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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일 (목) 17:12 기준 최신판
법흥사(法興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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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
지정일 | |
지정 명칭 | |
한자 명칭 | |
영문 명칭 | |
분류 | |
건립·제작 | |
주소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
위도 | 37.371749 |
경도 | 128.261156 |
웹사이트 |
목차
위치
가상현실
기본정보
-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本寺)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寺)
- 창건시기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 422-1)
법흥사의 키워드
법흥사홈페이지>법흥사소개 발췌[1]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위해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흥녕사(興寧寺)로 창건했다.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나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그 후 폐사지에 가까웠던 흥녕사가 1902년 대원각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1912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이전 중수하였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옛 흥녕선원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3개의 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사리탑(강원도 유형 문화재 73호),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612호),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흥녕선원지(강원도 지정 기념물 6호)가 있고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의 소중한 삼보종재가 남아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
자장율사(590년경~658년경)는 신라의 승려로,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는 법도를 확립하여 한국 계율 불교의 완성자로 평가받는다. 당나라로 가서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기도하고, 가사(袈裟)와 부처의 발우, 그리고 불두골(佛頭骨) 한 조각과 함께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 자장은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佛國土) 사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산의 신라적 설정이다. 『화엄경』에 따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중국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오대산이 신라에도 있으며, 문수진신(文殊眞身)과 5만의 여러 불·보살이 머무르고 있다는 신앙을 신라에 전하였다.[2]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3]
한국의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은 다음과 같다.[4]
-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적멸보궁
- 자장이 반야(般若)의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 근본인 계를 금강석처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석가모니의 가사와 진신사리를 모셨다.
- 강원도 평창 오대산 중대(中臺) 상원사(上院寺)의 적멸보궁
-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거주지로 보고 사리를 모신 뒤 적멸보궁을 쌓았는데, 뒤에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 중대지로산(中臺地爐山)에 절을 지었다. 지금은 불사리를 안치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뒤쪽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 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의 적멸보궁
- 자장이 창건하고 5층석탑에 불사리를 안치하였다.
-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 자장이 경전을 담아온 석함 등이 있다
-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으로, 보궁 건물 뒤쪽 산 위에 수마노탑이 있다.
사자산문(獅子山門)
사자산문의 실제 개창자는 징효절중(澄曉折中)이지만, 산문의 개산조는 철감도윤(澈鑒道允)이다. 사자산문을 개창한 절중은 풍악 장담사(長潭寺)에 주석하고 있는 도윤을 찾아가 16년간 법을 배웠다. 이후 그는 흥녕선원(興寧禪院, 지금의 법흥사)을 근본 도량으로 하여 사자산문을 개창하였다. 헌강왕이 흥년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하고, 그 후 정강왕과 진성여왕대에도 대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 절중은 도윤의 법인을 이었으면서도, 자인(慈忍)이나 대통(大通) 승려와의 교류를 통해 성주산문(聖住山門)과 관련을 맺었다. 또한 개청(開淸)의 제자인 홍림(弘琳) 스님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보아 사자산문은 주위의 여러 산문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5]
법흥사의 전각
- 일주문
- 코끼리와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진 일주문 기둥[6]
- 원음루
- 법고, 운판, 목어가 있는 누각[7]
- 삼성각
- 칠성님 또는 칠원성군님, 독성님 또는 나반존자님, 용왕대신님을 모신 곳[9]
- 범종각
-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 울리는 종이 있는 누각[10]
- 산신각
- 사자산, 구봉대산, 백덕산의 세 명의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전각. 특히 백덕산 산신은 여 산신으로 아주 영험하다고...[11]
- 약사전
-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 언제나 기도할 수 있도록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법당[12]
- 극락전
-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모셔져 있는 전각[13]
법흥사의 문화유산
- 영월법흥사부도 (寧越法興寺浮屠),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
- 법흥사 적멸보궁 뒤쪽에 놓여 있는 부도. 아직 밝혀 지지 않은 주인.
- 영월법흥사석분(寧越法興寺石墳),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 자장율사가 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토굴.
- 영월징효국사부도 (寧越澄曉國師浮屠),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
- 사자산문의 개창자 징효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 부도 옆엔 오랜 시간(500여년) 함께 도량을 지키고 있는 밤나무가 있다고...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보물 제612호
-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석비.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최윤(崔潤)이 쓰고, 최오규(崔奧規)가 새김.
- 흥녕선원지 (興寧禪院址), 강원도 기념물 제6호
- 사자산문 흥녕선원의 본거지. 1933년 이곳에서 1km 정도 산쪽으로 올라와 다시 절을 지은 것이 지금의 법흥사로, 법흥사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밭 앞쪽에 위치하고 있음.[14]
- 패엽경(貝葉經)
- 종이가 없던 시절에 인도에서 영라수(靈羅樹) 잎에 경전을 기록하던 것으로, 앞뒤 가득하게 범어로 쓰여져 있는 희귀한 것. 본래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봉안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공산 치하를 피하여 한 승려가 남한으로 가지고 내려왔고, 그 후 30여년 동안 행방이 묘연하다가 부산의 한 절의 주지가 신도로부터 얻어 법흥사에 봉안하게 되었다고 함.[15]
원 페이지
출처
- ↑ 법흥사홈페이지 법흥사소개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장'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적멸보궁'
- ↑ 두산백과 '오대적멸보궁'
-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한국불교사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조계종출판사, 2011, pp.91-92.
- ↑ 법흥사홈페이지 일주문
- ↑ 법흥사홈페이지 원음루
- ↑ 법흥사홈페이지 만다라전
- ↑ 법흥사홈페이지 삼성각
- ↑ 법흥사홈페이지 범종각
- ↑ 법흥사홈페이지 산신각
- ↑ 법흥사홈페이지 약사전
- ↑ 법흥사홈페이지 극락전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흥녕선원지'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법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