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개관)
 
(같은 사용자에 의한 10개의 중간 편집이 숨겨짐)
1번째 줄: 1번째 줄:
 
{{문화유산정보
 
{{문화유산정보
|대표명칭 = 화양정 터[ 華陽亭 址 ]
+
|대표명칭 = 화양정
 
|지정번호 =  
 
|지정번호 =  
 
|지정일 =  
 
|지정일 =  
|지정명칭 = 화양정
+
|지정명칭 = 화양정(터)
|영문명칭 = Hwayangjeong
+
|한자명칭 = 華陽亭(址)
 +
|영문명칭 = Hwayangjeong Site
 
|분류 = 정자, 누각
 
|분류 = 정자, 누각
 
|건립·제작 =  
 
|건립·제작 =  
 
|주소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도 봉화산
 
|주소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도 봉화산
|위도 = 37.546313
+
|위도 = 37.546473
|경도 = 127.071347
+
|경도 = 127.071951
 
|사진 = 화양정_터.jpg
 
|사진 = 화양정_터.jpg
 
}}
 
}}
  
 
=='''개관'''==
 
=='''개관'''==
이곳 화양동 110번지 일원은 세종(1419-1451) 임금의 별장 화양정(1432창건)이 있었던 자리이다.
+
조선 [[세종]] 14년(1432년 창건)에 지어진 세종 소유의 정자(별장)가 있던 곳으로 [[화양정]]세워지기 전부터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르던 국립목장이자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화양정은 4각 정자로서 기둥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는 100여간 이상이어서 규모가 매우 컸다.
  
조선 [[세종|세종]] 14년(1432)에 지어진 세종 소유의 정자가 있던 곳으로 화양정이 세워지기 전부터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르던 국립목장이자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화양정은 4각 정자로서 기둥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는 100여간 이상이어서 규모가 매우 컸다.
+
화양정의 이름은 세종이 직접 지었다고 전해지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세종은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정사는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 될 것이냐?” 하면서 그 풍취에 따라 화양정이라 이름 붙였으며, 화양정이란 이름은 [[주서|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 즉 ‘화산 양지바른 곳에 말을 돌린다’ 라는 부분에서 "화양"을 따서 지은 것이다.
  
화양정의 이름은 세종이 직접 지었다고 전해지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세종은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정사는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 될 것이냐?” 하면서 그 풍취에 따라 화양정이라 이름 붙였으며, 화양정이란 이름은 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 즉 ‘화산 양지바른 곳에 말을 돌린다’ 라는 부분을 따서 지은 것이다.
+
화양정은 1911년 큰 벼락을 맞아 무너졌으며. 시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진헌마정색도 목장지도]]에 팔작지붕으로 된 화양정이 그려져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
화양정이 있던 자리인 화양동 110-60번지 일원이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4501&cid=49352&categoryId=49352#TABLE_OF_CONTENT6, 화양정 터,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ref>
화양정은 1911년 큰 벼락을 맞아 무너졌으며. 영상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진헌마정색도]]에 팔작지붕으로 된 화양정이 그려져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4501&cid=49352&categoryId=49352#TABLE_OF_CONTENT6,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클래스'''==
 
=='''클래스'''==
 
* 정자
 
* 정자
 
* 누각
 
* 누각
 +
* 별장
  
 
=='''관련 문서'''==
 
=='''관련 문서'''==
33번째 줄: 32번째 줄:
 
!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
 
|-
|[[화양정 터]]||A는 B이 정자를 지었던 장소이다.||[[세종]]
+
|[[화양정|화양정 터]]||A는 B이 정자를 지었던 장소이다.||[[세종]]
 
|-
 
|-
 
|[[화양정]]||A은 B이 직접 누각의 이름을 지었다.||[[세종]]
 
|[[화양정]]||A은 B이 직접 누각의 이름을 지었다.||[[세종]]
42번째 줄: 41번째 줄:
 
==지도==
 
==지도==
 
<center>
 
<center>
<googlemap width="90%" height="200" lat="37.546313" lon="127.071347" type="hybrid" zoom="12"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
<googlemap width="90%" height="300" lat="37.546473" lon="127.071951" type="terrain" zoom="15"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37.546313, 127.071347, [[아차산 봉수대지]]
+
37.546473, 127.071951, [[화양정 터]]
 
</googlemap>
 
</googlemap>
 
</center>
 
</center>

2016년 6월 24일 (금) 20:04 기준 최신판


개관

조선 세종 14년(1432년 창건)에 지어진 세종 소유의 정자(별장)가 있던 곳으로 화양정이 세워지기 전부터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르던 국립목장이자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화양정은 4각 정자로서 기둥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는 100여간 이상이어서 규모가 매우 컸다.

화양정의 이름은 세종이 직접 지었다고 전해지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세종은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정사는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 될 것이냐?” 하면서 그 풍취에 따라 화양정이라 이름 붙였으며, 화양정이란 이름은 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 즉 ‘화산 양지바른 곳에 말을 돌린다’ 라는 부분에서 "화양"을 따서 지은 것이다.

화양정은 1911년 큰 벼락을 맞아 무너졌으며. 시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 목장지도에 팔작지붕으로 된 화양정이 그려져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화양정이 있던 자리인 화양동 110-60번지 일원이다. [1]

클래스

  • 정자
  • 누각
  • 별장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화양정 터 A는 B이 정자를 지었던 장소이다. 세종
화양정 A은 B이 직접 누각의 이름을 지었다. 세종
화양정 A은 B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진헌마정색도

지도

갤러리

기여

주석

  1. 화양정 터,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