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淸橋 記文 原文
○ 顯宗甲辰 留守趙復陽 築堰築水門, 其後 留守李溵 重修水門 有記曰:
“花島水門, 在沁府之南二十里許, 廣城堡之北. 門名以花島者, 以其在花島墩之下也. 門之外有鼇頭洋, 門之內有大淸浦. 一島中衆(계곡??)水 莫不(??)此浦而會此洋浦之左右 又有數百結民田 卽所謂ʻ滿月坪ʼ而仙·仁·佛三面居民所賴者也. 二去甲辰趙公復陽居留時, 沿築大堤橫(桓??)數十里外, 以備颶風出沒之憂, 以防潮水之浸冐旁田者, 卽'浦之口',而置三水門以泄內水, 卽所謂ʻ花島水門ʼ也. 門之設豈亶然哉! 水門不謹則 內水之 넘칠 뿐만 아니라 바다의 조수가 침범하게 되어 큰 제방이 무너지면 바다를 지키는 일이 허망 해지고 국가의 유사시를 대비하는 일도 말할 수가 없으며 또한 3면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명도 매우 위태롭게 되므로 국가를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수문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최초로 설치할 때에는 바위를 깎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돌로 덮어서 너비가 십여 보,높이가 한 장쯤 되었다. 그 공력이 매우 컸으며 그 규모와 제도 또한 장엄하였다. 그러나 안으로는 포구이고 밖으로는 조수가 있어서 서로 충돌하여 그 위치가 매우 험하며,문의 곁으로는 또 흙이 있어서 흙에 물이 스며들어 틈이 생겼다. 이 때문에 1백년 전에 처음으로 수리했을 때에는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북쪽의 한 문에서 물길이 무너졌고 여름 장마에 막혀 성안으로 범람해서 경작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오래도록 폐기될까 우려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수리를 요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유수로 부임한 처음에 그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공력이 클 뿐만 아니라 썰물 후에야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수가 하루에도 여섯 번 드나드는데 공사 시각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그럭저럭 세월만 가고 오래도록 복구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방이 중요하고 백성들의 생업이 걸려있는 만큼 이대로 둘 수 없어서 재물을 모아 성 수축 시기에 맞추어 한꺼번에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붕괴 위험은 북문 옆의 흙에 물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전에 쌓았던 것을 모조리 걷어내고 물길을 터놓고서 돌을 많이 가져다가 옛것과 새것을 섞어 좌우의 무사석(武砂石)과 훤선(楦墠) 등은 두꺼운 장방형의 돌받침으로 길게 엇갈려 쌓고 위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 홍예(虹霓)를 만들어 흙이 무너지는 병폐를 방지하고 너비를 약간 넓게 해서 물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자 일몰 후에도 물이 넘쳐 붕괴되는 근심을 면하게 하였다. 공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와서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한 자들 중에서는 단지 하루만 일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백성들을 위한 정사가 매우 절실 하고 급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병술년(1766,영조 4) 4월 13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6월 10일에 공사를 마쳤다. 공사가 끝나갈 즈음 감독·장교·공장 등을 모아 공사 장소에서 회식을 시켜주었다. 아! 조공이 처음 공사할 때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3개의 수문과 동시에 시행하였으니 그 비용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수문에 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재력이 부족해서이다. 내가 쌓은 것은 옛 제방 중에서 무너진 곳을 보수했으므로 수리한 곳은 한 개의 수문뿐이다. 공력이 매우 적게 들었고 이미 망가진 곳을 보아서 돌홍예를 설치하으며 남쪽의 두 문은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돌을 덮는 제도를 따랐다. 후에 개수할 대에도 이 제도에 따라 3문을 모두 돌로된 홍예문을 완성한다면 해안 방어와 백성들의 생업은 영원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공사 완료 뿐만 아니라 장차 후인에게도 알리고 싶어서이다.”
번역
○ 현종 갑진년(1664)에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제방 등 수문을 쌓았다. 그 후에 유수 이은(李溵)이 수문을 수리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화도수문은 심부(沁府) 남쪽 20리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광성보의 북쪽에 있다. 수문의 이름이 화도(花島)인 것은 화도돈대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문의 외부에는 오두양(鼇頭洋)이 있으며 수문(바다??)안쪽으로는 대청포(大淸浦)가 있다. 이 섬의 여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바다와 포구의 좌우로 모이고 또 수백 결의 민전이 있어서 ʻ만월평(滿月坪)ʼ이라고 하는데 선원면·인정면· 불은면 3면의 백성들이 이곳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
1백년 전 갑진년(1664,현종 5)에 조복양(趙復陽)이 유수로 재직할 때에 연변에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쌓아서 태풍에 대비하고 조수가 전지(田地)에 침범하는 것을 막았으므로 ʻ포구ʼ라고 하였으며,3개의 수문을 설치해서 안쪽의 물을 밖으로 빼냈으므로 ʻ화도 수문ʼ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을 설치한 것이 어찌 절실하다 하지 않겠는가? 수문을 삼가지 않으면 내지의 물이 넘칠 뿐만 아니라 바다의 조수가 침범하게 되어 큰 제방이 무너지면 바다를 지키는 일이 허망해지고 국가의 유사시를 대비하는 일도 말할 수가 없으며 또한 3면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명도 매우 위태롭게 되므로 국가를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수문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최초로 설치할 때에는 바위를 깎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돌로 덮어서 너비가 십여 보,높이가 한 장쯤 되었다. 그 공력이 매우 컸으며 그 규모와 제도 또한 장엄하였다. 그러나 안으로는 포구이고 밖으로는 조수가 있어서 서로 충돌하여 그 위치가 매우 험하며,문의 곁으로는 또 흙이 있어서 흙에 물이 스며들어 틈이 생겼다. 이 때문에 1백년 전에 처음으로 수리했을 때에는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북쪽의 한 문에서 물길이 무너졌고 여름 장마에 막혀 성안으로 범람해서 경작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오래도록 폐기될까 우려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수리를 요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유수로 부임한 처음에 그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공력이 클 뿐만 아니라 썰물 후에야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수가 하루에도 여섯 번 드나드는데 공사 시각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그럭저럭 세월만 가고 오래도록 복구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방이 중요하고 백성들의 생업이 걸려있는 만큼 이대로 둘 수 없어서 재물을 모아 성 수축 시기에 맞추어 한꺼번에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붕괴 위험은 북문 옆의 흙에 물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전에 쌓았던 것을 모조리 걷어내고 물길을 터놓고서 돌을 많이 가져다가 옛것과 새것을 섞어 좌우의 무사석(武砂石)과 훤선(楦墠) 등은 두꺼운 장방형의 돌받침으로 길게 엇갈려 쌓고 위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 홍예(虹霓)를 만들어 흙이 무너지는 병폐를 방지하고 너비를 약간 넓게 해서 물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자 일몰 후에도 물이 넘쳐 붕괴되는 근심을 면하게 하였다. 공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와서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한 자들 중에서는 단지 하루만 일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백성들을 위한 정사가 매우 절실 하고 급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병술년(1766,영조 4) 4월 13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6월 10일에 공사를 마쳤다. 공사가 끝나갈 즈음 감독·장교·공장 등을 모아 공사 장소에서 회식을 시켜주었다. 아! 조공이 처음 공사할 때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3개의 수문과 동시에 시행하였으니 그 비용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수문에 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재력이 부족해서이다. 내가 쌓은 것은 옛 제방 중에서 무너진 곳을 보수했으므로 수리한 곳은 한 개의 수문뿐이다. 공력이 매우 적게 들었고 이미 망가진 곳을 보아서 돌홍예를 설치하으며 남쪽의 두 문은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돌을 덮는 제도를 따랐다. 후에 개수할 대에도 이 제도에 따라 3문을 모두 돌로된 홍예문을 완성한다면 해안 방어와 백성들의 생업은 영원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공사 완료 뿐만 아니라 장차 후인에게도 알리고 싶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