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두두미(斗頭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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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4일 (토) 12: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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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두두촌(斗頭村*)

四月淸風返舊 (사월청풍반구)     4월의 맑은 바람 맞으며 옛집에 돌아오니, 
終頭至尾摠如 (종두지미총여) 머리(頭)부터 꼬리(尾)까지 모두가 한결같네.
倚窓坐讀江都賦 (의창좌독강도부) 창가에 기대 앉아 강도부를 읽다가,
呼覓楮毛更一 (호멱저모갱일)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다시 글을 쓰노라.

○ 내가 두두촌(斗頭村)에서 시작하여 강화부의 산천과 고적을 관람한 후에 다시 두두미(斗頭尾)로 돌아왔으므로 머리부터 꼬리까지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닥나무(楮)와 털(毛)은 곧 종이와 붓을 말한다.
○ 강화는 경기지역에 있으면서 동서로는 40리요 남북으로는 70리이고 둘레는 280리 107보이다.
○ 예전의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는데 고구려 때에 처음으로 군을 두었으니 혈구군(穴口郡)이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 신라 때에는 진을 두어서 혈구진(穴口鎭)이라고 하였다. 고려 때에는 예전의 이름을 이어서 현을 만들었다. 천도할 때 미쳐서는 강화를 심주(沁州)라고 하였는데 군을 두고서 강도(江都), 심도(沁都)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다. 이 이후로는 인천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며 또 부를 두어서 부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우리 태종조 때에 부를 도호부로 승격시켰고 광해군 때에는 부윤으로 승격시켰다. 인조 때에는 유수로 승격시켰고 숙종 때에는 진무영을 두었으며 정조 때에는 통어영을 옮겨서 소속시켰으니 모두 유수와 겸하였다. 그 뒤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하고 둔 것이 한결같지 않다.


○ 이민서(李敏叙)의 강도부(江都賦)는 다음과 같다.

三江之會     京口之     (삼강지회 경구지충)            "세 강이 모이는 곳이며, 한성 입구의 요충지라네.
跨下流之形 屹孤島之峙 (과하류지형승 흘고도지치중) 하류의 형승을 건너서, 외론 섬에 걸터앉았네.
聯二都而作 控三方而通 (련이도이작보 공삼방이통조) 두 도읍의 보필이고, 세 곳 당겨 만나네.
宜未雨之綢繆 備暮夜之惕 (의미우지주무 비모야지척호) 미리미리 준비해서, 밤의 통곡 없게 하네.
設重防而據要 有列聖之洪規 (설중방이거요 유렬성지홍규) 겹성 쌓아 웅거하니, 열성조의 교훈이라네.
余受命而來牧 撫天險而視師 (여수명이래목 무천험이시사) 명을 받은 이후에는, 요새 쌓고 군대 살피네.
愧才能之不副 歎籌劃之無奇 (괴재능지불부 탄주획지무기) 못난 재주 부끄럽고, 평이한 계획 탄식하네.
嗟往事之倉卒 痛百萬之魚肉 (차왕사지창졸 통백만지어육) 과거지사 한탄하며, 죽은 백성 통곡하네.
彼竪子之何誅 亦廟謨之不立 (피수자지하주 역묘모지불립) 저 오랑캐 벌할 것을, 조정에선 계획없네.
孰毖後之是圖 迷禍敗之所因 (숙비후지시도 미화패지소인) 후일을 경계하자니, 화란 원인 어지럽네.
欲憑依而負恃 又舍此而何適 (욕빙의이부시 우사차이하적) 특별히 의지하련만, 이것 버리고 어찌하리?
或賤舊而貴新 非制勝之善經 (혹천구이귀신 비제승지선경) 온고지신 하는 것이, 제승하는 계책이라네.
徒擾攘而不決 孰內斷於冥冥 (도요양이부결 숙내단어명명) 결정못해 흔들리니, 그 누가 결정하리?
擲奇寶於道傍 更遑遑而焉索 (척기보어도방 경황황이언색) 보배를 버렸으니, 어떻게 찾겠는가?
旣設備之無素 尙虛名而何益 (기설비지무소 상허명이하익) 대책안이 원칙없어, 어떻게 보완하리?
知吾謀之不用 恐不言之有責 (지오모지불용 공부언지유책) 내 계획 못쓰지만, 책임회피 두렵다네. ”

○ 이정섭(李廷爕)의 시는 다음과 같다.

山河表裏壯關 (산하표리장관방)     "산하는 안팎으로 관방이 견고한데, 
留守權爲列島 (유수권위렬도강) 유수부는 모든 섬의 중심이 된다네.
壤土平鋪開局勢 (양토평포개국세) 토양은 평평하고 탁트인 형세이고,
閭閻錯落接垣 (여염착락접원장) 백성이 사는 집은 담장이 접하였네.
良田䆉稏東南畝 (량전파아동남무) 여러 지역 경작지 엔 벼나락이 자라고,
沿海魚鹽大小 (연해어염대소상) 연해의 어염으로 상인이 모여드네.
寄語邦侯多種木 (기어방후다종목) 나라에서 여러 나무 심기를 바라니,
腐儒言拙意還 (부유언졸의환장) 못난 선비 말 못하지만 뜻만은 길다네.”

○ 신라 경덕왕 때에는 혈구(穴口)를 고쳐서 해구(海口)라고 하였다.
○ 원성왕 때에는 혈구진(穴口鎭)을 두었다.
○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병을 피하기를 의논하였는데 최우(崔瑀)가 왕을 도와 도읍을 옮겼다.
○ 20년(1233)에 외성(外城)을 쌓았다.
○ 21년(1234)에 여러 도의 병사들을 불러서 궁궐과 백사를 지었다.
○ 24년(1237)에는 승려들이 외성을 쌓았다.
○ 40년(1253)에는 갑곶강에서 수전(水戰)을 연습하였다.
○ 43년(1256)에는 몽고병이 갑곶의 강 바깥에 이르러서 깃발을 크게 벌렸다. 민전에 말을 방목하였고 통진산(通津山)에 올라서 강도를 바라고 왔다.
○ 45년(1258)에 몽고군대가 갑곶의 강 바깥에 이르렀다.
○ 46년(1259)에는 몽고의 사자 주라는 자가 내외성을 모두 헐었다.
○ 원종 11년(1270)에는 개경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가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렸다.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숨었다.
○ 몽고의 장수 타리대(朶利대)는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재물을 약탈하고 성 내의 인가를 불태웠다.
○ 충렬왕 16년(1290)에 거란병을 피하여 강화로 옮겼다.
○ 18년(1292)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 공민왕 9년(1360)에 왜인이 와서 노략질을 하니 300여 명이 죽었고 쌀 4만 석을 약탈해갔다.
○ 14년(1365)에 왜구가 와서 도둑질하였다. ○ 또 왜구가 왔다.
○ 16년(1367) 왜인이 와서 약탈하였다.
○ 신우 2년(1376)에 왜인이 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 3년(1377)에 왜가 다시 와서 노략질을 하여 크게 살육을 일삼았다.
○ 13년(1387)에 왜가 와서 노략질하였다.
○ 본조의 광해군 무오년(1618)에 북쪽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무찰사 심돈(沈惇)을 파견하여 외성을 쌓고 별당을 지었으며 또 체찰사 이경전(李慶全), 우의정 조정(趙挺), 호조참판 권반(權盼)이 배를 타고 바다를 순찰하여서 보장지라고 결정하였다.
○ 인조 5년 정묘년(1627)에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의 군대를 따라 들어가 노략질하였으니 평산(平山)에 이르러 상이 강도로 행차하였고 또 오랑캐와 화친을 맺었을 적에 환도하였다.
○ 14년 병자년(1636)에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삼고 이민구(李敏求)을 부사로 삼아 강도를 지키게 했고, 종 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숙의,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도 모두 들어왔다.
○ 상이 행차하여 숭례문에 이르렀는데 오랑캐가 서교(西郊)에 다 다라서 그 말을 옮겨서 행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였는데 김경징 등은 그 험준함을 믿고 대비를 느슨히 하였다.
정축년(1637) 정월에 오랑캐가 물러나자 작은 배를 만들고 갑곶을 건넜다. 김경징 등이 겁을 먹고 달아났고 유수 장신(張紳)도 배를 타고 도망갔다. 오랑캐가 부성(府城)에 들어오자 종묘와 사직이 몽진되었으며 사녀들이 많이 죽임을 당했다. 빈궁 이하는 남한산성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성의 아래에 이르렀다.


인물

  • 이민서(李敏叙)[1]
  • 이정섭(李廷爕)[2]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