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Underwood To Ellinwood (18890430)

DH 교육용 위키
윤미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21일 (일) 16:23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편지 목록으로 돌아가기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1889년 4월 30일)
식별자 L18890430UTOE
한글명칭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1889년 4월 30일)
영문명칭 Horace G. Underwood's Letter To Frank F. Ellinwood (April 30, 1889)
발신자 Underwood, Horace G.(원두우)
수신자 Ellinwood, Frank F.
작성연도 1889년
작성월일 4월 30일
작성공간 의주
자료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번역문출처 김인수,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Dr. Horace G. Underwood
,Euiju,Korea
언더우드
한국,의주
April 30, 1889 1889년 4월 30일
Dear Dr. Ellinwood, 엘린우드 박사님께,
We have heard that a government courier starts for Seoul tomorrow morning & I want to let you have a line from us. I suppose ere this you got my letter from Hur Jun (Chun) & have heard of the troubles that we had had then but all those were thrown in the shade by what occurred later 6t we feel that indeed the Lord has been good to us in sparing our lives.
정부의 우편행랑이 내일 아침 서울로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사님께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펜을 들었습니다. 이 편지에 앞서, 우리는 허천에서 박사님께 편지를 보내드렸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지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상황이 잘 정리되어 평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But I did not begin to tell you about this but about the work up here in Euiju I had heard much about what had been done but could not tell how it was till I got here. Here too I know that I would be in a better position for work as with China just across the river & a Chinese passport in my pocket I would be able to get beyond the limit of my promise & to both teach & Baptise.
무엇보다 먼저 박사님께 이곳 의주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지만 실제로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강만 건너면 닿는 중국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상황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수중에 중국 통행증만 있으면 저는 제가 약속했던 것에 제한 받지 않고 가르치고 세례 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During the past year the work has gone forward in a most glorious way, It is far ahead of all that I had ever thought. I have already met 27 converts whom I have examined with a view to Baptism & all but two of whom have sustained a good profession. They are all men, from all classes, from a former deputy magistrate of this city, who now holds the position of governor of a fort ten miles from here, down to the police & couriers of this place. The interest manifested & the earnestness shown is indeed marvelous & encouraging. They were here 300 miles from Seoul, a long, long way in Korea, books were scarce & they loaned them round, one book often doing for ten or fifteen people. Our Colporteur & head man here says that there were over a hundred who desired Baptism but that these were the most earnest & were showing their faith by their lives. I am to meet some women tonight & examine them. In Kang Ki the work was not as far forward as I had thought, in fact through the failure of the colporteur to meet me I was unable to see what had been done. The Medical work that we have been able to do has also been not small.
작년 한 해 동안 이곳의 사역은 놀랄 만큼 영광스럽게 성장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이미, 저는 신앙을 갖게 된 27명을 만났고 세례를 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문답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두 명을 제외하고는 신앙고백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의주시의 부윤 대리였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십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교역소의 소장직을 맡고 있는 사람부터 포졸과 일꾼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영적인 관심과 진지함은 무척 놀라울 정도며,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그들은 서울에서 무려 3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책이 드물어 이들은 쪽 복음서를 서로 돌려보고 있습니다. 쪽 복음서 한 권을 보통 10명이나 15명이 함께 읽습니다. 우리 권서 중 한 사람과 이곳의 한 유지(有志)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백 명도 더 되는데 이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다 무척 진지하고, 삶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밤 몇 명의 여성들을 만나 문답을 하려 합니다. 강계에서는 제가 예상했던 것만큼 사역이 많이 진행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권서와 제가 만나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We are now almost entirely out of medicine. People come 10 & 15 miles to get healed & we have now seen nearly 500 patients. All of these we have not been able to help but we have done all that we could. How the news spread so fast I do not know, but we would find people waiting for us to get medicine when we would reach a town. In not a few places we found a good deal of ill-feeling toward Foreigners which was dissipated to a large extent after a stay of a day or so.
우리가 그 동안 감당했던 의료 사역의 양(量) 또한 적잖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약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10~15마일을 걸어 와 우리에게서 치료받고자 합니다. 지금껏 500명 가까이 되는 환자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소식이 빨리 전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느 마을에 이를 때면 약을 받고 싶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적지 않은 곳에서 외국인에 대해 악감(惡感)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 우리가 머무른 후에는 그러한 좋지 않은 감정이 대부분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We expect to leave here on Thursday or Friday of the week & will have a good deal to do & be pretty well pushed to do so. A Gospel centre is needed here. It would cost but $100. or at the most $200.00 & after the Church is strong they would buy it back. What are we to do in such places. A boys school for Chinese & Urnmun or Korean would be a wonderful power if in the hands of one of the Christians. There are two free schools in connection with the Magistracy & another would be a power for good. It would cost only $50.00 a year to run such a school as living is cheap up here.
이번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우리는 이곳을 떠날 예정입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을 테고 그렇게 해 나가게 될 겁니다. 이곳에, 복음 전도사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100달러 정도 혹은 최대한으로 200달러 정도가 있어야 할 겁니다. 이곳 교회에 힘이 생기면 교인들이 그 건물을 완전히 매입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한문을 가르치고 언문 즉 한국어를 가르치는 남학교(男學校)를 그리스도인들이 세우고 운영한다면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의 관할 구역과 연관된 무료 학교 두 곳이 있습니다. 학교가 하나 더 있게 된다면 무척 바람직한 일이 될 겁니다. 이곳의 물가가 낮기 때문에 이러한 학교를 운영하는 데 1년에 50달 정도밖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The Women cannot be Baptised this time as they cannot cross the river. They must then wait. I had to stop for a women's meeting. There were 10 women present not one of whom could have been seen had not my wife been with me. We had prayer with them, I leading & then my wife told them the story of Christ. Many of them had heard a little before but it was but a little.
여자들은 강을 건너질 못하기 때문에 이번에 여자들은 세례를 받지 못합니다. 기다려야만 합니다. 저는 여성들의 모임에 참석해야 했었습니다. 열 명 정도 되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제 아내가 저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한 명도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 드렸고 제 아내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그들 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미 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저 조금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On our way up we will have a little work. At Anju the second largest city of this province where the Deputy-Governor of the province resides. I am told there is a good work going on. Not only are there 15 waiting to be Baptised (which I can not do at this time) but I am told that the Deputy-Governor himself & several of his suit are awaiting my return anxious for Baptism. At Pyang Yang the capital there is also work. I had hoped to have been able to go through Whang Hai Do but shall have to leave this as this season is so far gone.
올라오는 길에 안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좀 있습니다. 안주는 이 도(道)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 이 도의 부지사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사역이 잘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5명이 세례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세례를 줄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 부지사 자신을 비롯해 부지사 밑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서 세례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몇 명 있어서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도의 중심지인 평양에서도 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황해도를 지나가고 싶었습니다만,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On the trip thus far we have gone into many towns & cities heretofore unvisited by the Gospel & left tracts & dropped seeds. In a great many of the places my wife has been asked to call on the wives of the magistrate & has told them of Christ & left books. In some cases also telling the Magistrates themselves the story & giving them books, a thing heretofore never done.
여행을 하는 도중 우리는 지금껏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여러 마을과 도시에 들러 소책자를 나눠주었고,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여러 곳에서 제 아내는 그 지역 관리의 부인들에게서 “찾아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고 책을 선물했습니다. 관리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며 책을 주었던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In going through these wild districts we have not been without our difficulties. At one place a company of 30 men had banded together & armed with guns were going to surprise us at night & kill us & our followers. But the Lord allowed their leader to bring to nought his own plan. He got drunk & before the time fired his gun at our sleeping room & then went around bragging of what they were going to do. Some of our men heard & the soldier who was with me at once arrested the man. I took the gun & ordered the man to be kept carefully. We were 15 miles from a Magistrate. I gave the gun to the Magistrate the next day & left him to settle matters. I thought that then all was right but a few days later our party were attacked by a band of 15 or 20 men with clubs who seized & carried off three of our men (a colporteur, servant & horse leader) & carried them to the mountains saying that they were going to kill them. We were allowed to go on but had to leave all our baggage with them. It was then 2 P.M. We were 25 miles from a Magistracy & had high mountains to cross. We at once pushed on with all speed, not knowing who was friend & who foe of those whom we met. At about 9 we reached the town & I can tell you that the city wall & gate were a welcome sight. I at once called on the Magistrate who turned out to be a friend for whom I had done a favor in Seoul. He at once took up the case & sent a party of soldiers & policemen out. We waited 2 days not knowing whether we would see the Koreans alive again & not expecting to see our baggage but then they came poor fellows limping in & beaten brutally. Later came our baggage & later the police & soldiers with seven of the men.
그렇지만 이 거칠고 황량한 곳들을 지나는 동안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전에는 총으로 무장한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밤중에 우리를 급습해서 우리와 우리의 수행원들을 죽이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리의 두목이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서는 계획된 시간이 되기도 전에 우리 침실 쪽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자기들이 하려던 일을 자랑삼아 떠들어대며 다녔습니다. 우리 측 사람들 중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있던 군병은 즉시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권총을 빼앗았고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가두어 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곳 관리가 있는 곳에서 1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 그 권총을 그 관리에게 주었고 그가 이 사건을 처리하도록 맡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며칠 후에 우리 일행은 15명 내지 20명가량 되는 무리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몽둥이를 들고 와서는 우리 일행 중 세 사람을 붙잡고서는 납치해 갔습니다(그 세 사람은 권서와 하인과 마부였습니다.). “이 세 놈들을 죽여 버릴 거라”고 하면서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우리에게는 ‘가도 좋다’고 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짐은 모두 놓고 가라고 했습니다.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관할 구역에서 25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고, 높은 산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으로 속도를 내어갔습니다.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우리가 만났던 적인지 알아 볼 경황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9시쯤 되어 우리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마을의 성벽과 성문을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관리에게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일전에 서울에서 제게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던 지인(知人)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이 사건을 맡겠다고 했고, 여러 명의 군졸과 포졸을 보내었습니다. 그 한국 사람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짐을 되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이틀을 기다렸습니다. 그 후 그 불쌍한 사람들은 심하게 매를 맞아 절뚝거리는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짐도 되찾았고 군병과 순사들은 무리 중 7명을 체포했습니다.
Thus the Lord took care of us. When I saw the yard full of those armed ruffians I did not know what would come. With my own hands I withstood them for a while but what could I do. Had we known the attack would be made we would have been ready. But all is safe now & with God's help we hope to reach Seoul in safety. But I must close, Hastily.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돌보셨습니다. 뜰 안이 그 무장한 강도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 뻔 했나’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그들에게 저항하기도 했지만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우리에게 기습하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에 대해 대비했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서울에 무사히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두서없이 급한 마음으로 적어 보내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H. G. Underwood 언더우드 올림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