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 토우
아차산성 토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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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삼국시대 |
발견지 | 아차산성 A지구 |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 |
개관
아차산성 토우는 아차산성 A지구 기단건물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사람모양의 소형토우로 몸체는 없어지고 얼굴과 어깨 일부만 남아있다. 현재 높이는 약 3cm가량으로 점토를 빚어서 만들었다.
토우의 얼굴은 비교적 길고 갸름하며,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뒤쪽으로 운두가 솟아오른 관모를 쓰고 있으며 볼과 턱에는 관모를 묶은 끈이 음각으로 묘사되어있다. 머리 위쪽 관모의 가운데에는 작은 구멍이 수직으로 뚫려 있는데 깃과 같은 작은 물체를 끼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
아차산성 토우와 [[[아차산성 철제초두]]
삼국사기권제5 신라본기第5 661년 신라 태종무열왕8년에 고구려가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북한산성을 공격했는데, 이때 성안에 남녀 2,800명이 있었으며, 적을 물리친 공으로 성주 冬陁川의 관등을 大奈麻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아차산성 A지구 기단건물지에서 출토된 관모를 착용한 아차산성 토우와 아차산성 철제초두는 아차산성이 중요한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2-33쪽
高句麗將軍惱音信與靺鞨將軍生偕合軍來攻述川城不克移攻北漢山城列抛車飛石所當陴屋輒壞城主大舍冬陁川使人擲鐵蒺蔾於城外人馬不能行又破安養寺廩廥輸其材隨城壞處卽構爲樓櫓結絙網懸牛馬皮綿衣內設弩砲以守時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城主冬陁川能激勵少弱以敵强大之賊凡二十餘日然糧盡力疲至誠告天忽有大星落於賊營又雷雨以震賊疑懼解圍而去王嘉獎冬陁川擢位大奈麻’
이 기사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아차산성에는 2,800여명의 신라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신라 17관등 중 11위에 해당하는 나마(奈麻)또는 10위에 해당하는 대나마(大奈麻)관등의 성주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문헌기록을 통해 볼 때 현존하는 아차산성은 7세기 중엽에 2천 8백여 명의 신라인이 거주할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668년 고구려 정벌 당시 신라군의 중진(重鎭)[3]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종택,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과제」, 『사총』, 제 81집, 2014, 32-33쪽.
지도
클래스
- 사물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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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토우 |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 아차산 |
아차산성 토우 |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
아차산성 토우 |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아차산성 토우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아차산성 토우 | A는 B에 만들어졌다 | 고구려시대 |
갤러리
주석
- ↑ 아래 사진출처: 임효재 외, 『아차산성 시굴조사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광진구, 2000, 6쪽.
- ↑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123쪽.
- ↑ 국가의 방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한 군진(軍鎭)을 뜻함.
- ↑ 사진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6쪽.
- ↑ 그림출처: 최종택,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과제」, 『사총』, 제 81집, 2014, 25쪽.
기여
- 김지선: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