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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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0817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6월 16일 (금) 11: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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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서유기(西遊記)』는 초당 때의 승려 현장(玄奘, 600~664)의 서천취경(西天取經, 천축에서 불경을 가져옴)의 역사적 사실을 제재로 한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도 『수호전(水滸傳)』,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마찬가지로 오랜 동안 민간에 유전되어 오다가 작가에 의해 창작되었다. 현장은 당 태종 정관(貞觀) 1년(627) 8월, 그의 나이 28세 때 장안을 출발하여 정관 19년(645) 1월 귀환하기까지, 17년 동안 1백여 나라를 온갖 고난을 겪으며 경유하고, 마침내는 불교 경전 600여 부를 가지고 돌아왔다.

현장은 귀국 후에 현종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따라서 이 이야기는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때에 보고 들은 서역, 인도의 기후, 풍토, 언어, 습관, 미술, 전설 등의 구술을 그의 제자인 변기(辯機)가 기록하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로 펴냈다.

그처럼 역경을 극복하고 불경을 가져온 것은 중국 불교사상 위대한 사건으로, 사건 자체가 신기한 색채가 농후하며 널리 전파됨으로써 차츰 신화화되었다. 그래서 송나라 때 '설경(說經)' 하는 사람 중에는 이 취경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존하는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가 바로 그 설화인의 화본이었다.

이 화본이 비록 구성이나 문장면에서 거칠고,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하지만 후행자(猴行者), 즉 '화과산(花果山) 수렴동(水帘洞) 팔만사천(八萬四千) 동두철액(銅頭鐵額) 미후왕(美猴王)'이 백의수사(白衣秀士)로 변신하여 현장의 서천 취경을 보호하는 내용과 취경길의 항요복괴(降妖伏怪)의 이야기들은 원나라 때에 더욱 발전하여 무대 희극으로 연출되었다.

금원본(金院本)인 무명씨의 『당삼장(唐三藏)』, 원의 잡극인 오창령(吳昌齡)의 『당삼장서천취경(唐三藏西天取經)』 등이 그것이다.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극본은 원말 명초 때의 사람인 양경현(楊景賢)의 『서유기잡극(西遊記雜劇)』으로 모두 6본 24절로 되어 있다.

이와 동시에 현장의 서천 취경의 이야기는 민간 설화인의 화본 소설로 발전하여, 원말에는 『서유기평화(西遊記平話)』가 출현하였으나 이 화본은 전해 오지 않으며, 다만 『영락대전(永樂大典)』에 "위정몽참경하룡(魏征夢斬涇河龍)"이라고 쓴 약 1,200여 자의 문장이 남아 있다. 조선(朝鮮) 시대의 한어교과서(漢語敎科書)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도 『당삼장서유기(唐三藏西遊記)』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다. 오승은(吳承恩)은 이와 같이 몇백 년 간 민간에 유전되어 오던 당 승의 '서천취경' 전설, 화본을 기초로 하여 오늘날의 100회본의 『서유기(西遊記)』를 창작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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