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 한중수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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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6일 (목) 11:27 기준 최신판


개요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한 일.

내용

중국은 1949년 정부를 수립한 후 모든 친미국가를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은 거의 30년동안 단절의 벽을 쌓고 지냈다.

그러다 70년대초 미­중화해무드로 한반도주변정세에 변화가 일자 한국은 73년 6·23선언을 통해 비적대적인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념과 체제에 관계없이 모든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했다.

이어 1978년 중국이 제 11기 제 3차 전인대에서 개혁실용주의를 채택하고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한국과 중국관계의 우호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70년대에 삼각무역 등 제 3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교류를 해오던 중에 83년 5월 중국민항기가 공중피랍돼 한국의 춘천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 정부관계자들이 접촉하게 됐는데 이는 한­중간 최초의 공식대면이 됐다.

이후 양국은 체육, 관광, 이산가족, 친척방문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교류를 시작하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 중국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여 두나라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이루어졌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서로의 선수단 교류가 있었다.

1990년에 들어와서 양국은 영사기능의 일부를 수행하는 무역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여 새로운 교류의 이정표를 마련하였으며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한중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이후 한국과 중국은 활발한 경제, 문화, 사회 교류를 이어왔으며 2001년 중국은 우리의 제2위 수출대상국, 최대 투자대상국으로 부상했다.


영향[1]

수교 후 한국 기업들의 '차이나 러시' 가속화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한국과 연고가 있는 지린(吉林)·랴오닝(遼寧)·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포 집단거주 지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 한국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동포들이 한국계 기업에 노무직뿐 아니라 통역 등으로 일했고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식당과 유흥업소도 번성했다.

7월 14일자 흑룡강신문에 따르면 올해로 설립 60주년(9.3)을 맞는 옌볜자치주의 지난해 지역내총생산(GRDP)이 652억위안, 1인당 생산총액은 2만9천782위안으로 1952년에 비해 각각 61배, 21.5배 늘었다.

수출입통계 작성을 시작한 1954년 38만달러이던 무역 규모도 2007년 10억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 18억5천만달러로 늘어나 무려 5천배 증가했다.

옌볜주의 대학생 수는 2만2천명으로 1952년의 19.6배에 달했다. 공공도서관과 박물관은 각각 9개, 10개로 느는 등 교육과 문화 수준도 크게 높아졌다.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좇아 본격적으로 한국을 찾게 된 것도 수교가 가져온 현상이다.

동포들은 국내 3D 산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1993년 도입된 산업연수생 제도(2001년부터 '1년 연수, 2년 취업')와 방문취업제(2007년) 등에 힘입어 단순 노무직을 중심으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한국행 비자를 신청했다.

이들은 힘들게 번 돈을 고향으로 송금해 중국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조선족인터넷매체인 `조글로미디어'에 따르면 최근 해외 노무자들이 옌볜조선족자치주로 보내는 돈은 10억달러로 자치주 재정 총수입의 2.5배에 달한다.

그려나 조선족이 줄지어 한국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입국자가 브로커 등에 속아 귀국을 포기, 불법 체류자로 전락했다. 수교 후 주로 청년층이 구직이나 결혼을 목적으로 서울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로 떠나면서 조선족 사회는 가족해체, 농촌 공동화 현상, 조선족 학교 급감, 청소년층의 정체성 상실 등을 겪어야 했다.

한때 200만명으로 알려진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는 현지의 가임 연령층 감소에 따라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중국국가통계국이 지난 7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제6차 전국인구조사 민족별 인구통계자료에 따르면 1990년 제4차 인구조사(192만597명) 때보다 8만9천668명(4.6%) 감소했다.

2010년 말부터 지난해 초까지 진행된 이 조사 결과 중국 내 조선족은 여성(92만394명)이 남성(91만535명)보다 약간 많았다.

지역별로는 옌볜자치주가 있는 지린성의 조선족 인구가 104만16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헤이룽장성(32만7천806명), 랴오닝성(23만9천537명) 순이었다. 이들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는 전체 조선족의 87.8%를 차지했다.

이밖에 산둥성(6만1천556명), 상하이시(2만2천257명), 네이멍구자치구(1만8천464명), 톈진시(1만8천247명), 광둥성(1만7천615명), 허베이성(1만1천296명) 등 그동안 한국 기업·기관의 진출이 활발했거나 산업이 발달한 도시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부 통계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은 29만7천명이고 조선족 결혼 이민자는 2만9천명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불법체류자 등을 합치면 37만명에서 최대 50만명으로 추산한다. 미국, 일본 등 해외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약 1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대표적인 조선족 밀집지역인 대림동의 `중앙통'으로 불리는 중앙시장 밤거리. 중국음식점과 식료품점, 여행사 등이 즐비해 있다 (자료사진)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 인구가 감소하면서 옌볜자치주의 경우 1995년 조사 당시 86만명을 헤아렸으나 2009년 80만명으로 7% 가량 줄었다. 조선족 비율은 자치주 건립 초기인 1953년 조사 당시 70.5%에서 절반 수준인 36.7%로 크게 떨어졌다.

이 같은 조선족 감소세가 지속되면 옌볜이 조선족자치주 지위를 잃게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조선족 마을의 생활 터전도 크게 잠식된 상황이다. 농지와 주택 등을 처분한 뒤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은 귀국해도 이미 자리를 차지한 한족(漢族)에 밀려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경제적으로 성공해 귀국하더라도 이미 터줏대감이 된 한족과 충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각주

  1. <한중수교 20년과 조선족>① 빛과 그림자, 연합뉴스, 2012.08.23.


관련항목

S(객체1) V(관계) O(객체2)
한중수교 A는_B에_포함된다. 황하의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