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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슬픔을 지닌 효창원, 문화공간이 되다

Synopsis

Storyline

Episode 1: 문효세자, 5세에 요절하여 효창원에 안장되다

정조임금에게는 아들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이며 또 다른 한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한 문효세자이다.

문효세자가 태어날 당시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1]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2]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일 때부터 교육기관인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고 스승 보양관(輔養官)을 임명하였다. 보양관이 정해지면 바로 원자와의 상견례(相見禮)를 실시하였는데, 상견례는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보양관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보양청에서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1784년 1월 문효세자가 창덕궁 대은원(戴恩院)에서 두 명의 보양관과 처음 만나 서로 인사하는 의식을 그린 궁중행사도이며, 『문효세자 보양청일기(輔養廳日記)』에는 1783년 11월 18일부터 1785년 4월 3일까지 보양청에서 있었던 일들이 매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왕세자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였기에 그 위상을 높이는 각종 통과의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통과의례는 책봉, 입학, 관례, 가례다. 책례는 책봉 의식으로 왕세자가 왕의 후계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공식 의식이며 왕이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서를 수여하고, 세자가 이를 하사받는 의식이다. 왕세자 책봉을 위해서는 책례도감이 구성되어 책봉에 따른 의장과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책례도감의궤를 작성하였다.

문효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정조의 나이가 30대였기 때문에 신하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3]본래 책봉례와 수책례는 동시에 진행되지만, 문효세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책봉례에 참석할 수 없어서 별도로 치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책봉례는 1784년 8월 1일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와 대신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하고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 수책례가 진행되었다. 이때 어린 문효세자 대신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을 맡았고, 문효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이 책봉례와 수책례의 모습은 《문효세자책례계병》에 각각 묘사되어있으며, 글로 기술된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도 현존한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왕세자궁인 중희당을 짓고 현판을 직접 썼다. 이 중희당에 정조 9년(1785) 12월 27일 정조가 친림한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그린 《중희당친정계병(重熙堂親政契屛)》가 남아있다.

그러나 1786년 문효세자는 홍역에 걸렸고 그해(1786년) 5월 문효세자는 5세(만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같은 해 9월 의빈 성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4]하였다.

이에 정조는 궁궐 가까운 곳[5]에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원소를 조성하며 정조는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효창묘'라고 명명하였고, 묘소 조성에 관해서는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효창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이 행차하는 것)하였기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을 ‘거둥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6] 특히 효창원의 아기 석호는 정조의 애달픔이 들어있는 것으로 앙증맞고 귀엽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조가 쓴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에는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며 사랑하는 문효세자를 잃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애통한 심경을 서술했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Episode 2: 네 명의 독립운동가를 위한 삼의사 묘역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가 훼손한 효창원의 터에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삼의사 묘역에는 가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언젠가 조국으로 봉환되어 오리라 염원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자리이다.

윤봉길 의사는 윤봉길은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32년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져 중국 주둔 일본군대의 수뇌부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사형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는 질문에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하등의 남길 말이 없다."라고 하였다. 윤봉길의사의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청북도 예산에는 윤봉길이 태어난 집인 광현당 및 제향공간인 충의사 등이 매헌 윤봉길 의사 유적지로 사적 제229호에 등록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가 순국 후 일본 정부가 보내 준 유품들은 보물 등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중 회중시계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전 김구 선생과 최후로 작별할 때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시계가 더 비싸나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일이 없으니 바꾸자고 하여 바꾼 것이라고 김구의 『백범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이봉창 의사는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1932년 동경에서 신년 관병식을 끝내고 지나가는 일왕 히로히토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일본 궁내부대신이 탄 마차를 일왕이 탄 것으로 오인하여 첫번째 수류탄을 던졌으며, 불행히도 두번째는 불발되었다. 첫번째 수류탄으로 굉음과 함께 말이 거꾸러지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일왕은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사쿠라다문 의거)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비록 거사는 실패하였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일본 왕의 행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사의 의거는 한국의 지속적인 저항과 강인한 독립 운동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며, 무엇보다 침체되어 가던 우리 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이봉창의 거사는 중국의 각 신문들이 대서특필하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며 유감을 표하였는데, 이 표현에 일본은 주중일본군을 동원하여 신문사와 국민당 당사를 습격하게 되었고,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과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및 의거자금 송금증서는 국가등록문화재에 등록되어 있으며, 효창공원에는 이봉창의사가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다.

일제강점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정기 의사는 1931년 한국·중국·일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산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장에 나서는 등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조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상해 훙커우[虹口]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정객 참모부원들을 위시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키스트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첩자의 밀고로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순국하였다. 백정기 의사의 고택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03호(구파 백정기의사 고택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읍에는 백정기의사의 기념관인 구파기념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 등을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며 한국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하자 1908년 4월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대한의군참모중장이 되어 동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였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일본 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7]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은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8]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는데,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 (중략)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한국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 및 측량을 통해 2008년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당초 목표로 삼은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고,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하다. 그 이후 중국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하고, 북한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쓴 유묵들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라남도 장흥의 해동사에는 안중근의사의 배향공간이 있고(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 서울 중구에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Episode 3: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 임시정부

Episode 4: 나라의 큰 선생,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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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verse 구현 예시

Virtual Classroom: 슬픔을 지닌 효창원, 문화공간이 되다


참고문헌

  1. 출산 이후 정조는 승은 상궁에게 정식 후궁 인 ‘소용’의 첩지를 내렸고, 1783년 2월 19일 소용 성씨에게 의빈(宜嬪)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2. 『정조실록』 정조 6년(1782) 9월 7일
  3. 『정조실록』 정조 8년(1784) 7월 2일
  4.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786년) 9월 14일
  5. 효창원은 서소문 밖에서 2km 떨어져있다.
  6. 「거둥 고개」, 서울지명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72XXXXXX8944
  7. 관선 변호인은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8.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의 자서전이며,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인데 사형으로 『동양평화론』은 완결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