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Go-mun
정조대왕 관련 문헌
목차
1 전령
개략
1793년(정조 17) 1월, 정조가 수원부(水原府) 유수(留守)로 재직 중인 채제공에게 장용영외사(壯勇營外使)를 겸직하도록 임명한 전령이다. 같은 해 1월, 정조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키면서 서울에 있는 본영인 내영(內營) 외에 화성에 장용외영(壯勇外營)을 신설하였다. ‘장용지보(壯勇之寶)’가 날인되어 있으며, 왼쪽 상단에는 정조의 수결이 있다.
원문
傳令. 水原府留守蔡濟恭.
拜壯勇外
使, 卿其察
任者.
癸丑 正月 日 [인장: 施命之寶]
[御花押]
번역
전령(傳令).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 채제공(蔡濟恭)에게
장용외사(壯勇外使)에 배수하니, 경(卿)은 그 직무를 살펴라. 계축년(1793, 정조17) 1월 일
2 고풍
개략
어사고풍첩 : 金爔(1749~1811)가 정조로부터 1795년(정조19)부터 1797년(정조21)동안 받은 고풍 77건을 수록한 첩이다. 1796년 1월 22일 고풍은 정조가 수원에 행차하여 득중정에서 유엽전 5을 쏘아 변에 2발을 맞추고, 동장대에서는 유엽전 5발을 쏘아 3발을 적중하고, 掌革에 5발을 쏘아 2발을 맞추었다는 내용이다. 이에 장용영 소속 김희가 정조의 득점 내용을 기록하여 하사품을 청하였다.
원문
古風 蓮府 金爔
華城得中亭
御射柳葉箭一巡 邊二中
東將臺
御射柳葉箭一巡邊三中
掌革一巡邊二中
[정조 어압] 丙辰正月二十二日
古風 蓮府 金爔 始興縣中紅亭
御射柳葉箭三巡十一矢十五分
第一巡四中五分 第二巡四中 第三巡三中六分
[정조 어압] 丙辰正月二十四日
3 어찰
개략
정조 20년인 1796년 9월 10일에 수원 화성의 축조를 2년 10개월에 걸려 완성하였다.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정조는 그 완성을 기뻐하면서 일을 담당한 趙心泰와 李儒敬을 불러 그 마무리 상황을 물었다. 또 성역과 관련한 賞典을 시행하게 하고, 이를 승정원의 『일기』와 내각의 『일성록』에 베껴 놓도록 하였다. 화성의 각 건물 명칭에 대해서는 전년도인 1795년 2월에 李家煥에게 시켜 각 門號를 짓게 하고, 신풍루와 장안문 등의 여러 편액을 曺允亨에게 쓰도록 했다. 또 건물마다 상량문을 짓게 하였는데, 華虹門은 尹塾(1734∼1797)에게 짓게 했다.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는 윤숙이 11월에 교서를 받들어 지었다고 한다. 어찰에 기록된 ‘이번 달 20일 전후~’라는 대목을 봤을 때, 이 어찰의 작성일은 1796년 11월 초순쯤으로 보인다. 당시에 윤숙은 1790년 황해 병사로 있을 때 눈병을 얻어 실명을 하였고, 이후에 여러 관직들을 모두 고사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해 1797년 3월 26일 卒逝하였다. 이 어찰은 정조가 병으로 집에 있는 윤숙에게 각 건물의 명칭에 대한 유래를 자세하게 전하면서, 상량문 작성에 도움을 주고자 한 의도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어찰은 정조가 가진 화성에 대한 지대한 애착심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일 것이다.
원문
御札 判府事 尹塾
華虹門上樑文. 卽北城水門上樓, 樓下有虹霓門, 古有華渚虹流之語, 而此門是華城虹霓水門. 南瞻花山, 松柏密邇, 北臨華亭,(卽迎華亭在長安門外) 禾稼穰穰. 門傍有亭, 曰訪花隨柳,(取花山柳川地名) 亦譙樓. 仰異於他人, 且文藻合居詞垣, 雖休暇在家, 是地是作, 不可無仰善頌之語. 儀軌印役, 今年內, 欲爲告成, 趂今念前後製進, 凡例問於內閣.
번역
화홍문 상량문에 대해. 곧 북쪽 성의 수문 위의 누각이고, 누각 아래에는 홍예문이 있으니, 옛날에 ‘화저홍류’라는 말이 있지만, 이 문은 ‘화성홍예’인 수문이다. 남쪽으로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니 송백이 빽빽하고, 북쪽으로 영화정에 임하여(곧 영화정은 장안문 밖에 있다.) 들판의 곡식이 풍성하다. 문의 곁에 정자가 있으니, ‘방화수류’라고 하는데,(화산과 유천의 지명을 취했다.) 또한 성 위에 세운 누각이다. 다른 사람보다 높고 뛰어나며 또 문장력이 응당 한림원에 위치하여 비록 휴가를 받아 집에 있지만, 이곳의 이 건물에 대해 좋은 송축의 말이 없을 수 없다. 의궤의 인출을 올해 내에 완성을 하고자 하니, 이번 달 20일 전후에 맞추어 지어 올리되, 범례는 內閣에 문의하라.
4 금석문
개략
박명원(朴明源(1725, (영조 1)∼1790(정조 14))은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晩葆亭). 할아버지는 참봉 박필하(朴弼夏)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택상(李宅相)의 따님이다. 1738년(영조 14) 영조의 셋째 따님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에 봉하여졌으며 영조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정조는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올리고 또 그 무덤의 천장의 시도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노론에서 의구심을 가질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정조 13년(1789) 7월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면서 이 문제를 거론한 인물이 바로 자신의 고모부인 금성위 박명원이었다. 정조가 찬한 이 신도비는 서두에 이런 내력을 설파하면서 그 감사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
御製綏綠大夫錦城尉贈諡忠僖朴公神道碑銘(篆額) 有明朝鮮國綏綠大夫錦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忠僖朴公神道碑銘幷序
維予踐阼。▩有四年秋。錦城尉朴公明源上䟽言。地理之說。始於漢晉。盛於唐宋。其說苟虛僞也。豈能使人崇信如此哉。程子雖不信地理。然有彼安此安之訓。朱子則實深究其說。而其葬親之地。旣以法求之。又論山陵得失曰。以子孫而葬其祖考。必致其謹重誠敬之心。以爲安固久遠之圖。使形體全而神靈安。則子孫盛而祭祀不絶。此自然之理。夫豈無稽而程朱言之。伏惟園所事體顧何如也。今日臣子所以思萬世之大計者。心無不用其極。義固不敢自隱。則臣雖素昧堪輿。只以人人之易知易見者論之。莎草枯損。一也。靑龍穿鑿。二也。後托水勢之衝激。三也。後節築石之非天作。四也。卽此數端。其風氣之不順。土性之不全。地勢之汙下。盖可推知。而至若蛇虺之跡。交於局內。尤所驚心而痛骨者也。且臣嘗聞術士之言。形局非不拱抱。案對非不分明。而論以砂水之法。則大爲地家之所忌云。使其言。萬有一依俙彷彿者。於聖躬何。於宗國何。念我聖上。自甲午拜▩園之初。至丙申御極之後。憧憧一念。唯在於▩園所安否。晨鐘夜燭。丙枕靡安。而側聽多年。未見有一介臣爲殿下對揚者。臣竊慨然。昔在▩英廟辛亥。大臣諸臣。以戊申以後顒若之情。前席建議。移奉▩長寢。國祚之靈長。可卜於萬。噫。▩列聖血脈之傳。惟聖躬。三百年▩宗社之託。亦惟聖躬。▩園所安。然後聖躬安。聖躬安。然後本支百世可占古人。所謂宗廟饗之。子孫保之。不其在玆歟。予召大臣卿宰三司之臣。博詢而決疑。乃命公相地于水原邑治。而▩遷奉之禮以成。先是。有建言于斯地者曰。千載一遇。千里難逢。夫以一遇難逢之地。而爲我家萬億年无疆之基者。微公之功之誠。孰能辦此。予所云昨秋以後。視之以恩人勳舊者。此之謂也。公字晦甫。潘南人。以斯盧王。爲鼻祖。後世有文正公尙衷。以直節顯于麗。入我朝。左議政平度公訔。錦溪君忠翼公東亮。以勳業聞。錦陽尉文貞公瀰。以文章聞。遂爲我東甲族。曾祖曰泰斗郡守。祖曰弼夏叅奉。考曰師正叅判。妣咸平李氏。宅相之女。公以▩英宗乙巳十月二十一日生。年十四。尙和平貴主。封錦城尉。八轉階至綏祿。間除五衛都摠府都摠管。兼綰太常,典醫,繕工,司宰,長興,濟用提調。奉使之燕者三。屢以寶冊書寫勞承錫馬恩。公性度簡潔。風儀峻整。持身較若畫一。發言恒戒傷煩。雖處綺紈之中。而密若靜女。淡若寒士。其或出而當事務。心力內到。精華外溢。往往人莫能及。至其孤忠大節。凜凜有烈士風。不憚艱險。期以盡瘁。而貴主之內助。又能匹美共貞。扶危持顚。觀乎戊辰前後公之內外所樹立。卓然有不容泯者。若公者詎不謂邦之藎臣歟。其事父母也。存而愛沒而慕。皆有孺子心。經營遷厝十餘年。足遍畿湖。未嘗自恤其勞苦。苟以風水名者。雖緇髡之賤。無不厚幣以將之焉。其處兄弟也。友愛甚摯。仲兄之逝。過哀傷肺。幾聾兩耳。寡姊窮獨無依。爲賃屋立嗣。廩周之不少懈。以至追遠奉先。皆爲久遠圖。自出貲, 倡諸宗, 買祭田。以享祧主焉。其居家也。上念▩聖祖之鍾愛貴主。俾不欲歸處私第。故尙主且一紀。歸第僅八日。及沒宮樣一遵貴主成規。至今不改。丙申以前。退食自公。則必徑造貴主祠。告以承安。初貴主之適公也。棃峴有大君舊第。命以爲公第。則公上章力辭。卒易他第。或有田民之特賚者。公必懇請反汗。強命之則藏牒于家而不敢受。所賜器玩。有宮中舊物。則必委曲還獻。而不自留。性喜林泉。嘗縛小屋於郊墅。蒔花種竹。負杖逍遙。淸瞳皓髮。翛然若世外人。頻飮酒。亦不多酌。從容沾醉吟哦以終老焉。其在朝也。出入禁闥。竊識有常。由少至老。不失尺寸。凡有晉對。不與諸儀賓俱。則逡巡不敢當命。每與人語。有及朝廷事。則必顧左右而不應。公子相喆。妙年登巍科。公牢閉戶。不接朝士。蹙蹙有憂色。從子宗德。秉銓數十年。不惟公之不與聞政注。人亦不敢以此浼公。當是時。朝論四歧。滄桑百變。權貴世祿之家。後多自底罪戾。而公獨保令名而庇門戶。其謹約素規。寔有賴焉。▩英廟於諸儀賓。嘗眷公偏隆。始終恩禮。冠絶宮掖。我▩先君亦愛重公最甚。一有艱虞。輒就公諮諏。公與貴主。感激奮勵。所以彌綸而翊輔之者。盖有外廷之所不知。國史之所不載。惟予生晩。豈能盡知之。知之亦何忍言。卽夫瓊韻之寄贈。聯帖之批圈。公之密勿契遇。今猶可想像。若宣禧宮號之上章請改。特其一事。嗚呼欷矣。及予之在宥。公又追▩先朝之未報。知無不言。役無憚勞。可書者不一二數。其赴燕也。淫霖水溢。臨河路阻。從者皆挽公少留。公不聽曰。使程有期。將使我委命草莽耶。趣駕渡河。而水亦不能害。至熱河。禮部強要公頂拜番僧。公凝立不動曰。人臣無外交。吾肯屈膝於彼耶。雖嘖言交沓。而終不撓。其敦匠也。予引永安東陽諸尉故事。特命之。盖國制儀賓。不常監務故也。丙午之變。由喪及葬。相地蕫工。一畀公裁之。則公雖病暍濱危。而不敢遑息。衝暑奔走。卒事無愆。此皆公鞠躬之實蹟。而公有大節在。則餘事可略論也。公有小眞二本。▩英廟嘗御書贊以侈之。平生好讀書。工筆札。尤長於詩。所著有晩葆亭詩集,燕行錄,熱河日記若干卷。其號晩葆。卽予之臨公第。扁公楣者也。晩年欲乞暇長往。予重其去。未之許。竟以庚戌三月二十五日卒。壽六十六。臨沒歎曰。國恩未酬。死不瞑矣。我死其勿受禮葬。無一言及私。賢矣哉。予不欲拂公遺志。只命弔祭賵賻。視常典有加。詞臣撰狀。太常議諡。五月十六日。合窆于貴主墓。貴主▩英廟第三女。暎嬪李氏出也。▩英廟亟稱其孝友。予於侑爵之文。亦稱隻手擎天。斯可以徵其哲範矣。公取兄子相喆爲子。文科府尹。側室子宗善,宗顯,宗謇,宗璉。女張僎,徐瑾修,李建永。相喆系子紭壽叅奉。紭壽子齊一。女李羲先,洪正圭。嗟乎。公之言行事功。應銘法銘之。孰如予知者。予於公。其尙愛不腆之辭乎。乃序而銘之。其銘曰。 朴貫錦城。世襲璜聲。勳鑱金鏞。直媲玉衡。流芬未艾。高文典冊。公繩前武。跡聯禁掖。▩先王曰嘉。名門肖眷。香風紫鞚。彼誰顧眄。公惟恂恂。密若窈窕。明內柔外。恭大慈小。知雄守雌。我則有受。敢不鞠躬。▩兩朝恩厚。始終大節。一髮千勻。喬山之巓。佳氣氤氳。孰居厥功。俾熾而昌。公歸何憾。死哀生榮。勞汝未酬。予責多負。猶有牲石。屹彼螭首。深刻銘章。矢無溢辭。豈弟君子。曷日忘之。
崇禎紀元後三庚戌月日立 篆集李陽氷字 書集顏眞卿字
번역
어제 수록대부금성위증시충희박공신도비명(전액) 유명조선국 수록대부금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희박공신도비명 병서
내가 즉위한 지 14년째 되던 해 가을에 금성위(錦城尉) 박공 명원(朴公明源)이 상소하기를, “지리(地理) 학설이 한(漢)ㆍ진(晉)에서 시작되어 당(唐)ㆍ송(宋)에 와서 유행했는데, 그 학설이 과연 거짓이라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토록 신봉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자(程子)도 지리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쪽이 편안해야 이쪽도 편안할 것이라고 했고, 주자(朱子)는 사실 그 학설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자기 어버이의 장지(葬地)를 법에 맞추어 구했을 뿐만 아니라 산릉(山陵)의 득실에 대해 논평하기를,
‘자손으로서 자기 조고(祖考)를 장례 모실 때는 반드시 경근한 마음으로 안전하고 오래갈 수 있게 하여 체백과 영령이 편안하도록 해야지만 자손도 번성하고 제사도 끊기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섭리이다.’ 했는데, 그 학설이 황당무계한 것이라면
정(程)ㆍ주(朱)가 왜 그리 말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원소(園所)는 그 얼마나 중한 곳입니까. 오늘의 신하들로서는 앞으로 만년대계를 생각해서 마음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써야 하고, 또 의리상으로도 스스로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신이 비록 감여(堪輿)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고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들어 논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잔디가 말라 죽는 것, 두 번째로 청룡(靑龍)이 뚫린 것, 세 번째로 뒤에서 미는 수세(水勢)가 충격을 주고 있는 것, 네 번째로 뒤에 석축을 한 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것 등인데, 이상 몇 가지만으로도 그곳 풍기(風氣)가 불순하고, 토질이 좋지 않고, 지세(地勢)가 너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국내(局內)에 구렁이 흔적이 여기저기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랍고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신이 술사(術士)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곳의 형국(形局)이 잘 짜여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안대(案對)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수(砂水)의 법으로 따질 때는 지가(地家)가 크게 꺼려 하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이 만의 하나라도
그럴싸한 점이 있다면 성궁(聖躬)이 어떻게 되고,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1774, 영조50)에 처음으로 원소를 배알하신 후로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즉위 후까지 생각이 전부 원소의 안부(安否)에 있어 밤이나 낮이나 잠자리 한 번
편히 못 드신 줄 아는 데, 몇 해를 두고 지켜봐도 어느 신하 하나 전하를 위해 그 일을 추진한 이가 없어서 신으로서는 적이 슬펐습니다. 옛날 영조 신해년(1731, 영조7)에 대신 이하 제신이 무신년 이후 서로 간격 없는 정분을 내세워 전석(前席)에서 장침(長寢)을 옮겨 모실 것을 건의했기에 국조(國祚)가 만년을 가리라고 기대했던 것 아닙니까. 열성(列聖)의 피가 전해지는 것도 오직 성궁에 달렸고, 300년 종묘사직의 의탁도 오직 성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원소가 좋아야 성궁이 편안하고, 성궁이 편안해야 본지(本支)가
백대를 갈 것입니다. 옛 분들이 이른바 종묘에 제사 올리고, 자손을 보존한다고 한 그 말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대신(大臣)과 경재(卿宰),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모아 의문을 떨친 다음 공(公)으로 하여금 수원읍 부근에다 자리를 보아 잡게 하고 그리로 옮겨 모신 것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곳을 두고 말했던 자가 그전에도
있었는데, 그도 역시 천재일우의 기회이고, 천 리를 가도 만나기 어려운 자리라고 했었다.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자리에다 우리 가문 억만년 끝이 없을 기반을 잡은 것은 그 공의 정성과 공로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내가 그래서, 작년 가을 이후로 그를 은인(恩人)이요 훈구(勳舊)로 여긴다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공의 자(字)는 회보(晦甫)이고, 반남인(潘南人)이며 사로왕(斯盧王)이 그의 시조이다. 그 후대에 와서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고려조에서 곧은 절의로 이름났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좌의정 평도공(平度公) 은(訔), 금계군(錦溪君) 충익공(忠翼公)
동량(東亮)이 훈업(勳業)으로 이름을 내고, 금양위(錦陽尉) 문정공(文貞公) 미(瀰)는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드디어 우리나라 갑족(甲族)이 된 것이다. 공의 증조는 태두(泰斗)로 군수였고, 조부는 필하(弼夏)로 참봉이고, 아버지는 사정(師正)으로 참판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택상(宅相)의 딸이다. 공이 영종 을사년(1725, 영조1) 10월 21일에 태어나 나이 14세 때 화평귀주(和平貴主)를 아내로 맞으면서 금성위에 봉해지고, 여덟 번 전직 끝에 위계가 수록(綏祿)에 이르렀다. 더러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제수된 일도 있고, 태상(太常), 전의(典醫), 선공(繕工), 사재(司宰), 장흥(長興), 제용(濟用) 등의 제조(提調)를 겸임하기도 했으며, 사신으로 연경(燕京)을 세 차례나 갔다 오기도 하고, 여러 차례 보책(寶冊)을 쓴 공로로 말을 하사받기도 했다.
공은 성품이 간결하고, 풍채가 헌칠했으며, 몸가짐이 변함이 없고, 말은 항상 적었다. 비록 부귀영화 속에서 살았으나 조용하기가 정녀(靜女)와 같고, 담박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그러나 혹 나가서 사무를 맡게 되면 안으로는 마음을 다하고 정기가 밖으로
넘쳐흘러 더러는 남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고, 거기에 충성과 절의라면 아주 늠름한 열사풍(烈士風)이 있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였다. 화평귀주의 내조의 공로 또한 공과 필적할 만하여 여러모로 공을 도왔다. 무진년을 전후하여 공의 내외가 했던 일을 보면 우뚝하여 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공 같은 이야말로 어찌 나라의 신신(藎臣)이 아니겠는가.
공은 부모에 대하여 살아 있을 때 사랑하고 죽은 뒤에 사모하기를 다 어린애 적 심정으로 했으며, 심지어 묘소를 이장하기 위하여 10여 년을 두고 기호(畿湖)를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풍수(風水)로 이름난 자만 있으면 비록 미천한 중이라 하더라도
후한 예폐를 주어 맞이했다. 형제 사이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중형(仲兄)이 서거하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폐(肺)가 상하고 두 귀가 거의 어두워졌으며, 홀로된 누님이 의지할 곳이 없자 살 집을 임대해 주고, 후사를 정해 주고, 먹을 것을 대 주는 등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도 먼 장래를 생각하여 자기가 먼저 출자하고, 이어 일가들을 설득해서 제전(祭田)을 사서 사당에 제사 지냈다.
공의 가정생활은 상께서 성조(聖祖)가 귀주(貴主)를 너무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여 귀주가 사제(私第)에 가 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에 부마도 사제에 가 있는 날은 일 년에 겨우 여드레밖에 안 되었다. 귀주가 죽은 후에도 집의 모양을 귀주가 있을 때와
똑같은 법식을 따라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으며, 병신년(1736, 영조12) 이전에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지레 귀주의 사(祠)로 가서 안부를 여쭈었다. 처음 귀주가 공에게로 시집갈 때 대군(大君)의 옛집이 이현(梨峴)에 있었는데, 그 집을 공에게 주자 공은 글월을 올려 완강히 사양하였으므로 끝내는 다른 집으로 바꾸어서 주었고, 혹시 특례로 민전(民田)을 주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명령을 철회하도록 간청하였고, 만약 억지로 주면 첩안[牒]만 집에다 간직하고 감히 실물은 받지 않았으며, 그릇이나 노리갯감 중에도 궁중에서 쓰던 오래된 물건이면 반드시 간곡하게 청하여 꼭 돌려보내고 자기 집에다 두지 않았다.
천성이 산과 물을 좋아하여 들 밖에다 작은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 등을 심어 두고는 지팡이 짚고 거니는 것을 보면 맑은 눈동자에 하얀 머리가 마치 세상 밖의 사람처럼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고,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었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고 거나할
정도면 시나 읊조리며 그렇게 늙어갔던 것이다.
또 조정에서는 금달(禁闥)을 출입할 때면 일정한 법도가 있어 젊어서부터 늘그막까지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지켰으며, 진대(晉對)가 있을 때는 다른 여러 의빈(儀賓)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물러나고 감히 혼자 대하지를 못했다. 그리고 누구와 말하다가도
혹시 말이 조정 일에 미치면 응답을 않고 좌우만 돌아보고 있었다. 공의 아들 상철(相喆)이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자 공은 문을 굳게 닫고 들어앉아 조사(朝士)들을 일체 상대하지 않고 얼굴에는 걱정하는 빛이 있었으며, 조카인 종덕(宗德)이 전주(銓注)를 몇십 년간 맡고 있었으나 공 자신이 일체 거기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감히 이 일을 가지고 공을 매도하지 못했다. 그때 조정의 공론이 사색으로 나뉘어 숫한 변고를 겪었기 때문에 권세를 부리던 집들 중에 뒤에 죄에 걸린 자들이 많았지만 공만은 영명(令名)을 그대로 지키고 가문도 그대로 보존했는데, 그것은 공이 평소 근약(謹約)했던 힘이 컸던 것이다.
영조께서 여러 의빈(儀賓)들 중에서 특히 공을 사랑하여 다른 궁액(宮掖)들과는 판이하게 은례(恩禮)로 시종일관하셨다. 우리 선군(先君)께서도 공을 가장 애중히 여겨 어려운 일만 있으면 곧 공에게 가 자문했으므로 공이나 귀주나 거기에 너무 감격하여 조정
밖에서는 감히 알지도 못하고 국사(國史)에도 기록이 안 된 결점을 보완하고 정성껏 도운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늦게 태어난 내가 어찌 그 속을 다 알 것이며, 또 안다고 한들 어찌 차마 그 말을 할 것인가. 다만 시를 써서 서로 주고받고, 시첩을 두고 서로 논평하고 하던, 공과 그렇게 간격 없이 다정하게 지내시던 일은 지금도 오히려 상상이 된다. 선희궁(宣禧宮) 궁호를 고치도록 글월을 올려 청했던 것 같은 일이 그 한 예이다.
아, 슬프다. 내가 대리청정을 할 때도 공은 선왕께 다 갚지 못한 은혜를 생각하여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무슨 일이라도 힘이 든다 하여 꺼려하지 않는 등 공의 행적을 쓰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경을 갈 때만 해도 계속된 장마로 물이 넘쳐 임진강 길이 막혔으므로 공을 따라간 사람들 모두가 조금 머물자고 만류하였지만 공은, “사행 길은 기한이 있는 것인데, 그럼 나더러 왕명을 풀밭에다 버려 버리란 말인가.” 하고는 그들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해 물을 건넜는데, 물도 방해를 놓지 못했다.
열하(熱河)에 이르자 예부(禮部)가 공을 강요하여 번승(番僧)에게 절을 하도록 했는데, 공은 그때도 꼼짝 않고 서서 말하기를, “신하 된 자는 달리 사귀는 법이 없는 것인데, 내 어찌 그에게 무릎을 굽힐 것인가.” 하고는, 그들이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다. 또 장례 일을 보살핀 것만 하더라도 내가 공에게, 옛날 영안위(永安尉)와 동양위(東陽尉)가 하던 대로만 할 것을 특별히 명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제도에 의빈(儀賓)은 일정한 감무(監務)를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오년(1786, 정조10) 왕세자가 죽었을 때 초상에서부터 장례 때까지 심지어 장지 정하는 일까지도 그 모두를 공에게 맡기자, 공은 더위를 먹어 거의 위태로운 상태였는데도 감히 쉬지 않고 더위를 무릅쓰고 동분서주하여 별 탈 없이 일을 마쳤으니, 이는 모두 공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실적인 것이다. 그 큼직큼직한 것들이 그러한데 나머지 일들을 논해 무엇 하리. 공에게는 작은 영정 두 장이 있었는데, 영조께서 거기에다 어필로 찬(贊)을 써 주기도 하셨다. 한평생 독서를 좋아하고 필찰(筆札)에도 능했지만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저술로는 《만보정시집(晩葆亭詩集)》이 있고, 그 밖에 《연행록(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약간의 책이 있다. 만보(晩葆)라는 호는 바로 내가 공의 집에 갔을 때 공의 인중방(引中枋)에다 액자로 써 붙인 것이다. 공이 늘그막에 와서 한가롭게 쉬고 싶다고 한 것을 그가 떠나는 것이 싫어 허락하지 않았더니, 경술년(1790, 정조14) 3월 25일 66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공이 임종시 탄식하며 이르기를, “나라 은혜를 보답하지 못해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내가 죽으면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 하고는 자기 사적인 일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얼마나 현자인가. 나도 공의 유지(遺志)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상전(常典)에 비하여 부의를 조금만 더하라고 했고, 사신(詞臣)이 행장을 쓰고, 태상(太常)이 시호를 정하여 5월 16일 귀주의 묘와 합장하게 했다. 귀주는 영조의 셋째 따님으로 영빈(暎嬪) 이씨(李氏) 소생인데, 그의 효우(孝友)에 대해 영조의 칭찬이 대단했으며, 나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월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치받친 사람이라고 했으니 여기에서 그의 현철한 규범을 알 수 있으리라. 공은 자기 형의 아들 상철(相喆)을 후사로 삼았는데, 지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으로 재직 중이고, 측실(側室) 소생으로는 종선(宗善), 종현(宗顯), 종건(宗謇), 종련(宗璉)과 사위 장선(張僎), 서근수(徐瑾修), 이건영(李建永)이 있다. 상철의 계자(系子) 횡수(紭壽)는 참봉(參奉)이고, 횡수의 아들은 제일(齊一)이며, 사위는 이희선(李羲先)과 홍정규(洪正圭)이다.
아, 공의 언행(言行)과 사공(事功)에 대해 당연히 명법(銘法)에 맞춰 명을 해야 할 것이지만 누가 나만큼 공을 알 것인가. 내가 공에 대해 비록 서툰 말이나마 아끼겠는가. 그리하여 서를 쓰고 명을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朴貫錦城 금성이 관향인 박씨들
世襲璜聲 대대로 좋은 명성 이어졌다네
勳鑱金鏞 큰 쇠북에 공로 새겨지고
直媲玉衡 곧기는 옥형과 같았다네
流芬未艾 그 꽃다운 명성 계속 유전되어
高文典冊 훌륭한 문장 국가 전책을 맡았었는데
公繩前武 공이 그 뒤를 이어
跡聯禁掖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네
先王曰嘉 선왕께서 좋으시다고
名門肖眷 명문의 착한 자손이라고 하여
香風紫鞚 향풍 속에 자색 굴레의 말 탈 사람을
彼誰顧眄 거기에서 물색하셨지
公惟恂恂 공은 그렇게도 진실하여
密若窈窕 요조숙녀의 좋은 짝이었고
明內柔外 겉은 유해도 속은 강명했으며
恭大慈小 어른에게 공순하고 어린이를 사랑했다네
知雄守雌 강함을 갈무리하고 부드러움을 취하시니
我則有受 내 그에게 배움을 받았네
敢不鞠躬 왜 감히 국궁을 않을까 보냐
兩朝恩厚 양조의 사랑이 그리도 후하신데
始終大節 변할 줄 모르는 대절은
一髮千勻 홀로 위태로운 국운을 유지하셨네
喬山之巓 높은 산꼭대기에
佳氣氤氳 아름다운 기운이 서리게 되었다네
孰居厥功 그런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俾熾而昌 더욱더 성하고 번창하도록 말이네
公歸何憾 가신 공이야 무슨 유감 있으리
死哀生榮 죽어 슬프지만 살아서는 영광이었는데
勞汝未酬 다만 그의 공로를 못다 갚아
予責多負 내가 공에게 많은 빚을 졌구나
猶有牲石 그래도 이 비를 세우니
屹彼螭首 이수가 저토록 우뚝하여라
深刻銘章 공의 행략을 깊이 새겼는데
矢無溢辭 꾸며 댄 말은 절대로 없다네
豈弟君子 화락한 그 단아한 군자를
曷日忘之 내 어찌 잊을 날 있으리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술년(1790) 월일에 세움
전서는 이양빙(李陽氷)의 글자를 모음
본문 글씨는 안진경(顏眞卿)의 글자를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