 중시하는 나라였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왕조는 500여 년 동안 과거제도를 통해 국가를 경영할 인재를 뽑았다.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고전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응시하여 출세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가 일제의 강점으로 멸망하자 애국지사들은 교육만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여기고 마을마다 학교를 만든다는 결의로 신교육운동에 나섰다. 많은 명문사립학교들이 세워지고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훗날 국가와 사회에 큰 기여를 했다. &lt;br /&gt;
&lt;br /&gt;
이런 전통은 현대 한국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기득권층이 몰락한 신생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사회계층이동과 신분상승의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었기 에 국민들의 자녀교육열은 그 만큼 더 강해졌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교육투자는 성공적인 결실을 가져왔다. 중등 및 고등 교육을 받은 한국의 우수한 인적 자원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산업화와 해외시장개척 과정에서 지대한 기여를 했다. 한국의 근면하고 질 높은 인력은 중동건설시장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lt;br /&gt;
&lt;br /&gt;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많은 한국이 1960년대 세계 최빈국대열에서 오늘의 부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저력은 교육에서 나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은 국제비교에서도 나타난다. OECD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68%로 캐나다 미국 영국 보다 높으며 회원국 중 최고다. 회원국 평균은 41%다. 2015년 OECD가 전세계 7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학업성취도평가에서 한국은 싱가포르와 홍콩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lt;br /&gt;
&lt;br /&gt;
교육법이 정한 한국의 학제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교육대학, 사범대학, 전문대학, 방송통신대학과 개방대학, 기술학교, 고등기술학교, 공민학교, 고등공민학교, 특수학교, 각종학교 등으로 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기본적인 골격은 6(초등학교)-3(중학교)-3(고등학교)-4(대학교)제도이다. 초등학교6년과 중학교3년을 합쳐 9년이 의무교육기간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은 입학시험 없이 교육당국이 원칙적으로 근거리에 있는 학교 중 하나로 배정해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은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뽑는 과학고와 외국어고, 그리고 자립형사립고등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 내 학교에 배정된다. &lt;br /&gt;
&lt;br /&gt;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할 때 극심한 입시 경쟁이 이루어진다. 명문 대학의 입학은 성공인생의 첫걸음이라는 전국민적 믿음 때문에 전국적으로 전쟁 못지않게 치열한 입시경쟁이 벌어진다. 대학입시는 대학이 원하는 우수인재를 서류전형을 통해 뽑는 방식과 국가가 주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시험) 성적에 따라 뽑는 방식이 있다. &lt;br /&gt;
&lt;br /&gt;
대학 학제는 4년제 대학(189개교)과 2년제 전문대학(138개교)이 있다. 의과대학, 치과대학, 한의대학은 예과 2년에 본과 4년을 합쳐 6년제이다. 직장인들의 대학교육을 위해 국가가 방송통신대학(1개교)을 운영하며, 사립 사이버 대학도 17개가 운영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2016년 현재 한국의 4년제 대학은 189개교에 재학생 수는 208만 명이다. 전문대학은 138개교에 70만 명이 재학하고 있다. 대학원 재학생 수도 33만 명에 이른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학기는 모든 학교가 3월에 시작하며, 대학은 6월 하순, 기타는 7월 하순에 여름방학에 들어가며, 가을학기는 8월 하순에 시작하여 12월 중순에 끝난다. 일부대학에서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계절학기제를 운영하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현대교육은 산업화 과정에서 지대한 기여를 했지만, 해결해야 할 부작용도 적지 않다. 명문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지나친 경쟁에서 비롯된 사교육의 비대화와 학부모들의 과다한 사교육비용 지출, 선행학습과 조기유학의 폐습은 자주 지적되면서도 여전히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다. 높은 대학 진학률이 초래한 학력인플레 현상과 취업난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되어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교육통계센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현대 한국의 교육’ 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쓰여져 있으나, 오늘날 한국의 교육을 설명하는 글이라기보다는 한국의 교육을 언급한 문장을 단순히 나열하고 있다. 첫 페이지의 기본 정보 내용이 거의 작성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작성하고 글의 출처 및 인용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교육법이 정한 한국의 학제는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육대학,사범대학,전문대학,방송통신대학과 개방대학,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공민학교,고등공민학교,특수학교,각종학교등으로 되어 있다. → 이 부분은 구지 쓸 필요가 없을 듯하다.&amp;lt;br/&amp;gt;&lt;br /&gt;
-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은 입학시험 없이 교육당국이 학교를 배정해 준다. →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은 입학시험 없이 교육당국이 원칙적으로 근거리에 있는 학교 중 하나로 배정해준다.&amp;lt;br/&amp;gt;&lt;br /&gt;
- 일부 대학에서는 여름학기를 운영하기도 한다. → 일부대학에서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계절학기제를 운영하기도 한다.&amp;lt;br/&amp;gt;  &lt;br /&gt;
- 사학의 비대화와 학부모들의 과다한 사학비용 → 사학을 사교육으로 바꾸어서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사학을 사립학교와 동일어로 이해할 수 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7%BC%EB%8C%80_%EA%B5%90%EC%9C%A1%EA%B3%BC_%EA%B8%B0%EB%8F%85%EA%B5%90&amp;diff=387</id>
		<title>Draft 근대 교육과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7%BC%EB%8C%80_%EA%B5%90%EC%9C%A1%EA%B3%BC_%EA%B8%B0%EB%8F%85%EA%B5%90&amp;diff=387"/>
				<updated>2017-07-30T07:32: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근대교육과 기독교&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매클레이, 앨런, 아펜젤러, 스크랜턴, 언더우드, 앨러스, 베어드&lt;br /&gt;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경신학교, 정신학교, 연세대학교, 이화대학교, 연희전문, 세브란스 의전, &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의 근대교육에서 기독교가 이룬 공적은 지대하다. 기독교 교육의 근대적 성격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화 주체세력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성경 번역을 통한 한글의 보급, 서양학문 소개, 여성교육의 실시에 기여하였다. &lt;br /&gt;
&lt;br /&gt;
19세기 후반, 조선은 오랜 쇄국정책 끝에 뒤늦게 해외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한 인재교육은 조선의 급선무였다. 새로운 서구식 학교가 정부, 민간인 유지, 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중 선교단체가 세운 학교가 시기적으로 앞서고 수적으로도 많았다. &lt;br /&gt;
&lt;br /&gt;
그 전통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2016년 현재 한국의 총 대학 수 189개교 중 약 절반인 94개 대학이 기독교재단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이 미국의 해외선교단에게 문호를 열었다. 이듬해 여름 고종은 민영익에게 전권대사 자격을 주어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케 했다. 이때 뉴욕 감리회(監理會) 선교본부는 민영익으로부터 조선의 사정을 청취하고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 머물던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ey)가 본부의 지시를 받고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lt;br /&gt;
&lt;br /&gt;
매클레이 부처는 1884년 6월 한국에 도착하여 김옥균의 안내로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의사 앨런(H.N. Allen)부처, 이듬해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함께 조선에 들어왔고, 한달 후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Mrs, M. F. Scranton)가 도착했다. &lt;br /&gt;
&lt;br /&gt;
알렌은 1885년 의료기관이면서 서양식 의료교육을 겸한 광혜원을 세웠고, 아펜젤러는 미션스쿨 1호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lt;br /&gt;
&lt;br /&gt;
1886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학당을 세웠고 스크랜턴 여사는 조선 최초의 서구식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열었다. 1997년에는 북장로교 선교사 엘러스(Miss, Annie Ellers)가 서울 정동(貞洞)에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lt;br /&gt;
&lt;br /&gt;
이처럼 기독교계 학교는 처음 서울을 중심으로 세워졌으나 차츰 지방으로 퍼져나가 거의 전국화되었다. 평양에서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裵緯良)가 13명의 학생을 모아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평양의 기독교 유지들이 운영해 온 이 학교는 1900년에 수업연한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가 되었고, 1905년 가을학기부터 고등교육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1910년 2월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종파 별 통계를 보면 장로파가 501교, 감리파가 158교, 성공회(聖公會)가 4교, 안식교가 2교, 종파 미상교가 84교, 각 파 합동이 1교, 천주교 46교로 신·구교회가 세운 학교는 모두 796교였다. 남자학교보다 여자학교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의 대학과정인 조선기독교대학은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4년제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통합하여 명문사학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이 학교이름을 하사한 이화학당은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세워 고등교육에도 진출했으며, 오늘날 세계 최대의 명문여성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배재학당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입학하여 처음 서양문물을 배웠던 학교로 유명하다. &lt;br /&gt;
&lt;br /&gt;
기독교 계열 학교들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다스리던 시절 심한 간섭과 견제를 받아야 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숭실학원은 1938년 자진 폐교를 하기도 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기독교계 학교들은 새로 활력을 띄게 되었고 많은 학교가 기독교 교단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위키백과&lt;br /&gt;
*두산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미션계 학교는 선교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교육에 포함된 근대적 성격이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적 주체 형성에도 공헌하였다. 기독교의 영향 즉, 1) 근대화의 전파와 한글을 통한 교육의 변화, 2) 교육을 통한 서양학문의 소개 3) 근대 학문의 수립 4) 여성교육의 실시, 5) 성경 번역을 통한 자국어의 보급 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교육 기관 설립과 주요 학교의 발전에 대해서는 잘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어떠한 근대교육(즉 교육 교과목)이 이루어졌으며, 졸업생들은 어떤 활동을 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하였는가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 일제 식민지에 대항, 근대학문 습득 이후의 활약 등등&amp;lt;br/&amp;gt;&lt;br /&gt;
- 주로 어떤 사람들이 근대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초창기 기독교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들을 모집할 때의 어려운 점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기독교계 학교가 남자학교보다 여학교가 많은 이유도 설명했으면.&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4%ED%86%B5%EC%8B%9C%EB%8C%80%EC%9D%98_%EA%B5%90%EC%9C%A1&amp;diff=386</id>
		<title>Draft 전통시대의 교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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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3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전통 교육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광종, [[공자]], 선현, 최충, 주세붕, 안향, 백운동서원, 소수서원&lt;br /&gt;
|장소/공간=문묘, 명륜당, 풍기&lt;br /&gt;
|사건=서북 방향 국경 개척&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삼국시대]], [[유교]], [[불교]], [[고구려]], [[신라]], 화랑도, 통일 신라, [[고려]], 과거 제도, 태학, 국자감, 학당, 향교, 십이도, 서당, 삼사·오경 및 제술, [[성리학]], [[성균관]], [[서원]], 생원 · 진사, 사액서원&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시대의 교육에는 유교와 불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지배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에게 학문적ㆍ인성적 소양을 길러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용맹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을 주요 교육 목표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최초의 학교는 372년에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이었다. 태학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 기관으로, 귀족 등 지배 계급의 자제들을 위한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태학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다. 화랑도 교육은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중흥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lt;br /&gt;
&lt;br /&gt;
통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정치나 교육은 유교의 이념을 따랐다. 제4대 광종 때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배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과거 제도의 실시이다. 이는 관직 진출의 문호를 모든 지배 계층에 개방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형식은 바뀌었지만 과거 제도는 관리 등용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lt;br /&gt;
&lt;br /&gt;
고려의 교육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중앙의 국자감과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다. 국립 종합대학교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992년 개경에 설립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고 입학 자격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규정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자감의 교육 목적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인 동시에 유학의 연구였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의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립된 중등 정도의 관학 교육 기관이었다. 1127년 3월, 각 주와 현에다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敎導)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향학의 시초로 보고 있다. 향교에는 공자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교육을 실시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학당이 있었다. 교육 정도는 향교와 유사하였으나 학당은 문묘가 없는, 교육만 담당한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사학인 십이도는 관학인 국자감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교육 기관이었다. 1053년 최충(崔冲)이 국자감을 비롯한 관학의 부진을 개탄하여 자기 집에 서당을 설치, 이웃 아동들을 교육한 데서 비롯하였다. 교과목은 국자감의 범주에 따라 삼사 · 오경 및 제술을 주로 하였고 나아가서 실천 윤리를 앞세웠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이념은 성리학적 도학 정신이 중추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 교육이 아닌,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실시되었다. 그 주된 대상은 양반 계급으로서, 관직 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다. 또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 체계는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향교, 서원과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는 공자와 제현(諸賢)을 모신 문묘와 유생 교육의 장소인 명륜당이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춰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과거에 1차 합격한 생원 · 진사 이상이 입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lt;br /&gt;
&lt;br /&gt;
사부학당은 중등 교육을 담당했던 관립 교육 기관이었다. 처음 서울을 동·서·남·북의 4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사부학당이라 불리다가 중앙에도 학교가 세워져 오부학당이라 하였다.  &lt;br /&gt;
&lt;br /&gt;
향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에서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문묘인 대성전과 명륜당 등의 구조를 갖추었다. 향교에서는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서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lt;br /&gt;
&lt;br /&gt;
서원은 사림에 의한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다. 또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의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되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 백운동서원은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농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lt;br /&gt;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장소로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고려사(高麗史)』&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lt;br /&gt;
*『조선교육사 상·하』(이만규, 을유문화사, 1949)&lt;br /&gt;
*『한국교육사 상·중·하』(박상만, 대한교육연합회, 1956∼1959)&lt;br /&gt;
*『한국교육사』(한기언, 박영사, 1963)&lt;br /&gt;
*『한국신교육사』(오천석,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lt;br /&gt;
*『한국교육사상사연구』(한기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lt;br /&gt;
*『한국교육사연구』(차석기·신천식, 재동문화사, 1969)&lt;br /&gt;
*『한국고등교육연구』(김종철, 배영사, 1969)&lt;br /&gt;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lt;br /&gt;
*『한국기술교육사』(이원호, 서문당, 1974)&lt;br /&gt;
*『한국교육사자료 1·2』(국사편찬위원회, 1975)&lt;br /&gt;
*『한국인교육관의 사적 배경』(박준희, 실학사, 1976)&lt;br /&gt;
*『일제하민중교육운동사』(노영택, 탐구당, 1979)&lt;br /&gt;
*『한국서원교육제도사연구』(정순목,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lt;br /&gt;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lt;br /&gt;
*『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정재철, 일지사, 198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의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에 대한 설명은 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이 한국의 교육에 미친 영향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체계화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글에서 “한국에서 국가에~ 삼국시대부터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명확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자칫 한국 공교육의 시작이 삼국시대부터로 읽힐 수 있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화랑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면. 화랑도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분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원광의 세속5계를 받들며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amp;lt;삼국사기&amp;gt;에는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 삼사 오경에서 삼사가 무엇인가요? 사서 오경 아닌가요?&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교육기관 중 초등 교육기관은 서당, 중등 교육기관은 서울의 경우 사부학당, 지방의 경우 향교, 고등 교육기관은 성균관입니다. 사부학당이 빠졌네요, 확인하고 보완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원이 사림에 의한 사립교육기관임을 제시하여 당시 관립학교와 차별성을 가졌음을 서술할 것.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을 제사하고,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amp;lt;br/&amp;gt;&lt;br /&gt;
- 전통시대의 교육은 남성 지배층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특징과 내용, 양반 등 지배층 이외의 중인의 교육기관 및 내용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교육 후 과거를 통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홍패, 장원급제에게 내린 어사화 등 장원급제자 축하 행사(?)에 대해 서술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4%ED%86%B5%EC%8B%9C%EB%8C%80%EC%9D%98_%EA%B5%90%EC%9C%A1&amp;diff=385</id>
		<title>Draft 전통시대의 교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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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31: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전통 교육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광종, [[공자]], 선현, 최충, 주세붕, 안향, 백운동서원, 소수서원&lt;br /&gt;
|장소/공간=문묘, 명륜당, 풍기&lt;br /&gt;
|사건=서북 방향 국경 개척&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삼국시대]], [[유교]], [[불교]], [[고구려]], [[신라]], 화랑도, 통일 신라, [[고려]], 과거 제도, 태학, 국자감, 학당, 향교, 십이도, 서당, 삼사·오경 및 제술, [[성리학]], [[성균관]], [[서원]], 생원 · 진사, 사액서원&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시대의 교육에는 유교와 불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지배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에게 학문적ㆍ인성적 소양을 길러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용맹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을 주요 교육 목표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최초의 학교는 372년에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이었다. 태학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 기관으로, 귀족 등 지배 계급의 자제들을 위한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태학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다. 화랑도 교육은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중흥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lt;br /&gt;
&lt;br /&gt;
통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정치나 교육은 유교의 이념을 따랐다. 제4대 광종 때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배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과거 제도의 실시이다. 이는 관직 진출의 문호를 모든 지배 계층에 개방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형식은 바뀌었지만 과거 제도는 관리 등용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lt;br /&gt;
&lt;br /&gt;
고려의 교육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중앙의 국자감과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다. 국립 종합대학교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992년 개경에 설립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고 입학 자격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규정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자감의 교육 목적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인 동시에 유학의 연구였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의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립된 중등 정도의 관학 교육 기관이었다. 1127년 3월, 각 주와 현에다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敎導)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향학의 시초로 보고 있다. 향교에는 공자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교육을 실시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학당이 있었다. 교육 정도는 향교와 유사하였으나 학당은 문묘가 없는, 교육만 담당한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사학인 십이도는 관학인 국자감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교육 기관이었다. 1053년 최충(崔冲)이 국자감을 비롯한 관학의 부진을 개탄하여 자기 집에 서당을 설치, 이웃 아동들을 교육한 데서 비롯하였다. 교과목은 국자감의 범주에 따라 삼사 · 오경 및 제술을 주로 하였고 나아가서 실천 윤리를 앞세웠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이념은 성리학적 도학 정신이 중추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 교육이 아닌,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실시되었다. 그 주된 대상은 양반 계급으로서, 관직 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다. 또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 체계는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향교, 서원과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는 공자와 제현(諸賢)을 모신 문묘와 유생 교육의 장소인 명륜당이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춰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과거에 1차 합격한 생원 · 진사 이상이 입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lt;br /&gt;
&lt;br /&gt;
사부학당은 중등 교육을 담당했던 관립 교육 기관이었다. 처음 서울을 동·서·남·북의 4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사부학당이라 불리다가 중앙에도 학교가 세워져 오부학당이라 하였다.  &lt;br /&gt;
&lt;br /&gt;
향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에서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문묘인 대성전과 명륜당 등의 구조를 갖추었다. 향교에서는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서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lt;br /&gt;
&lt;br /&gt;
서원은 사림에 의한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다. 또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의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되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 백운동서원은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농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lt;br /&gt;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장소로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고려사(高麗史)』&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lt;br /&gt;
*『조선교육사 상·하』(이만규, 을유문화사, 1949)&lt;br /&gt;
*『한국교육사 상·중·하』(박상만, 대한교육연합회, 1956∼1959)&lt;br /&gt;
*『한국교육사』(한기언, 박영사, 1963)&lt;br /&gt;
*『한국신교육사』(오천석,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lt;br /&gt;
*『한국교육사상사연구』(한기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lt;br /&gt;
*『한국교육사연구』(차석기·신천식, 재동문화사, 1969)&lt;br /&gt;
*『한국고등교육연구』(김종철, 배영사, 1969)&lt;br /&gt;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lt;br /&gt;
*『한국기술교육사』(이원호, 서문당, 1974)&lt;br /&gt;
*『한국교육사자료 1·2』(국사편찬위원회, 1975)&lt;br /&gt;
*『한국인교육관의 사적 배경』(박준희, 실학사, 1976)&lt;br /&gt;
*『일제하민중교육운동사』(노영택, 탐구당, 1979)&lt;br /&gt;
*『한국서원교육제도사연구』(정순목,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lt;br /&gt;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lt;br /&gt;
*『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정재철, 일지사, 198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의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에 대한 설명은 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이 한국의 교육에 미친 영향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체계화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글에서 “한국에서 국가에~ 삼국시대부터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명확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자칫 한국 공교육의 시작이 삼국시대부터로 읽힐 수 있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화랑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면. 화랑도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분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원광의 세속5계를 받들며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amp;lt;삼국사기&amp;gt;에는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 삼사 오경에서 삼사가 무엇인가요? 사서 오경 아닌가요?&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교육기관 중 초등 교육기관은 서당, 중등 교육기관은 서울의 경우 사부학당, 지방의 경우 향교, 고등 교육기관은 성균관입니다. 사부학당이 빠졌네요, 확인하고 보완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원이 사림에 의한 사립교육기관임을 제시하여 당시 관립학교와 차별성을 가졌음을 서술할 것.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을 제사하고,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amp;lt;br/&amp;gt;&lt;br /&gt;
- 전통시대의 교육은 남성 지배층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특징과 내용, 양반 등 지배층 이외의 중인의 교육기관 및 내용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교육 후 과거를 통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홍패, 장원급제에게 내린 어사화 등 장원급제자 축하 행사(?)에 대해 서술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4%ED%86%B5%EC%8B%9C%EB%8C%80%EC%9D%98_%EA%B5%90%EC%9C%A1&amp;diff=384</id>
		<title>Draft 전통시대의 교육</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4%ED%86%B5%EC%8B%9C%EB%8C%80%EC%9D%98_%EA%B5%90%EC%9C%A1&amp;diff=384"/>
				<updated>2017-07-30T07:31: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전통 교육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광종, [[공자]], 선현, 최충, 주세붕, 안향, 백운동서원, 소수서원&lt;br /&gt;
|장소/공간=문묘, 명륜당, 풍기&lt;br /&gt;
|사건=서북 방향 국경 개척&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삼국시대]], [[유교]], [[불교]], [[고구려]], [[신라]], 화랑도, 통일 신라, [[고려]], 과거 제도, 태학, 국자감, 학당, 향교, 십이도, 서당, 삼사·오경 및 제술, [[성리학]], [[성균관]], [[서원]], 생원 · 진사, 사액서원&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시대의 교육에는 유교와 불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지배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에게 학문적ㆍ인성적 소양을 길러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용맹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을 주요 교육 목표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최초의 학교는 372년에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이었다. 태학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 기관으로, 귀족 등 지배 계급의 자제들을 위한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태학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다. 화랑도 교육은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중흥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lt;br /&gt;
&lt;br /&gt;
통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정치나 교육은 유교의 이념을 따랐다. 제4대 광종 때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배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과거 제도의 실시이다. 이는 관직 진출의 문호를 모든 지배 계층에 개방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형식은 바뀌었지만 과거 제도는 관리 등용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lt;br /&gt;
&lt;br /&gt;
고려의 교육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중앙의 국자감과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다. 국립 종합대학교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992년 개경에 설립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고 입학 자격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규정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자감의 교육 목적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인 동시에 유학의 연구였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의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립된 중등 정도의 관학 교육 기관이었다. 1127년 3월, 각 주와 현에다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敎導)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향학의 시초로 보고 있다. 향교에는 공자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교육을 실시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학당이 있었다. 교육 정도는 향교와 유사하였으나 학당은 문묘가 없는, 교육만 담당한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사학인 십이도는 관학인 국자감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교육 기관이었다. 1053년 최충(崔冲)이 국자감을 비롯한 관학의 부진을 개탄하여 자기 집에 서당을 설치, 이웃 아동들을 교육한 데서 비롯하였다. 교과목은 국자감의 범주에 따라 삼사 · 오경 및 제술을 주로 하였고 나아가서 실천 윤리를 앞세웠다.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이념은 성리학적 도학 정신이 중추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 교육이 아닌,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실시되었다. 그 주된 대상은 양반 계급으로서, 관직 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다. 또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 체계는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향교, 서원과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는 공자와 제현(諸賢)을 모신 문묘와 유생 교육의 장소인 명륜당이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춰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과거에 1차 합격한 생원 · 진사 이상이 입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lt;br /&gt;
&lt;br /&gt;
사부학당은 중등 교육을 담당했던 관립 교육 기관이었다. 처음 서울을 동·서·남·북의 4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사부학당이라 불리다가 중앙에도 학교가 세워져 오부학당이라 하였다.  &lt;br /&gt;
&lt;br /&gt;
향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에서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문묘인 대성전과 명륜당 등의 구조를 갖추었다. 향교에서는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서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lt;br /&gt;
&lt;br /&gt;
서원은 사림에 의한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다. 또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의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되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 백운동서원은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농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lt;br /&gt;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장소로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고려사(高麗史)』&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lt;br /&gt;
*『조선교육사 상·하』(이만규, 을유문화사, 1949)&lt;br /&gt;
*『한국교육사 상·중·하』(박상만, 대한교육연합회, 1956∼1959)&lt;br /&gt;
*『한국교육사』(한기언, 박영사, 1963)&lt;br /&gt;
*『한국신교육사』(오천석,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lt;br /&gt;
*『한국교육사상사연구』(한기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lt;br /&gt;
*『한국교육사연구』(차석기·신천식, 재동문화사, 1969)&lt;br /&gt;
*『한국고등교육연구』(김종철, 배영사, 1969)&lt;br /&gt;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lt;br /&gt;
*『한국기술교육사』(이원호, 서문당, 1974)&lt;br /&gt;
*『한국교육사자료 1·2』(국사편찬위원회, 1975)&lt;br /&gt;
*『한국인교육관의 사적 배경』(박준희, 실학사, 1976)&lt;br /&gt;
*『일제하민중교육운동사』(노영택, 탐구당, 1979)&lt;br /&gt;
*『한국서원교육제도사연구』(정순목,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lt;br /&gt;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lt;br /&gt;
*『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정재철, 일지사, 198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의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에 대한 설명은 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이 한국의 교육에 미친 영향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체계화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글에서 “한국에서 국가에~ 삼국시대부터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명확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자칫 한국 공교육의 시작이 삼국시대부터로 읽힐 수 있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화랑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면. 화랑도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분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원광의 세속5계를 받들며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amp;lt;삼국사기&amp;gt;에는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 삼사 오경에서 삼사가 무엇인가요? 사서 오경 아닌가요?&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교육기관 중 초등 교육기관은 서당, 중등 교육기관은 서울의 경우 사부학당, 지방의 경우 향교, 고등 교육기관은 성균관입니다. 사부학당이 빠졌네요, 확인하고 보완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원이 사림에 의한 사립교육기관임을 제시하여 당시 관립학교와 차별성을 가졌음을 서술할 것.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을 제사하고,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amp;lt;br/&amp;gt;&lt;br /&gt;
- 전통시대의 교육은 남성 지배층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특징과 내용, 양반 등 지배층 이외의 중인의 교육기관 및 내용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교육 후 과거를 통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홍패, 장원급제에게 내린 어사화 등 장원급제자 축하 행사(?)에 대해 서술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9%94%ED%8F%AC%EC%99%80_%ED%99%94%EC%95%BD&amp;diff=383</id>
		<title>Draft 화포와 화약</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9%94%ED%8F%AC%EC%99%80_%ED%99%94%EC%95%BD&amp;diff=383"/>
				<updated>2017-07-30T07:27: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최무선의 화약 개발, 나라를 구하다&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최무선]], 왜구, 이원, 화통도감, 화통방사군, [[태조 이성계]], 태종, [[세종]], 화통군, 화약장, 왜인, 문종, 도회소, 성근, 김지남&lt;br /&gt;
|장소/공간=벽란도, 금강 하구의 진포, 나세 &lt;br /&gt;
|사건=서북 방향 국경 개척&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고려, 초석 · 유황 · 분탄, [[조선]], 염초자취법, &amp;lt;신전자취염초방&amp;gt;, &amp;lt;신전자초방&amp;gt;, 명나라&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화약과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된 것은 최무선(崔茂宣) 이후의 일이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역항 벽한국에서 화약이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말기로 추측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화약이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원료, 즉 초석 · 유황 · 분탄 중 초석(염초 : 焰硝)의 제조법이 비밀이어서 고려에서는 정부조차도 화약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약이 필요할 때는 중국에서 얻어다 쓰곤 했다. &lt;br /&gt;
&lt;br /&gt;
고려에서 화약과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된 것은 최무선(崔茂宣) 이후의 일이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인들 중 초석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중국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난 최무선은 화약을 만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흙에서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낼 국가의 화약제조소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자고 고려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덕분에 화통도감이 만들어졌고 1377년 10월부터 화약과 화약 무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 1378년에는 화기 발사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이 편성되었다.  &lt;br /&gt;
&lt;br /&gt;
화통도감에서 만들어진, 화약을 사용한 무기는 18종에 이르렀다. 총포류나, 화포류, 불화살 등 다양한 무기가 개발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화기들은 실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최무선은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lt;br /&gt;
&lt;br /&gt;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화기 발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반에게 대중화되어 새 왕조의 권력 집중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약은 설 명절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에만 쓰였을 정도였다. 태조와 달리 태종 ‧ 세종에 이르러는 화기 발달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태종 때인 1404년에는 화약을 주로 쓰는 부대인 화통군(火㷁軍)이 증원되었고 화약을 만드는 화약장(火藥匠)의 수도 늘어났다. &lt;br /&gt;
&lt;br /&gt;
세종 때에는 서북 방향 국경을 개척하면서 연간 약 8,000근이나 되는 화약을 소비하기도 했다. 이 중 약 3,000근은 지방에서 생산하였는데, 중앙 정부에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엄중히 관리하였다.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등 한반도 남쪽의 세 도(下三道)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감독 아래 해안에서 먼 곳을 골라서 초석을 만들게 하였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혹시 왜인에게 알려질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이 늘 부족하여 화포 발사 훈련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1433년부터는 불꽃놀이에 쓰는 염초량을 종전의 1,000근에서 30근으로 대폭 줄였다.  &lt;br /&gt;
&lt;br /&gt;
세종의 뒤를 이른 제5대 임금 문종은 화약의 필요성과 그 제조를 위한 염초자취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전국에 25개의 도회소를 설치하였는데, 이 도회소들에서는 나라의 인가를 받은 사람만이 염초를 제조할 수 있었다. 또 만들어낸 염초를 전부 국가에 바쳐 그 비밀이 왜인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조선 초기에 이르러 화기와 화약의 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국가적으로 대량 생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 화약의 정확한 제조 기술은 알려지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화약 제조법 관련 서적은 1635년에 쓰인 &amp;lt;신전자취염초방&amp;gt;과 1698년에 이루어진 &amp;lt;신전자초방&amp;gt;이다. &amp;lt;신전자취염초방&amp;gt;은 성근(成根)이, &amp;lt;신전자초방&amp;gt;은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중국에서 배워와 스스로 연구하여 완성한 화약 제조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lt;br /&gt;
&lt;br /&gt;
이처럼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온 화기와 화약은 외적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방을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 화약과 화기 만드는 기술은 중국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왜인들은 우리의 화약 병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애썼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고려사(高麗史)』&lt;br /&gt;
*『태조실록(太祖實錄)』&lt;br /&gt;
*『무기와 화약』(김기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lt;br /&gt;
*『신전자취염초방언해(新傳煮取焰硝方諺解)』&lt;br /&gt;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lt;br /&gt;
*『화약학·발파학(火藥學·發破學)』(김영달외, 문운당, 1971)&lt;br /&gt;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lt;br /&gt;
*『조선시대화약병기사연구(火藥兵器史硏究)』(허선도, 일조각, 1994)&lt;br /&gt;
*「여말선초 화기(火器)의 전래와 발달」 상·중·하(허선도, 『역사학보』 24·25·26, 1964·1965)&lt;br /&gt;
*「이조중기 화기(火器)의 발달」 상·하(허선도, 『역사학보』 30·31, 196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고려, 조선의 화포와 화약발전에 관한 설명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비교는 불필요하다고 본다. 고려, 조선의 화포와 화약 제조 및 정책에 관한 설명이 너무 많아 내용이 지루하다. 중국의 금비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 장군 등은 화약무기를 사용해 승리를 이끌었는지 또는 조선의 화약무기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 시각 자료와 함께 제시한다면 좀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 개발과 사용에 대해서는 잘 설명되어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조선시대의 화포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화약 개발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화약 제조법 서적에 대해서 정리하였는데..... 임진왜란 거북선의 경우 대형 화포가 탑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서술하면 어떨까요?&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C%A0%84%ED%86%B5_%EB%AC%B4%EC%98%88&amp;diff=382</id>
		<title>Draft 한국의 전통 무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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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25: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태권도 종주국 한국의 전통 무예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정조, 국제올림픽위원회, 세계태권도연맹&lt;br /&gt;
|장소/공간=국기원&lt;br /&gt;
|사건=[[임진왜란]], 갑오개혁, 서울올림픽, 바르셀로나올림픽, 시드니올림픽&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고분 벽화, 총포와 화약의 사용, 십팔기무예, 이십사반무예, 샅바, 육예(六藝),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고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활을 쏘고 말을 달리고 무술을 하는 것이 중요한 교육 과목이었다. 특히 택견, 씨름, 활쏘기 등의 무예 장면은 고대 국가의 고분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에는 씨름 · 택견 · 활쏘기 등으로 분류되지 않은 종합 무예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해 무예는 전쟁 준비를 위한 훈련이나 놀이는 물론 무용의 요소까지 함께 갖추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 후반 총포와 화약의 사용으로 무예 종목들은 민속 놀이 형태로 모습이 바뀌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무예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1594년 훈련원이 만들어지면서 선조의 명으로 곤방,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상수도 등의 무예 6기가 만들어졌다. 이후 1749년인 영조 때 죽장창, 예도, 월도, 쌍검, 권법 등 12기를 더한 18기 무예가 담긴 ‘무예신보’가 완성되었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마상 6기가 더해진 &amp;lt;무예도보통지&amp;gt;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무예24기가 정비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무예로는 씨름, 궁술, 택견 등을 들 수 있다. &lt;br /&gt;
&lt;br /&gt;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나 띠 또는 바지의 허리춤을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민속 놀이이자 운동 경기이다. 순수 한국의 운동 경기인 씨름은 온몸을 움직여 힘과 기술을 겨루는 운동이므로 체력 · 기술 · 투지의 세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씨름은 전통 사회에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명절에 즐거움을 나누기 위하여 실시되었다. 또 농한기를 맞으면 고된 몸과 정신적인 긴장을 풀기 위해서도 씨름을 즐겼다. 오늘날에는 운동 경기로 발전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lt;br /&gt;
&lt;br /&gt;
활쏘기는 이미 고대 이전부터 널리 민간에 장려 ‧ 보급된 무예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술이 무예 수련과 더불어 심신 수양의 하나로서 군자가 익혀야 할 육예(六藝)의 한 가지로 중시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급격한 근대화 및 총기류의 발전으로 활과 화살의 무기로서의 역할은 사라지고 궁술은 대중 스포츠로서 널리 보급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 활은 ‘국궁’이라 불린다. 올림픽 종목 가운데 한국 선수들이 높은 성적으로 보이는 ‘양궁’은 국궁에 대비하여 서양의 활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택견은 손과 발을 주로 사용하는 전신 운동으로,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 심신 수련을 통하여 인격을 도야하며, 기술 단련으로 자신의 신체를 방어하는 호신의 무술이다. 여러 문헌에는 수박 ·수박희 등의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주로 발로 차거나 걸어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지만 상대방 얼굴을 차는 것으로도 이길 수 있다. 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왔으며 격투기임에도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 독특한 경기방법도 있다. 2011년 11월 28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이후 택견은 일본 무술들에 의해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특히 6. 25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태권도가 택견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1970년대 이후에는 태권도와 택견이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택견과 태권도는 역사적 · 기술적으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 무술인 태권도는 여러 전통 무술을 계승 발전시켜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태권도 수련 방법은 기본 동작으로부터 품세 · 겨루기 · 단련 · 호신술 등으로 구별한다. 기본동작은 태권도 기술의 근간을 이루는 손과 발을 이용한 기술로, 주먹과 손날을 이용한 막기 · 지르기 · 찌르기 · 치기와 발을 이용한 차기 기술이 있다. 품세는 혼자서 상대를 가상하여 공격과 방어의 동작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숙달시켜 민첩성 · 근력 · 유연성 및 중심의 이동, 그리고 호흡 조절 및 동작의 완급 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태권도는 무예에 경기적 요소를 더해 스포츠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예의 규범을 제정하여 태권도인의 예의와 자세, 도장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사항,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방문하였을 때의 복장과 용모 · 의식 등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겸 시합장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는 태권도를 올림픽 경기 종목으로 채택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시범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태권도는 세계의 스포츠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은 태권도의 종주국이다. 세계태권도연맹의 본부는 서울에 있으며, 현재 전 세계의 태권도 도장에는 태극기를 전면에 게양하여 예의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또 수련생에게는 한국어 구령으로 지도함으로써 종주국으로서의 한국의 얼을 세계에 떨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삼국유사』&lt;br /&gt;
*『고려사』&lt;br /&gt;
*『세종실록』&lt;br /&gt;
*『선조실록』&lt;br /&gt;
*『증보문헌비고』&lt;br /&gt;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lt;br /&gt;
*『대전회통』&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오늘날 한국 무예의 모습을 설명할 때, 태권도만 사례로 제시하였는데 여기에 무예 24기도 언급하면 좋을 것이다.&lt;br /&gt;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festival/festival.jsp?cid=1805914&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크게 보완했으면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원고에 나오는 고분벽화 및 현대 스포츠 관련 내용을 사진자료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C%9D%B8%EC%87%84_%EB%AC%B8%ED%99%94&amp;diff=381</id>
		<title>Draft 한국의 인쇄 문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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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24: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고려의 직지심경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구텐베르크, 이규보, 플랑시&lt;br /&gt;
|장소/공간=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인사 장경각, 청주목 흥덕사, 프랑스 국립도서관&lt;br /&gt;
|사건=몽골군의 침입, 1972년 세계 도서의 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금속 활자, &amp;lt;직지심체요절&amp;gt;, &amp;lt;직지심경&amp;gt;, 유네스코 기록 유산,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 목판권자본, 납탑 공양, &amp;lt;다라니경&amp;gt;, [[신라]], [[고려]], [[팔만대장경]], &amp;lt;동국이상국집&amp;gt;, &amp;lt;상정예문&amp;gt;, 밀랍 주조법, 숭유억불정책, 유교 경전, 주조술, 점착성 물질, 고급 종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751년 무렵에 간행된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 목판권자본이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불경을 통해 그 시대 이전부터 목판 인쇄를 했다는 것과 초기 목판 인쇄는 본문 내용이 짧은 &amp;lt;다라니경&amp;gt; 등의 불경을 작은 판에 새겨 다량으로 인쇄하여 납탑 공양한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은 작은 목판본으로, 판목에 본문과 다라니의 경문을 완전하게 새겨서 평면으로 놓고 글자 면에 먹물을 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그 위를 문질러 찍어낸, 목판 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하게 갖춘 인쇄물이다. 목판에 글자를 새긴 기술이 정교하여 글자체의 힘찬 필력을 살려 주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지닌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은 당시 우리 민족의 고도로 발달한 인쇄 문화 수준을 입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9세기 후반기인 신라 시대 말기에는 일반 학문 서적을 목판에 새겨 인쇄해내는 단계로까지 인쇄술이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로 들어서 불교가 국가 종교로 승격되고 그 진흥책이 강화되면서 불교 서적의 판각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은 한층 더 발달한 목판 인쇄 문화를 보여준다.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대장경은, 1232년에 만든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 9월 25일(양력으로 10월 11일)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 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 목판이 8만여 매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이 목판들은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은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하여 새긴 것으로 완벽한 대장경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목판 인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기 위해 노력한 결과 만들어진 것은 금속 활자이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어낸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 인쇄물은 1377년에 간행된 &amp;lt;직지심체요절&amp;gt;이다. &amp;lt;직지심경&amp;gt;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1436년부터 1446년 사이에 제작된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보다 60년이나 앞선 것이다. &amp;lt;직지심체요절&amp;gt;은 2001년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금속 활자 인쇄는 고려 시대 중앙 정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발명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3세기 전기에 금속 활자 인쇄가 실시된 것을 기록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이규보의 &amp;lt;동국이상국집&amp;gt;에는 금속 활자로 &amp;lt;상정예문&amp;gt;을 28부 찍어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중앙 관서가 관장하였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이후 지방의 사찰에까지 전파되었다. 1377년에 청주목의 교외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찍어낸 &amp;lt;불조직지심체요절&amp;gt; 하권 1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플랑시(Plancy,C.de.)가 1887년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여 수집한 장서 중의 하나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이 1972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임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고려 시대, 관청에서 만든 금속 활자 인쇄물은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다. 정교하게 주형을 만들어 활자를 부어 낸 다음 잘 손질하여 인쇄한 듯하다. 그런데 흥덕사 금속 활자본은 관청에서 만든 활자로 찍은 것이 아니고 사찰이 전통적인 재래의 밀랍 주조법으로 만든 활자로 찍어낸 것이다. 그래서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같은 것이 드물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사찰의 금속 활자 인쇄는 고려의 인쇄술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당시  몽골의 지배로 관서의 인쇄 기능은 중단되었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사찰에서 재래의 밀랍주조법으로 활자를 계속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고려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조선으로 이어져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조선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와 달리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했다. 그래서 인쇄 문화는 주로 유교 경전과 역사책 간행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금속 활자 인쇄는 동철을 녹여 활자를 부어내는 주조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조술은 물론, 부어낸 활자를 판에 고착시키는 점착성 물질과 쇠붙이 활자에 잘 묻는 기름 먹물이 개발되어야 인쇄를 할 수 있다. 또 금속 활자에 찍어도 찢어지지 않는 고급 종이가 있어야 인쇄가 가능하다. 고려 시대에 금속 활자 인쇄에 성공했다는 것은 당시 한민족이 이 모든 요건을 다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금속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lt;br /&gt;
*『한국목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lt;br /&gt;
*『한국전적인쇄사』(천혜봉, 범우사, 1990)&lt;br /&gt;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개정판)&lt;br /&gt;
*『나려인쇄술의 연구』(천혜봉, 경인문화사, 1978)&lt;br /&gt;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lt;br /&gt;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은 한국의 인쇄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부분에서 좀 더 정확한 기술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그런데~조잡한 활자본이다.” 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관청이 아닌 사찰에서 활자를 만든 이유는 몽골의 지배로 관서의 인쇄기능이 중단되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사찰에서 재래의 밀랍주조법으로 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양과는 달리 조선의 인쇄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숭유억불정책’에 기인한 점도 있지만, 1) 국가정책 변화에 따라 사찰의 사찰판본에서 정부의 관판본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고, 2) 독일의 경우 상업적 목적으로 민간 중심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이 전파되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지만 조선은 극소수의 양반들을 위해 국가에서 독점 제작되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부분에 인쇄물 또는 인쇄물 발달의 의미 서술&amp;lt;br/&amp;gt;&lt;br /&gt;
- 목판인쇄물과 금속활자를 시기순으로 서술할 것 : 주제가 왔다 갔다 함&amp;lt;br/&amp;gt;&lt;br /&gt;
- 팔만대장경 제작 시기를 정확히 명기 할 것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8%80&amp;diff=380</id>
		<title>Draft 한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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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23: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애민 정신이 담긴 글자, 한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조선]], [[세종]], 주시경,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lt;br /&gt;
|장소/공간=갑오개혁, [[일제강점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훈민정음]], 한자, 자주 정신, 민본주의, 자음과 모음,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 천지인, 유교 경전, 불경, 한글 전용 대원칙, 민족 말살 정책, 비문해율&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lt;br /&gt;
&lt;br /&gt;
한글은 처음에는 모두 스물여덟 자였는데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lt;br /&gt;
&lt;br /&gt;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lt;br /&gt;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 의학 서적 · 농업 서적 ·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amp;lt;숙명신한첩&amp;gt;, &amp;lt;홍길동전&amp;gt;, &amp;lt;춘향전&amp;gt;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이니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국문연구(國文硏究)』(주시경, 필사본, 1909)&lt;br /&gt;
*『훈민정음통사』(방종현, 일성당서점, 1948)&lt;br /&gt;
*『국어조어논고』(이숭녕, 을유문화사, 1961)&lt;br /&gt;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lt;br /&gt;
*『새로 지은 국어학사』(김윤경, 을유문화사, 1963)&lt;br /&gt;
*『국어표기법의 역사적연구』(이기문, 서울대학교한국연구원, 1963)&lt;br /&gt;
*『개화기의 국문연구』(이기문, 일조각, 1970)&lt;br /&gt;
*『한글학회50년사』(한글학회, 1971)&lt;br /&gt;
*『국어정책론』(김민수,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lt;br /&gt;
*『한글과 민족문화』(허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lt;br /&gt;
*『개화기의 한글운동사』(이응호, 성청사, 1975)&lt;br /&gt;
*『주시경연구』(김민수, 탑출판사, 1977)&lt;br /&gt;
*『신국어학사』(김민수, 일조각, 1980)&lt;br /&gt;
*『훈민정음연구』(강신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7)&lt;br /&gt;
*『국어표기법연구』(이익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2)&lt;br /&gt;
*「세종대의 어문정책에 대한 연구」(김완진, 『성곡논총』 3, 1972)&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공용 문자는 한글이 아니라 한자가 쓰였다.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1월 21일의 일이다.”을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로 수정할 수 있다.  &lt;br /&gt;
|의견2=&lt;br /&gt;
- 임금의 경우 ( )안에 생몰연대와 즉위년도를 함께 서술.&amp;lt;br/&amp;gt;&lt;br /&gt;
- 한글의 자음과 모음 설명을 좀 더 간단하게 설명. 어금닛소리... 등까지는 서술하지 않아도 될 듯. &amp;lt;br/&amp;gt;&lt;br /&gt;
- 훈민정음으로 서술, 번역된 주요 서적은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글창제 시기의 어려웠던 점, 반대파의 주장과 세종의 반박에 대한 에피소드, 한글을 사용하였던 부류, 여성, 언문, 한글 소설 등에 대해 설명하여 한글이 유지 과정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8%80&amp;diff=379</id>
		<title>Draft 한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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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23: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애민 정신이 담긴 글자, 한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조선]], [[세종]], 주시경,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lt;br /&gt;
|장소/공간=갑오개혁, [[일제강점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훈민정음]], 한자, 자주 정신, 민본주의, 자음과 모음,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 천지인, 유교 경전, 불경, 한글 전용 대원칙, 민족 말살 정책, 비문해율&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lt;br /&gt;
한글은 처음에는 모두 스물여덟 자였는데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lt;br /&gt;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lt;br /&gt;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lt;br /&gt;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 의학 서적 · 농업 서적 ·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lt;br /&gt;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amp;lt;숙명신한첩&amp;gt;, &amp;lt;홍길동전&amp;gt;, &amp;lt;춘향전&amp;gt;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lt;br /&gt;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lt;br /&gt;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이니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국문연구(國文硏究)』(주시경, 필사본, 1909)&lt;br /&gt;
*『훈민정음통사』(방종현, 일성당서점, 1948)&lt;br /&gt;
*『국어조어논고』(이숭녕, 을유문화사, 1961)&lt;br /&gt;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lt;br /&gt;
*『새로 지은 국어학사』(김윤경, 을유문화사, 1963)&lt;br /&gt;
*『국어표기법의 역사적연구』(이기문, 서울대학교한국연구원, 1963)&lt;br /&gt;
*『개화기의 국문연구』(이기문, 일조각, 1970)&lt;br /&gt;
*『한글학회50년사』(한글학회, 1971)&lt;br /&gt;
*『국어정책론』(김민수,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lt;br /&gt;
*『한글과 민족문화』(허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lt;br /&gt;
*『개화기의 한글운동사』(이응호, 성청사, 1975)&lt;br /&gt;
*『주시경연구』(김민수, 탑출판사, 1977)&lt;br /&gt;
*『신국어학사』(김민수, 일조각, 1980)&lt;br /&gt;
*『훈민정음연구』(강신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7)&lt;br /&gt;
*『국어표기법연구』(이익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2)&lt;br /&gt;
*「세종대의 어문정책에 대한 연구」(김완진, 『성곡논총』 3, 1972)&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공용 문자는 한글이 아니라 한자가 쓰였다.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1월 21일의 일이다.”을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로 수정할 수 있다.  &lt;br /&gt;
|의견2=&lt;br /&gt;
- 임금의 경우 ( )안에 생몰연대와 즉위년도를 함께 서술.&amp;lt;br/&amp;gt;&lt;br /&gt;
- 한글의 자음과 모음 설명을 좀 더 간단하게 설명. 어금닛소리... 등까지는 서술하지 않아도 될 듯. &amp;lt;br/&amp;gt;&lt;br /&gt;
- 훈민정음으로 서술, 번역된 주요 서적은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글창제 시기의 어려웠던 점, 반대파의 주장과 세종의 반박에 대한 에피소드, 한글을 사용하였던 부류, 여성, 언문, 한글 소설 등에 대해 설명하여 한글이 유지 과정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8%80&amp;diff=378</id>
		<title>Draft 한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8%80&amp;diff=378"/>
				<updated>2017-07-30T07:23: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애민 정신이 담긴 글자, 한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조선]], [[세종]], 주시경,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lt;br /&gt;
|장소/공간=갑오개혁, [[일제강점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훈민정음]], 한자, 자주 정신, 민본주의, 자음과 모음,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 천지인, 유교 경전, 불경, 한글 전용 대원칙, 민족 말살 정책, 비문해율&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lt;br /&gt;
한글은 처음에는 모두 스물여덟 자였는데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lt;br /&gt;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lt;br /&gt;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lt;br /&gt;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 의학 서적 · 농업 서적 ·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lt;br /&gt;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amp;lt;숙명신한첩&amp;gt;, &amp;lt;홍길동전&amp;gt;, &amp;lt;춘향전&amp;gt;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lt;br /&gt;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lt;br /&gt;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이니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국문연구(國文硏究)』(주시경, 필사본, 1909)&lt;br /&gt;
*『훈민정음통사』(방종현, 일성당서점, 1948)&lt;br /&gt;
*『국어조어논고』(이숭녕, 을유문화사, 1961)&lt;br /&gt;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lt;br /&gt;
*『새로 지은 국어학사』(김윤경, 을유문화사, 1963)&lt;br /&gt;
*『국어표기법의 역사적연구』(이기문, 서울대학교한국연구원, 1963)&lt;br /&gt;
*『개화기의 국문연구』(이기문, 일조각, 1970)&lt;br /&gt;
*『한글학회50년사』(한글학회, 1971)&lt;br /&gt;
*『국어정책론』(김민수,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lt;br /&gt;
*『한글과 민족문화』(허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lt;br /&gt;
*『개화기의 한글운동사』(이응호, 성청사, 1975)&lt;br /&gt;
*『주시경연구』(김민수, 탑출판사, 1977)&lt;br /&gt;
*『신국어학사』(김민수, 일조각, 1980)&lt;br /&gt;
*『훈민정음연구』(강신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7)&lt;br /&gt;
*『국어표기법연구』(이익섭,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2)&lt;br /&gt;
*「세종대의 어문정책에 대한 연구」(김완진, 『성곡논총』 3, 1972)&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공용 문자는 한글이 아니라 한자가 쓰였다.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1월 21일의 일이다.”을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로 수정할 수 있다.  &lt;br /&gt;
|의견2=&lt;br /&gt;
- 임금의 경우 ( )안에 생몰연대와 즉위년도를 함께 서술.&amp;lt;br/&amp;gt;&lt;br /&gt;
- 한글의 자음과 모음 설명을 좀 더 간단하게 설명. 어금닛소리... 등까지는 서술하지 않아도 될 듯. &amp;lt;br/&amp;gt;&lt;br /&gt;
- 훈민정음으로 서술, 번역된 주요 서적은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글창제 시기의 어려웠던 점, 반대파의 주장과 세종의 반박에 대한 에피소드, 한글을 사용하였던 부류, 여성, 언문, 한글 소설 등에 대해 설명하여 한글이 유지 과정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4%EC%98%88&amp;diff=377</id>
		<title>Draft 도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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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22: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도예&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토기,와질토기, 도질토기, 도기, 자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도예의 선진국으로 각 시대마다 특색 있는 기법의 우수한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발생지 중국에서도 최고 품질을 인정 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오늘날 세계의 여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미술품 중에서는 도자기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lt;br /&gt;
&lt;br /&gt;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은 소성 온도에 따라 대체로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lt;br /&gt;
삼국시대는 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토기 중 850∼950℃에서 구워낸 와질토기는 취사와 저장 용기와 분묘 부장품, 제사 용기로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의 토기 유물 중 기와, 치미, 벽돌 등 건축용 가공품에서 당대의 예술적 정취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 많이 발견된다.   &lt;br /&gt;
&lt;br /&gt;
1100℃ 이상에서 도질토기는 서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초에 가야는 물론 백제와 신라에서도 생산되고, 이후 점진적인 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생산되었고, 고려로 진입하면서 도기로 대체된다.&lt;br /&gt;
&lt;br /&gt;
고려시대 들어와서 도자기는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청자가 이 시대에 생산되었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이다. &lt;br /&gt;
&lt;br /&gt;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청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세계 도자사상 독보적인 상감기법이다.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반쯤 말랐을 때 조각 칼로 음각을 하고,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자토 등을 넣어 문양을 만든 다음 말려서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청자유를 입혀서 재벌구이를 하는 방식이다. &lt;br /&gt;
&lt;br /&gt;
청자의 원류인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명망은 높았다. 고려 청자의 기형은 식기, 다기, 주기, 제기, 불기, 문방구, 베게, 악기, 기와, 향합 등 다양하며, 그 시대 귀족들의 호사스런 생활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청자제작법의 변형인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생산되었다. 왕 실에서는 백자를 선호하여 세종시대부터 궁중의 그릇은 백자만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도자기 수요는 매우 컸다. 왕실, 관아, 향교, 민가의 제기와 식기 등으로 백자가 애용되었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에는 왕실에 백자를 만들어 바치는 중앙관요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 전국에 자기소 136개, 도기소 185개 등 321개의 가마가 있어 전국에 그릇을 공급했다. &lt;br /&gt;
&lt;br /&gt;
상품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여 그릇을 빚고 이를 다시 갑(匣, 匣鉢, 개비)에 넣어 번조하여 그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했다. 이를 갑번(匣燔)이라고 하였고,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백자의 장식은 코발트(회회청)로 그림을 그려 구운 청화백자가 있고, 철사와 진사를 사용하여 검은색과 붉은색을 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분청사기의 전성기에는 활달한 기법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큰 걸작들을 많이 생산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잡혀간 이후에는 생산이 끊어졌다. &lt;br /&gt;
&lt;br /&gt;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서 가마를 열어 일본 도예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미술전집3 - 토기 토우 와박』(진홍섭, 동화출판공사)&lt;br /&gt;
『한국미술전집9 - 고려도자』(최순우, 동화출판공사)&lt;br /&gt;
『한국미술전집9 - 이조도자』(정양모, 동화출판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 전통도예가 담고 있는 미적인 성격과 특징이 무엇이며, 현재에는 어떻게 계승 발전되어오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의 청자는 한국의 도자산업이 도기질-&amp;gt;자기질로 바뀌었으며 이는 생활문화의 발전을 의미한다. 청자가 당시의 생활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구체적인 사례 또는 이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중국에 이어 2번째의 청자 제작국이며 현재까지 청자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과 차별화되는 한국 전통도예의 장점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도예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토기, 도기, 자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시대적 변천과 함께 서술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도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기와 도기에 대한 구분에 대한 설명을 해줄 것&amp;lt;br/&amp;gt;&lt;br /&gt;
- 도예는 사진 자료와 함께 설명해야 이해가 잘 될 수 있는 주제이다. 자료 사진과 함께 설명을 했으면 한다.&amp;lt;br/&amp;gt; &lt;br /&gt;
- 도자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주로 어떤 것이며, 각각이 가지는 의미는? 도자기의 형태의 특징은? 청자와 백자의 대표적인 형태 설명할 것.&amp;lt;br/&amp;gt; &lt;br /&gt;
- ‘갑에 넣어 번조하였다’는 것을 쉽게 풀어 설명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도공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자세히 했으면.&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A%8C%ED%99%94&amp;diff=376</id>
		<title>Draft 회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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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21: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회화&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담징, 아좌태자, 안견, 겸재정선, [[김홍도]], 이정, 강세황, 어몽룡, 이계우, 이인상, 김은호, 강희언, 김윤겸, 최북, 김응환, 정수영, 김석신, [[신사임당]]&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고분벽화, 불교회화, 문인화, 민화, 궁중어용화가, 겸재파화법 &lt;br /&gt;
|물품/도구/유물=몽유도원도, 인왕제색도, 의궤, 법륭사금당벽화, 성덕태자상, 수월관음도, 초충도&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의 전통회화는 중국과의 지리적 문화적 유대 때문에 그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해 왔다. &lt;br /&gt;
&lt;br /&gt;
4세기에서 7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삼국시대의 회화로는 고분의 벽화와 고분 출토 유물의 장식화가 남아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의 생동하는 사신상과 기마수렵인 묘사는 중국의 화풍과는 다른 활달한 개성과 역량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승려화가 담징과 백제의 화가 아좌태자 등 다수의 화가가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담징은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렸고, 아좌태자는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의 회화는 남송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수묵화가 크게 발전하였으나 남아있는 유물이 드물다. 그러나 불교회화(불화)는 많이 남아있다.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 부석사와 수덕사의 벽화는 대표적인 고려시대 불화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회화는 크게 나누어 궁중어용화가들의 그림, 사대부들의 문인화, 서민들의 그림인 민화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은 개국 때부터 도화서란 관청을 두어 궁중화가들을 양성했다. 궁중화가들은 궁중의 의례와 장식에 필요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왕의 초상화(어진)를 그리거나 왕실의 중요 의례행사인 5례(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와 관련된 의궤를 그렸다. 정교한 묘사와 채색은 이들의 특기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회화작품으로 가장 오래된 몽유도원도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안견이 그린 것이다. 조선왕조 말까지 지속된 이 관공서는 풍속화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와 신윤복, 채색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 등 많은 우수한 화가를 배출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는 관료를 시험으로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널리 실시하여왔고, 이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독서계급 계층이 생겼다. 이들의 생활 속에는 늘 지필묵이 가까이 있었고, 시서화를 익히는 것은 기본교양에 속했다. &lt;br /&gt;
&lt;br /&gt;
대부분의 선비들은 시와 글씨의 경지에서 머물렀으나 일부 재능 있는 선비들은 그림도 그려 좋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선비의 교양과 여기에서 탄생한 그림을 문인화라고 부른다. &lt;br /&gt;
&lt;br /&gt;
그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는 조선 중기 이정(李霆)의 묵죽, 어몽룡(魚夢龍)의 묵매, 이계우(李繼祐)의 묵포도, 후기에 활약한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의 산수화가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초기 그림은 대개 중국 그림의 모사 수준에 머문 것이 많았다. 18세기 들어 겸재 정선의 출현과 함께 한국 고유의 산수화가 탄생했다.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은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그가 창시한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은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민화는 민간에서 널리 사랑 받는 그림으로 관혼상제에 쓰이는 병풍이나 민가의 다락방문과 같은 문호에 붙인 그림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수석과 고기, 호랑이와 까치 등이 많이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서양의 나이브 페인팅에 해당하는 민화는 형상물을 도안화하고 단순화하고 화려한 채색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lt;br /&gt;
&lt;br /&gt;
사대부집 규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초충도는 수를 놓기 위한 밑그림인데, 그 중에는 회화수준의 높은 기량을 보인 작품도 많다. 한국의 지폐에 그려진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특히 유명하다. 곤충(나비, 메뚜기, 개구리 등)과 일상에서 만나는 식물(수박, 가지, 오이, 원추리, 도라지꽃 등)이 자주 소재로 등장한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미술전집12 회화(동화출판공사) 최순우 편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음악논고(韓國音樂論攷)』(성경린, 동화출판공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의 전통회화를 시대순으로 설명한다면 각 시대별 회화의 특징에 대해서도 추가 서술할 필요가 있다. 예) 고려시대 회화의 특징은 1) 실용적 기능을 지난 작품뿐 아니라 순수한 여가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 활발히 제작된, 2) 종교화가 발전, 3) 산수화의 제작 등 &lt;br /&gt;
그리고 글에서 “고려시대의 회화는 ~ 남아있는 유물이 전혀 없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공민왕의 ‘수렵도’, 이제현의 ‘기마도강도’, ‘어제비장전변상’, 목판화 등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정적인 서술보다는 현존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미지와 함께 한국 각 시대별 회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한국미술전집12 회화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다. 해당 문헌에서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고려시대 청자에 남아있는 그림으로는 회화라고 할 수 없나요? &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회화에 대한 설명 순서를 궁중어용화가의 그림, 문인화, 민화로 바꾸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중간에 도화서 화원의 설명 뒤 겸재 정선과 겸재파 화가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들의 그림은 어용화가, 문인화, 민화 중에 어디에 포함되는지? 구분을 정확히 하고 문단 간의 이어지는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었으면 한다. 도화서의 화공들의 그림도 민화에 포함된다고 하는데...&amp;lt;br/&amp;gt;&lt;br /&gt;
- 조선회화에 대한 설명으로 김홍도, 신윤복에 대해 미흡한 것이 아쉽다. 조선회화의 양대 거장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이들인 만큼 각각의 화풍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민화의 소재들에 백성의 바람을 담은 상징물임을 설명하고 모란 이외에도 각각의 소재에 대해 설명하면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된다. &amp;lt;br/&amp;gt;&lt;br /&gt;
-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의 회화는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이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되었으면 한다. 특징, 의미 등&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5%AD%EC%95%85&amp;diff=375</id>
		<title>Draft 국악</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5%AD%EC%95%85&amp;diff=375"/>
				<updated>2017-07-30T07:20: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국악&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국악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다. 조선왕조의 궁중에서 각종 의례에 쓰였던 아악과 당악, 속악 등을 포함한 정악과 민속음악으로 크게 나뉜다.   &lt;br /&gt;
&lt;br /&gt;
유가에서는 음악은 인간의 도덕적 교화, 즉 미적 체험을 통한 도덕감의 고양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유교를 국가경영의 원리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실이 앞장서서 궁중음악을 장려했다. &lt;br /&gt;
한글을 창제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세종대왕은 아악을 집대성한 왕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고려왕조 때 송나라에서 들여온 아악은 주로 왕실의 의례와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의 제례에서 연주되었다. 이 음악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고 한국에만 남아있다. 아악보다 먼저 들어 온 당악은 주로 궁중의 조회와 연회에 쓰였다.&lt;br /&gt;
 &lt;br /&gt;
향악(鄕樂)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말한다. 이다. 당악곡은 6음계로 되어있고, 향악곡은 5음계로 되어있다. 향악곡으로 오래된 음악은 정읍(수제천), 동동, 종묘제향악의 향악계 음악을 들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민속음악은 민중의 기층사회에서 형성되고 애호된 음악으로 과거 상층사회에서 애호되던 정악(正樂)에 대한 대칭적인 개념의 전통음악이다. &lt;br /&gt;
민요는 본래 민중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려온 것으로 각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경기민요·서도민요·남도민요로 가른다.&lt;br /&gt;
잡가는 소리꾼들이 부르던, 통절형식(通節形式)의 긴 노래인데, 특히 경기도와 서도에서는 방안에 앉아 부른다고 하여 좌창(坐唱)이라고도 하며, 경기잡가·서도잡가·남도잡가로 나누어진다.&lt;br /&gt;
잡가와 음악형식이 비슷하면서도 야외에서 부르는 노래는 선소리 또는 입창(立唱)이라고 하며, 사설이 산을 주제로 하였기 때문에 산타령이라고도 한다.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이 있으며, 남도의 입창은 산타령이라 하지 않고, 화초사거리라 한다.&lt;br /&gt;
&lt;br /&gt;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이야기를 음악으로 구연하는 장르이다. 표현력이 풍부한 창(노래)과 아니리(말), 사설과 너름새(몸짓) 등으로 엮어진다. 최대 8시간 동안 연행되기도 한다. 판소리의 청중은 구연 중 흥겨울 때 추임새를 넣어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lt;br /&gt;
서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던 판소리는 19세기말께 문학적 내용면에서 더욱 세련되어 도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판소리 소리꾼은 다양하고 독특한 음색을 터득하고 복잡한 내용을 모두 암기하여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lt;br /&gt;
현재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의 다섯마당이 있다.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판소리를 하기 전에 짧게 부르는 단가(短歌)는  서정적인 노래로, 유명한 것만도 수십 가지가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병창(竝唱)은 판소리 중 어느 대목이나 단가를 창자 자신의 가야금 반주로 부르는 소리형식이다.  한 공연자가 반주와 노래를 함께 하므로 지금도 인기가 높다. &lt;br /&gt;
산조(散調)는 남도악의 기악독주곡의 형식으로, 가야금·거문고·대금으로 많이 연주되며, 아쟁·피리·단소·퉁소·호적 등으로도 연주된다.&lt;br /&gt;
무용음악에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타령·굿거리 등과 즉흥합주곡인 시나위가 있다.&lt;br /&gt;
농악과 무악은 가장 일반인들의 생활과 밀착된 음악이다. 농악은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충청북도·경기도와 영동의 농악이 유명하다.  무악(巫樂)은 각종 의식에서 무당이 부르는 무가와 잽이들이 연주하는 반주음악을 말한다.&lt;br /&gt;
&lt;br /&gt;
범패(梵唄)는 사찰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성악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이 즐겨온 음악은 아니지만, 편의상 민속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lt;br /&gt;
국악의 대표적인 악기 편성은 3현6각이다. 향피리 2, 젓대 1, 해금 1, 북 1, 장구 1로 구성된다.  때에 따라서 나발 2, 피리 2, 태평소 2의 편성도 삼현육각이다. 이런 편성을 육잡이 또는 육잽이라고 부른다. 무용·민속극·행악의 기본 악기편성이 삼현육각이다. &lt;br /&gt;
현대의 글로벌한 문화 환경속에서 일반인들이 전통음악을 접하는 기회는 줄어 들고 있지만 국악의 보존과  현대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로 창작국악과 다양한 형태의 연주가 국악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겨레음악대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음악논고(韓國音樂論攷)』(성경린, 동화출판공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국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 국악 종류에 대한 단순 나열보다는 국악의 시대적 특징을 통해 한국의 전통음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 함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하거나 또는 국악의 세부 분류 중 하나를 주제로 삼아 스토리텔링 하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겨레음악대사전에 나와 있는 국악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겨레음악대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향악, 민요, 잡가, 선소리, 판소리, 산조, 농악, 무악은 민속음악에 속하나요? 국악의 구분을 도입부에 설명하였는데, 향악은 설명되지 않았다. &amp;lt;br/&amp;gt;&lt;br /&gt;
- 국악은 원고의 틀을 다시 계획하고 조정했으면 합니다. 국악은 한국의 전통음악으로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 국악의 의미와 종류, 각 종류에 대한 설명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곁들여 체계적으로 설명했으면 합니다.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었을 때 별로 흥미가 일어나지 않으며, 정보의 수준도 낮습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5%AD%EC%95%85&amp;diff=374</id>
		<title>Draft 국악</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5%AD%EC%95%85&amp;diff=374"/>
				<updated>2017-07-30T07:20: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국악&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국악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다. 조선왕조의 궁중에서 각종 의례에 쓰였던 아악과 당악, 속악 등을 포함한 정악과 민속음악으로 크게 나뉜다.   &lt;br /&gt;
&lt;br /&gt;
유가에서는 음악은 인간의 도덕적 교화, 즉 미적 체험을 통한 도덕감의 고양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유교를 국가경영의 원리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실이 앞장서서 궁중음악을 장려했다. &lt;br /&gt;
한글을 창제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세종대왕은 아악을 집대성한 왕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고려왕조 때 송나라에서 들여온 아악은 주로 왕실의 의례와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의 제례에서 연주되었다. 이 음악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고 한국에만 남아있다. 아악보다 먼저 들어 온 당악은 주로 궁중의 조회와 연회에 쓰였다.&lt;br /&gt;
 &lt;br /&gt;
향악(鄕樂)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말한다. 이다. 당악곡은 6음계로 되어있고, 향악곡은 5음계로 되어있다. 향악곡으로 오래된 음악은 정읍(수제천), 동동, 종묘제향악의 향악계 음악을 들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민속음악은 민중의 기층사회에서 형성되고 애호된 음악으로 과거 상층사회에서 애호되던 정악(正樂)에 대한 대칭적인 개념의 전통음악이다. &lt;br /&gt;
민요는 본래 민중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려온 것으로 각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경기민요·서도민요·남도민요로 가른다.&lt;br /&gt;
잡가는 소리꾼들이 부르던, 통절형식(通節形式)의 긴 노래인데, 특히 경기도와 서도에서는 방안에 앉아 부른다고 하여 좌창(坐唱)이라고도 하며, 경기잡가·서도잡가·남도잡가로 나누어진다.&lt;br /&gt;
잡가와 음악형식이 비슷하면서도 야외에서 부르는 노래는 선소리 또는 입창(立唱)이라고 하며, 사설이 산을 주제로 하였기 때문에 산타령이라고도 한다.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이 있으며, 남도의 입창은 산타령이라 하지 않고, 화초사거리라 한다.&lt;br /&gt;
&lt;br /&gt;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이야기를 음악으로 구연하는 장르이다. 표현력이 풍부한 창(노래)과 아니리(말), 사설과 너름새(몸짓) 등으로 엮어진다. 최대 8시간 동안 연행되기도 한다. 판소리의 청중은 구연 중 흥겨울 때 추임새를 넣어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lt;br /&gt;
서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던 판소리는 19세기말께 문학적 내용면에서 더욱 세련되어 도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판소리 소리꾼은 다양하고 독특한 음색을 터득하고 복잡한 내용을 모두 암기하여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lt;br /&gt;
현재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의 다섯마당이 있다.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판소리를 하기 전에 짧게 부르는 단가(短歌)는  서정적인 노래로, 유명한 것만도 수십 가지가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병창(竝唱)은 판소리 중 어느 대목이나 단가를 창자 자신의 가야금 반주로 부르는 소리형식이다.  한 공연자가 반주와 노래를 함께 하므로 지금도 인기가 높다. &lt;br /&gt;
 산조(散調)는 남도악의 기악독주곡의 형식으로, 가야금·거문고·대금으로 많이 연주되며, 아쟁·피리·단소·퉁소·호적 등으로도 연주된다.&lt;br /&gt;
무용음악에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타령·굿거리 등과 즉흥합주곡인 시나위가 있다.&lt;br /&gt;
농악과 무악은 가장 일반인들의 생활과 밀착된 음악이다. 농악은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충청북도·경기도와 영동의 농악이 유명하다.  무악(巫樂)은 각종 의식에서 무당이 부르는 무가와 잽이들이 연주하는 반주음악을 말한다.&lt;br /&gt;
&lt;br /&gt;
 범패(梵唄)는 사찰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성악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이 즐겨온 음악은 아니지만, 편의상 민속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lt;br /&gt;
국악의 대표적인 악기 편성은 3현6각이다. 향피리 2, 젓대 1, 해금 1, 북 1, 장구 1로 구성된다.  때에 따라서 나발 2, 피리 2, 태평소 2의 편성도 삼현육각이다. 이런 편성을 육잡이 또는 육잽이라고 부른다. 무용·민속극·행악의 기본 악기편성이 삼현육각이다. &lt;br /&gt;
현대의 글로벌한 문화 환경속에서 일반인들이 전통음악을 접하는 기회는 줄어 들고 있지만 국악의 보존과  현대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로 창작국악과 다양한 형태의 연주가 국악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겨레음악대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음악논고(韓國音樂論攷)』(성경린, 동화출판공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국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 국악 종류에 대한 단순 나열보다는 국악의 시대적 특징을 통해 한국의 전통음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 함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하거나 또는 국악의 세부 분류 중 하나를 주제로 삼아 스토리텔링 하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겨레음악대사전에 나와 있는 국악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겨레음악대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향악, 민요, 잡가, 선소리, 판소리, 산조, 농악, 무악은 민속음악에 속하나요? 국악의 구분을 도입부에 설명하였는데, 향악은 설명되지 않았다. &amp;lt;br/&amp;gt;&lt;br /&gt;
- 국악은 원고의 틀을 다시 계획하고 조정했으면 합니다. 국악은 한국의 전통음악으로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 국악의 의미와 종류, 각 종류에 대한 설명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곁들여 체계적으로 설명했으면 합니다.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었을 때 별로 흥미가 일어나지 않으며, 정보의 수준도 낮습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C%8B%9D&amp;diff=373</id>
		<title>Draft 한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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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17: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식&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음식은 최근 건강식으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각종 채소를 유산균으로 발효시킨 김치는 한국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며, 불고기 갈비 비빕밥등도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한식이다.  &lt;br /&gt;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내륙은 평야와 산지와 하천으로 되어있어 어패류와 해초류, 농산물, 축산물, 산지채취 나물 및 버섯 등 다양한 식재료가 생산된다. 특히 김치, 나물, 절임, 쌈, 장아찌 등 각종 채소와 산채를 조리하는 방식과 각종 어패류를 젓갈, 염장, 건조하여 보관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해초류 중 김과 김 가공품은 최근 세계적인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아 일본과 러시아 중국 등으로 많은 양이 수출된다. &lt;br /&gt;
식재료를 조미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양조법도 매우 발달하였다. 주재료와 부재료를 배합하고 맛을 보완하는데는 고추 ·후추 ·생강 ·파 ·마늘 ·부추 ·산초와 같은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한다. &lt;br /&gt;
한국음식은 주식, 부식, 후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식은 쌀과 잡곡으로 만든 밥과 죽, 떡과 떡국, 밀가루로 만든 국수류와 만두 등이다. 밥을 상식하고, 그 밖의 것은 필요에 따라 적절히 이용한다. &lt;br /&gt;
&lt;br /&gt;
부식이란 밥에 곁들여서 밥맛을 돋우고 영양분을 보충하는 반찬으로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국물을 위주로 하는 국, 국물과 건더기를 비슷한 양으로 하는 찌개, 국물을 조금 붓고 볶는 전골과 볶음, 불에 직접 굽는 구이와 적, 기름을 두르고 지지는 전, 찜통에다 중탕으로 익히는 찜, 바짝 조리는 조림이 있다. &lt;br /&gt;
알 종류로 만드는 수란·숙란(熟卵), 쇠고기·생선 등을 날것으로 무치는 회(膾), 나물 종류인 생채·숙채, 쇠고기·돼지고기 등을 삶아 눌러서 물기를 빼고 얇게 저민 편육, 쇠(돼지)머리·족·고기 등을 흐무러지게 고아서 뼈를 추려 내고 눌려서 굳힌 족편이 있다. &lt;br /&gt;
양념간을 해서 말렸다가 기름에 튀기는 부각·튀각·자반, 고추장·된장·간장 등에 짭짤하게 절여서 밑반찬으로 쓰는 장아찌, 밥을 싸서 먹는 쌈, 소금에 짜게 절여 발효시켜서 밑반찬이나 김장양념으로 쓰는 젓갈,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반찬으로 채소를 발효시킨 김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후식은 밥을 먹고 난 뒤 입가심으로, 또는 간식으로 먹는 기호음식이다. 떡 종류로 시루떡·인절미·흰떡·절편·송편·경단·단자·약식 등이 있고, 조과류(造果類)에 강정·유밀과·숙실과·다식·정과·엿 등이 있다.&lt;br /&gt;
화채·차(茶)종류에 오미자화채, 꿀화채, 식혜, 수정과, 유자차, 모과차, 생강차, 계피차, 인삼차, 결명자차, 두충차, 녹차 등이 있고, 술 종류로 청주, 약주, 막걸리, 과실주 등이 있다. &lt;br /&gt;
한국음식의 상차리기는 한 상에 차리는 음식 이름의 가짓수를 뜻하기도 하고, 그 음식을 놓는 자리를, 정확히는 설찬(設饌)을 뜻하기도 한다. 상에 차리는 찬의 그릇 수에 따라 삼첩, 오첩, 칠첩, 구첩 반상이 있다. 민간에서는 구첩이 최고이고, 궁중에서는 십이첩으로 수라상을 차렸다. &lt;br /&gt;
한식의 뿌리는 전통적인 서민음식, 양반과 지주 등 상류계층의 음식, 궁중음식의 세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식재료로 보면, 서민들의 식단은 채소와 나물, 두부 콩나물 등 콩 가공식품, 김치와 젓갈 등 발효식품, 절인생선과 해조류(김, 파래 등)를 주로 사용하고, 쇠고기 돼지고기 사용은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반가와 궁중에서는 산과 바다와 경작지에서 나오는 최고급 식재료를 사용하여 사치스러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lt;br /&gt;
&lt;br /&gt;
대중식당에서는 서민들의 일상음식에 가까운 식단을 제공하지만, 고급한식당에서는 반가와 궁중에서 발전시킨 최고급 한식을 맛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한식은 코스별로 제공되는 서양요리와는 달리 식탁에 동시에 제공된다. 최근에는 한식도 코스별로 서브하는 식당이 늘고 있다. &lt;br /&gt;
&lt;br /&gt;
식당에서 파는 한식은 가정식 식단과는 좀 다르다. 서민용 메뉴로는 탕반류(설렁탕, 곰탕, 내장탕, , 꼬리곰탕, 갈비탕, 장국밥), 비빔밥(기내식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면류(냉면, 칼국수, 라면, 메밀국수 등), 가정식과 비슷한 한정식 등이 보편적이다. &lt;br /&gt;
&lt;br /&gt;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는 쇠고기다. 한국인의 쇠고기 요리는 살코기는 물론이고, 내장과 피, 뼈와 꼬리와 발톱 등 거의 모든 부위를 조리하여 먹는다. 쇠고기는 구이(로스구이 소금구이, 양구이, 갈비구이)로 먹거나 삶아서 먹기도 하고(수육) 탕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양념을 하여 구운 불고기와 갈비구이는 국제적으로도 인기 있는 식단이다. &lt;br /&gt;
&lt;br /&gt;
최근에는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요식업쪽으로 진출하여 한식의 품질 고급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창의적인 한식 레시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최근 한식은 영양의 균형이 잘 잡힌 건강식으로 국제적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두산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글의 목적, 주제 또는 메시지를 읽을 수 없으며, 한식의 종류를 나열한 느낌이 강하다. 세계인들이 한식의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고 높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며, 대표적인 한식인 김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전략적으로 한식을 소개할 수 있는 글의 구성 및 내용전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두산백과에 나와 있는 한식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두산백과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외국인에게 한식으로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김치인데, 김치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지역마다 각 지역의 특산 김치가 있으며,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에 따라 같은 배추김치도 들어가는 재료가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 그리고 계절마다 특정 김치를 해 먹으며, 채소가 생산되지 않는 겨울에 먹기 위해 가정마다 ‘김장’을 한다는 것 등을 서술하면 좋겠다. 그리고 과거에는 김장을 땅에 항아리를 묻어 보관하였으나, 현재 한국은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는 가정이 많아 김치를 보관하기 위한 김치냉장고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울 듯.&amp;lt;br/&amp;gt;&lt;br /&gt;
-생일(미역국), 설날(떡국), 정월대보름(오곡밥), 추석(송편), 동지(팥죽) 등 특정일에 먹는 음식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좋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B%B3%B5&amp;diff=372</id>
		<title>Draft 한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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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0T07:16: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복&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전통한복, 개량한복&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복은 한국의 전통 복식을 일컫는다. 현재는 평상복으로는 입지 않고 전통명절인 추석과 설날, 격식을 차리는 혼례, 제례, 상례 때 주로 입는다. &lt;br /&gt;
유교사회이면서 신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의관을 제대로 갖추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의복과 모자는 사농공상의 사회적 신분과 관혼상제 등 의례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승려 기생, 역졸, 보부상 등 특수 계층에 따라 그 종류가 수 백 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입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 전부 사라졌다. 다만 불교의 승려들은 지금도 전통적인 복식을 고수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복은 몸매를 감싸주므로 그 결점을 덮어준다. 그러므로 작은 사람도 크게 보이게 입을 수 있으며, 마른 사람도 풍신하게 보이게 입을 수 있다. 또한 좌식생활에 맞도록 되어있다. &lt;br /&gt;
한복의 직물소재로는 전통적으로 비단, 무명, 모시, 삼베 등이 주로 쓰였다. 간혹 사치스러운 복장에는 담비, 토끼, 여우 등의 모피가 쓰이기도 했다. 겨울 옷은 솜을 넣어 보온을 강화하고 여름 옷은 부유층은 모시를, 서민층은 삼베를 즐겨 입었다. 근대화 이후에는 모직물을 소재로 쓰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여성용 한복 정장은 치마와 저고리, 두루마기로 되어있다. 치마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입으며, 저고리는 기장이 짧고 소매는 넓게 만들어져 있다. 저고리의 소매 끝부분과 겨드랑이 부분에 색깔이 다른 직물을 넣어 멋을 내기도 한다. 이를 끝동과 회장이라고 부른다. 옷을 여미는 데는 단추를 쓰지 않고 장식을 겸한 옷고름을 단다.    &lt;br /&gt;
&lt;br /&gt;
저고리와 두루마기의 목이 닿는 부분은 하얀색 천으로 동정을 단다. 동정이 더럽혀지면 새것으로 갈아서 입는다. 외출할 때는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예의였다. &lt;br /&gt;
&lt;br /&gt;
멋을 내기 위해 머리에 조바위를 쓰고 저고리 위에 모피로 안을 댄 조끼를 입기도 한다. 발에는 버선을 신고 굽이 없는 고무신을 신는다.  &lt;br /&gt;
&lt;br /&gt;
여자 어린이의 한복은 무지개 색 줄무늬의 색동저고리 등 색상이 매우 화려하다. 신혼의 여성은 녹의홍상이라 하여 초록색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 연로한 여성들은 색상이 요란하지 않게 입는 것이 상식이었다. 근대화 이후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긴치마대신 짧은 검정색 치마를 입고 밝은 빛 저고리를 입었다.     &lt;br /&gt;
&lt;br /&gt;
남성용 정장은 바지와 저고리와 두루마기로 되어있다. 바지는 기마민족의 전통에서 온듯 통이 넓고 헐렁헐렁하다. 이 때문에 좌식생활에도 잘 맞는다. 바지는 발목 부분에서 대님이라는 직물 끈으로 졸라매게 되어있다. 저고리는 여성의 것보다 기장이 길다. 조끼는 서양 복식에서 모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남성이 저고리 위에 헐렁하게 걸치는 마고자는 집안에서 입는 옷으로 외출할 때는 입지 않는다.  외출을 할 때는 반드시 두루마기를 걸치는 것이 예법에 맞는다. 최근에는 두루마기 소재로 모직물이 많이 사용된다. 남성의 저고리와 두루마기에도 동정을 단다. 발에는 버선을 신고 고무신, 구두 등을 신었다. 요즘은 양말과 구두를 신는다.    &lt;br /&gt;
&lt;br /&gt;
근대화 이전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한복은 물감을 들이지 않은 흰색이 주종이었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복 외에는 백색 옷을 찾아보기 어렵다. &lt;br /&gt;
&lt;br /&gt;
최근에는 개량한복이라는 이름아래 전통한복을 모체로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한복이 인기를 끌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amp;quot;[http://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quo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복에 대한 설명은 잘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복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미지와 영상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한국문화원’, ‘한복진흥센터’의 한복소개, 자료실의 영상자료 등의 영상자료와 추가 읽기자료를 제공한다면 더 유용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lt;br /&gt;
또한 최근 경복궁, 인사동, 전주한옥마을 등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일상 또는 주요 장소에서 한복이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자료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한복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여름 옷 소재를 부유층과 서민층으로 나눈 것처럼, 겨울옷도 비단과 무명으로 나누어 서술할 것&lt;br /&gt;
- 폐백할 때 신랑 신부가 입는 혼례복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좋을 듯하다. &lt;br /&gt;
- 조바위는 멋을 내기 위해 썼던 것보다 부녀자가 방한용으로 사용한 모자로 모든 계층에서 착용하였다. &lt;br /&gt;
- 양반 여성의 경우 남녀유별의 성리학 이념으로 인해 장옷 또는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렸던 것을 서술하면 좋겠다.&lt;br /&gt;
- 여성의 한복 장식품으로 노리개에 대해 서술하며, 여성들이 기원하는 마음을 노리개의 형상(고추, 가지, 박쥐, 원앙 등등)으로 표현했음을 서술해도 흥미가 있을 듯하다. 이로써 당시 과거 여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상도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 내용은 크게 문제가 없으나,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윤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365</id>
		<title>Draft 88 서울올림픽</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365"/>
				<updated>2017-07-29T06:15: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김현규 (토론)의 364판 편집을 되돌림&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우]], UN총회 &lt;br /&gt;
|장소/공간=바덴바덴, 모스크바, 소련, 로스앤젤레스, 동유럽, 멕시코, 헝가리,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 중국&lt;br /&gt;
|사건=아프가니스탄 침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화합과 전진, [[냉전]], 분단 국가, 선진국, 후진국, 개발도상국, 정식 종목, 시범 종목, 전시 종목&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lt;br /&gt;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첫째, 동서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제24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lt;br /&gt;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서울올림픽 개최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졌다.&lt;br /&gt;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로써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희망하는 민족임을 실천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정한 것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국민의 적극적인 자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상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을 세계 여러 나라에 드러내 보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기로 여겨졌던 공산권 예술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나라 문화 예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헝가리와는 무역대표부 설치로 통상의 길을 열었고, 동독 · 유고슬라비아 ·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왔다.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중국은 한국의 기술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 경제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현상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직접 사용해 본 한국 상품에 대한 신용도가 높아졌고, 그 기술에 대한 신뢰도 커진 덕분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임자 올림픽 한 번 해보지』(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13)&lt;br /&gt;
*『서울 올림픽 성공스토리』(전상진, 홍진, 2011)&lt;br /&gt;
*『88서울올림픽 그 성공비화』(리처드 W. 파운드 저·최보은 역, 예음, 1995)&lt;br /&gt;
*『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박세직, 고려서적, 1991)&lt;br /&gt;
*『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정책보고 89-01(김종기, 한국개발연구원, 1989)&lt;br /&gt;
*『서울올림픽의 국가발전적 의의』정책보고 87-01(서상목, 한국개발연구원, 1987)&lt;br /&gt;
*「서울올림픽 유치의 정치외교사」(김명섭·양준석, 『국제정치논총』54-4, 2014)&lt;br /&gt;
*「한국 스포츠외교의 태동: 서울올림픽 유치의 유산」(박경호·옥광·박장규, 『한국체육사학회지』16-2, 2011)&lt;br /&gt;
*「국가 도약의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김종해, 『국회보』, 2010)&lt;br /&gt;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이윤근·김명수, 『한국교육문제연구』6, 199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이므로 재집필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은 88올림픽의 의미로 맨 뒤에 서술해도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364</id>
		<title>Draft 88 서울올림픽</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364"/>
				<updated>2017-07-29T06:09: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우]], UN총회 &lt;br /&gt;
|장소/공간=바덴바덴, 모스크바, 소련, 로스앤젤레스, 동유럽, 멕시코, 헝가리,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 중국&lt;br /&gt;
|사건=아프가니스탄 침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화합과 전진, [[냉전]], 분단 국가, 선진국, 후진국, 개발도상국, 정식 종목, 시범 종목, 전시 종목&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lt;br /&gt;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첫째, 동서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제24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lt;br /&gt;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서울올림픽 개최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졌다.&lt;br /&gt;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로써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희망하는 민족임을 실천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정한 것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국민의 적극적인 자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상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을 세계 여러 나라에 드러내 보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기로 여겨졌던 공산권 예술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나라 문화 예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헝가리와는 무역대표부 설치로 통상의 길을 열었고, 동독 · 유고슬라비아 ·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왔다.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중국은 한국의 기술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 경제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현상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직접 사용해 본 한국 상품에 대한 신용도가 높아졌고, 그 기술에 대한 신뢰도 커진 덕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임자 올림픽 한 번 해보지』(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13)&lt;br /&gt;
*『서울 올림픽 성공스토리』(전상진, 홍진, 2011)&lt;br /&gt;
*『88서울올림픽 그 성공비화』(리처드 W. 파운드 저·최보은 역, 예음, 1995)&lt;br /&gt;
*『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박세직, 고려서적, 1991)&lt;br /&gt;
*『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정책보고 89-01(김종기, 한국개발연구원, 1989)&lt;br /&gt;
*『서울올림픽의 국가발전적 의의』정책보고 87-01(서상목, 한국개발연구원, 1987)&lt;br /&gt;
*「서울올림픽 유치의 정치외교사」(김명섭·양준석, 『국제정치논총』54-4, 2014)&lt;br /&gt;
*「한국 스포츠외교의 태동: 서울올림픽 유치의 유산」(박경호·옥광·박장규, 『한국체육사학회지』16-2, 2011)&lt;br /&gt;
*「국가 도약의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김종해, 『국회보』, 2010)&lt;br /&gt;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이윤근·김명수, 『한국교육문제연구』6, 199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이므로 재집필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은 88올림픽의 의미로 맨 뒤에 서술해도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363</id>
		<title>Draft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363"/>
				<updated>2017-07-29T06:08: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대의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lt;br /&gt;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lt;br /&gt;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기독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신교,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lt;br /&gt;
&lt;br /&gt;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선교사가 입국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lt;br /&gt;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스페인인 종군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을 뿐이다.&lt;br /&gt;
&lt;br /&gt;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조선 사신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스스로 접근했다. 선교사들도 스스로 찾아온 사신들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는 가장 훌륭한 선교의 대상이었으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신도가 되지 못했다. 학자들이기도 했던 사신들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서적을 국내로 들려왔고, 종교보다는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고, 5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lt;br /&gt;
&lt;br /&gt;
로마 교황청은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에 이어 2014년 8월 16일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실학이란 명분으로 초기 도입된 가톨릭교는 피를 흘리며 조선에 정착,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lt;br /&gt;
&lt;br /&gt;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알렌이었지만 그는 외교관 신분이었고,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됐다. 이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 신교는 이를 기준으로 하여 두 해의 중간인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종교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교는 동포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2,600여명의 순교자 중 600여명이 헌정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신교는 한국에서 신도의 수가 967만 여명으로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대형교회는 신도가 10만 명을 넘는 곳도 있다.&lt;br /&gt;
&lt;br /&gt;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lt;br /&gt;
&lt;br /&gt;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https://www.mdsd.or.k 명동대성당]&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출처 및 근거자료가 통계청만 제시되어 있다. 이 글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amp;lt;br/&amp;gt;&lt;br /&gt;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amp;lt;br/&amp;gt;&lt;br /&gt;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amp;lt;br/&amp;gt;&lt;br /&gt;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amp;lt;br/&amp;gt;&lt;br /&gt;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296</id>
		<title>Draft 88 서울올림픽</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296"/>
				<updated>2017-07-27T17:13: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우]], UN총회 &lt;br /&gt;
|장소/공간=바덴바덴, 모스크바, 소련, 로스앤젤레스, 동유럽, 멕시코, 헝가리,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 중국&lt;br /&gt;
|사건=아프가니스탄 침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화합과 전진, [[냉전]], 분단 국가, 선진국, 후진국, 개발도상국, 정식 종목, 시범 종목, 전시 종목&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lt;br /&gt;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첫째, 동서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제24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lt;br /&gt;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서울올림픽 개최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졌다.&lt;br /&gt;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로써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희망하는 민족임을 실천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정한 것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국민의 적극적인 자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상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lt;br /&gt;
&lt;br /&gt;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을 세계 여러 나라에 드러내 보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기로 여겨졌던 공산권 예술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나라 문화 예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헝가리와는 무역대표부 설치로 통상의 길을 열었고, 동독 · 유고슬라비아 ·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왔다.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중국은 한국의 기술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 경제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현상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직접 사용해 본 한국 상품에 대한 신용도가 높아졌고, 그 기술에 대한 신뢰도 커진 덕분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임자 올림픽 한 번 해보지』(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13)&lt;br /&gt;
*『서울 올림픽 성공스토리』(전상진, 홍진, 2011)&lt;br /&gt;
*『88서울올림픽 그 성공비화』(리처드 W. 파운드 저·최보은 역, 예음, 1995)&lt;br /&gt;
*『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박세직, 고려서적, 1991)&lt;br /&gt;
*『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정책보고 89-01(김종기, 한국개발연구원, 1989)&lt;br /&gt;
*『서울올림픽의 국가발전적 의의』정책보고 87-01(서상목, 한국개발연구원, 1987)&lt;br /&gt;
*「서울올림픽 유치의 정치외교사」(김명섭·양준석, 『국제정치논총』54-4, 2014)&lt;br /&gt;
*「한국 스포츠외교의 태동: 서울올림픽 유치의 유산」(박경호·옥광·박장규, 『한국체육사학회지』16-2, 2011)&lt;br /&gt;
*「국가 도약의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김종해, 『국회보』, 2010)&lt;br /&gt;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이윤근·김명수, 『한국교육문제연구』6, 199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이므로 재집필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은 88올림픽의 의미로 맨 뒤에 서술해도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88_%EC%84%9C%EC%9A%B8%EC%98%AC%EB%A6%BC%ED%94%BD&amp;diff=295</id>
		<title>Draft 88 서울올림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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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7:12: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 |집필자=황인희 |인물/기관/단체=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우]], UN총회 &lt;br /&gt;
|장소/공간=바덴바덴, 모스크바, 소련, 로스앤젤레스, 동유럽, 멕시코, 헝가리,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 중국&lt;br /&gt;
|사건=아프가니스탄 침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화합과 전진, [[냉전]], 분단 국가, 선진국, 후진국, 개발도상국, 정식 종목, 시범 종목, 전시 종목&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lt;br /&gt;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lt;br /&gt;
&amp;lt;ins&amp;gt;첫째, 동서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제24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lt;br /&gt;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서울올림픽 개최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졌다.&lt;br /&gt;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로써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희망하는 민족임을 실천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정한 것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국민의 적극적인 자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상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amp;lt;/ins&amp;gt;&lt;br /&gt;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lt;br /&gt;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lt;br /&gt;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lt;br /&gt;
&amp;lt;ins&amp;gt;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을 세계 여러 나라에 드러내 보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기로 여겨졌던 공산권 예술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나라 문화 예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헝가리와는 무역대표부 설치로 통상의 길을 열었고, 동독 · 유고슬라비아 ·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왔다.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중국은 한국의 기술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 경제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현상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직접 사용해 본 한국 상품에 대한 신용도가 높아졌고, 그 기술에 대한 신뢰도 커진 덕분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임자 올림픽 한 번 해보지』(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13)&lt;br /&gt;
*『서울 올림픽 성공스토리』(전상진, 홍진, 2011)&lt;br /&gt;
*『88서울올림픽 그 성공비화』(리처드 W. 파운드 저·최보은 역, 예음, 1995)&lt;br /&gt;
*『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박세직, 고려서적, 1991)&lt;br /&gt;
*『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정책보고 89-01(김종기, 한국개발연구원, 1989)&lt;br /&gt;
*『서울올림픽의 국가발전적 의의』정책보고 87-01(서상목, 한국개발연구원, 1987)&lt;br /&gt;
*「서울올림픽 유치의 정치외교사」(김명섭·양준석, 『국제정치논총』54-4, 2014)&lt;br /&gt;
*「한국 스포츠외교의 태동: 서울올림픽 유치의 유산」(박경호·옥광·박장규, 『한국체육사학회지』16-2, 2011)&lt;br /&gt;
*「국가 도약의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김종해, 『국회보』, 2010)&lt;br /&gt;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이윤근·김명수, 『한국교육문제연구』6, 199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이므로 재집필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은 88올림픽의 의미로 맨 뒤에 서술해도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IMF_%EA%B2%BD%EC%A0%9C%EC%9C%84%EA%B8%B0%EC%99%80_%EA%B8%88%EB%AA%A8%EC%9C%BC%EA%B8%B0%EC%9A%B4%EB%8F%99&amp;diff=292</id>
		<title>Draft IMF 경제위기와 금모으기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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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7:08: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IMF금융위기와 금모으기운동&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새마을운동]], [[국채보상운동]]&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아시아 각국으로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한국경제의 건전성에도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이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런 위기를 지켜본 국민들은 나라를 경제위기에서 구하자는 애국심에서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 국운이 기운 대한제국의 국채를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벌인 애국운동이었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귀금속과 기부금을 자발적으로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lt;br /&gt;
&lt;br /&gt;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lt;br /&gt;
&lt;br /&gt;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lt;br /&gt;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lt;br /&gt;
&lt;br /&gt;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amp;quot;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lt;br /&gt;
&lt;br /&gt;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lt;br /&gt;
&lt;br /&gt;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이 운동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금을 수출해서 외환으로 바꾸는 것을 우선한 탓에 모인 금의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으로 팔아버렸다는 주장이다. 지나치게 많은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져서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국제시장에 227t의 금이 갑자기 쏟아진다면 금값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단시일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두산백과&lt;br /&gt;
*위키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민의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므로 이 문단의 내용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인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의 문단을 맨 마지막 문단과 같이 묶어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글을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IMF_%EA%B2%BD%EC%A0%9C%EC%9C%84%EA%B8%B0%EC%99%80_%EA%B8%88%EB%AA%A8%EC%9C%BC%EA%B8%B0%EC%9A%B4%EB%8F%99&amp;diff=291</id>
		<title>Draft IMF 경제위기와 금모으기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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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7:08: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IMF금융위기와 금모으기운동 |집필자=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장소/공간= |사건= |기록물= |개념용어=새마을운동, 국...&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IMF금융위기와 금모으기운동&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새마을운동]], [[국채보상운동]]&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아시아 각국으로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한국경제의 건전성에도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이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런 위기를 지켜본 국민들은 나라를 경제위기에서 구하자는 애국심에서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 국운이 기운 대한제국의 국채를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벌인 애국운동이었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귀금속과 기부금을 자발적으로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lt;br /&gt;
&lt;br /&gt;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lt;br /&gt;
&lt;br /&gt;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lt;br /&gt;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lt;br /&gt;
&lt;br /&gt;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amp;quot;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lt;br /&gt;
&lt;br /&gt;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lt;br /&gt;
&lt;br /&gt;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이 운동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금을 수출해서 외환으로 바꾸는 것을 우선한 탓에 모인 금의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으로 팔아버렸다는 주장이다. 지나치게 많은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져서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국제시장에 227t의 금이 갑자기 쏟아진다면 금값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lt;br /&gt;
&lt;br /&gt;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단시일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두산백과&lt;br /&gt;
*위키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민의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므로 이 문단의 내용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인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의 문단을 맨 마지막 문단과 같이 묶어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글을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289</id>
		<title>Draft 2002 한일월드컵</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289"/>
				<updated>2017-07-27T17:05: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2002년 월드컵대회&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붉은 악마]], [[FIFA]], [[거스 히딩크]]&lt;br /&gt;
|장소/공간=[[취리히]], [[부산]], 프랑스, 요코하마, [[광화문]], [[서울 광장]]&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된 제17회 월드컵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주최국으로 결정된 것은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축구연맹 본부에서 열린 FIFA 집행위원회에서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였으며,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였다.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며 대회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2000년 3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대륙별 지역 예선이 실시되었고, 2001년 12월 1일 부산에서 29개 본선 진출 팀과 개최국(한국과 일본), 지난 대회 우승국(프랑스) 등을 포함한 총 32개 팀이 조 추첨을 했다. 추첨 결과에 따른 본선 조별 리그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64경기가 펼쳐졌다. 양국의 합의에 따라 개막식 및 개막전은 2002년 5월 31일 서울에서, 결승전은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르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고,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한국이 4위를 차지하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은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루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 특히 세계인의 눈길은 끈 것은 한국의 응원 문화이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많은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전국에서 길거리 응원을 펼쳤다. 이 길거리 응원은 ‘붉은 악마’라는 단체가 주도하였다.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 국가 대표 선수들을 조직적으로 응원하고자 만들어진, 비상업적 · 비정치적 활동을 지향하는 민간 단체이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팀을 현지 언론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적극적 참여를 통해 축구를 즐기려는 축구팬들에 의해 구성된 단체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 활동 원칙을 중시하고 폭력적 응원 문화로 변질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규모 동호회와도 같은 성격의 붉은 악마는 축구 관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국민의 염원을 한 데 모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해왔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서울 시청 앞 광장(서울 광장)이나 광화문과 같이 인파가 많이 모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조직적으로 응원을 주도하였다. 길거리 응원의 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서울광장, 광화문, 대학로는 물론, 전국의 체육관이나 학교 운동장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장소에 모였다. 그곳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lt;br /&gt;
&lt;br /&gt;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시작할 무렵 응원단은 5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 팀이 계속 승리하고 선전을 거듭하자 마지막에는 전 국민의 20%인 700만 명까지 응원에 참여하였다. 결국 2002년 월드컵은 국민 대부분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참여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길거리 응원으로 월드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함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 행사가 될 수 있었다. 길거리 응원은 현재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응원을 상징하는 고유 문화로 자리잡았다. &lt;br /&gt;
&lt;br /&gt;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로 한국은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4강 신화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렬한 길거리 응원은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한국 국민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붉은악마와 월드컵』(이순형,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lt;br /&gt;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정치사회적 담론: 19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을 중심으로」(박보현,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2002 월드컵의 주역 선수들 몇몇 이름 적어주면 어떨까?&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2002_%ED%95%9C%EC%9D%BC%EC%9B%94%EB%93%9C%EC%BB%B5&amp;diff=288</id>
		<title>Draft 2002 한일월드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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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7:05: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2002년 월드컵대회 |집필자=황인희 |인물/기관/단체=붉은 악마, FIFA, 거스 히딩크 |장소/...&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2002년 월드컵대회&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붉은 악마]], [[FIFA]], [[거스 히딩크]]&lt;br /&gt;
|장소/공간=[[취리히]], [[부산]], 프랑스, 요코하마, [[광화문]], [[서울 광장]]&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된 제17회 월드컵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주최국으로 결정된 것은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축구연맹 본부에서 열린 FIFA 집행위원회에서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였으며,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였다.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며 대회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2000년 3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대륙별 지역 예선이 실시되었고, 2001년 12월 1일 부산에서 29개 본선 진출 팀과 개최국(한국과 일본), 지난 대회 우승국(프랑스) 등을 포함한 총 32개 팀이 조 추첨을 했다. 추첨 결과에 따른 본선 조별 리그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64경기가 펼쳐졌다. 양국의 합의에 따라 개막식 및 개막전은 2002년 5월 31일 서울에서, 결승전은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치르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고,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한국이 4위를 차지하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은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루었다. &lt;br /&gt;
&lt;br /&gt;
이 대회에서 특히 세계인의 눈길은 끈 것은 한국의 응원 문화이다. 월드컵 대회 기간 중 많은 인파가 붉은 옷을 입고 전국에서 길거리 응원을 펼쳤다. 이 길거리 응원은 ‘붉은 악마’라는 단체가 주도하였다.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 국가 대표 선수들을 조직적으로 응원하고자 만들어진, 비상업적 · 비정치적 활동을 지향하는 민간 단체이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팀을 현지 언론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적극적 참여를 통해 축구를 즐기려는 축구팬들에 의해 구성된 단체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 활동 원칙을 중시하고 폭력적 응원 문화로 변질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규모 동호회와도 같은 성격의 붉은 악마는 축구 관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국민의 염원을 한 데 모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해왔다.&lt;br /&gt;
&lt;br /&gt;
붉은 악마는 서울 시청 앞 광장(서울 광장)이나 광화문과 같이 인파가 많이 모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조직적으로 응원을 주도하였다. 길거리 응원의 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서울광장, 광화문, 대학로는 물론, 전국의 체육관이나 학교 운동장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장소에 모였다. 그곳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lt;br /&gt;
&lt;br /&gt;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시작할 무렵 응원단은 5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 팀이 계속 승리하고 선전을 거듭하자 마지막에는 전 국민의 20%인 700만 명까지 응원에 참여하였다. 결국 2002년 월드컵은 국민 대부분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참여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길거리 응원으로 월드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함께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 행사가 될 수 있었다. 길거리 응원은 현재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응원을 상징하는 고유 문화로 자리잡았다. &lt;br /&gt;
&lt;br /&gt;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로 한국은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4강 신화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렬한 길거리 응원은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한국 국민들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붉은악마와 월드컵』(이순형,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lt;br /&gt;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정치사회적 담론: 1988 서울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을 중심으로」(박보현,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2002 월드컵의 주역 선수들 몇몇 이름 적어주면 어떨까?&amp;lt;br/&amp;gt;&lt;br /&gt;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283</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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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0년대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으로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가요의 인기가 높아져서 K-p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최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영화,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http://www.edunet.net)&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권석정 외(2015.).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lt;br /&gt;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2016.). 『2015 음악 산업백서』.&lt;br /&gt;
*박영웅 외(2015.).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lt;br /&gt;
*유동길(2015.).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lt;br /&gt;
*임진모(2014.).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lt;br /&gt;
*장유정 · 서병기(2015.).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lt;br /&gt;
*정혜승(2011.).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lt;br /&gt;
*최광식(2013.).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lt;br /&gt;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2015.).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lt;br /&gt;
*한국콘텐츠진흥원(2015.).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lt;br /&gt;
*Euny Hong 저, 정미현 역(2014.).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2015.).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282</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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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57: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style=&amp;quot;margin: 0 auto;&amp;quot;&lt;br /&gt;
|[[File:gangnam1.png|섬네일|350px|메타데이터]]&lt;br /&gt;
|[[File:gangnam2.png|섬네일|350px|메타데이터 작성양식]]&lt;br /&gt;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0년대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으로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가요의 인기가 높아져서 K-p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최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영화,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http://www.edunet.net)&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권석정 외(2015.).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lt;br /&gt;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2016.). 『2015 음악 산업백서』.&lt;br /&gt;
*박영웅 외(2015.).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lt;br /&gt;
*유동길(2015.).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lt;br /&gt;
*임진모(2014.).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lt;br /&gt;
*장유정 · 서병기(2015.).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lt;br /&gt;
*정혜승(2011.).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lt;br /&gt;
*최광식(2013.).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lt;br /&gt;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2015.).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lt;br /&gt;
*한국콘텐츠진흥원(2015.).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lt;br /&gt;
*Euny Hong 저, 정미현 역(2014.).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2015.).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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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56: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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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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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style=&amp;quot;margin: 0 auto;&amp;quot;&lt;br /&gt;
|[[File:gangnam1.JPG|섬네일|350px|메타데이터]]&lt;br /&gt;
|[[File:gangnam2.JPG|섬네일|350px|메타데이터 작성양식]]&lt;br /&gt;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0년대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으로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가요의 인기가 높아져서 K-p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최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영화,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http://www.edunet.net)&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권석정 외(2015.).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lt;br /&gt;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2016.). 『2015 음악 산업백서』.&lt;br /&gt;
*박영웅 외(2015.).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lt;br /&gt;
*유동길(2015.).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lt;br /&gt;
*임진모(2014.).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lt;br /&gt;
*장유정 · 서병기(2015.).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lt;br /&gt;
*정혜승(2011.).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lt;br /&gt;
*최광식(2013.).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lt;br /&gt;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2015.).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lt;br /&gt;
*한국콘텐츠진흥원(2015.).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lt;br /&gt;
*Euny Hong 저, 정미현 역(2014.).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2015.).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278</id>
		<title>Draft 강남스타일과 한류 열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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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53: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0년대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으로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가요의 인기가 높아져서 K-p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최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영화,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http://www.edunet.net)&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권석정 외(2015.).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lt;br /&gt;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2016.). 『2015 음악 산업백서』.&lt;br /&gt;
*박영웅 외(2015.).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lt;br /&gt;
*유동길(2015.).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lt;br /&gt;
*임진모(2014.).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lt;br /&gt;
*장유정 · 서병기(2015.).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lt;br /&gt;
*정혜승(2011.).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lt;br /&gt;
*최광식(2013.).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lt;br /&gt;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2015.).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lt;br /&gt;
*한국콘텐츠진흥원(2015.).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lt;br /&gt;
*Euny Hong 저, 정미현 역(2014.).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2015.).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 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0%95%EB%82%A8%EC%8A%A4%ED%83%80%EC%9D%BC%EA%B3%BC_%ED%95%9C%EB%A5%98_%EC%97%B4%ED%92%8D&amp;diff=275</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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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강남스타일과 한류열풍&lt;br /&gt;
|집필자=정경란&lt;br /&gt;
|인물/기관/단체=싸이, 신경숙, 전지현, 세종학당&lt;br /&gt;
|장소/공간=강남&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핀란드교과서의 &amp;lt;강남스타일&amp;gt;내용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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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도구/유물=대장금, 엄마를 부탁해, 별에서 온 그대, 겨울연가, 사랑이 뭐길래&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2012년 7월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싸이(Psy)의 노래이다. 이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유튜브(Youtube)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17년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8억을 돌파하여 유튜브 조회수의 한계를 바꿔놓았고, 이는 유튜브를 통해서 손쉽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리듬, 신나는 말춤과 코믹한 노래 가사로 세계인들의 인기를 얻었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덕분에 서울의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들은 강남을 가보고 싶어 했으며, 강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도시에 왔다는 기쁨에 거리에서 ‘Gangnam’ 이라는 글자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말춤을 추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amp;lt;강남스타일&amp;gt;을 패러디한 동영상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가수 싸이를 통한 직・간접적 경제적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옴으로써 문화와 미디어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amp;lt;강남스타일&amp;gt;의 가사중의 ‘오빤 강남스타일’에서 외국인들은 ‘오빠’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amp;lt;강남스타일&amp;gt; 노래를 통해 한국의 존칭예절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핀란드 교과서에도 싸이와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수록될 정도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노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강남스타일&amp;gt;은 한국의 가요인 K-pop으로 &amp;lt;강남스타일&amp;gt;이 유명해지기 전, 이미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류(Korean Wave)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드라마 &amp;lt;사랑이 뭐길래&amp;gt;가 홍콩, 중국 등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0년대 드라마 &amp;lt;대장금&amp;gt;으로 우리나라의 한식과 궁중의 문화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개국에서 사랑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번 이상 재방송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생겨나고 김치와 김, 라면, 음료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한국 제품에 대한 구입도 급증하였다. &amp;lt;대장금&amp;gt;은 우리 전통 음식문화를 콘텐츠로 드라마가 단순히 우리 국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드라마 &amp;lt;겨울연가&amp;gt;는 일본 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문화콘텐츠의 수출에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amp;lt;별에서 온 그대&amp;gt;에서 ‘눈오는 날엔 치맥이 짱인데’라는 전지현의 명대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치맥 열풍이 불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드라마와 함께 한류 열풍을 이끌어 온 것은 한국 가요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가요의 인기가 높아져서 K-p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K-pop 열풍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와 일사 분란한 군무는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최근 유튜브 같은 동영상 전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SNS)가 활성화되면서 K-pop이 더 확산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드라마, 한국 가요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글, 한식, 영화, 한국문학, 한국교육, 게임, 애니메이션, 순수예술 등 한국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 &amp;lt;엄마를 부탁해&amp;gt;가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55위를 기록하였고, 아마존 올해의 책 문학부문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교육을 하는 세종학당은 2008년 17개소에 불과하던 것이 2016년 174개소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한류로 인해 세계인들은 냉장고, TV 등의 가전제품과, 휴대폰, 자동차 등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어 학원이 늘고 있고, 세계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계속 개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K-pop 콘서트나 드라마, 영화 시사회와 같은 다양한 한류 문화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에듀넷(http://www.edunet.net)&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권석정 외(2015.).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 서울: 토토북.&lt;br /&gt;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콘텐츠진흥원(2016.). 『2015 음악 산업백서』.&lt;br /&gt;
*박영웅 외(2015.).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 서울: 마리북스.&lt;br /&gt;
*유동길(2015.). 『K-POP 뮤직 비즈니스의 이해』. 서울: 엑시무.&lt;br /&gt;
*임진모(2014.). 『팝, 경제를 노래하다』. 서울: 아트북스.&lt;br /&gt;
*장유정 · 서병기(2015.).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서울: 성안당.&lt;br /&gt;
*정혜승(2011.). 『킬러 콘텐츠 승부사들』. 서울: (주)다산북스.&lt;br /&gt;
*최광식(2013.). 『한류로드 :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융화』. 서울: 나남.&lt;br /&gt;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2015.). 『2014 대한민국 한류백서』.&lt;br /&gt;
*한국콘텐츠진흥원(2015.). 한류 20년을 빛낸 K-콘텐츠. 2015 제1차 K-컬처 정책포럼.&lt;br /&gt;
*Euny Hong 저, 정미현 역(2014.). 『코리안 쿨: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강국 ‘코리아’ 탄생기』. 서울: 원더박스.&lt;br /&gt;
*Starr, Larry &amp;amp; Waterman, Christopher, 김영대 · 조일동 역(2015.). 『미국 대중음악』. 서울: 한울.&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기존의 원고들과 다른 문체로 쓰여져 있어 이를 수정하였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 자료로 “http://www.edunet.net”을 제시하고 있는데, 해당 사이트의 어떤 부분에서 인용 또는 발췌한 것인지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 강남은 전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유명한 지역, 유명한 공간.&amp;lt;br/&amp;gt;&lt;br /&gt;
- &amp;lt;겨울연가&amp;gt;가 &amp;lt;대장금&amp;gt;보다 먼저 방송되었고, 해외 진출도 일찍 했으니, 먼저 서술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한류열풍이 부는 이유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 있나요? 이에 대해서 정리하였으면 합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또한 시기별 한류의 중심에 있는 분야(드라마, 노래, 영화 등)의 변천도 정리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마지막에 한류에 대한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인이 해야 할 노력, 각오, 계획 등도 서술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4%9B%EB%B6%88_%EB%AF%BC%EC%A3%BC%EC%A3%BC%EC%9D%98&amp;diff=270</id>
		<title>Draft 촛불 민주주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4%9B%EB%B6%88_%EB%AF%BC%EC%A3%BC%EC%A3%BC%EC%9D%98&amp;diff=270"/>
				<updated>2017-07-27T16:4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 출처 및 관련자료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촛불 민주주의&lt;br /&gt;
|집필자=임미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최순실, [[박근혜]], 정유라, 우병우, 문고리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안종범, 이재용,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헌법재판소]], [[국회]]&lt;br /&gt;
|장소/공간=[[광화문광장]], [[청와대]], [[서울광장]], [[청계광장]], [[경복궁역]],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신교동 로터리&lt;br /&gt;
|사건=[[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미선-효순이 사건),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건]], [[최순실 게이트]]&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촛불집회]](candlelight vigil), [[민중총궐기]], 대통령 탄핵소추, [[특검]], 탄핵심판&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1992년 인터넷 서비스망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하여 열린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미선·효순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2002년 11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렸을 때이다. 이때 열린 촛불집회는 과거의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평화적 시위를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으며, 이후 한국의 대표적 집회 및 시위 문화로 자리를 잡아갔다. 2002년 외에는 2004년 3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5월 2일부터 2개월 간 지속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진 운동으로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에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lt;br /&gt;
&lt;br /&gt;
대규모적인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 여론에 압박을 받은 여야가 2016년 11월 17일 이른바 최순실 특검법(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국정조사 실시에 합의했다. 이후 11월 30일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을 특별검사로 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특검팀이 공식 출범했다. 여기에 11월 17일 국정조사 계획안이 통과돼 2017년 1월 15일까지 총 60일간 국정조사가 진행됐으며 12월 6일 1차 청문회에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등 9개의 대기업 총수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기업 총수들이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것은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이었다.&lt;br /&gt;
&lt;br /&gt;
12월 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을 제외한 299명이 참여해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통과됐다. 총 129석의 새누리당 의원 중 상당수가 찬성표를 던진 결과였다. 이에 곧바로 박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고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 이관됐다.&lt;br /&gt;
&lt;br /&gt;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진행하는 동안 122명의 특검팀은 삼성그룹과 국민연금이 연루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뇌물공여, 문화계 블랙리스트,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입시·학사 비리, 최 씨의 국정 이권개입, 청와대 비선진료 등 15개의 수사 대상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최 씨를 비롯해 안종범 전 국정조정수석과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청와대 인사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30명의 정부 인사들을 대거 구속·기소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2번의 시도 끝에 구속영장을 받아낸 것은 특검 수사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특검은 당초 90일간의 수사 기간에 연장조사 30일 등 최장 120일간 수사할 수 있도록 돼 있었으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연장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특검의 수사는 2월 28일 종료됐다. 이에 검찰은 3월 6일 검사 31명으로 구성된 2기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고 특검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lt;br /&gt;
&lt;br /&gt;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렸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 헌재에 접수한 지 92일 만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선고 이틀째인 3월 12일 오후 7시 16분 청와대에서 나와 7시 37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복귀했다. &lt;br /&gt;
&lt;br /&gt;
최순실 국정농담 의혹에서 시작돼 결국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낸 촛불집회는 1차·2차 시위 기간에는 하야론이 우세했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 늦춰지자 3차·4차 때 퇴진론으로 바뀌었고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사임할 뜻이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자 5차·6차 시위 때부터 강제적인 퇴진인 탄핵론으로 바뀌었다. 2016년 10월 29일 5만명(경찰추산 1만2천명)에서 시작한 집회는 5차(11월 26일) 전국 190만명, 5차(12월3일) 전국 232만명로 헌정사 최대 시위기록을 계속해 경신했으며, 2017년 4월 29일 23차까지 누적인원은 전국 1,683만명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집회인원 집계방식에 문제가 제기되자 경찰은 추산인원을 비공개로 돌리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집회참가인원뿐 아니라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으나 그간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또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으며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려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lt;br /&gt;
&lt;br /&gt;
촛불시위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구체적으로는 2008년 촛불의 주역이었던 ‘안티MB카페’,  사법시험존치를위한고시생모임, 금융사기피해자모임, 홈리스행동 등 구체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깃발, 평화재향군인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등 소속단체를 알리는 깃발, 딴지일보 애묘당, 새누리당표밭 강남주민들, 청와대민둥수석-전국탈모인연대, 신촌잉어회조개줍기소모임, 집에가고싶다-집가십, 범우주일꾼노동조합(스타) 등 세태를 반영하거나 정체성을 개성 있게 드러낸 깃발들이 집회 현장을 장식했다. 촛불집회와 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국민이 갖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확인한 일이었다면 이 같은 깃발은 촛불집회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시사매거진 2580〉. 《촛불민심빅데이터》. 제 1014회. 12년 11월. MBC.&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글의 ‘기사 제목’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과 촛불 민주주의’로 정하였는데,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을 부각하기보다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과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촛불민주주의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현재의 글은 촛불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글이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첫째 분량이 지나치게 많으며, 둘째 한국의 민주화를 읽을 수 있는 주요 지점인 촛불민주주의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부터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박근혜 퇴진운동은 본 원고에서 제외하였으면 한다.  &lt;br /&gt;
원고의 앞부분 &amp;lt;기본 정보&amp;gt; 중 특히 ‘인물/기관/단체’에서도 촛불민주주의를 이해하기보다 박근혜 퇴진운동에 초점을 맞춘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어 이에 대한 조정도 필요할 것이다.&lt;br /&gt;
외국의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 촛불집회에 대해 보도된 적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이같은 내용도 본문에서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용의 상당부분이 현재 재판 중에 있는 박근혜-최순실 관련 탄핵 촛불집회에 대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너무 자세하네요. 신문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예민한 문제로 구지 스토리텔링의 100가지 주제로 넣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촛불민주주의라는 주제보다 ‘한국의 정치 민주화’라는 내용으로 4·19 학생 의거를 위시하여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을 각 시대별 정치상황과 더불어 서술하고 그러한 서술 과정에서 촛불민주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4%9B%EB%B6%88_%EB%AF%BC%EC%A3%BC%EC%A3%BC%EC%9D%98&amp;diff=269</id>
		<title>Draft 촛불 민주주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4%9B%EB%B6%88_%EB%AF%BC%EC%A3%BC%EC%A3%BC%EC%9D%98&amp;diff=269"/>
				<updated>2017-07-27T16:46: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촛불 민주주의 |집필자=임미리 |인물/기관/단체=최순실, 박근혜, 정유라, 우병우, 문고리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촛불 민주주의&lt;br /&gt;
|집필자=임미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최순실, [[박근혜]], 정유라, 우병우, 문고리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안종범, 이재용,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헌법재판소]], [[국회]]&lt;br /&gt;
|장소/공간=[[광화문광장]], [[청와대]], [[서울광장]], [[청계광장]], [[경복궁역]],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신교동 로터리&lt;br /&gt;
|사건=[[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미선-효순이 사건),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건]], [[최순실 게이트]]&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촛불집회]](candlelight vigil), [[민중총궐기]], 대통령 탄핵소추, [[특검]], 탄핵심판&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1992년 인터넷 서비스망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하여 열린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미선·효순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2002년 11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렸을 때이다. 이때 열린 촛불집회는 과거의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평화적 시위를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으며, 이후 한국의 대표적 집회 및 시위 문화로 자리를 잡아갔다. 2002년 외에는 2004년 3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5월 2일부터 2개월 간 지속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진 운동으로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에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lt;br /&gt;
&lt;br /&gt;
대규모적인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 여론에 압박을 받은 여야가 2016년 11월 17일 이른바 최순실 특검법(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국정조사 실시에 합의했다. 이후 11월 30일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을 특별검사로 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특검팀이 공식 출범했다. 여기에 11월 17일 국정조사 계획안이 통과돼 2017년 1월 15일까지 총 60일간 국정조사가 진행됐으며 12월 6일 1차 청문회에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등 9개의 대기업 총수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기업 총수들이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것은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이었다.&lt;br /&gt;
&lt;br /&gt;
12월 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을 제외한 299명이 참여해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통과됐다. 총 129석의 새누리당 의원 중 상당수가 찬성표를 던진 결과였다. 이에 곧바로 박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고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 이관됐다.&lt;br /&gt;
&lt;br /&gt;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진행하는 동안 122명의 특검팀은 삼성그룹과 국민연금이 연루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뇌물공여, 문화계 블랙리스트,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입시·학사 비리, 최 씨의 국정 이권개입, 청와대 비선진료 등 15개의 수사 대상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최 씨를 비롯해 안종범 전 국정조정수석과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청와대 인사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30명의 정부 인사들을 대거 구속·기소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2번의 시도 끝에 구속영장을 받아낸 것은 특검 수사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특검은 당초 90일간의 수사 기간에 연장조사 30일 등 최장 120일간 수사할 수 있도록 돼 있었으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연장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특검의 수사는 2월 28일 종료됐다. 이에 검찰은 3월 6일 검사 31명으로 구성된 2기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고 특검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lt;br /&gt;
&lt;br /&gt;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렸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 헌재에 접수한 지 92일 만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선고 이틀째인 3월 12일 오후 7시 16분 청와대에서 나와 7시 37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복귀했다. &lt;br /&gt;
&lt;br /&gt;
최순실 국정농담 의혹에서 시작돼 결국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낸 촛불집회는 1차·2차 시위 기간에는 하야론이 우세했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 늦춰지자 3차·4차 때 퇴진론으로 바뀌었고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사임할 뜻이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자 5차·6차 시위 때부터 강제적인 퇴진인 탄핵론으로 바뀌었다. 2016년 10월 29일 5만명(경찰추산 1만2천명)에서 시작한 집회는 5차(11월 26일) 전국 190만명, 5차(12월3일) 전국 232만명로 헌정사 최대 시위기록을 계속해 경신했으며, 2017년 4월 29일 23차까지 누적인원은 전국 1,683만명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집회인원 집계방식에 문제가 제기되자 경찰은 추산인원을 비공개로 돌리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집회참가인원뿐 아니라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으나 그간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또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으며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려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lt;br /&gt;
&lt;br /&gt;
촛불시위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구체적으로는 2008년 촛불의 주역이었던 ‘안티MB카페’,  사법시험존치를위한고시생모임, 금융사기피해자모임, 홈리스행동 등 구체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깃발, 평화재향군인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등 소속단체를 알리는 깃발, 딴지일보 애묘당, 새누리당표밭 강남주민들, 청와대민둥수석-전국탈모인연대, 신촌잉어회조개줍기소모임, 집에가고싶다-집가십, 범우주일꾼노동조합(스타) 등 세태를 반영하거나 정체성을 개성 있게 드러낸 깃발들이 집회 현장을 장식했다. 촛불집회와 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국민이 갖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확인한 일이었다면 이 같은 깃발은 촛불집회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시사매거진 2580〉. 《촛불민심빅데이터》. 제 1014회. 12년 11월. MBC.&lt;br /&gt;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본 글의 ‘기사 제목’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과 촛불 민주주의’로 정하였는데,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을 부각하기보다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과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촛불민주주의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현재의 글은 촛불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글이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첫째 분량이 지나치게 많으며, 둘째 한국의 민주화를 읽을 수 있는 주요 지점인 촛불민주주의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부터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박근혜 퇴진운동은 본 원고에서 제외하였으면 한다.  &lt;br /&gt;
원고의 앞부분 &amp;lt;기본 정보&amp;gt; 중 특히 ‘인물/기관/단체’에서도 촛불민주주의를 이해하기보다 박근혜 퇴진운동에 초점을 맞춘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어 이에 대한 조정도 필요할 것이다.&lt;br /&gt;
외국의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 촛불집회에 대해 보도된 적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이같은 내용도 본문에서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의견2=&lt;br /&gt;
용의 상당부분이 현재 재판 중에 있는 박근혜-최순실 관련 탄핵 촛불집회에 대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너무 자세하네요. 신문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예민한 문제로 구지 스토리텔링의 100가지 주제로 넣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촛불민주주의라는 주제보다 ‘한국의 정치 민주화’라는 내용으로 4·19 학생 의거를 위시하여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을 각 시대별 정치상황과 더불어 서술하고 그러한 서술 과정에서 촛불민주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0%EA%B5%90&amp;diff=239</id>
		<title>Draft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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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8: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lt;br /&gt;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성균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유교의 사랑이란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모두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lt;br /&gt;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과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하며 ‘예’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모두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룬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유교가 이미 자리 잡은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다만 유교를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lt;br /&gt;
&lt;br /&gt;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 그중 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도덕과 예의이다.&lt;br /&gt;
&lt;br /&gt;
이는 유교가 종교의 개념보다는 일반 실생활속의 의례의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lt;br /&gt;
&lt;br /&gt;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도 상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상례에는 상주가 특별한 복장을 착용하는 상복제도가 있다. 흔히 오복제도라고 부르는 격식은 촌수의 가깝고, 멀고에 따라 복식의 형태와 복식을 갖추는 기간이 각각 달랐다. 오죽하면 조선에서는 상복을 입는 격식과 기간을 얼마로 해야 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달라지자 정치세력이 갈라지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상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지금도 이 복식제도의 전통이 일부 가문에서는 옛 제도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유교뿐만 아니라 각 집안의 각종 종교와 절도에 접목하여 각각 다르게 행하고 있다. 한국 속담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것이 있다. 남의 일에 공연히 간섭하고 나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그 만큼 상례의 모든 것이 집집마다 다 다르니 참견하지 말라는 의미이다.&lt;br /&gt;
&lt;br /&gt;
이 기간 상주는 먹는 음식도 평소와 달라야했다. 상주는 부모를 돌아가시게 만든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으로 좋은 음식과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상중인 임금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을 단축하라고 상소하고, 임금이 신하인 상주에게 상례에 따르지 말고 일찍 고기를 먹으라고 권(명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lt;br /&gt;
&lt;br /&gt;
인간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는 데도 법도가 있다. 관례(남)와 계례(여)를 지나야 어른이 된다. 관례가 행해지는 날 남자는 여자처럼 길게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틀며, 관을 쓴다. 남자 나이 15살부터 20살 사이에 정월달 중에서 날을 받아서 한다. 계례가 행해지는 날 여자는 댕기 맺던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현재는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에 그 해 만 19살이 되는 성년을 대상으로 ‘성년의 날’ 행사를 연다.&lt;br /&gt;
&lt;br /&gt;
이 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에 합당한 몸가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었다.&lt;br /&gt;
&lt;br /&gt;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성균관, 무형문화재 제85호,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성균관(http://www.skk.or.kr)&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삼국사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lt;br /&gt;
|의견2=&lt;br /&gt;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amp;quot;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amp;quot;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amp;lt;br/&amp;gt; &lt;br /&gt;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4%ED%86%B5%EC%8B%9C%EB%8C%80%EC%9D%98_%EA%B5%90%EC%9C%A1&amp;diff=237</id>
		<title>Draft 전통시대의 교육</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4%ED%86%B5%EC%8B%9C%EB%8C%80%EC%9D%98_%EA%B5%90%EC%9C%A1&amp;diff=237"/>
				<updated>2017-07-27T16:18: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전통 교육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광종, [[공자]], 선현, 최충, 주세붕, 안향, 백운동서원, 소수서원&lt;br /&gt;
|장소/공간=문묘, 명륜당, 풍기&lt;br /&gt;
|사건=서북 방향 국경 개척&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삼국시대]], [[유교]], [[불교]], [[고구려]], [[신라]], 화랑도, 통일 신라, [[고려]], 과거 제도, 태학, 국자감, 학당, 향교, 십이도, 서당, 삼사·오경 및 제술, [[성리학]], [[성균관]], [[서원]], 생원 · 진사, 사액서원&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시대의 교육에는 유교와 불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지배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에게 학문적ㆍ인성적 소양을 길러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용맹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을 주요 교육 목표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최초의 학교는 372년에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이었다. 태학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 기관으로, 귀족 등 지배 계급의 자제들을 위한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태학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다. 화랑도 교육은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중흥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lt;br /&gt;
&lt;br /&gt;
통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정치나 교육은 유교의 이념을 따랐다. 제4대 광종 때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배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과거 제도의 실시이다. 이는 관직 진출의 문호를 모든 지배 계층에 개방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형식은 바뀌었지만 과거 제도는 관리 등용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lt;br /&gt;
&lt;br /&gt;
고려의 교육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중앙의 국자감과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다. 국립 종합대학교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992년 개경에 설립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고 입학 자격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규정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자감의 교육 목적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인 동시에 유학의 연구였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의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립된 중등 정도의 관학 교육 기관이었다. 1127년 3월, 각 주와 현에다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敎導)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향학의 시초로 보고 있다. 향교에는 공자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교육을 실시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학당이 있었다. 교육 정도는 향교와 유사하였으나 학당은 문묘가 없는, 교육만 담당한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사학인 십이도는 관학인 국자감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교육 기관이었다. 1053년 최충(崔冲)이 국자감을 비롯한 관학의 부진을 개탄하여 자기 집에 서당을 설치, 이웃 아동들을 교육한 데서 비롯하였다. 교과목은 국자감의 범주에 따라 삼사·오경 및 제술을 주로 하였고 나아가서 실천 윤리를 앞세웠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이념은 성리학적 도학 정신이 중추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 교육이 아닌,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실시되었다. 그 주된 대상은 양반 계급으로서, 관직 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다. 또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 체계는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과 향교, 서원과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는 공자와 제현(諸賢)을 모신 문묘와 유생 교육의 장소인 명륜당이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춰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과거에 1차 합격한 생원 · 진사 이상이 입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lt;br /&gt;
&lt;br /&gt;
향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에서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문묘인 대성전과 명륜당 등의 구조를 갖추었다. 향교에서는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서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lt;br /&gt;
&lt;br /&gt;
서원은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되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 백운동서원은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농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장소로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고려사(高麗史)』&lt;br /&gt;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lt;br /&gt;
*『조선교육사 상·하』(이만규, 을유문화사, 1949)&lt;br /&gt;
*『한국교육사 상·중·하』(박상만, 대한교육연합회, 1956∼1959)&lt;br /&gt;
*『한국교육사』(한기언, 박영사, 1963)&lt;br /&gt;
*『한국신교육사』(오천석,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lt;br /&gt;
*『한국교육사상사연구』(한기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lt;br /&gt;
*『한국교육사연구』(차석기·신천식, 재동문화사, 1969)&lt;br /&gt;
*『한국고등교육연구』(김종철, 배영사, 1969)&lt;br /&gt;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lt;br /&gt;
*『한국기술교육사』(이원호, 서문당, 1974)&lt;br /&gt;
*『한국교육사자료 1·2』(국사편찬위원회, 1975)&lt;br /&gt;
*『한국인교육관의 사적 배경』(박준희, 실학사, 1976)&lt;br /&gt;
*『일제하민중교육운동사』(노영택, 탐구당, 1979)&lt;br /&gt;
*『한국서원교육제도사연구』(정순목,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lt;br /&gt;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lt;br /&gt;
*『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정재철, 일지사, 198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의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에 대한 설명은 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이 한국의 교육에 미친 영향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체계화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글에서 “한국에서 국가에~ 삼국시대부터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명확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자칫 한국 공교육의 시작이 삼국시대부터로 읽힐 수 있다.   &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화랑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면. 화랑도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분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원광의 세속5계를 받들며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amp;lt;삼국사기&amp;gt;에는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 삼사 오경에서 삼사가 무엇인가요? 사서 오경 아닌가요?&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교육기관 중 초등 교육기관은 서당, 중등 교육기관은 서울의 경우 사부학당, 지방의 경우 향교, 고등 교육기관은 성균관입니다. 사부학당이 빠졌네요, 확인하고 보완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원이 사림에 의한 사립교육기관임을 제시하여 당시 관립학교와 차별성을 가졌음을 서술할 것.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을 제사하고,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amp;lt;br/&amp;gt;&lt;br /&gt;
- 전통시대의 교육은 남성 지배층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특징과 내용, 양반 등 지배층 이외의 중인의 교육기관 및 내용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교육 후 과거를 통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홍패, 장원급제에게 내린 어사화 등 장원급제자 축하 행사(?)에 대해 서술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9%94%ED%8F%AC%EC%99%80_%ED%99%94%EC%95%BD&amp;diff=235</id>
		<title>Draft 화포와 화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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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7: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최무선의 화약 개발, 나라를 구하다&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최무선]], 왜구, 이원, 화통도감, 화통방사군, [[태조 이성계]], 태종, [[세종]], 화통군, 화약장, 왜인, 문종, 도회소, 성근, 김지남&lt;br /&gt;
|장소/공간=벽란도, 금강 하구의 진포, 나세 &lt;br /&gt;
|사건=서북 방향 국경 개척&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고려, 초석 · 유황 · 분탄, [[조선]], 염초자취법, &amp;lt;신전자취염초방&amp;gt;, &amp;lt;신전자초방&amp;gt;, 명나라&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화약이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말기로 추측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화약이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원료, 즉 초석 · 유황 · 분탄 중 초석(염초 : 焰硝)의 제조법이 비밀이어서 고려에서는 정부조차도 화약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약이 필요할 때는 중국에서 얻어다 쓰곤 했다. &lt;br /&gt;
&lt;br /&gt;
고려에서 화약과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된 것은 최무선(崔茂宣) 이후의 일이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인들 중 초석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중국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난 최무선은 화약을 만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흙에서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낼 국가의 화약제조소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자고 고려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덕분에 화통도감이 만들어졌고 1377년 10월부터 화약과 화약 무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 1378년에는 화기 발사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이 편성되었다.  &lt;br /&gt;
&lt;br /&gt;
화통도감에서 만들어진, 화약을 사용한 무기는 18종에 이르렀다. 총포류나, 화포류, 불화살 등 다양한 무기가 개발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화기들은 실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최무선은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lt;br /&gt;
&lt;br /&gt;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화기 발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반에게 대중화되어 새 왕조의 권력 집중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약은 설 명절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에만 쓰였을 정도였다. 태조와 달리 태종 ‧ 세종에 이르러는 화기 발달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태종 때인 1404년에는 화약을 주로 쓰는 부대인 화통군(火㷁軍)이 증원되었고 화약을 만드는 화약장(火藥匠)의 수도 늘어났다. &lt;br /&gt;
&lt;br /&gt;
세종 때에는 서북 방향 국경을 개척하면서 연간 약 8,000근이나 되는 화약을 소비하기도 했다. 이 중 약 3,000근은 지방에서 생산하였는데, 중앙 정부에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엄중히 관리하였다.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등 한반도 남쪽의 세 도(下三道)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감독 아래 해안에서 먼 곳을 골라서 초석을 만들게 하였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혹시 왜인에게 알려질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이 늘 부족하여 화포 발사 훈련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1433년부터는 불꽃놀이에 쓰는 염초량을 종전의 1,000근에서 30근으로 대폭 줄였다.  &lt;br /&gt;
&lt;br /&gt;
세종의 뒤를 이른 제5대 임금 문종은 화약의 필요성과 그 제조를 위한 염초자취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전국에 25개의 도회소를 설치하였는데, 이 도회소들에서는 나라의 인가를 받은 사람만이 염초를 제조할 수 있었다. 또 만들어낸 염초를 전부 국가에 바쳐 그 비밀이 왜인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조선 초기에 이르러 화기와 화약의 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국가적으로 대량 생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 화약의 정확한 제조 기술은 알려지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화약 제조법 관련 서적은 1635년에 쓰인 &amp;lt;신전자취염초방&amp;gt;과 1698년에 이루어진 &amp;lt;신전자초방&amp;gt;이다. &amp;lt;신전자취염초방&amp;gt;은 성근(成根)이, &amp;lt;신전자초방&amp;gt;은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중국에서 배워와 스스로 연구하여 완성한 화약 제조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lt;br /&gt;
&lt;br /&gt;
이처럼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온 화기와 화약은 외적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방을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 화약과 화기 만드는 기술은 중국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왜인들은 우리의 화약 병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애썼다. 마침내 조선 명종 말기쯤 왜인들이 이 기술을 배워 외국 사신들에게 보여주는 불꽃놀이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고려사(高麗史)』&lt;br /&gt;
*『태조실록(太祖實錄)』&lt;br /&gt;
*『무기와 화약』(김기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lt;br /&gt;
*『신전자취염초방언해(新傳煮取焰硝方諺解)』&lt;br /&gt;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lt;br /&gt;
*『화약학·발파학(火藥學·發破學)』(김영달외, 문운당, 1971)&lt;br /&gt;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lt;br /&gt;
*『조선시대화약병기사연구(火藥兵器史硏究)』(허선도, 일조각, 1994)&lt;br /&gt;
*「여말선초 화기(火器)의 전래와 발달」 상·중·하(허선도, 『역사학보』 24·25·26, 1964·1965)&lt;br /&gt;
*「이조중기 화기(火器)의 발달」 상·하(허선도, 『역사학보』 30·31, 196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고려, 조선의 화포와 화약발전에 관한 설명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비교는 불필요하다고 본다. 고려, 조선의 화포와 화약 제조 및 정책에 관한 설명이 너무 많아 내용이 지루하다. 중국의 금비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 장군 등은 화약무기를 사용해 승리를 이끌었는지 또는 조선의 화약무기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 시각 자료와 함께 제시한다면 좀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 개발과 사용에 대해서는 잘 설명되어 있다. &amp;lt;br/&amp;gt;&lt;br /&gt;
- 조선시대의 화포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화약 개발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화약 제조법 서적에 대해서 정리하였는데..... 임진왜란 거북선의 경우 대형 화포가 탑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서술하면 어떨까요?&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C%A0%84%ED%86%B5_%EB%AC%B4%EC%98%88&amp;diff=234</id>
		<title>Draft 한국의 전통 무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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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7: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태권도 종주국 한국의 전통 무예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정조, 국제올림픽위원회, 세계태권도연맹&lt;br /&gt;
|장소/공간=국기원&lt;br /&gt;
|사건=[[임진왜란]], 갑오개혁, 서울올림픽, 바르셀로나올림픽, 시드니올림픽&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고분 벽화, 총포와 화약의 사용, 십팔기무예, 이십사반무예, 샅바, 육예(六藝),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고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활을 쏘고 말을 달리고 무술을 하는 것이 중요한 교육 과목이었다. 특히 택견, 씨름, 활쏘기 등의 무예 장면은 고대 국가의 고분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에는 씨름 · 택견 · 활쏘기 등으로 분류되지 않은 종합 무예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해 무예는 전쟁 준비를 위한 훈련이나 놀이는 물론 무용의 요소까지 함께 갖추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고려시대 후반 총포와 화약의 사용으로 무예 종목들은 민속 놀이 형태로 모습이 바뀌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무예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1749년에 와서 창과 검, 곤봉 등의 십팔기무예로 군사를 훈련하였다. 정조 때인 1790년에는 말을 타고 행하는 무예 등을 더해 이십사반무예로 정비하였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무예로는 씨름, 궁술, 택견 등을 들 수 있다. &lt;br /&gt;
&lt;br /&gt;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나 띠 또는 바지의 허리춤을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민속 놀이이자 운동 경기이다. 순수 한국의 운동 경기인 씨름은 온몸을 움직여 힘과 기술을 겨루는 운동이므로 체력 · 기술 · 투지의 세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씨름은 전통 사회에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명절에 즐거움을 나누기 위하여 실시되었다. 또 농한기를 맞으면 고된 몸과 정신적인 긴장을 풀기 위해서도 씨름을 즐겼다. 오늘날에는 운동 경기로 발전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lt;br /&gt;
&lt;br /&gt;
활쏘기는 이미 고대 이전부터 널리 민간에 장려 ‧ 보급된 무예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술이 무예 수련과 더불어 심신 수양의 하나로서 군자가 익혀야 할 육예(六藝)의 한 가지로 중시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급격한 근대화 및 총기류의 발전으로 활과 화살의 무기로서의 역할은 사라지고 궁술은 대중 스포츠로서 널리 보급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 활은 ‘국궁’이라 불린다. 올림픽 종목 가운데 한국 선수들이 높은 성적으로 보이는 ‘양궁’은 국궁에 대비하여 서양의 활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택견은 손과 발을 주로 사용하는 전신 운동으로,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 심신 수련을 통하여 인격을 도야하며, 기술 단련으로 자신의 신체를 방어하는 호신의 무술이다. 여러 문헌에는 수박 ·수박희 등의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주로 발로 차거나 걸어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지만 상대방 얼굴을 차는 것으로도 이길 수 있다. 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왔으며 격투기임에도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 독특한 경기방법도 있다. 2011년 11월 28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이후 택견은 일본 무술들에 의해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특히 6. 25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태권도가 택견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1970년대 이후에는 태권도와 택견이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택견과 태권도는 역사적 · 기술적으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 무술인 태권도는 여러 전통 무술을 계승 발전시켜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태권도 수련 방법은 기본 동작으로부터 품세 · 겨루기 · 단련 · 호신술 등으로 구별한다. 기본동작은 태권도 기술의 근간을 이루는 손과 발을 이용한 기술로, 주먹과 손날을 이용한 막기 · 지르기 · 찌르기 · 치기와 발을 이용한 차기 기술이 있다. 품세는 혼자서 상대를 가상하여 공격과 방어의 동작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숙달시켜 민첩성 · 근력 · 유연성 및 중심의 이동, 그리고 호흡 조절 및 동작의 완급 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태권도는 무예에 경기적 요소를 더해 스포츠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예의 규범을 제정하여 태권도인의 예의와 자세, 도장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사항,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방문하였을 때의 복장과 용모 · 의식 등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겸 시합장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는 태권도를 올림픽 경기 종목으로 채택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시범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태권도는 세계의 스포츠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은 태권도의 종주국이다. 세계태권도연맹의 본부는 서울에 있으며, 현재 전 세계의 태권도 도장에는 태극기를 전면에 게양하여 예의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또 수련생에게는 한국어 구령으로 지도함으로써 종주국으로서의 한국의 얼을 세계에 떨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삼국유사』&lt;br /&gt;
*『고려사』&lt;br /&gt;
*『세종실록』&lt;br /&gt;
*『선조실록』&lt;br /&gt;
*『증보문헌비고』&lt;br /&gt;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lt;br /&gt;
*『대전회통』&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오늘날 한국 무예의 모습을 설명할 때, 태권도만 사례로 제시하였는데 여기에 무예 24기도 언급하면 좋을 것이다.&lt;br /&gt;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festival/festival.jsp?cid=1805914&lt;br /&gt;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크게 보완했으면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원고에 나오는 고분벽화 및 현대 스포츠 관련 내용을 사진자료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A%B5%AD%EC%9D%98_%EC%9D%B8%EC%87%84_%EB%AC%B8%ED%99%94&amp;diff=233</id>
		<title>Draft 한국의 인쇄 문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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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6: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고려의 직지심경 &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구텐베르크, 이규보, 플랑시&lt;br /&gt;
|장소/공간=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인사 장경각, 청주목 흥덕사, 프랑스 국립도서관&lt;br /&gt;
|사건=몽골군의 침입, 1972년 세계 도서의 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금속 활자, &amp;lt;직지심체요절&amp;gt;, &amp;lt;직지심경&amp;gt;, 유네스코 기록 유산,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 목판권자본, 납탑 공양, &amp;lt;다라니경&amp;gt;, [[신라]], [[고려]], [[팔만대장경]], &amp;lt;동국이상국집&amp;gt;, &amp;lt;상정예문&amp;gt;, 밀랍 주조법, 숭유억불정책, 유교 경전, 주조술, 점착성 물질, 고급 종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어낸 나라이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 인쇄물은 1377년에 간행된 &amp;lt;직지심체요절&amp;gt;이다. &amp;lt;직지심경&amp;gt;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1436년부터 1446년 사이에 제작된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보다 60년이나 앞선 것이다. &amp;lt;직지심체요절&amp;gt;은 2001년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도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751년 무렵에 간행된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 목판권자본이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불경을 통해 그 시대 이전부터 목판 인쇄를 했다는 것과 초기 목판 인쇄는 본문 내용이 짧은 &amp;lt;다라니경&amp;gt; 등의 불경을 작은 판에 새겨 다량으로 인쇄하여 납탑 공양한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은 작은 목판본으로, 판목에 본문과 다라니의 경문을 완전하게 새겨서 평면으로 놓고 글자 면에 먹물을 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그 위를 문질러 찍어낸, 목판 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하게 갖춘 인쇄물이다. 목판에 글자를 새긴 기술이 정교하여 글자체의 힘찬 필력을 살려 주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지닌 &amp;lt;무구정광대다라니경&amp;gt;은 당시 우리 민족의 고도로 발달한 인쇄 문화 수준을 입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9세기 후반기인 신라 시대 말기에는 일반 학문 서적을 목판에 새겨 인쇄해내는 단계로까지 인쇄술이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로 들어서 불교가 국가 종교로 승격되고 그 진흥책이 강화되면서 불교 서적의 판각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은 한층 더 발달한 목판 인쇄 문화를 보여준다.  고려 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 목판이 8만여 매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이 목판들은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은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하여 새긴 것으로 완벽한 대장경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목판 인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기 위해 노력한 결과 만들어진 것은 금속 활자이다. 금속 활자 인쇄는 고려 시대 중앙 정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발명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3세기 전기에 금속 활자 인쇄가 실시된 것을 기록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이규보의 &amp;lt;동국이상국집&amp;gt;에는 금속 활자로 &amp;lt;상정예문&amp;gt;을 28부 찍어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중앙 관서가 관장하였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이후 지방의 사찰에까지 전파되었다. 1377년에 청주목의 교외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찍어낸 &amp;lt;불조직지심체요절&amp;gt; 하권 1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플랑시(Plancy,C.de.)가 1887년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여 수집한 장서 중의 하나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이 1972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임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고려 시대, 관청에서 만든 금속 활자 인쇄물은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다. 정교하게 주형을 만들어 활자를 부어 낸 다음 잘 손질하여 인쇄한 듯하다. 그런데 흥덕사 금속 활자본은 관청에서 만든 활자로 찍은 것이 아니고 사찰이 전통적인 재래의 밀랍 주조법으로 만든 활자로 찍어낸 것이다. 그래서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같은 것이 드물다. 또 한 줄에 있는 자수가 한두 자씩 차이가 있을 만큼 조잡한 활자본이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사찰의 금속 활자 인쇄는 고려의 인쇄술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고려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조선으로 이어져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조선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와 달리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했다. 그래서 인쇄 문화는 주로 유교 경전과 역사책 간행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금속 활자 인쇄는 동철을 녹여 활자를 부어내는 주조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조술은 물론, 부어낸 활자를 판에 고착시키는 점착성 물질과 쇠붙이 활자에 잘 묻는 기름 먹물이 개발되어야 인쇄를 할 수 있다. 또 금속 활자에 찍어도 찢어지지 않는 고급 종이가 있어야 인쇄가 가능하다. 고려 시대에 금속 활자 인쇄에 성공했다는 것은 당시 한민족이 이 모든 요건을 다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금속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lt;br /&gt;
*『한국목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lt;br /&gt;
*『한국전적인쇄사』(천혜봉, 범우사, 1990)&lt;br /&gt;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개정판)&lt;br /&gt;
*『나려인쇄술의 연구』(천혜봉, 경인문화사, 1978)&lt;br /&gt;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lt;br /&gt;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은 한국의 인쇄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부분에서 좀 더 정확한 기술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그런데~조잡한 활자본이다.” 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관청이 아닌 사찰에서 활자를 만든 이유는 몽골의 지배로 관서의 인쇄기능이 중단되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사찰에서 재래의 밀랍주조법으로 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양과는 달리 조선의 인쇄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숭유억불정책’에 기인한 점도 있지만, 1) 국가정책 변화에 따라 사찰의 사찰판본에서 정부의 관판본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고, 2) 독일의 경우 상업적 목적으로 민간 중심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이 전파되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지만 조선은 극소수의 양반들을 위해 국가에서 독점 제작되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도입부분에 인쇄물 또는 인쇄물 발달의 의미 서술&amp;lt;br/&amp;gt;&lt;br /&gt;
- 목판인쇄물과 금속활자를 시기순으로 서술할 것 : 주제가 왔다 갔다 함&amp;lt;br/&amp;gt;&lt;br /&gt;
- 팔만대장경 제작 시기를 정확히 명기 할 것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4%EC%98%88&amp;diff=231</id>
		<title>Draft 도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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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5: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도예&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토기,와질토기, 도질토기, 도기, 자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한국은 도예의 선진국으로 각 시대마다 특색 있는 기법의 우수한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lt;br /&gt;
 &lt;br /&gt;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은 소성 온도에 따라 대체로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삼국시대는 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토기 중 850∼950℃에서 구워낸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의 취사와 저장 용기와 분묘 부장품, 제사 용기로 사용되었다. &lt;br /&gt;
&lt;br /&gt;
1100℃ 이상에서 도질토기는 서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초에 가야는 물론 백제와 신라에서도 생산되고, 이후 점진적인 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생산되었고, 고려로 진입하면서 도기로 대체된다.&lt;br /&gt;
&lt;br /&gt;
삼국시대의 토기 유물 중 기와, 치미, 벽돌 등 건축용 가공품에서 당대의 예술적 정취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 많이 발견된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청자가 생산되었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이다. &lt;br /&gt;
&lt;br /&gt;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청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세계 도자사상 독보적인 상감기법이다.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반쯤 말랐을 때 조각 칼로 음각을 하고,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자토 등을 넣어 문양을 만든 다음 말려서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청자유를 입혀서 재벌구이를 하는 방식이다. &lt;br /&gt;
&lt;br /&gt;
청자의 원류인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명망은 높았다. 고려 청자의 기형은 식기, 다기, 주기, 제기, 불기, 문방구, 베게, 악기, 기와, 향합 등 다양하며, 그 시대 귀족들의 호사스런 생활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청자제작법의 변형인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생산되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백자를 선호하였다. 세종시대부터 궁중의 그릇은 백자만을 사용하였다. 『세종실록』에 이미 명나라 사신이 백자를 요구한 사실이 여러 번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백자 제작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신흥 조선의 도자기 수요는 매우 컸다. 왕실, 관아, 향교, 민가의 제기와 식기 등으로 백자가 애용되었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에는 왕실에 백자를 만들어 바치는 중앙관요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 전국에 자기소 136개, 도기소 185개 등 321개의 가마가 있어 전국에 그릇을 공급했다. &lt;br /&gt;
&lt;br /&gt;
상품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여 그릇을 빚고 이를 다시 갑(匣, 匣鉢, 개비)에 넣어 번조하여 그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했다. 이를 갑번(匣燔)이라고 하였고,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백자의 장식은 코발트(회회청)로 그림을 그려 구운 청화백자가 있고, 철사와 진사를 사용하여 검은색과 붉은색을 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분청사기의 전성기에는 활달한 기법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큰 걸작들을 많이 생산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잡혀간 이후에는 생산이 끊어졌다. &lt;br /&gt;
&lt;br /&gt;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서 가마를 열어 일본 도예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미술전집3 - 토기 토우 와박』(진홍섭, 동화출판공사)&lt;br /&gt;
『한국미술전집9 - 고려도자』(최순우, 동화출판공사)&lt;br /&gt;
『한국미술전집9 - 이조도자』(정양모, 동화출판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 전통도예가 담고 있는 미적인 성격과 특징이 무엇이며, 현재에는 어떻게 계승 발전되어오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의 청자는 한국의 도자산업이 도기질-&amp;gt;자기질로 바뀌었으며 이는 생활문화의 발전을 의미한다. 청자가 당시의 생활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구체적인 사례 또는 이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중국에 이어 2번째의 청자 제작국이며 현재까지 청자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과 차별화되는 한국 전통도예의 장점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도예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토기, 도기, 자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시대적 변천과 함께 서술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도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기와 도기에 대한 구분에 대한 설명을 해줄 것&amp;lt;br/&amp;gt;&lt;br /&gt;
- 도예는 사진 자료와 함께 설명해야 이해가 잘 될 수 있는 주제이다. 자료 사진과 함께 설명을 했으면 한다.&amp;lt;br/&amp;gt; &lt;br /&gt;
- 도자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주로 어떤 것이며, 각각이 가지는 의미는? 도자기의 형태의 특징은? 청자와 백자의 대표적인 형태 설명할 것.&amp;lt;br/&amp;gt; &lt;br /&gt;
- ‘갑에 넣어 번조하였다’는 것을 쉽게 풀어 설명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도공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자세히 했으면.&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4%EC%98%88&amp;diff=229</id>
		<title>Draft 도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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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4: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도예&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토기,와질토기, 도질토기, 도기, 자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한국은 도예의 선진국으로 각 시대마다 특색 있는 기법의 우수한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lt;br /&gt;
 &lt;br /&gt;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은 소성 온도에 따라 대체로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삼국시대는 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토기 중 850∼950℃에서 구워낸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의 취사와 저장 용기와 분묘 부장품, 제사 용기로 사용되었다. &lt;br /&gt;
&lt;br /&gt;
1100℃ 이상에서 도질토기는 서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초에 가야는 물론 백제와 신라에서도 생산되고, 이후 점진적인 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생산되었고, 고려로 진입하면서 도기로 대체된다.&lt;br /&gt;
&lt;br /&gt;
삼국시대의 토기 유물 중 기와, 치미, 벽돌 등 건축용 가공품에서 당대의 예술적 정취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 많이 발견된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청자가 생산되었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이다. &lt;br /&gt;
&lt;br /&gt;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청자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세계 도자사상 독보적인 상감기법이다.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반쯤 말랐을 때 조각 칼로 음각을 하고,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자토 등을 넣어 문양을 만든 다음 말려서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청자유를 입혀서 재벌구이를 하는 방식이다. &lt;br /&gt;
&lt;br /&gt;
청자의 원류인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명망은 높았다. 고려 청자의 기형은 식기, 다기, 주기, 제기, 불기, 문방구, 베게, 악기, 기와, 향합 등 다양하며, 그 시대 귀족들의 호사스런 생활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청자제작법의 변형인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생산되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백자를 선호하였다. 세종시대부터 궁중의 그릇은 백자만을 사용하였다. 『세종실록』에 이미 명나라 사신이 백자를 요구한 사실이 여러 번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백자 제작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신흥 조선의 도자기 수요는 매우 컸다. 왕실, 관아, 향교, 민가의 제기와 식기 등으로 백자가 애용되었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에는 왕실에 백자를 만들어 바치는 중앙관요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 전국에 자기소 136개, 도기소 185개 등 321개의 가마가 있어 전국에 그릇을 공급했다. &lt;br /&gt;
&lt;br /&gt;
상품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여 그릇을 빚고 이를 다시 갑(匣, 匣鉢, 개비)에 넣어 번조하여 그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했다. 이를 갑번(匣燔)이라고 하였고,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백자의 장식은 코발트(회회청)로 그림을 그려 구운 청화백자가 있고, 철사와 진사를 사용하여 검은색과 붉은색을 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분청사기의 전성기에는 활달한 기법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큰 걸작들을 많이 생산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잡혀간 이후에는 생산이 끊어졌다. &lt;br /&gt;
&lt;br /&gt;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서 가마를 열어 일본 도예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미술전집3 - 토기 토우 와박』(진홍섭, 동화출판공사)&lt;br /&gt;
『한국미술전집9 - 고려도자』(최순우, 동화출판공사)&lt;br /&gt;
『한국미술전집9 - 이조도자』(정양모, 동화출판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 전통도예가 담고 있는 미적인 성격과 특징이 무엇이며, 현재에는 어떻게 계승 발전되어오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의 청자는 한국의 도자산업이 도기질-&amp;gt;자기질로 바뀌었으며 이는 생활문화의 발전을 의미한다. 청자가 당시의 생활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구체적인 사례 또는 이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중국에 이어 2번째의 청자 제작국이며 현재까지 청자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과 차별화되는 한국 전통도예의 장점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도예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토기, 도기, 자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시대적 변천과 함께 서술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도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기와 도기에 대한 구분에 대한 설명을 해줄 것&amp;lt;br/&amp;gt;&lt;br /&gt;
- 도예는 사진 자료와 함께 설명해야 이해가 잘 될 수 있는 주제이다. 자료 사진과 함께 설명을 했으면 한다.&amp;lt;br/&amp;gt; &lt;br /&gt;
- 도자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주로 어떤 것이며, 각각이 가지는 의미는? 도자기의 형태의 특징은? 청자와 백자의 대표적인 형태 설명할 것.&amp;lt;br/&amp;gt; &lt;br /&gt;
- ‘갑에 넣어 번조하였다’는 것을 쉽게 풀어 설명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도공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자세히 했으면.&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A%8C%ED%99%94&amp;diff=227</id>
		<title>Draft 회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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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4: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회화&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담징, 아좌태자, 안견, 겸재정선, [[김홍도]], 이정, 강세황, 어몽룡, 이계우, 이인상, 김은호, 강희언, 김윤겸, 최북, 김응환, 정수영, 김석신, [[신사임당]]&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고분벽화, 불교회화, 문인화, 민화, 궁중어용화가, 겸재파화법 &lt;br /&gt;
|물품/도구/유물=몽유도원도, 인왕제색도, 의궤, 법륭사금당벽화, 성덕태자상, 수월관음도, 초충도&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의 전통회화는 중국과의 지리적 문화적 유대 때문에 그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해 왔다. &lt;br /&gt;
&lt;br /&gt;
4세기에서 7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삼국시대의 회화로는 고분의 벽화와 고분 출토 유물의 장식화가 남아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의 생동하는 사신상과 기마수렵인 묘사는 중국의 화풍과는 다른 활달한 개성과 역량을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승려화가 담징과 백제의 화가 아좌태자 등 다수의 화가가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담징은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렸고, 아좌태자는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의 회화는 남송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수묵화가 크게 발전하였으나 남아있는 유물이 전혀 없다. 그러나 불교회화(불화)는 많이 남아있다.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 부석사와 수덕사의 벽화는 대표적인 고려시대 불화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회화는 크게 나누어 사대부들의 그림인 문인화, 궁중어용화가들의 그림, 서민들의 그림인 민화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는 관료를 시험으로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널리 실시하여왔고, 이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독서계급 계층이 생겼다. 이들의 생활 속에는 늘 지필묵이 가까이 있었고, 시서화를 익히는 것은 기본교양에 속했다. &lt;br /&gt;
&lt;br /&gt;
대부분의 선비들은 시와 글씨의 경지에서 머물렀으나 일부 재능 있는 선비들은 그림도 그려 좋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선비의 교양과 여기에서 탄생한 그림을 문인화라고 부른다. &lt;br /&gt;
&lt;br /&gt;
그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는 조선 중기 이정(李霆)의 묵죽, 어몽룡(魚夢龍)의 묵매, 이계우(李繼祐)의 묵포도, 후기에 활약한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의 산수화가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은 개국 때부터 도화서란 관청을 두어 궁중화가들을 양성했다. 궁중화가들은 궁중의 의례와 장식에 필요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왕의 초상화(어진)를 그리거나 왕실의 중요 의례행사인 5례(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와 관련된 의궤를 그렸다. 정교한 묘사와 채색은 이들의 특기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회화작품으로 가장 오래된 몽유도원도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안견이 그린 것이다. 조선왕조 말까지 지속된 이 관공서는 풍속화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와 채색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 등 많은 우수한 화가를 배출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초기 그림은 대개 중국 그림의 모사 수준에 머문 것이 많았다. 18세기 들어 겸재 정선의 출현과 함께 한국 고유의 산수화가 탄생했다. 그의 대표작은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은 그 좋은 예이다. &lt;br /&gt;
&lt;br /&gt;
그가 창시한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은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민화는 민간에서 널리 사랑 받는 그림으로 관혼상제에 쓰이는 병풍이나 민가의 다락방문과 같은 문호에 붙인 그림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수석과 고기, 호랑이와 까치 등이 많이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서양의 나이브 페인팅에 해당하는 민화는 형상물을 도안화하고 단순화하고 화려한 채색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lt;br /&gt;
&lt;br /&gt;
사대부집 규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초충도는 수를 놓기 위한 밑그림인데, 그 중에는 회화수준의 높은 기량을 보인 작품도 많다. 한국의 지폐에 그려진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특히 유명하다. 곤충(나비, 메뚜기, 개구리 등)과 일상에서 만나는 식물(수박, 가지, 오이, 원추리, 도라지꽃 등)이 자주 소재로 등장한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미술전집12 회화(동화출판공사) 최순우 편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음악논고(韓國音樂論攷)』(성경린, 동화출판공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국의 전통회화를 시대순으로 설명한다면 각 시대별 회화의 특징에 대해서도 추가 서술할 필요가 있다. 예) 고려시대 회화의 특징은 1) 실용적 기능을 지난 작품뿐 아니라 순수한 여가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 활발히 제작된, 2) 종교화가 발전, 3) 산수화의 제작 등 &lt;br /&gt;
그리고 글에서 “고려시대의 회화는 ~ 남아있는 유물이 전혀 없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공민왕의 ‘수렵도’, 이제현의 ‘기마도강도’, ‘어제비장전변상’, 목판화 등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정적인 서술보다는 현존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미지와 함께 한국 각 시대별 회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한국미술전집12 회화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다. 해당 문헌에서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고려시대 청자에 남아있는 그림으로는 회화라고 할 수 없나요? &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회화에 대한 설명 순서를 궁중어용화가의 그림, 문인화, 민화로 바꾸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중간에 도화서 화원의 설명 뒤 겸재 정선과 겸재파 화가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들의 그림은 어용화가, 문인화, 민화 중에 어디에 포함되는지? 구분을 정확히 하고 문단 간의 이어지는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었으면 한다. 도화서의 화공들의 그림도 민화에 포함된다고 하는데...&amp;lt;br/&amp;gt;&lt;br /&gt;
- 조선회화에 대한 설명으로 김홍도, 신윤복에 대해 미흡한 것이 아쉽다. 조선회화의 양대 거장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이들인 만큼 각각의 화풍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민화의 소재들에 백성의 바람을 담은 상징물임을 설명하고 모란 이외에도 각각의 소재에 대해 설명하면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된다. &amp;lt;br/&amp;gt;&lt;br /&gt;
-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의 회화는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이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되었으면 한다. 특징, 의미 등&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C%98%A5&amp;diff=225</id>
		<title>Draft 한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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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3: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옥&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용인민속촌, 낙안읍성, 서울북촌, 서촌, 전주한옥마을, 양동마을, [[하회마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옥은 한국 고유의 전통적 건축방식으로 지은 살림집이다. &lt;br /&gt;
&lt;br /&gt;
가옥의 구조는 목재로 만들며, 못을 전혀 쓰지 않고 목재를 깎고 다듬어서 구조를 조립한다. 소나무가 주로 쓰였다. 전통 한옥의 벽체는 흙과 돌과 석회 등 천연재료를 썼다. 근대화 이후 시멘트, 가공석재, 도기타일, 함석 등의 공산품 자재가 사용되었다.  &lt;br /&gt;
&lt;br /&gt;
문호는 목재로 촘촘하게 짜서 유리대신 전통한지를 발라 채광도 되고 보온도 되도록 했다.  &lt;br /&gt;
&lt;br /&gt;
지붕은 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한국식 기와를 쓴다. 기와 밑에는 황토로 두꺼운 바닥 층을 만들어 기와를 고정시키면서 보온효과도 거두도록 했다. 과거 농촌지역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이 많았지만, 지금은 경기도 용인의 민속촌과 전라남도 순천시의 낙안읍성 등 초가 보존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전통 한옥은 모두 단층집이다. 또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남향집이 대부분이다. &lt;br /&gt;
집의 구조는 혹서와 혹한을 견디기 위한 채광과 통풍이 잘 되도록 공간을 개방적으로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서울 도심의 한옥은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ㄷ 자형이나 ㅁ 자형으로 지은 것이 많다. &lt;br /&gt;
중앙의 마당을 중심으로 방, 부엌, 대청 등이 연결된 형태이다. 마당은 채광과 통풍을 돕는 공간이면서 가족들이 공동작업을 하거나 놀이를 하는 공간이다. 전주의 한옥은 서울의 한옥보다 규모가 크고 ㅡ자형이 대부분이다. &lt;br /&gt;
&lt;br /&gt;
실내공간은 전통적 바닥난방 방식의 온돌방과 난방이 안 되는 마루방으로 되어있다. 온돌방은 바닥에 고랑을 파고 그 위에 돌을 얹은 후 흙으로 바르고 기름을 먹인 한지로 마감을 한다. 온돌에 불을 지피는 구멍을 아궁이라고 하며, 실외에 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불길과 연기는 온돌 밑의 고랑을 지나 굴뚝으로 빠지면서 두꺼운 돌을 덥혀 불길이 꺼진 후에도 오랫동안 실내에 높은 온도를 공급한다. &lt;br /&gt;
 &lt;br /&gt;
주거생활이 아파트로 바뀐 후에도 온돌식 바닥난방 방식이 널리 쓰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난방방식이 바닥난방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인데, 한국은 이미 수백 년 간 바닥 난방방식을 사용해왔다.  &lt;br /&gt;
&lt;br /&gt;
한옥은 실내에 들어갈 때 신을 벗어야 한다. 방과 마루는 지면 보다 높게 되어있고, 부엌은 방과 마루보다 낮게 설치되어있고 부엌의 천정 위에는 낮은 지붕의 다락방을 설치하여 저장공간으로 쓰인다. 부엌에 접해있는 안방에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좌식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실내의 가구는 앉아서 사용하기 위해 작고 낮게 설계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부엌은 온돌방과 마루보다 낮게 위치하며, 전통방식으로는 이곳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 취사준비와 난방을 한꺼번에 해결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장작을 연료로 썼으나 1950년대부터 무연탄이 주연료가 되었다가 지금은 도시가스와 유류를 쓴다.    &lt;br /&gt;
&lt;br /&gt;
한옥의 크기는 ‘칸’으로 계산한다. 한 칸은 면적과 관계없이 4개의 기둥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서민의 집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하고, 양반과 부자들도 100간 이내로 짓도록 하는 국법이 있었다. &lt;br /&gt;
&lt;br /&gt;
도시 서민용 한옥은 대체로 10칸을 넘지 않는다. 각 공간은 가족 구성원에 따라 배분된다. 부엌과 부엌에 붙어있는 안방은 안주인이 기거하면서 가족들이 회합하고 식사를 하는 공간이다. 나머지 방들은 가장과 자녀들이 나누어 쓴다. 대청은 통풍이 가장 잘되고 마당과 연결된 공간으로 주로 여름에 가족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쓰인다. &lt;br /&gt;
&lt;br /&gt;
규모가 큰 양반이나 지주의 집은 넓은 대지에 본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후원 등 수십 칸으로 구성된다. 본채는 가족들이 기거하는 공간이고, 사랑채는 집주인이 기거하며 외부인사와 교류하는 공간이다. 행랑채는 하인들의 공간이며, 별당은 부인과 자녀들의 서재와 공부방이다. &lt;br /&gt;
&lt;br /&gt;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주거양식이 아파트로 바뀜에 따라 한옥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지금은 한옥 보존지역에 제한된 숫자만이 남아있다. 서울의 북촌과 서촌, 전주의 한옥마을이 대표적인 보존지역이다.  &lt;br /&gt;
&lt;br /&gt;
전통적인 양반과 지주가옥은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 등에서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옥구조에 대한 이미지를 사용해 한옥에 대해 형상화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왜 한국형태의 전통가옥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한옥의 장점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능하다면 한국인의 공간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보충설명을 덧붙여도 좋을 것 같다. &lt;br /&gt;
첫 페이지의 표 내용을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한옥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한옥은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기후에 적합하도록 혹한과 혹서를 이겨낼 수 있도록 온돌과 마루가 있다는 것, 나무, 돌, 흙 등 천연재료로 건축되었다는 것, 조선시대 신분에 따라 경제능력에 따라 가옥의 구조가 달랐다는 것, 남녀와 신분의 활동 공간이 구별되어 있었다는 것, 한옥에는 각 공간마다 가신(家神)이 있었다는 것 등을 특징으로 먼저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양반과 서민의 가옥의 구조를 각각 설명하고, 서민의 경우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의 기후에 따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면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글의 흐름을 다시 조정해서 비슷한 내용끼리 묶어 산발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글이 중복되어 쓰여지기도 하였다.&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D%95%9C%EB%B3%B5&amp;diff=224</id>
		<title>Draft 한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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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3: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복&lt;br /&gt;
|집필자=황정욱&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전통한복, 개량한복&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복은 한국의 전통 복식을 일컫는다. 특히 조선 시대에 입던 형태의 옷을 이르며, 현재는 평상복보다는 격식을 차리는 자리나 명절, 경사, 상례, 제례 때 주로 입는다. &lt;br /&gt;
유교사회이면서 신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복식은 사농공상의 사회적 신분과 관혼상제 등 의례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승려 기생, 역졸, 보부상 등 특수 계층에 따라 그 종류가 수 백 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입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 전부 사라졌다. 다만 불교의 승려들은 지금도 전통적인 복식을 고수하고 있다.  &lt;br /&gt;
한복은 몸매를 감싸주므로 그 결점을 덮어준다. 그러므로 작은 사람도 크게 보이게 입을 수 있으며, 마른 사람도 풍신하게 보이게 입을 수 있다. 또한 좌식생활에 맞도록 되어있다. &lt;br /&gt;
한복의 직물소재로는 전통적으로 비단, 무명, 모시, 삼베 등이 주로 쓰였다. 간혹 사치스러운 복장에는 담비, 토끼, 여우 등의 모피가 쓰이기도 했다. 겨울 옷은 솜을 넣어 보온을 강화하고 여름 옷은 부유층은 모시를, 서민층은 삼베를 즐겨 입었다. 근대화 이후에는 모직물을 소재로 쓰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여성용 한복 정장은 치마와 저고리, 두루마기로 되어있다. 치마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입으며, 저고리는 기장이 짧고 소매는 넓게 만들어져 있다. 저고리의 소매 끝부분과 겨드랑이 부분에 색깔이 다른 직물을 넣어 멋을 내기도 한다. 이를 끝동과 회장이라고 부른다. 옷을 여미는 데는 단추를 쓰지 않고 장식을 겸한 옷고름을 단다.    &lt;br /&gt;
&lt;br /&gt;
저고리와 두루마기의 목이 닿는 부분은 하얀색 천으로 동정을 단다. 동정이 더럽혀지면 새것으로 갈아서 입는다. 외출할 때는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예의였다. &lt;br /&gt;
&lt;br /&gt;
멋을 내기 위해 머리에 조바위를 쓰고 저고리 위에 모피로 안을 댄 조끼를 입기도 한다. 발에는 버선을 신고 굽이 없는 고무신을 신는다.  &lt;br /&gt;
&lt;br /&gt;
여자 어린이의 한복은 무지개 색 줄무늬의 색동저고리 등 색상이 매우 화려하다. 신혼의 여성은 녹의홍상이라 하여 초록색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 연로한 여성들은 색상이 요란하지 않게 입는 것이 상식이었다. 근대화 이후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긴치마대신 짧은 검정색 치마를 입고 밝은 빛 저고리를 입었다.     &lt;br /&gt;
&lt;br /&gt;
남성용 정장은 바지와 저고리와 두루마기로 되어있다. 바지는 기마민족의 전통에서 온듯 통이 넓고 헐렁헐렁하다. 이 때문에 좌식생활에도 잘 맞는다. 바지는 발목 부분에서 대님이라는 직물 끈으로 졸라매게 되어있다. 저고리는 여성의 것보다 기장이 길다. 조끼는 서양 복식에서 모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남성이 저고리 위에 헐렁하게 걸치는 마고자는 대원군이 중국의 복식을 본떠서 만들어 입은 데서 유래한다. 남성도 외출을 할 때는 반드시 두루마기를 걸치는 것이 예법에 맞는다. 최근에는 두루마기 소재로 모직물이 많이 사용된다. 남성의 저고리와 두루마기에도 동정을 단다. 발에는 버선을 신고 고무신, 구두 등을 신었다. 요즘은 양말과 구두를 신는다.    &lt;br /&gt;
&lt;br /&gt;
근대화 이전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한복은 물감을 들이지 않은 흰색이 주종이었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복 외에는 백색 옷을 찾아보기 어렵다. &lt;br /&gt;
&lt;br /&gt;
최근에는 개량한복이라는 이름아래 전통한복을 모체로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한복이 인기를 끌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amp;quot;[http://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quo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한복에 대한 설명은 잘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복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미지와 영상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한국문화원’, ‘한복진흥센터’의 한복소개, 자료실의 영상자료 등의 영상자료와 추가 읽기자료를 제공한다면 더 유용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lt;br /&gt;
또한 최근 경복궁, 인사동, 전주한옥마을 등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일상 또는 주요 장소에서 한복이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 원고의 출처 및 근거자료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한복의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lt;br /&gt;
- 여름 옷 소재를 부유층과 서민층으로 나눈 것처럼, 겨울옷도 비단과 무명으로 나누어 서술할 것&lt;br /&gt;
- 폐백할 때 신랑 신부가 입는 혼례복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좋을 듯하다. &lt;br /&gt;
- 조바위는 멋을 내기 위해 썼던 것보다 부녀자가 방한용으로 사용한 모자로 모든 계층에서 착용하였다. &lt;br /&gt;
- 양반 여성의 경우 남녀유별의 성리학 이념으로 인해 장옷 또는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렸던 것을 서술하면 좋겠다.&lt;br /&gt;
- 여성의 한복 장식품으로 노리개에 대해 서술하며, 여성들이 기원하는 마음을 노리개의 형상(고추, 가지, 박쥐, 원앙 등등)으로 표현했음을 서술해도 흥미가 있을 듯하다. 이로써 당시 과거 여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상도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 내용은 크게 문제가 없으나,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윤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0%EA%B5%90&amp;diff=220</id>
		<title>Draft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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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1: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현규: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유교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 |사건= |기록물= |개념용어=...&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유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성균관, 공자, 소수림왕&lt;br /&gt;
|장소/공간=성균관, 향교, 서원&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석전, 오륜, 관례, 계례, 당파, 오복제도, 성년의 날&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성균관에 따르면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며 “근본 사상은 인(仁)”이다.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유교의 사랑이란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유학의 근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분별(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長幼有序)”,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믿음(朋友有信)”을 뜻한다. 모두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lt;br /&gt;
유교의 교리는 일상의 생활과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하며 ‘예’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유교의 예경(禮經)으로 불리는 것 중 중요한 세 가지가 『주례』·『의례』·『예기』이다. 모두 한국인이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예의를 다룬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유교가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유교가 이미 자리 잡은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고구려는 유교에 근거를 두고 사서를 편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372 소수림왕 2년)을 설치했으며, 경전을 실생활에 활용했다. 유교는 계속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다만 유교를 종교로써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소양, 통치의 근본, 학문의 기초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같은 상황은 지금도 같다.&lt;br /&gt;
&lt;br /&gt;
이는 한국 정부의 통계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생활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가 어느 종교인 수보다도 많다. 그중 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 되는 것이 도덕과 예의이다.&lt;br /&gt;
&lt;br /&gt;
이는 유교가 종교의 개념보다는 일반 실생활속의 의례의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관혼상제가 종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생활이라고 생각한다.&lt;br /&gt;
&lt;br /&gt;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도 상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상례에는 상주가 특별한 복장을 착용하는 상복제도가 있다. 흔히 오복제도라고 부르는 격식은 촌수의 가깝고, 멀고에 따라 복식의 형태와 복식을 갖추는 기간이 각각 달랐다. 오죽하면 조선에서는 상복을 입는 격식과 기간을 얼마로 해야 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달라지자 정치세력이 갈라지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상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지금도 이 복식제도의 전통이 일부 가문에서는 옛 제도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유교뿐만 아니라 각 집안의 각종 종교와 절도에 접목하여 각각 다르게 행하고 있다. 한국 속담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것이 있다. 남의 일에 공연히 간섭하고 나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그 만큼 상례의 모든 것이 집집마다 다 다르니 참견하지 말라는 의미이다.&lt;br /&gt;
&lt;br /&gt;
이 기간 상주는 먹는 음식도 평소와 달라야했다. 상주는 부모를 돌아가시게 만든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으로 좋은 음식과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상중인 임금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을 단축하라고 상소하고, 임금이 신하인 상주에게 상례에 따르지 말고 일찍 고기를 먹으라고 권(명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lt;br /&gt;
&lt;br /&gt;
인간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는 데도 법도가 있다. 관례(남)와 계례(여)를 지나야 어른이 된다. 관례가 행해지는 날 남자는 여자처럼 길게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틀며, 관을 쓴다. 남자 나이 15살부터 20살 사이에 정월달 중에서 날을 받아서 한다. 계례가 행해지는 날 여자는 댕기 맺던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현재는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에 그 해 만 19살이 되는 성년을 대상으로 ‘성년의 날’ 행사를 연다.&lt;br /&gt;
&lt;br /&gt;
이 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에 합당한 몸가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었다.&lt;br /&gt;
&lt;br /&gt;
유교의 큰 행사로 문묘에서 공부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는데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악기와 제기를 사용한다. 석전대제 때는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은 선비학당, 한림원, 석전교육원, 예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에는 서원과 향교가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성균관, 무형문화재 제85호,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성균관(http://www.skk.or.kr)&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삼국사기&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에서 관혼상제 중 관례, 상례, 제례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으나, 혼례가 빠져있다. 밑 줄 친 부분 ‘지금도 …(중략)…의미이다’ 부분을 삭제하고 혼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lt;br /&gt;
|의견2=&lt;br /&gt;
- 성균관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성균관 OO에 따르면 ~~ : 해당 문구가 적혀있는 문헌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출처 OO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고조선 시대라고 하면 그 시기상 범주가 너무 넓지 않을까요? 유교가 고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한국에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종교인 수는 7만6천명에 가까울 뿐이다. → 한국에서 종교로서 유교를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7만 6천명으로 전 인구의 O%에 불과하다.&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어야 이후 상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상제를 특히 중시 여겼던 이유도 유교 교리 등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은 좀 줄여도 되겠습니다. 특히 상제의 내용 중 상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요약 정리해도 될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과거 여성의 계례는 혼인하는 날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염집 여성이 혼인하지 않고 머리를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확인해서 서술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이날은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예(責成人之禮)”에 있었다. → ‘성년의 날(관례?)’의 의미는 나이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운다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에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 관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amp;quot;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amp;quot;를 의미로, 주로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통치이념인 덕치, 인정, 군왕의 도리 등을 설명에 넣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인의예지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으면.&amp;lt;br/&amp;gt; &lt;br /&gt;
- 한국의 유교 사상(철학)의 발전 정도와 그 깊이, 특정 유학자에 대한 언급, 타국으로의 사상 전파 등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한국 유교만의 특징이 없을까요? 이에 대해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현규</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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