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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3일 (월) 00:40 판
박공달(朴公達) | |
대표명칭 | 박공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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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朴公達 |
출생일 | 1470년 |
사망일 | 1544년 |
본관 | 강릉(江陵) |
호 | 강호(江湖)·사지(四止)·사휴당(四休堂) |
자 | 대관(大觀)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박시행(朴始行) |
모 | 영양남씨 진사 과의 딸 |
박공달(朴公達, 1470년 ~ 1544년)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1470년(성종 경인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말을 가려서 했다. 아무리 춥고 더운 날이라 하더라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앉으니, 고을 사람들이 선사라 칭하였다. 연산군 을묘년(1495)에 생원에 합격하였는데, 나이 26세였다. 자신을 수양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가만히 앉아 독서만하고 다시는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이후 충암이 기묘년1518 4월에 극력 천거하여 홍문관 저작에 임명되고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해 11월 15일에 사림에 화가 일어나 북문으로 밤에 나와 아침에 동시에 이르렀다. 소인배들이 현량과를 가리켜 공적인 것이 아니라 하여 폐지해 버렸다. 강릉에 퇴거하여 사월촌에 집을 짓고 종질 삼가당 박수량과 더불어 경학을 강하고 연마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세상을 잇고 살았다. 인종 을사년 (1545)에 이르러 다시 천과로 명하여 승문원 교검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 즉위초에 이기와 윤인경 등이 아뢰어 또 천거과를 폐지했다. 선조 무진년 1568에 상공 이준경 등이 뇌진의 변으로 인하여 계문을 올려 다시 천과를 설치하니, 이후 본직을 되찾았다. 향년 84세에 졸했다.
인조 23년(1645)에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여담
박공달의 행적은 동국명현록, 기묘당적, 기묘명현록 등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