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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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원문
無極而太極.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 上天之載, 無聲無臭, 而實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也. 故曰: “無極而太極.” 非太極之外, 復有無極也.
- 상천(上天)에서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1] 실제로는 온갖 조화의 근원(樞紐)이며 만물의 근거(根柢)다. 그러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태극 외에 다시 무극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태극이 움직여서[2] 양(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여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긴다. 그리고 고요함이 극한에 다다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 각각의 근거가 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세워진다.
- 太極之有動靜, 是天命之流行也, 所謂“一陰一陽之謂道”. 誠者, 聖人之本, 物之終始, 而命之道也. 其動也, 誠之通也, 繼之者善, 萬物之所資以始也; 其靜也, 誠之復也, 成之者性, 萬物各正其性命也. 動極而靜,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命之所以流行而不已也; 動而生陽, 靜而生陰, 分陰分陽, 兩儀立焉, 分之所以一定而不移也. 蓋太極者, 本然之妙也; 動靜者, 所乘之機也. 太極, 形而上之道也; 陰陽, 形而下之器也. 是以自其著者而觀之, 則動靜不同時, 陰陽不同位, 而太極無不在焉. 自其微者而觀之, 則沖漠無朕, 而動靜陰陽之理, 已悉具於其中矣. 雖然, 推之於前, 而不見其始之合; 引之於後, 而不見其終之離也. 故程子曰: “動靜無端, 陰陽無始. 非知道者, 孰能識之?”
- 태극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두 가지 상태가 있는데 이는 천명(天命)의 유행으로 「계사전」에서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3]라고 말한 것이다.
- [태극이란] 『통서』에서 “성(誠)이라는 것은 성인의 근본이다.”[4]라고 말한 것이며 『중용』에서 “만물의 시작과 끝이다.”[5]라고 말한 것으로 천명이라는 도리이다.
- 이것의 움직임은 “성(誠)의 형통함이다.”[6]라고 말한 것이고 “이를 이은 것은 선(善)이다.”라고 말한 것이고 “만물이 바탕으로 삼아 시작하는 것”[7]이라 말한 것이다.
- 이것의 고요함은 “성(誠)의 회복함이다.”[8]라고 말한 것이고, “이를 완성시킨 것이 성(性)이다.”라고 말한 것이고, “만물이 자신의 성명(性命)을 각각 바르게 한다.”[9]라고 말한 것이다.
-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극한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니, 이렇게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어주니, 천명은 이로써 유행하여 멈추지 않는 것이다. 움직여서 양이 생겨나고 고요해져서 음이 생겨나 양으로 나뉘고 음으로 나뉘어 양의가 세워지니, 분수가 이로써 일정해져서 바뀌지 않는 것이다. 대개 태극이라는 것은 본연의 신묘함이고, 움직임과 고요함은 [태극이] 올라타는 기틀이다.[10] 태극이란 형이상의 도리이고, 음양은 형이하의 형기이다.[11]
각주
- ↑ 『詩經·文王之什』 「文王」, 命之不易, 無遏爾躬. 宣昭義問, 有虞殷自天. 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 ↑ 진래, 『주희의 철학』, 67쪽, “유행은 여기에서 천명의 유행을 가리키며 천명의 유행은 理氣를 겸해 말한 것으로 기가 리의 지배 아래에서 動靜·闔闢·往來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주역』「계사전」에서 ‘一陰一陽之謂道’고 한 것은 주희가 二程의 견해를 이어 한번 陰이되고 한번 陽이되는 것은 기의 유행이라 하고 도를 그 유행의 所以然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一陰一陽之謂道’는 주희에게 있어 기가 리의 지배 아래 운동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 역시 태극 자체의 운동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태극이 (음양)이기가 동정·교차하는 운동 과정에서 체현된 것임을 의미한다. 태극이 동정을 포함한다는 것은 본체의 은미한 데서 말한 것이고,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은 유행의 드러남 즉 작용에서 말한 것이다.”
- ↑ 『周易』 「繫辭上」5章,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 ↑ 『通書』 「誠上第一」, 誠者, 聖人之本. 【註】 誠者, 至實而無妄之謂, 天所賦·物所受之正理也. 人皆有之, 而聖人之所以聖者無他焉, 以其獨能全此而已. 此書與太極圖相表. 誠即所謂太極也.
- ↑ 『中庸章句』25章,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為貴.
- ↑ 『通書』 「誠上第一」, 元·亨, 誠之通.
- ↑ 『周易』 「乾卦·彖傳」,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 ↑ 『通書』 「誠上第一」, 利·貞, 誠之複.
- ↑ 『周易』 「乾卦·彖傳」,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
- ↑ 『朱子語類』94권, 問「動靜者,所乘之機。」 曰:「理撘於氣而行。」 ; 『朱子語類』94권, 問「動靜者,所乘之機」。曰:「太極理也,動靜氣也。氣行則理亦行,二者常相依而未嘗相離也。太極猶人,動靜猶馬;馬所以載人,人所以乘馬。馬之一出一入,人亦與之一出一入。蓋一動一靜,而太極之妙未嘗不在焉。此所謂『所乘之機』,無極、二五所以『妙合而凝』也。」“동정은 [태극이] 타는 기틀이다.”를 물었다. 답했다. “태극은 理이고, 동정은 氣이다. 기가 운행하면 리 역시 운행되니, 둘은 항상 의존하면서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태극은 사람에 비유할 수 있고 동정은 말에 비유할 수 있으니, 말은 사람을 싣고 사람은 말에 올라타는 것이다. 말이 한번 왔다 갔갈 때 사람 역시 이와 함께 왔다 갔다 한다. 대개 한번 동이 되고 한번 정이 될 때 태극의 오묘함은 그 안에 없던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는 바의 기틀이다.’라는 말이다. 無極과 陰陽·五行은 ‘신묘하게 결합하여 응결’된 것이다.”
- ↑ 『文集』41卷 「答楊子直一」, “蓋天地之間, 只有動靜兩端, 循環不已, 更無餘事, 此之謂易. 而其動其靜, 則必有所以動靜之理焉, 是則所謂太極者也. 聖人旣指其實而名之, 周子又爲之圖以象之, 其所以發明表著, 可謂無餘蘊矣. 原極之所以得名, 蓋取樞極之義, 聖人謂之太極者, 所以指夫天地萬物之根也. 周子因之, 而又謂之無極者, 所以著夫無聲無臭之妙也. 然曰‘無極而太極’·‘太極本無極’, 則非無極之後, 別生太極, 而太極之上, 先有無極也. 又曰‘五行陰陽’·‘陰陽太極’, 則非太極之後, 別生二五, 而二五之上, 先有太極也. 以至於成男成女化生萬物, 而無極之妙, 蓋未始不在是焉. 此一圖之綱領, 大易之遺意, 與老子所謂‘物生於有, 有生於無’, 而以造化爲眞有始終者, 正南北矣. 來喩乃欲一之, 所以於此圖之說多所乖礙而不得其理也. 熹向以太極爲體, 動靜爲用, 其言固有病, 後已改之, 曰: ‘太極者本然之妙也, 動靜者所乘之機也’, 此則庶幾近之. 來喩疑於體用之云甚當, 但所以疑之之說, 則與熹之所以改之之意, 又若不相似然. 蓋謂太極含動靜則可(以本體而言也), 謂太極有動靜則可(以流行而言也), 若謂太極便是動靜, 則是形而上下者不可分, 而易有太極之言亦贅矣.”천지의 사이엔 단지 動靜이라는 두 가지 단서가 끝없이 순환함만 있을 뿐 다른 일은 없으니 이것을 ‘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動靜에은 반드시 動靜하는 이치가 있기 마련이니 이를 ‘太極’이라고 합니다. 성인께서는 이미 그 실질을 지칭하여 이름 하셨고, 주돈이는 또 이로 인해 도를 그려서 형상화 시켰으니 그가 발명하여 드러낸 것에 더 이상 감춰진 것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極’이라는 명칭을 궁구해보자면 대개 ‘樞極’이라는 뜻에서 취해졌으니 성인께서 이를 太極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천지만물의 근본임을 지칭한 것입니다. 주돈이가 이에 기인하여 또 ‘無極’이라 한 것은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없이 작용하는 오묘한 작용’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無極而太極’이라 한 것은 無極의 뒤에 별도로 太極이 생겨난다는 말이 아니고, 太極의 위에 먼저 無極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또 ‘五行陰陽’ ‘陰陽太極’을 말한 것은 太極의 뒤에 별도로 陰陽과 五行이 생겨난다는 말이 아니고, 陰陽과 五行 위에 먼저 太極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남자를 이루고 여자를 이루어서 만물을 화생시킨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無極의 신묘함이 대개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태극도설의 강령이고, 주역의 남겨진 뜻이니 노자가 ‘만물은 有에서 생겨나고,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라고 말하여 조화의 과정에 시작과 끝을 상정한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이를 하나로 보려고 하셨으니, 도설의 설에 막히는 부분이 많아 그 이치를 얻지 못한 까닭입니다. 저는 일전에 太極은 體라 여기고, 動靜은 用이라고 여겼는데 이 말에는 진실로 병폐가 있어서 훗날 개정하며 ‘太極이란 본연의 신묘함이고, 動靜이란 타는 것의 기틀이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거의 이치에 가까운 듯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體用이라는 말이 의심스럽다고 하셨는데 매우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의심하신 말과 제가 이를 개정한 의도에는 또 비슷하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대개 太極이 動靜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가하고(이는 본체로 말한 것이다.), 太極에 動靜이 있다고 말해도 가하지만(이는 유행으로 말한 것이다.) 만약 太極이 곧 動靜이라고 말한다면 형이상과 형이하를 구분할 수 없게 되니 ‘易有太極’이라는 말이 또한 군더더기가 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