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VC-2203.story
목차
Theme
메타버스 속 효창원과 효창공원
Synopsis
1923년 인왕산 자락 은행나무골에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 ‘딜쿠샤’와 그 집의 주인이었던 테일러 부부가 경험한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와 문화 이야기. 4대 130년에 갈친 테일러 가문과 한국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떠한 유산으로 남았는가?
Storyline
Episode 1: 문효세자, 5세에 요절하여 효창원에 안장되다
정조임금에게는 아들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이며 또 다른 한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한 문효세자이다.
문효세자가 태어날 당시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1]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2]
문효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정조의 나이가 30대였기 때문에 신하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3]
본래 책봉례와 수책례는 동시에 진행되지만, 문효세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책봉례에 참석할 수 없어서 별도로 치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책봉례는 1784년 8월 1일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와 대신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하고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 수책례가 진행되었다. 이때 어린 문효세자 대신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을 맡았고, 문효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이 책봉례와 수책례의 모습은 <문효세자책례계병>에 각각 묘사되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세자궁인 중희당을 짓고 직접 현판을 쓸 만큼 아꼈으나, 1786년 문효세자는 홍역에 걸렸고 그해(1786년) 5월 문효세자는 5세(만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같은 해 9월 의빈 성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4]하였다.
이에 정조는 궁궐 가까운 곳[5]에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원소를 조성하고, 정조는 이 곳을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효창묘'라고 명명한다. 정조는 효창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이 행차하는 것)하였기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을 ‘거둥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6] 특히 효창원의 아기 석호는 정조의 애달픔이 들어있는 것으로 앙증맞고 귀엽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일제는 효창원의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다는 점을 이용해 숙영지로 삼거나 비밀 병참기지로 활용하여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을 이곳에서 벌이기도 하였다.
1921년 일제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하고 경성 최초 골프장을 개설하였는데 9홀 규모로 영국인이 설계를 맡았다고 한다. 1924년 효창원 일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1930년대 놀이시설이 들어서고 벚나무, 플라타너스 등의 외래 식물들이 심어져 유원지로 조성되었다. 1944년 효창원의 문효세자와 의빈의 묘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되면서 이름만이 남았다.
하지만 1945년 해방 후에는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된 뒤, 그 자리에 독립지사인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가 1946년에 모셔졌고
Episode 2: 운산금광과 테일러 부자
테일러 가문의 한국과의 인연은 평안북도 운산에 있었던, 세계적인 규모의 금광 개발 사업에 기인한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구한 공으로 조선왕실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미국인 의사 알렌은 운산금광의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를 끌어들여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하게 하였다. 모스는 1985년에 조선개광회사(Korean Mining and Development Co.)를 설립하고 1986년에 조지 테일러를 광산기술자로 초빙하였다. 1897년 다른 미국인 사업가 헌트(Leigh S. J. Hunt)와 파세트(J. Sloat Fasset)가 모스로부터 운산금광에 관한 권리를 인수하여 동양합동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설립하고 광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였다. 그러자 운산금광의 기술책임자였던 조지 테일러는 첨단 광업 장비인 쇄광기를 도입하기로 하고 미국에 있던 아들로 하여금 그 장비를 운송해 오도록 하였다. 1987년 앨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입한 쇄광기를 운송 가능한 부품으로 해체한 후 이것들을 인천을 거쳐 운산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살이었던 동생 윌리엄도 이 때 형과 동행했다.
Episode 3: 메리 테일러와 딜쿠샤
메리 린리 테일러는 영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향 첼트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의 예비신부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만두고 나와 연극 배우가 되었다. 1916년 메리는 극단을 따라 아시아 순회공연을 가게 되었고, 공연지 중 한 곳이었던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국에서 온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를 만났다. 열 달 후 앨버트는 인도에서 공연중이던 메리를 찾아갔고, 두 사람은 봄베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17. 6. 15)
앨버트와 결혼하여 한국에 온 메리는 서대문 인근에 살면서, 남편과 함께 자주 인왕산 인근을 산책했다. 그러던 어느날 산 아래 마을의 우물가에서 노거수 은행나무를 발견하고, 훗날 집을 짓게 되면 이 나무 옆에 지으리라 결심한다. 몇 해를 기다란 끝에 테일러 부부는 그곳의 땅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1923년에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의 이름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 순회공연 도중에 가 보았던 러크나우 지역의 유적지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인도의 딜쿠샤는 인도에 사는 영국인들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고, 메리의 할아버지가 인도인들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곳이기도 했다. 메리가 그곳에 갔을 때 건물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힌디어 ‘딜쿠샤’의 뜻이 마음에 들었던 메리는 자신이 집을 짓게 되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다.
Episode 4: 테일러 형제와 3.1 운동
운산금광 직원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한 테일러 형제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개척해 가기 시작했다. 형 앨버트는 운산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충청도 직산(현재 충남 천안)에서 광산을 개발했고, 한국의 골동품을 수집•판매하는 골동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업 수완이 좋은 동생 윌리엄은 자동차와 각종 잡화를 수입•판매하는 무역 회사 ‘테일러상회(W. W. Tayler Complaty)’를 경영했다.
이들의 본업은 사업가였지만, 뜻하지 않게 한국의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세계에 알리는 언론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 앨버트는 미국 연합통신사(Associated Press, AP)의 특파원 자격으로 장례를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때 그의 아내 메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을 위해 입원 중이었는데, 간호원 한 사람이 메리의 침대에 문서 다발을 숨기는 일이 벌어졌다. 3,1 운동의 주동자들이 세브란스 병원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는데 일본 경찰이 이를 알고 압수하러 오자, 그 증거를 감추려 한 것이다. 앨버트는 이 문서가 독립선언문임을 알게 된 즉시 특종이 될 기사를 작성했고, 동생 윌리엄으로 하여금 기사와 선언문을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으로 반출하고, 그곳에서 미국 UPA로 타전하게 했다.
앨버트가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할 때 찍은 사진들은 아들을 브루스를 거쳐 손녀 제니퍼에게 전해졌고, 제니퍼는 이것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Episode 5: 호박목걸이
메리는 어렸을 때부터의 어머니의 호박목걸이를 좋아했고. 그녀가 가정에서 독립 할 때 어머니는 그 목걸이를 메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메리는 아시아 순회 공연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이 목걸이의 구슬들을 잃어버렸고, 몹시 서운했던 마음을 일본에서 만난 미래의 남편 앨버트에게 이야기 했다. 앨버트는 며칠 후 아름다운 호박 목걸이를 그녀에게 선물한다. 호박에 대한 한국인들의 각별한 애정을 이야기해 주면서....... 메리는 일생 동안 이 목걸이를 간직했고, 노년에는 이것을 그녀의 한국에 대한 추억의 표상으로 삼았다. 메리가 그녀의 한국 생활을 기술한 자서전을 썼을 때 책의 제목을 ‘호박 목걸이’라고 했으며 책에 담은 이야기 하나 하나를 목걸이의 구슬에 대응시켰다. 1982년 메리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가 남긴 ‘호박 목걸이’ 유고를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정리하여 1992년에 출간했다. 메리가 목에 걸었던 호박 목걸이는 그녀의 손녀인 제니퍼가 테일러 가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2016년에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 호박 목걸이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며, 딜쿠샤(앨버트 테일러 가옥)에서 전시하고 있다.
Storytelling Network
Metaverse 구현 예시
Virtual Classroom: 메타버스 속 효창원과 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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