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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화순 쌍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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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칭 = 和順 雙峯寺
 
|한자명칭 = 和順 雙峯寺
|영문명칭 = Ssangbongsa temple in Hwasu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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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sangbongsa Temple, Hwasun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건립·제작 = 839년 이전으로 추정(후기신라)  
 
|건립·제작 = 839년 이전으로 추정(후기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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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화순 쌍봉사는 3층 목탑형 불전인 대웅전과 국보 제57호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2 철감선사탑] 및 보물 제170호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3 철감선사탑비] 등이 있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247호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662 송광사]의 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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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쌍봉사는 3층 목탑형 불전인 대웅전과 국보 제57호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2 철감선사탑] 및 보물 제170호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3 철감선사탑비] 등이 있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247호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662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도윤(道允, 798~868)]과 함께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MAS_IDX=101013000756998&_method=view 구산조사(九山祖師)]의 한 사람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644 혜철(惠哲, 785~861)]이 839년<ref>839년은 후기신라(통일신라) 민애왕이 희강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 해이자,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이 된 신무왕의 원년이며, 신무왕의 병사로 왕위에 오른 그의 태자 문성왕의 원년이다. 그 해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다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여기서 원년이라 함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591 칭원법(稱元法)]상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 중 삼국시대의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에 의거한 것이다.</ref>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하는 점<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577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비문에 나와 있다. 태안사 적인선사탑(泰安寺寂忍禪師塔)은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泰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 또는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ref>을 고려할 때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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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 창건 연대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도윤(道允, 798~868)]과 함께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MAS_IDX=101013000756998&_method=view 구산조사(九山祖師)]의 한 사람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644 혜철(惠哲, 785~861)]이 839년<ref>839년은 후기신라(통일신라) 민애왕이 희강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 해이자,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이 된 신무왕의 원년이며, 신무왕의 병사로 왕위에 오른 그의 태자 문성왕의 원년이다. 그 해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다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여기서 원년이라 함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591 칭원법(稱元法)]상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 중 삼국시대의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에 의거한 것이다.</ref>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하는 점<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577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비문에 나와 있다. 태안사 적인선사탑(泰安寺寂忍禪師塔)은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泰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 또는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ref>을 고려할 때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쌍봉사라는 이름은 이 절의 앞뒤로 산봉우리가 쌍봉인 데에 근거하는데, 847년(문성왕 9)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이 쌍봉(雙峰)으로 자신의 도호를 정하고 사찰명도 쌍봉사로 지었다고 한다.<ref>[http://www.ssangbongsa.org/category/쌍봉사이야기/쌍봉사History 쌍봉사 홈페이지] 참조.</ref> 다만 창건 연대와 비교하자면, 사찰명을 철감선사가 지었는지 여부와 그 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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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 쌍봉사라는 이름은 이 절의 앞뒤로 산봉우리가 쌍봉인 데에 근거하는데, 847년(문성왕 9)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02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이 쌍봉(雙峰)으로 자신의 도호를 정하고 사찰명도 쌍봉사로 지었다고 한다.<ref>[http://www.ssangbongsa.org/category/쌍봉사이야기/쌍봉사History 쌍봉사 홈페이지] 참조.</ref> 다만 창건 연대와 비교하자면, 사찰명을 철감선사가 지었는지 여부와 그 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대웅전은 상륜(相輪) 부분을 빼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는 건물(보물 제163호)이었는데, 1984년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실되면서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8C%8D%EB%B4%89%EC%82%AC 위키백과]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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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 대웅전은 상륜(相輪) 부분을 빼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는 건물(보물 제163호)이었는데, 1984년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실되면서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8C%8D%EB%B4%89%EC%82%AC 위키백과]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ref>  
  
철감선사탑은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작으로 손꼽히며,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라고 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쌍봉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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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 철감선사탑은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작으로 손꼽히며,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라고 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13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쌍봉사']</ref>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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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9일 (월) 21:06 기준 최신판


개요

   화순 쌍봉사는 3층 목탑형 불전인 대웅전과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 및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 등이 있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247호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도윤(道允, 798~868)과 함께 구산조사(九山祖師)의 한 사람인 혜철(惠哲, 785~861)이 839년[1]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하는 점[2]을 고려할 때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쌍봉사라는 이름은 이 절의 앞뒤로 산봉우리가 쌍봉인 데에 근거하는데, 847년(문성왕 9)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이 쌍봉(雙峰)으로 자신의 도호를 정하고 사찰명도 쌍봉사로 지었다고 한다.[3] 다만 창건 연대와 비교하자면, 사찰명을 철감선사가 지었는지 여부와 그 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대웅전은 상륜(相輪) 부분을 빼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는 건물(보물 제163호)이었는데, 1984년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실되면서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4]

   철감선사탑은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작으로 손꼽히며,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라고 한다.[5]

위치

Virtual Pavilion

이번 답사의 촬영 결과물로 제작해서 넣을 예정.

전경

화순 쌍봉사 전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건조물 배치도

화순 쌍봉사 배치도(Daum지도)

갤러리

관련 항목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화순 쌍봉사 보유 문화재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쌍봉사 극락전,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지장전 지장보살상일괄
화순 쌍봉사 관련 인물 철감선사 도윤, 적인선사 혜철
화순 쌍봉사 관련 공간 계당산, 송광사

기여

주석

  1. 839년은 후기신라(통일신라) 민애왕이 희강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 해이자,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이 된 신무왕의 원년이며, 신무왕의 병사로 왕위에 오른 그의 태자 문성왕의 원년이다. 그 해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다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여기서 원년이라 함은 칭원법(稱元法)상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 중 삼국시대의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에 의거한 것이다.
  2.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비문에 나와 있다. 태안사 적인선사탑(泰安寺寂忍禪師塔)은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泰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 또는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3. 쌍봉사 홈페이지 참조.
  4.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쌍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