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가로서의 정몽주
현종이후로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나 유목민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고종 이후로는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다시 불교가 호국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불교를 허구적인 환상(극락)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존재라고 보고 유교(성리학)의 진흥과 장려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반 사대부로 하여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거해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5대조까지 제사지내도록 의무화 하였으며, 성균관의 유생 수를 늘리고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을 추가로 설립하여 교육진흥을 꾀했다. 성균관과 5부 학당을 통해 그는 성리학 이념을 보급시키는 한편으로 지역에도 향교와 서당과 서원을 적극 장려, 향교, 서원, 서당 등을 통해 성리학 이념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 이숭인 등은 향리에 내려가 지역사회에 성리학을 보급시켰고, 이들이 향촌의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세조 때부터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세조 때 김종직이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종 때는 훈구파에 필적하는 정치적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로 희생되나 중종 반정 이후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에는 일부 사림이 훈구파와 야합하여 신진 사림파를 축출하기도 했으나, 중종 말기에 가서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색의 문인으로, 정도전과 동문수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라서게 되었다. 학문상으로 세종대왕은 그의 손제자가 된다. 정몽주의 제자는 길재, 이숭인, 권우 등으로 권우는 후에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고,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태두를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