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콘텐츠제작노트(양루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05번째 줄: | 105번째 줄: | ||
==특색 음식== | ==특색 음식== | ||
+ | **카오야 | ||
+ | *[[File:2014082001810_0.jpg]] | ||
+ | 우리에게는 ‘베이징덕’, 혹은 ‘북경 오리구이’로 알려진 ‘베이징 카오야(北京烤鴨)’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 전통음식이다. 서구에서는 ‘페킹 덕(Peking Duck)’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카오야는 원래 베이징이 아닌 난징(南京)의 요리에서 출발하였다. 600년 전 왕서방이라는 사람이 ‘편의방’이라는 오리구이 식당을 차리면서 난징의 향토음식으로 성장한 카오야는 베이징으로 수도가 천도가 되면서 황제가 즐겨 먹는 궁중요리인 베이징 카오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카오야의 ‘카오(烤)’는 굽는다는 뜻이고 ‘야(鴨)’는 오리라는 뜻으로 ‘구운 오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오리를 구울 때는 오리를 불 위에 걸어놓고 장작을 태워 굽는 방식인 전취덕 방식과 오리를 화덕에 넣어 굽는 방식인 편의방 방식이 있다. 카오야는 오리의 껍질과 고기를 밀전병에 싸먹으며, ‘야장’이라는 소스와 파나 오이채를 같이 얹어 먹으면 된다. 카오야로 유명한 베이징 내의 레스토랑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은 전취덕(全聚德, 취엔취더)과 대동(大董, 따뚱)이 있다. | ||
+ | **딤섬 | ||
+ | *[[File:다운로드.png]] | ||
+ | 중화요리 중 하나인 딤섬(點心). 딤섬이라는 말은 점심이라는 뜻을 가진다.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순 없지만, 중국에서는 소량의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차와 함께 맛보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하며 베이징에서는 흔히 ‘바오쯔(包子)’라 부른다. 얇은 만두피에 야채와 고기, 해물 등을 소로 넣어 만든 후 대나무 찜통에 쪄내는 것이 특징인데, 안에 육즙이 가득 들어있어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부분 사람들의 입맛에도 잘 맞으며 맛있어서 중국의 딤섬 레스토랑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상하이에서는 이를 ‘샤오롱바오(小笼包)’라 부르는 것이 특징이며 딤섬은 광동요리 전문점에 가면 쉽게 맛볼 수 있다. | ||
+ | **훠궈 | ||
+ | *[[File:슬라이드13.jpg]] | ||
+ |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火锅)’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좋은 요리이다. 훠궈는 중국의 긴 역사를 함께했고, 현지인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음식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핫팟(Hot Pot)이라 부른다. 베이징에서는 훠궈 요리집을 거리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훠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샤브샤브를 먹는 방식과 같은데, 펄펄 끓는 진한 육수에 양고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담가 살짝 익혀 먹으면 된다. 그 외 온갖 해물, 채소 등을 곁들여 먹을 수 있다. 훠궈는 지역이나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나는데, 소스는 마장이라 불리는 땅콩소스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 중국 전통의 훠궈맛을 느끼고 싶다면 탕의 색이 붉은 것(辣汤)을 선택하면 되고, 무난하게 즐기고 싶다면 맑은 탕(清汤)을 선택하면 된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느껴보고 싶다면 혼합 탕도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즐겨보자. | ||
+ | **자장몐 | ||
+ | *[[File:cc44ead0f5d249e1902deb89f3d1c4be.jpg]] | ||
+ | 우리나라 사람들과도 너무나도 친숙한 요리인 자장면. 중국어로는 '자장몐(炸酱面)'이라 부른다. 자장몐의 기원은 베이징에 있다. 우리나라의 자장면과는 달리 베이징 자장몐은 황장콩을 발효시킨 중국식 춘장을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장면과는 그 맛부터 다르다. 중국의 자장몐은 곱게 채를 썬 여러 종류의 야채를 얹어 춘장과 함께 비벼 먹는데, 그 맛은 우리나라의 자장면보다 짠 편이다. 야채는 콩, 콩나물, 버섯, 오이, 숙주 등 다양하니 본인의 입맛과 안 맞는 재료가 있으면 빼서 먹으면 된다. | ||
+ | |||
+ | |||
==손온톨로지== | ==손온톨로지== | ||
[[File:IMG_6373.JPG]] | [[File:IMG_6373.JPG]] |
2019년 6월 11일 (화) 17:24 판
주제
내 고향 China, Beijing
주제선정의 이유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당^^ 우리 고향 어디 있는지, 얼마나 아른답지, 어떤 역사가 있는지 ..등 다 소개하고 싶습니당~!
고향 소개
北京(북경)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평야[華北平野] 북쪽 끝에 있으며, 동남쪽으로 보하이해[渤海]와 150㎞ 거리에 있다.
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의 수도였으며, 초기에는 '지[蓟]'라고도 불렸다. 후에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 나라 등을 거쳐 중화민국 초기의 수도로서 8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1928년 시(市)로 정하고 이름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명칭도 다시 '베이징'으로 고치고 수도로 정해졌다.
면적은 16,808㎢이다. 행정구역은 둥청구[東城區]·시청구[西城區]·충원구[崇文區]·쉬안우구[宣武區]·하이뎬구[海淀區]·차오양구[朝陽區]·펑타이구[豊台區]·스징산구[石景山區]·팡산구[房山區]·먼터우거우구[門頭溝區]·퉁저우구[通州區]·순이구[順義區]·창핑구[昌平區]·다싱구[大興區]·화이러우구[懷柔區]·핑구구[平谷區]등 16개 구와 옌칭[延慶]·미윈[密雲] 등 2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와 대외 교류의 중심지이며 국제화된 대도시다.
1929년 교외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된 60만~23만 년 전의 베이징원인[北京原人] 화석을 통하여 불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북방을 포함한 전국의 정치·문화·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인재가 흥성하여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원나라 희곡의 4대 작가 중 마치원(馬致遠)·관한경(關漢卿)·왕실보(王實甫) 등 3명이 이곳 출신이며, 《낙타샹쯔[駱駝祥子]》로 유명한 현대 소설가 라오서[老舍]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이징 [Beijing, 北京(북경)] (두산백과)
인문
- 량치차오
- 청말민초의 중국의 언론인, 정치가, 저술가. 한국식 독음은 양계초다. 그의 고향말인 광둥어로는 룅카이치우(Lèuhng Kái-chīu)
1873년 청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수재(秀才)를 거쳐 15살에 향시(鄉試)에 합격, 거인(擧人)이 된다. 이때 베이징에서 내려온 감독관이 그의 총명함을 알고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주는데, 베이징의 처가는 량치차오가 훗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때 의사소통부터 도움을 줬다. 량치차오는 광둥어가 심해 음식점에서 주문도 못할 정도였다.
량치차오는 향시에 합격한 이후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가 된다. 1898년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한다. 당시 겨우 25세이었다. (광서제 항목 참조).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이후 1912년까지 14년 동안 중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망명 이후 강력한 서구식 근대화를 주장하며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蠻報)> 등 잡지를 발행했는데 특히 신민총보는 3만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당대 중국의 최고 판매량을 갱신하기도 했다.
한편 1900년도 즈음에는 역시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쑨원과 만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두 거물 망명객이 힘을 합쳐 중국을 변화시키기를 바랬고 량치차오도 이에 긍정적이었지만 두 사람의 합작은 결국 실패했다. 캉유웨이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데다가 량치차오는 1903년경부터 폭력적인 혁명이 중국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2] 일반적인 입헌군주제보다 좀 더 보수적인 개명전제(開明專制) 및 청조 주도의 헌법 제정을 주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였다. 망명 당시의 량치차오 사진과 당시 일본 사회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담론을 편집한 『음빙실문집』(1903)
신해혁명(청나라 멸망) 후에 40대로 인생의 리즈시절을 맞아 의회운동의 당수, 사법총장, 재무총장 등을 맡으며 잠시 위안스카이와 연정하여 진보당을 이끌며 국회 내부의 정치를 이끌었다. 하지만 1913년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을 연이어 일으키자 점점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1914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저지르고 1915년에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차이어, 탕지야오, 리례쥔 등과 합세하여 호국전쟁을 주도했다.
이후에는 돤치루이와 연합해 장훈복벽도 반대했고 재정총장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예측하고 로비를 통해 연합국 줄서기를 이루어냈으며, 결국 그 덕분에 파리 강화 회의에도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량치차오는 군벌의 난립으로 무력화된 중앙정부를 보고 회의를 느껴 결국 정계를 은퇴한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유럽 여행 도중 그는 총리 돤치루이가 중국 남방 정벌을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칭다오 등 산둥의 이권을 넘겨주려 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의 폭로는 5.4운동으로 이어져 북양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귀국 이후 정계를 은퇴한 량치차오는 저서 《구유심영록(歐游心影錄)》에서 과학만능주의의 파산을 선언하며 "자연의 파괴보다 인간의 파괴가 더 심하고, 야만인의 파괴보다 문명인의 파괴가 더욱 더 심하다."라고 언급하였다. 은퇴 후 베이징, 톈진 일대에서 저술, 교육활동을 하다가 1929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1942년 중화민국 건국 및 호국전쟁에 참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서 표창이 내려졌다. 주요 저서로 《신민설(新民說, 1902~1906)》,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1920)》 등이 있다.
배경
- 건물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흉노족 등의 유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의 고대 진나라 때 기존의 성곽을 잇고 부족한 부분은 새롭게 축조하여 만든 거대한 성곽이다. 위키백과 주소: 중국 베이징 시 화이러우 구 길이: 69,541,273ft 완공: 1644년 직경: 69,541,273ft 영업시간: 영업 중 ⋅ 오후 5:30에 영업 종료 세계문화유산 등재지: 1987년
- 만리장성
자금성 자금성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으로 불리고 있으며, 1925년 10월 고궁 박물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주소: 4 Jingshan Front St, Dongcheng Qu, Beijing Shi, 중국 100006 완공: 1420년 영업시간: 현재 영업 중,전체 영업시간 추가 건축 양식: 중국 건축
- 자금성
천단 천단은 중국 베이징 직할시 충웬 구에 있는 사적으로, 명청시대 중국에서 군주가 제천의식을 행하던 도교 제단이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것은 황제의 연례행사였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주소: 1 Tiantan E Rd, Dongcheng Qu, Beijing Shi, 중국 100068 건축: 영락제 세계문화유산 등재지: 1998년
- 천단
- 베이징 국가수영센터, 다른 말로 수이리팡, 워터 큐브는 베이징 국가체육장 옆에 있는 수영 경기장이다. 베이징 국가수영센터는 2008년 하계 올림픽의 주요 수영 종목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쓰인다. 올림픽 공원 내에 지어져 있다.
주소: 11 Tianchen E Rd, Chaoyang Qu, 중국 100875 좌석수: 6000석 완공: 2008년 1월 28일 시공: 2003년 12월 24일 건축 양식: 해체주의 건축
- 베이징 국가수영센터
중국 베이징
- 물건
- 민간 기념품
- 종이 자르기
- 팬더 문양의 다양한 공예품
- 오래된 베이징 꽃차
- 지역
- Beijing
- 사건
- 5.4운동
- 1840년 아편전쟁 이래로 중국 국민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봉건주의 압박에 반대하여 70여년 동안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태평천국봉기 의화단운동 신해혁명 등을 비롯한 그들의 민족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실은 반식민지, 반봉건 상황에 처해 있던 중국의 농민계급이나 자산계급의 영도하에서는 혁명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무산계급은 근대공업의 발달과 함께 탄생되었다. 1870년을 전후하여 중국의 산업노동자들은 1만명도 되지 않았으나, 1919년 '5 4운동' 직전에는 이미 200만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중국의 공업 무산계급 수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생산력을 대표하는 세력이면서 가장 진보적인 계급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10월혁명이 발발하여 무산계급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하였다.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하에서 중국에서는 이대교(李大釗), 진독수(陳獨秀),모택동 등과 같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지식인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무산계급혁명을 선동하였다.
새로운 정세와 혁명사상의 영향으로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는 철저한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혁명운동이 발발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5 4운동(五四運動)'이다. '5 4운동'은 먼저 북경대학의 학생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3천여명이 천안문광장에 집결하여 중국 정부의 대표가 '파리강화조약'에서 국가의 주권 포기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였다. 항의시위가 북양군벌(北洋軍閥) 정부의 진압을 받게 되자 중국민들의 분노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리하여 북경에 이어 상해(上海) 등 주요 도시의 노동자 학생 상인들도 모두 동맹파업을 하면서 대규모의 항의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북양군벌 정부는 하는 수 없이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3명의 매국노를 관직에서 파면시키고 "파리강화조약"의 서명을 거절하게 됨으로써 5·4운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5 4운동'은 중국 무산계급의 거대한 혁명역량을 최초로 드러낸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혁명운동의 결합을 촉진시켜 중국공산당의 탄생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1921년 7월, 모택동(毛澤東)과 동필무(董必武)를 비롯한 몇몇 혁명가들은 전국 각지의 공산주의 그룹을 대표하여 상해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第一次全國代表大會)를 개최하여 중국공산당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중국의 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5 4운동'은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구분하고 구민주주의 혁명과 신민주주의 혁명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목적
- '여러분들에게 Beijing를 선전하고싶다
- '제가 아는 정보를 제공하다, Beijing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당~
특색 음식
우리에게는 ‘베이징덕’, 혹은 ‘북경 오리구이’로 알려진 ‘베이징 카오야(北京烤鴨)’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 전통음식이다. 서구에서는 ‘페킹 덕(Peking Duck)’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카오야는 원래 베이징이 아닌 난징(南京)의 요리에서 출발하였다. 600년 전 왕서방이라는 사람이 ‘편의방’이라는 오리구이 식당을 차리면서 난징의 향토음식으로 성장한 카오야는 베이징으로 수도가 천도가 되면서 황제가 즐겨 먹는 궁중요리인 베이징 카오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카오야의 ‘카오(烤)’는 굽는다는 뜻이고 ‘야(鴨)’는 오리라는 뜻으로 ‘구운 오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오리를 구울 때는 오리를 불 위에 걸어놓고 장작을 태워 굽는 방식인 전취덕 방식과 오리를 화덕에 넣어 굽는 방식인 편의방 방식이 있다. 카오야는 오리의 껍질과 고기를 밀전병에 싸먹으며, ‘야장’이라는 소스와 파나 오이채를 같이 얹어 먹으면 된다. 카오야로 유명한 베이징 내의 레스토랑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은 전취덕(全聚德, 취엔취더)과 대동(大董, 따뚱)이 있다.
중화요리 중 하나인 딤섬(點心). 딤섬이라는 말은 점심이라는 뜻을 가진다.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순 없지만, 중국에서는 소량의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차와 함께 맛보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하며 베이징에서는 흔히 ‘바오쯔(包子)’라 부른다. 얇은 만두피에 야채와 고기, 해물 등을 소로 넣어 만든 후 대나무 찜통에 쪄내는 것이 특징인데, 안에 육즙이 가득 들어있어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부분 사람들의 입맛에도 잘 맞으며 맛있어서 중국의 딤섬 레스토랑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상하이에서는 이를 ‘샤오롱바오(小笼包)’라 부르는 것이 특징이며 딤섬은 광동요리 전문점에 가면 쉽게 맛볼 수 있다.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火锅)’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좋은 요리이다. 훠궈는 중국의 긴 역사를 함께했고, 현지인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음식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핫팟(Hot Pot)이라 부른다. 베이징에서는 훠궈 요리집을 거리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훠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샤브샤브를 먹는 방식과 같은데, 펄펄 끓는 진한 육수에 양고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담가 살짝 익혀 먹으면 된다. 그 외 온갖 해물, 채소 등을 곁들여 먹을 수 있다. 훠궈는 지역이나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나는데, 소스는 마장이라 불리는 땅콩소스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 중국 전통의 훠궈맛을 느끼고 싶다면 탕의 색이 붉은 것(辣汤)을 선택하면 되고, 무난하게 즐기고 싶다면 맑은 탕(清汤)을 선택하면 된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느껴보고 싶다면 혼합 탕도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즐겨보자.
우리나라 사람들과도 너무나도 친숙한 요리인 자장면. 중국어로는 '자장몐(炸酱面)'이라 부른다. 자장몐의 기원은 베이징에 있다. 우리나라의 자장면과는 달리 베이징 자장몐은 황장콩을 발효시킨 중국식 춘장을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장면과는 그 맛부터 다르다. 중국의 자장몐은 곱게 채를 썬 여러 종류의 야채를 얹어 춘장과 함께 비벼 먹는데, 그 맛은 우리나라의 자장면보다 짠 편이다. 야채는 콩, 콩나물, 버섯, 오이, 숙주 등 다양하니 본인의 입맛과 안 맞는 재료가 있으면 빼서 먹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