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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위제 | + | ==남경천도와 『신지비사』== |
− |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은, 삼각산이라는 곳은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仙境으로서 거기서 시작한 花脈(산맥)은 세 겹 내지 네 겹으로 갈려 나와(三角山·文殊峰·普賢峰·白岳 등) 산이 산을 등지고 명당(서울)을 지키고 있으며, 案前의 朝山은 다섯 겹 또는 여섯 겹을 이루고(冠岳·牛眠·狐峴·淸溪·鶴峴·葛山 등), 방계·직계의 姑山·叔山·父山·母山은 모두 솟아나서 이를 옹호하고, 內水口·外水口에는 각각 충실히 주인을 지키는 세 개의 犬山이 있고(내수구 즉 내문은 往十里·馬場里, 沙斤里 부근을 말한 듯하고, 외문 즉 외수구는 한강 하류방면을 지칭한 듯함), 좌우의 청룡·백호는 세력이 비슷하니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으며, 내부의 商客과 寶貨가 이 곳으로 모여들어 국왕을 돕고, 임자년중에 이 땅을 개척하면 정사년에는 聖子를 낳을 것이고 또 삼각산에 의지하여 帝京을 세운다면 9년 만에 4海로부터 조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다.0328)
| + | ≪신지비사≫의 내용은, 3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하고, 오덕구(五德丘)(지금의 서울)를 저울의 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의 증판으로 삼아서 머리와 꼬리가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왕업이 쇠퇴하여 기울어지리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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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신지비사≫의 내용은, 3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하고, 五德丘(지금의 서울)를 저울의 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의 증판으로 삼아서 머리와 꼬리가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왕업이 쇠퇴하여 기울어지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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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경천도론을 펼 때 김위제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란 새로운 예언서를 인용해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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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유달리 한시를 즐겼다. 그런 까닭에 예언서마저도 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달리 말해,‘삼각산명당기’는 고려중기 귀족문화의 산물이다. 신라 말에 저술된 예언서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이 예언서는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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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각산명당기’를 이용해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뚜렷이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는 삼각산의 지세를 검토한 결과 명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물샐틈없이 방어되고 있으므로, 이곳에 왕궁 터를 정하면 절대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또한 청룡과 백호의 모양으로 점쳐 볼 때 신하들 사이에도 파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안과 바깥의 장사꾼이 각기 보배를 바쳐” 왕실의 재정도 풍부해진다고 보았다.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고,“재상(輔國)과 바른 임금(匡君)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국정운영이 순조롭다고 예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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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시기도 못 박아 두었다.“임자 년에 만일 궁전 지을 공사를 시작하면, 정사 년에는 성스러운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성군(聖君)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삼각산에 의지하여 황제의 서울을 지어라. 아홉 해만에 사해가 조공을 바쳐 온다.” 했다.(‘고려사’, 권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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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호에선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다루었다. 그것이 ‘정감록’에 예언된 계룡산천도론의 모태가 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제 알고 보니 김위제는 묘청보다 한 세대 앞서 천도론을 폈다. 물론 묘청의 주장은 좀더 새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사해조공설(四海朝貢說·천하가 고려에 복종한다는 뜻)을 폈던 점에서 묘청은 김위제의 남경천도론을 계승한 셈이다. 국운상승의 힘을 천도론에서 찾은 점에서 김위제는 ‘정감록’의 보다 심원한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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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지비사』관련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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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삼국유사』]] 권제3, 흥법 3 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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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v style="font-size:10pt;color:grey;margin: 20px 20px 20px 20px;">『신지비사』의 서문을 인용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언급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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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고려사(高麗史)』]] 권122, 열전35 [[김위제|김위제(金謂磾)]]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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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v style="font-size:10pt;color:grey;margin: 20px 20px 20px 20px;">≪신지비사≫에 이르기를, “(삼경을)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과 신령의 보호를 입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비유로 들은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은 쇠퇴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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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은 저울을 가지고 3경(三京)을 비유한 것입니다. 저울접시는 머리이며, 저울추는 꼬리이고, 저울대라는 것은 〈균형을 잡기 위해〉 끌어당겨 총괄하는 곳입니다. 송악(松嶽)은 부소이니 비유하자면 저울대이며, 서경(西京)은 백아강이니 비유하자면 저울머리이며,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언덕으로 비유하자면 저울추입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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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스'''== | | =='''클래스'''== |
≪신지비사≫의 내용은, 3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하고, 오덕구(五德丘)(지금의 서울)를 저울의 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의 증판으로 삼아서 머리와 꼬리가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왕업이 쇠퇴하여 기울어지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