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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二十四日,至健跳所,是日晴,曉過穿岩里,里西有山,戴石壁,屹立写隆,有大寶洞,望如虹門,里之得名以此.又過田嶺,嶺上有僧作佛[http://www.serengeseba.com/zonepic.php?wd=%E5%9C%86%E5%BD%A2%E4%BD%9B%E8%88%8D&img=http://i.serengeseba.com/uploads/i_4_2522410239x3376587197_26.jpg&tip= | + | 二十四日,至健跳所,是日晴,曉過穿岩里,里西有山,戴石壁,屹立写隆,有大寶洞,望如虹門,里之得名以此.又過田嶺,嶺上有僧作佛[http://www.serengeseba.com/zonepic.php?wd=%E5%9C%86%E5%BD%A2%E4%BD%9B%E8%88%8D&img=http://i.serengeseba.com/uploads/i_4_2522410239x3376587197_26.jpg&tip=0불사]字横道路,行人從寺中以過,臣等平地雖或乘轎,領峻路險下轎步行為多,至此寺百技跛行,寺僧憐之,煎茶以供,少留,行至海浦,有兵船具戎器,循浦上下,示以水戰之狀,臣從鼻居以渡,則乃是健跳所也,城臨海岸,所千戶李昂,軀幹壯大,容儀丰美,具甲胃兵戎,導臣等入城門,門皆重城,鼓角號师,聲震海岳,其嗩吶等大小角末端皆上曲鉤,向吹者眉目間,城中人物弟宅視桃诸所尤豐盛,李昂引臣至一客館,與翟勇、許清、王匡、王海等及所之有姓莊也尹也,亡其名,俱是厚重老官人,皆環立卓之左右,問臣以漂 流之故,略陳首末云云,李昂請升堂行賓主之禮,昂由階,臣由東階而上,相對再拜後,昂饋臣茶果,又饋臣之從者以酒肉,頗示忠款之意,姓尹老官人引程保等,請私靠飲食之,因見其妻妾子女以展禮,其人心淳彪如此,有一人以丙午年登科小錄來示臣曰:“此吾的登科第榜錄也.”又指點錄中‘張輔’二字,曰:“此吾的姓名也.”因問曰:“你國亦貴其登科者乎?”曰:“然.”曰:“我國制,草茅士登第者,皆官給俸祿,確表門閭,刺銜亦書賜進士及第某科某等人”云云. 引臣至其家,則其家前街果以雕龍石柱,作二層三間之門,金碧眩曜,其上大書丙午科張輔之家之標,輔盖以己之登第誇示臣. 臣亦以浮誕之言之,曰:“我再中科第,歲受米二百石,难門三層,足下其不及於我矣.”輔曰:“何以知之?”臣曰:“我之族門,遠莫致之,我有文科重試小錄在此,”即撥示之,輔於錄中,見臣職姓名,下跪曰:“我不及矣.” |
건도소(健跳所)에 도착하였습니다. | 건도소(健跳所)에 도착하였습니다. | ||
2020년 4월 2일 (목) 17:28 판
목차
개요
학력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재학중
좋아하는 것
음악 장르
- 발라드
취미
- 웹툰 보기
- 소설 읽기
- 그림그리기
디지털 큐레이션 기획
영주 흑석사 아미타 불상
- 흑석사
- 흑석사 아미타 불상의 복장
- 계유정란
- 불상 조성기
- 불상 복장물
- 영주 흑석사 아미타 불상에 얽힌 도난 사건들
증강현실(AR)을 활용한 컨텐츠
- 삼국유사 속 불교
최부의 표해록
- 1월 24일
二十四日,至健跳所,是日晴,曉過穿岩里,里西有山,戴石壁,屹立写隆,有大寶洞,望如虹門,里之得名以此.又過田嶺,嶺上有僧作佛[1]字横道路,行人從寺中以過,臣等平地雖或乘轎,領峻路險下轎步行為多,至此寺百技跛行,寺僧憐之,煎茶以供,少留,行至海浦,有兵船具戎器,循浦上下,示以水戰之狀,臣從鼻居以渡,則乃是健跳所也,城臨海岸,所千戶李昂,軀幹壯大,容儀丰美,具甲胃兵戎,導臣等入城門,門皆重城,鼓角號师,聲震海岳,其嗩吶等大小角末端皆上曲鉤,向吹者眉目間,城中人物弟宅視桃诸所尤豐盛,李昂引臣至一客館,與翟勇、許清、王匡、王海等及所之有姓莊也尹也,亡其名,俱是厚重老官人,皆環立卓之左右,問臣以漂 流之故,略陳首末云云,李昂請升堂行賓主之禮,昂由階,臣由東階而上,相對再拜後,昂饋臣茶果,又饋臣之從者以酒肉,頗示忠款之意,姓尹老官人引程保等,請私靠飲食之,因見其妻妾子女以展禮,其人心淳彪如此,有一人以丙午年登科小錄來示臣曰:“此吾的登科第榜錄也.”又指點錄中‘張輔’二字,曰:“此吾的姓名也.”因問曰:“你國亦貴其登科者乎?”曰:“然.”曰:“我國制,草茅士登第者,皆官給俸祿,確表門閭,刺銜亦書賜進士及第某科某等人”云云. 引臣至其家,則其家前街果以雕龍石柱,作二層三間之門,金碧眩曜,其上大書丙午科張輔之家之標,輔盖以己之登第誇示臣. 臣亦以浮誕之言之,曰:“我再中科第,歲受米二百石,难門三層,足下其不及於我矣.”輔曰:“何以知之?”臣曰:“我之族門,遠莫致之,我有文科重試小錄在此,”即撥示之,輔於錄中,見臣職姓名,下跪曰:“我不及矣.” 건도소(健跳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천암리(穿岩里)를 지났습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산 위쪽으로 석벽이 높게 솟아있는데, 홍문(虹門)처럼 보이는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천암(穿岩)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령(田嶺)을 지나니 전령 위에는 중이 불사(佛舍)를 짓느라 도로를 가로막았으므로, 행인들이 절 가운데로 지나갔습니다.
신 등은 평지에서는 더러 가마도 탔지만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하므로 가마에서 내려 걷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절에 이르러 온갖 모양으로 절룩거리며 걸으니 그 절의 중이 불쌍히 여겨 차를 끓여 대접하였습니다.
조금 머물렀다가 출발해서 바닷가에 이르니 무기를 갖춘 병선(兵船)이 물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수전(水戰)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는데 바로 이곳이 건도소였습니다.
건도소성(城)은 해안에 붙어 있었습니다.
건도소의 천호인 이앙(李扇)은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는데, 갑주(甲周)와 무장을 갖추고 신 등을 이끌어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은 모두 겹성이었고, 고각(鼓角)187과 총통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그 쇄납(噴网) 등 크고 작은 피리는 끝이 모두 위가 굽어 있어 부는 사람의 미간(眉間)을 향하였습니다.
성 안의 사람과 저택은 도저소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이앙은 신을 이끌고 한 객관(客館)에 이르러서, 적용, 허청, 왕광, 왕해 등 및 이름은 잊었지만 성이 장(莊)이니 윤(尹)이니 하는 중후하고 나이 든 건도소 관인들과 함께 탁자의 좌우에 빙 둘러서서 신에게 표류된 까닭을 물었습니다.
신은 대략 그 전말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에게 당(堂)에 올라서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앙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고 신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서 서로 마주보고 두 번 절한 뒤에 이앙이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또 신의 종자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먹여 자못 환대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성이 윤(尹)인 노령의 관인은 정보 등을 이끌고 사저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 이어 그 처첩과 자녀로 하여금 인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 인심의 순박하고 두터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오년에 등과(登科)한 소록(小錄)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과거에 합격한 방록(榜錄)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방록 가운데 '장보(張輔)(장푸, 送朝鮮崔校理序를 썼음) 란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도 등과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에 있던 선비로서 등과한 사람은 모두 관청에서 봉록을 주고 문가에 정문(陸門)을 세워주며, 명함에도 무슨 과 몇 등으로 진사급 제한 자 등이라고 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을 이끌고 자기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 앞의 네거리에 과연 용(龍)을 아로새긴 석주(石柱)로 2층 3간의 문을 만들었는데, 노란빛과 푸른빛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고, 그 위에는 병오과(丙午科)장보(張輔)의 가(家)'라는 글씨가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장보는 자기의 등과를 신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신 또한 떠벌리는 말로 그에게 자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해마다 쌀 200석을 받았고 정문이 3층이나 되니 족하가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신은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 없지만, 내게 문과(文科) 중시(重試)의 소록(小錄)이 있습니다”라고 하고 펼쳐 보였습니다.
장보는 소록 속에 신의 관직과 성명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4th Day. Arrival at Chien-t'iao Chiliad. This day was fair.
At dawn we passed Pierced Cliff Village. West of the village was a mountain, and on it were stone cliffs. Its peak was lofty and arched and had a great hole that looked like an arched gate. The village got its name from that. We crossed T'ien Range. At the peak, priests had built a Buddhist temple across the road, and travelers passed through the temple. Though on level ground we sometimes rode in the sedan-chairs, we frequently got out of the sedan-chairs and walked where the ranges were steep and the road difficult. When we came to that temple, we were limping along by whatever means we could. The priests of the temple pitied us, boiled tea and served us, and we stayed a little while. Going on, we reached a bay in which were warships, all armed and patrolling up and down, looking as if they were in a sea battle. I crossed over in a tender to Chien-t'iao Chiliad. The wall overlooked the shore. The Chiliarch of the place, Li Ang, of powerful physique and handsome appearance, wore armor and carried weapons. He led us through a gate of the wall. The gates were all doubled-walled. The sounds of drums, horns, and fire weapons shook the sea and the hills. All the sournas and other large and small horns curved up in a hook at the ends and faced back toward the blowers' foreheads. The people and houses in the town were even more prosperous than those of T’ao-chu Chiliad. Li Ang led me to a guest house. He and Chai Yung, Hsü Ch’ing, Wang K’uang, Wang Hai, and a Chuang and Yin from the place, I have forgotten their given names; they were both fat old officials - stood at the left and right of a table. They asked me how I had come to sail adrift, which I briefly outlined to them. Li Ang asked that we go up to the main hall and perform the ceremony between host and guest. Ang went up by the west stairs, I by the east, and we bowed twice to each other. Afterwards, Ang served me tea and fruit and my staff wine and meat. He showed a marked spirit of true hospitality. The old official named Yin took Chong Po and others to his own house. After giving them food and drink, he introduced his wife, concubines, sons and daughters, and they extended greetings. The man's heart was as pure and full as that. A man brought an abbreviated examination list for 1486 and showed it to me. He said, “This is the notice of my placing in the examinations.” He pointed to the two characters “Chang” and “Fu” on the notice and said, “There is my name.”?46 Then he asked, “In your country, do they honor those who place on the lists, too?" I said, “Yes.” He said, “Under our system, all provincial scholars who place on the lists are given public stipends. Banners are displayed at their gates, and on their name cards is written the rank Chin-shih of Such-and-such Place in Suchand-such Section.'” He took me to his house, and in front of the house in the street was, indeed, a gate of two stories and three doors, built of stone pillars carved with dragons. Its glitter and brightness were dazzling. At the top was written large the sign.“House of Chang Fu, Examination of 1486.” The reason Chang Fu had shown me this was to boast. I, too, boasted extravagantly: “I placed on the list twice. I receive two hundred shih of rice annually,47 and my banner gate has three stories. You are not my equal." Chang Fu said, “How do I know that?”' I said, “My banner gate is far away, and I cannot bring it here, but I have a short list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here.” I opened it and showed it to him. When Chang Fu saw my name and position in the list, he knelt and said, “I am not at all your equal.”
- 1월 25일
二十五日,到越溪巡檢司,是日陰霾,李昂、許清、王国及莊也尹也,俱这臣于海上,昂握臣手,曰:“我與足下千載一時,萬里一見,一別兩地,無復再見,”臣於船上敘別,曰:“僕之來也,將軍以百千兵甲,環城擁圓,雄旗凌亂,鼓轟馳,則將軍之示遠人嚴矣;僕之寓館也,升堂禮莫怠,饋食意益师, 開心見誠, 一見如舊, 則將軍之待遠人寬矣;及偿之去也,步出城西,遠送海曲, 扶僕登船,鼓辭以別,則將軍之送遠人厚矣,僕一遠人也,相逢未一日也, 而嚴以示之,寬以待之,厚以別之,其意固有在也,盖我朝鮮,地雖海 外,《冠文物,悉同中國,則不可以外國視也,況今大明一統,胡越為家, 則 p.378 一天之下,皆吾兄弟,豈以地之遠近,分內外哉?况又我國恪事天朝,貢獻不怠,故天子亦禮以待之,仁以撫之,懷紋之化,至矣盡矣,而僕朝鮮之臣也,將軍亦天子分關之臣也,則其體天子字小之心,而待遠人至於此極,斯不亦忠矣乎哉?其間情意之篤,則僕既感之深矣,然不得一日之暇,與將軍及莊、尹兩官人,從容談話,展布所懷,百歲之間,萬里之外,雲樹之望,渴維“其已?”又別許清,曰:“將軍與王足下,遇我於蒲宰之里,我於飢渴之極,生我於萬死之餘,以至杜賣場,以至桃诸所,以至於此城,崎嶇數百[里]”之地,扶護七八日之間,其恩情之篇,不勝枚悉,一別之後,會面難期,增黯然,“遂告別,與翟勇同舟過大海,勇謂臣曰:“浮此海而去,西可望天台山,今年雲霧四塞,不得觀望”云云,夕至(淨)(寧海縣之越溪巡檢司,城在山巔,軍卒皆帶甲,列立海傍,勇與其徒,下入城,留臣等于海岸,莫知所為.
월계순검사(越溪巡檢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어두웠습니다.
이앙, 허청, 왕광 및 성이 장이니 윤이니 하는 분들이 모두 신을 바다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와 족하는 천 년 만에 만 리 밖에서 한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배 위에서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제가 올 적에는 장군께서 수백 내지 천여 명의 군인으로 성을 둘러싸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가 사관(舍館)에 머물 적에는 당(堂)에 오르게 하였는데, 예절이 틀림없고 음식을 대접하는데 뜻이 더욱 두터웠으며 마음을 터놓고 성의를 보여서 처음 보고도 옛 벗과 같이 친밀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제가 떠날 적에는 성 서쪽까지 걸어 나오고 멀리 바다 모퉁이까지 전송하며 저를 부축하여 배에 태우고 글을 지어 작별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보내심이 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일개 먼 지방 사람인데 서로 만난 지 하루가 못되었는데도 엄함으로써 위엄을 보이고 관대함으로써 응대하고 두터움으로써 작별하였으니, 그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대개 우리 조선은, 땅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의관, 문물은 모두 중국과 같으니 외국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나라가 통일을 이루어 북방의 호(胡)와 남방의 월(越)도 일가가 되었으니, 한 하늘 아래에서 모두가 형제입니다. 어찌 지역의 거리로 안팎을 나누겠습니까? 하물며 또 우리나라는 천조(天朝)를 정성으로 섬겨 공물 바치는 일을 게을리 아니한 까닭에 천자께서 예절로써 대우하고 인애로써 어루만져 주셨으니, 감싸고 안정시켜 주신 덕화(德化)는 지극하였습니다. 또 저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천자(天子)의 지방을 맡은 신하인데 천자의 자소지심(字小之心)을 체현하여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이 또한 충(忠)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의 두터운 온정은 제가 이미 깊이 느낀 바이지만 하루도 장군 및 장(莊), 윤(尹) 두 관인과 함께 조용히 담화하며 회포를 풀 짬을 얻지 못하였으니, 백년 한 평생을 만리 밖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어찌 그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 허청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장군은 왕광 족하와 함께 나를 포봉(蒲峯)이란 마을에서 만나보고, 지극히 배고프고 목마른 나를 배부르게 먹이고, 나를 죽을 지경에서 살려주고, 두독장과 도저소 및 이 성에 이르기까지 산길이 험준한 수백 리의 땅에서 7-8일 동안을 돕고 보호해 주셨으니, 그 은정(恩情)의 두터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작별한 뒤에는 서로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슬픔이 더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작별을 고하고 적용과 함께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넜습니다.
적용은 신에게, “이 바다를 떠가노라면 서쪽으로 천태산이 보이는데, 지금은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막혀서 바라볼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저녁에 영해현(寧海縣)의 월계순검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성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군졸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바닷가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적용은 그 무리와 함께 배에서 내려서 성에 들어가고 신 등은 해안에 머물게 하였는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25th Day. Arrival at Yüeh-ch’i Police Station [Hsün-chien ssu]. This day was cloudy, with dust blowing.
Li Ang, Hsü Ch’ing, Wang K’uang, Chuang, and Yin escorted me to the sea. Ang took my hands and said, “There was one chance in a thousand years that you and I, from places far apart, would ever meet. Parted we shall not see each other again.” I got into the boat and took my leave with these words: “When I came, General [Chiang-chün], you lined the wall and filled the gates with thousands of arms and shields. Masses of pennants fluttered. Gongs and drums rumbled. You displayed your might to a stranger, General. “When I lodged at the inn, you went up to the main hall and performed the ceremony faultlessly. You served us food in great abundance. The sincerity in your heart was apparent; at a glance, it was as if we were old friends. You treated a stranger generously, General. “As I leave, you walk out west of the city, escorting me a long way to a nook of the sea. You help me into the boat and say good-bye to me. You accompany a stranger kindly, General. “I am a stranger, we have not been acquainted a day. Yet you have shown me your might, treated me generously, and taken leave of me kindly. Certainly that shows your feelings that though my Korea is beyond the sea, its clothing and culture being the same as China's, it cannot be considered a foreign country. That is especially so now, with Great Ming's unification and Hu and Yüeh under one roof. All under Heaven are my brothers; how can we discriminate among people because of distance? That is particularly true of my country, which respectfully serves the Celestial Court and pays tribute without fail. The Emperor, for his part, treats us punctiliously and tends us benevolently. The feeling of security he imparts is perfect. "But I am a Korean minister. You, too, General, are the Emperor's minister outside the gates, and you embody the Emperor's love of the humble. Is it not also loyal service to treat a stranger to this extent? The magnanimity of your feelings in this period I have felt deeply. Though I have not had a day's free time to talk at leisure with you, General, and the two officials Chuang and Yin, to reveal what is in my heart, I shall always remember you, as long as I live and no matter how far away I am.” Then I took leave of Hsü Ch’ing, saying to him, "You, General, and your Wang K’uang met me at the village of P’u-fêng, filled me in the last stage of my hunger and thirst, and put life into me when I should long before have died. Over many li of dangerous ground, to Tu-tu-ch'ang,48 to T’ao-chu Chiliad, and to this town, for seven or eight days you have helped and protected me. The extent of your kindness is immeasurable. Once we have parted, it is unlikely that we shall meet again, and I am sadder for that.” I then bade them leave and, riding in the same boat as Chai Yung, went across a sea. Yung said to me, “When one sails out into this sea, Mt. T'ien-t'ai is visible in the west, but it happens to be cloudy and foggy everywhere now, and we shall not get to see it.” In the evening we arrived at Yüeh-ch'i Police Station, Ning-hai County. The town was at the top of a mountain, and troops, all wearing armor, lined the shore. Yung and his staff got out of the boat and went into the town, leaving us on the shore. I do not know what they did.
- 1월 26일
二十六日, 過寧海縣, 是日雨, 巡檢司對岸有越溪鋪,自鋪前舍舟乘陸,從溪岸而步,溪之通海口甚廣闊,不知其源之所從來,行過西洋嶺、許家 山,至市奥鋪,鋪中人體茶數棕,又行至白崎嶺,有軍卒二十餘人,擔轎來迎臣等,臣等八人,又乘過進士坊,至寧海縣之白崎驛,驛在縣治之中,有知縣姓唐者,供饋臣等,期至於飽,因乘轎冒雨而行,過桐山鋪、梅林铺、江淮嶺、紅寨鋪、海口鋪,其間有三大川、二大橋,亡其名,夜二更,至西店驛以信,驛有甲兵警成,如防禦所,
영해현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순검사의 건너편 언덕에 월계포(越溪鋪)가 있었습니다.
월계포 앞에 배를 놓아두고 육지에 올라 시냇가의 언덕을 따라서 걸었습니다.
시내의 바다로 통하는 어귀는 매우 넓었는데 그 원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다가 서양령(西洋嶺) 허가산(許家山)[1]을 지나서 시오포(市奧鋪)에 이르니, 포(鋪) 안의 사람이 차 몇 사발을 대접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백교령(白嶠嶺)에 이르니, 군졸 20여 인이 가마를 메고 와서 신 등을 맞이하였습니다.
신 등 여덟 사람은 또 가마를 타고 진사방(進士坊)을 지나서 영해현의 백교역(白嶠驛)197에 이르렀습니다.
역은 현치(縣治) 안에 있었습니다. 당(唐)이란 성을 가진 지현(知縣)198이 신 등에게 음식을 배부르게 먹였습니다.
가마를 타고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서 동산포(桐山鋪), 매림포(梅林鋪), 강격령(江__嶺), 항공포(__空鋪), 해구포(海口鋪)를 지났습니다.
그 중간에 큰 내 셋과 큰 다리 둘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밤 2경쯤에 서점역(西店驛)이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서점역에는 갑병(甲兵)202 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방어소(防禦所) 같았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의전 제도(교통) 인명 지리
26th Day. Passing Ning-hai County. This day it rained.
On the shore opposite the police station was Yüeh-ch’i Stop [P’u]. We left the boat in front of the stop and went by land. We walked along the bank of the stream, the mouth of which, where it entered the sea, was very wide. I do not know the source from which it came. We crossed Hsi-yang Range and Hsü-chia Mountain and came to Shih-ao Stop. The people at the stop served us many cups of tea. We went on and reached Pai-ch'iao Range. Over twenty soldiers had come there carrying sedan-chairs to greet us. Eight of us riding again, we passed Chin-shih-fang and came to Pai-ch'iao Station [I] of Ning-hai County. The station was in the county seat, and the County Magistrate, T'ang, served us food. We ate enough to be full and then got into the sedan-chairs and went on, braving the rain. We passed T’ung-shan Stop, Mei-lin Stop, Chiang[chi?] Range, Kang-k’ung Stop, and Hai-k'ou Stop. In the interval there were three big rivers and two big bridges, the names of which I have forgotten.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we came to Hsi-tien Station and put up there. The station was guarded like a defense point by armed men.
- 1월 27일
二十七日, 在西店驛, 是日大風大雨, 溪澗水漲, 不得已留于西店驛.
서점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서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하는 수습이 없이 서점역에서 묵었습니다.
27th Day. At Hsi-tien Station. This day there were high wind and heavy rain.
The stream was a flooding torrent. We had no alternative to staying at Hsi-tien Station.
- 1월 28일
二十八日, 到連山驛, 是日大雨, 霍勇謂臣曰:“我大唐法令嚴整,少有選緩,必致罪責,今雖大雨,不可復留,”勇之軍史及臣之從者,俱不欲,日:“今日雨大至,水溢洞壑,不可行.”勇曰:“洞壑滾水,滿而復除,且此驛支給,亦有限量,昨日之留,已為不可!”遂與臣等冒雨過圳墟鋪、拆開嶺、山隍鋪,又過大嶺、方門鋪,至雙溪鋪,鋪北有雙溪,溪水漲溢,人皆以衣而涉,經尚田鋪,止宿奉化縣之連山驛,縣距驛東二里,知縣姓名杜安也,驛丞見臣等雨透沾衣,肌寒帶粟,遂喂帽於堂前,臣及從者環坐親炙使自溫,有一人自外至,橫怒肆毒,跳踏帽相之火,臣等惧奔匿,勇及驛丞,俱被辱焉,勇謂臣曰:“外有一人說你是劫賊之人,阻當驛“官不要供給,我與他說汝是讀書君子,他復肆暴,你可寫狀,告他搶去衣包云云,呈于知縣.”臣曰:“彼人之惡,誠欲可懲,但以不見奪之物,為強奪,伏人非罪,甚悖於理,今足下護我等而來,治他以喝眾侵暴之罪,亦不為無辭,”勇即寫狀,送于縣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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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역(連山驛) 203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중국의 법령은 엄정해서 조금이라도 더디고 늦어지면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지금 비록 큰비가 내리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와 신의 종자들이 모두 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이 계곡에 넘치므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이 말하기를, “계곡의 물은 가득 찼다가도 다시 줄어들고 또 이 역에서 지급하는 식량도 한정이 있으니, 어제 머문 것도 이미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 등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책허포(明墟鋪), 탁개령(拆開嶺), 산황포(山隍鋪)를 지나고, 또 대령(大嶺), 방문포(方門鋪)를 지나서 쌍계포(雙溪鋪)에 이르렀습니다.
쌍계포 북쪽에 쌍계(雙溪)가 있는데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옷을 입은 채 건넜습니다.
상전포(尙田鋪)를 지나서 봉화현(奉化縣)[1][2][3]의 연산역에서 유숙하였습니다.
현은 역 동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지현의 성명은 두안(杜安)204이었습니다.
역승(驛丞)205은 신 등이 옷이 비에 젖어서 소름이 돋은 것을 보고 건물 앞에서 나무 등걸을 불태워 주었습니다.
신과 종자들은 빙 둘러앉아 불을 쬐어 온기를 취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마구 화를 내며 등걸불을 차고 짓밟았습니다.
신 등은 두려워서 달아나 숨었지만, 적용과 역승은 욕을 당하였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밖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해적이라고 말하면서, 역관(驛官)이 지급해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저 분은 글을 읽는 군자라고 말했지만 저 사람은 여전히 횡포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 자가 의복을 빼앗아 갔다는 등의 내용으로 고소장을 써서 지현에게 바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나쁜 짓은 진실로 징계하고 싶지만, 빼앗긴 물건이 없는데도 빼앗겼다고 무고하여 남을 부당한 죄로 덮어씌우는 일은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 족하는 우리를 호위해 왔으니 대중을 공갈하고 폭행한 죄로 저 자를 다스린다 해도 말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은 곧 고소장을 작성하여 지현에게 보냈습니다. 28th Day. Arrival at Lien-shan Station. This day it rained hard.
Chai Yung said to me, “The laws of China are strict; if there is the slightest delay, it will bring punishment upon us. It is raining hard now, but we cannot stay longer.” Neither Chai Yung's military officers nor my own staff were willing to go. They said, “The rain today is extremely heavy, and the water is overflowing the gorge. We cannot go.” Chai Yung said, “The waters of the gorge are in flood, but they will recede. The supplies of this station, moreover, are limited. Yesterday's [unscheduled] stay has already strained its resources.” With that he went with us into the rain, (past Shan-hsü Stop, Shang-t'ien Stop, and beyond]. We stopped at Lien-shan Station in Feng-hua County. The county seat was two li east of the station, and the County Magistrate was named Tu An.49 The Station Master saw that the rain had soaked through our clothing and that the cold had raised goose flesh on our bodies. He then had stumps kindled in a hollow in front of the main hall, and I and my staff sat in a ring close to the coals to warm ourselves. A man came from outside and, surly and malicious, kicked and trampled on the stump fire. We were frightened and ran for cover. Both Chai Yung and the Station Master were humiliated by him. Chai Yung said to me, “This man, having been told by someone that you were bandits, did not want the station officials to give you supplies. I explained to him that you are a well-read gentleman, but he was still enraged. You may write a deposition saying that he took away your clothes, packages, and so forth, and present it to the County Magistrate.” I said, “I certainly want the man's wickedness to be punished, but to accuse him falsely of seizing what has not been seized and to bring the man down for something of which he is not guilty, is highly contrary to justice. You, now, have come to protect us; it would not be unreasonable for you to handle the man by accusing him of assault.” Chai Yung then wrote a deposition and sent it to the county officials.
- 1월 29일
二十九日,過寧波府,是日雨,勇與臣等乘轎過大川,川畔有佛字,極華麗,前有五浮圖雙大塔,又過虛白觀、金鍾鋪、南渡鋪,至廣濟橋,橋跨大川,橋上架屋,橋長可二十餘步,橋所在之地,即寧波府界,舊為明州時所建也,又行至三里有大橋,橋之北有進士里,又行至十餘里,又有大橋,橋上亦架屋,與廣濟橋同而差小,忘其名,橋之南有文秀鄉,又過常浦橋,至北渡江,乘小而渡,自牛頭外洋西北至連山驟,幫宰列恤,糾紛繚繞,溪澗嚴壁,村錯亂.至此江則平郊廣野,一望豁如,但見遠山如眉耳,江之北岸築一壩,即挽丹上過之處,壩之北築堤臺江,有鼻居繞岸列泊,勇引臣等乘其舶,過石橋十三,行二十餘里,江之東堤,閱撲地,其西南望有四明山,山西南連天台山,東北連會稽、秦望等山,即賀知章少時所居也,掉至寧波府城,截流築城,城皆重門,門皆重層,門外重城,水溝亦重,城皆設虹門,門有鐵局,可容一船,(掉)「掉」入城中,至尚書橋,橋內江廣可一百餘步,又過惠政橋、社稷壇,凡城中所過大橋,亦不止十餘處,高宮巨室,夾岸聯絡,紫石為柱者,殆居其半,奇觀勝景,不可彈錄,掉出北門,門亦與 門同,城周廣狹不可知,府治及寧波衛、鄞縣治及四明驛,俱在城中,至過大得橋, 橋有三虹門. 雨甚, 留泊江中.
영파부(寧波府)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적용과 신 등이 가마를 타고 큰 내를 건넜습니다.
냇가에 절이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앞에는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두 개의 큰 탑이 있었습니다.
또 허백관(虛白觀), 금종포(金鐘__), 남도포(南渡鋪)를 지나서 광제교(廣濟橋)209에 이르렀습니다.
광제교는 큰 내에 걸쳐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다리의 길이는 20여보(步)나 되었습니다.
다리가 있는 땅이 곧 영파부의 영역이니 옛날 명주(明州)였을 적에 세운 것입니다.
또 3리를 가니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의 북쪽이 진사리(進士里)였습니다.
또 10여 리를 가니 다시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광제교와 같으면서 조금 적은 편인데 그 이름은 잊었습니다.
다리의 남쪽에 문수향(文秀鄕)이 있었습니다.
또 상포교(常浦橋)를 넘어 북도강(北渡江)[1]에 이르러 작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우두 앞바다에서 서북쪽으로 연산역에 이르기까지는 뭇 산들의 죽 늘어선 산봉우리가 어지러이 둘러싸여 있고, 시내와 암벽이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강에 이르니 평평하고 넓은 들이 넓게 트여 있고, 다만 먼 곳에 있는 산들이 눈썹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강의 북쪽 언덕에 방죽 하나를 쌓았으니, 방죽은 곧 배를 끌어 올려서 지나가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방죽의 북쪽에 제방을 쌓고 강을 파서 작은 거룻배가 강가를 둘러 죽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적용이 신 등을 이끌어 그 거룻배를 타고 석교(石橋) 열 셋을 지나 20여 리를 갔습니다.
강의 동쪽 제방에는 민가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서남방에는 사명산(四明山)[2][3]이 보였습니다.
산의 서남쪽으로는 천태산에 연해 있고, 동북쪽으로는 회계산(會稽山)[4][5][6]<>[1]</ref>[7][8][9], 진망산(秦望山)[10] 등과 연해 있었으니 곧 하지장(賀知章)[11][12][13][14]이 젊었을 때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노를 저어 영파부성(寧波府城)에 이르니 물을 가로막아 성을 쌓았는데 성은 모두 겹 문, 문도 모두 겹 층, 문 밖도 겹 성, 그리고 수구(水溝)213 또한 이중이었습니다.
성에는 모두 홍문(虹門)을 설치했는데 문에는 쇠 빗장이 있었고 배 한 척이 드나들 만하였습니다.
노를 저어 성안으로 들어가서 상서교(尙書橋)214에 이르니 다리 안의 강의 너비는 100여 보(步)였습니다.
다시 혜정교(惠政橋)215와 사직단(社稷壇)을 지났습니다.
성안에서 지나간 큰 다리 또한 10여 곳이었고, 높고 큰 집들이 언덕 좌우에 죽 이어져 있었으며, 자석(紫石)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기이한 광경과 좋은 경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노를 저어 북문으로 나오니 북문 또한 남문과 같았습니다.
성 주위의 둘레를 알 수 없었습니다.
부치(府治), 영파위(寧波衛), 은현(_縣)의 현치(縣治)와 사명역(四明驛)이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과대득교(過大得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홍문 세 개가 있었습니다. 비가 세차게 내려 강에서 유숙하였습니다. 29th Day. Passing Ning-po Prefecture [Fu]. This day it rained.
Chai Yung and we rode in sedan-chairs and crossed a large river. On the bank of the river was an extremely beautiful Buddhist temple, in front of which were five small pagodas and two big ones. Then we passed [from Hsü-pai-kuan to the Pei-tu River). From Niu-t’ou-wai-yang northwest to Lien-shan Station, mountain peaks rose everywhere in clusters and ranges, some crossing others. Rushing streams and steep cliffs were scattered through them thickly. When we reached that river, flat, open lands and broad fields were apparent at a glance. We saw the distant mountains only as eyebrows. On the north shore of the river an embankment had been built, which was a place up over which boats were pulled. North of the embankment a levee had been built to canalize the river. Tenders were moored to the bank in a row. Chai Yung led us into the boats, and we passed thirteen stone bridges and went more than twenty li. On the east levee of the river, village gates were everywhere. To the southwest we saw the Ssu-ming Mountains, adjoined to Mt. T'ien-t'ai in the southwest and to the K’uai-chi, Ch’in-wang, and other mountains in the northeast. It was where Ho Chih-chang had been when he was young: 50 We rowed up to the wall of Ning-po Prefecture. The wall was built across the stream, and all the gates of it were double and of two stories. Outside the gates was a second wall, and the moat, too, was double. All the gates of the wall were arched and had iron doors that would admit a single boat. We rowed inside the wall and came to Shang-shu Bridge. Beyond the bridge the width of the river was about five hundred feet. We passed Hui-cheng Bridge and Shechi-t'an. Altogether we passed more than ten big bridges in the town. I cannot record adequately the wonderfully beautiful sights. We rowed out the north gate, which was the same as the south gate. I do not know the circumference of the wall, but the prefectural capital, Ning-po Garrison, the seat of Yin County, and Ssu-ming Station were inside it. We reached and passed Ta-te Bridge, which had three arches. It was raining extremely hard, and we moored for the night in the river.
- 2월 1일
二月初一日,過慈溪縣,是日雨,經新清橋、進士鄉,至宋石將軍廟,廟大如官府,立雄表之門,自府城至此十餘里間,江之兩岸,市肆艦,全集如雲,過此後,松篁橙橘,夾岸成林,又過茶亭、景安鋪、繼錦鄉、俞氏貞節門,至西鎮橋,橋高大,所過又有二大橋,至西壩廳,壩之兩岸,築堤以石,斷流為壤,使與外江不得相通,兩傍設機械,以竹編為纜,乾舟而過,至西(週)[嶼】鄉“之新堰,堰舊為利子港顏公堰,後塞港廢墟為田,導水東涯,至于廣利橋之南,置此壩,外捍江湖,乾濟官船,謂之新堰,藥與西壩同,至此又乾丹而過,過新橋、開禧橋、姚平處士之墓,至慈溪縣,掉入其中,有經元門、鍾英門、都堂里門、都憲橋、進士門、德星橋、寶峯門, 至臨 清亭前,少停舟,夜又诉江而北,至雞報泊于岸待曙,而問其江,則乃姚江也,江邊有驛,乃車底驛也,驛丞乃秦高也.
자계현(慈溪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신청교(新淸橋)와 진사향(進士鄕)을 지나서 송(宋)나라 석장군(石將軍)의 사당219에 이르렀습니다.
사당의 크기는 관부(官府)처럼 컸고, 정표(佐表)220하는 문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부성(府城)에서 이곳까지 10여 리 사이에 강의 양쪽 언덕에는 상점과 큰 배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난 뒤에는 소나무, 대나무, 등자나무, 귤나무가 언덕 좌우에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다정(茶亭), 경안포(景安鋪), 계금향(繼錦鄕), 유씨정절문(兪氏貞節門)을 지나서 서진교(西鎭橋)에 이르니 다리가 높고 컸습니다.
또 두개의 큰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서파청(西鬪廳)에 이르니, 방죽의 양쪽 언덕은 돌로 제방을 쌓아, 물을 가로막아 보[堰]를 만들어 바깥 강과는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쪽 옆에 기계(機械)를 설치하고 대로 만든 새끼로 밧줄을 만들어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서여향(西嶼鄕)의 신언(新堰)에 이르니, 신언은 옛날 찰자항(刹子港)과 안공언(顔公堰)으로서 후에 찰자항을 막고 안공언을 없애어 전지(田地)를 만들고 물을 끌어 동쪽으로 합류시켜 광리교(廣利橋)의 남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방죽을 설치하여 밖으로 강호(江湖)를 막고 관선(官船)을 당겨 건너게 하고 이를 신언이라 불렀는데, 대개 서파(西__)와 같았습니다.
이곳에 이르러 또 배를 당겨 지나야 하였습니다.
신교(新橋), 개희교(開禧橋)222, 요평(姚平)223 처사(處士)의 무덤을 지나서 자계현(慈溪縣)에 이르렀습니다.
노를 저어 그 안으로 들어가니 경원문(經元門), 종영문(鍾英門), 도당리문(都堂里門), 도헌교(都憲橋)224, 진사문(進士門), 덕성교(德星 橋)225, 보봉문(寶峯門)이 있었고, 임청정(臨淸亭) 앞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밤에 또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가서 닭이 울 무렵 언덕에 정박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강 이름을 물으니 바로 요강(姚江)226 이었습니다. 강가에 역(驛)이 있으니 거구역(車廢驛)227이고, 역승(驛丞)은 진고(秦高)였습니다. 1st Day, Second Month. Passing Tz'u-ch'i County. This day it rained.
We passed [two places) and came to the Shrine of General Shih of the Sung Dynasty.51 The shrine was as big as a public office and had a gate with banners. From the wall of the prefecture to that place was over ten li. In that distance, on both banks of the river, markets and warships were gathered like clouds. After we had passed there, pines, bamboos, and citrus and orange trees lined the banks in groves. [We went on to Ch'e-chiu Station.]
- 2월 2일
初二日,過餘姚縣,是日陰,早發船湖西北而上,江山高大,郊野平鋪,人煙稠密,景物萬千,日夕過五靈廟、驛前鋪、姚江曙、江橋,至餘姚縣,江抱城而西,有聯錦鄉曹墅橋,橋三虹門,又過登科門、張氏光明堂,夜三更到下新壩,壩又與前所見新堰同,又乾舟過壩,經一大橋,有大樹數十株,列立江中,將曙到中壩,壩又與下新壩同,又乾丹逆上江,即上虞江也.
여요현(餘姚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아침 일찍이 배를 출발시켜 서북방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강과 산은 크고 높았고 들판은 평평하게 펼쳐 있으며 인가는 빽빽하고 경치는 천태만상이었습니다.
저녁에 오령묘(五靈廟), 역전포(驛前鋪), 요강역(姚江驛)228, 강교(江橋)229를 지나서 여요현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이 성을 안고 서쪽으로 흐르니 연금향(聯錦鄕)의 조서교(曹__橋)가 있었는데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습니다.
또 등과문(登科門)과 장씨광명당(張氏光明堂)을 지나 밤 3경에 하신파(下新婦)에 이르니 하신파도 또한 앞서 본 신언과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하신파를 지나 큰 다리를 지나니, 큰 나무 수십 그루가 강 가운데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중파(中__)에 이르니 중파 또한 하신파와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거슬러 강으로 올라가니 곧 상우강(上虞江)이었습니다. 2nd Day. Passing Yü-yao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started early, the boats going upstream to the northwest. The rivers and mountains were big, the fields broad, and the settlements thick. The scenes of beauty were innumerable. [We went from Wu-ling Shrine by way of Yü-yao County to the Shang-yü Ri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