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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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眞平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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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시대 | 고대/삼국 |
성별 | 남 |
생년 | 미상 |
몰년 | 632년 |
관련사건 | - |
대표관직 | 왕 |
개요
- ?∼632(진평왕 54). 신라 제26대 왕.
인물 정보
- 재위기간은 579∼632.
-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다.
-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했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했다고 한다
생애
-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이것은 관제(官制)의 정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해 일체의 국정을 맡겼다.
-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581년에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었다.
- 같은 해에 또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다.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 진평왕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金龍春)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 상사서(賞賜署)와 대도서(大道署)에 대정(大正)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 584년에 건복(建福)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한편,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 진평왕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求法行)과 귀국행(歸國行)이 빈번하게 있었다.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뤄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 진평왕 7년(585)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로 구법을 위해 떠났던 고승 지명(智明)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上軍)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大德)이 되었다.
-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圓光)은 600년에 조빙사(朝聘使)인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과 함께 귀국하였다.
-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曇育)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入朝使) 혜문(惠文)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종교적인 불사(佛事)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사(國家事)에도 참여함으로써 이 시기의 불교는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 진평왕대에는 진흥왕대의 고구려·백제지역에 대한 영역확장 결과, 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양국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 : 지금의 전라북도 雲峰)으로 공격해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침입해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원광(圓光)에게 <걸사표 乞師表>를 짓게 하여,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 이 후에도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 : 지금의 전라북도 운봉)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速含城 : 지금의 경상남도 咸陽)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무렵 신라는 수나라를 이어서 618년에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인해 당나라에 대한 외교통로가 막히게 되었음을 호소하였다.
-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朱子奢)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 한편, 628년에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金舒玄)·김유신(金庾信)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을 공격하게 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 재위 54년만에 죽었다.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국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클래스
- 인물
- 인물-왕
관련 문서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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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 A는 B에 기록되어있다 | 삼국사기, 삼국유사 |
진평왕 | A는 B에서 전투하다 | 북한산성 |
기여
- 김현종, 20160606, draft v1.0 제작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진평왕[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