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 한옥마을 탄생과 역사.문화 가치
익선동 한옥마을 탄생과 역사.문화 가치
익선동 한옥마을이란 어떤 곳인가?
익선동 한옥마을은 서울의 중심 종로에 위치하고 있다. 5호선 종로3가역 3.4번 출구에서 나오면 건너편에 좁은 골목길이 보인다. 차가 끼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다. 이 평범한 골목길 안에 역사적인 옛 한옥마을의 존재는 흥미로운 발견이다. 10평~30평 규모인 작은 한옥이 백여 채 이상 모여 아늑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인근에 외국인이 많이 찾는 북촌 한옥마을과 달리 규모와 분위기가 크거나 세련되지 않지만 작고 소박하다. 서울시의 1930년대 이전 조성된 유일한 마을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기도 하다.
익선동 한옥마을 탄생
일제시기 토지 소유는 크게 변화되었다. 일본인들의 토지 매입, 국가소유지(국유지)와 공동 소유지가 증가하면서 개인 소유지가 줄어들었다. 1917년 기준으로 국가소유지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민유지 중에 일본인 소유 토지는 35%, 한국인 개인 소유 토지는 28%밖에 안 되었다. 서울 인구가 증가하자 주택을 구하지 못한 주민들이 급증하고 주택난이 벌어졌다. 당시에 기존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라서 생활의 불편과 비위생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일반 서민들을 위한 저렴한 가격의 주택 제공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1] 1920년대, 한국 최초 근대 건축가인 정세권은 자신의 회사를 통해 익선동 관할 토지를 대량으로 사서 분할한 후, 평균 30평의 한옥을 지어 공급하였다. 그 당시 주택을 많이 소유한 일본인들이 일본식 주택을 건설하였고 한인 지식인과 부유층은 ‘문화주택’이라 불리는 서양식 주택을 선호하였다. 정세권은 종로통에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으며, 100% 전통적인 한옥보다는 개량형 주택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익선동 한옥은 당시에 파격적으로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공간을 재배치하였으며,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건축비 절약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또한 주택을 분양하고나서 입주자에게 분양금을 한번에 받지 않고 월 단위로 나눠 받았다고 한다. 현재 서민용 주택 구입을 지원하기 위한 금융 정책들이 많이 있지만 그 당시에 공기업이 아닌 일반 민간 회사를 운영한 정세권이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북촌 가회동이 깔끔하고 아름답기에 보존가치가 있다면, 익선동 한옥은 주거환경을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그리고 대지주들의 북촌 가회동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면, 서민들을 위해 지었던 익선동 한옥마을의 가치 또한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
역사.문화를 품은 익선동 한옥마을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거리인“운종가”라 불렸던 종로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근에 창덕궁, 북촌, 경복궁, 인사동, 종묘, 탑골공원 등 조선 500년의 문화.역사를 많이 담고 있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피맛길의 하나였다. 피맛길은 말그대로 말을 피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말을 타고 다닌 양반들을 마주할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일반 백성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이다. 피맛길에 따라 서민들이 좋아하는 저렴한 맛집, 술집들도 자연스럽게 들어셨다. 조선시대에 왕들이 주로 행차했던 길은 종로 외에 돈화문로이기도 하여 돈화문로에 위치한 익선동은 피맛길인 것으로 알려졌다. 낙원동과 함께 익선동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의 궁궐이 해체되자, 궁밖으로 나온 궁녀들에 의해 궁중요리, 한복, 음악 등 다양한 궁중문화 지역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에는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 국악촌으로도 불렸으며 현재까지도 국악, 한복, 맛집 등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옛 피맛길의 흔적인 전통맛집, 한복집, 국악 등 익선동 한옥마을 입구 골목이나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2]
역사를 지닌 익선동 한옥마을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진 것이 있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데이터 코스로 유명하지만 60년 전에는 정치인, 기업인들이 많이 찾던 코스 중 하나였다. 여기에 1960년대 유명했던 ‘오진암’ 요정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요정은 고급 한정식 요릿집이지만 실제로 기생들이 국악공연을 하는 술자리이자 그 당시의 유흥업소였다. 오진암은 1953년 처음 영업을 시작하였는데 700평 규모로 ‘소궁궐’로 불릴 만큼 건축미가 뛰어난 요정이었다. 1950년~1970년대 한국 밀실 정치 스토리를 간직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부 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곳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 연회를 가졌고 외국인한테 인기가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 ‘기생 관광의 중심지’라는 사회적 지적을 받기도 했으며 부인할 수 없는 서울의 역사다. 2010년 오진암의 폐업으로 인해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비즈니스 호텔 이비스가 들어섰다. [3].
연합뉴스의 인터뷰에서 오진암 사업관리자인 김석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0년까지는 운영할 정도가 됐는데 노무헌 전 대통령 때 성매매 단속을 강화한 이후 서울 시내의 요정이 다 죽고 장사가 잘 안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관광요정이 10개 있었는데 오진암이 1호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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