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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146&cid=40942&categoryId=33539 명릉]</ref> |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146&cid=40942&categoryId=33539 명릉]</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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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04:05 판
목차
정의
1661(현종 2)∼1720(숙종 46). 조선 제19대 왕[2]
인물명 | 숙종 |
---|---|
본명 | 이 순(李 焞) |
성별 | 남 |
출생일 | 1661년 8월 15일 |
출생지 | 경덕궁 회상전(會祥殿) |
사망일 | 1720년 6월 8일 |
사망지 | 경덕궁 융복전(隆福殿) |
국적 | 조선 |
재위기간 | 1674∼1720)46년 |
왕후 |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3] |
내용
생애.업적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모후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다. 휘는 이순(李焞)이고, 자는 명보(明普)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그는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74년 8월 23일 13세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해, 그때까지 가장 긴 기간인 46년 동안 재위했다.[4]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숙종은 현종의 적장자였다. 즉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사람이었던 것이다.
왕비의 장남으로 잉태되어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이를 원자라고 한다.
이러한 원자는 나중에 세자로 책봉된다. 숙종 이전에 원자로 태어난 왕은 연산군, 인종 단 두 명뿐이었다.
이외의 다른 왕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차남이 계승했다. 완벽한 ‘정통성’ 때문이었을까?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수렴청정 없이 정치를 시작했다.[5]
46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숙종은 여러 업적을 남겼다.
우선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까지 확대한 것이 주목된다.
강원도(1709)와 삼남 지방(1720)의 양전(과세 대상인 토지를 조사ㆍ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함)을 실시해
서북 지역의 일부를 빼고는 전국의 토지를 측량한 것도 중요한 시책이었다.
주전(鑄錢)을 확대한 것도 의미 있는 업적이다. 1678년(숙종 4) 1월부터 사용된 상평통보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조선 후기의 경제와 상업 발달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6]
또한, 숙종은 즉위한 이듬해 개성 천마산에 폐허로 남아있는 고려시대 산성인 대흥산성을 다시 축성하여 완성하고,
북한산성을 크게 개축해 도성 방어를 강화하는 등 국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12년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로 개편해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된 군제 개편을 사실상 완료하였다.[7]
정치에도 자신의 여인들을 이용했던 숙종, 그들과 함께 서오릉에 묻히다.
때는 바야흐로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이 드디어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숙종 이전까지는 붕당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같이 어우러져 지냈다. 서로를 정치를 하는 집단으로 인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숙종 대부터는 붕당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다른 붕당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즉, 한 붕당이 집권하면 다른 붕당을 모조리 없애는 일당 전제화가 시작된 것이다.
숙종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가 심화되고 붕당 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8]
이때의 정국 형세를 살펴보면, 숙종의 즉위 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숙종6)에 일어난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되었다.
이후 1688년 소의 장씨(이후 희빈 장씨)가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반대하자 1689년 기사환국을 주도해 서인들을 숙청한 뒤 남인을 재등용한다.
이후 중전 민씨(인현왕후)를 서인으로 폐출해 사가로 내보낸 뒤,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고 종묘사직에 알린다.
1694년에는 갑술환국이 일어나 기사환국 당시 왕비가 되었던 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되고 서인이 재발탁되었다.
이 환국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 변화가 있었다.
이후부터는 서인의 노·소론(老少論) 간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9]
각각 다른 정치 세력을 등에 업은 숙종의 여인들, 그러한 그들을 그저 여인으로만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숙종.
3차례의 환국을 치르면서 그 흐름의 시작에 있었지만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인경왕후,
숙종으로 인해 폐위와 복위를 거듭하여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국엔 숙종의 옆에 묻히게 된 최후의 승자 인현왕후,
한때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경종을 낳았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엔 자진을 명받은 희빈 장씨,
숙종 말년에 왕비가 되어 그의 마지막을 지켰던 인원왕후.
결국 숙종은 이러한 자신의 여인들과 함께 서오릉 속에 묻혔다.
능묘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으며, 사적 제198호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10]
명릉(쌍릉)의 모습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 숙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숙종 - 환국 정치의 명암 (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
- 숙종 - 환국으로 왕권을 강화하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이다지)
- 숙종 - 붕당, 무리를 지은 신하들 간의 대립 (생방송 한국사 6, 2017.01.20., 심선민, 최인수, 박종호, 고종훈, 공미라)
- 숙종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명릉
기여
주석
웹 자원
본명 | 이순(李焞) |
---|---|
자 | 명보(明普) |
국적/왕조 | 조선 |
시대 | 조선시대 |
출생~사망 | 1661년 ~ 1720년 |
성격 | 왕 |
재위기간 | 1674년 ~ 1720년 |
성별 | 남 |
가족관계 |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아버지 현종(顯宗),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
본관 | 전주 |
요약 | 1661(현종 2)∼1720(숙종 46). 조선 제19대 왕. |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며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 때 왕위(조선왕조 19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인경왕후 김씨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희빈 장씨에게선 두 아들을 두었다. 또한 숙빈 최씨에게서는 세명의 아들을 두었고 명빈 박씨에게서는 1명의 아들(연령군)을 두었다.
즉위한 이듬해 개성 천마산에 폐허로 남아있는 고려시대 산성인 대흥산성(大興山城)을 다시 축성하여 완성하였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재수축하여 북방의 방위에 힘썼다. 병자호란과 같은 혼란을 막기위해 국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49곳에 돈대를 쌓았다. 또한 청나라를 의식한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도 수축(숙종 38년)도 결행하였는데 국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숙종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군제를 개편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창설하여 5군영 체제를 갖추었지만 이는 외척과 서인 세력의 집권 안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고 실질적인 조선 군사력 강화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숙종이 집권한 당시 조선의 조정은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1680년 역모사건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경신환국)하였으며 이때 기호학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두고 서인 남인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세력이 치명상을 입고 실각하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하여 당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영향력으로 정계는 경직되었고 주희의 사상을 맹신하지 않는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고 개탄하였지만 당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숙종은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궁녀 출신인 숙원(淑媛) 장씨(張氏:장희빈)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왕자 이윤(李?)을 낳았다. 왕자가 출생한지 3개월 째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다. 왕자의 명호를 정하게되면 세자로 책봉되는 길이기에 서인들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자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을 유배형을 내렸고 결국 송시열은 이 일로 사사되었다. 숙종의 의지대로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고 숙종 사후 경종(景宗 1688~1724)으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왕비 인현왕후를 투기죄로 폐위하자 이를 반대하는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국문하여 유배형에 처하거나 처형하였고,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 일로 서인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이 서인세력을 대거 실각시키고 남인들이 다시 기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문묘에 종사되었던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이와 성혼도 출향되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인정하지 않고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들의 결집하자 우의정 민암 등이 타도하려고 시도하다 서인들의 역공으로 숙빈 최씨를 독살한다는 모함에 걸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숙종은 장희빈보다 무수리 출신의 궁녀 최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1694년 숙종은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키고(갑술환국)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국내적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로 선조 말 이후 계속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말년에는 소현세자의 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측은하게 여겨 강빈을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또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로 개편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