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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목적이었다.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정찰과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최선일(崔善一)]]·[[최인서|최인서(崔仁瑞)]]·[[심순녀|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 학살에 대한 강경한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조선 조정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병인양요, 김원모]</ref> |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목적이었다.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정찰과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최선일(崔善一)]]·[[최인서|최인서(崔仁瑞)]]·[[심순녀|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 학살에 대한 강경한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조선 조정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42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병인양요, 김원모]</ref> |
2019년 6월 23일 (일) 02:23 기준 최신판
강화도방어체계_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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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시간 | 1866년 9월 18일 |
사건 종료 시간 | 1866년 12월 21일 |
한글표기 | 병인양요 |
한자표기 | 丙寅洋擾 |
영문표기 | |
사건 종류 | 외세침략 |
관련 방어시설 | 덕진진, 초지진, 갑곶돈대 |
목차
내용
병인양요의 배경
1866년(조선 고종 3) 초에 대원군은 병인사옥으로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때 프랑스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하였다. 이에 로즈는 대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범하였다. [1]
병인양요의 진행 상황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목적이었다.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정찰과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최인서(崔仁瑞)·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 학살에 대한 강경한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조선 조정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2]
프랑스군의 패배와 철수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 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거하였다. 드디어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정족진(鼎足鎭)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 하의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李濂) 지휘 하의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李大興) 지휘 하의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이 패배의 여파로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3]
강화도 방어체계와 관련
병인양요와 관련된 진과 돈대는 바로 덕진진, 초지진, 갑곶돈대이다. 덕진진은 이 시기 순무천총 양현수가 부대를 이끌고 덕진진을 거쳐 몰래 삼랑성으로 가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다. 초지진은 프랑스 함대와 교전을 벌인 곳이며, 갑곶돈대는 프랑스 군인 600명이 강화산성을 점령하기 위한 길목에 놓여 있어, 결국 점령당했고, 이곳에 프랑스 군이 상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