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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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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보는 인현왕후'''== | =='''재미로 보는 인현왕후'''== | ||
2019년 6월 24일 (월) 20:20 판
목차
정의
1667(현종 8)∼1701(숙종 27).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내용
생애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송준길의 딸이다.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숙종 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하였으며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1701년 사망하였는데 소생이 없었으며,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懿烈貞穆仁顯王后)이다.
숙종의 변덕으로 폐위와 복위를 거듭한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늘 숙종의 관심이 고팠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장옥정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人)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다.
하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 또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
1688년 장씨가 왕자 윤(뒷날의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서인들은 숙청되기 시작했고 이 문제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인현왕후도 폐위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庶人)이 되었고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693년 무수리였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환국이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그 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씨와 화기를 도모하면서 살았으나, 원인모를 질병으로 1701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관련 사건
능묘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으며, 사적 제198호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1]
명릉(쌍릉)의 모습
재미로 보는 인현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