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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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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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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7-24T11:0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Understanding the Design and Function of Joseon's Royal Palaces&lt;br /&gt;
}}&lt;br /&gt;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궁(宮)과 궐(闕)===&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lt;br /&gt;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조선 세조|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조선 고종|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고종|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선 고종|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경복궁&amp;gt;&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3-18.경복궁_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lt;br /&gt;
파일:3-18.경복궁_근정전_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 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0.사정전_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 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lt;br /&gt;
파일:3-18.경복궁_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 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lt;br /&gt;
파일:3-18.경복궁_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lt;br /&gt;
파일:3-18.경복궁_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조선 태종|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애초 지형 위에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조선 순종|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에서 살았고 [[조선 순종|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조선 순종|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창덕궁 후원|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는 한반도를 강제점령한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창덕궁&amp;gt;&lt;br /&gt;
파일:1-10.궁궐_인정전_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lt;br /&gt;
파일:3-18.창덕궁_인정전_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lt;br /&gt;
파일:3-18.창덕궁_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lt;br /&gt;
파일:3-18.창덕궁_돈화문_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lt;br /&gt;
파일:3-18.창덕궁_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lt;br /&gt;
파일:3-18.창덕궁_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 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lt;br /&gt;
[[덕수궁|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조선 선조|선조]]가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 광해군|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조선 고종|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조선 고종|고종]]은 [[환구단|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을사조약|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조선 고종|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 고종|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조약|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조선 순종|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 순종|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덕수궁&amp;gt;&lt;br /&gt;
파일:1-11.중화전_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덕수궁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조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인조|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조선 인조|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046(K).jpg|center|500px|thumb]]&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대한제국]]&lt;br /&gt;
*[[경복궁]]&lt;br /&gt;
*[[경복궁 근정전]]&lt;br /&gt;
*[[창덕궁]]&lt;br /&gt;
*[[창덕궁 낙선재]]&lt;br /&gt;
*[[창덕궁 후원]]&lt;br /&gt;
*[[창경궁]]&lt;br /&gt;
*[[덕수궁]]&lt;br /&gt;
*[[덕수궁 중명전]]&lt;br /&gt;
*[[경희궁]]&lt;br /&gt;
*[[종묘]]&lt;br /&gt;
*[[사직]]&lt;br /&gt;
*[[문묘]]&lt;br /&gt;
*[[성균관]]&lt;br /&gt;
*[[조선 태조]]&lt;br /&gt;
*[[조선 태종]]&lt;br /&gt;
*[[조선 세조]]&lt;br /&gt;
*[[조선 고종]]&lt;br /&gt;
*[[조선 순종]]&lt;br /&gt;
*[[흥선대원군]]&lt;br /&gt;
*[[덕혜옹주]]&lt;br /&gt;
*[[임진왜란]]&lt;br /&gt;
*[[을미사변]]&lt;br /&gt;
*[[아관파천]]&lt;br /&gt;
*[[을사조약]]&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궁궐의 구조 및 장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해, 『궁궐 유교건축』, 솔, 2004.&lt;br /&gt;
|참고문헌2=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3=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창덕궁 창경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4=수류산방 편집부,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 수류산방, 2008.&lt;br /&gt;
|참고문헌5=허균, 『궁궐 장식』, 돌베개, 2011.&lt;br /&gt;
|참고문헌6=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2.&lt;br /&gt;
|참고문헌7=남호현,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궁궐 유교건축』'''은 궁궐·유교건축물들의 사진과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재미와 애정을 갖도록 도와준다. 궁궐, 종묘, 사직, 문묘, 향교, 서원 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통치자를 위한 건축, 제사를 위한 건축, 유교 성리학과 관계되는 건축으로 나뉜다. 한국건축의 특성이 나타나는 궁궐과 유교건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시대 주요 다섯 궁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유교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묘, 성균관, 향교, 서원건축의 성립과 발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주요 건출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부한 사진, 도면을 수록했다.&lt;br /&gt;
&lt;br /&gt;
조선조 궁궐 건물의 공간적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 및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덕치주의와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과, 민본주의를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현판과 주련이다. 현판은 건물의 고유한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기능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 산문 등을 새기거나 써서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련의 글씨는 선대의 이름난 서가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겼기 때문에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는 점이다. 즉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조선의 국가적 이념과 궁궐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삶의 멋과 운치까지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의 1편은 경복궁, 2편은 창덕궁과 창경궁, 3편은 덕수궁, 경희궁, 종묘, 칠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lt;br /&gt;
&lt;br /&gt;
'''『궁궐장식』'''은 유교정치의 이상과 옛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이 담긴 다양한 조각상과 그림, 문양, 건축물 등을 통해 궁궐장식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서초, 황룡, 사자 등의 형상으로 재현된 장식들뿐만 아니라, 당가, 곡병, 향로 등 궁궐 설치물들의 상징적, 문화적 연원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장식물과 조형물들을 현장감 있는 200여 컷의 컬러 도판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여기에 정확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들을 궁궐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를 심미적으로 잘 재현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궁궐 장식에 담긴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이다.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의 의례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피며 궁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를 토대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에 주목하며 궁궐의 배치, 공간 구성 등의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였다. 나아가 절대 권력의 취향, 근대화, 외세의 영향력 등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 덕수궁 등 조선 궁궐의 주거공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궐과 그 의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상)』,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2=홍순민,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하)』, 눌와, 2017.&lt;br /&gt;
|참고문헌3=황인희, 『궁궐 그날의 역사』, 기파랑, 2014.&lt;br /&gt;
|참고문헌4=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10.&lt;br /&gt;
}}&lt;br /&gt;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에서 저자는 그저 궁궐에 가서 보이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내어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다. 빈터도 흔적이기에 그곳에 있던 건조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도록, 현재 모습을 뛰어넘어 옛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도면과 그림, 사진 등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상권은 궁궐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에 해당한다. 궁궐이 자리한 서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 궁궐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떻게 짜인 공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궁궐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궁궐의 탄생과 운영, 변천까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한편, 책의 말미에는 궁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통문화에 대한 기본 관념 해설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하권은 서울의 다섯 궁궐을 돌아보는 답사를 위한 안내로 구성되었다. 저자의 시선이 임금과 신하들이 머물렀을 위엄 있고 화려한 전각들뿐만 아니라 궁궐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우물과 담장에도 미치고, 이미 건물이 사라진 빈터에서도 궁궐이 본래 기능을 하던 때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곡과 파괴의 상처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곳들에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각 궁궐의 현황 지도, 《동궐도형》과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이전 궁궐들의 전각 배치와 현재의 현황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를 실었다.&lt;br /&gt;
&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는 옛날 궁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동선을 쫓아 5대 궁궐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도처에 스며있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의 사진뿐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현대 기술로 섬세하게 복원한 궁궐들의 새로운 사진들까지 함께 실어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의 사상과 이념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궁궐에 담겨있다.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원색의 사진과 함께 살핀 책.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궁궐의 역사, 답사를 하는 뜻을 설명하고 경운궁, 경희궁,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 등 5개 궁궐을 샅샅이 살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2</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2"/>
				<updated>2024-10-16T02:54: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1</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1"/>
				<updated>2024-10-16T02:40: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0</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0"/>
				<updated>2024-10-16T02:34: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69</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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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6T02:33: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8</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8"/>
				<updated>2024-10-13T11:46: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King Jeongjo’s Visit to Hwaseong Fortress in 1795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Stories'''==&lt;br /&gt;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화성_융릉과_건릉}}&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화려한 왕릉 중 하나인 화성의 융릉과 건릉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곳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조선 왕조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건축적 유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융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묘소입니다. 사도세자는 조선 영조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들 정조는 후에 수원화성을 건설했습니다. 이처럼 융릉은 단순한 묘소가 아니라 조선 왕실의 역사가 응축된 장소입니다.&lt;br /&gt;
&lt;br /&gt;
건릉은 조선 정조의 묘소로, 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장소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를 기리며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한국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화성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요새로, 그 당시의 첨단 기술이 적용된 건축물이었습니다. 이곳은 정조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그의 업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더욱 쉽게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
현재 융릉과 건릉은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러 웹 리소스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3D 지도와 다양한 스토리를 통해 방문자들에게 더 생생한 경험을 제공합니다.&lt;br /&gt;
&lt;br /&gt;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수원_화성행궁과_화령전}}&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위대한 왕, 정조는 수원 화성행궁을 창건하여 이곳을 조선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화령전 안에 모셔져 있으며, 화령전은 운한각과 풍화당 같은 중요한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 화성행궁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 신풍루 등은 메타버스에서 3D 모델로 구현되어, 디지털 시대에 그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3D 모델은 문화 포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물의 역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의 전체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와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들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도시 계획의 정수를 보여줍니다.&lt;br /&gt;
&lt;br /&gt;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을 세운 이유는 단순한 왕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비전과 노력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King Jeongjo’s Visit to Hwaseong Fortress in 1795===&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정조의_화성행차(1795)}}&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1795년의 어느 봄날, 조선의 정조 임금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으로 성대한 행차를 떠났습니다. 이 여정은 8일간의 대규모 행사가 포함된 특별한 이벤트였으며, 이를 통해 정조는 자신의 통치력을 과시하고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려 했습니다.&lt;br /&gt;
&lt;br /&gt;
행차는 수원화성행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을 명한 곳으로,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과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낙남헌에서 문무과별시가 열렸고, 이는 낙남헌방방도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이어진 행사로는 수원향교에서의 알성례와 서장대에서의 군사훈련이 있었습니다. 특히 서장대야조는 밤에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그린 서장대야조도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중요한 날인 2월 14일에는 득증정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졌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봉수당에서 열렸습니다. 이 모든 순간들은 봉수당진찬도와 같은 그림들로 세세히 기록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정조는 이 모든 행사들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백성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는 한강주교환어를 통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 장면은 한강주교환어도에 담겨 있어, 당시의 감동적인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그의 정치적 비전과 가족 사랑이 어우러진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꼼꼼히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습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7</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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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3T11:45: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Stories'''==&lt;br /&gt;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화성_융릉과_건릉}}&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화려한 왕릉 중 하나인 화성의 융릉과 건릉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곳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조선 왕조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건축적 유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융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묘소입니다. 사도세자는 조선 영조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들 정조는 후에 수원화성을 건설했습니다. 이처럼 융릉은 단순한 묘소가 아니라 조선 왕실의 역사가 응축된 장소입니다.&lt;br /&gt;
&lt;br /&gt;
건릉은 조선 정조의 묘소로, 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장소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를 기리며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한국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화성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요새로, 그 당시의 첨단 기술이 적용된 건축물이었습니다. 이곳은 정조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그의 업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더욱 쉽게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
현재 융릉과 건릉은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러 웹 리소스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3D 지도와 다양한 스토리를 통해 방문자들에게 더 생생한 경험을 제공합니다.&lt;br /&gt;
&lt;br /&gt;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수원_화성행궁과_화령전}}&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위대한 왕, 정조는 수원 화성행궁을 창건하여 이곳을 조선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화령전 안에 모셔져 있으며, 화령전은 운한각과 풍화당 같은 중요한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 화성행궁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 신풍루 등은 메타버스에서 3D 모델로 구현되어, 디지털 시대에 그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3D 모델은 문화 포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물의 역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의 전체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와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들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도시 계획의 정수를 보여줍니다.&lt;br /&gt;
&lt;br /&gt;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을 세운 이유는 단순한 왕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비전과 노력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King Jeongjo’s Visit to Hwaseong Fortress in 1795===&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정조의_화성행차(1795)}}&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6</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6"/>
				<updated>2024-10-13T11:30: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Stories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Stories'''==&lt;br /&gt;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화성_융릉과_건릉}}&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화려한 왕릉 중 하나인 화성의 융릉과 건릉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곳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조선 왕조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건축적 유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융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묘소입니다. 사도세자는 조선 영조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들 정조는 후에 수원화성을 건설했습니다. 이처럼 융릉은 단순한 묘소가 아니라 조선 왕실의 역사가 응축된 장소입니다.&lt;br /&gt;
&lt;br /&gt;
건릉은 조선 정조의 묘소로, 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장소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를 기리며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한국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화성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요새로, 그 당시의 첨단 기술이 적용된 건축물이었습니다. 이곳은 정조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그의 업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더욱 쉽게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
현재 융릉과 건릉은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러 웹 리소스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3D 지도와 다양한 스토리를 통해 방문자들에게 더 생생한 경험을 제공합니다.&lt;br /&gt;
&lt;br /&gt;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수원_화성행궁과_화령전}}&lt;br /&gt;
&lt;br /&gt;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lt;br /&gt;
조선 시대의 위대한 왕, 정조는 수원 화성행궁을 창건하여 이곳을 조선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화령전 안에 모셔져 있으며, 화령전은 운한각과 풍화당 같은 중요한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 화성행궁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 신풍루 등은 메타버스에서 3D 모델로 구현되어, 디지털 시대에 그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3D 모델은 문화 포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물의 역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의 전체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와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들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도시 계획의 정수를 보여줍니다.&lt;br /&gt;
&lt;br /&gt;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을 세운 이유는 단순한 왕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비전과 노력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5</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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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3T11:29: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Stories'''==&lt;br /&gt;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화성_융릉과_건릉}}&lt;br /&gt;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수원_화성행궁과_화령전}}&lt;br /&gt;
&lt;br /&gt;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lt;br /&gt;
조선 시대의 위대한 왕, 정조는 수원 화성행궁을 창건하여 이곳을 조선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화령전 안에 모셔져 있으며, 화령전은 운한각과 풍화당 같은 중요한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수원 화성행궁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 신풍루 등은 메타버스에서 3D 모델로 구현되어, 디지털 시대에 그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3D 모델은 문화 포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물의 역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의 전체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와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들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도시 계획의 정수를 보여줍니다.&lt;br /&gt;
&lt;br /&gt;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을 세운 이유는 단순한 왕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비전과 노력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4</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4"/>
				<updated>2024-10-13T11:28: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Stories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Stories'''==&lt;br /&gt;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화성_융릉과_건릉}}&lt;br /&gt;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수원_화성행궁과_화령전}}&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8B%80:EpisodeLoader&amp;diff=14663</id>
		<title>틀:EpisodeLoader</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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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3T11:12: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새 문서: &amp;lt;onlyinclude&amp;gt; {{#tag:html| &amp;lt;iframe width=&amp;quot;90%&amp;quot; height=&amp;quot;700px&amp;quot; style=&amp;quot;border:0&amp;quot; src=&amp;quot;https://dh.aks.ac.kr/~sandbox/cgi-bin/Story03.py?db={{{db|}}}&amp;amp;project={{{project|}}}&amp;amp;key={{{title|}...&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tag:html|&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amp;quot; height=&amp;quot;700px&amp;quot; style=&amp;quot;border:0&amp;quot; src=&amp;quot;https://dh.aks.ac.kr/~sandbox/cgi-bin/Story03.py?db={{{db|}}}&amp;amp;project={{{project|}}}&amp;amp;key={{{title|}}}&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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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사용방법==&lt;br /&gt;
* 특정 에피소드의 네트워크 그래프를 생성하여 스토리텔링 데이터베이스에 적재하는 틀입니다. &lt;br /&gt;
* 데이터베이스(db)와 시맨틱 데이터 세트(project), 스토리/에피소드 문서의 제목(title)을 지정하세요.&lt;br /&gt;
* 에피소드 문서의 제목(title)은 에피소드 데이터의 id로 인식됩니다.&lt;br /&gt;
&lt;br /&gt;
&amp;lt;pre style=&amp;quot;width:500px&amp;quot;&amp;gt;&lt;br /&gt;
&lt;br /&gt;
{{EpisodeLoader | db = | project = | title =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디지털 큐레이션 지원 시스템]]&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2</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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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3T11:09: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Stories'''==&lt;br /&gt;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lt;br /&gt;
{{Story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화성_융릉과_건릉}}&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8B%80:StoryGraph&amp;diff=14661</id>
		<title>틀:StoryGraph</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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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새 문서: &amp;lt;onlyinclude&amp;gt; {{#tag:html| &amp;lt;iframe width=&amp;quot;90%&amp;quot; height=&amp;quot;700px&amp;quot; style=&amp;quot;border:0&amp;quot; src=&amp;quot;https://dh.aks.ac.kr/~sandbox/cgi-bin/Story03.py?db={{{db|}}}&amp;amp;project={{{project|}}}&amp;amp;key={{{title|}...&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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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사용방법==&lt;br /&gt;
* 스토리텔링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특정 에피소드의 네트워크 그래프를 출력하는 틀입니다. &lt;br /&gt;
* 데이터베이스(db)와 시맨틱 데이터 세트(project), 스토리/에피소드 문서의 제목(title)을 지정하세요.&lt;br /&gt;
* 에피소드 문서의 제목(title)은 스토리 데이터의 id로 인식됩니다.&lt;br /&gt;
&lt;br /&gt;
&amp;lt;pre style=&amp;quot;width:500px&amp;quot;&amp;gt;&lt;br /&gt;
&lt;br /&gt;
{{StoryGraph | db = | project = | title =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디지털 큐레이션 지원 시스템]]&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0</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60"/>
				<updated>2024-10-13T08:32: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Description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9</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9"/>
				<updated>2024-10-13T08:31: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Related Articles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ing Ritual and Celebration -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8</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8"/>
				<updated>2024-10-13T08:23: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lt;br /&gt;
=='''Description'''==&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 Depict, Honor, and Express - Traditional Korean Painting]]&lt;br /&gt;
*[[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7</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7"/>
				<updated>2024-10-13T08:22: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__TOC__&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 Depict, Honor, and Express - Traditional Korean Painting]]&lt;br /&gt;
*[[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6</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6"/>
				<updated>2024-10-13T08:22: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 Depict, Honor, and Express - Traditional Korean Painting]]&lt;br /&gt;
*[[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Multimedia'''==&lt;br /&gt;
===Gallery===&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Video===&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5</id>
		<tit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Filial_Son_and_Renaissance_Leader,_King_Jeongjo_of_Joseon&amp;diff=14655"/>
				<updated>2024-10-13T08:21: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lt;br /&gt;
[[King Jeongjo (Joseon)|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lt;br /&gt;
&lt;br /&gt;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Joseon)|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Joseon)|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Joseon)|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lt;br /&gt;
&lt;br /&gt;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egyujanggak|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lt;br /&gt;
&lt;br /&gt;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amp;quot;true-view landscapes&amp;quot;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lt;br /&gt;
&lt;br /&g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lt;br /&gt;
&lt;br /&gt;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King Sunjo (Joseon)|Sunjo]], became the next king.&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File:정조_일러스트.jpg|Illustration of Jeongjo&lt;br /&gt;
File:5-10.수원 화성 DSC_6332.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5-10.수원 화성 FSC_4107.JPG|Hwaseong Fortress (Suwon, Gyeonggi-do) &lt;br /&gt;
File:3-19.외규장각-ESC_8976.jpg|Outer (Oe) Gyujanggak on Ganghwado Island (Ganghwa-gun, Incheon)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20px&amp;gt;&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M-uUj7tUhIw&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The Resting Places of Kings and Queen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Document, Depict, Honor, and Express - Traditional Korean Painting]]&lt;br /&gt;
*[[Creators of a Unique &amp;quot;Genre&amp;quot; of Korean Painting, Kim Hong-do and Sin Yun-bok]]&lt;br /&gt;
&amp;lt;!--&lt;br /&gt;
*[[King Jeongjo (Joseon)]]&lt;br /&gt;
*[[King Yeongjo (Joseon)]]&lt;br /&gt;
*[[Crown Prince Sado (Joseon)]]&lt;br /&gt;
*[[Lady Hyegyeong (Joseon)]]&lt;br /&gt;
*[[King Sunjo (Joseon)|Sunjo]]&lt;br /&gt;
*[[Kim Hong-do]]&lt;br /&gt;
*[[Sin Yun-bok]]&lt;br /&gt;
*[[Joseon]]&lt;br /&gt;
*[[Ganghwado Island]]&lt;br /&gt;
*[[Hwasan Mountain, Suwon, Gyeonggi-do]]&lt;br /&gt;
*[[Changdeokgung Palace]]&lt;br /&gt;
*[[Hwaseong Fortress, Suwon|Hwaseong]]&lt;br /&gt;
*[[Gyujanggak]]&lt;br /&gt;
*[[Oegyujanggak]]&lt;br /&gt;
*[[Seoul National University]]&lt;br /&gt;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UNESCO Memory of the World]]&lt;br /&gt;
*[[UNESCO World Heritage]] &lt;br /&gt;
*[[True-view landscapes]]&lt;br /&gt;
*[[Genre paintings]]&lt;br /&gt;
--&amp;gt;&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8%98%EC%9B%90_%ED%99%94%EC%84%B1%ED%96%89%EA%B6%81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lt;br /&gt;
&lt;br /&gt;
&lt;br /&gt;
[[Category:Key Figures of Korea]]&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54</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54"/>
				<updated>2024-10-13T08:16: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관련항목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95%9C%EA%B5%AD%EC%9D%98_%EA%B8%B0%EB%8F%85%EA%B5%90&amp;diff=14653</id>
		<title>한국의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95%9C%EA%B5%AD%EC%9D%98_%EA%B8%B0%EB%8F%85%EA%B5%90&amp;diff=14653"/>
				<updated>2024-10-13T08:14: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rom Persecution to Prevalence - Christianity in Korea&lt;br /&gt;
}}&lt;br /&gt;
=='''한국의 기독교'''==&lt;br /&gt;
===기독교의 수용===&lt;br /&gt;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오던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보다 더 늦게 소개되었지만, 중국,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선교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 선비들의 학구적인 호기심과 자발적인 수용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소개되었다. &lt;br /&gt;
&lt;br /&gt;
병자호란(1636~1637) 이후부터 수시로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의 관원들과 그 수행원들은 당시 청에 소개되었던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서 간행한  『[[천주실의|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책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소개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기독교]]를 학술 이론으로 바라보고,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논평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생적인 기독교인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신앙 조직을 만들고 포교 활동을 벌였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이곳에서 [[예수회]] 출신 [[장 그라몽|그라몽(Grammont, Jean Joseph de,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기독교 박해===&lt;br /&gt;
조선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또 조선 국왕과 정부가 이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이들의 [[기독교]]가 유교적 사고와의 타협을 추구한 [[예수회]] 교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하고, 교조적인 선교 시책을 지시하면서 조선에서도 [[기독교]]와 유교적 규범 사이의 갈등이 노정되었다. 기독교인 중에 제사와 같은 유교적 의례를 중단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자 조선 정부는 [[기독교]]를 국가기강을 문란시키는 해악으로 지목하고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기독교]] 박해는 1791년 이후 조선이 서양 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교하였다.&lt;br /&gt;
&lt;br /&gt;
1876년부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제국과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었고, 암묵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lt;br /&gt;
&lt;br /&gt;
===개신교의 선교 계몽 활동===&lt;br /&gt;
조선의 문호개방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의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법으로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호러스 알렌|알렌(Allen, Horace Newton, 1858~193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웠고(1885),  감리회 목사 [[헨리 아펜젤러|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1885), [[메리 스크랜튼|스크랜튼(Scranton, Mary 1832~1909년)]]은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열었고(1886), 장로회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세워(1915) 교육계몽 활동을 펼쳤다. 이어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인을 억압하고 수탈할 때에 다수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 섰으며, 교육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lt;br /&gt;
&lt;br /&gt;
개신교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종교로만이 아니라 근대적인 서양 문명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한 인식을 배경으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다.&lt;br /&gt;
&lt;br /&gt;
===현대 한국의 기독교===&lt;br /&gt;
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교인을 보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온 나라에서 짧은 기간에 이렇듯 [[기독교]] 교세가 확장된 것은 최근 수십년간 한국인들이 치열하게 추구해 온 근대화, 산업화의 동반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기독교]]는 한국 사회가 서구 문명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의 시기에 [[기독교]]는 노동자와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개신교회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고 남한으로 근거지를 옮겨 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lt;br /&gt;
&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교황도 다녀간 대한민국 천주교 3대 성지를 가다(문화재청)'''&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NtOeXIVs_g0&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마테오 리치]]&lt;br /&gt;
*[[장 그라몽]]&lt;br /&gt;
*[[이승훈]]&lt;br /&gt;
*[[호러스 알렌]]&lt;br /&gt;
*[[헨리 아펜젤러]]&lt;br /&gt;
*[[호러스 언더우드]]&lt;br /&gt;
*[[메리 스크랜튼]]&lt;br /&gt;
*[[기독교]]&lt;br /&gt;
*[[예수회]]&lt;br /&gt;
*[[한국전쟁]]&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의 기독교 수용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마테오 리치 지음, 송영배 옮김, 『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lt;br /&gt;
|참고문헌2=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lt;br /&gt;
|참고문헌3=박경미 외,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lt;br /&gt;
|참고문헌4=김권정, 『근대전환기 한국사회와 기독교 수용』, 북코리아, 2016.&lt;br /&gt;
}}&lt;br /&gt;
1583년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온 이탈리아 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이다.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에 대해 자신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저술한 『천주실의』를 번역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판본을 비교했을 뿐 아니라, 불어판과 영어판을 구해 살펴보면서 원본에 가까운 직역을 시도했다. 『천주실의』는 중국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lt;br /&gt;
&lt;br /&gt;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는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에 관한 연구서이다.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문과 서학 이해, 천주교 수용과 녹암계의 서학사상, 척사론의 형성과 척사운동의 전개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은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을 중심으로 서양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을 살펴보는 책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은 서양의 기독교 신앙을 한국의 종교 문화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한국의 정신 문화를 바탕으로 서양의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주체적으로 실천했다. 아울러 일본에 점령당한 조선인으로서의 경험을 기독교 신앙에 근거를 두고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 사상을 형성했다. 이 책은 그러한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삶과 사상을 담고 있다. 진정한 한국적 기독교 사상의 의미와 실천에 대한 통찰과 해석을 얻게 된다.&lt;br /&gt;
&lt;br /&gt;
'''『근대전환기 한국사회와 기독교 수용』'''은 21세기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기독교의 역할을 조망한 책이다. 기독교가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전해준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결단과 실천 속에서 수용되고 있었음을 검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천주교 박해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해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사상사, 2007.&lt;br /&gt;
|참고문헌2=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 인물과사상사, 2007.&lt;br /&gt;
|참고문헌3=오영환, 『순교자의 땅』, 가톨릭출판사, 2012.&lt;br /&gt;
}}&lt;br /&gt;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면서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정리하였다. 여러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하고 현재화하였으며,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역사의 진실을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특정한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운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교과서가 지니는 경직성에서 벗어나 역사를 생동감 있게 몽타주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으며,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내고 있다. 제1권에서는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의 역사를 살펴본다. 제2권에서는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의 역사를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순교자의 땅』'''은 한국 천주교 관련 해외 성지와 사적지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된 해외 성지와 사적지들을 직접 답사하고 정리한 성지순례 안내서이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라 밖에서도 우리 신앙 선조들과 선교사들의 고난의 여정과 순교자적 삶을 소개하고 있다. 초기 교회 때부터의 성지와 사적지 264개소를 소개한 단행본 『순교의 맥을 찾아서』와 순교자 관련 성지를 중심으로 125개소를 소개한 국내편 휴대용 안내서 『가족이 함께 가는 성지순례』에 이어서 해외편 성지와 사적지를 총 망라한 순례 안내서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현대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2009.&lt;br /&gt;
|참고문헌2=한국교회사연구회편, 『한국 기독교 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1998.&lt;br /&gt;
|참고문헌3=김권정,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론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15.&lt;br /&gt;
|참고문헌4=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아카데미, 2016.&lt;br /&gt;
|참고문헌5=강명숙, 『일제강점기 한국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lt;br /&gt;
}}&lt;br /&gt;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는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조명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개신교가 전통사회, 사회주의, 군사독재, 친미반공 이데올로기 등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한다. 근대 기독교를 다룬 부분에서는 개화기 지식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와 근대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와 서구 문물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견해를‘전통적 중화주의’, ‘현실적 중화주의’, ‘일본식 서구주의’, ‘미국식 서구주의’등 네 가지 관점으로 검토한다. 또한 선교사들의 문명관, 조선관, 개화론 등에 총체적 접근을 모색하면서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현대와의 접점을 탐색한다. 개항과 문명개화의 문제, 김일성과 기독교의 관계,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 뉴라이트의 이념과 세계관 등 흥미로운 주제들을 흥미롭게 다루는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시도한다.&lt;br /&gt;
&lt;br /&gt;
'''『한국 기독교 사상』'''은 12명의 교회사학자들이 한국기독교사상을 6가지 주제로 나누어 세계교회사적 입장과 한국교회사적 입장에서 논구한 저서이다. 한국 교회와 근본주의, 오순절 운동, 자유주의, 경건주의, 신정통주의, 청교도주의로 나누어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었다. &lt;br /&gt;
&lt;br /&gt;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론과 민족운동』'''은 1920~30년대 기독교 민족운동이란 개념 아래 한국기독교세력이 전개한 민족운동론과 민족운동의 내용과 성격을 고찰하였다. 3ㆍ1운동 이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기독교세력의 민족운동을 당시 국내 민족운동진영의 동향과 관련하여 접근하였고, 기독교 민족운동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일제하 민족운동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시작해, 박정희 정권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과정까지를 실증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또한 휴전회담을 둘러싼 논란, 승공 담론의 확산, 전쟁고아 사업과 가족계획 사업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이슈에서 한국 기독교가 남긴 자취를 재발견함으로써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역사를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불러내고,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만든 이념과 가치관의 근원에 한국 기독교가 있음을 밝힌다.&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한국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사상』'''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해 풀어내는 일본 강점기시대 한국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사상을 소개한다. 본서는 1920년대의 사회변화에 직면하여 나타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을 이해하려는 데에 일차적 목적이 있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관한 인식을 고찰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였는가를 살피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F%85%EB%8F%84%EC%9D%B4%EC%95%BC%EA%B8%B0&amp;diff=14652</id>
		<title>독도이야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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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3T08:13: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Nucleus(토론)의 편집을 Wlghkwk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bout Dokdo Island&lt;br /&gt;
}}&lt;br /&gt;
=='''독도이야기'''==&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2-12.독도1 Dokdo Island.jpg|독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2-12.독도2 Dokdo.jpg|독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2-12.독도 표지석 Dokdo Island.jpg|독도 표지석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독도]]에는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인구 1만여 명,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이사부(異斯夫, ?~?)]]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조선(1392~1910)]]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울릉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이 명확하게 수록된 자료로서 [[울릉도]]와 부속도서가 조선의 통치 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안용복(安龍福, ?~?)]]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 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조선|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 전역과 죽도(울릉도에 붙은 작은 섬) 석도(돌섬, 그 당시 독도의 이름) 등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권의 주장은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수로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기간을 제외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사료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독도]]의 한국 지배를 무시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보며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2008년 일본 정부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도록 하였고, 2012년부터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교육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였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독도]]&lt;br /&gt;
*[[울릉도]]&lt;br /&gt;
*[[이사부]]&lt;br /&gt;
*[[안용복]]&lt;br /&gt;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독도의 지정학적, 경제적 가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기태, 『바다자연과 지리적 중요성』, 탐구당, 2016.&lt;br /&gt;
|참고문헌2=김명기, 『독도총람』, 선인, 2015.&lt;br /&gt;
|참고문헌3=국립수목원, 『한국의 독도·울릉도 유용한 민속자원식물』, 국립수목원, 2014. &lt;br /&gt;
}}&lt;br /&gt;
'''『바다자연과 지리적 중요성』'''은 독도의 지리적, 경제적 가치의 모든 부분들을 매우 상세하게 정리하여 다루고 있다. 독도의 기후와 수온 등 자연적 조건에서부터, 해양 생산과 수중 생태자원, 식생, 지하 자원, 그리고 지정학적 중요성 측면에서 군사적 가치까지 독도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들을 망라하고 있다. 독도가 왜 한국의 영토이며, 한국의 영토이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독도총람』'''은 독도 영유의 역사성에서 시작하여 독도 관련 기록, 일본의 독도에 대한 침탈과정과 함께 독도의 실권을 확인하게 된 여러 조약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상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법률과 국제조약 차원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하는 동시에 배타적 경제수역의 공간 안에 놓여진 만큼 그 경제적 지리적 가치를 함께 검토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와 시야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 독도 수호를 위한 역대 정부의 정책들도 함께 다루고 있어 그 공과를 평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독도·울릉도 유용한 민속자원식물』'''은 독도에 분포하고 있는 식물자원의 현황과 그 성격들을 자세하게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도록의 형태로 많은 사진자료 위주로 구성된 이 책은 독도에 다양한 식물자원들이 실제 우리에게 어떤 자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면서 그 분포 현황과 생김새 등을 세심하게 정리하여 제공하고 있다. 독도의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항상 한국의 실리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실상 독도는 그곳에서만 자생하는 여러 식물자원들이 있으며, 그 식물자원들의 존재는 독도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는 만큼 그 본연의 의미와 가치만으로도 한국인에게 독도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알리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해와 인식의 지형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lt;br /&gt;
*'''역사 속에서 소개되는 독도의 존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상균, 『19세기 일본지도에 독도는 없다』, Book Star, 2016. &lt;br /&gt;
|참고문헌2=호사카 유지, 『독도, 1500년의 역사』, 교보문고, 2016.&lt;br /&gt;
|참고문헌3=다케우치 다케시, 『(獨島=竹島 문제) '고유영토론'의 역사적 검토』, 선인, 2014. &lt;br /&gt;
}}&lt;br /&gt;
'''『19세기 일본지도에 독도는 없다』'''는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19세기 일본의 지도에 독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입각해 일본 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희박함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역사성을 규명하고자한 저서들이 대부분 한국의 역사 속에서 그 근거를 찾고자 하였던 데 반해, 이 책은 독도와 관련하여 한국 이외의 역사적 사실들, 특히 일본에 초점을 맞춰 집중적으로 그 근거 없음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따라서 독도와 관련한 일본 측 주장의 오류를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독도, 1500년의 역사』'''는 독도의 역사성과 한국 영토로서의 역사적 근거들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책이다. 일본인 대학교수가 정리하여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주장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저자는 독도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배를 통해 어떻게 강점되었으며, 일본 측이 말하는 문헌적 근거는 무엇인지를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제3장에서 독도가 왜 한국 땅인지 다양한 사료와 역사적 근거들을 제시하며 집중적으로 논증하였고,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독도 문제를 양국간에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독도와 그 일대가 일종의 평화선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문제를 안타까워하면서 영토문제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역사의 힘이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친한파 일본인의 시각으로 정리한 독도관련 책이라는 부수적인 흥미로움도 있다.  &lt;br /&gt;
&lt;br /&gt;
'''『(獨島=竹島 문제) '고유영토론'의 역사적 검토』'''는 일본인 저자의 시각에서 정리된 독도 문제 관련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저자 다케우치 다케시가 바로 ‘다케시마’가 일본의 영토임을 조례로 확인했던 시마네현 출신의 향토사학자라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적 맥락에서 독도 영유권을 검토하는 한편, 근대 제국주의 일본 시대를 거쳐 현재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관되게 독도의 문제는 처음부터 독도를 지칭하는 용어가 통일되지 못했던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조선에서는 울릉도, 우산도, 독도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본에서는 죽도와 송도 등으로 표현되면서 그 실체가 더욱 모호해지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 조인 당시 독도=죽도라는 개념을 분리해 합의하면서 일이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인 현역 향토사학가를 통해 정리된 독도 영유권 문제를 통해서 보다 객관적인 근거와 사실들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안용복의 활동과 내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병우, 『일본인이 기억하는 조선인 안용복』, 지성인, 2015.&lt;br /&gt;
|참고문헌2=김명기, 『안용복의 도일활동과 국제법』, 책과 사람들, 2011. &lt;br /&gt;
}}&lt;br /&gt;
'''『일본인이 기억하는 조선인 안용복』'''은 조선 후기 안용복의 활동과 일본내에서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발굴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저자는 안용복이 도일해 접촉했던 대상인 ‘대마도번’에서 기록한 『죽도기사(竹島紀事)』와 일본 역사가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저술한 『죽도고(竹島考)』에 등장하는 안용복 관련 기사 일체를 추출해 그 내용을 분석하였다. 이로써 일본인 시각에서의 안용복에 대한 인식과, 안용복을 통해 전달받은 죽도 즉 독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안용복의 도일과 그 행적은 근대 이전 조선과 일본 에도 막부 사이에 독도라는 섬을 두고 그 영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확인한 가장 확실한 사실이며,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과 해방 후 논란 속에서도 그 역사적 근거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라 일본인에게 남겨진 기억을 통해 안용복의 도일과 독도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안용복의 도일활동과 국제법』'''은 안용복의 도일활동과 독도관련 역사적 사실들을 국제법상 효력의 관점으로 분석한 흥미로운 책이다. 안용복의 독도 관련 활동은 독도의 영유권 문제에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는 역사적 근거인데, 이 책은 안용복 활동에 대한 일본 측 대응이 바로 독도 영유권과 주권에 대한 승인의 의미를 지닌다는 측면으로 서술해 나가고 있다. 전근대 시기 접촉 사안을 가지고 국제법 적용을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영유권과 관련하여 역사적 근거로 이야기하기에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바라볼 때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F%99%EB%B0%A9_%EA%B5%B0%EC%9E%90%EC%9D%98_%EB%82%98%EB%9D%BC,_%EC%A1%B0%EC%84%A0&amp;diff=14651</id>
		<title>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F%99%EB%B0%A9_%EA%B5%B0%EC%9E%90%EC%9D%98_%EB%82%98%EB%9D%BC,_%EC%A1%B0%EC%84%A0&amp;diff=14651"/>
				<updated>2024-10-13T08:09: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Country of the Eastern Noblemen - Joseon&lt;br /&gt;
}}&lt;br /&gt;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개국에 즈음한 당면 과제===&lt;br /&gt;
[[조선 태조|이성계]]가 개창한 [[조선|조선왕조]]는 1392년에 성립되어 약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고려]] 말 많은 공을 세운 명망 높았던 장군으로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혼란한 정세를 평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려]] 말 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성리학자 집단인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lt;br /&gt;
&lt;br /&gt;
당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첫째, 고려왕이었던 우왕의 혈통에 대한 문제, 둘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개혁, 셋째,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권문세족들을 제거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 넷째,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 중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 다섯째, 여러 폐단을 야기한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 등이었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을 축출하고 왕이 된 태종===&lt;br /&gt;
[[파일:5-6.근정전-_DSC_1264.jpg|thumb|200px|left|경복궁 근정전]]&lt;br /&gt;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한때 [[신진사대부]]들은 둘로 나뉘기도 하였다. 이 때 [[조선 태조|이성계]]는 그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마침내 [[조선]] 건국에 찬성하는 [[신진사대부]]를 위주로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다. 그는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의 신임 속에 중국의 동의를 얻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도읍을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정했으며, 왕궁인 [[경복궁]]을 짓고 새나라 [[조선]]의 여러 국가제도들을 마련해 가며 정치를 이끌어갔다. &lt;br /&gt;
&lt;br /&gt;
그러자 신하인 [[정도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해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몇몇 왕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태조|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조선 태종|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왕위에 올라 [[조선 태종|태종]]으로 등극하였다. &lt;br /&gt;
   &lt;br /&gt;
===태종이 다지고 세종이 꽃피운 태평성대 ===&lt;br /&gt;
[[파일:3-7.세종대왕-DSC_4141.jpg||thumb|200px|right|세종대왕 동상(서울 종로구 세종대로)]]&lt;br /&gt;
[[조선 태종|태종]]은 국왕이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모든 국정을 자신이 직접 관장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했으며, 왕권에 방해가 되는 외척세력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때문에 그 토대 위에 등극한 [[조선 세종|세종]]은 다져진 왕권 위에서 찬란한 문화정치를 꽃 피울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성리학]]이 꿈꾸는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데 집중하였던 [[조선 세종|세종]]은 신하들이 마음껏 정치를 논의할 수 있도록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해 국왕의 권력을 신하에게 나눠주었다. 또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각종 농사기술을 기록한 책들을 보급하고 측우기와 물시계 등의 발명을 장려하였다. 특히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한글]]을 창제하여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글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북쪽으로 4군과 6진을 개척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줄곧 [[조선 세종|세종]]과 그 아들인 문종의 치세를 제일가는 태평성대로 칭송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사림과 훈구의 갈등, 사화===&lt;br /&gt;
어린 조카를 제거하고 왕이 된 세조 이래로 한동안 조선은 정치적 혼란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여러 정치적 격변 속에 성장한 공신 세력들은 자신의 위세를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선의 지배계층에서 대두되면서 사림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훈구라 불리던 공신 세력들을 비판하며 조선의 혁신을 주장했던 사림은 여러 현안에서 그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급기야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던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4대 [[사화]]’이다. &lt;br /&gt;
&lt;br /&gt;
사림에 대한 훈구의 박해는 대략 조선 중기 명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그들은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 지식인들을 기르는 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 이후 훈구세력들이 모두 제거되면서 사림은 어느덧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lt;br /&gt;
   &lt;br /&gt;
===당쟁의 와중에 맞은 임진왜란===&lt;br /&gt;
선조 즉위를 계기로 사림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리학]] 사회를 만들고자 다양한 목소리들을 냈다. 하지만 각 학파들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견해에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다시 정파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것이 곧 ‘당쟁’이다. &lt;br /&gt;
&lt;br /&gt;
당쟁은 중앙정치의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선조 당시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겪었던 가장 큰 전란이었으며, [[조선]]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대략 [[조선]]의 인구와 토지의 1/3이 사라졌으며, 도읍지 한양의 궁궐이 불길에 휩싸이고 각종 문서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일본군의 침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조선]] 정부의 무능함은 [[조선]]의 국토와 국민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lt;br /&gt;
&lt;br /&gt;
명군의 참전으로 전기를 마련한 [[조선]]의 관군은 [[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권율|권율(權慄, 1537~1599)]] 등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승병]]들의 활약도 대단히 컸다. 1598년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그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 caption='민족기록화로 그려진 임진왜란'&amp;gt;&lt;br /&gt;
파일:김형구-한산대첩(이순신)-1975s.jpg|한산대첩&amp;lt;br/&amp;gt;(김형구作, 1975년)&lt;br /&gt;
파일:오승우-행주대첩(권율)-1975s.jpg|행주대첩&amp;lt;br/&amp;gt;(오승우作, 1975년)&lt;br /&gt;
파일:강대운-진주성싸움(김시민)-1975s.jpg|진주성싸움&amp;lt;br/&amp;gt;(강대운作, 1975년)&lt;br /&gt;
파일:김기창-명량대첩(이순신)-1975s.jpg|명량대첩&amp;lt;br/&amp;gt;(김기창作, 1975년)&lt;br /&gt;
파일:박서보-왜장감화(사명당)-1976s.jpg|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amp;lt;br/&amp;gt;(박서보作, 1976년)&lt;br /&gt;
파일:박광진-승군(서산대사)-1976s.jpg|승군을 지휘하는 휴정&amp;lt;br/&amp;gt;(박광진作, 1976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두 번의 호란이 남긴 상처===&lt;br /&gt;
전쟁이 끝나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부적으로 여러 전후 복구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밖으로는 새롭게 성장하는 [[여진|여진족]], 즉 후금을 의식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균형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중립적인 외교를 펼쳐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후금을 배척하는 세력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거기에 정통성 논란이 계속되다가 결국 어머니 인목대비와 동생 영창대군을 유폐하거나 죽인일로 정변이 일어났다. 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를 잃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명나라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며 후금을 적대시하였다. 더욱 강성해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두 차례 쳐들어온다. 이른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조선은 청나라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지금의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와 강화를 체결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에 편입되었다. &lt;br /&gt;
&lt;br /&gt;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즉 양란을 거치며 [[조선]]은 피폐해진 사회를 회복시키는 한편 무너진 질서와 기강을 다시 바로잡는 데 주력한다. 물론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걸고 조선 사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효종 대에 와서는 급기야 청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기획하면서 이른바 ‘북벌’을 준비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의 르네상스===&lt;br /&gt;
[[파일:정조_일러스트.jpg|thumb|200px|right|정조 일러스트]]&lt;br /&gt;
하지만 본격적인 부흥기는 조선 후기 숙종과 [[조선 영조|영조]], 그리고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정조]]의 출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숙종 이후 [[조선 영조|영조]]와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정조]]에 이르는 대략 120년간의 정치에서 [[조선]]은 다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조선 영조|영조]]는 그를 위해 ‘탕평’이라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lt;br /&gt;
&lt;br /&gt;
[[탕평책]]의 목적은 학문적 배경에 따라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던 신하들을 강력한 왕권으로 제어하는 것에 있었다. 그 결과 한동안이나마 국왕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다시금 정치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토대 위에서 대를 이은 국왕들은 조선 사회를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 등장===&lt;br /&gt;
그러나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뒤 그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그러한 균형은 다시 깨지게 되었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까지 대략 3대에 걸친 60여 년 간의 [[조선]]은 다시 왕권이 약화되고 국왕의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세도정치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출현한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중요한 관직은 대부분 세도가문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돌아갔으며, 그들로부터 자행된 부정부패 역시 심각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내부적으로 분쟁과 소요가 난무하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사회에 진입하여 놀라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안에서의 세력 다툼에만 몰두한 나머지 아무 변화도 알지 못하였으며 [[조선]]과 서양 근대국가와의 간극은 더욱더 커져버리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몰락한 500년 왕조===&lt;br /&gt;
결국 철종이 죽고 등극한 어린 [[조선 고종|고종]]을 대신하여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야 세도정치는 종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쇄국정책이란 이름으로 서양의 문물제도를 철저하게 막았던 탓에 조선은 여전히 변화와 개혁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 고종|고종]]이 장성하면서 급기야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왕비였던 [[명성황후|민자영]]과 그 외척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이 그리는 이상사회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이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불법과 강요로 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1910년에 이르러 [[조선|조선왕조]]는 그 500여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과학 강국===&lt;br /&gt;
[[조선]]은 건국 초기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많은 문화적 업적을 이루어냈다. 해시계와 물시계, 자격루와 칠정산과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이 동원된 업적들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새로 개창된 [[조선]]을 보다 부국강병한 나라로 키우기 위한 의지가 이러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때 축적된 조선의 과학기술과 지식은 [[거북선]]과 [[비격진천뢰]], [[신기전]]과 같은 첨단 무기를 탄생시켰고, 결국 위기에서 국가를 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때 제작된 [[한글]]은 우리 한민족이 높은 수준의 문화민족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의 위상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사대부 문화와 민간 예술===&lt;br /&gt;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문화와 학문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조선의 [[성리학]]은 당대 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그 깊이를 더하였다. 한편에서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실용적이고 현실지향적인 학문 경향이 나타나 성행하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서화와 미술을 망라한 문화 전반의 경향 역시 당시 사대부 중심으로 꽃피었고 그들이 지향하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문인화와 서예, 그리고 도자기를 위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lt;br /&gt;
&lt;br /&gt;
한편 민간에서는 자유분방한 문화가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민요와 판소리, 그리고 민화 등은 당시 조선의 예술과 미술이 결코 지배계층인 사대부 중심만으로 흐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아 기발하고 창의적인 소재와 주제, 자유로운 내용과 모습으로 그려진 조선 후기의 민간 예술은 조선의 사대부 중심의 예술과는 또 다른 당대 의식과 인식의 면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File:008(K).jpg|조선&lt;br /&gt;
File:029(K).jpg|조선시대 국제 무역&lt;br /&gt;
File:023(K).jpg|임진왜란&lt;br /&gt;
File:044(K).jpg|임진왜란(조선 해군의 항전)&lt;br /&gt;
File:041(K).jpg|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터&lt;br /&gt;
File:045(K).jpg|조선 왕릉 위치&lt;br /&gt;
File:046(K).jpg|서울의 5대 궁궐&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고려]]&lt;br /&gt;
*[[조선 태조]]&lt;br /&gt;
*[[조선 태종]]&lt;br /&gt;
*[[조선 세종]]&lt;br /&gt;
*[[조선 영조]]&lt;br /&gt;
*[[조선 정조]]&lt;br /&gt;
*[[조선 고종]]&lt;br /&gt;
*[[정도전]]&lt;br /&gt;
*[[이순신]]&lt;br /&gt;
*[[권율]]&lt;br /&gt;
*[[신진사대부]]&lt;br /&gt;
*[[경복궁]]&lt;br /&gt;
*[[한글]]&lt;br /&gt;
*[[위화도회군]]&lt;br /&gt;
*[[임진왜란]]&lt;br /&gt;
*[[병자호란]]&lt;br /&gt;
*[[거북선]]&lt;br /&gt;
*[[의병]]&lt;br /&gt;
*[[승병]]&lt;br /&gt;
*[[성리학]]&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존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5.&lt;br /&gt;
|참고문헌2=계승범, 『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 역사비평사, 2014.&lt;br /&gt;
|참고문헌3=김돈, 『조선중기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9. &lt;br /&gt;
}}&lt;br /&gt;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전기 훈구와 사림의 대립 양상과 그 결과로 벌어진 사화의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다. 훈구와 사림을 전혀 다른 계통성을 지닌 정치세력으로 보고자 했던 기존의 시각에 비해 저자는 훈구와 사림 모두 사대부의 정체성을 지녔으며, 국가의 통치 조직 안에 수렴되는 과정에서 자연히 분화된 존재라는 견해를 제시하여 그 실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lt;br /&gt;
&lt;br /&gt;
'''『중종의 시대』'''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중종 시대의 정국 동향과 그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저자는 조선의 유교화를 한국의 민주화와 대비하면서 당시 사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국의 분위기는 곧 조선 전기 권력의 분산과 정치 참여 기회의 확산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울러 ‘사림의 시대’로 지칭되기도 하는 조선 전기의 분위기를 살펴보면서 사림이 지향했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중기 정치사 연구』'''는 조선의 정치사적 전개에 있어 이 시기 성격이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 준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단순히 조선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이 중기를 넣어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훈구와 사림이 대립하며 공론과 여론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던 이 시기가 바로 중기로서 시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정치사적 흐름에 따라 상세한 사실 문제를 제시하는 한편 사림의 출현과 활동이 조선 역사의 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이해를 위한 거시적인 시야를 요구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당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우인수, 『조선후기 영남 남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5. &lt;br /&gt;
|참고문헌2=이태진, 김백철 공저,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태학사, 2011.&lt;br /&gt;
|참고문헌3=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아름다운날, 2007.&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영남 남인 연구』'''는 조선 후기 남인 세력의 중심지였던 영남지역 사대부들에 대한 심층적 연구 성과로 제출된 책이다. 남인 세력은 숙종대 일시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제외하고 줄곧 야당의 역할을 해 왔던 세력이다. 지역적으로 영남이라는 특성과 학맥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학문 경향, 정치적으로 남인으로서 가지는 그들의 정체성과 실체에 대해 정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아울러 그 학맥과 계보 상에서 주요한 인물들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은 조선후기 당쟁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조처로써 추진된 탕평정책을 집중 분석한 책이다. 영조에서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 시행된 탕평정책에 대하여 탕평의 원리에서부터 그 정치적 동향, 사상적 기반, 탕평에 따른 왕정체제의 정비과정에 이르기까지 탕평 전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당쟁의 연장선 상에서 탕평에 이르는 조선후기 정치적 환경을 보다 상세하게 살필 수 있는 책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 당쟁사』'''는 사림들의 독점적인 정치가 무르익었던 선조 즉위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전체 당쟁의 전개와 흐름을 충실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흔히 붕당의 폐단으로 지칭되는 당시의 당쟁 양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학맥에 근거한 정파간의 정치적 충돌로서 당쟁이 발생한 배경과 그 접점이 무엇인지를 시계열적으로 세밀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당쟁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충실한 도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사상적 흐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권오영,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양상』, 일지사, 2011. &lt;br /&gt;
|참고문헌2=주자사상연구회,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 혜안, 2009.&lt;br /&gt;
|참고문헌3=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 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lt;br /&gt;
}}&lt;br /&gt;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양상』'''은 조선 성리학의 이학적 핵심과 조선 유학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특히 사상적으로 분화와 전개가 활발하였던 조선 후기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주자성리학’이 아니라 ‘조선성리학’으로 그것을 규정하고 조선만의 성리학적 특징과 독창성의 면면들을 도출해내기에 주력하였다. 조선의 사상적 지형을 중국에서의 연장이 아닌 조선만의 심화와 독창성의 단계로 이해하고자 한 저자의 시야를 통해 거시적인 조망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은 조선 건국 이후 깊이 뿌리내린 주자학(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과정을 정리하면서 조선 후기 등장한 새로운 사조인 실학의 내용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실학이 주자학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종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배경과 내용을 정밀하게 수록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주자학의 내용을 매우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단순한 학문의 경향을 설명하기보다는 사상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한 측면이 더 크다. 따라서 실학도 그 연장선 상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사상으로서의 주자학에 대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자에게는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lt;br /&gt;
&lt;br /&gt;
'''『조선 유학의 개념들』'''은 조선시대 완숙해진 성리학의 발전과 분화와 관련하여 조선의 유학의 개념적인 요소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개념서이다.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나라임을 말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과 개념에 대해 충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과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기본적인 성리학의 개념과 용어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조선시대의 이해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사의 중요 흐름]]&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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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사의 중요 흐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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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Kedmiladsenso (토론)의 13346판 편집을 되돌림&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 An Overview of Korean History&lt;br /&gt;
}}&lt;br /&gt;
&lt;br /&gt;
#[[한민족의 여명기, 선사시대]]&lt;br /&gt;
#[[역사시대의 문을 열다, 고조선]]&lt;br /&gt;
#[[한반도의 용광로, 삼국시대]]&lt;br /&gt;
#[[초원을 달리고 대륙을 지배한 기상, 고구려]]&lt;br /&gt;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해상왕국의 번영, 백제]]&lt;br /&gt;
#[[철의 나라, 잊힌 연맹국가, 가야]]&lt;br /&gt;
#[[동해의 태양이 비추는 나라, 신라]]&lt;br /&gt;
#[[고구려를 닮은 기상, 발해]]&lt;br /&gt;
#[[용의 후손들이 꿈꾼 고구려 부흥의 꿈, 고려]]&lt;br /&gt;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황제국임을 천하에 고한다, 대한제국]]&lt;br /&gt;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독립을 외치다,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의 위기 뒤에 찾아온 태풍의 전야, 해방정국]]&lt;br /&gt;
#[[영광과 번영의 이름, 대한민국]]&lt;br /&gt;
#[[또 하나의 민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lt;br /&gt;
&lt;br /&gt;
[[분류:한국사의 중요 흐름]]&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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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동해와 일본해: 두 이름을 가진 바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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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A Sea with Two Names: The East Sea or the Sea of Japan?&lt;br /&gt;
}}&lt;br /&gt;
=='''동해와 일본해: 두 이름을 가진 바다'''==&lt;br /&gt;
===식민통치의 잔재, ‘일본해’===&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파일:동해지도_일러스트.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러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바다를 어떤 이름으로 표기할 것인가는 국제적인 문제이다. 제국주의가 흥성하던 시절에 강대국 임의로 표기한 지리 명칭은 민족 국가가 들어서면서 국가 간 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국에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명칭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 있다. 바로 한반도와 일본, 러시아 연해주와 사할린 섬에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 동쪽 바다인 ‘[[동해]]’이다. 한국은 [[동해]]가 역사적으로 '동양해(Oriental Sea)' 또는 '한국해(Sea of Korea)'로 불려 왔으므로 '동해(East Sea)'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일본해(Sea of Japan)'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lt;br /&gt;
현재 외국 교과서와 지리부도 등 대부분은 이 바다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세계 주요국에서는 [[동해]]를 일본해로 인식하고 표기하는 게 대세였다. 그렇게 된 것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점령하여 지명을 바꾸고, 이 지명이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을 때 국제협약([[국제수로기구]])에 의해 표준화되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1929년 일본의 강압적 식민통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국제수로기구]]에서 처음으로 세계 해양 명칭의 표준안을 결정하여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라는 해도집을 발간하였다. 이 때 ‘[[동해]]’는 일본의 주장에 따라 ‘일본해’로 표기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해양과 바다의 경계』는 1953년 발간된 제3판이며, 여기에도 ‘일본해’로 단독 표기되어 있다. 한국은 1957년 [[국제수로기구]]에 가입하였고, 1992년부터 ‘일본해’ 명칭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일본은 ‘일본해’ 단독 표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lt;br /&gt;
&lt;br /&gt;
일본이 ‘일본해’ 단독 표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마테오 리치가 1602년 만든 최초의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 ‘[[동해]]’ 해역을 ‘일본해’라 표기를 하여 그 이름이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고, ‘일본해’ 명칭이 [[국제수로기구]]의 승인을 통해 한국과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일본해’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오랜 역사적 기록, ‘동해’===&lt;br /&gt;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외국에서 발간된 고지도들을 살펴보면 이 해역이 단일 명칭이 아니고 'Sea of Korea', 'East Sea', 'Oriental Sea'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동해]]’ 명칭은 기원전 37년에 해당하는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동명왕에 대한 기술, [[광개토대왕릉비]](414년)에 등장할 정도로 2,000년 이상 된 고유한 명칭이었다. 반면에 일본에서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된 것도 8세기 즈음이었으므로 ‘일본해’ 명칭 또한 일본에서 본래부터 사용된 이름이 아니었다.  &lt;br /&gt;
&lt;br /&gt;
16세기까지 일본에는 자기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 이름을 붙인 지도가 거의 없었다. 일본의 지도 제작은 거의 전적으로 자기 나라를 표현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반대로 조선은 16세기부터 「팔도총도(八道總圖)」, 「아국총도(我國摠圖)」, 「동람도(東覽圖)」 등 ‘동해’라는 단어를 쓰는 지도를 수없이 많이 갖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19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일본 지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은 두 나라 사이의 큰 바다에 ‘조선해’라는 이름을 붙인 반면, 일본 해안의 동쪽 바다를 칭할 때에만 ‘일본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가 정점을 찍던 19세기 말이 되자 일본의 모든 지도와 지구본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에 ‘일본해’를 사용했다. 일본에서 ‘[[동해]]’나 ‘조선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지도는 1894년에 발간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직후 오직 ‘일본해’만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이 유사 이래 써오던 이름은 모두 지워지고 ‘일본해’로 대체된 것이다. 이 새로운 이름은 1910년의 한일 병합으로 확정되었다. &lt;br /&gt;
&lt;br /&gt;
1929년 [[국제수로기구]]에서 ‘일본해’ 명칭을 승인한 것은 한국이 일본의 강점기하에서 모든 고유 명칭을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 당하던 시기에 일본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된 특수한 상황이므로 ‘일본해’ 명칭이 국제적인 표준으로 합의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lt;br /&gt;
&lt;br /&gt;
===나란히 쓰이는 동해와 일본해===&lt;br /&gt;
현재 한국인들은 ‘[[동해]]’ 지역의 명칭에 대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논쟁이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지명 분쟁에 관한 국제 규범인 유엔지명표준화회의 및 [[국제수로기구]]의 결의에 의거하여, 한일 양국이 공통의 명칭에 합의하기 전까지는 ‘동해’와 ‘일본해’ 두 명칭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적극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세계 지식인들의 동의를 얻어 저명한 지도 제작 업체, 내셔날 지오그래픽, 월드 애틀러스, 론리 플래닛 등의 출판물, 교과서 및 언론 등에서 ‘일본해’ 단독 표기에서, 점차 ‘동해ㆍ일본해’ 병기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특히 주요 세계지도 대부분을 제작하는 G7 국가들 가운데 일본을 제외한 조사에서도 동해·일본해 병기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동해]]&lt;br /&gt;
*[[국제수로기구]]&lt;br /&gt;
*「[[곤여만국전도|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lt;br /&gt;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광개토대왕릉비]]&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다른 나라의 해양분쟁 사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고충석, 『이어도 해양분쟁과 중국 민족주의』, 한국학술정보, 2013.&lt;br /&gt;
|참고문헌2=이석용, 『국제 해양분쟁 해결』, 한남대학교출판부, 2007.&lt;br /&gt;
|참고문헌3=한국국제정치학회, 『21세기 해양갈등과 한국의 해양전략』, 2006.&lt;br /&gt;
}}&lt;br /&gt;
'''『이어도 해양분쟁과 중국 민족주의』'''는 현재 이어도의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마찰을 겪고 있는 가운데, 잠재적으로 해양분쟁의 상대국가가 될 수 있는 중국의 실체를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영토분쟁과 해양분쟁은 곧 민족주의의 발현으로 나타난 부작용으로 보고 중국의 경우 그 민족주의의 요소가 해양분쟁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우선 중국의 민족주의가 가지는 특징을 분석하면서 현재 그것이 진화해 가고 있음도 밝히고 있다. 또 중국에게 있어 이어도를 불러싼 분쟁은 단순한 영유권 분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이슈가 있다고 보고 그것에 따른 영향과 적절한 대응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따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국은 현재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과 영토 및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 분쟁의 실체와 이면, 그리고 적절한 대응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책은 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lt;br /&gt;
&lt;br /&gt;
'''『국제 해양분쟁 해결』'''은 국제적으로 발생하는 해양분쟁의 내용과 그 해결 과정들을 상세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구체적인 발생 사례보다는 해양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는 국제사회의 제도와 구조, 절차 등에 대해 정밀하게 정리하였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해양과 관련한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 협약의 종류와 내용, 그것을 조율할 다양한 국제기구의 존재와 그 활동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한일간 해양분쟁을 바라보면서 단순한 민족 감정에 의지해 반응하기보다는 구체적인 국제법상 절차와 과정에 대한 이해 속에 사안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lt;br /&gt;
&lt;br /&gt;
'''『21세기 해양갈등과 한국의 해양전략』'''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해양분쟁의 사례들을 확인하면서 이것을 해결해 나갈 한국의 전략과 방안을 모색해 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해양분쟁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해결하는 것이 곧 안보의 문제라고 보고 그것은 전략적인 사고와 접근 속에 국제적인 협력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전략으로 해군력의 증강과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결국 해양분쟁에 대한 다각도의 전략 마련은 강력한 해군력 증강과 확보 속에서 가능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라도 안보적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해양분쟁과 관련해 단순한 민족주의적 감정과 영토적 욕심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를 전략적이고 안보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독자들의 인식의 틀을 확산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동해 명칭 관련 연구성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윤명철, 『현 동아시아 해양국경분쟁의 역사적 근거 연구와 대안 탐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16. &lt;br /&gt;
|참고문헌2=최장근, 『일본의 영토분쟁 : 일본제국주의 흔적과 일본내셔널리즘』, 백산자료원, 2005. &lt;br /&gt;
|참고문헌3=김신, 『동해의 경계와 명칭』, 지영사, 2004.&lt;br /&gt;
}}&lt;br /&gt;
'''『현 동아시아 해양국경분쟁의 역사적 근거 연구와 대안탐구』'''는 동아시아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해양국경분쟁과 관련하여 이를 역사적으로 접근하고자 한 성과이다. 해양국경분쟁의 경우 그 영유권과 영해적 권리가 역사성에 근거를 두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각 사례의 역사적 근거 및 배경 등을 살펴 그 해법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일본과의 동해 문제뿐만 아니라 중국과 이어도 문제를 겪고 있는 만큼 그 역사적 근거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해 명칭 문제는 곧 동해에 대한 영유권을 넘어 역사적으로 누구의 주된 활동 공간이었는지를 중심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 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영토분쟁 : 일본제국주의 흔적과 일본내셔널리즘』'''은 일본을 둘러싼 다양한 영토분쟁의 본질은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와 강렬하게 유지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적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해 가고 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체결된 대일평화조약에서 영토의 처리가 명료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다분히 정치성을 반영한 결과였기 때문에 현재 영토분쟁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전후 조약체결 당시 특수성이 있었으나, 결국은 최종적으로 미국 주도의 정치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동해의 명칭을 일본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성향에는 일정부분 미국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보았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일본이 전개해온 대략적인 영토분쟁의 사례와 내용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제국주의에 대한 일본의 동경과 내셔널리즘적 성향을 강조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동해의 경계와 명칭』'''은 대양과 바다를 구분하면서 바다로써 동해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 명칭으로써 ‘동해’의 타당성을 정리해 제시하고자 하였다. 저자는 동해 표기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동해가 일본해로 바뀐 과정을 살피고 동해가 처해있는 국제적 환경의 특징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또 바다의 명칭 가운데 특정국가 명칭이 부여된 것은 일본해가 유일하다고 주장하면서 ‘일본해’ 표기의 시작이 되었던 20세기 초반 『대양과 바다의 경계』의 출판 과정과 그 내용 속에서 동해의 명칭을 둘러싼 문제의 실마리와 해결점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개정판이 출간되고 있는 『대양과 바다의 경계』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검토하면서 그 안에 일본해 표기와 내용, 그 밖에 다른 해양 명칭의 사례와 그 내용들을 비교 검토하여 의미와 해법을 찾고 있다. 동해 명칭을 둘러싼 미시적인 문제와 관련해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lt;br /&gt;
*'''독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학준, 『독도연구 : 한일간 논쟁의 분석을 통한 한국 영유권의 재확인』, 동북아역사재단, 2012. &lt;br /&gt;
|참고문헌2=존 반 다이크 , 『독도 영유권에 관한 법적쟁점과 해양경계선』,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8. &lt;br /&gt;
}}&lt;br /&gt;
'''『독도연구』'''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 오랜 논쟁의 과정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한국의 영유권을 증명하는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동해를 둘러싼 해양분쟁에는 독도 문제가 함께 결부되어 있어 독도에 대한 영유권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 역시 필요한데, 한국과 일본이 각자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와 그 논쟁의 전개를 분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기존 역사성에 근거한 입증뿐만 아니라 국제법상의 내용에 대한 검토까지 진행함으로써, 다방면에서 독도의 한국 영유권 확인을 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겠다. &lt;br /&gt;
&lt;br /&gt;
'''『독도 영유권에 관한 법적쟁점과 해양경계선』'''은 한일간 첨예한 영토분쟁의 중심지인 독도 문제와 그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국제법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일본은 줄곧 독도의 영유권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보내 해결하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국제법상 독도 영유권에 대한 판결은 누구에게로 귀속될 수 있을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조사와, 세부적인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상세히 소개하는 가운데, 독도를 둘러싼 역사적 근거와 그 사실 여부가 판결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 한일간 해양경계가 확정되고 배타적 경제수역이 설정되었을 때 이것이 일정하게 독도 영유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도 보았다. 저자는 말미에 논쟁 해결을 위해 가용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결론지었다. 독도의 영유권을 당연히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보다 시야를 넓혀 국제법적, 국제적 시야에서 조망할 때 그 인식은 더욱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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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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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Ssi168 (토론)의 11837판 편집을 되돌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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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자료 이용시 출처 표기는 다음과 같이 합니다. &lt;br /&gt;
&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2017. https://dhlab.aks.ac.kr/~Korea101/wiki/&lt;br /&gt;
&lt;br /&gt;
All content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 website can be freely used. The attribution for using the materials is as follows:&lt;br /&gt;
&lt;br /&gt;
Academy of Korean Studies, “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 2017. https://dhlab.aks.ac.kr/~Korea101/wiki/&lt;br /&gt;
&amp;lt;/center&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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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C%80%EB%AC%B8&amp;diff=6505</id>
		<title>대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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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9-01T12:31: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Park sonk kran (토론)의 6308판 편집을 되돌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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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2017. https://dhlab.aks.ac.kr/~Korea101/wiki/&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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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ontent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 website can be freely used. The attribution for using the materials is as follows:&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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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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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2017. https://dhlab.aks.ac.kr/~Korea101/wiki/&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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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of Korean Studies, “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 2017. https://dhlab.aks.ac.kr/~Korea101/wiki/&lt;br /&gt;
&amp;lt;/center&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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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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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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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2017. https://dhlab.aks.ac.kr/~Korea101/wiki/&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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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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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6-29T00:32: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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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center&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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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6-29T00:31:5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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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8B%80:%EC%B0%B8%EA%B3%A0%EB%AC%B8%ED%97%8C&amp;diff=4778</id>
		<title>틀:참고문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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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강혜원 (토론)의 4777판 편집을 되돌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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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참고문헌8|}}} | &amp;lt;t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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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noinclude&amp;gt;&lt;br /&gt;
==사용법==&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lt;br /&gt;
|참고문헌2=&lt;br /&gt;
|참고문헌3=&lt;br /&gt;
|참고문헌4=&lt;br /&gt;
|참고문헌5=&lt;br /&gt;
|참고문헌6=&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예시==&lt;br /&gt;
===입력===&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참고문헌2=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lt;br /&gt;
|참고문헌3=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lt;br /&gt;
|참고문헌4=&lt;br /&gt;
|참고문헌5=&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참고문헌2=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lt;br /&gt;
|참고문헌3=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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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lt;br /&gt;
===입력===&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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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참고문헌2=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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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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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결과===&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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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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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법==&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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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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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예시==&lt;br /&gt;
===입력===&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참고문헌2=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2001.&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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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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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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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Imag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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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윤상구 작가 */&lt;/p&gt;
&lt;hr /&gt;
&lt;div&gt;__TOC__&lt;br /&gt;
=='''윤상구 작가'''==&lt;br /&gt;
&amp;lt;gallery&amp;gt; &lt;br /&gt;
파일:1-1.고인돌-ESC_8997.jpg|강화지석묘(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81.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83.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96.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98.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정림사 탑-ESC_9265.jpg|백제 말기에 세워진 정림사지 5층 석탑(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lt;br /&gt;
파일:1-3.당포성-DSC_0244.jpg|고구려의 유적 당포성(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lt;br /&gt;
파일:1-3.당포성-ESC_8715.jpg|고구려의 유적 당포성(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lt;br /&gt;
파일:1-4.강화 연개소문비ESC_8993.jpg|강화도에 세워진 연개소문 유적비&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20.jpg|고구려의 유적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 &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32.jpg|고구려의 유적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 &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53.jpg|고구려의 유적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 &lt;br /&gt;
파일:1-4.중원고구려비-FSC_0415.jpg|중원 고구려비(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lt;br /&gt;
파일:1-4.중원고구려비-FSC_0424.jpg|중원 고구려비(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lt;br /&gt;
파일:1-5.계백장군 동상-ESC_9178.jpg|백제 계백장군 동상(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lt;br /&gt;
파일:1-5.계백장군 동상-ESC_9178_1.jpg|백제 계백장군 동상(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lt;br /&gt;
파일:1-5.계백장군 사당-ESC_9172.jpg|백제 계백장군 사당(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lt;br /&gt;
파일:1-5.계백장군묘-ESC_9161.jpg|백제 계백장군 묘(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lt;br /&gt;
파일:1-5.공산성-ESC_9356.jpg|백제 공산성(충남 공주시 금성동) &lt;br /&gt;
파일:1-5.백제 성왕 동상-ESC_9260.jpg|백제 성왕 동상(충남 부여읍 구아리)&lt;br /&gt;
파일:1-5.백제 의자왕 묘-ESC_9200.jpg|백제 의자왕 가묘(충남 부여 능산리)&lt;br /&gt;
파일:1-5.백제 의자왕묘-ESC_9195.jpg|백제 의자왕 가묘(충남 부여 능산리)&lt;br /&gt;
파일:1-7. 신라 감은사-FSC_0202.jpg|신라 감은사 탑(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lt;br /&gt;
파일:1-7. 신라 감은사-FSC_0208.jpg|신라 감은사 터(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lt;br /&gt;
파일:1-7.신라 안압지-FSC_0280.jpg|신라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왕동)&lt;br /&gt;
파일:1-7.신라 안압지-FSC_0281.jpg|신라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왕동)&lt;br /&gt;
파일:1-7.신라 안압지-FSC_0285.jpg|신라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왕동)&lt;br /&gt;
파일:1-7.신라 포석정-FSC_0308.jpg|신라 포석정(경북 경주시 배동)&lt;br /&gt;
파일:1-7.신라 포석정-FSC_0310.jpg|신라 포석정(경북 경주시 배동)&lt;br /&gt;
파일:1-7.신라 포석정-FSC_0313.jpg|신라 포석정(경북 경주시 배동)&lt;br /&gt;
파일:1-9. 고려 공민왕 사당 DSC_7610.jpg|고려 공민왕 사당(서울 종로구 훈정동)&lt;br /&gt;
파일:1-9.고려 공민왕 사당 DSC_7610.jpg|고려 공민왕 사당(서울 종로구 훈정동)&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25.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32.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34.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36.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공양왕릉-DSC_8862.jpg|고려 공양왕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lt;br /&gt;
파일:1-9.공양왕릉-DSC_8863.jpg|고려 공양왕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lt;br /&gt;
파일:1-9.공양왕릉-DSC_8866.jpg|고려 공양왕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lt;br /&gt;
파일:1-9.무량수전_파노라마2.jpg|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1-10.궁궐 인정전 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1-10.사정전 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_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1.석고-DSC_7329.jpg|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석고(서울 중구 소공로)&lt;br /&gt;
파일:1-11.원구단-DSC_7338.jpg|황제의 제천 행사를 위한 환구단 부속 건물 황궁우(서울 중구 소공로)&lt;br /&gt;
파일:1-11.유릉-석상.jpg|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lt;br /&gt;
파일:1-11.중화전 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서울 중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1-FSC_5805.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2-FSC_5807.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3-FSC_5808.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4-FSC_5877.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5-FSC_5883.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6-FSC_5887.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lt;br /&gt;
파일:1-12.서대문형무소-.jpg|옛 서대문형무소(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독립공원) &lt;br /&gt;
파일:1-12.서대문형무소-FSC_5857.jpg|옛 서대문형무소(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독립공원) &lt;br /&gt;
파일:1-12.윤봉길-ESC_7660.jpg|윤봉길 의사 동상(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2.조선총독부- DSC_0169.jpg|옛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2.조선총독부- ESC_7685.jpg|옛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2.조선총독부- ESC_7688.jpg|옛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3.끊어진 다리-DSC_0021.jpg|끊어진 임진강 다리(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1-13.끊어진 다리-ESC_7428.jpg|끊어진 임진강 다리(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1-13.이승만대통령-ESC_8234.jpg|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서울 중구 장충단로) &lt;br /&gt;
파일:1-13.이승만대통령-ESC_8235.jpg|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서울 중구 장충단로) &lt;br /&gt;
파일:1-13.인천상륙작전-ESC_7115.jpg|인천상륙작전 기념물(인천 연수구 청량로) &lt;br /&gt;
파일:1-13.인천상륙작전-ESC_7129.jpg|인천상륙작전 기념물(인천 연수구 청량로) &lt;br /&gt;
파일:1-13.인천상륙작전-ESC_7161.jpg|맥아더 장군 동상(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자유공원) &lt;br /&gt;
파일:1-13.자유공원 인천상륙작전-ESC_7151.jpg|인천상륙작전 기념물(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자유공원) &lt;br /&gt;
파일:1-14.국회-ESC_7818.jpg|대한민국 국회의사당(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로)&lt;br /&gt;
파일:1-14.국회-ESC_7828.jpg|대한민국 국회의사당(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로)&lt;br /&gt;
파일:1-14.역대 대통령ESC_8192.jpg|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초상(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lt;br /&gt;
파일:1-14.태극기 광장-DSC_0127.jpg|태극기 광장(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4.태극기 광장-DSC_0134.jpg|태극기 광장(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5.임진각 거리 표지판 DSC_0009.jpg|임진각 표지판(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2-5.당항성-FSC_0084.jpg|신라와 당나라를 이어준 중요 지역 당항성(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lt;br /&gt;
파일:2-5.당항성-FSC_0107.jpg|신라와 당나라를 이어준 중요 지역 당항성(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lt;br /&gt;
파일:2-5.당항성-FSC_0111.jpg|신라와 당나라를 이어준 중요 지역 당항성(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lt;br /&gt;
파일:2-5.신라 중앙탑-FSC_0475.jpg|신라 통일의 상징물 중앙탑(충북 충주 탑평리)&lt;br /&gt;
파일:2-5.신라 중앙탑-FSC_0490.jpg|신라 통일의 상징물 중앙탑(충북 충주 탑평리)&lt;br /&gt;
파일:2-5.신라 중앙탑-FSC_0963.jpg|신라 통일의 상징물 중앙탑(충북 충주 탑평리)&lt;br /&gt;
파일:2-5.원효길-_GSC9720.jpg|원효길 표지석(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lt;br /&gt;
파일:2-5.원효길-_GSC9722.jpg|원효길 표지석(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lt;br /&gt;
파일:2-6.고려궁터-ESC_8962.jpg|강화도 고려 궁터 정문(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lt;br /&gt;
파일:2-6.대몽항쟁전승기념탑-FSC_0681.jpg|대몽항쟁전승기념탑(충북 충주시 안림동) &lt;br /&gt;
파일:2-6.대몽항쟁전승기념탑-FSC_0697.jpg|대몽항쟁전승기념탑(충북 충주시 안림동) &lt;br /&gt;
파일:2-6.처인성-DSC_0214.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6.처인성-ESC_8587.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6.처인성-ESC_8588.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6.처인성-ESC_8589.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7.독립문-FSC_5917.jpg|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lt;br /&gt;
파일:2-7.독립문-FSC_5921.jpg|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lt;br /&gt;
파일:2-7.삼전도비- DSC_9021.jpg|삼전도비(서울 송파구 잠실동)&lt;br /&gt;
파일:2-7.연미정-ESC_9000.jpg|정묘호란의 항복 장소인 연미정(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lt;br /&gt;
파일:2-7.연미정-ESC_9003.jpg|정묘호란의 항복 장소인 연미정(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lt;br /&gt;
파일:2-7.연미정-ESC_9013.jpg|정묘호란의 항복 장소인 연미정(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러시아공사관에서 나온 고종이 살았던 덕수궁(서울 중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2-8.동학 무명용사 위령탑-FSC_5739.jpg|동학농민운동 무명 용사 위령탑(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lt;br /&gt;
파일:2-8.동학 사발통문 작성의 집-FSC_5715.jpg|동학농민운동 사발통문 작성의 집(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lt;br /&gt;
파일:2-8.동학 전봉준 동상-FSC_5690.jpg|전봉준 동상(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26.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27.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30.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36.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9.동해-ESC_8351.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352.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368.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419.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420.jpg|동해&lt;br /&gt;
파일:2-10.민영환-FSC_5832.jpg|을사조약 후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동상(서울 종로구 우정국로)&lt;br /&gt;
파일:2-10.민영환-FSC_5833.jpg|을사조약 후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동상(서울 종로구 우정국로)&lt;br /&gt;
파일:2-10.중명전 내부-DSC_5341.jpg|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던 중명전 내부(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늑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2-11.소녀상-FSC_5840.jpg|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lt;br /&gt;
파일:2-13.양반집 대문-_GSC9705.jpg|조선 시대의 양반집 감고당 대문(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2-13.양반집-_GSC9706.jpg|조선 시대의 양반집 감고당(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2-13.양반집-ESC_9303.jpg|조선 시대의 양반집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1.수문장 교대식-DSC_1276.jpg|경복궁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3-1.수문장 교대식-DSC_1278.jpg|경복궁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3-1.수문장 교대식-DSC_4665_1.jpg|경복궁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3-2.장고-DSC_5155_0025.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5157_0027.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5158_0028.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5159_0029.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6527.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6535.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3.한옥-_GSC9703.jpg|한옥 감고당(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3-3.한옥-ESC_9296.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3.한옥-ESC_9297.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3.한옥-ESC_9298.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3.한옥-ESC_9302.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4.국악기-DSC_7496.jpg|종묘 제례에 쓰이는 국악기&lt;br /&gt;
파일:3-4.국악기-ESC_5596.jpg|종묘 제례에 쓰이는 국악기&lt;br /&gt;
파일:3-4.국악기-ESC_5623.jpg|종묘 제례에 쓰이는 국악기&lt;br /&gt;
파일:3-4.사물놀이-ESC_7920.jpg|사물놀이&lt;br /&gt;
파일:3-6.도예촌-_GSC9634.jpg|이천 도예촌(경기 이천시 경충대로)&lt;br /&gt;
파일:3-6.조선시대 청화백자-FSC_0999.jpg|청화백자(충주박물관)&lt;br /&gt;
파일:3-7.세종대왕-DSC_4141.jpg|세종대왕 동상(서울 종로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3-7.주시경-FSC_5853.jpg|주시경 기념물(서울 종로구 한글가온길)&lt;br /&gt;
파일:3-9.전통무예-ESC_7929.jpg|전통 무예 시범(국립현충원) &lt;br /&gt;
파일:3-9.전통무예-ESC_7931.jpg|전통 무예 시범(국립현충원) &lt;br /&gt;
파일:3-9.전통무예-ESC_7939.jpg|전통 무예 시범(국립현충원) &lt;br /&gt;
파일:3-10.광성보 화포-FSC_0782.jpg|강화도 광성보의 화포(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lt;br /&gt;
파일:3-10.덕수궁 신기전-DSC_6955.jpg|덕수궁에 전시된 신기전(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3-10.덕수궁 신기전-DSC_6957.jpg|덕수궁에 전시된 신기전(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3-11.심곡서원- DSC_8594.jpg|심곡서원(경기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lt;br /&gt;
파일:3-11.심곡서원- DSC_8607.jpg|심곡서원(경기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lt;br /&gt;
파일:3-11.파산서원-DSC_8735.jpg|파산서원(경기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lt;br /&gt;
파일:3-11.파산서원-DSC_8737.jpg|파산서원(경기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086.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087.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107.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108.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24.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27.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28.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30.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31.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5.불교(금산사)-ESC_9105.jpg|김제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lt;br /&gt;
파일:3-15.불교(금산사)-ESC_9109.jpg|김제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lt;br /&gt;
파일:3-15.불교(금산사)-ESC_9127.jpg|김제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lt;br /&gt;
파일:3-15.불교(대원지)-FSC_0450.jpg|충주 미륵대원지(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lt;br /&gt;
파일:3-15.불교(대원지)-FSC_0456.jpg|충주 미륵대원지(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lt;br /&gt;
파일:3-15.불교(불회사 법당) 내부.DSC_3076.jpg|나주 불회사 법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5.불교(운주사)-DSC_3055.jpg|화순 운주사 석불(전남 화순군 대초리)&lt;br /&gt;
파일:3-15.불교(운주사)-DSC_3064.jpg|화순 운주사 석불(전남 화순군 대초리)&lt;br /&gt;
파일:3-15.불교-DSCN0482.jpg|서울 길상사 연등(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lt;br /&gt;
파일:3-15.불교-DSCN0496.jpg|서울 길상사 연등(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lt;br /&gt;
파일:3-15.불교-DSCN0501.jpg|서울 길상사 연등(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lt;br /&gt;
파일:3-16.개신교 십자가-.jpg|개신교 교회 십자가 &lt;br /&gt;
파일:3-16.성공회성당-_FSC7181.jpg|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서울 중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3-17. 돌장승-DSC_3018.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19.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20.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21.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22.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분황사 당간지주-FSC_0214.jpg|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3-17.분황사 당간지주-FSC_0216.jpg|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3-17.분황사 당간지주-FSC_0217.jpg|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3-17.솟대-DSC_0090.jpg|솟대 &lt;br /&gt;
파일:3-17.솟대-DSC_0091.jpg|솟대 &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_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_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근정전 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돈화문 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인정전 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76.jpg|강화도 외규장각(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85.jpg|강화도 외규장각 표지판(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86.jpg|강화도 외규장각 표지판(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lt;br /&gt;
파일:3-20.건원릉(동구릉)-0138.jpg|동구릉 건원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경릉-동구릉.jpg|동구릉 경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광릉-석상.jpg|광릉 석상(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lt;br /&gt;
파일:3-20.목릉(동구릉)- 0113.jpg|동구릉 목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선릉(선정릉(성종)-0049.jpg|선정릉 선릉(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lt;br /&gt;
파일:3-20.수릉(동구릉)-DSC_0323.jpg|동구릉 수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융릉-석상.jpg|융건릉 융릉(경기 화성시 안녕동)&lt;br /&gt;
파일:3-20.의릉 0117.JPG|의릉(서울 성북구 화랑로32길)&lt;br /&gt;
파일:3-20.창릉-서오릉.jpg|서오릉 창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lt;br /&gt;
파일:3-20.파주장릉-_GSC8668.jpg|파주 장릉(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lt;br /&gt;
파일:3-20.파주장릉-1788.jpg|파주 장릉 제향(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lt;br /&gt;
파일:3-20.헌릉1.jpg|헌인릉 헌릉(서울 서초구 헌인릉길)&lt;br /&gt;
파일:3-20.현릉-동구릉.jpg|동구릉 현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혜릉-석상.jpg|동구릉 혜릉 석상(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2.종묘- 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0.jpg|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7.jpg|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8.jpg|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lt;br /&gt;
파일:3-26.아기와 엄마-ESC_8096.jpg|외동이 아기와 엄마&lt;br /&gt;
파일:3-27.대한민국박물관-ESC_8167.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3-27.종묘- DSC_7412.jpg|종묘(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3-27.종묘- DSC_7427.jpg|종묘(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3-27.종묘대제-ESC_5608.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4-1.혜초기념비-_GSC9716.jpg|혜초기념비(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 &lt;br /&gt;
파일:4-1.혜초기념비-_GSC9718.jpg|혜초기념비(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 &lt;br /&gt;
파일:4-3.충렬사- DSCN0797.jpg|통영 충렬사(경남 통영시 여황로)&lt;br /&gt;
파일:4-6.광성보-ESC_9053.jpg|강화 광성보(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lt;br /&gt;
파일:4-6.덕진진-ESC_9073.jpg|강화 덕진진(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lt;br /&gt;
파일:4-6.덕진진-ESC_9080.jpg|강화 덕진진(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lt;br /&gt;
파일:4-6.덕진진-ESC_9088.jpg|강화 덕진진(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lt;br /&gt;
파일:4-6.양헌수장군 승전비-ESC_9026.jpg|양헌수 장군 승전비(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lt;br /&gt;
파일:4-6.초지진-ESC_9089.jpg|병인양요 때의 포탄 자국이 남아 있는 강화 초지진(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lt;br /&gt;
파일:4-6.초지진-ESC_9092.jpg|강화 초지진(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lt;br /&gt;
파일:4-7.명성황후 생가-_GSC9681.jpg|명성황후 생가(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4-7.명성황후 생가-_GSC9682.jpg|명성황후 생가(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4-7.명성황후 숭모비-_GSC9673.jpg|명성황후 숭모비(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4-8.김좌진-ESC_7666.jpg|김좌진 장군 동상(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4-8.안창호 어록비-_FSC6106.jpg|안창호 어록비(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도산공원)&lt;br /&gt;
파일:4-8.안창호-_FSC6119.jpg|안창호 동상(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도산공원)&lt;br /&gt;
파일:4-8.안창호-_FSC6126.jpg|안창호 동상(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도산공원)&lt;br /&gt;
파일:4-8.임정요인-ESC_7648a.jpg|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 모형(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4-9.분단 철책- DSC_0011.jpg|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4-9.삼팔선-ESC_7253.jpg|38도선 표지석&lt;br /&gt;
파일:4-9.중앙청 태극기-ESC_7796.jpg|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게양했던 태극기&lt;br /&gt;
파일:4-9.판문점- FSC_0743.jpg|판문점&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27.jpg|새마을 정신 비석(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40.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43.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54.jpg|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1.베트남전-_ESC_7262.jpg|베트남 파병부대 깃발(강원 화천군 간동면 죽엽산길 베트남 참전기념관)&lt;br /&gt;
파일:4-11.베트남전-DSC_0084.jpg|베트남 참전기념탑(강원 화천군 간동면 죽엽산길 베트남 참전기념관)&lt;br /&gt;
파일:4-14.블라디보스토크역-_GSC9002.jpg|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lt;br /&gt;
파일:4-14.블라디보스토크역-_GSC9006.jpg|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lt;br /&gt;
파일:4-16.사일구 영정-ESC_8270.jpg|4.19학생혁명 희생자 영정(서울 강북구 4.19로8길 국립4.19 민주묘지) &lt;br /&gt;
파일:4-16.사일구 정신-ESC_8278.jpg|국립4.19 민주묘지(서울 강북구 4.19로8길) &lt;br /&gt;
파일:4-16.이한열-ESC_7774.jpg|이한열 어머니의 글(서울 마포구 신촌로12나길 이한열기념관)&lt;br /&gt;
파일:4-17.올림픽 공원-_GSC8346.jpg|평화의 문(서울 송파구 올림픽로)&lt;br /&gt;
파일:4-17.올림픽 공원-_GSC8352.jpg|평화의 문(서울 송파구 올림픽로)&lt;br /&gt;
파일:4-17.종합운동장-_GSC8381.jpg|잠실종합운동장(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lt;br /&gt;
파일:5-2.일본 왕인박사 기념비-DSCN1846.jpg|일본 왕인 박사 비(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lt;br /&gt;
파일:5-2.일본 왕인박사 기념비-DSCN1847.jpg|일본 왕인 박사 비(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lt;br /&gt;
파일:5-2.일본 왕인박사 기념비-DSCN1851.jpg|일본 왕인 박사 비(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lt;br /&gt;
파일:5-3.분황사-FSC_0240.jpg|분황사(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분황사-FSC_0243.jpg|분황사(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분황사-FSC_0252.jpg|분황사(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1.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2.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5.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6.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33.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4.거란의 침입-_GSC9662.jpg|거란족의 침입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거란의 침입-_GSC9666.jpg|거란족의 침입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 담판-_GSC9651.jpg|서희의 담판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 담판-_GSC9653.jpg|서희의 담판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 담판-_GSC9659.jpg|서희의 담판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역사관-_GSC9645.jpg|서희 역사관(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6.근정전- DSC_1264.jpg|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5-6.근정전-DSC_4670.jpg|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5-7.덕수궁 앙부일귀-DSC_6976.jpg|덕수궁에 전시된 앙부일구(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덕수궁 자격루-DSC_6952.jpg|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덕수궁 자격루-DSC_6953.jpg|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덕수궁 자격루-DSC_6958.jpg|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영릉(英陵)-0147.jpg|여주 영릉 세종전 앞 전시물(경기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lt;br /&gt;
파일:5-9.이황-DSC_8730.jpg|이황 동상&lt;br /&gt;
파일:5-9.이황-DSC_8731.jpg|이황 동상&lt;br /&gt;
파일:5-10.건릉(융건릉)-0320.jpg|융건릉 건릉(경기 화성시 안녕동)&lt;br /&gt;
파일:5-10.건릉(융건릉)-0329.jpg|융건릉 건릉(경기 화성시 안녕동)&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_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DSC_6332.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DSC_6356.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DSC_6365.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FSC_4107.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2.윤동주 시인의 언덕-20160417_151055.jpg|윤동주 시인의 언덕(서울 종로구 창의문로)&lt;br /&gt;
파일:5-12.윤동주 영혼의 터- 20160417_150503.jpg|윤동주 영혼의 터(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lt;br /&gt;
파일:5-13.안중근 어록비-ESC_7678.jpg|안중근 어록비(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5-13.안중근-ESC_7667.jpg|안중근 동상(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5-14.경교장 내부- FSC6626.jpg|경교장 내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lt;br /&gt;
파일:5-14.경교장-_FSC6665.jpg|경교장(서울 종로구 새문안로)&lt;br /&gt;
파일:5-14.김구-ESC_7639.jpg|김구 모형(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5-14경교장 내부-_FSC6634.jpg|경교장 내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lt;br /&gt;
파일:5-15.손기정 투구-ESC_8198.jpg|손기정 투구(대한민국역사박물관)&lt;br /&gt;
파일:5-15.손기정 투구-ESC_8199.jpg|손기정 투구(대한민국역사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공공누리 및 기타 출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1-1.석장리박물관_Seokjangni Museum, Seokjangni Prehistoric Site (2).jpg|석장리 박물관(충남 공주시 금벽로)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1.석장리박물관_Seokjangni Museum, Seokjangni Prehistoric Site.jpg|석장리 박물관 내부(충남 공주시 금벽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_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 (2).jpg|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내부(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_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jpg|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내부(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2.단군 동상_Dangun Statue.jpg|단군상(전남 고흥 익금해수욕장)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2.단군 영정_Dangun Seongjeon in Seoul.jpg|단군 영정(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2.단군 영정_Dangunseongjeon Shrine.jpg|단군 영정(강원 태백시 소도동 단군성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6.전고령가야 왕릉_Tomb of Goryeong Gaya King.jpg|전고령가야 왕릉(경북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6.제철로 모형_Daegaya Museum.jpg|제철로 모형(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가야금길 대가야박물관)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6.창녕박물관_Changnyeong Museum.jpg|창녕박물관(경남 창녕군 창녕읍 군청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12.군산 삼일운동 기념관_The Purpose and Background of Gunsan 3.1 Movement Memorial Hall.jpg|군산 삼일운동기념관(전북 군산시 구암동)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3.대가야 왕릉 출토물_Exhibition Hall for the royal tomb of Daegaya.jpg|대가야 왕릉 출토물(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대가야왕릉전시관)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3.대가야 왕릉전시관_Exhibition Hall for the royal tomb of Daegaya.jpg|대가야왕릉전시관(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1.평화의 소녀상_Dongguksa Temple in Gunsan.jpg|평화의 소녀상(전북 군산시 금광동 동국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 표지석_Dokdo Island.jpg|독도 표지석(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1_Dokdo Island.jpg|독도(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2_Dokdo.jpg|독도(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3_Dokdo.jpg|독도(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생활한복_Cultural Products Pavilion.jpg|생활 한복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한복_Bukchon Hanok Village.jpg|한복 입은 여자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각종 김치_Kimchi Assortment.jpg|각종 김치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궁중요리_Gungjung Yori(Court Cuisine).jpg|궁중 요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3.북촌 한옥마을_Bukchon Hanok Village.jpg|북촌 한옥 마을(서울 종로구 북촌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6.강진 도요지_Gangjin Goryeo Celadon Kiln Sites (2).jpg|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 대구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6.강진 도요지_Gangjin Goryeo Celadon Kiln Sites (3).jpg|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 대구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6.강진 도요지_Gangjin Goryeo Celadon Kiln Sites.jpg|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 대구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8.세계문화유산 직지_Cheongju Old Printing Museum.jpg|세계문화유산 직지(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8.직지심경_Cheongju Old Printing Museum (2).jpg|직지(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8.직지심경_Cheongju Old Printing Museum.jpg|직지(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8.활자주조_Cheongju Old Printing Museum.jpg|활주 주조 과정 모형(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9.양궁_Archery.jpg|양궁 경기(88서울올림픽)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9.태권도-시범_Asian-Game.jpg|태권도 시범(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9.활쏘기_Suwon Hwaseong Fortress.jpg|국궁 쏘기(수원 화성 연무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0.충렬사 화포_Chungnyeolsa Shrine(Tongyeong).jpg|충렬사 화포(경남 통영시 여황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0.통영 거북선 화포_Turtleship in Tongyeong.jpg|거북선 내 화포(경남 통영시 여황로 충렬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1.석천서당_Seokcheonseodang Village School (1).jpg|석천서당(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1.석천서당_Seokcheonseodang Village School.jpg|석천서당(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1.양지향교_Yangji Hyanggyo School.jpg|양지향교(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1.전주향교_Jeonju Hyanggyo.jpg|전주향교 내부(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배재학당 역사박물관_Appenzeller Noble Memorial Museum (2).jpg|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서울 정동 서소문로11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배재학당 역사박물관_Appenzeller Noble Memorial Museum.jpg|배재학당 역사박물관(서울 정동 서소문로11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연대 언더우드 동상_Yonsei University.jpg|언더우드 동상(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연세대학교)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이화여대_Ehwa Woman's University.jpg|이화여자대학교 본관(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3.이대캠퍼스1_Ehwa Woman's University.jpg|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3.이대캠퍼스2_The State-of-the-Art Campus.jpg|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Apitchaya Boonrin)-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4.전통 혼례1_Traditional Wedding Ceremony.jpg|전통 혼례(충북 진천군 농다리) / 사진제공(홍순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4.전통혼례2_Chole(Food setting for a wedding) (1).jpg|전통 혼례(충북 진천군 농다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4.제사상_World Confucian Food Festival (2).jpg|제사상(2013 세계유교음식페스티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4.제사상_World Confucian Food Festival.jpg|제사상(2013 세계유교음식페스티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4.폐백상_World Confucian Food Festival.jpg|폐백 음식(2013 세계유교음식페스티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마라도 교회_Marado Church.jpg|마라도 교회(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로101번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매봉교회_Maebong church.jpg|매봉교회(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명동성당_Myeongdong Cathedral (2).jpg|명동성당 내부(서울 중구 명동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명동성당_Myeongdong Cathedral.jpg|명동성당(서울 중구 명동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7.장승_Chilgapsan Totem Pole Park (2).jpg|장승(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길 칠갑산 장승공원)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7.장승_Chilgapsan Totem Pole Park.jpg|장승(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길 칠갑산 장승공원)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9.의궤_The National Museum of Korea (2).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9.의궤_The National Museum of Korea (3).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9.의궤_The National Museum of Korea.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조실록_Jeonju Historical Museum.jpg|정조실록(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전주역사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족산 사고_Samnangseong (2).jpg|정족산 사고(인천 강화군 길상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족산 사고_Samnangseong (3).jpg|정족산 사고(인천 강화군 길상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족산 사고_Samnangseong.jpg|정족산 사고 장사각(인천 강화군 길상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1.태조실록_Jeonju Historical Museum.jpg|태조실록(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전주역사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5.교통카드 충전_PublicTransportation - Subway.jpg|교통카드 충전 중 / 사진제공(주민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5.전철 개찰구_PublicTransportation - Subway.jpg|전철 개찰구 / 사진제공(주민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6.아기와 엄마_Samcheong-dong Street.jpg|엄마와 아기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7.강남 야경_Nightscape of Gangnam.jpg|서울 강남의 야경 / 사진제공(김미숙)-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7.강남거리_Gangnam Station Street.jpg|서울 강남 거리 / 사진제공(김학리)-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8.명동_Myeong-dong Street.jpg|서울 명동 거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8.아파트촌_Complete View of Seoul.jpg|서울의 아파트촌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팔만대장경 이운행렬_Relocation Parade of Tripitaka Koreana.jpg|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팔만대장경_Haeinsa Temple, Tripitaka Koreana.jpg|대장경판(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_Haeinsa Temple.jpg|해인사 장경각(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내부1_Haeinsa Temple, Tripitaka Koreana.jpg|해인사 장경각 내부(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내부2_Haeinsa Temple.jpg|해인사 장경각 내부(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브이앤드)-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내부3_the Tripitaka Koreana.jpg|해인사 장경각 내부(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거북선1_Hyeonchungsa Shrine.jpg|거북선(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거북선2_Turtleship-Hyeonchungsa.jpg|거북선(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이순신장군 동상_General Yi Sun-shin in Seoul.jpg|이순신 장군 동상(서울 종로구 세종로)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현충사_Hyeonchungsa-Shrine.jpg|현충사(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4.동의보감_Heojun Museum (2).jpg|동의보감(서울 강서구 허준로 허준박물관)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4.동의보감_Heojun Museum.jpg|동의보감(서울 강서구 허준로 허준박물관)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4.허준박물관_Heojun Museum.jpg|허준박물관(서울 강서구 허준로)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5.하멜기념비_하멜기념비.jpg|하멜기념비(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중앙로)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5.하멜상선 모형_Hamei Ship Exhibition (2).jpg|하멜 상선전시관(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중앙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5.하멜상선 모형_Hamei Ship Exhibition.jpg|하멜 상선전시관(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중앙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8.제헌국회-153.jpg|제헌국회 개원식(1948년 5월 31일 중앙청)&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B5-213-청도군-새마을사업장026.jpg|새마을운동 청도군 사업장&lt;br /&gt;
파일:4-11.베트남전 참전 백마부대 환송식(66.8.27).jpg|베트남전 참전 백마부대 환송식(1966년 8월 27일)&lt;br /&gt;
파일:4-11.베트남-참전-환송-660722.jpg|베트남전 참전 맹호부대 환송식(1965년 10월 27일)&lt;br /&gt;
File:4-12리비아 대수로 공사_동아건설산업_국문-49.jpg| 리비아 대수로 공사 / 사진 출처 – 동아건설 홍보물  &lt;br /&gt;
File:4-12사우디전화공사_동아건설산업_국문-52.jpg|사우디아라비아 자동 전화 공사 / 사진 출처 – 동아건설 홍보물 &lt;br /&gt;
파일:4-13.독일마을1_German Village.jpg|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정착한 독일마을(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13.독일마을2_German Village.jpg|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정착한 독일마을(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4-13.독일마을3_German Village.jpg|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정착한 독일마을(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File:4-18금모으기-전시물.jpg|금모으기 운동 관련 전시물(서울 중구 소공로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lt;br /&gt;
파일:4-19.서울월드컵 경기장_Seoul world Cup Stadium.jpg|서울월드컵경기장(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19.월드컵-거리응원_Cheer.jpg|월드컵 경기 거리 응원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19.월드컵-거리응원2_Cheer.jpg|월드컵 경기 거리 응원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0.치맥_Chicken Beer.jpg|치킨과 맥주 / 사진제공(주민호)-한국관광공사&lt;br /&gt;
File:4-21촛불집회1.jpg|2016년 광화문 촛불 집회 / 사진 제공 남해선&lt;br /&gt;
File:4-21촛불집회2.jpg|2016년 광화문 촛불 집회 / 사진 제공 남해선&lt;br /&gt;
파일:5-1.구리-태왕사신기-드라마-세트_Taewangsasingi-set-place-in-Guri.jpg|구리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장(경기 구리시 아천동 고구려대장간마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_Taewangsasingi set place in Jeju (2).jpg|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장(제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_Taewangsasingi set place in Jeju.jpg|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장(제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백제역사문화관_Baekje Historical Museum.jpg|백제역사문화관 내부(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왕인 박사 유적지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 (2).jpg|왕인박사 유적지(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2.왕인 박사 유적지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jpg|왕인박사 유적지(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2.왕인박사 동상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jpg|왕인박사 동상(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왕인박사 유적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왕인박사 부조물_EMBOSSED CARVED STONE STATUE,HISTORICAL REMAINS OF DR. WANGIN.jpg|왕인박사 추정 부조물(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왕인박사 유적지)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왕인박사 영정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jpg|왕인박사 영정(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왕인박사 유적지)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3.첨성대_Cheomseongdae Observatory (2).jpg|첨성대(경북 경주시 인왕동)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3.첨성대_Cheomseongdae Observatory.jpg|첨성대(경북 경주시 인왕동)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6.삼봉시비_Monument of poetry of Sambong Jeong Do-jeon.jpg|삼봉시비(서울 종로구 종로 종묘공원)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신사임당 동상1_Ojukheon.jpg|신사임당 동상(강원 강릉시 율곡로 오죽헌)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신사임당 동상2_The Hall of Folk Customs.jpg|신사임당 동상(강원 강릉시 율곡로 오죽헌)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오죽헌_Ojukheon.jpg|오죽헌 내부(강원 강릉시 율곡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오죽헌2_Ojukheon.jpg|오죽헌(강원 강릉시 율곡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9.안동 도산서원_Dosan Seowon Confucian Academy.jpg|안동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9.안동 도산서원_Dosanseowon Confucian Academy.jpg|안동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9.안동-도산서원2_Dosanseowon-Confucian-Academy.jpg|안동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9.퇴계종택_Toegyejongtaek.jpg|퇴계 종택(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4.이승만과-김구-15.jpg|임시정부 환국 환영식에서의 이승만과 김구 &lt;br /&gt;
파일:5-16.환기미술관_WHANKI MUSEUM.jpg|환기미술관 내부(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6.환기미술관2_WHANKI MUSEUM.jpg|환기미술관 내부(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6.환기미술관3_WHANKI MUSEUM.jpg|환기미술관(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 내부(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2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 내부(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3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 내부(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4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8.김대중 컨벤션센터_Kimdaejung Convention Center.jpg|김대중 컨벤션센터(광주 서구 상무누리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8.김대중 흉상_Kimdaejung Convention Center.jpg|김대중 흉상(광주 서구 상무누리로 김대중 컨벤션센터)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8.김대중-납치사건.jpg|피랍 후 돌아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하는 김대중(1973년 8월 13일)&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씨름.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씨름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춤추는아이.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춤 추는 아이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활쏘기.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활쏘기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신윤복_거문고줄고르는여인.jpg|신윤복 - 거문고 줄 고르는 여인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신윤복_대쾌도.jpg|신윤복 - 대쾌도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신윤복_전모를쓴여인.jpg|신윤복 - 전모를 쓴 여인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정선_신묘년풍악도첩_금강산.jpg|정선 - 신묘년 풍악도첩 속 금강산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SPA_이산가족찾기.JPG|이산가족찾기 / 사진제공-서울사진아카이브(공공누리)&lt;br /&gt;
File:SPA_이산가족찾기2.JPG|이산가족찾기 / 사진제공-서울사진아카이브(공공누리)&lt;br /&gt;
File:CHA_윤두서_자화상.jpg|윤두서 -자화상 / 사진제공-문화재청(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득신_정조의현륭원행차.jpg|정조의 현륭원 행차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서당.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서당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W_백남준.jpg|백남준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GH_김환기_03-Ⅶ-71.jpg|김환기 - 03-Ⅶ-71 / 사진출처-Gallery Hyundai&lt;br /&gt;
File:GH_김환기_Untitled.jpg|김환기 - Untitled / 사진출처-Gallery Hyundai&lt;br /&gt;
File:KN_윤동주.jpg|윤동주 / 사진출처-Korea.net&lt;br /&gt;
File:KT_김대중.jpg|김대중 / 사진출처-Korea Times&lt;br /&gt;
File:W_김구.jpg|김구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W_김환기.jpg|김환기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W_안중근.JPG|안중근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W_손기정.jpg|손기정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프로젝트관리]]&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B4%88%EC%9B%90%EC%9D%84_%EB%8B%AC%EB%A6%AC%EA%B3%A0_%EB%8C%80%EB%A5%99%EC%9D%84_%EC%A7%80%EB%B0%B0%ED%95%9C_%EA%B8%B0%EC%83%81,_%EA%B3%A0%EA%B5%AC%EB%A0%A4&amp;diff=4774</id>
		<title>초원을 달리고 대륙을 지배한 기상, 고구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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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4-12T07:16: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 The Spirit that Conquered the Mainland - Goguryeo&lt;br /&gt;
}}&lt;br /&gt;
=='''초원을 달리고 대륙을 지배한 기상, 고구려'''==&lt;br /&gt;
===압록강 유역의 왕권국가===&lt;br /&gt;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 국가로 일어나 주변 세력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한 나라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따르면, 북부여의 왕자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왕가는 부여로부터 나왔다는 계통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부여신으로 섬기며 [[주몽]]과 함께 국가적으로 제사지내는 등 [[부여]]와의 관계를 명확히 내세웠다. &lt;br /&gt;
&lt;br /&gt;
1세기 후반 태조왕을 기점으로 연맹체를 벗어나 고대국가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위로는 [[부여]]를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동예]]를 정복했으며, 서쪽으로는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뻗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3세기 중국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다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세기에 접어들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체제를 확립하면서 국력을 회복하였다. &lt;br /&gt;
  &lt;br /&gt;
===고구려 전성기===&lt;br /&gt;
[[파일:광개토대왕_일러스트.jpg|thumb|180px|left|광개토대왕 일러스트]]&lt;br /&gt;
이에 5세기 [[고구려]]는 476년 요동반도를 포함하여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3/4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국간 경쟁에서 가장 우세를 보이고 있었던 [[백제]]를 격파해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한편, 남쪽으로 내려가 [[가야]]를 압박하면서 [[신라]]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에 해당한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광개토대왕(374~413)]]과 그의 아들 [[장수왕|장수왕(394~491)]]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중국의 후연(後燕)과 남쪽의 [[백제]], [[가야]]를 물리치면서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이어 [[장수왕]]은 수도를 오늘날의 평양으로 옮긴 후 본격적으로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가의 안정을 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극복하지 못한 위기 ===&lt;br /&gt;
그러나 6세기에 들어 [[고구려]]는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551년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체결하고 반격을 시도하면서 [[고구려]]의 요충지이자 [[백제]]의 옛 수도였던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이어 북쪽에서는 중국의 오랜 분열을 통일하고 등장한 수나라와 당나라가 연이어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연이어 그들과 맞서 싸웠던 고구려는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그 과정에서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 [[백제]]와 나눠 갖기로 했던 약속을 무시하고 독차지하면서 이를 토대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급기야 [[신라]]와 적대하기 시작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와 대항하였다. 삼국 간 관계에서 고립되던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더욱 견고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를 쳐들어왔고,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멸망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나라가, 남쪽은 [[신라]]가 나눠가졌다가 이후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영토를 [[발해]]가 점령하면서 남북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뛰어난 기술과 높은 문화 수준 ===&lt;br /&gt;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다. 372년 중국에서 전파된 [[불교]]를 수용한 이래 왕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불교]]는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던 과정에서 왕권을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근거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고구려의 성곽'&amp;gt;&lt;br /&gt;
파일:1-3.당포성-DSC 0244.jpg|당포성(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lt;br /&gt;
파일:1-3.당포성-ESC 8715.jpg|당포성(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 0120.jpg|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32.jpg|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또 [[고구려]]는 오랜 기간 중국과의 전쟁을 거치며 견고하고 탁월한 성곽 방어 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성곽의 돌을 계단식으로 들여쌓는 방식이나, 성곽 돌을 안쪽으로 뾰족하게 깎아 마치 사람의 이빨처럼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게 축성한 것은 고구려만의 독특한 축성 방식이자 수준 높은 기술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lt;br /&gt;
&lt;br /&gt;
아울러 [[고구려]]의 주거형태 가운데 [[온돌]]을 활용한 난방이나, 고구려의 무예·무용과 의복과 같은 당시 실질적인 생활 모습들이 왕과 귀족들의 무덤 안 벽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한국 전통 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고구려]]의 고분과 성곽, 궁성터 등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는 몇몇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매우 신중하게 보호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File:003(K).jpg|삼국시대(4세기 후반~5세기 초반)&lt;br /&gt;
File:004(K).jpg|삼국시대(5세기 후반~6세기 초반)&lt;br /&gt;
File:005(K).jpg|삼국시대(6세기 중반~7세기 초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고구려]]&lt;br /&gt;
*[[부여]]&lt;br /&gt;
*[[옥저]]&lt;br /&gt;
*[[동예]]&lt;br /&gt;
*[[백제]]&lt;br /&gt;
*[[가야]]&lt;br /&gt;
*[[신라]]&lt;br /&gt;
*[[발해]]&lt;br /&gt;
*[[주몽]]&lt;br /&gt;
*[[광개토대왕]]&lt;br /&gt;
*[[장수왕]]&lt;br /&gt;
*[[광개토대왕릉비]]&lt;br /&gt;
*[[나제동맹]]&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고구려의 영토확장과 강력한 군사활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봉, 『고구려의 남진 발전과 사적 의의』, 경인문화사, 2015.&lt;br /&gt;
|참고문헌2=김락기, 『고구려의 동북방 경역과 물길 말갈』, 경인문화사, 2013.&lt;br /&gt;
|참고문헌3=마대정 외 공저, 『(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 여유당,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의 남진 발전과 사적 의의』'''는 고구려가 한반도 안에서 영향력을 급격히 확장시켰던 5세기경 남진의 성과와 그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략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 업적에 해당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해 저자는 서기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된 사건임을 밝히고, 더욱 세분화하여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또 그 발전 속에서 고구려 사람들의 천하관과 문화적 발전도 함께 형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lt;br /&gt;
&lt;br /&gt;
'''『고구려의 동북방 경역과 물길 말갈』'''은 고구려가 소위 만주지역이라고 지칭하는 중국의 동북방으로 진출해 가는 과정과 그 내용을 상세하게 다뤘다. 주로 숙신과 물길 또는 말갈로 불리었던 종족에 대한 확장과 지배로 언급되는 고구려의 동북방 경영은 부여를 멸망시키고 확장한 송화강 유역과 더불어 고구려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고구려 영토확장 과정에서 등장하는 ‘유인(遊人)’에 존재에 대해 기존의 시선을 소개하면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등 고구려의 발전과정과 영토확장 전반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사서 속에 확인되는 고구려의 발전과정과 면면들을 종합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구려의 건국에서부터 국호, 민족 호칭 등 고구려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고구려의 확장과 발전을 거쳐 멸망에 이르는 전 과정을 시야에 담고 있다. 특히 중국의 왕조들과 충돌하는 정황을 중국 측 사료 내용과 시선으로 자세히 다루면서 고구려가 만주지역을 넘어 그 영향력과 세력을 확장해간 사실을 중국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신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경복, 『한국 신화』, 청아출판사, 2014. &lt;br /&gt;
|참고문헌2=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사계절, 2008.&lt;br /&gt;
|참고문헌3=강윤동, 임지덕 공저, 『고구려의 전설』, 백산자료원, 2005.&lt;br /&gt;
}}&lt;br /&gt;
'''『한국 신화』'''는 단군신화에서부터 고려의 설화까지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승과 신화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가고 있어 접하기가 편한 장점이 있다. 이 책에서는 제2장에서 부여 관련 신화를, 제3장에서 고구려 관련 신화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부여와의 연관성을 지닌 고구려의 신화와 그 정신세계를 입체적으로 접하기에 용이하다.   &lt;br /&gt;
&lt;br /&gt;
'''『고구려의 별자리와 신화』'''는 고구려의 별자리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매우 정밀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전통시대 천문지식이 모두 중국의 위도에서 관찰되고 축적된 정보가 유입된 것으로 고구려의 천문관측과 지식은 전혀 다른 것임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고구려만의 천문지식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 천하관과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그 안에는 신화의 형태로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되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전설』'''은 최무장 교수가 북경에 교환 교수로 갔을 때 현지에서 구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사서에 소개되지 않은 고구려 건국과 정신세계 관련 설화들을 담고 있다. 고구려의 사료와 문헌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에서 전해져 오는 고구려 관련 전설들은 고구려 사람들의 삶과 그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에는 『삼국유사』에서도 다루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일정부분 사료적 가치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고구려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유미, 『고구려 음식문화사』, 학연문화사, 2017. &lt;br /&gt;
|참고문헌2=안휘준, 『고구려 회화 : 고대 한국 문화가 그림으로 되살아나다』, 효형출판, 2007.&lt;br /&gt;
|참고문헌3=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07.&lt;br /&gt;
}}&lt;br /&gt;
'''『고구려 음식문화사』'''는 고구려의 음식문화 전반을 정리한 책이다.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해 내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저자는 여러 문헌자료와 고분 벽화의 기록들을 집대성하여 밝혀내고자 하였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 음식 재료의 범위를 더욱 확대시켰다면서, 고구려의 생태환경과 음식문화를 연결시켜 밝히고 있다. 또 고구려 시대 식기구와 구조 등도 아울러 규명하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고구려 회화』'''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 속에 담겨져 있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저자는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고구려 사람들의 문화를 담고 있으며, 고구려 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고분 벽화가 그려내는 생활상은 초기와 중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일종의 삶의 기록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충분히 신뢰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은 고구려의 풍속과 신앙, 유불도를 망라한 사상, 언어와 문학을 넘어 의식주와 생활상 전반을 총망라하여 소개하였다. 한국에서 고구려 관련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해당 전공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망라해 모은 이 책은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실제 삶의 모습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정제된 내용을 제공할 것이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사의 중요 흐름]]&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The_Spirit_that_Conquered_the_Mainland_-_Goguryeo&amp;diff=4773</id>
		<title>The Spirit that Conquered the Mainland - Gogurye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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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4-12T07:16: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Kor Article|&lt;br /&gt;
|Article= 초원을 달리고 대륙을 지배한 기상, 고구려&lt;br /&gt;
}}&lt;br /&gt;
Goguryeo, on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Three Kindgoms of Korea]], began as a tribal city-state near the [[Amnokgang (Yalu) River]] which emerged to consolidate power and become a kingdom. According to the [[Gwanggaeto Stele]], erected in 414 CE, the kingdom was founded by a legendary prince from the northern state of [[Buyeo]], named [[Jumong]]. In the 3rd century, Goguryeo engaged in war with [[Wei China]], which destroyed the capital, but Goguryeo recovered and was able to expand its territories. At its height in 476, the kingdom stretched across a large portion of [[Manchuria]], including the [[Liaoning peninsula]], and all but the bottom fourth of the Korean peninsula. In following centuries, Goguryeo experienced decline due to internal strife and external conflict. In 551, [[Silla]] and [[Baekje]] entered an alliance to push Goguryeo out of the valuable [[Hangang River valley]], and Silla eventually took over the area. Wars with Sui and Tang to the north also weakened the kingdom, and it was defeated by a Silla-Tang alliance in 668, after which its former territories fell to [[Silla]], [[Tang China]] and, later, [[Balhae]].&lt;br /&gt;
&lt;br /&gt;
One of the most well-known kings of Goguryeo is [[King Gwanggaeto]] (374–413), who made great territorial gains against [[Later Yan China]], in the north, and Silla and Baekje, to the south. His son, [[Jangsu]] (394–491), moved the capital to present-day [[Pyeongyang]], which aided cultural and economic advancement. Goguryeo was the first of the [[Three Kingdoms Period|Three Kingdoms]] to adopt [[Buddhism]]. Traces of some elements of Korean culture, such as fortress structure, ''ondol'' underfloor heating, and kinds of martial arts, dance, and clothing, began to develop during Goguryeo. Today, some Goguryeo sites, including tombs, fortresses, palaces, and artifacts, in China and North Korea are registered as [http://whc.unesco.org/en/list/1091/ UNESCO World Heritages]. Among these are the Goguryeo tombs, known for their tomb paintings.&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Goguryeo Fortress Walls'&amp;gt;&lt;br /&gt;
파일:1-3.당포성-DSC 0244.jpg|Dangposeong Fortress (Dongi-ri, Misan-myeon, Yeoncheon-gun, Gyeonggi-do)&lt;br /&gt;
파일:1-3.당포성-ESC 8715.jpg|Dangposeong Fortress (Dongi-ri, Misan-myeon, Yeoncheon-gun, Gyeonggi-do)&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 0120.jpg|Achasanseong Fortress (Gwangjang-dong, Gwangjin-gu, Seoul)&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32.jpg|Achasanseong Fortress (Gwangjang-dong, Gwangjin-gu, Seoul)&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File:003(E).jpg|Three Kingdoms - Late 4CE-Early 5CE&lt;br /&gt;
File:004(E).jpg|Three Kingdoms - Late 5CE-Early 6CE&lt;br /&gt;
File:005(E).jpg|Three Kingdoms - Mid 6CE-Early 7CE&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Related Articles'''==&lt;br /&gt;
*[[Goguryeo]]&lt;br /&gt;
*[[Buyeo]]&lt;br /&gt;
*[[Okjeo]]&lt;br /&gt;
*[[Dongye]]&lt;br /&gt;
*[[Baekje]]&lt;br /&gt;
*[[Gaya]]&lt;br /&gt;
*[[Silla]]&lt;br /&gt;
*[[Balhae]]&lt;br /&gt;
*[[Three Kingdoms]]&lt;br /&gt;
*[[Jumong]]&lt;br /&gt;
*[[King Gwanggaeto the Great]]&lt;br /&gt;
*[[King Jangsu]]&lt;br /&gt;
*[[Gwanggaeto Stele]]&lt;br /&gt;
*[[Silla-Baekje Alliance]]&lt;br /&gt;
&lt;br /&gt;
&lt;br /&gt;
=='''References'''==&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Category:An Overview of Korean History]]&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Images&amp;diff=4772</id>
		<title>Imag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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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4-12T07:15: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윤상구 작가 */&lt;/p&gt;
&lt;hr /&gt;
&lt;div&gt;__TOC__&lt;br /&gt;
=='''윤상구 작가'''==&lt;br /&gt;
&amp;lt;gallery&amp;gt; &lt;br /&gt;
파일:1-1.고인돌-ESC_8997.jpg|강화지석묘(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81.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83.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96.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문무왕릉-FSC_0198.jpg|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릉&lt;br /&gt;
파일:1-3.정림사 탑-ESC_9265.jpg|백제 말기에 세워진 정림사지 5층 석탑(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lt;br /&gt;
파일:1-3.호로고루성-DSC_0244.jpg|고구려의 유적 당포성(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lt;br /&gt;
파일:1-3.호로고루성-ESC_8715.jpg|고구려의 유적 당포성(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lt;br /&gt;
파일:1-4.강화 연개소문비ESC_8993.jpg|강화도에 세워진 연개소문 유적비&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20.jpg|고구려의 유적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 &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32.jpg|고구려의 유적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 &lt;br /&gt;
파일:1-4.아차산성-FSC_0153.jpg|고구려의 유적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광장동) &lt;br /&gt;
파일:1-4.중원고구려비-FSC_0415.jpg|중원 고구려비(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lt;br /&gt;
파일:1-4.중원고구려비-FSC_0424.jpg|중원 고구려비(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lt;br /&gt;
파일:1-5.계백장군 동상-ESC_9178.jpg|백제 계백장군 동상(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lt;br /&gt;
파일:1-5.계백장군 동상-ESC_9178_1.jpg|백제 계백장군 동상(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lt;br /&gt;
파일:1-5.계백장군 사당-ESC_9172.jpg|백제 계백장군 사당(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lt;br /&gt;
파일:1-5.계백장군묘-ESC_9161.jpg|백제 계백장군 묘(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lt;br /&gt;
파일:1-5.공산성-ESC_9356.jpg|백제 공산성(충남 공주시 금성동) &lt;br /&gt;
파일:1-5.백제 성왕 동상-ESC_9260.jpg|백제 성왕 동상(충남 부여읍 구아리)&lt;br /&gt;
파일:1-5.백제 의자왕 묘-ESC_9200.jpg|백제 의자왕 가묘(충남 부여 능산리)&lt;br /&gt;
파일:1-5.백제 의자왕묘-ESC_9195.jpg|백제 의자왕 가묘(충남 부여 능산리)&lt;br /&gt;
파일:1-7. 신라 감은사-FSC_0202.jpg|신라 감은사 탑(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lt;br /&gt;
파일:1-7. 신라 감은사-FSC_0208.jpg|신라 감은사 터(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lt;br /&gt;
파일:1-7.신라 안압지-FSC_0280.jpg|신라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왕동)&lt;br /&gt;
파일:1-7.신라 안압지-FSC_0281.jpg|신라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왕동)&lt;br /&gt;
파일:1-7.신라 안압지-FSC_0285.jpg|신라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왕동)&lt;br /&gt;
파일:1-7.신라 포석정-FSC_0308.jpg|신라 포석정(경북 경주시 배동)&lt;br /&gt;
파일:1-7.신라 포석정-FSC_0310.jpg|신라 포석정(경북 경주시 배동)&lt;br /&gt;
파일:1-7.신라 포석정-FSC_0313.jpg|신라 포석정(경북 경주시 배동)&lt;br /&gt;
파일:1-9. 고려 공민왕 사당 DSC_7610.jpg|고려 공민왕 사당(서울 종로구 훈정동)&lt;br /&gt;
파일:1-9.고려 공민왕 사당 DSC_7610.jpg|고려 공민왕 사당(서울 종로구 훈정동)&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25.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32.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34.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고려 숭의전-ESC_8736.jpg|고려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lt;br /&gt;
파일:1-9.공양왕릉-DSC_8862.jpg|고려 공양왕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lt;br /&gt;
파일:1-9.공양왕릉-DSC_8863.jpg|고려 공양왕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lt;br /&gt;
파일:1-9.공양왕릉-DSC_8866.jpg|고려 공양왕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lt;br /&gt;
파일:1-9.무량수전_파노라마2.jpg|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lt;br /&gt;
파일:1-10.광화문-DSC_4138.jpg|경복궁 광화문(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1-10.교대식-DSC_2902.jpg|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1-10.궁궐 인정전 드므-DSC_0592.jpg|창덕궁 인정전(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1-10.사정전 내부-DSC_3145.jpg|경복궁 사정전 내부(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1-10.사정전 앞 행차-DSC_3168.jpg|경복궁 사정전 앞 임금 행차&lt;br /&gt;
파일:1-11.석고-DSC_7329.jpg|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석고(서울 중구 소공로)&lt;br /&gt;
파일:1-11.원구단-DSC_7338.jpg|황제의 제천 행사를 위한 환구단 부속 건물 황궁우(서울 중구 소공로)&lt;br /&gt;
파일:1-11.유릉-석상.jpg|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lt;br /&gt;
파일:1-11.중화전 드므-DSC_5368.jpg|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는 덕수궁 중화전 드므(서울 중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1-FSC_5805.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2-FSC_5807.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3-FSC_5808.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4-FSC_5877.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5-FSC_5883.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lt;br /&gt;
파일:1-12.삼일운동기념비6-FSC_5887.jpg|3·1만세운동 기념비(서울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lt;br /&gt;
파일:1-12.서대문형무소-.jpg|옛 서대문형무소(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독립공원) &lt;br /&gt;
파일:1-12.서대문형무소-FSC_5857.jpg|옛 서대문형무소(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독립공원) &lt;br /&gt;
파일:1-12.윤봉길-ESC_7660.jpg|윤봉길 의사 동상(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2.조선총독부- DSC_0169.jpg|옛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2.조선총독부- ESC_7685.jpg|옛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2.조선총독부- ESC_7688.jpg|옛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3.끊어진 다리-DSC_0021.jpg|끊어진 임진강 다리(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1-13.끊어진 다리-ESC_7428.jpg|끊어진 임진강 다리(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1-13.이승만대통령-ESC_8234.jpg|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서울 중구 장충단로) &lt;br /&gt;
파일:1-13.이승만대통령-ESC_8235.jpg|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서울 중구 장충단로) &lt;br /&gt;
파일:1-13.인천상륙작전-ESC_7115.jpg|인천상륙작전 기념물(인천 연수구 청량로) &lt;br /&gt;
파일:1-13.인천상륙작전-ESC_7129.jpg|인천상륙작전 기념물(인천 연수구 청량로) &lt;br /&gt;
파일:1-13.인천상륙작전-ESC_7161.jpg|맥아더 장군 동상(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자유공원) &lt;br /&gt;
파일:1-13.자유공원 인천상륙작전-ESC_7151.jpg|인천상륙작전 기념물(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자유공원) &lt;br /&gt;
파일:1-14.국회-ESC_7818.jpg|대한민국 국회의사당(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로)&lt;br /&gt;
파일:1-14.국회-ESC_7828.jpg|대한민국 국회의사당(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로)&lt;br /&gt;
파일:1-14.역대 대통령ESC_8192.jpg|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초상(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lt;br /&gt;
파일:1-14.태극기 광장-DSC_0127.jpg|태극기 광장(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4.태극기 광장-DSC_0134.jpg|태극기 광장(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1-15.임진각 거리 표지판 DSC_0009.jpg|임진각 표지판(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2-5.당항성-FSC_0084.jpg|신라와 당나라를 이어준 중요 지역 당항성(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lt;br /&gt;
파일:2-5.당항성-FSC_0107.jpg|신라와 당나라를 이어준 중요 지역 당항성(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lt;br /&gt;
파일:2-5.당항성-FSC_0111.jpg|신라와 당나라를 이어준 중요 지역 당항성(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lt;br /&gt;
파일:2-5.신라 중앙탑-FSC_0475.jpg|신라 통일의 상징물 중앙탑(충북 충주 탑평리)&lt;br /&gt;
파일:2-5.신라 중앙탑-FSC_0490.jpg|신라 통일의 상징물 중앙탑(충북 충주 탑평리)&lt;br /&gt;
파일:2-5.신라 중앙탑-FSC_0963.jpg|신라 통일의 상징물 중앙탑(충북 충주 탑평리)&lt;br /&gt;
파일:2-5.원효길-_GSC9720.jpg|원효길 표지석(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lt;br /&gt;
파일:2-5.원효길-_GSC9722.jpg|원효길 표지석(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lt;br /&gt;
파일:2-6.고려궁터-ESC_8962.jpg|강화도 고려 궁터 정문(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lt;br /&gt;
파일:2-6.대몽항쟁전승기념탑-FSC_0681.jpg|대몽항쟁전승기념탑(충북 충주시 안림동) &lt;br /&gt;
파일:2-6.대몽항쟁전승기념탑-FSC_0697.jpg|대몽항쟁전승기념탑(충북 충주시 안림동) &lt;br /&gt;
파일:2-6.처인성-DSC_0214.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6.처인성-ESC_8587.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6.처인성-ESC_8588.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6.처인성-ESC_8589.jpg|처인성(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lt;br /&gt;
파일:2-7.독립문-FSC_5917.jpg|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lt;br /&gt;
파일:2-7.독립문-FSC_5921.jpg|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lt;br /&gt;
파일:2-7.삼전도비- DSC_9021.jpg|삼전도비(서울 송파구 잠실동)&lt;br /&gt;
파일:2-7.연미정-ESC_9000.jpg|정묘호란의 항복 장소인 연미정(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lt;br /&gt;
파일:2-7.연미정-ESC_9003.jpg|정묘호란의 항복 장소인 연미정(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lt;br /&gt;
파일:2-7.연미정-ESC_9013.jpg|정묘호란의 항복 장소인 연미정(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lt;br /&gt;
파일:2-8.덕수궁-DSC_7273.jpg|러시아공사관에서 나온 고종이 살았던 덕수궁(서울 중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2-8.동학 무명용사 위령탑-FSC_5739.jpg|동학농민운동 무명 용사 위령탑(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lt;br /&gt;
파일:2-8.동학 사발통문 작성의 집-FSC_5715.jpg|동학농민운동 사발통문 작성의 집(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lt;br /&gt;
파일:2-8.동학 전봉준 동상-FSC_5690.jpg|전봉준 동상(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26.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27.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30.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8.러시아공사관-ESC_8636.jpg|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lt;br /&gt;
파일:2-9.동해-ESC_8351.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352.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368.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419.jpg|동해&lt;br /&gt;
파일:2-9.동해-ESC_8420.jpg|동해&lt;br /&gt;
파일:2-10.민영환-FSC_5832.jpg|을사조약 후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동상(서울 종로구 우정국로)&lt;br /&gt;
파일:2-10.민영환-FSC_5833.jpg|을사조약 후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동상(서울 종로구 우정국로)&lt;br /&gt;
파일:2-10.중명전 내부-DSC_5341.jpg|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던 중명전 내부(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2-10.중명전-DSC_5327.jpg|을사늑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2-11.소녀상-FSC_5840.jpg|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lt;br /&gt;
파일:2-13.양반집 대문-_GSC9705.jpg|조선 시대의 양반집 감고당 대문(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2-13.양반집-_GSC9706.jpg|조선 시대의 양반집 감고당(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2-13.양반집-ESC_9303.jpg|조선 시대의 양반집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1.수문장 교대식-DSC_1276.jpg|경복궁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3-1.수문장 교대식-DSC_1278.jpg|경복궁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3-1.수문장 교대식-DSC_4665_1.jpg|경복궁 수문장 교대식&lt;br /&gt;
파일:3-2.장고-DSC_5155_0025.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5157_0027.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5158_0028.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5159_0029.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6527.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2.장고-DSC_6535.jpg|경복궁의 장고(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3.한옥-_GSC9703.jpg|한옥 감고당(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3-3.한옥-ESC_9296.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3.한옥-ESC_9297.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3.한옥-ESC_9298.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3.한옥-ESC_9302.jpg|한옥 추사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lt;br /&gt;
파일:3-4.국악기-DSC_7496.jpg|종묘 제례에 쓰이는 국악기&lt;br /&gt;
파일:3-4.국악기-ESC_5596.jpg|종묘 제례에 쓰이는 국악기&lt;br /&gt;
파일:3-4.국악기-ESC_5623.jpg|종묘 제례에 쓰이는 국악기&lt;br /&gt;
파일:3-4.사물놀이-ESC_7920.jpg|사물놀이&lt;br /&gt;
파일:3-6.도예촌-_GSC9634.jpg|이천 도예촌(경기 이천시 경충대로)&lt;br /&gt;
파일:3-6.조선시대 청화백자-FSC_0999.jpg|청화백자(충주박물관)&lt;br /&gt;
파일:3-7.세종대왕-DSC_4141.jpg|세종대왕 동상(서울 종로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3-7.주시경-FSC_5853.jpg|주시경 기념물(서울 종로구 한글가온길)&lt;br /&gt;
파일:3-9.전통무예-ESC_7929.jpg|전통 무예 시범(국립현충원) &lt;br /&gt;
파일:3-9.전통무예-ESC_7931.jpg|전통 무예 시범(국립현충원) &lt;br /&gt;
파일:3-9.전통무예-ESC_7939.jpg|전통 무예 시범(국립현충원) &lt;br /&gt;
파일:3-10.광성보 화포-FSC_0782.jpg|강화도 광성보의 화포(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lt;br /&gt;
파일:3-10.덕수궁 신기전-DSC_6955.jpg|덕수궁에 전시된 신기전(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3-10.덕수궁 신기전-DSC_6957.jpg|덕수궁에 전시된 신기전(서울 중구 정동길)&lt;br /&gt;
파일:3-11.심곡서원- DSC_8594.jpg|심곡서원(경기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lt;br /&gt;
파일:3-11.심곡서원- DSC_8607.jpg|심곡서원(경기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lt;br /&gt;
파일:3-11.파산서원-DSC_8735.jpg|파산서원(경기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lt;br /&gt;
파일:3-11.파산서원-DSC_8737.jpg|파산서원(경기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086.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087.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107.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대성전-DSC_8108.jpg|서울 문묘 대성전(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24.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27.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28.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30.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4.명륜당-DSC_8131.jpg|서울 문묘 명륜당(서울 종로구 성균관로)&lt;br /&gt;
파일:3-15.불교(금산사)-ESC_9105.jpg|김제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lt;br /&gt;
파일:3-15.불교(금산사)-ESC_9109.jpg|김제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lt;br /&gt;
파일:3-15.불교(금산사)-ESC_9127.jpg|김제 금산사(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lt;br /&gt;
파일:3-15.불교(대원지)-FSC_0450.jpg|충주 미륵대원지(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lt;br /&gt;
파일:3-15.불교(대원지)-FSC_0456.jpg|충주 미륵대원지(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lt;br /&gt;
파일:3-15.불교(불회사 법당) 내부.DSC_3076.jpg|나주 불회사 법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5.불교(운주사)-DSC_3055.jpg|화순 운주사 석불(전남 화순군 대초리)&lt;br /&gt;
파일:3-15.불교(운주사)-DSC_3064.jpg|화순 운주사 석불(전남 화순군 대초리)&lt;br /&gt;
파일:3-15.불교-DSCN0482.jpg|서울 길상사 연등(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lt;br /&gt;
파일:3-15.불교-DSCN0496.jpg|서울 길상사 연등(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lt;br /&gt;
파일:3-15.불교-DSCN0501.jpg|서울 길상사 연등(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lt;br /&gt;
파일:3-16.개신교 십자가-.jpg|개신교 교회 십자가 &lt;br /&gt;
파일:3-16.성공회성당-_FSC7181.jpg|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서울 중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3-17. 돌장승-DSC_3018.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19.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20.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21.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돌장승-DSC_3022.jpg|나주 불회사 돌장승(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lt;br /&gt;
파일:3-17.분황사 당간지주-FSC_0214.jpg|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3-17.분황사 당간지주-FSC_0216.jpg|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3-17.분황사 당간지주-FSC_0217.jpg|경주 분황사 당간 지주(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3-17.솟대-DSC_0090.jpg|솟대 &lt;br /&gt;
파일:3-17.솟대-DSC_0091.jpg|솟대 &lt;br /&gt;
파일:3-18.경복궁 강녕전 내부-DSC_6607.jpg|경복궁 강녕전 내부(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 장안당-DSC_6799.jpg|경복궁 건청궁 장안당(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건청궁-_6778.jpg|경복궁 건청궁(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경회루-DSC_3124.jpg|경복궁 경회루(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광화문-DSC_2897.jpg|경복궁 광화문(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근정전 내부-DSC_3030.jpg|경복궁 근정전 내부(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아미산-DSC_6763.jpg|경복궁 아미산(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경복궁 향원정-DSC_6643.jpg|경복궁 향원정(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금천교-DSC_2112.jpg|창덕궁 금천교(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돈화문 뒤-DSC_2096.jpg|창덕궁 돈화문 뒤(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문화유산비-DSC_1776.jpg|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비(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삼삼와-_FSC6378.jpg|창덕궁 삼삼와(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인정전 내부-DSC_0610.jpg|창덕궁 인정전 내부(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8.창덕궁 인정전-_FSC6392.jpg|창덕궁 인정전(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76.jpg|강화도 외규장각(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85.jpg|강화도 외규장각 표지판(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lt;br /&gt;
파일:3-19.외규장각-ESC_8986.jpg|강화도 외규장각 표지판(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lt;br /&gt;
파일:3-20.건원릉(동구릉)-0138.jpg|동구릉 건원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경릉-동구릉.jpg|동구릉 경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광릉-석상.jpg|광릉 석상(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lt;br /&gt;
파일:3-20.목릉(동구릉)- 0113.jpg|동구릉 목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선릉(선정릉(성종)-0049.jpg|선정릉 선릉(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lt;br /&gt;
파일:3-20.수릉(동구릉)-DSC_0323.jpg|동구릉 수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융릉-석상.jpg|융건릉 융릉(경기 화성시 안녕동)&lt;br /&gt;
파일:3-20.의릉 0117.JPG|의릉(서울 성북구 화랑로32길)&lt;br /&gt;
파일:3-20.창릉-서오릉.jpg|서오릉 창릉(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lt;br /&gt;
파일:3-20.파주장릉-_GSC8668.jpg|파주 장릉(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lt;br /&gt;
파일:3-20.파주장릉-1788.jpg|파주 장릉 제향(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lt;br /&gt;
파일:3-20.헌릉1.jpg|헌인릉 헌릉(서울 서초구 헌인릉길)&lt;br /&gt;
파일:3-20.현릉-동구릉.jpg|동구릉 현릉(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0.혜릉-석상.jpg|동구릉 혜릉 석상(경기 구리시 동구릉로)&lt;br /&gt;
파일:3-22.종묘- 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0.jpg|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7.jpg|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lt;br /&gt;
파일:3-24.다문화-FSC_0528.jpg|다문화 가정을 위한 강좌&lt;br /&gt;
파일:3-26.아기와 엄마-ESC_8096.jpg|외동이 아기와 엄마&lt;br /&gt;
파일:3-27.대한민국박물관-ESC_8167.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 세종대로)&lt;br /&gt;
파일:3-27.종묘- DSC_7412.jpg|종묘(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3-27.종묘- DSC_7427.jpg|종묘(서울 종로구 종로)&lt;br /&gt;
파일:3-27.종묘대제-ESC_5608.jpg|종묘대제 &lt;br /&gt;
파일:4-1.혜초기념비-_GSC9716.jpg|혜초기념비(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 &lt;br /&gt;
파일:4-1.혜초기념비-_GSC9718.jpg|혜초기념비(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 &lt;br /&gt;
파일:4-3.충렬사- DSCN0797.jpg|통영 충렬사(경남 통영시 여황로)&lt;br /&gt;
파일:4-6.광성보-ESC_9053.jpg|강화 광성보(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lt;br /&gt;
파일:4-6.덕진진-ESC_9073.jpg|강화 덕진진(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lt;br /&gt;
파일:4-6.덕진진-ESC_9080.jpg|강화 덕진진(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lt;br /&gt;
파일:4-6.덕진진-ESC_9088.jpg|강화 덕진진(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lt;br /&gt;
파일:4-6.양헌수장군 승전비-ESC_9026.jpg|양헌수 장군 승전비(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lt;br /&gt;
파일:4-6.초지진-ESC_9089.jpg|병인양요 때의 포탄 자국이 남아 있는 강화 초지진(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lt;br /&gt;
파일:4-6.초지진-ESC_9092.jpg|강화 초지진(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lt;br /&gt;
파일:4-7.명성황후 생가-_GSC9681.jpg|명성황후 생가(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4-7.명성황후 생가-_GSC9682.jpg|명성황후 생가(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4-7.명성황후 숭모비-_GSC9673.jpg|명성황후 숭모비(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lt;br /&gt;
파일:4-7.옥호루-DSC_6484.jpg|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옥호루(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4-8.김좌진-ESC_7666.jpg|김좌진 장군 동상(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4-8.안창호 어록비-_FSC6106.jpg|안창호 어록비(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도산공원)&lt;br /&gt;
파일:4-8.안창호-_FSC6119.jpg|안창호 동상(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도산공원)&lt;br /&gt;
파일:4-8.안창호-_FSC6126.jpg|안창호 동상(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도산공원)&lt;br /&gt;
파일:4-8.임정요인-ESC_7648a.jpg|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 모형(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4-9.분단 철책- DSC_0011.jpg|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4-9.삼팔선-ESC_7253.jpg|38도선 표지석&lt;br /&gt;
파일:4-9.중앙청 태극기-ESC_7796.jpg|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게양했던 태극기&lt;br /&gt;
파일:4-9.판문점- FSC_0743.jpg|판문점&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27.jpg|새마을 정신 비석(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40.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43.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_7754.jpg|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1.베트남전-_ESC_7262.jpg|베트남 파병부대 깃발(강원 화천군 간동면 죽엽산길 베트남 참전기념관)&lt;br /&gt;
파일:4-11.베트남전-DSC_0084.jpg|베트남 참전기념탑(강원 화천군 간동면 죽엽산길 베트남 참전기념관)&lt;br /&gt;
파일:4-14.블라디보스토크역-_GSC9002.jpg|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lt;br /&gt;
파일:4-14.블라디보스토크역-_GSC9006.jpg|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lt;br /&gt;
파일:4-16.사일구 영정-ESC_8270.jpg|4.19학생혁명 희생자 영정(서울 강북구 4.19로8길 국립4.19 민주묘지) &lt;br /&gt;
파일:4-16.사일구 정신-ESC_8278.jpg|국립4.19 민주묘지(서울 강북구 4.19로8길) &lt;br /&gt;
파일:4-16.이한열-ESC_7774.jpg|이한열 어머니의 글(서울 마포구 신촌로12나길 이한열기념관)&lt;br /&gt;
파일:4-17.올림픽 공원-_GSC8346.jpg|평화의 문(서울 송파구 올림픽로)&lt;br /&gt;
파일:4-17.올림픽 공원-_GSC8352.jpg|평화의 문(서울 송파구 올림픽로)&lt;br /&gt;
파일:4-17.종합운동장-_GSC8381.jpg|잠실종합운동장(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lt;br /&gt;
파일:5-2.일본 왕인박사 기념비-DSCN1846.jpg|일본 왕인 박사 비(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lt;br /&gt;
파일:5-2.일본 왕인박사 기념비-DSCN1847.jpg|일본 왕인 박사 비(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lt;br /&gt;
파일:5-2.일본 왕인박사 기념비-DSCN1851.jpg|일본 왕인 박사 비(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lt;br /&gt;
파일:5-3.분황사-FSC_0240.jpg|분황사(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분황사-FSC_0243.jpg|분황사(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분황사-FSC_0252.jpg|분황사(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1.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2.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5.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26.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3.황룡사-FSC_0233.jpg|황룡사 터(경북 경주시 분황로)&lt;br /&gt;
파일:5-4.거란의 침입-_GSC9662.jpg|거란족의 침입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거란의 침입-_GSC9666.jpg|거란족의 침입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 담판-_GSC9651.jpg|서희의 담판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 담판-_GSC9653.jpg|서희의 담판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 담판-_GSC9659.jpg|서희의 담판 상징물(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4.서희역사관-_GSC9645.jpg|서희 역사관(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서희테마파크)&lt;br /&gt;
파일:5-6.근정전- DSC_1264.jpg|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5-6.근정전-DSC_3111.JPG|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5-6.근정전-DSC_4670.jpg|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구 사직로)&lt;br /&gt;
파일:5-7.덕수궁 앙부일귀-DSC_6976.jpg|덕수궁에 전시된 앙부일구(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덕수궁 자격루-DSC_6952.jpg|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덕수궁 자격루-DSC_6953.jpg|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덕수궁 자격루-DSC_6958.jpg|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서울 중구 세종대로) &lt;br /&gt;
파일:5-7.영릉(英陵)-0147.jpg|여주 영릉 세종전 앞 전시물(경기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lt;br /&gt;
파일:5-9.이황-DSC_8730.jpg|이황 동상&lt;br /&gt;
파일:5-9.이황-DSC_8731.jpg|이황 동상&lt;br /&gt;
파일:5-10.건릉(융건릉)-0320.jpg|융건릉 건릉(경기 화성시 안녕동)&lt;br /&gt;
파일:5-10.건릉(융건릉)-0329.jpg|융건릉 건릉(경기 화성시 안녕동)&lt;br /&gt;
파일:5-10.비원 주합루 DSC_2315.jpg|창덕궁 후원 주합루(서울 종로구 율곡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DSC_6332.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DSC_6356.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DSC_6365.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0.수원 화성 FSC_4107.JPG|수원 화성(경기 수원시)&lt;br /&gt;
파일:5-12.윤동주 시인의 언덕-20160417_151055.jpg|윤동주 시인의 언덕(서울 종로구 창의문로)&lt;br /&gt;
파일:5-12.윤동주 영혼의 터- 20160417_150503.jpg|윤동주 영혼의 터(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lt;br /&gt;
파일:5-13.안중근 어록비-ESC_7678.jpg|안중근 어록비(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5-13.안중근-ESC_7667.jpg|안중근 동상(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5-14.경교장 내부- FSC6626.jpg|경교장 내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lt;br /&gt;
파일:5-14.경교장-_FSC6665.jpg|경교장(서울 종로구 새문안로)&lt;br /&gt;
파일:5-14.김구-ESC_7639.jpg|김구 모형(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독립기념관)&lt;br /&gt;
파일:5-14경교장 내부-_FSC6634.jpg|경교장 내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lt;br /&gt;
파일:5-15.손기정 투구-ESC_8198.jpg|손기정 투구(대한민국역사박물관)&lt;br /&gt;
파일:5-15.손기정 투구-ESC_8199.jpg|손기정 투구(대한민국역사박물관)&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공공누리 및 기타 출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파일:1-1.석장리박물관_Seokjangni Museum, Seokjangni Prehistoric Site (2).jpg|석장리 박물관(충남 공주시 금벽로)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1.석장리박물관_Seokjangni Museum, Seokjangni Prehistoric Site.jpg|석장리 박물관 내부(충남 공주시 금벽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_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 (2).jpg|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내부(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1.암사동 선사유적_Amsadong Prehistoric Settlement Site.jpg|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내부(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2.단군 동상_Dangun Statue.jpg|단군상(전남 고흥 익금해수욕장)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1-2.단군 영정_Dangun Seongjeon in Seoul.jpg|단군 영정(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2.단군 영정_Dangunseongjeon Shrine.jpg|단군 영정(강원 태백시 소도동 단군성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6.전고령가야 왕릉_Tomb of Goryeong Gaya King.jpg|전고령가야 왕릉(경북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6.제철로 모형_Daegaya Museum.jpg|제철로 모형(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가야금길 대가야박물관)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6.창녕박물관_Changnyeong Museum.jpg|창녕박물관(경남 창녕군 창녕읍 군청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1-12.군산 삼일운동 기념관_The Purpose and Background of Gunsan 3.1 Movement Memorial Hall.jpg|군산 삼일운동기념관(전북 군산시 구암동)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3.대가야 왕릉 출토물_Exhibition Hall for the royal tomb of Daegaya.jpg|대가야 왕릉 출토물(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대가야왕릉전시관)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3.대가야 왕릉전시관_Exhibition Hall for the royal tomb of Daegaya.jpg|대가야왕릉전시관(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1.평화의 소녀상_Dongguksa Temple in Gunsan.jpg|평화의 소녀상(전북 군산시 금광동 동국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 표지석_Dokdo Island.jpg|독도 표지석(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1_Dokdo Island.jpg|독도(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2_Dokdo.jpg|독도(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2-12.독도3_Dokdo.jpg|독도(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생활한복_Cultural Products Pavilion.jpg|생활 한복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한복_Bukchon Hanok Village.jpg|한복 입은 여자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각종 김치_Kimchi Assortment.jpg|각종 김치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궁중요리_Gungjung Yori(Court Cuisine).jpg|궁중 요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3.북촌 한옥마을_Bukchon Hanok Village.jpg|북촌 한옥 마을(서울 종로구 북촌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6.강진 도요지_Gangjin Goryeo Celadon Kiln Sites (2).jpg|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 대구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6.강진 도요지_Gangjin Goryeo Celadon Kiln Sites (3).jpg|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 대구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6.강진 도요지_Gangjin Goryeo Celadon Kiln Sites.jpg|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 대구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8.세계문화유산 직지_Cheongju Old Printing Museum.jpg|세계문화유산 직지(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8.직지심경_Cheongju Old Printing Museum (2).jpg|직지(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8.직지심경_Cheongju Old Printing Museum.jpg|직지(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8.활자주조_Cheongju Old Printing Museum.jpg|활주 주조 과정 모형(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청주 고인쇄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9.양궁_Archery.jpg|양궁 경기(88서울올림픽)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9.태권도-시범_Asian-Game.jpg|태권도 시범(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9.활쏘기_Suwon Hwaseong Fortress.jpg|국궁 쏘기(수원 화성 연무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0.충렬사 화포_Chungnyeolsa Shrine(Tongyeong).jpg|충렬사 화포(경남 통영시 여황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0.통영 거북선 화포_Turtleship in Tongyeong.jpg|거북선 내 화포(경남 통영시 여황로 충렬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1.석천서당_Seokcheonseodang Village School (1).jpg|석천서당(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1.석천서당_Seokcheonseodang Village School.jpg|석천서당(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1.양지향교_Yangji Hyanggyo School.jpg|양지향교(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1.전주향교_Jeonju Hyanggyo.jpg|전주향교 내부(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배재학당 역사박물관_Appenzeller Noble Memorial Museum (2).jpg|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서울 정동 서소문로11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배재학당 역사박물관_Appenzeller Noble Memorial Museum.jpg|배재학당 역사박물관(서울 정동 서소문로11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연대 언더우드 동상_Yonsei University.jpg|언더우드 동상(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연세대학교)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2.이화여대_Ehwa Woman's University.jpg|이화여자대학교 본관(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3.이대캠퍼스1_Ehwa Woman's University.jpg|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3.이대캠퍼스2_The State-of-the-Art Campus.jpg|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 사진제공(Apitchaya Boonrin)-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4.전통 혼례1_Traditional Wedding Ceremony.jpg|전통 혼례(충북 진천군 농다리) / 사진제공(홍순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4.전통혼례2_Chole(Food setting for a wedding) (1).jpg|전통 혼례(충북 진천군 농다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4.제사상_World Confucian Food Festival (2).jpg|제사상(2013 세계유교음식페스티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4.제사상_World Confucian Food Festival.jpg|제사상(2013 세계유교음식페스티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4.폐백상_World Confucian Food Festival.jpg|폐백 음식(2013 세계유교음식페스티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마라도 교회_Marado Church.jpg|마라도 교회(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로101번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매봉교회_Maebong church.jpg|매봉교회(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명동성당_Myeongdong Cathedral (2).jpg|명동성당 내부(서울 중구 명동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6.명동성당_Myeongdong Cathedral.jpg|명동성당(서울 중구 명동길)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7.장승_Chilgapsan Totem Pole Park (2).jpg|장승(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길 칠갑산 장승공원)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7.장승_Chilgapsan Totem Pole Park.jpg|장승(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길 칠갑산 장승공원)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19.의궤_The National Museum of Korea (2).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9.의궤_The National Museum of Korea (3).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19.의궤_The National Museum of Korea.jpg|의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조실록_Jeonju Historical Museum.jpg|정조실록(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전주역사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족산 사고_Samnangseong (2).jpg|정족산 사고(인천 강화군 길상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족산 사고_Samnangseong (3).jpg|정족산 사고(인천 강화군 길상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1.정족산 사고_Samnangseong.jpg|정족산 사고 장사각(인천 강화군 길상면)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1.태조실록_Jeonju Historical Museum.jpg|태조실록(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전주역사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5.교통카드 충전_PublicTransportation - Subway.jpg|교통카드 충전 중 / 사진제공(주민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5.전철 개찰구_PublicTransportation - Subway.jpg|전철 개찰구 / 사진제공(주민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6.아기와 엄마_Samcheong-dong Street.jpg|엄마와 아기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7.강남 야경_Nightscape of Gangnam.jpg|서울 강남의 야경 / 사진제공(김미숙)-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7.강남거리_Gangnam Station Street.jpg|서울 강남 거리 / 사진제공(김학리)-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8.명동_Myeong-dong Street.jpg|서울 명동 거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3-28.아파트촌_Complete View of Seoul.jpg|서울의 아파트촌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팔만대장경 이운행렬_Relocation Parade of Tripitaka Koreana.jpg|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 사진제공(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팔만대장경_Haeinsa Temple, Tripitaka Koreana.jpg|대장경판(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_Haeinsa Temple.jpg|해인사 장경각(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내부1_Haeinsa Temple, Tripitaka Koreana.jpg|해인사 장경각 내부(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내부2_Haeinsa Temple.jpg|해인사 장경각 내부(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브이앤드)-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해인사 장경각 내부3_the Tripitaka Koreana.jpg|해인사 장경각 내부(경남 합천군 치인리 해인사)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거북선1_Hyeonchungsa Shrine.jpg|거북선(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거북선2_Turtleship-Hyeonchungsa.jpg|거북선(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이순신장군 동상_General Yi Sun-shin in Seoul.jpg|이순신 장군 동상(서울 종로구 세종로)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3.현충사_Hyeonchungsa-Shrine.jpg|현충사(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4.동의보감_Heojun Museum (2).jpg|동의보감(서울 강서구 허준로 허준박물관)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4.동의보감_Heojun Museum.jpg|동의보감(서울 강서구 허준로 허준박물관)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4.허준박물관_Heojun Museum.jpg|허준박물관(서울 강서구 허준로)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5.하멜기념비_하멜기념비.jpg|하멜기념비(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중앙로)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5.하멜상선 모형_Hamei Ship Exhibition (2).jpg|하멜 상선전시관(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중앙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5.하멜상선 모형_Hamei Ship Exhibition.jpg|하멜 상선전시관(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중앙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8.제헌국회-153.jpg|제헌국회 개원식(1948년 5월 31일 중앙청)&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B5-213-청도군-새마을사업장026.jpg|새마을운동 청도군 사업장&lt;br /&gt;
파일:4-11.베트남전 참전 백마부대 환송식(66.8.27).jpg|베트남전 참전 백마부대 환송식(1966년 8월 27일)&lt;br /&gt;
파일:4-11.베트남-참전-환송-660722.jpg|베트남전 참전 맹호부대 환송식(1965년 10월 27일)&lt;br /&gt;
File:4-12리비아 대수로 공사_동아건설산업_국문-49.jpg| 리비아 대수로 공사 / 사진 출처 – 동아건설 홍보물  &lt;br /&gt;
File:4-12사우디전화공사_동아건설산업_국문-52.jpg|사우디아라비아 자동 전화 공사 / 사진 출처 – 동아건설 홍보물 &lt;br /&gt;
파일:4-13.독일마을1_German Village.jpg|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정착한 독일마을(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13.독일마을2_German Village.jpg|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정착한 독일마을(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4-13.독일마을3_German Village.jpg|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정착한 독일마을(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File:4-18금모으기-전시물.jpg|금모으기 운동 관련 전시물(서울 중구 소공로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lt;br /&gt;
파일:4-19.서울월드컵 경기장_Seoul world Cup Stadium.jpg|서울월드컵경기장(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19.월드컵-거리응원_Cheer.jpg|월드컵 경기 거리 응원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19.월드컵-거리응원2_Cheer.jpg|월드컵 경기 거리 응원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4-20.치맥_Chicken Beer.jpg|치킨과 맥주 / 사진제공(주민호)-한국관광공사&lt;br /&gt;
File:4-21촛불집회1.jpg|2016년 광화문 촛불 집회 / 사진 제공 남해선&lt;br /&gt;
File:4-21촛불집회2.jpg|2016년 광화문 촛불 집회 / 사진 제공 남해선&lt;br /&gt;
파일:5-1.구리-태왕사신기-드라마-세트_Taewangsasingi-set-place-in-Guri.jpg|구리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장(경기 구리시 아천동 고구려대장간마을)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_Taewangsasingi set place in Jeju (2).jpg|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장(제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_Taewangsasingi set place in Jeju.jpg|제주 태왕사신기 드라마 세트장(제주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사진제공(전형준)-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백제역사문화관_Baekje Historical Museum.jpg|백제역사문화관 내부(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왕인 박사 유적지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 (2).jpg|왕인박사 유적지(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2.왕인 박사 유적지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jpg|왕인박사 유적지(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2.왕인박사 동상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jpg|왕인박사 동상(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왕인박사 유적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왕인박사 부조물_EMBOSSED CARVED STONE STATUE,HISTORICAL REMAINS OF DR. WANGIN.jpg|왕인박사 추정 부조물(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왕인박사 유적지)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2.왕인박사 영정_Historical Relics of Dr. Wang In.jpg|왕인박사 영정(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왕인박사 유적지) / 사진제공(박성근)-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3.첨성대_Cheomseongdae Observatory (2).jpg|첨성대(경북 경주시 인왕동)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3.첨성대_Cheomseongdae Observatory.jpg|첨성대(경북 경주시 인왕동)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6.삼봉시비_Monument of poetry of Sambong Jeong Do-jeon.jpg|삼봉시비(서울 종로구 종로 종묘공원)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신사임당 동상1_Ojukheon.jpg|신사임당 동상(강원 강릉시 율곡로 오죽헌)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신사임당 동상2_The Hall of Folk Customs.jpg|신사임당 동상(강원 강릉시 율곡로 오죽헌)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오죽헌_Ojukheon.jpg|오죽헌 내부(강원 강릉시 율곡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8.오죽헌2_Ojukheon.jpg|오죽헌(강원 강릉시 율곡로) / 사진제공(이범수)-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9.안동 도산서원_Dosan Seowon Confucian Academy.jpg|안동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9.안동 도산서원_Dosanseowon Confucian Academy.jpg|안동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9.안동-도산서원2_Dosanseowon-Confucian-Academy.jpg|안동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9.퇴계종택_Toegyejongtaek.jpg|퇴계 종택(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4.이승만과-김구-15.jpg|임시정부 환국 환영식에서의 이승만과 김구 &lt;br /&gt;
파일:5-16.환기미술관_WHANKI MUSEUM.jpg|환기미술관 내부(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6.환기미술관2_WHANKI MUSEUM.jpg|환기미술관 내부(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6.환기미술관3_WHANKI MUSEUM.jpg|환기미술관(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 내부(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2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 내부(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3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 내부(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7.백남준 아트센터4_Baeknamjun Art Center.jpg|백남준 아트센터(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5-18.김대중 컨벤션센터_Kimdaejung Convention Center.jpg|김대중 컨벤션센터(광주 서구 상무누리로)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8.김대중 흉상_Kimdaejung Convention Center.jpg|김대중 흉상(광주 서구 상무누리로 김대중 컨벤션센터)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 &lt;br /&gt;
파일:5-18.김대중-납치사건.jpg|피랍 후 돌아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하는 김대중(1973년 8월 13일)&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씨름.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씨름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춤추는아이.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춤 추는 아이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활쏘기.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활쏘기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신윤복_거문고줄고르는여인.jpg|신윤복 - 거문고 줄 고르는 여인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신윤복_대쾌도.jpg|신윤복 - 대쾌도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신윤복_전모를쓴여인.jpg|신윤복 - 전모를 쓴 여인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정선_신묘년풍악도첩_금강산.jpg|정선 - 신묘년 풍악도첩 속 금강산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SPA_이산가족찾기.JPG|이산가족찾기 / 사진제공-서울사진아카이브(공공누리)&lt;br /&gt;
File:SPA_이산가족찾기2.JPG|이산가족찾기 / 사진제공-서울사진아카이브(공공누리)&lt;br /&gt;
File:CHA_윤두서_자화상.jpg|윤두서 -자화상 / 사진제공-문화재청(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득신_정조의현륭원행차.jpg|정조의 현륭원 행차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NMK_김홍도_단원풍속도첩_서당.jpg|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속 서당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lt;br /&gt;
File:W_백남준.jpg|백남준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GH_김환기_03-Ⅶ-71.jpg|김환기 - 03-Ⅶ-71 / 사진출처-Gallery Hyundai&lt;br /&gt;
File:GH_김환기_Untitled.jpg|김환기 - Untitled / 사진출처-Gallery Hyundai&lt;br /&gt;
File:KN_윤동주.jpg|윤동주 / 사진출처-Korea.net&lt;br /&gt;
File:KT_김대중.jpg|김대중 / 사진출처-Korea Times&lt;br /&gt;
File:W_김구.jpg|김구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W_김환기.jpg|김환기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W_안중근.JPG|안중근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File:W_손기정.jpg|손기정 / 사진출처-위키피디어&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프로젝트관리]]&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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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강혜원님이 파일:1-3.호로고루성-ESC 8715.jpg 문서를 넘겨주기를 만들지 않고 파일:1-3.당포성-ESC 8715.jpg 문서로 이동했습니다&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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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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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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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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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31T02:09: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예술로서의 종묘제례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왕 한 분과 그의 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봄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였으며, 2012년부터는 봄, 가을 2 차례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제향일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이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9</id>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9"/>
				<updated>2018-01-31T02:08: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예술로서의 종묘제례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왕 한 분과 그의 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봄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였으며, 2012년부터는 봄, 가을 2 차례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제향일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이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6</id>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6"/>
				<updated>2018-01-31T01:50: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왕 한 분과 그의 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였으며, 2012년부터는 매년 11월 첫째 토요일에 가을에도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5</id>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5"/>
				<updated>2018-01-31T01:33: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왕 한 분과 그의 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4</id>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4"/>
				<updated>2018-01-31T01:30: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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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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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22T10:43: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Korea's First Female Ruler, Queen Seondeok of Silla&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한국 최초의 여왕'''==&lt;br /&gt;
===골품제 때문에 왕이 된 여성===&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화백|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lt;br /&gt;
&lt;br /&gt;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lt;br /&gt;
  &lt;br /&gt;
===여왕으로서의 고난===&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무례하게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지혜와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아 장지를 스스로 정하여 지시했다고도 한다. &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 선덕여왕의 생애와 치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이적,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 어문학사, 2009.&lt;br /&gt;
● 김용희,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초당, 2009.&lt;br /&gt;
&lt;br /&gt;
󰡔선덕여왕 향기나는 여왕 선덕󰡕은 사료를 중심으로 선덕여왕과 여왕이 살던 시대를 소개한 책이다. 여왕의 시대를 같이 만들어 갔던 여러 영웅들과 역사의 흔적인 고대유물, 유적 등에 관한 사서 등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조각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녀의 모습을 역추적 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진위 여부가 논쟁 중인 화랑세기의 자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기록과 설화만으로 선덕여왕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료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선덕여왕과 여왕의 시대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더불어 선덕여왕의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사찰과 탑 등 고대 유물, 유적을 더듬는 작업을 덧붙인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이 그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다. 풍성한 유물 사진과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함께 엮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lt;br /&gt;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을 그려낸 역사서이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신라에서 여왕이 되었던 선덕.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선덕여왕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통치를 암탉이 우는 것에 비유했고 당 태종 이세민 역시 선덕 여왕 대신 자신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롱했을 정도. 그러나 이 책은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여성 군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이 반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 주역으로 김유신과 김춘추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 저자는 역사적 추론을 통해 선덕 여왕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덕여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여성 특유의 포용의 정치와 문화의 정치를 폈던 그녀의 업적을 재평가한다.&lt;br /&gt;
&lt;br /&gt;
2. 황룡사 9층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양정석,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서경문화사, 2004.&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호국의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은 황룡사의 조영과정과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 왕권의 상징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역사적 건축물들에 대해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문헌사 등 학제간 비교연구를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3. 한국사에서의 여왕의 지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 임종욱, 󰡔여왕의 시대󰡕, 휴먼앤북스, 2012.&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에 여성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여왕의 시대’가 세 번 있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여왕의 시대󰡕는 여왕의 시대가 탄생하게 된 당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드러움과 통합이라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조명한다. 또한 여왕의 시대를 함께 조력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여왕들이 이들 인재를 활용했던 방식을 분석한다. 나아가 여왕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 여성적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어떠한 실책이 그러한 리더십의 발현에 한계를 지었는지 예리하게 파헤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3%88%EB%A7%88%EC%9D%84%EC%9A%B4%EB%8F%99%EA%B3%BC_%EB%B0%95%EC%A0%95%ED%9D%AC,_%EC%A1%B0%EA%B5%AD_%EA%B7%BC%EB%8C%80%ED%99%94&amp;diff=4441</id>
		<title>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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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22T09:20: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New Village Movement and Park Chung-Hee's Modernization of the Nation&lt;br /&gt;
}}&lt;br /&gt;
=='''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lt;br /&gt;
===농촌 자주 노력의 방안으로 시작===&lt;br /&gt;
새마을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발의로 시작된 농촌종합개발운동이다. 그는 근면·자조·협동을 이 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제시했다. 나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나서고 이웃과 협력하여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를 위해 먼저 농민들의 자세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꾸고, ‘우리도 할 수 있다’ (can-do spirit)는 의식을 계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시키려면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마을의 협동 체제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지런한 농민’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변화의 촉매제가 될 활동으로 먼저 마을환경개선사업을 제시했다. &lt;br /&gt;
&lt;br /&gt;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주민 주도아래 마을환경개선사업을 하도록 전국의 3만 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했다. 각 마을은 사업 추진기구로 주민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 사업을 결정하고 주민의 협동으로 이를 추진했다. 마을 안 길을 포장하거나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낡은 담장을 새로 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바꾸는 것 등이 그 사업내용이었다. 짧은 시간에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caption='새마을운동을 그린 민족기록화'&amp;gt;&lt;br /&gt;
파일:이인영-협업영농새마을(개곡리)-1973s.jpg|경기도 가평군 개곡리에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협업영농의 모습(이인영作, 1973년)&lt;br /&gt;
파일:장두건-종합우수새마을(묵현리)-1973s.jpg|경기도 남양주군 화도읍 묵현리에서 진행된 새마을운동 모습(장두건作, 1973년)&lt;br /&gt;
파일:이동훈-환경정리새마을-1973s.jpg|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비례리의 농민들이 현대화된 기계로 가을 추수를 하는 장면(이동훈作, 1973년)&lt;br /&gt;
파일:이마동-소득사업(새마을)-1975s.jpg|비닐하우스가 바라보이는 경기도 김포의 새마을 풍경(이마동作, 1975년)&lt;br /&gt;
파일:이마동-감귤-1973s.jpg|1972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조성된 서귀포시 감귤단지의 모습(이마동作, 1973년)&lt;br /&gt;
파일:천칠봉-경지정리-1973s.jpg|새마을운동의 열기와 정부의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 추진으로 질서정연하게 변화한 경지 모습(천칠봉作, 1973년)&lt;br /&gt;
파일:천칠봉-대단위뽕밭-1975s.jpg|김제군 일대의 대단위 뽕밭과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천칠봉作, 1973년)&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경쟁적으로 확산된 새마을운동===&lt;br /&gt;
1972년부터는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갈 주민지도자의 발굴과 훈련, 이들의 활동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사업내용도 생활환경개선과 영농기반 조성사업 등을 계속 추진하면서 이에 더해 주민들의 의식계발사업과 소득증대사업 등도 포괄하는 종합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종자개량, 경지정리, 농업기계화, 선진영농법 도입 등에 새마을운동 조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lt;br /&gt;
&lt;br /&gt;
정부는 사업이 부진한 마을을 돕는 대신 성과가 좋은 마을에게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줌으로써 마을 간의 경쟁과 분발을 촉진하는 시책을 썼다. 1973년 정부는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있는지를 평가해 전국 3만5천 개 마을을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로 나누었다. 가령 기초 마을은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없는 마을로 그 등급에 맞게 적합한 사업 과제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제공되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등급이 나뉘고 승급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갔다. 마을 사이에 경쟁심이 자극된 것이다. 1979년까지 전국 3만5천 개 마을 중 97%가 자립 마을로 승격했고 기초 마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좋은 성과를 낸 마을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참석한 새마을지도자 회의에서 성공사례발표를 하여 다른 마을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노록 했다. 성공사례로 뽑힌 마을에는 전국의 농촌지도자들이 견학을 가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농촌지역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둔 새마을 운동은 그 후 도시, 직장, 공장 등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새마을운동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쓰레기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lt;br /&gt;
&lt;br /&gt;
1980년에는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민간주도의 추진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과 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담당했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 후인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lt;br /&gt;
&lt;br /&gt;
===해외로 수출되는 개발 모델===&lt;br /&gt;
새마을운동은 수 천 년을 이어온 한국농민의 수동성과 농촌의 빈곤을 타파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독창적인 지역사회개발 모델이지만 비슷한 발전 단계에 놓인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해 볼만한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 국가원수들이 이 모델을 도입하고 싶어 했다. &lt;br /&gt;
&lt;br /&gt;
한국정부도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수하는 데 적극 나섰다.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한국에서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다. 또한 한국해외협력단(KOICA)이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해외협력단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전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lt;br /&gt;
&lt;br /&gt;
1970-1979동안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27.jpg|새마을 정신 비석(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40.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43.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54.jpg|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B5-213-청도군-새마을사업장026.jpg|새마을운동 청도군 사업장&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AF%BC%EC%A1%B1%EA%B8%B0%EB%A1%9D%ED%99%94%EB%A1%9C_%EC%82%B4%ED%8E%B4%EB%B3%B4%EB%8A%94_%EB%86%8D%EC%96%B4%EB%AF%BC_%EC%86%8C%EB%93%9D%EC%A6%9D%EB%8C%80_%ED%8A%B9%EB%B3%84%EC%82%AC%EC%97%85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오유석 외 공저,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 근대화, 전통 그리고 주체』, 한울아카데미, 2014.&lt;br /&gt;
|참고문헌2=정갑진, 『(외국인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한국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의 재평가와 활용』, 케이빌더, 2008.&lt;br /&gt;
|참고문헌3=김영모, 『새마을운동연구』, 고헌출판부, 2003.&lt;br /&gt;
}}&lt;br /&gt;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 : 근대화, 전통 그리고 주체』'''는 새마을운동이 가진 이른바 근대적 개혁성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새마을 운동이 한국사에서 근대적 주체를 출현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그런 측면에서 농촌 계몽활동에 주목하였다고 소개한다. 이어 여성운동의 차원에서 새마을 부녀지도자 조직의 기능과 역할, 마을공동체 조성과 그 역동성을 이끌어낼 원동력으로써 가지는 의미 등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은 새마을운동을 평가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망라하되, 그것이 이른바 관주도의 사회개혁적 사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전통적 사회와 조직이 관주도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어떻게 현대적 사회 조직으로 탈바꿈 되고 있으며, 그 안에 이념과 인식들은 어떻게 대체되어 갔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자 하였다. 특히 새마을운동은 전통적 구조를 부정하고 이것을 일방적으로 현대적 구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전통을 활용하면서 이를 근대성에 입각한 새로운 이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 것이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lt;br /&gt;
&lt;br /&gt;
'''『(외국인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한국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의 재평가와 활용』'''은 40여년간 진행된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그 의미와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고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시작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전국적인 사회 개조 운동으로써 새마을운동으로 정착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새마을운동의 핵심에는 농촌의 근대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새마을운동을 규정할 수 있는 10가지의 키워드도 함께 제시하였다. 또 저개발 혹은 개발도상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을 주목하는 이유는 새마을운동이 가진 그 특성과 노하우에 있다고 정리하면서, 새마을운동의 국제화를 위해서 풀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했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들을 의식하면서 그 오해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역시 10가지로 정리해 밝혔다. 또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교과서의 왜곡 실태가 어떤 것인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새마을 운동 연구』'''는 1973년 저자가 직접 새마을 운동에 참여한 이래 그 실상과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평가한 기록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정책 사업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근대적 요소와 사회적 면면들을 일신하여 당당한 현대적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저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계획이 수립되고 실제 정책으로 시행되었던 초창기부터 직접 새마을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그 내용과 전개 과정, 그 종합적인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당사자라는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우선 새마을운동이 지향한 방향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새마을’이라는 개념의 의미, 새마을정신의 내용, 그 운동의 방향성과 조직 구성들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농촌의 정신개발, 소득증대, 지역사회 조직운동, 도시에서의 직장 새마을운동,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 총체를 망라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정희 시대 경제 개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양윤세,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 박정희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 해남, 2017.&lt;br /&gt;
|참고문헌2=김용서 외 공저,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전통과현대, 2006. &lt;br /&gt;
|참고문헌3=이병천 외 공저,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창비, 2003.&lt;br /&gt;
}}&lt;br /&gt;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 박정희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은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 시대를 이끌었던 박정희 시대에 대한 내용과 실체를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주요한 사례를 중심으로 구성하되, 그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화나 숨은 이면의 이야기들을 비중 있게 다루며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인 자신이 박정희 시대 동력자원부 장관에 재직하면서 경제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회고록의 성격이 짙다. 다만 실제 실무를 맡았던 관료가 업무의 최일선에서 접했던 다양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 경제 정책과 운용에 대한 흥미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저자는 60년대 전반 대미 원조를 위해 교섭하여 얻어진 성과를 토대로 65년 이후 경제개발의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이후 한국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 기관들, 대한국제경제협의체, 종합제철소,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업 근대화 과정이 어떻게 수립 및 진행될 수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 경제를 생동감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은 박정희 시대의 밝은 면이 어두운 면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그 밝은 면에 주목해 정리된 책이다. 이 책은 지정학적으로 위기에 영속적으로 노출되었던 당시 한국 사회가 약소국가라는 숙명 속에서 무엇을 해야 했는지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박정희가 집중적인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해 경제성장을 이뤄낸 것은 한국 사회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들, 즉 한일회담과 청구권 지급 문제와 같은 사례들은 결국 일본 자본을 도입하여 한국의 공업화를 이루겠다는 전략 하에 한ㆍ미ㆍ일 3각 무역시스템의 성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아가 그 속에 축적된 자본을 중심으로 근대적 산업경제 구조의 토대가 조성되었음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는 점 역시 함께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여전히 위기의 영속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박정희식 발전모델이 어떻게 21세기적 변용을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며, 이를 통한 한국사회의 위기극복을 전략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음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은 경제학과 사회학 두 분야의 학자들이 이른바 박정희 시대를 총체적으로 분석하여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는 인식의 토대 속에 그 밝은 면으로 포장된 부분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어떠한 것인지에 주목하면서 집중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산업화와 발전양식이 가진 특성 속에 이른바 한국경제의 특징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른바 재벌체제의 발전과 성장 위주의 경제적 카르텔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질문을 던지는 한편, 정부의 강력한 금융통제, 노동정책과 노사의 관계, 나아가 개발독재 속의 빈부격차의 실마리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아울러 밝히고 있다. 한편 정치․사회학적으로 유신체제가 남북간 분단구조를 고착시키는데 일조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주목하고자 하였다. 베트남 파병과 함께 병영국가화 한 70년대 한국의 모습은 폭압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독재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 구조를 더욱 견고히 가져감으로써 오히려 남북의 분단은 고착되고 말았다고 이 책은 보고 있다. 따라서 민주화 시대에 접어든 오늘 ‘박정희’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볼 것인지가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대하는 마지막 질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은 마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70년대 계층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권경미, 『박정희체제 속 농민 노동자 도시 이방인의 삶』, 혜안, 2016.&lt;br /&gt;
|참고문헌2=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힘, 2010. &lt;br /&gt;
}}&lt;br /&gt;
'''『박정희체제 속 농민 노동자 도시 이방인의 삶』'''은 1970년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층민들의 삶과 양태를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을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박정희 시대 하층민으로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도시로 이주한 농촌 출신 빈민계층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삶을 그려낸 각각의 문학 작품들에 투영된 내용에 주목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농민은 전통과 근대의 점이지대에 놓여있던 존재들로 유교적 세계관과 공동체적 삶에 강하게 강박되어 있었으며, 근대적 가치관과 충돌하던 존재였다고 보았다. 그 결과 박정희 시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사회의 전근대적 구조를 허물고자 하였고, 나아가 농업의 산업화를 국가가 주도하면서 농촌 내 새로운 구조와 계급적 모순을 양산시켜 결국 농민집단을 분열케 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노동자의 경우 노동 현장의 모순이 만연한 상황에서 그 법적 주체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박정희 시대가 조장하였다고 보았다. 법의 절대성이 강조된 폭압적 대응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탄압의 대상자일 뿐이었으며, 결국 노동의 주체가 아닌 가족생계형 노동자로 재편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 농촌 공동체의 붕괴, 산업 구조 재편에 따른 가족공동체의 해체는 도시 이방인을 출현시켰고, 도시로 몰려든 그들은 일종의 잉여 노동력과 인적 자본으로 소비되었다. 그렇게 소비된 도시이방인들은 하나의 인격적 주체가 되기보단 타자에 의해 규정된 규율과 정체성에 순응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음도 함께 언급되었다. 이처럼 70년대 민중들의 삶은 당대 많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되어 있으며, 이것은 70년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방법론이 되기도 함을 이 책은 역설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낸 조세희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소설은 난장이로 묘사된 힘 없는 도시 노동자의 삶과 애환을 그린 것으로 한 개인으로서 도시 노동자의 현실, 나아가 그들의 가족공동체가 직면한 위기의 모습들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책이다. 개발독재 속에 작동되던 70년대 권위주의적 사회가 이뤄낸 산업사회와 근대화의 허상이 한 개인과 당시 하층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특히 당시 산업화를 통해 얻어진 열매는 그 발전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노동자들과는 무관하게 소비되던 가운데,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은 노동환경, 주택문제, 사회 양극화의 물결 속에 점차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다양한 상징적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이해는 전문 학술서를 활용 이외에 당시 하층민들의 실질적인 삶을 묘사한 주요 문학작품을 접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83%88%EB%A7%88%EC%9D%84%EC%9A%B4%EB%8F%99%EA%B3%BC_%EB%B0%95%EC%A0%95%ED%9D%AC,_%EC%A1%B0%EA%B5%AD_%EA%B7%BC%EB%8C%80%ED%99%94&amp;diff=4440</id>
		<title>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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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22T09:14: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관련항목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New Village Movement and Park Chung-Hee's Modernization of the Nation&lt;br /&gt;
}}&lt;br /&gt;
=='''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lt;br /&gt;
===농촌 자주 노력의 방안으로 시작===&lt;br /&gt;
새마을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발의로 시작된 농촌종합개발운동이다. 그는 근면·자조·협동을 이 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제시했다. 나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나서고 이웃과 협력하여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를 위해 먼저 농민들의 자세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꾸고, ‘우리도 할 수 있다’ (can-do spirit)는 의식을 계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시키려면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마을의 협동 체제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지런한 농민’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변화의 촉매제가 될 활동으로 먼저 마을환경개선사업을 제시했다. &lt;br /&gt;
&lt;br /&gt;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주민 주도아래 마을환경개선사업을 하도록 전국의 3만 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했다. 각 마을은 사업 추진기구로 주민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 사업을 결정하고 주민의 협동으로 이를 추진했다. 마을 안 길을 포장하거나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낡은 담장을 새로 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바꾸는 것 등이 그 사업내용이었다. 짧은 시간에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lt;br /&gt;
  &lt;br /&gt;
===경쟁적으로 확산된 새마을운동===&lt;br /&gt;
1972년부터는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갈 주민지도자의 발굴과 훈련, 이들의 활동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사업내용도 생활환경개선과 영농기반 조성사업 등을 계속 추진하면서 이에 더해 주민들의 의식계발사업과 소득증대사업 등도 포괄하는 종합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종자개량, 경지정리, 농업기계화, 선진영농법 도입 등에 새마을운동 조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lt;br /&gt;
&lt;br /&gt;
정부는 사업이 부진한 마을을 돕는 대신 성과가 좋은 마을에게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줌으로써 마을 간의 경쟁과 분발을 촉진하는 시책을 썼다. 1973년 정부는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있는지를 평가해 전국 3만5천 개 마을을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로 나누었다. 가령 기초 마을은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없는 마을로 그 등급에 맞게 적합한 사업 과제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제공되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등급이 나뉘고 승급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갔다. 마을 사이에 경쟁심이 자극된 것이다. 1979년까지 전국 3만5천 개 마을 중 97%가 자립 마을로 승격했고 기초 마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좋은 성과를 낸 마을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참석한 새마을지도자 회의에서 성공사례발표를 하여 다른 마을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노록 했다. 성공사례로 뽑힌 마을에는 전국의 농촌지도자들이 견학을 가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농촌지역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둔 새마을 운동은 그 후 도시, 직장, 공장 등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새마을운동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쓰레기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lt;br /&gt;
&lt;br /&gt;
1980년에는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민간주도의 추진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과 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담당했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 후인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lt;br /&gt;
&lt;br /&gt;
===해외로 수출되는 개발 모델===&lt;br /&gt;
&lt;br /&gt;
새마을운동은 수 천 년을 이어온 한국농민의 수동성과 농촌의 빈곤을 타파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독창적인 지역사회개발 모델이지만 비슷한 발전 단계에 놓인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해 볼만한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 국가원수들이 이 모델을 도입하고 싶어 했다. &lt;br /&gt;
&lt;br /&gt;
한국정부도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수하는 데 적극 나섰다.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한국에서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다. 또한 한국해외협력단(KOICA)이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해외협력단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전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lt;br /&gt;
&lt;br /&gt;
1970-1979동안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27.jpg|새마을 정신 비석(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40.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43.jpg|새마을 운동(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ESC 7754.jpg|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 기념 도서관)&lt;br /&gt;
파일:4-10.새마을-운동-B5-213-청도군-새마을사업장026.jpg|새마을운동 청도군 사업장&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AF%BC%EC%A1%B1%EA%B8%B0%EB%A1%9D%ED%99%94%EB%A1%9C_%EC%82%B4%ED%8E%B4%EB%B3%B4%EB%8A%94_%EB%86%8D%EC%96%B4%EB%AF%BC_%EC%86%8C%EB%93%9D%EC%A6%9D%EB%8C%80_%ED%8A%B9%EB%B3%84%EC%82%AC%EC%97%85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오유석 외 공저,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 근대화, 전통 그리고 주체』, 한울아카데미, 2014.&lt;br /&gt;
|참고문헌2=정갑진, 『(외국인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한국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의 재평가와 활용』, 케이빌더, 2008.&lt;br /&gt;
|참고문헌3=김영모, 『새마을운동연구』, 고헌출판부, 2003.&lt;br /&gt;
}}&lt;br /&gt;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 : 근대화, 전통 그리고 주체』'''는 새마을운동이 가진 이른바 근대적 개혁성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새마을 운동이 한국사에서 근대적 주체를 출현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그런 측면에서 농촌 계몽활동에 주목하였다고 소개한다. 이어 여성운동의 차원에서 새마을 부녀지도자 조직의 기능과 역할, 마을공동체 조성과 그 역동성을 이끌어낼 원동력으로써 가지는 의미 등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은 새마을운동을 평가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망라하되, 그것이 이른바 관주도의 사회개혁적 사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전통적 사회와 조직이 관주도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어떻게 현대적 사회 조직으로 탈바꿈 되고 있으며, 그 안에 이념과 인식들은 어떻게 대체되어 갔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자 하였다. 특히 새마을운동은 전통적 구조를 부정하고 이것을 일방적으로 현대적 구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전통을 활용하면서 이를 근대성에 입각한 새로운 이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 것이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lt;br /&gt;
&lt;br /&gt;
'''『(외국인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한국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의 재평가와 활용』'''은 40여년간 진행된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그 의미와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고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시작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전국적인 사회 개조 운동으로써 새마을운동으로 정착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새마을운동의 핵심에는 농촌의 근대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새마을운동을 규정할 수 있는 10가지의 키워드도 함께 제시하였다. 또 저개발 혹은 개발도상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을 주목하는 이유는 새마을운동이 가진 그 특성과 노하우에 있다고 정리하면서, 새마을운동의 국제화를 위해서 풀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했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들을 의식하면서 그 오해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역시 10가지로 정리해 밝혔다. 또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교과서의 왜곡 실태가 어떤 것인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lt;br /&gt;
&lt;br /&gt;
'''『새마을 운동 연구』'''는 1973년 저자가 직접 새마을 운동에 참여한 이래 그 실상과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평가한 기록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정책 사업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근대적 요소와 사회적 면면들을 일신하여 당당한 현대적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저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계획이 수립되고 실제 정책으로 시행되었던 초창기부터 직접 새마을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그 내용과 전개 과정, 그 종합적인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당사자라는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우선 새마을운동이 지향한 방향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새마을’이라는 개념의 의미, 새마을정신의 내용, 그 운동의 방향성과 조직 구성들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농촌의 정신개발, 소득증대, 지역사회 조직운동, 도시에서의 직장 새마을운동,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 총체를 망라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정희 시대 경제 개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양윤세,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 박정희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 해남, 2017.&lt;br /&gt;
|참고문헌2=김용서 외 공저,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전통과현대, 2006. &lt;br /&gt;
|참고문헌3=이병천 외 공저,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창비, 2003.&lt;br /&gt;
}}&lt;br /&gt;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 박정희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은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 시대를 이끌었던 박정희 시대에 대한 내용과 실체를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주요한 사례를 중심으로 구성하되, 그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화나 숨은 이면의 이야기들을 비중 있게 다루며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인 자신이 박정희 시대 동력자원부 장관에 재직하면서 경제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회고록의 성격이 짙다. 다만 실제 실무를 맡았던 관료가 업무의 최일선에서 접했던 다양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 경제 정책과 운용에 대한 흥미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저자는 60년대 전반 대미 원조를 위해 교섭하여 얻어진 성과를 토대로 65년 이후 경제개발의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이후 한국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 기관들, 대한국제경제협의체, 종합제철소,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업 근대화 과정이 어떻게 수립 및 진행될 수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 경제를 생동감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은 박정희 시대의 밝은 면이 어두운 면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그 밝은 면에 주목해 정리된 책이다. 이 책은 지정학적으로 위기에 영속적으로 노출되었던 당시 한국 사회가 약소국가라는 숙명 속에서 무엇을 해야 했는지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박정희가 집중적인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해 경제성장을 이뤄낸 것은 한국 사회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들, 즉 한일회담과 청구권 지급 문제와 같은 사례들은 결국 일본 자본을 도입하여 한국의 공업화를 이루겠다는 전략 하에 한ㆍ미ㆍ일 3각 무역시스템의 성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아가 그 속에 축적된 자본을 중심으로 근대적 산업경제 구조의 토대가 조성되었음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는 점 역시 함께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여전히 위기의 영속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박정희식 발전모델이 어떻게 21세기적 변용을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며, 이를 통한 한국사회의 위기극복을 전략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음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은 경제학과 사회학 두 분야의 학자들이 이른바 박정희 시대를 총체적으로 분석하여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는 인식의 토대 속에 그 밝은 면으로 포장된 부분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어떠한 것인지에 주목하면서 집중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산업화와 발전양식이 가진 특성 속에 이른바 한국경제의 특징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른바 재벌체제의 발전과 성장 위주의 경제적 카르텔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질문을 던지는 한편, 정부의 강력한 금융통제, 노동정책과 노사의 관계, 나아가 개발독재 속의 빈부격차의 실마리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아울러 밝히고 있다. 한편 정치․사회학적으로 유신체제가 남북간 분단구조를 고착시키는데 일조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주목하고자 하였다. 베트남 파병과 함께 병영국가화 한 70년대 한국의 모습은 폭압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독재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 구조를 더욱 견고히 가져감으로써 오히려 남북의 분단은 고착되고 말았다고 이 책은 보고 있다. 따라서 민주화 시대에 접어든 오늘 ‘박정희’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볼 것인지가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대하는 마지막 질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은 마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70년대 계층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권경미, 『박정희체제 속 농민 노동자 도시 이방인의 삶』, 혜안, 2016.&lt;br /&gt;
|참고문헌2=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힘, 2010. &lt;br /&gt;
}}&lt;br /&gt;
'''『박정희체제 속 농민 노동자 도시 이방인의 삶』'''은 1970년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층민들의 삶과 양태를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을 분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박정희 시대 하층민으로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도시로 이주한 농촌 출신 빈민계층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삶을 그려낸 각각의 문학 작품들에 투영된 내용에 주목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농민은 전통과 근대의 점이지대에 놓여있던 존재들로 유교적 세계관과 공동체적 삶에 강하게 강박되어 있었으며, 근대적 가치관과 충돌하던 존재였다고 보았다. 그 결과 박정희 시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사회의 전근대적 구조를 허물고자 하였고, 나아가 농업의 산업화를 국가가 주도하면서 농촌 내 새로운 구조와 계급적 모순을 양산시켜 결국 농민집단을 분열케 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노동자의 경우 노동 현장의 모순이 만연한 상황에서 그 법적 주체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박정희 시대가 조장하였다고 보았다. 법의 절대성이 강조된 폭압적 대응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탄압의 대상자일 뿐이었으며, 결국 노동의 주체가 아닌 가족생계형 노동자로 재편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 농촌 공동체의 붕괴, 산업 구조 재편에 따른 가족공동체의 해체는 도시 이방인을 출현시켰고, 도시로 몰려든 그들은 일종의 잉여 노동력과 인적 자본으로 소비되었다. 그렇게 소비된 도시이방인들은 하나의 인격적 주체가 되기보단 타자에 의해 규정된 규율과 정체성에 순응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음도 함께 언급되었다. 이처럼 70년대 민중들의 삶은 당대 많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되어 있으며, 이것은 70년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방법론이 되기도 함을 이 책은 역설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낸 조세희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소설은 난장이로 묘사된 힘 없는 도시 노동자의 삶과 애환을 그린 것으로 한 개인으로서 도시 노동자의 현실, 나아가 그들의 가족공동체가 직면한 위기의 모습들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책이다. 개발독재 속에 작동되던 70년대 권위주의적 사회가 이뤄낸 산업사회와 근대화의 허상이 한 개인과 당시 하층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특히 당시 산업화를 통해 얻어진 열매는 그 발전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노동자들과는 무관하게 소비되던 가운데,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은 노동환경, 주택문제, 사회 양극화의 물결 속에 점차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다양한 상징적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이해는 전문 학술서를 활용 이외에 당시 하층민들의 실질적인 삶을 묘사한 주요 문학작품을 접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3%B5%EC%82%B0%EC%A3%BC%EC%9D%98%EC%9E%90%EB%93%A4%EC%9D%98_%EB%A7%8C%ED%96%89,_%EB%B6%84%EB%8B%A8%EA%B3%BC_%ED%95%9C%EA%B5%AD%EC%A0%84%EC%9F%81&amp;diff=4439</id>
		<title>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한국전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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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22T09:13: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휴전으로 중지된 전쟁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Division of Korea and the Korean War&lt;br /&gt;
}}&lt;br /&gt;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한국전쟁'''==&lt;br /&gt;
===38선을 통제한 소련===&lt;br /&gt;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8월 11일이었지만 소련은 8일부터 한반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도 서둘러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소련군은 미군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 다급해진 미군은 소련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8월 27일까지 38선 이북의 북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미군은 9월 8일에야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바로 38선을 통제하였다. 8월 말에는 남북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모두 막았다. 9월 6일에는 통신을 끊고 우편물이 오고가는 것도 금지했다. 원래 38선은 미소 연합국이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남한과 북한을 분단시키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lt;br /&gt;
  &lt;br /&gt;
===한국전쟁 발발===&lt;br /&gt;
[[파일:김서봉-구월산지구유격대-1967s.jpg|600px|thumb|center|한국전쟁 중 황해도 구월산 일대에서 적군에 맞선 구월산유격대(九月山遊擊隊)의 전투 장면을 그린 민족기록화(김서봉作, 1967년)]]&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해왔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남한보다 훨씬 뛰어났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유엔은 바로 다음 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게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lt;br /&gt;
&lt;br /&gt;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남한군은 그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다. 그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였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고 11월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은 후 38선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38선 근처에서는 양쪽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을 계속해봤자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현재 형성된 전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회담이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휴전으로 중지된 전쟁===&lt;br /&gt;
휴전 회담은 2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싸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전 협정에 반대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무시된 채, 공산 국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이 휴전 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6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중단되었다.  &lt;br /&gt;
&lt;br /&gt;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다.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받아들였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 조인이 이뤄졌다. &lt;br /&gt;
&lt;br /&gt;
휴전은 했지만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국군과 유엔군 119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부상당하였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남북한의 인명 피해 규모는 50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거의 전국이 다 전쟁터였기 때문에 건물은 물론 도로, 철도, 항만과 산업 시설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피해는 같은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4-9.분단 철책- DSC 0011.jpg|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4-9.삼팔선-ESC 7253.jpg|38도선 표지석&lt;br /&gt;
파일:4-9.중앙청 태극기-ESC 7796.jpg|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게양했던 태극기&lt;br /&gt;
파일:4-9.판문점- FSC 0743.jpg|판문점&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파일:018(K).jpg|북한의 남한 침략&lt;br /&gt;
파일:019(K).jpg|UN군의 참전&lt;br /&gt;
파일:020(K).jpg|중공군의 개입&lt;br /&gt;
파일:021(K).jpg|정전협정에 따른 군사분계선 설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단의 책임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종효, 『한반도 분단론의 기원과 러·일 전쟁: 1904~1905』, 선인, 2014.&lt;br /&gt;
|참고문헌2=김계동, 『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 명인문화사, 2012.&lt;br /&gt;
|참고문헌3=윤진헌, 『한반도 분단사 : 분단의 과정과 전쟁의 책임』, 이담북스, 2010.&lt;br /&gt;
}}&lt;br /&gt;
'''『한반도 분단론의 기원과 러·일 전쟁: 1904~1905』'''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일본에게 있다는 전제하에 그 기원과 전개 과정을 정리해낸 책이다. 종래에는 한반도의 분단이 냉전과 미‧소 대립의 결과이며, 한국전쟁을 계기로 고착화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보다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으로 인한 연합국의 점령이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고 그러한 맥락에서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일본에게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한 노력의 종결점이 되었던 러‧일전쟁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소급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라고 보고 러‧일전쟁의 내용과 그 전개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해 내고자 하였다. 저자는 조선을 두고 경쟁했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이미 한반도 분할론이 대두되었던 점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자국의 이해에 따라 분할 점령하겠다는 의도와 시도가 있었다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한반도 분단에 있어 그 책임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한반도 분단과 관련한 전통적인 시각과 수정주의 시각을 망라하여 이해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일본의 책임론에 입각한 명료한 이해를 토대로 시야를 넓혀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완전한 분단국가로 남게 되어 버린 한반도의 분단상황에 대해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해방직후부터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서술하면서 그것이 한국전쟁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어 분단으로 고착되게 되는 과정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해 내었다. 그 안에서 당초 통일정부 수립을 약속한 주변 강대국들이 자국에 대한 이해를 한반도에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결국 타협점에 이르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그 분단의 아픔과 피해를 고스란히 우리 한민족이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신탁통치의 구상이 결국 한반도 안에 강대국간 영향력을 공유하는 발상에서 기인하였으며, 이것이 분단의 출발이었다고 보고 있다. 또 미국과 소련의 진주로 말미암아 냉전의 경쟁이 한반도로 옮겨오는 가운데 두 개의 상이한 점령정책은 소련 팽창의 봉쇄를 추구하던 미국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진영 확대를 원하던 소련 및 중국의 반발에 부딪치며 끝내 분단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국내 좌․우익간 대립과 갈등 역시 분단을 촉진시키는 동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민족 외부, 즉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대와 냉전의 갈등의 산물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반도 분단사 : 분단의 과정과 전쟁의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과 그 책임의 소재를 규명하고자 그 역사적 진행 과정을 정리해낸 책이다. 저자는 한반도 분단은 결국 한국전쟁을 통해 고착화 되었으며, 한국전쟁의 책임이 곧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라는 관점 속에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표면화된 냉전의 대립이 그대로 한반도로 옮겨와 충돌한 사건으로 결국 당시 전세계적으로 냉전의 갈등을 주도해가던 미국과 소련에게 한반도 분단의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미국의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UN으로의 이관은 분단에 있어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반도가 가진 여러 지정학적, 정치적 환경과 요소를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분석하였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정부가 한반도에 수립되길 원했으며, 신탁통치로 인해 분할점령과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력적 충돌을 통해서라도 자국의 의도를 관철시켜 나가야만 했다. 이것이 결국 한국전쟁으로 표출되었고, 한반도는 이후 오랜 기간 분단의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력 지원을 공산진영의 위협에 대한 수호의 의지로 설명해 내기도 하지만, 이 책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자국의 이익과 영향력 유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며, 이는 아직도 한반도가 분단과 갈등의 현장으로 남아있는 배경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한반도의 분단을 이해하는데 보다 넓은 시야를 제공해 주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인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반도와 핵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우상, 『신한국책략. 4.0, 북한 핵위협과 한반도 안보』, 세창출판사, 2017.&lt;br /&gt;
|참고문헌2=김병욱, 『북한 핵개발 원인과 미국의 전략』, 킴스정보전략연구소, 2015. &lt;br /&gt;
|참고문헌3=요시무라 신타로 외 공저, 『핵확산 문제와 아시아 : 핵 억지론(抑止論)을 넘어서』, 문, 2012.&lt;br /&gt;
}}&lt;br /&gt;
'''『신한국책략. 4.0, 북한 핵위협과 한반도 안보』'''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안보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살피며 그 대안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북핵과 관련한 한반도 정세와 안보 문제는 한국내에서도 보수와 진보 진영간 입장의 차이가 매우 뚜렷하고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북한 핵개발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보수에 비해 진보는 북한 정권의 안정을 보장하고 온건한 대응을 통한 신뢰를 쌓은 이후 점진적인 핵포기로의 유인해 내야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저자는 이 가운데 후자에 가까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한 대북정책에는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으로 보이고 있다. 저자는 북한의 핵개발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되지만, 성공적인 대북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대전략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한국의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 문제가 다시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제한적 선제불사용 원칙을 도입하는 가운데 핵의 평화적 사용권을 포기 하지 않는 등 북한과 국제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정세와 관련해 가장 최신의 정보를 토대로 분석하고 있는 책이란 점에서 한반도 핵문제와 관련한 많은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북한 핵개발 원인과 미국의 전략』'''은 현재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노력의 면면 속에서 그 원인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의 전략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집착이 미국의 적대정책을 향한 정권안보 차원에서의 몸부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북한은 군사력 강화와 동시에 국내 정치적 목적이라는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핵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중요한 가운데 이를 위해 당사자인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입장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이른바 6자회담이란 바로 북한의 핵위협을 둘러싼 주변국 당사자들간의 입장을 조율할 대화의 창구인데, 이것이 과연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를 명확히 분석해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강조하였다. 결국 미국의 북한 핵개발에 대한 전략이 6자 회담을 통해 얼마나 관철되고 있는지가 관건이며, 그와 관련한 그간의 평가와 의의를 덧붙여 놓았다. 북한의 핵개발과 그 외교적 대응의 전반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핵확산 문제와 아시아 : 핵 억지론(抑止論)을 넘어서』'''는 일본의 저명한 정치학자들이 북한 핵개발과 관련한 다양한 입장과 의견을 담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북한의 핵개발과 핵확산의 분위기를 대하는 일본의 입장을 ‘혼네’와 ‘다테마에’로 분석하면서, 세계 유일의 피폭국으로 평화를 지향한다는 다테마에 속에 정세적 명분을 이용해 핵무장으로 나아가려는 혼네를 지닌 것이 일본이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포스트 냉전 시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초강대국들에 대한 대응의 방편으로 핵개발과 핵무장이 추진되는 경향에 주목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은 자칫 동북아시아를 넘어 아시아 전체에 그와 같은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음도 경고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핵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무엇보다 핵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넘어 인도와 파키스탄, 이란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서 핵개발과 관련한 상세한 배경과 실체들을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비무장지대-DMZ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규현, 김재한 공저, 『비무장지대를 넘는 길: 라인강에서 출발하는 분단과 통일의 역사, 문화, 생태 기행』, 아마존의나비, 2015.&lt;br /&gt;
|참고문헌2=이태호 외 공저,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 공동경비구역 JSA와 DMZ』, 눈빛, 2013. &lt;br /&gt;
|참고문헌3=이해용, 『비무장지대(DMZ)를 찾아서: 정전50년, 휴전선 분단현장 보고서』, 눈빛, 2003. &lt;br /&gt;
}}&lt;br /&gt;
'''『비무장지대를 넘는 길: 라인강에서 출발하는 분단과 통일의 역사, 문화, 생태 기행』'''은 10년에 걸쳐 한반도와 독일의 분단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 공저자들이 분단과 통일에 대한 자신들의 감상과 생각들을 담아내고 현장의 생생한 모습과 의미들을 도출해 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같은 분단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독일과 한국의 현장들을 직접 소개하면서 한쪽은 분단을 극복해 옛 기억으로 남은 모습으로, 한쪽은 현재 진행형의 고통으로 설명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비무장지대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면서 만나는 주요한 포인트들을 독일의 유사한 사례와 나란히 비교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저자는 독일의 것이 개방의 성격이라면, 한국의 것은 폐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일종의 기행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책은 비무장지대의 모습을 눈과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 공동경비구역 JSA와 DMZ』'''는 분단과 휴전의 상징과도 같은 비무장지대의 실상과 실체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내용의 책이다. 오랜 기간의 휴전이 가지고 온 나른함은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는 눈길을 어느덧 자라난 꽃과 풀, 그 속을 누비는 야생의 동물들에게 돌리게 하여 일정한 낭만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비무장지대와 판문점은 여전히 일촉즉발의 위기를 경계하는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다. 이에 저자는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냉엄한 현실과 의미를 하나씩 되짚어 보면서 그 속에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판문점의 유래에서 시작해서 현재 판문점의 현황들을 소개하고, 이어 그곳에서 벌어졌던 정전회담과 포로 송환에 대한 논의,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의 내용들을 정리하였다. 또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졌던 많은 사건들과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그 긴장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그곳이 더 이상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남북대화와 교류의 현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아울러 담고 있다. 비무장지대와 남북간 대립의 실체를 날것 그대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비무장지대(DMZ)를 찾아서: 정전50년, 휴전선 분단현장 보고서』'''는 한반도 분단과 대립의 상징으로 화석처럼 남아있는 비무장지대의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비무장지대는 남북한 군사력이 의도치 않게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선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 씩, 총 4km를 물러나 비워둔 공간이다. 때문에 이곳은 군사지역으로써 많은 지뢰와 전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가운데, 민간인의 출입과 개발이 금지되어 있어 야생의 상태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제한적이지만 그곳에는 정착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다시 과거 사람들의 삶의 흔적도 존재한다. 비무장지대에 산재한 많은 문화유산과 유적지들은 지뢰밭 더미 속에서 다시금 찾아올 우리들의 발길을 기다리며 지금도 그렇게 서 있다. 비무장지대의 아픔과, 생태, 각종 문화재들과 지역 주민들의 삶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책으로써 다양한 사진들을 수록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쉽고 친근하게 비무장지대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A%B3%B5%EC%82%B0%EC%A3%BC%EC%9D%98%EC%9E%90%EB%93%A4%EC%9D%98_%EB%A7%8C%ED%96%89,_%EB%B6%84%EB%8B%A8%EA%B3%BC_%ED%95%9C%EA%B5%AD%EC%A0%84%EC%9F%81&amp;diff=4438</id>
		<title>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한국전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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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22T09:13: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The Division of Korea and the Korean War&lt;br /&gt;
}}&lt;br /&gt;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한국전쟁'''==&lt;br /&gt;
===38선을 통제한 소련===&lt;br /&gt;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8월 11일이었지만 소련은 8일부터 한반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도 서둘러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소련군은 미군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 다급해진 미군은 소련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8월 27일까지 38선 이북의 북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미군은 9월 8일에야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바로 38선을 통제하였다. 8월 말에는 남북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모두 막았다. 9월 6일에는 통신을 끊고 우편물이 오고가는 것도 금지했다. 원래 38선은 미소 연합국이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남한과 북한을 분단시키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lt;br /&gt;
  &lt;br /&gt;
===한국전쟁 발발===&lt;br /&gt;
[[파일:김서봉-구월산지구유격대-1967s.jpg|600px|thumb|center|한국전쟁 중 황해도 구월산 일대에서 적군에 맞선 구월산유격대(九月山遊擊隊)의 전투 장면을 그린 민족기록화(김서봉作, 1967년)]]&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해왔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남한보다 훨씬 뛰어났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유엔은 바로 다음 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게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lt;br /&gt;
&lt;br /&gt;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남한군은 그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다. 그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였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고 11월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lt;br /&gt;
&lt;br /&gt;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은 후 38선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38선 근처에서는 양쪽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을 계속해봤자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현재 형성된 전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회담이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휴전으로 중지된 전쟁===&lt;br /&gt;
휴전 회담은 2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싸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전 협정에 반대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무시된 채, 공산 국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이 휴전 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6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중단되었다.  &lt;br /&gt;
&lt;br /&gt;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다.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받아들였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 조인이 이뤄졌다. &lt;br /&gt;
&lt;br /&gt;
휴전은 했지만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국군과 유엔군 119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부상당하였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남북한의 인명 피해 규모는 50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거의 전국이 다 전쟁터였기 때문에 건물은 물론 도로, 철도, 항만과 산업 시설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피해는 같은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4-9.분단 철책- DSC 0011.jpg|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lt;br /&gt;
파일:4-9.삼팔선-ESC 7253.jpg|38도선 표지석&lt;br /&gt;
파일:4-9.중앙청 태극기-ESC 7796.jpg|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게양했던 태극기&lt;br /&gt;
파일:4-9.판문점- FSC 0743.jpg|판문점&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amp;gt;&lt;br /&gt;
파일:018(K).jpg|북한의 남한 침략&lt;br /&gt;
파일:019(K).jpg|UN군의 참전&lt;br /&gt;
파일:020(K).jpg|중공군의 개입&lt;br /&gt;
파일:021(K).jpg|정전협정에 따른 군사분계선 설치&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단의 책임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종효, 『한반도 분단론의 기원과 러·일 전쟁: 1904~1905』, 선인, 2014.&lt;br /&gt;
|참고문헌2=김계동, 『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 명인문화사, 2012.&lt;br /&gt;
|참고문헌3=윤진헌, 『한반도 분단사 : 분단의 과정과 전쟁의 책임』, 이담북스, 2010.&lt;br /&gt;
}}&lt;br /&gt;
'''『한반도 분단론의 기원과 러·일 전쟁: 1904~1905』'''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일본에게 있다는 전제하에 그 기원과 전개 과정을 정리해낸 책이다. 종래에는 한반도의 분단이 냉전과 미‧소 대립의 결과이며, 한국전쟁을 계기로 고착화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보다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으로 인한 연합국의 점령이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고 그러한 맥락에서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일본에게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한 노력의 종결점이 되었던 러‧일전쟁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소급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라고 보고 러‧일전쟁의 내용과 그 전개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해 내고자 하였다. 저자는 조선을 두고 경쟁했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이미 한반도 분할론이 대두되었던 점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자국의 이해에 따라 분할 점령하겠다는 의도와 시도가 있었다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한반도 분단에 있어 그 책임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한반도 분단과 관련한 전통적인 시각과 수정주의 시각을 망라하여 이해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일본의 책임론에 입각한 명료한 이해를 토대로 시야를 넓혀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완전한 분단국가로 남게 되어 버린 한반도의 분단상황에 대해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해방직후부터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서술하면서 그것이 한국전쟁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어 분단으로 고착되게 되는 과정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해 내었다. 그 안에서 당초 통일정부 수립을 약속한 주변 강대국들이 자국에 대한 이해를 한반도에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결국 타협점에 이르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그 분단의 아픔과 피해를 고스란히 우리 한민족이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신탁통치의 구상이 결국 한반도 안에 강대국간 영향력을 공유하는 발상에서 기인하였으며, 이것이 분단의 출발이었다고 보고 있다. 또 미국과 소련의 진주로 말미암아 냉전의 경쟁이 한반도로 옮겨오는 가운데 두 개의 상이한 점령정책은 소련 팽창의 봉쇄를 추구하던 미국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진영 확대를 원하던 소련 및 중국의 반발에 부딪치며 끝내 분단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국내 좌․우익간 대립과 갈등 역시 분단을 촉진시키는 동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민족 외부, 즉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대와 냉전의 갈등의 산물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한반도 분단사 : 분단의 과정과 전쟁의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과 그 책임의 소재를 규명하고자 그 역사적 진행 과정을 정리해낸 책이다. 저자는 한반도 분단은 결국 한국전쟁을 통해 고착화 되었으며, 한국전쟁의 책임이 곧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라는 관점 속에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표면화된 냉전의 대립이 그대로 한반도로 옮겨와 충돌한 사건으로 결국 당시 전세계적으로 냉전의 갈등을 주도해가던 미국과 소련에게 한반도 분단의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미국의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UN으로의 이관은 분단에 있어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반도가 가진 여러 지정학적, 정치적 환경과 요소를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분석하였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정부가 한반도에 수립되길 원했으며, 신탁통치로 인해 분할점령과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력적 충돌을 통해서라도 자국의 의도를 관철시켜 나가야만 했다. 이것이 결국 한국전쟁으로 표출되었고, 한반도는 이후 오랜 기간 분단의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력 지원을 공산진영의 위협에 대한 수호의 의지로 설명해 내기도 하지만, 이 책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자국의 이익과 영향력 유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며, 이는 아직도 한반도가 분단과 갈등의 현장으로 남아있는 배경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한반도의 분단을 이해하는데 보다 넓은 시야를 제공해 주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인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반도와 핵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우상, 『신한국책략. 4.0, 북한 핵위협과 한반도 안보』, 세창출판사, 2017.&lt;br /&gt;
|참고문헌2=김병욱, 『북한 핵개발 원인과 미국의 전략』, 킴스정보전략연구소, 2015. &lt;br /&gt;
|참고문헌3=요시무라 신타로 외 공저, 『핵확산 문제와 아시아 : 핵 억지론(抑止論)을 넘어서』, 문, 2012.&lt;br /&gt;
}}&lt;br /&gt;
'''『신한국책략. 4.0, 북한 핵위협과 한반도 안보』'''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안보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살피며 그 대안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북핵과 관련한 한반도 정세와 안보 문제는 한국내에서도 보수와 진보 진영간 입장의 차이가 매우 뚜렷하고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북한 핵개발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보수에 비해 진보는 북한 정권의 안정을 보장하고 온건한 대응을 통한 신뢰를 쌓은 이후 점진적인 핵포기로의 유인해 내야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저자는 이 가운데 후자에 가까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한 대북정책에는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으로 보이고 있다. 저자는 북한의 핵개발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되지만, 성공적인 대북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대전략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한국의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 문제가 다시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제한적 선제불사용 원칙을 도입하는 가운데 핵의 평화적 사용권을 포기 하지 않는 등 북한과 국제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정세와 관련해 가장 최신의 정보를 토대로 분석하고 있는 책이란 점에서 한반도 핵문제와 관련한 많은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북한 핵개발 원인과 미국의 전략』'''은 현재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노력의 면면 속에서 그 원인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의 전략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집착이 미국의 적대정책을 향한 정권안보 차원에서의 몸부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북한은 군사력 강화와 동시에 국내 정치적 목적이라는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핵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중요한 가운데 이를 위해 당사자인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입장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이른바 6자회담이란 바로 북한의 핵위협을 둘러싼 주변국 당사자들간의 입장을 조율할 대화의 창구인데, 이것이 과연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를 명확히 분석해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강조하였다. 결국 미국의 북한 핵개발에 대한 전략이 6자 회담을 통해 얼마나 관철되고 있는지가 관건이며, 그와 관련한 그간의 평가와 의의를 덧붙여 놓았다. 북한의 핵개발과 그 외교적 대응의 전반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핵확산 문제와 아시아 : 핵 억지론(抑止論)을 넘어서』'''는 일본의 저명한 정치학자들이 북한 핵개발과 관련한 다양한 입장과 의견을 담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북한의 핵개발과 핵확산의 분위기를 대하는 일본의 입장을 ‘혼네’와 ‘다테마에’로 분석하면서, 세계 유일의 피폭국으로 평화를 지향한다는 다테마에 속에 정세적 명분을 이용해 핵무장으로 나아가려는 혼네를 지닌 것이 일본이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포스트 냉전 시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초강대국들에 대한 대응의 방편으로 핵개발과 핵무장이 추진되는 경향에 주목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은 자칫 동북아시아를 넘어 아시아 전체에 그와 같은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음도 경고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핵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무엇보다 핵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넘어 인도와 파키스탄, 이란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서 핵개발과 관련한 상세한 배경과 실체들을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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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DMZ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김규현, 김재한 공저, 『비무장지대를 넘는 길: 라인강에서 출발하는 분단과 통일의 역사, 문화, 생태 기행』, 아마존의나비, 2015.&lt;br /&gt;
|참고문헌2=이태호 외 공저,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 공동경비구역 JSA와 DMZ』, 눈빛, 2013. &lt;br /&gt;
|참고문헌3=이해용, 『비무장지대(DMZ)를 찾아서: 정전50년, 휴전선 분단현장 보고서』, 눈빛, 2003. &lt;br /&gt;
}}&lt;br /&gt;
'''『비무장지대를 넘는 길: 라인강에서 출발하는 분단과 통일의 역사, 문화, 생태 기행』'''은 10년에 걸쳐 한반도와 독일의 분단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 공저자들이 분단과 통일에 대한 자신들의 감상과 생각들을 담아내고 현장의 생생한 모습과 의미들을 도출해 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같은 분단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독일과 한국의 현장들을 직접 소개하면서 한쪽은 분단을 극복해 옛 기억으로 남은 모습으로, 한쪽은 현재 진행형의 고통으로 설명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비무장지대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면서 만나는 주요한 포인트들을 독일의 유사한 사례와 나란히 비교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저자는 독일의 것이 개방의 성격이라면, 한국의 것은 폐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일종의 기행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책은 비무장지대의 모습을 눈과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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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과 비무장지대 : 공동경비구역 JSA와 DMZ』'''는 분단과 휴전의 상징과도 같은 비무장지대의 실상과 실체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내용의 책이다. 오랜 기간의 휴전이 가지고 온 나른함은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는 눈길을 어느덧 자라난 꽃과 풀, 그 속을 누비는 야생의 동물들에게 돌리게 하여 일정한 낭만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비무장지대와 판문점은 여전히 일촉즉발의 위기를 경계하는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다. 이에 저자는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냉엄한 현실과 의미를 하나씩 되짚어 보면서 그 속에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판문점의 유래에서 시작해서 현재 판문점의 현황들을 소개하고, 이어 그곳에서 벌어졌던 정전회담과 포로 송환에 대한 논의,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의 내용들을 정리하였다. 또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졌던 많은 사건들과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그 긴장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그곳이 더 이상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남북대화와 교류의 현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아울러 담고 있다. 비무장지대와 남북간 대립의 실체를 날것 그대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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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DMZ)를 찾아서: 정전50년, 휴전선 분단현장 보고서』'''는 한반도 분단과 대립의 상징으로 화석처럼 남아있는 비무장지대의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비무장지대는 남북한 군사력이 의도치 않게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선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 씩, 총 4km를 물러나 비워둔 공간이다. 때문에 이곳은 군사지역으로써 많은 지뢰와 전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가운데, 민간인의 출입과 개발이 금지되어 있어 야생의 상태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제한적이지만 그곳에는 정착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다시 과거 사람들의 삶의 흔적도 존재한다. 비무장지대에 산재한 많은 문화유산과 유적지들은 지뢰밭 더미 속에서 다시금 찾아올 우리들의 발길을 기다리며 지금도 그렇게 서 있다. 비무장지대의 아픔과, 생태, 각종 문화재들과 지역 주민들의 삶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책으로써 다양한 사진들을 수록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쉽고 친근하게 비무장지대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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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의 중요 사건]]&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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