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속 암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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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위스 뇌샤텔 출생. 16세 때 보르도에서 의학을 배우고, 1765∼1775년 런던에서 의학을 연구하면서 1774년 《노예제도의 사슬》을 저술하여 절대주의적 정치구조를 비판하였다. 1789년 7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9월 《인민의 벗 Ami du Peuple》지(紙)를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참여를 고취하였다.1792년 8월 16일 민중봉기시에는 파리코뮌을 지도하면서 지롱드당과 대항하였고, 국민공회(國民公會)의 산악당(山岳黨)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정치강령은 철저하게 인민주의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소농민과 소시민층의 절대생활권 보장과 모든 특권층과 기생계급을 없앨 것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1793년 7월 산악당의 독재를 증오하는 반혁명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에게 자택 욕실에서 암살당하였다. | ||
− | + | 두번째 인물, 앙리 4세_프랑스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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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14일 이른 오후, 그는 병상에 누워 있는 쉴리공을 문병하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루브르 궁전을 떠난 마차가 비좁은 페롱네리 거리에서 교통혼잡으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부는 속력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 ||
+ | 그 때 갑자기 프랑수아 라바이악이라는 미치광이가 뛰쳐나와 앙리의 마차에 올라타더니 장칼로 왕을 두 번이나 찔렀다. 그때 국왕은 소리쳤다 “이크, 나 다쳤어(Je suis blessé)!” 국왕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 ||
+ | 이 암살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예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했다고 주장하면서, 일체 공범여부를 부인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왕비의 측근이나 친 스페인파들이 이 암살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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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mall><small>(차례로) 기즈 공작,기즈 공작의 암살-폴 들라로슈</small></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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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년 2월 17일 ~ 1563년 2월 24일)는 프랑스의 귀족이자 군인이다. 기즈 공작 클로드와 방돔 백작의 딸 앙투아네트의 장남이다. 형제로는 스코틀랜드 왕비 마리, 로렌 추기경 샤를 등이 있다. | ||
+ | 1548년 4월 29일 에스테 가문의 딸인 안나 데스테와 결혼했다. 그녀는 친가 쪽으로는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와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손녀였고 외가로는 루이 12세의 딸이자 앙리 2세의 이모인 르네 드 프랑스를 어머니로 둔 프랑스 왕가의 혈통이었다. | ||
+ | 프랑수아는 당시 국왕이었던 앙리 2세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셈이었다. 프랑수아는 조카딸인 메리 스튜어트를 앙리 2세의 아들이자 미래의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2세와 약혼시켰다. 1559년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한 뒤에는 아직 어리고 허약한 왕을 대신해 | ||
+ | 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560년 프랑수아 2세가 죽고 동생 샤를이 즉위하면서 프랑수아는 세력을 잃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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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고 왕태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위그노의 집회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프랑수아는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의 수장적인 존재였다. | ||
+ | 1562년 3월 1일 샹파뉴의 바시를 지나가던 프랑수아와 그 일행이 위그노 2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위그노 전쟁이 발발했고 이듬해인 1563년 프랑수아는 위그노 교도에게 맞은 총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 ||
==기여== | ==기여== |
2017년 6월 18일 (일) 18:54 판
프랑스 속 암살
인게임 : 프랑스 출신인 위도우메이커 캐릭터의 특성
위도우는 탈론에 속해있는 암살자이다. 주무기인 죽음의 입맞춤으로 적을 저격해 사살한다. 눈에 잘 띄지않는 색과 디자인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녀는 암살자의 특성을 확고하게 나타내고있다.
적을 저격하는 위도우메이커.
갈고리 스킬을 이용해 민첩하게 이동하는 위도우메이커.
아웃게임 : 프랑스 역사 속 암살된 인물들
첫번째 인물, 장 폴 마라_프랑스 혁명가
마라의 죽음 - 자크 루이 다비드
스위스 뇌샤텔 출생. 16세 때 보르도에서 의학을 배우고, 1765∼1775년 런던에서 의학을 연구하면서 1774년 《노예제도의 사슬》을 저술하여 절대주의적 정치구조를 비판하였다. 1789년 7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9월 《인민의 벗 Ami du Peuple》지(紙)를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참여를 고취하였다.1792년 8월 16일 민중봉기시에는 파리코뮌을 지도하면서 지롱드당과 대항하였고, 국민공회(國民公會)의 산악당(山岳黨)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정치강령은 철저하게 인민주의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소농민과 소시민층의 절대생활권 보장과 모든 특권층과 기생계급을 없앨 것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1793년 7월 산악당의 독재를 증오하는 반혁명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에게 자택 욕실에서 암살당하였다.
두번째 인물, 앙리 4세_프랑스 왕
앙리 4세
5월 14일 이른 오후, 그는 병상에 누워 있는 쉴리공을 문병하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루브르 궁전을 떠난 마차가 비좁은 페롱네리 거리에서 교통혼잡으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부는 속력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프랑수아 라바이악이라는 미치광이가 뛰쳐나와 앙리의 마차에 올라타더니 장칼로 왕을 두 번이나 찔렀다. 그때 국왕은 소리쳤다 “이크, 나 다쳤어(Je suis blessé)!” 국왕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 암살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예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했다고 주장하면서, 일체 공범여부를 부인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왕비의 측근이나 친 스페인파들이 이 암살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세번째 인물, 프랑수아 드 기즈_프랑스 공작
(차례로) 기즈 공작,기즈 공작의 암살-폴 들라로슈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 1519년 2월 17일 ~ 1563년 2월 24일)는 프랑스의 귀족이자 군인이다. 기즈 공작 클로드와 방돔 백작의 딸 앙투아네트의 장남이다. 형제로는 스코틀랜드 왕비 마리, 로렌 추기경 샤를 등이 있다. 1548년 4월 29일 에스테 가문의 딸인 안나 데스테와 결혼했다. 그녀는 친가 쪽으로는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와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손녀였고 외가로는 루이 12세의 딸이자 앙리 2세의 이모인 르네 드 프랑스를 어머니로 둔 프랑스 왕가의 혈통이었다. 프랑수아는 당시 국왕이었던 앙리 2세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셈이었다. 프랑수아는 조카딸인 메리 스튜어트를 앙리 2세의 아들이자 미래의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2세와 약혼시켰다. 1559년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한 뒤에는 아직 어리고 허약한 왕을 대신해 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560년 프랑수아 2세가 죽고 동생 샤를이 즉위하면서 프랑수아는 세력을 잃었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고 왕태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위그노의 집회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프랑수아는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의 수장적인 존재였다. 1562년 3월 1일 샹파뉴의 바시를 지나가던 프랑수아와 그 일행이 위그노 2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위그노 전쟁이 발발했고 이듬해인 1563년 프랑수아는 위그노 교도에게 맞은 총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기여
- 하재현: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