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석탄역사체험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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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북탄광 노사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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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실'''==
 
=='''관련 사실'''==
 
===사북탄광 노사분규===
 
===사북탄광 노사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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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지만, 탄광만은 예외였다.‘막장 인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던 곳이 바로 탄광이었다.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힘든 작업으로 인해 광부들은 도시 노동자들에 비해 약간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려야 했으며, 생필품의 부족으로 인해 물가도 다른 지역보다 30% 정도 높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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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21일 사북 탄광 노조들은 임금 인상을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를 진압하러 나선 경찰과 맞서는 과정에서 4명의 광부들이 경찰의 지프에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에 흥분한 광부들에 의해 한 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으며, 광부들이 사북 지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월 24일 정부 측 대책위원들과 노동자 대표들의 합의가 이루어져 사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주 후 합동수사본부는 70여 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연행하고, 25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1980년 4월21일 사북 탄광 노조들은 임금 인상을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를 진압하러 나선 경찰과 맞서는 과정에서 4명의 광부들이 경찰의 지프에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에 흥분한 광부들에 의해 한 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으며, 광부들이 사북 지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월 24일 정부 측 대책위원들과 노동자 대표들의 합의가 이루어져 사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주 후 합동수사본부는 70여 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연행하고, 25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2017년 4월 6일 (목) 06:49 판


개요

강원도 정선 소재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탄역사 체험터. 폐광된 사북탄광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한 곳. 지하 암반 굴착 장비, 적재장비, 운반 장비 등을 전시.

사북.JPG

위치

구성

사북석탄유물보존관

  • 강원도 정선에 있는 사북석탄유물보존관은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탄역사 체험터이다. 폐광된 사북탄광을 관광자원으로 해 지하 암반 굴착 장비, 적재장비, 운반 장비 등을 전시하여 광부들의 실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 사북탄광은 1950년대에 개발을 시작해 2004년 폐광될 때까지 재직 광원이 6,300명에 이르고 1987년 석탄생산이 200만 톤을 넘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탄광이었다.
  • 사북석탄유물보존관 1층에는 광부들의 샤워실, 보안장비실, 채탄장비실, 사진전 외 14실이 있고, 2층에는 광부복장체험 안전등실, 도면실, 문서자료실 외 9실로 구성되어 있다. 야외에는 광산정비전시장, 광부인차탑승체험장, 경석장, 영상실 등이 있다. 특히 실제 폐광을 입갱할 수 있는 광부인차 탑승 체험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사북은 매년 석탄문화제로 고장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사북 탄광 문화 관광촌

  • 1962년부터 2004년까지 석탄을 캐던 동양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가 폐광된 이후 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는 곳이다. 당시의 샤워실, 채탄 장비실, 세화실 및 광산 장비 등 폐광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현장감과 사실감을 느낄 수 있다.
  • 강원랜드와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포함된 사북읍 번영회가 공동으로 탄광문화관광촌을 지속적으로 조성중에 있으며 현재는 1차로 사북석탄유물보존관 및 탄광역사체험장(갱도 열차체험) 등을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관련 사실

사북탄광 노사분규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지만, 탄광만은 예외였다.‘막장 인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던 곳이 바로 탄광이었다.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힘든 작업으로 인해 광부들은 도시 노동자들에 비해 약간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려야 했으며, 생필품의 부족으로 인해 물가도 다른 지역보다 30% 정도 높은 편이었다.

1980년 4월21일 사북 탄광 노조들은 임금 인상을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를 진압하러 나선 경찰과 맞서는 과정에서 4명의 광부들이 경찰의 지프에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에 흥분한 광부들에 의해 한 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으며, 광부들이 사북 지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월 24일 정부 측 대책위원들과 노동자 대표들의 합의가 이루어져 사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주 후 합동수사본부는 70여 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연행하고, 25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6월 13일 주모자 이원갑씨 등 관련자 81명을 1군 계엄보통군법회의 감찰부에 계엄포고령법위반, 업무상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또 동원탄좌가 1971년 1월부터 1980년 4월까지 광부들의 채탄량을 검탄하는 과정에서 10여 억 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사실을 밝혀내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를 모두 광부들의 후생복지시설에 투입토록 조치했다고 밝혔다.[1]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진상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2]

동원탄좌

동양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는 1963년 문을 열었다. 1974년 연간 석탄생산량이 100만t을 돌파하는 등 석탄산업 호황기를 맞아 초고속 성장했다. 1980년 4월 회사 쪽의 착취와 어용노조의 횡포에 반발한 광부들이 들고 일어난 ‘사북항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는 종업원 수만 6000명이 넘었으며, 사북읍 10가구 가운데 8가구 정도가 광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 정선지역 탄광 가운데 가장 늦은 2004년 10월 문을 닫았다. 다른 탄광은 폐광 뒤 건물 철거 등으로 자취를 감췄지만 동원탄좌는 사북석탄역사체험관으로 탈바꿈해 탄광 관련 유물만 1600종 2만점가량이 남아있다.

2004년 문닫은 동원탄좌는 강원랜드가 인수해 관리하고 있다.강원랜드는 정선군 사북읍에 있는 옛 동원탄좌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동양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가 한국 근대기 경제의 주체였고, 석탄문화제로 이어진 인문학적 요소를 두루 지니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1년 산업기념물로 인증돼 세계유산에 등재된 독일 졸버레인 탄광 산업단지와 같은 형태다. [3]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임승수, 『사북탄광』, 오늘의문학사, 2016

주석

  1. "사북사건 비하인드 스토리" 프레시안
  2. "그때오늘" 중앙일보
  3. "동원탄좌 유네스코 등재 추진"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