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From Underwood To Ellinwood (190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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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1990년 12월 10일)
식별자 L19901210UTOE
한글명칭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1900년 12월 10일)
영문명칭 Horace G. Underwood's Letter To Frank F. Ellinwood(Dec 10, 1990)
발신자 Underwood, Horace G.(원두우)
수신자 Ellinwood, Frank F.
작성연도 1990년
작성월일 12월 10일
작성공간 서울
자료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번역문출처 김인수,『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With regard to my return home, I had hoped to be able to leave this Spring, when at the annual meeting it was proposed that Mr. Sidebotham be transferred to Seoul to be associated with me, I at once thought that it would be possible, but now that he has been sent to Fusan and Mr. Sharp has been appointed to be with me and as Mr. Sharp does not as yet know the language, it will be imperative that I stay until the fall. I hope to be able therefore to take Dr. Brown from Seoul to Pyeng Yang overland, so that he may see some of our country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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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 있는 이곳 선교부 소유지의 매각(賣却)건에 대해서는 제가 할 이야기가 없어서 제 편지에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제 의견을 상당히 길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제 의견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만,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이 땅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매각에 반대하면 자신들도 그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일로 전체 선교부의 뜻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교부의 사람들에게 “그 땅을 매각하는 것에 대해 찬성투표는 하지 못하겠지만 반대 투표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샤록스 씨와 저, 두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제가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샤록스 씨와 저는 한국에 있는 많은 필지의 매매가를 알아보고 이를 선교부에 보고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는 제일 먼저 서울 지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서울지부에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는 모든 선교 지부에 다 보내어졌습니다. 그 후에 모든 사람들의 승인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께서도 그 사본을 한 통 받아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샤록스 의사와 저는 그 모든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였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곳에서 이루어진 자세한 평가의 결과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지역의 땅 값을 고려해 볼 때 총 요구액인 49,220엔과 또 다른 부지 한 곳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다수가 결의한 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이 ‘정부측에 제시된 제안’이었습니다. 작년 연례 회의에서, 선교부 재산위원회에 의해 ‘구체적으로 명시된 기간 내에 정부측과의 협정을 마무리해야 할 당 위원회의 위원’으로 제가 임명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사본을 혹 가지고 계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사본을 동봉해 보내드립니다) 제가 지방에서 돌아온 후, 1주일 혹은 그 이상 되는 기간동안 이 일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의견교환이 있었는데 부지에 대한 첫 번째 항목만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합의가 되어 있습니다. 왕은 “옛 새문안 궁전터”는 한 부분도 내어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서대문 또는 새로 지어진 문의 안쪽과 북쪽으로 남아 있는 땅을 다 매입하겠다고 제안했으며, 대문 밖의 적당한 땅으로 그곳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곳의 모든 정황이 이러한데, 박사님께서는 때를 놓치시면 안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정부측 사람들이 제안하는 부지에 대해 지부에서 동의한다면 이 거래를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In regard to the sale of the mission property here in Chong Dong, I had not written you anything because I had nothing to say concerning the matter. I said my say at considerable length before. My opinion is not one whit changed, at the same time when I found that the majority of the missionaries here thought that this should be sold, although they stated that they would vote against it if I opposed the sale, I felt that I did not want to stand out in such a matter against the whole mission, and told the mission, that while I could not vote in favor, I would not vote against the sale of the property. It was after this statement was made, that Dr. Sharrocks and I were appointed a committee of two, to estimate the various properties on the land and report to the mission. The committee reported to Seoul station first. The Seoul station then made a report which was then sent down to all the stations and I think was approved by everybody. I suppose you have received a copy of the same. Dr. Sharrocks and I went carefully over all the items and it is a result of this careful estimate that is made here. In my own opinion considering the cost of the property in this section, the total asked 49,220 yen and a site elsewhere is rather small, but in such matters the vote of the majority was taken, and that is the proposition that has been presented to the government. At the last annual meeting I was appointed by the Mission property committee, a committee to complete the arrangements with the government within the terms specified. (For fear that you have not a copy of this, I enclose a copy herewith.) For the last week or more since my return from the country, there has been considerable communications back and forth in regard to the matter and practically the whole is agreed to with the exception of the first item on site. In regard to site His Majesty positively says, that no part of the “old Sai Mun An old palace grounds" can be given. They offered to purchase all the remaining land “inside and to the north of the west or new gate," and offer to make up the deficiency in area by a suitable piece outside the gate. In all these matters out here you have to strike when you can and under these circumstances I thought that I would, if the station agree to the site which they offer, to conclude the bargain.
</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
지금과 같은 상황하에서, ‘이러한 새 건물 건축 작업을 감독할 건축가가 조만간 미국에서 우리에게 와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박사님께서 아실 겁니다. 이곳으로 오는 건축가는 새 병원 건물의 건축도 감독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밀러 씨와 게일 씨의 집도 있습니다. 물론, 누가 올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 일을 맡아 주기에 적합한 사람을 박사님께서 뉴욕시에서 찾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건축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주리주에 있는 파크대학의 학생인데 내년 봄에 학교를 졸업하게 될 겁니다. 그는 건축가라기 보다는 실제로 쓸모 있는 집을 잘 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서 우리는 매우 훌륭한 중국인 건축업자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데, 그는 필드 의사의 집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고, 미국에 다녀 온 적도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내 버리고, 탕추후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들을 감독해 주고 그 중국 사람이 잘 하고 있는지 살펴봐 줄, 건축가로서의 좋은 경력이 있는 한 사람만 와 주면 됩니다. 이에 덧붙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고돈과 힐리웰 회사의 연합생명빌딩 내의 고돈 씨에게 편지를 쓰려 합니다. 고돈 씨는 캐나다의 몇몇 정부 청사(廳舍)의 건축권을 얻는 경쟁에 참여하였으며, 성공한 건축가입니다. 그는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돈 씨는 얼마 전 가족과 사별하였기 때문에, 굳이 캐나다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고돈 씨에 대해 들어 알고 있는 바로는, 그의 동업자에게 사업을 맡겨 놓을 수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분을 위해 요청될 수 있는 비용의 금액, 그가 이곳에서 있는 동안의 사례금과 오고 갈 때 제공되는 경비 등은 그가 해야 할 작업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건축가에게는 충분한 보수가 되지 못하겠지만, 고돈 씨가 형편이 되어서 올 수 있다고 한다면,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이 있기 때문에 1년이나 1년 반정도 이 일을 맡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건축가 한 사람이 이곳에 와서 일 년 간 지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용에 대한 예산을 세우면서, 우리는 6,000 엔 또는 미국 금화 3,000 달러를 책정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선교본부 건물을 감독해줄 수 있어서, 1년 넘도록 머물게 된다면 그 연장된 기간에 소요되는 비용은 본부에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토 혹은 그보다는 작은 뉴욕 부근의 서부도시 출신의 사람이 오면 아마도 환경에 적응하기가 보다 쉬울 것이고 어떤 자재가 적합한지를 보다 빨리 감지해 낼 수 있는 이점도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한 예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건축을 하는 것에 대해 뉴욕과 토론토와 일본과 중국에 있는 몇 명의 건축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중에서 고돈 씨만이 그가 보낸 첫 번째 답신에서 “한국에서의 건축에 관한 조언을 주려면 벽돌과 목재, 석재 등의 거래 가격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며 우리에게 있는 인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어야 할 건물이 무척 많은 이런 때에, 고돈 씨처럼 경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결국 그렇게 되면 본부에서 비용을 크게 절약하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필요상 ‘건축술과 건물’에 대해 공부하기는 했지만 우리 중에는 건축가나 실제로 축조 기술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할 일이 많은 때에, 고돈 씨 같은 사람이 우리 건물들에 대한 감독을 맡아준다면 분명히 큰 힘이 될 겁니다.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Under these circumstances, you see that we will be soon needing an architect from America to superintend the putting up of these new buildings. At the same time the man can superintend the building of the new hospital and there is Mr. Miller's house and Mr. Gale's. Of course the question comes as to who can come. I do not know whether you can find a suitable architect in New York city to undertake this. There is an architect, who as yet has not had much practical knowledge, a student at Park College, Missouri, who will graduate from there next spring. He is more of a practical builder than architect. Out here at the present time we can secure a very good Chinese builder, the one who put up Dr. Field's house, a man who seems to be trusty and who has been in America, who has given up his heathen worship and was baptised in the baptist church at Tang Chow Foe. A man who was a good architect to superintend all the work and to see that this Chinaman does the right thing would be all that would be needed. In addition to this, I am just writing to H. B. Gordon, Confederation Life Building, Toronto, Canada, a certified architect of Toronto, of the firm of Gordon and Hilliwell, who has been a successful architect competitor for several government buildings in Canada. He is considerably interested in Korean missions. He has just lost his family and has not much to tie him to Canada. From all that I know and hear of him, I think he could leave his business in the hands of his partner, and while the amount that has been asked for such a one, for his expenses here and during his stay and his return expenses would not give much remuneration to such an architect for the work that he would have to do, I think that if Mr. Gordon is free and able to come, that his interest in the Korea Mission would make it such that he would give a year or a year and a half to this work. In our reckoning we allowed for an architect to come out here, be on the field for one year and for his expenses back to America 6,000 yen or 3,000 U.S. gold dollars was what we put down for this. If he had to stay longer than a year because of their being mission buildings which he could superintend, I suppose the Board would have to pay him for the additional time. Another advantage appears to me in connection with a man from Toronto or one of the smaller western cities over New York is that the chances are he would be more ready to adapt himself to circumstances and would be more quick to realise what material would be suitable. An instance to the point, I have written to one or two architects concerning building in Korea, both in New York, Toronto, Japan, and China and Mr. Gordon was the only one who in his first reply stated, that he must know the relative cost of bricks, timber, stone and the kind of workmen we had if he was to give advice concerning buildings for Korea. It would be a great advantage, if we could have a man of Mr. Gordon's experience in building to assist at this time when there is so much building to be done, and really in the end it would be a great saving to the Board. None of us missionaries are architects, none of us are builders, and while we have of necessity studied up concerning architecture and building, it would certainly be a great help if we could have a man like Mr. Gordon at this time to superintend our buildings when there is so much to be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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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병원의 장소 문제와 병원 설비에 대해서도 박사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연례 회의에서, ‘정동에 있는 설비를 이전하려는 이 때에 새 병원이 서울 밖에 있게 될 수도 있다면, 그렇게 하기보다는 병원의 설비와 정동에 있는 설비를 시내 한복판에 같이 두고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이 제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이 의견은 ‘세 곳에 설비를 갖추어 놓되, 하나는 연동에, 또 하나는 무어 형제의 교회와 연관을 갖게 하며 시내 한복판에, 나머지 하나는 새문안교회와 연관을 갖게 하며 서쪽에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의사 한 사람의 집만 지으면 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훌륭한 건축가의 감독 하에 세워질 수 있다면, 시간과 돈을 크게 절약하게 될 것입니다.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Another matter concerning which you should be advised is in regard to the placing of the new hospital and the hospital plant. At the last annual meeting it was proposed and carried that if the new hospital was to be outside of Seoul, an effort should be made, when we are removing the Chong Dong plant to combine the hospital plant and Chong Dong plant in one strong centre, where each could mutually aid the other. The idea then would be to have three strong plants, one at Yun Dong, one in the centre of the city in connection with brother Moore's church, and one at the West in connection with the Sai Mun An church. If this is done, you see a doctor’s house will have to be built and it would be a great saving of time and money if the whole thing could be built under the superintendence of a good architect.
</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
일전에 제가 고국에 가는 것에 대해 편지로 말씀드리면서, ‘제가 유럽을 경유해서 돌아가도 좋다는 본부의 확답’을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린 바 있었습니다. 제가 휴식을 취하려 본국에 간다면, 미국 아닌 다른 곳에서 얼마 동안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이전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이 허락을 박사님께서 받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I wrote you some time ago in regard to my return home and asked you to secure from the Board permission for my return via Europe. My experience while home before, shows me plainly, if my return home is to be for rest, I must have part of it some where else than America. I trust that you will secure the necessary permission.
</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
제 아내와 어린 아들과 저를 비롯해 부산의 체이스 양과 대구의 누어스 양은 ‘황해도에 있는 우리 선교지부들을 돌아보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행 기간은 생각보다 더 길어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제가 맡은 사역은 모두 소래교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작년을 돌아볼 때, 제가 연례 보고에서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그 한 지역에서만 250명 이상이 세례를 받은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열성적이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교회를 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우리 교회 사역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니, 그런 말들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신도들 중에서 다른 교인들을 이러한 정치적 활동에 끌어들이고자 했던 몇몇 사람들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Mrs. Underwood and I with our little boy and Miss Chase of Fusan and Miss Nours of Taiku have just come back from a prolonged trip through our stations in Whang Hai Do. The work under my care in that section is all in connection with the Sorai church, and as we look over the past year, for that one section alone more than by baptisms to the church. As I have said over and over 250 additions again in my annual reports, this is not our work it is the Koreans and we thank God for giving us such an earnest hard working church. There have been a number of stories around concerning a large number of our church workers being engaged in politics. A careful examination of the same, however, finds that they were false church have tried to get church members to join them in such action.
</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
박사님께서 평안하시기를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With kindest regards from us all, I remain,
</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
.
</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
Yours very sincerely,
</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안녕히 계십시오.</td> </tr> <tr> <td style="width:45%;" cellpadding="30px" valign="top">Horace G. Underwood</td> <td style="width:55%;;" cellpadding="30px" valign="top">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인물 올림.</td>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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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Dr. Horace G. Underwood
Seoul, Korea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인물
한국,서울공간
Dec. 10, 1900 1900년 12월 10일
Rev. F. F. Ellinwood, D.D.
New York, N. Y.
엘린우드 박사
뉴욕주, 뉴욕시
Dear Dr. Ellinwood, 엘린우드(Ellinwood)인물 박사님께,
Your kind letter of Oct. 23, came duly to hand and I want to thank you for it. In regard to what you say concerning the paper and the Board releiving met?) of the burdens, of course, if the Board as a Board pays for the conducting of any such thing as this, it involves the whole thing coming before the mission in a different way than it has heretofore come up. I find that there are about as many ways of running a paper on the field here as there are at home in America. I suppose that you have received a copy of the Pyeng Yang report, which will show you plainly that they consider that a Christian paper should have no general news, no foreign news, no political news and no advertisements and in fact should confine itself to one theme. A great deal is said at home through a misinterpretation of St. Paul's statement. “He determined to know nothing save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is taken to mean that there is but one and only one thing to be done. There is but one thing to be done, and that is to preach Christ in His entirety, with the light of the gospel as in our home lands and it is but 0right that when we come to these lands, we should endeavor to give them an all around gospel. The Christian News aims to be an all round family Christian paper, containing information along farm lines for the farmer, in arts and sciences for the artizan, market reports for the merchant, articles on the home life for the Christian home, all to be given in a Christian way and with the one great object of winning these people to Christ through the Christian News. Mr. Reynolds of Chun Ju tell, of a man who becoming interested in the farm items read still further and was converted. A Korean maker of bell metal in Kyen Sang Do, took the paper to see what he could learn about foreign arts and sciences and is now an active, earnest Christian in that section. Numbers of other cases might be cited. The majority of the mission however, think that a Christian paper should be restricted as I mentioned above and hence, although my brother has written that you brought in a resolution to the Board for proposing that the Mission ask for an appropriation to cover the deficience during my absence in America; I do not think that the mission will make the request. The only hope is that some Christian brother at home will realize the need and undertake to continue the enterprise for the year and a half that I shall be away.
div style="text-align:justify">박사님이 따뜻한 마음을 담아 지난 6월 22일에 보내주신 편지가 제 때에 도착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박사님께서 그 신문에 대해, 그리고 본부에서 제 부담을 덜어 주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본부에서 이러한 일을 처리하는 비용을 지불하게 되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그 모든 것이 선교부와 연관을 갖게 됩니다. 본국인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신문의 특성을 정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박사님께서 평양보고서의 사본을 받아보셨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것을 보시면 그 사람들은 ‘기독교 신문에는 일반 사회의 소식, 국외 소식, 정치 상황에 대한 보도나 여러 광고 등은 전혀 없어야 하며 철저히 한 주제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바울이 했던 말을 잘못 해석하여 본국에서 이에 대한 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라고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조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통전성 내에서 그 분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 온 우리는 복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이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그리스도 신문』에는 농부들을 위한 농업 관련 정보․전문인들을 위한 예술 및 학문적 정보, 상인들을 위한 시장보고, 그리스도인 가정을 위한 가정생활에 대한 글들을 실어 포괄적인 기독교 신문이 되고자하는데, 이 모든 내용을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보도하여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이 나라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큰 목적을 이루고자 합니다. 전주에 있는 레넬즈 씨는 ‘농업관련 기사를 관심 있게 보다가 이 신문의 내용을 더 보게 되었고 결국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의 금속 재료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외국 예술과 학문에 대해 배울 만한 게 있는지 보려고 그 신문을 가져다 읽었던 경상도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그는 그 지역에서 적극적이며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교부의 대다수 사람들은 기독교 신문의 내용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돈이 부족하게 될 것인데 ‘이를 메꿀 비용을 선교부에서 요청해 달라’고 제안하는 결의문을 박사님께서 제출하셨다고 알리는 편지를 제 형이 보냈습니다만, 선교부에서 그러한 요청을 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본국의 몇몇 사람들이 이 필요성을 깨닫고, 제가 떠나 있게 될 1년 반 동안에도 이 사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올 봄에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연례 회의에서 사이드보담 씨가 서울로 옮겨와서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을 때, 저는 ‘제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게’ 가능하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이드보담 씨는 부산으로 가게 되었고 샤프 씨가 저와 함께 있도록 임명받았습니다. 그런데 샤프 씨는 아직 한국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제가 가을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브라운 박사님을 서울에서 육로를 통해 평양으로 모시고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러 지방에서 해 나가고 있는 사역을 브라운 박사님이 볼 수 있게 되실 겁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