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문동
기본 정보
- 서울특별시 도봉구 소속으로 동쪽으로 창동, 서남쪽으로 수유동, 북쪽으로 방학동과 인접
- 면적 2.80㎢
- 인구
쌍문1동 쌍문2동 쌍문3동 쌍문4동
- 위치
- 특징
상권(초록:도시 재생 및 신규 개발 상권, 노랑:신규 창업 우세지역)
지역명 유래
- 현재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은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 죽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아들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을 2개 세운 데에서 '쌍문'이 되었다.'
- 현 창동 우체국 부근에 열녀문이 2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
- 쌍갈래 길에 이문이 있었으므로 쌍갈 무늬가 쌍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행정구역상의 변화
- 조선시대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 자연 촌락
-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쌍문·방학·창·도봉동 지역은 양주군 노해면으로, 미아·번·수유 지역은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
-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
- 1973년: 대통령령 제6548호(1973.3.12공포) 성북구에서 도봉구 분리신설함과 동시에 도봉구로 편입
- 1980년: 쌍문 1동을 3동으로 분동
- 1991년: 쌍문 2동을 쌍문4동으로 분동
지역인물
- 함석헌(1901-1989)
사상가, 인권운동가, 독립운동가, 종교인, 시인, 역사가이며 교육자.
1919. 3.1운동 참여 후 학업 중단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귀국 후 오산고등학교 보통 교사로 활동하다 계우회 사건, 성서조선 사건,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함
1947. 월남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면서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함
1989.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병원에서 별세
작품 활동: <사상계>(1956),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 <씨알의 소리>(1970)
- 전태일(1948-1970)
1964. 평화시장에서 미싱사 보조로 취직
1967. 재단 보조 등을 거쳐 재단사가 됨.
이후 열악한 노동환경, 임금문제, 기업주의 횡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이라는 책을 구입해 읽음
1969. ‘바보회’ 모임을 가짐.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해고되어 평화시장에서 쫒겨남
1970. 다시 재단사로 취직하여 옛 바보회 사람들 사람들과 함께 '삼동친목회'를 만들어서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
받아들여지지 않자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실자살하였으며 이는 흔히 한국 노동운동을 10년 이상 앞당겼다는 평을 듣고 있음
당시 그는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에 살았으며 현재는 재개발되어 쌍문동 삼익세라믹 아파트로 바뀜
지역 변화
-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마제석토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때부터 농경 생활을 하면서 마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
-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면 해등천 지역이었으며 농경지, 내시묘 지역
- 1900-1999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시에 공산군이 침입해오자 국군이 수도 서울의 최후 방어선으로 창동과 함께 쌍이문 구릉 지대에 연대 병력 배치하여 창동 저지선 일익 담당
-60년대 이후 판자촌 형성
- 2000-2010
베드타운 형성 및 공기 오염도 상위 지역
- 2010-
-2015. 둘리뮤지엄 개관
-2017.서울 최초 경전철 우이신설선 신설
-역사문화관광벨트 형성
-미디어를 활용한 코스 제작
-쌍리단길
위치: 쌍문역 2번 출구
- 쌍문동 배경의 작품
-1983.아기공룡 둘리
-응답하라1988
-'추억의 장소', 레트로 이미지 확산
- 향후 사업
쌍문동 3번 출구 및 쌍문시장 일대 복고풍 맛집거리로 만들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