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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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

1578년(선조 11)에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 기효증(奇孝曾)이 선친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계휘(金繼輝) 및 지방유림들과 함께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으나, 1941년 빙월당을 새로 짓고 서원의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현재 고봉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인 춘·추향사제를 매년 3월과 9월에 개최하고, 교육체험관에서는 시민과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대승(奇大升, 1527년~1572년)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며 네권의 주자문록을 남겼으며 경연에서 선초에게 전한 말을 묶은 논사록이 있다. 아버지는 몰재 기진이며 기묘사화로 인해 삼촌이 복재 기준이 화를 당하자 아버지 기진이 광주의 소고룡리로 낙남하면서 광주에 세거하게 되었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부지런히 공부를 잘 하여 주위의 기대와 많이 받았다. 18세 되던 해에는 당시 조정의 훈구대신들에게 축출되어 향리에 은거하였던 龍山 鄭希濂로부터 문장을 지도받았다.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29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루면서 주자의 사상과 경륜에 깊이 침잠하였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32세에 넉넉히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고,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그의 관료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1558년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사칠논변

고봉은 이황과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특히 퇴계 이황과 나눈 12년간의 편지,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조선 최고의 사상 로맨스로 유명하다. 기대승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단칠정이 모두 다 정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을 주장, 주기설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과 맞섰다.기대승의 사상은 사단칠정이기론과 사림정치론, 예학사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대승은 이황과 8년간 논쟁을 통해 그의 성리학을 깊이 심화시켰는데, 그는 이기불상리를 중시하여 사단도 정이라고 봄으로서 사단과 칠정의 發을 다 같이 理와 氣의 共發로 보는데 비해, 이황은 이기불상잡의 측면을 존중하여 사단을 이의 발, 칠정을 기의 발로 각각 分對하여 설명한 것이다. 기대승의 이기공발설은 후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로 발전되어갔다.


기효증(奇孝曾 1550~1616)

기효증은 1550(명종5년)년 임곡 용동마을에서 기대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6월 10일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와 의곡을 모집하였다.이어서 그는 8월1일에 선조가 압록강 끝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모집격문'을 써서 각 고을에 돌린다. 1592년 8월 19일, 광주의 선비 기효증은 용진산 가학정의 주인 박경과 함께 장성 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을 만나 그들은 양곡을 모으고 운반했다.그 결과 의병 1,000인과 군량미 3,000여 석을 확보하였다.호남절의록에는 함께 의곡을 모은 이는 영광의 이굉중·이용중 형제, 오귀영, 이희룡, 송약선, 이헌, 임수춘, 이안현, 최희윤, 이곤과 이분, 김재택이고, 광주의 이운홍, 남평의 송기원, 무장의 오희량, 순천의 이안현, 고창의 김홍우, 무안의 윤황 등이다.'함재근왕록'에는 의곡을 모은 사람으로 이굉중, 민근, 이영립, 임업, 이운홍, 이천룡, 기효분, 기효민, 박경, 이한, 이녕 등의 이름이 나오고, 무안생원 김충수가 쌀 2백석, 순천 낙안 유생이 3백석, 태인 유생 안광주가 2백석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서 기효민은 기효증의 동생이고 기효분은 기효증의 사촌이다. 함재근왕록에 의하면 의곡을 실은 배는 모두 24척으로서, 강진 1척, 영암 2척, 나주 3척, 무안 1, 임치 1척, 함평 1척, 영광 2, 무장 2, 흥덕 1, 고부 1, 금모포1, 부안 2, 임피 1, 옥구 1, 태안 2, 근포 2척이다. 쌀과 의병을 실은 배들은 10월15일에 고부에 도착하고, 11월6일에는 군산포(羣山浦) , 11월10일 충청도의 람포(藍浦), 12월3일에 태안(泰安)에 도착한다. 그리고 12월6일에 근포진, 12월10일 독진을 거쳐서 1593년 1월19일 강화도에 도착한다. 포구에 이를 때마다 배가 안전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제문을 올리고 해신에게 제사를 드리었다. 이를테면 11월6일 군산포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원 임업이 제문을 지은 제서해신문祭西海神文이 '함재근왕록'에 실려있다. 1592년 겨울은 너무 추웠나 보다. 의병선 5척이 풍랑에 표류되기도 하였고 바다가 얼어서 제대로 운항을 못하였다. 의주의 행재소는 기효증이 의병과 의곡을 싣고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것 같다. 1592년 12월17일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효증이 정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있는데 삼화도가 얼어붙어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또 이곳 정군을 뽑아 이빈(李薲)에게 주어 싸움터로 보내면, 그는 그곳의 형세를 잘 알고 있고 또 전에 이미 오래 머물면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스스로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배는 1593년 1월말 경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효증이 2월1일에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썼기 때문이다. 기효증은 의주 거련관에서 선조 임금을 뵈었다. 임금께서 불러보시고 따뜻하게 말씀하시길 “고통을 무릅쓰고 먼 곳에서 이곳에 이르니 내가 매우 기쁘도다. 또한 풍랑이 심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무사히 도착한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라고 위로하였다.이 때 임금의 호위가 허술하였는데 호남에서 정예 근왕병 460명이 오자 비로소 호위병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양곡은 주로 명나라 군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기효증은 나중에 동복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93년 3월에 대간들의 논박을 받고 파직된다. 기효증은 사리를 조금 알지만, 객기가 많다 라는 평과 함께 의병을 위하여 양곡을 무역할 때부터 주위의 원망을 샀었던 행적의 기록이 있다.


김계휘(金繼輝, 1526년 ~ 1582년)

1578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과 함께 기대승의 사우 망천사를 지었다. 산림의 영수로 꼽히는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이며 김집의 할아버지이다.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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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봉서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987
참고 위키백과 월봉서원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1106870000
해설 광주광역시_서구문화원 기효증 http://www.gjsgcc.or.kr/ko/35/view?SEQ=3085
원문(번역) 조선왕조실록 기효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03021_002
참고 우리역사넷 사칠논변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4_0040_0020_0020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칠논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054
참고 유투브 도올TV 사칠논변 https://www.youtube.com/watch?v=ojAPSfGFBWU&t=220s
참고 메타버스 월봉서원 https://meta.wolbong.org/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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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발표문 정순우, 세계유산 등재기준으로 본 한국의 서원 (재)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통합관리센터 https://k-seowon.or.kr/?act=board&bbs_code=sub6_6&bbs_mode=view&bbs_seq=594
학술대회 발표문 엄원식, 미래문화자산! 서원의 진정성 있는 활용 (재)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통합관리센터 https://k-seowon.or.kr/?act=board&bbs_code=sub6_6&bbs_mode=view&bbs_seq=594
학술대회 발표문 노수경, 영감의 공간으로서의 서원 (재)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통합관리센터 https://k-seowon.or.kr/?act=board&bbs_code=sub6_6&bbs_mode=view&bbs_seq=594
단행본 정순우, 서원의 사회사
RISS:T16153957 논문 백옥연, 지역 인문문화자원으로서 서원의 활용에 관한 연구-광주 월봉서원을 중심으로 RISS http://www.riss.kr.openlink.aks.ac.kr:8080/link?id=T16153957
자료집 월봉서원지 월봉서원 자료실 http://www.wolbong.org/index.php?wbb=md:view;page:;q:;search:;uid:1&sid=45&_sb=&_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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