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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5일 (일) 08:1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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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버힌 남기 백척장송(百尺長松) 아니런가.
저근덧 두었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리니 
이 뒤 명당(明堂)이 기울면 어느 남기 받치리.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山水間)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 절로절로 늙사오려.

노화(蘆花) 피온 곳에 낙하(落霞)를 빗겨 띄고
삼삼오오(三三五五)히 섞여 노는 저 백구(白鷗)야
우리도 강호구맹(江湖舊盟)을 찾아볼까 하노라.

이 세 작품은 모두 <하서속집(河西續集)>에 한역시(漢譯詩)와 함께 실려 있고, 시의 내용도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 첫 수는 임형수(林亨秀)의 죽음을 애도한 시인데, 임형수가 죽었을 때 12살이었던 정철이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수는 유배 시절에도 위국충정으로 가득 차 있던 송시열의 작품이라기보다 강호에서 유유자적한 김인후의 자연관에 더 어울린다. 셋째 수도 소재적 측면에서 송강의 시보다는 그의 한시에 더 가깝다고 한다.

첫 수는 ‘도임사수사작단가(悼林士遂死作短歌)’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임형수가 양재역 벽서사건 때 윤임 일파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해서 지은 작품이다. 물론 겉으로는 기둥감의 훌륭한 나무가 베어진 것을 아깝게 여기는 것으로 되었다. 초장은 백척장송을 베어버린 무자비함을 한탄함이고, 중장은 동량재로 쓰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다. 그리고 종장은 임금의 정전(正殿)이 기울어질 때 무엇으로 지탱할 것이냐고 하여 임형수가 나라를 떠받칠 인재였음을 생각하고 애통해 하는 것이다. 정철이 스승인 김인후의 이 시조를 “어와 버힐시고 낙락장송 버힐시고 / 저근덧 두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 어즈버 명당이 기울거든 무엇으로 받치려뇨.”라고 고쳤을 것이다.

둘째 수는 산수간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노래다. 그는 38살 이후에 벼슬을 버리고 산수간에서 시와 술을 즐기고, 학문과 교육으로 일생을 마친 만큼 그의 삶에 잘 어울린다. 초,중장에서 산과 물은 동정(動靜)의 측면에서 대립되지만 자연성의 측면에서 통합되고 있다. 이런 속에서 자신도 자연성에 접근한다고 하여 노장적(老莊的) 자연 친화의 인생관을 보여준다. 종장에서 자연의 도에 순응하여 살아갈 것을 권하여 노장적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였지만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만큼 이러한 자연관을 드러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입장에서 이런 자연관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송시열의 창작이라기보다 손질한 작품으로 봐야할 것이다.

셋째 수는 흰 갈매기를 벗삼아 강호에서 노니는 생활을 읊은 것이다. 초장은 갈대꽃 핀 곳에 지는 노을이 비껴있다는 배경 설정이다. 중장은 삼삼오오 짝지어 노는 흰 갈매기를 제시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투사했다.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자연 속에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종장에서 갈매기와 시인이 강호에서 살아가기를 기약했던 바를 찾아보자고 하여 자신의 지향을 확실하게 하였다. 사랑하던 임금이 죽고 험난한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갈매기와 더불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