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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4일 (월) 17:26 판



정의

란(박경련)백석이 사모하던 여인이다. 본명은 박경련이지만 백석이 불렀던 이름인 란(蘭)으로 더 알려져 있다.

내용

생애

백석과 란

백석은 이 아리따운 처녀 박경련을 마나고 나서 몇 개월 후 <조선일보> 1936년 2월 21일자에 산문 <편지>를 발표했다.[2]

남쪽 바다ㅅ가 어떤 날근 항구의 처녀 하나를 는 좋하하엿습니다.머리가 깜아코 눈이 크고 코가 놉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엿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여 젊디젊은 그 아버지[3]는 가슴을 알어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섯달에도 눈이 오지 안는 따뜻한 이 날근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가티 살어왓습니다.


이에는 당시 백석이 란을 연모했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신현중

  • 생애

통영 출신인 신현중은 박경련 집안과도 잘 아는 처지였다. 1910년 경남 하동군 적량에서 아버지 신상재의 1남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진주 군청을 거쳐 통영 군청으로 이직한 보통학교 3학년 무렵, 통영으로 건너가 자랐다. 경성제대에 입학한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이 일어나자 격문을 시내 곳곳에 뿌린 혐의로 체포된 그는 3년형을 마치고 출소한 1935년 봄,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이름을 날린다.[4]

  • 백석의 친구 '신현중'

조선일보에서 근무했던 무렵부터 백석과 신현중, 그리고 허준은 형제처럼 어울려 다녔다. 신현중은 교정부에서 3개월쯤 일하다 1935년 1월에 사회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 셋은 광화문이든 종로든 퇴근만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만났다.[5]

  • 약혼자가 있던 '신현중'

신현중은 <동아일보> 주필로 있던 낭산 김준연의 큰딸 김자옥과 일찌감치 약혼을 해둔 상태였다. 김준연의 눈에 신현중은 명민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고, 딸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6]

  • 신순영의 오빠, 그리고 허준의 친구 '신현중'

신현중에게는 두 살 아래 여동생 신순영이 있었다. 신순영은 경성 서대문의 죽첨보통학교(지금의 서울금화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나중에 화가로 유명해진 미술교사 이동훈이 ㅇ같은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네 살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빠 신현중은 친구 허준을 매제로 삼기로 하고 주선에 나선다. 고향이 평북 용천인 허준은 외할머니가 혼자 운영하는 낙원동의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틀어박혀 글이나 쓰며 살아가는 게 그의 꿈이었다. 허준의 촉각은 음습한 '골방' 쪽을 택하고자 했다. 일본 유학을 하고도 졸업장을 포기하고 돌아온 그였다. 그런데 친구 신현중은 자신의 동생을 맡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자기방임적인 삶을 살고 싶은 허준에게 결혼은 짐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친구의 청을 거절한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그리하여 허준은 7월에 신순영과 결혼을 올리게 된다.[7]

  • 박경련의 남편 '신현중'

박경련과 혼인한 그는 1940년 모든 걸 접고 통영으로 귀향한다. 통영에서 그는 요시찰 인물로 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다시 상경해 조선통신사에 들어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진주로 내려와 진주여중교장을 시작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1950년 통영여중학교 교장, 1952년 통영중학교 교장, 1956년 부산남중학교 교장, 1962년 부산여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경남·부산의 교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과도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1980년에 영면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통영 미륵산 아래 묻혔다. 198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고, 1993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옮겨졌다.[8]

신현중의 배신과 둘의 결혼

불쑥 펼쳐진 1937년 봄은 잔혹했다. 백석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통영의 박경련과 그의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이 결혼했다는 소식이 함흥으로 날아들었다. 신현중은 4월 7일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약혼녀였던 김준연의 딸 자옥과 파혼을 하고 통영의 경련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었다. 백석이 그녀를 난으로 부르며 그토록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아는 신현중이었다.[9]
통영시에서 발간한 《예향 통영(2010)》에는 당시의 전후 사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37년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10] 낯선 평북 태생의 백석보다는 동향 출신에 집안 사정도 익히 알고 있는 신현중에게 딸을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정작 통영 명정골 396번지 대문을 열고 들어간 이는 백석이 아니라 신현중이었다.[11]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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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2. 안도현 「백석평전」 74p
  3. 박경련의 아버지 박성숙은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는데, 박경련도 이때 몸이 허약하고 폐가 좋지 않아 이화여고보를 한 해 휴학한 적도 있었다.(안도현 「백석평전」 74p)
  4. 국민일보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
  5. 안도현 「백석평전」 67p
  6. 안도현 「백석평전」 71p
  7. 안도현 「백석평전」 71p
  8. 국민일보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
  9. 안도현 「백석평전」 155p
  10. 안도현 「백석평전」 153p
  11. 국민일보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