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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은 평소 흥이 나면 시를 읊곤 하였는데 『동국문장(東國文章)』에서 박수량의 시를 평하여 “고삐와 재갈을 풀어놓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하였다. 경포대에는 박수량이 쓴 오언절구의 판상시가 걸려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박수량은 평소 흥이 나면 시를 읊곤 하였는데 『동국문장(東國文章)』에서 박수량의 시를 평하여 “고삐와 재갈을 풀어놓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하였다. 경포대에는 박수량이 쓴 오언절구의 판상시가 걸려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 | 위수 북쪽 땅의 축이 기울어져 형주 남쪽 동정호를 잃었다네. 떨어져 나온 악양루 한쪽 귀퉁이가 떠돌다가 동해에 떨어졌네.(渭北傾坤軸, 荊南失洞庭. 岳陽樓一角, 漂泊落東溟.) | + | '''위수 북쪽 땅의 축이 기울어져 형주 남쪽 동정호를 잃었다네. 떨어져 나온 악양루 한쪽 귀퉁이가 떠돌다가 동해에 떨어졌네.(渭北傾坤軸, 荊南失洞庭. 岳陽樓一角, 漂泊落東溟.)''' |
− | 또 박수량은 당시 가장 큰 문제이던 토지 소유 불균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 13) 5월, 중종이 천거인들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토지제도의 개혁 즉 균전법 시행을 건의 주장하였다. 후일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는데 중종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 중종이 “순임금 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박수량은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 맛이 썼으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단 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또한 어찌 고금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고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탄복하였다. | + | 또 박수량은 당시 가장 큰 문제이던 토지 소유 불균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 13) 5월, 중종이 천거인들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토지제도의 개혁 즉 균전법 시행을 건의 주장하였다. 후일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는데 중종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 중종이 “순임금 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박수량은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 맛이 썼으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단 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또한 어찌 고금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고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탄복하였다. |
==사후 추모사업== | ==사후 추모사업== |
2022년 9월 30일 (금) 15:48 판
박수량(朴遂良) | |
대표명칭 | 박수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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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朴遂良 |
출생일 | 1475년 |
사망일 | 1546년 |
본관 | 강릉(江陵) |
호 | 삼가당(三可堂) |
자 | 군거(君擧)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삼가집(三可集) |
대표직함 | 용궁현감(龍宮縣監) |
부 | 박승휴(朴承休) |
모 |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 |
박수량(朴遂良, 1475년 ~ 1546년)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박순(朴純)의 10세손으로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당(三可堂)이다. 부친은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모친은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성품은 호탕하고 거리낌이 없으며, 격식을 갖추거나 꾸미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잡인들이 스스럼없이 굴어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고, 충효의 큰 절조가 있어 후세 사람들이 선사(善士)라 칭송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3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모친상을 당하여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박수량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연산군이 단상제(短喪制) 단상제(短喪制)는 3년 동안 여묘에 거처하며 거상하던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거상하자는 것으로 연산군은 1505년 신료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상(國喪)과 사대부의 친상(親喪)은 달을 날로 계산하여 27일 만에 탈상하라고 지시하였다. 연산군은 이후에도 “왕명은 중한 것이니,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폐하여서는 안 된다.”며 왕명을 엄중히 준수할 것을 전교하였다. 를 시행할 당시였다. 그러나 박수량은 “차라리 쇠망치로 맞아서 죽을지언정 선왕 때부터 지켜온 법은 어길 수 없다” 하여 여막에 거처하며 3년상을 치렀다. 이 일로 1508년(중종 3) 생전에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다. 박수량은 1518년(중종 13)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는데 천목(薦目)에 “천성이 순후하고 지조가 구차스럽지 않으며 소박하고 말이 적어 꾸밈이 없으며 효행이 있고 뜻이 독실하다.”고 하였다. 이후 박수량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숙인 박공달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냇물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언제나 함께 지냈으며 바닷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노니니 세상 사람들이 그 정자를 쌍한정(雙閒亭)이라 칭하였다.
저술
박수량의 시문은 수천 편이 있었지만, 임종 직전 불사르도록 유지를 남겨 이후 후손이 약간을 수습하여 엮은 『삼가집(三可集)』이 전한다.
일화
박수량은 평소 흥이 나면 시를 읊곤 하였는데 『동국문장(東國文章)』에서 박수량의 시를 평하여 “고삐와 재갈을 풀어놓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하였다. 경포대에는 박수량이 쓴 오언절구의 판상시가 걸려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위수 북쪽 땅의 축이 기울어져 형주 남쪽 동정호를 잃었다네. 떨어져 나온 악양루 한쪽 귀퉁이가 떠돌다가 동해에 떨어졌네.(渭北傾坤軸, 荊南失洞庭. 岳陽樓一角, 漂泊落東溟.)
또 박수량은 당시 가장 큰 문제이던 토지 소유 불균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 13) 5월, 중종이 천거인들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토지제도의 개혁 즉 균전법 시행을 건의 주장하였다. 후일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는데 중종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 중종이 “순임금 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박수량은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 맛이 썼으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단 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또한 어찌 고금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고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탄복하였다.
사후 추모사업
박수량의 사후 당숙 박공달은 만시(輓詩)에서 “드높은 명성 천년토록 사서에 남아 길이 전하리라.(千歲高名史永傳)”라고 읊었으며, 중종 때 강릉부사를 지낸 이이(李頤)는 “혁혁한 그 이름 사책에 남으리.(赫赫芳名留史冊)”라고 칭송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최치운·최응현·박공달·최수성·최운우와 함께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고, 1754년(영조 30)에 이재(李縡)가 묘표(墓表)를 짓고, 홍봉조(洪鳳祚)가 비석 글씨를 썼다. 현재 남아 전하는 박수량의 관련 유적으로는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 묘소와 오사재(五思齋)가 있고, 미노리에는 쌍한정(雙閒亭)과 삼가봉(三可峯) 유적이 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