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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6일 (수) 10:38 판
영월 고씨동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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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80px]] | |
지정 번호 | 천연기념물 제219호 |
지정일 | 1969년 06월 04일 |
지정 명칭 | 영월고씨굴 |
한자 명칭 | 寧越 高氏洞窟 |
영문 명칭 | Gossigul Cave, Yeongwol |
분류 | 지질 |
건립·제작 | 약 4-5억년 전 |
주소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 1121-9 |
위도 | 37.131102 |
경도 | 128.536310 |
웹사이트 | 영월관광 |
Gossigul Cave
Gossigul Cave is located in Jinbyeol-ri, Hadong-myeon, Yeongwol-gun. The name “Gossigul” comes from the fact that a certain Go family took refuge in this cav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total length of this limestone cave is 3 km. It is speculated that the cave was formed about 4-5 hundred million years ago. Due to is extraordinary beauty, the cave is designated as Natural Monument No. 219.
정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에 있는 석회동굴. 규모(면적, 높이, 길이) 면적 28만 3,472㎡(지정구역), 총길이 3㎞이다. [1]
내용
- 영월 고씨굴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4∼5억년 전에 만들어졌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굴안의 온도는 연중 15℃ 안팎이며 수온은 5.3℃이다. 고씨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믿어왔던 갈로아 곤충이 서식하고 있다. 영월 고씨굴은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있고, 다른 동굴에 비하여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희귀한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2]
- 동굴의 발달방향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이며, 1966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74년 5월 15일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3]
명칭 유래
-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4] 이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을 모아 왜구에게 대항한 고종원 형제에 대한 이야기 이다. 강원도 영월군 진별리 여기에 고종원, 고종길, 고종경 삼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1592년 왜구가 쳐들어와 계속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9일 삼형제는 영남지방의 김성일과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크게 감격하였다. 자신들도 강원도 각 읍에 통문을 돌려 군량과 병기 및 쇠를 모으고 청장년을 모집하였다.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강원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에게 새로 모집한 관군 오백 명을 주어 흥원진까지 통솔해 가기를 명하였다. 흥원진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일본군이 남한강을 건너는 관문이었다. 군사를 통솔하여 가는 도중 고종경은 일부 도망친 군사들을 대신하여 다시 군사를 모았고, 통솔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제 시간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했다. 강원감사 유영길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의 백성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감사의 명령은 부당하다고 사면을 요청했고, 평창 군수 권두문이 이러한 사정을 원주 감영에 보고했지만 길이 막혀서 제 시간에 가지 못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을 사면한다고 명령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이후 유영길은 파면 당하였으나 영월 사람들은 고종경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는 의병에 참여하길 꺼려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 평창 군수 권두문은 평창군 응암리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영월은 이로써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을을 내주게 되었다. 살아남은 형제 고종원과 고종길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노리곡굴로 피난했다. 1592년 8월 17일 왜군은 강원도 영월까지 진입하고 남아 있는 농민들을 협박하여 피난민이 숨은 곳을 알아냈다. 18일 왜군은 뗏목을 타고 진별리 강을 건너 노리곡으로 집결하여 피난민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노리곡굴 입구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고종원의 아내 조씨 부인은 노리곡굴 안에 있는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고종원 형제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굴 밖으로 나와 포로가 되었다. 두 형제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9월 1일 두 형제는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영월로 돌아가던 길에 고종길은 잡혀서 죽고, 고종원은 포로가 된 지 이십 여일 만에 풀려나 영월로 돌아왔다. 그후 고종원은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피맺힌 사건을 『祈天錄(기천록)』에 기록해 놓았다.[5]
특징
석회암
- 고씨동굴은 전형적인 석회동굴이며,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구조를 보인다. 고씨동굴 내에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산호, 유석, 커튼과 동굴진주, 피솔라이트, 동굴방패, 곡석, 월유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분포하고 있으며, 기형종유석도 여러 지점에서 성장한다. 특히 고씨동굴의 특징적인 동굴생성물은 흑색의 동굴산호호서 동굴산호는 동굴수의 공급이 멈춘 석순과 유석 위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흑색의 동굴생성물은 비공개 구간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동굴생성물이 흑색을 띠는 이유는 동굴수 내에 토양으로부터 공급된 유기물의 영향이다.[6]
서식생물
- 고씨굴에는 총 68종의 다양한 동굴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씨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굴생물은 진동굴 생물 13종, 호동굴 생물 14종, 외래성동굴 생물 41종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고씨동굴 천장에는 현재 관박쥐, 관코박쥐, 물윗수염박쥐, 황금박쥐 등이 서식하고 있다.[7]
위치
갤러리
@사진추가예정
주석
- ↑ "영월고씨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04월 05일.
- ↑ "영월 고씨굴", 『문화재검색』 OnLine , 문화재청. 2017년 04월 05일.
- ↑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 OnLine , 문화관광과. 2017년 04월 05일.
- ↑ "고씨굴", 『한국지명유래집』, 국토정보지리원. 2017년 04월 05일.
- ↑ "고종원 형제의 활약", 『문화원형백과』 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2017년 04월 13일.
- ↑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 OnLine , 문화관광과. 2017년 04월 05일.
- ↑ "고씨굴(高氏窟)", 『Young World』 OnLine , 문화관광과. 2017년 04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