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우
최운우(崔雲遇) | |
대표명칭 | 최운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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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崔雲遇 |
출생일 | 1532년 6월 5일 |
사망일 | 1605년 5월 22일 |
본관 | 강릉(江陵) |
호 | 도경(蹈景) |
자 | 시중(時中)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최교수(崔敎授) |
모 | 진주강씨 참봉 준지의 딸 |
최운우(崔雲遇, 1532년 6월 5일 ~ 1605년 5월 22일)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7세 때 아이들이 앞 냇가에서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몰래 거두어 놓아주었다. 지나던 스님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선생을 안아서 바위 위에 앉히고 재배하고 갔으니, 그 인자하고 사랑스런 성품은 능히 사람을 감복하게 하는 점이 있었다. 12세때 참판 김광진에게서 대학을 배월때, 하루종일 말로써 가르쳐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책을 반쯤 읽고서야 대의를 깨달았고, 1년이 거의 되어 능히 달통하여 정밀하게 되었다. 명종 임자년 나이 21세 때 생원에 입격하고, 근궁에 출입할 때에 한결같이 정리 조사하고 힘써 행함을 위주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올때 성산 이회재가 글로써 송별하며 지극히 애모의 정으로 그대는 진실로 나의 스승입니다 라고 하였다. 갑인년에 퇴계 이문순공을 도산에 가서 도를 듣고 돌아왔다. 강릉에는 서원이 없다고 탄식하며, 병진년(1556)에 칠봉 함헌과 함께 구산에 사우를 창건하여 공자의 진영을 모셔놓고 후학들로 하여금 뜻을 품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하였다. 퇴계가 선생을 일러, 부지런히 힘쓰면서도 재능을 숨기고 감추어서 남의 지목을 피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임술년(1562)에 생부상을 당하고 이듬해에 또 후부상을 당하여 4년을 여모살이를 하였는데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이때 거처하던 여묘를 망극암이라 하였다. 선조 신미년(1571) 겨울에 천거하여 선공감역을 제수하니, 어버이의 늙음을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유년(1573)에 또 선원전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정축년(1577)에 강릉참봉을 제수하였는데, 이때 후모 최씨의 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늙어서는 깊이 돈후하여 비록 한가하고 일이 없을때라도 몸가짐은 단정하였으며 의관은 가지런히 하였다. 독서와 사색을 할때에는 오히려 미치지 못할가 드려워 했으며, 부지런함에도 힘서 소양을 갖추어 점점 익숙하게 했다. 또 덕망있는 벗들을 학문이나 덕으로 감화시키니, 한 때는 여러 선비들이 동중서나 가의와 같은 명망 있는 학자처럼 추앙하면서 선생보다 낫다고는 감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른 벼슬길에 나감에 있어 열번 관직을 천거받았으나 많이 나아가지 않았고, 또한 취임하여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대개 고향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하려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지, 녹봉을 받기 위한 뜻이 아니었다.
인조 23년(1645)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여담
조부 세건은 비안현감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교수 담과 진사 호를 낳았다. 진사공이 아들이 없어 선생이 그 양자가 되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