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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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은 우왕의 심복인 최영이 이성계를 끌어들여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해였다. 우왕의 왕권을 위협하던 집권세력인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이 제거되고, 우왕의 왕권을 지지하는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이제는 권력의 핵심에서 신진사대부(개혁 성향 선비그룹)의 뒷심으로 되어가는 이성계의 제거였다.
마침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가 생겨나 요동 정벌이라는 정치적 빌미가 생겼다. 하지만 공민왕 시대부터 성리학에 의한 정치적 개혁을 외치면서 우왕의 사부였던 이색(李穡, 1328 ~ 1396)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에 오른 신진사대부가 이성계에게는 우호적인 데 비해 최영에게는 적대적이었다. 변수는 여기서 갈라져 작용하고 있었지만 우왕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왕은 서경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24일(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6월 11일(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과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6월 26일(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송도(松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반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7월 4일(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고양)에 귀양 갔으며,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