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선생 고택(金正喜先生故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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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추사고택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6년 1월 8일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추사고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생가이며 그의 증조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266.11㎡(80.5평)로 솟을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칸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이 밖에도 추사의 묘소와 증조부 김한신, 그의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 홍문이 있다. 또한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m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다.


김정희의 생애

김정희 초상[1]


추사 김정희는 조선조의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추사는 시, 서, 화, 전각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書道)는 추사체로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추사체는 기존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하여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으로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의 서체이다. 이 외의 작품으로는 <묵란도>, <묵죽도>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 등이 있다.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다.





추사고택의 구조

추사고택 평면도[2]

추사고택은 조선후기의 대표적 서예가인 김정희가 거처하던 곳이다. 이 집은 본래 53칸의 저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그 절반 정도인 20여 칸만이 남아 있다. 이 고택은 솟을대문의 문간채를 시작으로, 동쪽에 사랑채,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을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하였고 사랑채는 남향하고 있다.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각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남쪽엔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 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 잡은 ㄱ자형 집이다. 또한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刻字)된 석주(石柱)가 있는데,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선생이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한다.

안채에는 여섯 칸 대청과 두 칸의 안방, 두 칸의 건넌방이 있다. 안방부엌,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 집으로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여섯 칸으로 그리 흔치 않은 큰 마루 규모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 형이다.[3]

지붕은 긴 홀치마에 팔작지붕[4]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는 맞배지붕[5]으로 층을 지게 하여 처리되었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을 이어 붙인 지붕이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추사고택 관련 유적지

김정희의 묘소

추사 김정희의 묘는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188호로 지정되었다. 묘지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2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한신(金漢藎), 화순옹주(和順翁主) 합장묘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의 묘는 1984년에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김한신은 1732년 13세 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과 제용감제조를 역임하였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던 그는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으며, 도장을 새김에 있어서도 뛰어나 인보(印寶: 임금의 도장)를 새기기도 하였다.

그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곧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묘역에는 그와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

화순옹주 홍문은 1976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조선 영조(재위1724∼1776)의 둘째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옹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9] 영조는 남편에 대한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의 열녀문은 훗날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것이다.

홍문은 묘막터 정문 위에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라고 판각되었다. 묘막터는 53칸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불타 없어지고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백송(白松)

예산의 백송은 1962년에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이 백송의 나이는 약 200살로 추정되며,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가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준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예산의 백송은 희귀하고 오래된 소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당시 사람들이 백송을 귀하게 여겼던 풍습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명숙, 「추사(秋史) 김정희의 예술이 숨 쉬는 고택」,『미술세계』 256호, 2006. 2

『영조실록(英祖實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http://www.cha.go.kr)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출처

  1. 이한철(李漢喆) 作. 1857년. 보물 제547-5호. 출처: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41291&cid=46702&categoryId=46739]
  2.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전통건축과 장소),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3. 김명숙, 「추사(秋史) 김정희의 예술이 숨 쉬는 고택」, 『미술세계』 256호, 2006. 2, 46쪽.
  4. 우진각지붕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과 같은 모습의 지붕이다. 출처: 김왕직,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2007.4.
  5. 건물 앞뒤에서만 지붕면이 보이고 추녀가 없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만으로 구성된 지붕이다. 마치 책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형태이다. 출처: 김왕직,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2007.4.
  6. 출처: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7.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8.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9. 『영조실록』권 91, 영조 34년 1월 17일(갑진) 첫 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