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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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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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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교육과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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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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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욱정.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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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큐레이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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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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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겟대상 : 아모레퍼시픽 등 뷰티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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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겟메세지 : 조선시대 화장, 화장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현재 화장품들에 역이용할 수 있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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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장품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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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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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랍 + 유지 + 연백 + 활석이 기본<br>-여기에 자연재료(좁쌀 물의 웃물, 복숭아 꽃, 동아 씨(동과인) 등을 첨가하여 사용)<br>-용도에 따라 영양크림, 클렌징크림 등으로 사용<br>-<규합총서><br>‘겨울에 얼굴이 거칠고 터질 때는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김이 새지 않도록 두껍게 봉하여두었다가 얼굴에 바른다. 그러면 트지 않을뿐더러 옥같이 고와진다.<br> 얼굴과 손이 터서 피가 나거든 돼지발기름에 괴화(회화나무의 꽃)을 섞어 붙이면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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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청화백자연꽃넝쿨무늬합.jp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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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미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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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세미, 오이, 박 등의 줄기를 자르면 나오는 즙이나 수분을 사용해 만듦<br>-액체형태의 동과인과 고체형태의 익모초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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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동과인.jpg|200px]][[파일:청화백자모란넝쿨무늬호.jp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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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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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른자 + 주사(朱砂) + 명반(明礬) + 사향(麝香)<br>-흰쌀가루 + 호분(연백) + 낙규자<br>-잇꽃 + 잿물 + 석류 <br>-'삼홍’이라 하여 볼과 입술, 손톱이 붉은 것을 미인상으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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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낙규자.jpe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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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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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가루(미백) + 연백(미백보완, 피부 부착) + 활성(발림석) 을 수저나 종지그릇으로 소량씩 떠 그릇에 개어 사용<br>-백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납’을 가미하여 부착력 높아진 ‘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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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색회등나무무늬합.jpg|200px]][[파일:분.jpe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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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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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솔 먹, 달개비꽃잎, 목화꽃을 태운 재 등을 기름에 개어 만듦<br>-16세기 초 – 가늘고 긴 눈썹이 유행<br> 17세기 초 – 넓고 진한 눈썹(궁양)이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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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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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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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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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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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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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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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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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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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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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bject red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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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rget green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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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ent blue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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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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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subject 조선시대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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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모레퍼시픽 target 아모레퍼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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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적분위기 content 시대적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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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분 content 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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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 content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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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능 content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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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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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rg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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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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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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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아모레퍼시픽 targ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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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시대적분위기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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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세분화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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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성분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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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색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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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화장품 효능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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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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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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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su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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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tworkGraph | title=조선시대화장품.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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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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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재료.jp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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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미인도.jp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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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부의 표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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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jsg.aks.ac.kr/data/dir/downloadPdf.do?callNum=K2-4515&volNum=001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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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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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三日,過[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A0%80%EC%9E%A5%EC%84%B1+%EC%82%AC%EC%98%A4%EC%8B%B1%EC%8B%9C+%EC%83%81%EC%9C%84%EA%B5%AC/@33.2540026,117.8018732,5.88z/data=!4m5!3m4!1s0x344cfd903258aa33:0x92d82bd1ad5435c3!8m2!3d30.03312!4d120.868122 上虞縣],是日晴,過二大橋而上,江之南有官人乘轎而來,乃上虞知縣,自縣來也,縣距江岸二三里許,又過黃浦橋、華渡鋪、蔡墓鋪、大板橋、步青雲門、新橋鋪,至曹娥驛,驛丞,徐深也. 驛北有[https://anntw.com/articles/20141207-H2zt 壩]. 舍舟過壩, 步至[https://www.google.com/maps/place/Cao'e+River/@30.0210533,120.4777116,10z/data=!3m1!4b1!4m5!3m4!1s0x344cfbb3ae54bfbb:0xb617e81e2f993a44!8m2!3d30.0600479!4d120.8027235 曹娥江]亂流而渡,越岸又有壩,壩與梁湖巡檢司,南北相對,又舍舟過壩而步西二里至東關譯,復乘船過文昌橋、東關鋪、景靈橋、黃家堰鋪、瓜山鋪、陶家堰鋪, 第洋鋪, 夜四更, 至一名不知江岸留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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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우현(上虞縣)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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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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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다리 둘을 지나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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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 남쪽에서 어떤 관인이 가마를 타고 왔는데 바로 상우지현(上虞知縣)이 현성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상우현성은 강 언덕에서 2-3리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또 황포교(黃浦橋), 화도포(華渡鋪), 채묘포(蔡墓鋪), 대판교(大板橋), 보청운문(步靑雲門), 신교포(新橋鋪)를 지나 조아역(曹娥驛)에 이르렀는데 역승은 서심(徐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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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 북쪽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도보로 조아강(曹熊江)에 이르러 강을 가로질러 건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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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너편 언덕에 또 방죽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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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죽과 양호순검사(梁湖巡檢司)는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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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서쪽으로 2리를 걸어서 동관역(東關驛)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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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배를 타고 문창교(文昌橋), 동관포(東關鋪), 경령교(景靈橋), 황가언포(黃家嘎鋪), 과산포(瓜山鋪), 도가언포(陶家堰鋪), 제양포(第洋鋪)를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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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 4경에 이름을 모르는 강기슭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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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rd Day. Passing Shan-yü County. This day was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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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 went upstream past two big bridges. On the south side of the river, an official came riding in a sedan-chair. He was the Magistrate of Shan-yü County and he came from the county seat, which was two or three li from the bank of the river. We then passed [more bridges, stops, and a gate and] came to Ts'ao-ê Station, where the Station Master was Hsü Shen. An embankment was north of the station. We left the boats, passed the embankment, walked to the Ts'ao-ê River, and went straight across it. On the opposite bank was another embankment, which faced the Liang-hu Police Station north to south. Again we left the boats and walked past the embankment, coming to Tung-kuan Station, two li to the west. We got into boats again and [proceeded past several stops]. In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we reached the bank of a river,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for the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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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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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四日,到紹興府,是日晴,撑鑑水而上,水自鏡湖一派來繞城中,日出時到紹興府,自城南派鑑水,而東北過昌安鋪,棹入城,城有虹門,當水口,凡四重,皆設鐵局,過有[https://www.google.com/maps/place/Guangxiang+Bridge/@30.0110302,120.573545,3a,75y,90t/data=!3m8!1e2!3m6!1sAF1QipPkBDQu3wT02S1PGQC2Su5rVynMPIao5Z0Z52ln!2e10!3e12!6shttps:%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PkBDQu3wT02S1PGQC2Su5rVynMPIao5Z0Z52ln%3Dw129-h86-k-no!7i1920!8i1280!4m5!3m4!1s0x0:0x37c8f5f8d393c702!8m2!3d30.01103!4d120.573545 光相橋]等五大橋及經魁門、聯桂門、祐聖觀、會水則碑,可十餘里許有官府,翟勇引臣等下岸,其闤闠之繁,人物之盛,三倍於寧波府矣,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副使吳文元、布政司分守右參議陳潭,連坐于瀓淸堂北壁,兵甲笞杖,森列於前,置一卓,引臣至卓邊,西向而立,問以臣之姓名、所住之鄉、所筮仕之官、所漂風之故、所無登劫之情狀、所資器械之有無,臣答以答把總官之辭,却添載下山逢賊、仙巖遇杖之事,所齎行李,又添馬鞍一部,三使相卽下把總官所報狀以示臣曰。是何供辭前後。詳略不同乎。臣曰。把總官初問。只答以漂流到泊之情。今日布政三司更問。詳擧遇賊等事耳。三使相徐謂臣曰:”供辭有違。汝實有罪。汝宜謄寫前辭。無一字加減云云。” 臣便寫之。三使相又謂臣曰。”他日你到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A0%80%EC%9E%A5%EC%84%B1+%ED%95%AD%EC%A0%80%EC%9A%B0%EC%8B%9C/@30.2610923,119.8917005,10z/data=!3m1!4b1!4m5!3m4!1s0x344bb629439aaa99:0xa7bfd183824de83a!8m2!3d30.274084!4d120.15507?hl=ko 杭州] 。鎭守太監綉衣三司大人到北京。兵部禮部。亦更問汝情。其亦以是答之。少有相違。大不可也。”又問曰。”初以汝類爲倭船劫掠。將加捕戮。汝若是朝鮮人。汝國歷代沿革都邑山川人物俗尙祀典喪制戶口兵制田賦冠裳之制。仔細寫來。質之諸史。以考是非。” 臣曰。沿革都邑。則初檀君。與唐堯竝立。國號朝鮮。都[https://www.google.com/maps?q=%E5%B9%B3%E5%A3%A4&source=lmns&hl=ko&ved=2ahUKEwjEw6qIp8noAhUIBaYKHab8AgcQ_AUoAXoECAEQAQ 平壤] 。歷世千有餘年,周武王封箕子于朝鮮。都平壤。以八條敎民。今國人以禮義成俗始此。厥後燕人衛滿。亡命入朝鮮。逐箕子之後箕準。準奔馬韓以都焉。其間或爲丸韓。或爲二府。或爲四郡。或爲三韓。年代久遠。不能盡述。至西漢宣帝時。新羅朴氏初立國。高句麗高氏,百濟扶餘氏相繼而起。三分舊朝鮮之地。新羅據東南界。都慶州,高句麗據西北界。都遼東,都平壤。又屢遷厥邦。忘其地。百濟據中西南界。都稷山,都廣州,都漢陽,都公州,都扶餘。當唐高宗朝。新羅文武王與唐兵滅高句麗。又滅百濟。合三國爲一。後甄萱叛據全州。弓裔叛據鐵原。高麗王氏功高德盛。國人推戴。弓裔自竄。甄萱自投。新羅王封府庫。籍郡縣來降。再合三國。都開城。傳世幾五百年。今革爲我朝鮮。都漢陽。蓋將百年于茲矣。山川則長白山在東北。一名白頭山。橫亘千餘里。高二百餘里。其巓有潭。周八十餘里。東流爲豆滿江。南流爲鴨綠江。東北流爲速平江。西北流爲松花江。松花下流。卽混同江也。妙香山在北。金剛山在東。有一萬二千餘峯。智異山在南。九月山在西右。四山極高峻多奇蹟。三角山。卽國都鎭山。大同江,薩水,臨津渡,漢江,洛東江,熊津,豆恥津,榮山津。已上川之大者。人物則新羅金庾信,金陽,崔致遠,薛聰。百濟階伯。高句麗乙支文德。高麗崔沖,姜邯贊,趙沖,金就礪,禹倬,鄭夢周。我朝鮮不可歷數。俗尙則尙禮義。明五倫。重儒術。每春秋。行養老宴,鄕射禮,鄕飮酒禮。祀典則社稷宗廟釋奠諸山川。刑制從大明律。喪制從朱子家禮。冠裳遵華制。戶口兵制田賊。我以儒臣。未知其詳。又問曰。所謂推刷人丁。何事。臣曰。濟州在大海中。水路甚險甚遠。凡有犯罪者。皆逃入以避。久爲逋逃之藪。故往刷之。又問曰。濟州距我中國幾里。臣虛張水路之遠曰。不可知其詳也。大抵船遇便風於大海。則日可行千里。今我自濟州浮海。折晝夜則凡二十九日。爲大風所驅。疾行如飛。到泊于中國海岸。則自中國距濟州路。大槩數萬餘里矣。又問曰。汝國與我朝廷。相距遠近幾何。臣曰。傳聞自我國都。過鴨綠江。經遼東城抵皇都。三千九百有餘里。總兵官三使相。卽饋臣以木果。仍書單字以賜。單字中送崔官禮物。猪肉一盤。鵝二隻。鷄四翼。魚二尾。酒一罇。米一盤。胡桃一盤。菜一盤。筍一盤。麪筋一盤。棗一盤。荳腐一盤。又賜饌糧等物丁陪吏軍人有差。臣卽做謝詩再拜。三使相亦起。答禮致恭。又謂臣曰。看汝謝詩。此地方山川。汝何知之詳。必此地人所說。臣曰。四顧無親。語音不通。誰與話言。我嘗閱中國地圖。到此臆記耳。對畢。臣與三四官人拱立卓邊。有翟勇之軍吏一人在外頭。敺打臣之從者金都終有傷。臣寫以示諸官人。官人奔告于總兵官。總兵官拿其敺打人。治罪杖之。又杖勇以不能馭下之罪。臣等退。復沿湖棹出城外。過迎恩橋。至蓬萊驛前留泊。夕。知府姓周及會稽山陰兩縣官。皆優送糧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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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흥부(紹興府)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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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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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수(鑑水)로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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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은 경호(鏡湖)의 한 갈래로부터 와서 성안을 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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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 뜰 무렵 소흥부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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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창안포(昌安鋪)를 지나 노를 저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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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에는 홍문이 수문(水門)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네 겹으로 되었는데 모두 쇠로 만든 문짝을 설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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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상교(光相橋)등 큰 다리 다섯과 경괴문(經魁門), 연계문(聯桂門), 우성관(祐聖觀), 회수칙비(會水則碑) 등을 거쳐서 10여 리쯤 가니 관부(官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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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용은 신 등을 이끌고 기슭에 내리니, 그 저자의 번화함과 인구의 많음은 영파부의 3배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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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분수우참의(布政司分守右參議) 진담(陳潭) 이 징청당(激清堂) 북벽(北壁)에 죽 늘어앉았는데, 병갑(兵甲), 태장(笞杖)이 그 앞에 삼엄하게 늘여져 있고 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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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을 인도하여 탁자 옆에 이르러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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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의 성명, 살던 지방, 역임한 관직, 그리고 표류하게 된 까닭, 상륙하여 약탈한 일이 없었는지의 정상, 가지고 온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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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파총관에게 답하던 말로 답하고 난 뒤 하산에서 해적을 만나고, 선암에서 몽둥이를 맞았던 일을 더 보태고, 가져온 행장에는 말안장 1벌을 또 첨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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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사상(使相)242 은 곧 파총관이 보고한 문서를 내어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공술서의 앞뒤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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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총관이 처음 심문할 적엔 표류하여 정박하게 된 사정만을 답했을 뿐이었고, 오늘 포정삼사(布政三司)가 다시 심문하시니 해적을 만났던 일 등을 상세히 거론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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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사상은 모두 신에게 천천히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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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술서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당신에게 실로 죄가 되오. 당신은 마땅히 앞서 쓴 말을 베껴 쓰되 한 글자도 가감이 없어야 하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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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곧 베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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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사상은 또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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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날 당신이 항주(杭州)에 도착하면 진수태감(鎭守太監)244 ·수의(誘衣) 삼사(三司)의 대인(大人)께서,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다시 당신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 때에도 또한 이대로 답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서로 어긋나면 절대로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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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묻기를,“처음에는 당신들을 왜선(倭船)을 타고 와서 겁략하는 무리들이라고 여겨, 잡아다 죽이려고 했소. 당신이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의 역대 연혁과 도읍 산천 · 인물·속상(俗尙) . 사전(祀典). 상제(喪制)·호구(戶口)·병제(兵制)·전부(田賦)·관상(冠裳)의 제도를 자세히 써 내면 여러 사서(史書)에 맞추어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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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진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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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혁과 도읍은 처음에 단군(檀君)께서 당요(唐堯)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여 세대(世代)를 천여 년이나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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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평양에 도읍하여 8조로 백성을 가르쳤으니,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禮義)로 풍속을 이룸이 이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을 내쫓으니 기준은 마한(馬韓)으로 달아나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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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중간에 구한(九韓)이 되기도 하고, 이부(二府)가 되기도 하고, 사군(四郡)이 되기도 하고, 삼한(三韓)이 되기도 했는데, 연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므로 다 기술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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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때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박씨(朴氏)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와 백제(百濟)의 부여씨(扶餘氏)가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옛 조선 땅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신라는 동남지방을 점거하여 경주(慶州)에 도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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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는 서북 지경을 점거하여 요동(遼東) 그리고 평양에 도읍했으며, 또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그 지명은 잊었습니다. 백제는 중부의 서남지역을 점거하여 직산(稷山)에 도읍 했다가 뒤에 광주(廣州), 한양(漢陽), 공주(公州), 부여(夫餘)에 도읍하였습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 때에 와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당군(唐軍)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 백제도 멸망시켜 삼국을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뒤에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전주(全州)를 점거하고, 궁예(弓裔)가 반란을 일으켜 철원(鐵原)을 점거했으나, 고려(高麗)의 왕씨(王氏)가 공적이 높고 덕망이 많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니, 궁예는 스스로 도망했고 견훤은 스스로 항복했으며, 신라왕은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장부에 기재하여 와서 항복했으니, 재차 삼국을 통합하여 개성(開城)에 도읍하고 대대로 전한 지 거의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조선으로 바뀌어, 한양에 도읍한 지 약 100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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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천은, 장백산(長白山)은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합니다. 가로는 천여 리 뻗쳤고 높이는 200여 리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여 리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 하류가 곧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은 동쪽에 있는 데 1만2천여 봉우리가 있으며, 지리산(智異山)은 남쪽에 있고 구월산(九月山)은 서쪽에 있는데, 이상 네 산은 매우 높고 험하며 기이한 유적이 많습니다. 삼각산(三角山)은 곧 국도(國都)의 진산(鎭山)입니다. 대동강(大同江)·살수(薩水)·임진도(臨津渡)·한강(漢江)·낙동강(洛東江)·웅진(熊 津)·두치(豆恥津) · 영산진(榮山津) 등은 큰 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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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金碩信) . 김양(金陽).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 백제의 계백(階伯) ,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최충(崔沖). 강감찬(姜郡贊) . 조충(趙沖) 김취려(金就順)·우탁(禹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일이 셀 수도 없습니다. 속상은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오륜(五倫)을 밝히고 유술(儒術)을 존중합니다. 해마다 봄가을에 양로연(養老宴)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합니다. 사전(祀典)은 사직(社稷), 종묘(宗廟),석전(釋奠)과 여러 산천에 대한 제사가 있습니다. 형제(刑制)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릅니다. 상제(喪制)는 주자(朱子)의 《가례》에 따릅니다. 관상(冠__)은 중화의 제도를 따릅니다. 호구(戶口), 병제(兵制), 전부(田賦)는 내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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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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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정을 추쇄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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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수로가 매우 험하고 멀기만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들어가 피하여 오랫동안 도망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런 까닭에 가서 이들을 잡아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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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는 우리 중국과 거리가 몇 리나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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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수로가 먼 것을 부풀려서 말하기를,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배가 큰 바다에서 순풍을 만난다면 하루에 천리도 갈 수 있는데, 지금 나는 제주도로부터 바다에 뜬 것이, 주야를 따져 본다면 무릇 29일이나 되며, 큰바람에 몰려서 나는 듯이 빨리 달려 중국의 해안에 도착 정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제주도로 가는 길은 대개 수만 여 리나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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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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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해 듣기로는 우리나라 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지나 황도(皇都)에 도착하자면 3천9백여 리나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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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병관 등의 세 사상은 곧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이어서 단자를 써서 내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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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자 속에는 “최관(崔官)에게 예물로 돼지고기 1쟁반, 거위 2마리, 닭 4마리, 물고기 2마리, 술 1동아리, 쌀 1쟁반, 호두 1쟁반, 채소 1쟁반, 죽순 1쟁반, 국수 1쟁반, 대추 1쟁반, 두부 1쟁반을 보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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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반찬과 식량 등 물품을 배리(陪吏)와 군인에게 차등있게 내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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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곧 사례하는 시를 지어 두 번 절하니 세 사상들도 일어나 공손스레 답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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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사례하는 시를 보건대 이 지방 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있소? 이는 필시 이곳 사람이 말해 준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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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방을 돌아봐도 친한 사람이라곤 도무지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얘기하겠습니까? 내가 일찍이 중국의 지도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여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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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을 마치고 나서, 신은 서너 명의 관인들과 함께 탁자 가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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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용의 군리(軍吏) 한 명이 밖에 있다가 신의 종자인 김도종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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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이 사실을 글로 써서 여러 관인들에게 보였더니 한 관인이 달려가서 총병관에게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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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병관이 구타한 사람을 잡아와서 죄를 다스려 곤장을 치고 또 적용에게 부하를 통솔치 못한 죄로 곤장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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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등은 물러 나와 다시 호수를 따라서 노를 저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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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은교(迎恩橋)를 지나 봉래역(蓬驛)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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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에 지부(知府) 주(周)라는 사람과 회계현, 산음현 두 지현(知縣)이 모두 식량과 반찬을 넉넉히 보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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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th Day. Arrival at Shao-hsi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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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 poled into the Chien River and went upstream. The river came as a branch from Lake Ching, meandering round and through towns. At sunrise we reached Shao-hsing Prefecture. From south of the wall we went up the Ching River, first east and then north, passed Ch’ang-an Stop, and rowed inside the wall. The wall had an arched gate just at the mouth of the river. [The gate] was quadruple, and in each [section] an iron door was hung, through which we passed. There were Kuang-hsiang Bridge, four other big bridges, Ching-k’uei Gate, Lien-kuei Gate, Yu-sheng-kuan, and a hydrographic marker. When we had gone about ten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and Chai Yung led us on to the bank. The profusion of gates and crowds of people were three times as great as those of Ning-po Prefecture.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Huang Tsung, Chekiang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Wu Wenyüan, and Right Assistant Administration Commissioner Ch'en T’an, sat in a row along the north wall of the Ch'eng-ch'ing Hall.52 Arms, armor, and bamboo whips were massed like a forest in front of them. They had a table placed and summoned me to it; I stood facing west. They asked me my name, where I lived, what my position was, the circumstances of my being blown adrift, whether it was true that we had not pillaged, and whether we had implements with us. I answered with the answers I had given the Commander, but I added that we had met bandits at Hsia-shan and been beaten at Hsien-yen. To the [list of] baggage we had I also added one horse saddle. The three high officials then handed down the Commander's report and showed it to me. They said, “Why are there discrepancies in certain details ?” I said, “It is only that in the beginning, when the Commander questioned me, I answered only with the circumstances of our sailing adrift and arriving here. Today, when you Three Authorities question me again, I inform you in detail about our meeting bandits and other things.” The three high officials said to me gravely, “The statements differ; truly you have done wrong. You must copy your previous statement so that there is exact agreement.” I copied it. They then said to me, “Later, when you reach Their Excellencie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and Three Resplendent Authorities53 of Hang-chou and the Ministries of War and Rites at Peking, you will be questioned again on the circumstances. Then use this again to answer them. It will never do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They then said, “At first we took you to be Japanese ships plundering, and we were going to arrest and execute you. If you are a Korean, write and bring to us [a statement of] the historical periods of your country, its changes of rule, the capital cities, the geography, the people, the customs, sacrifices, rules for mourning, population, military system, land tax, and styles of dress. We shall compare it with the Histories and note what is and is not so.” I said, “On the changes of rule and capital cities, at first Tan-gun and T’ang Yao rose side by side. The country was named Choson, and the capital was P’yongyang. The succession continued for over one thousand years. Wu-wang of Chou enfeoffed Kija (Chi Tzu) in Choson. He made P'yongyang the capital and instructed the people in eight articles. The observance by the people now of customs based on ritual (li) and righteousness (i) began from that. When Wei Man of Yen fled, he entered Choson and turned out Kija's descendant Kijun. Kijun fled to Ma-han and made his capital there. About this time, [the country may have been called] Kukwan, l-pu, Sagun, or Sam-han. It was a remote era, and the details are not clear. 54 With the time of Hsüan-ti of Western Han [r. 73-49 B.C.], the Pak family of Silla first established a state. The Ko family of Koguryð and the Puyo family of Paekche rose one after another. They divided into three the land of the old Choson. Silla occupied the southeast area and made Kyongju its capital. Koguryo occupied the northwest area and made Liao-tung and P'yongyang its capitals; it shifted boundaries several times, but I have forgotten the places. Paekche occupied the central and southwest areas and made Chiksan, Kwangju, Hamyang, Kongju, and Puy> [successively] its capitals. In the reign of Kao Tsung of T’ang [r. 650-683], King Wen-wu (r. 661-681] of Silla and T’ang soldiers destroyed Koguryo and then Paekche and united the three countries,55 Later, Chinwon rebelled and occupied Chònju, and Kungye rebelled and occupied Ch’ðlwon. The Wang family of Koryo had great merit and were full of virtue, and the people of the country gave them their allegiance. Kungye fled, Chinwon gave himself up, and the King of Silla sealed his treasury and storehouses, made a register of his counties and districts, and surrendered. The three states were again united, 56 and Kaesong was made the capital. The line of succession continued almost five hundred years. The present change is to our Choson, with Hamyang57 the capital. That is how it has been now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As to geography, the Changbaek Mountains are in the northeast. They are also called the Paedu Mountains and extend more than one thousand li, for over two hundred of which they rise to great heights. On one of the peaks is a deep lake, more than eighty li round. Its water flows east as the Tuman River, south as the Yalu River, northeast as the Sokp'yong River, and northwest as the Song-hwa River (Sungari River). Downstream the Sungari is the Kondong River. The Myohang Mountains are in the north; the Kŭmgang Mountains, with over twelve thousand peaks, in the east; the Chiri Mountains in the south; and the Kŭwol Mountains in the west. The above four ranges have extremely high peaks and many spectacular sights. Mt. Samgak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national capital. The Taedong River, Sa River, Imjin, Tohan River, Naktong River, Nŭngjin, Tou-ch’ih-chin,58 and Yongsan-jin are the largest of the rivers. “As to the personages, from Silla there have been Kim Yu-sin, Kim Yang, Ch'oe Ch’i-won, and Sól Ch’ong; from Paekche Kyehaek; from Koguryð Ulchi Mun-dök; from KoryÕ Choe Chung, Kang Kam-choan, Cho Chung, Kim Ch’wi-ryò, Wu T’ak, and Chòng Mong-ju; and from our Chosón too many to list.59 “As to customs, we esteem the codes of etiquette (li) and righteousness (i), we understand the Five Relationships, and we respect Confucian methods. Every year in spring and fall we observe the Feast for the Care of the Old, the Regional Archery Ceremony, and the Regional Wine Ceremony. 60 “As to sacrifices, there are altars of the soil and grain, ancestral temples, the Rite to Confucius,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The penal code follows the Great Ming Code.61 The rules of mourning follow Chu Hsi’s Chia li. In our dress we follow Chinese styles. “As to the population, military system, and land taxes, I, being a Confucian minister, do not know the details.” Next they asked, “What do you mean by your statement about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I said, “Cheju is in the great sea, and the sea lanes are extremely dangerous and long. All criminals flee there to escape. It has long been a refuge for outlaws in flight, so we go and investigate.” They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China to Cheju?”' I exaggerated the length of the sea route and said, “I do not know exactly, but generally a boat that meets favorable winds in the great sea can go one thousand li a day. We, now, sailed at sea a total, combining days and nights, of twenty-nine full days. We were driven by high winds and raced along as if we were flying, coming down to the Chinese coast. The distance, then, from China to Cheju must be roughly several tens of thousands of li.”62 They asked, “About how far is your country from our Court?”' I said, “I have heard that it is more than 3,900 li from the capital of our country to the Imperial capital, going across the Yalu River and through the town of Liao-tung.” The Regional Commander and the other two high officials 63 served me tea and fruit and wrote a list of things to be presented to me. The list [read], “Honoraria for the Escorted Minister Ch'oe One plate of pork Two ducks Four chickens Two fish One beaker of wine One plate of rice One plate of walnuts One plate of vegetables One plate of bamboo shoots One plate of wheat noodles One plate of jujubes One plate of bean-curd.” They gave food and drink and other things to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e soldiers according to their rank.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wice. The three statesmen also rose and returned the courtesy with respect. They said to me, “We see from your poem of thanks that you are familiar with the geography of this region. How did you acquire such knowledge? It must have been explained to you by natives.” I said, “No one is close to me here, and my language is not understood. Who would talk with me? I have studied maps of China, and now I have simply drawn on my memory.” When the interview ended, I and three or four officials were standing, hands folded, at the table. Outside, one of Chai Yung's military officers was beating and hurting Kim To-jong, a member of my staff. I wrote [an account of the incident] and showed it to the officials. One official hurried to report it to the Regional Commander, who had the attacker seized and punished by flogging. He also had Chai Yung flogged for not having been able to keep order. We withdrew and again went along the lake. We rowed out through the wall, passed Ying-en Bridge, arrived in front of P'eng-lai Station, and stopped for the night. In the evening the Prefect, named Chou, and the Magistrates of the two counties K’uai-chi and Shan-yin sent abundant amounts of food and d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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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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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五日。至西興驛。是日晴。總兵官等王使相竝轎。曉到蓬萊驛。復引臣及從者。拿行裝至前。討東搬西以檢點之。臣所齎則印信一顆。馬牌一隻。馬鞍一部。諸文書冊。入大小箱二箇。衣衾,笠纓,銅碗。入小皮袋一箇。冠帽幷匣。程保,金重,孫孝子,李楨,安義,李孝枝,崔巨伊山及奴子二人。則無所齎。與軍人同包。軍人所齎。或包或袋或無。點畢。謂臣曰。汝可先去杭州。鎭守太監綉衣三司大人更問之。一一辨對。無有舛錯。又饋臣等以茶果。臣辭退。總兵官。蓋指指揮僉事而言也。紹興府。卽越王舊都。秦漢爲會稽郡。居浙東下流。府治及會稽,山陰兩縣及紹興衛之治,臥龍山。俱在城中。會稽山。在城東十餘里。其他若秦望等高山。重疊崒嵂。千巖萬壑。競秀爭流于東西南三方。北濱大海。平衍無丘陵。蘭亭在婁公埠上天章寺之前。卽王羲之修禊處。賀家湖。在城西南十餘里。有賀知章千秋觀舊基。剡溪。在秦望山之南剩縣之地。距府百餘里。卽子猷訪戴逵之溪也。江流有四條。一出台州之天台山。西至新昌縣。又西至嵊縣。北經會稽,上虞而入海。是爲東小江。一出山陰西北。經蕭山縣東。復山陰抵會稽而入海。是爲西小江。一出上虞縣東。經餘姚縣。又東過慈溪縣。至定海而入海。是爲餘姚江。是臣所經之江。一出金華之東。陽浦江義烏合流。至諸曁縣。經山陰。至蕭山。入浙江。是爲諸曁江。其間泉源支派。滙溺堤障。會屬從入者。如脈絡藤蔓之不絶。臣又遡鑑水而西。經韻田鋪,嚴氏貞節門,高橋鋪。至梅津橋。距岸五里許。有山隆起。東有石壁削成。前有二大石人立。其一天作。人形逼眞。又過融光橋。至柯橋鋪。其南有小山。山脊有古亭基。人以謂蔡邕見椽竹。取爲笛之柯亭之遺址也。又過院社橋,白塔鋪,淸江橋。至錢淸驛。江名乃一錢江也。夜過鹽倉館,白鶴鋪,錢淸鋪,新林鋪,蕭山縣地方。至西興驛。天向曙矣。江名。卽西興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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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일 서흥역(西興驛)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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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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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병관 등 세 사상(使相)이 함께 나란히 교자를 타고 새벽에 봉래역에 도착한 뒤 다시 신과 종자(從者)들을 불러 행장을 앞으로 가져오게 하고는 이리저리 뒤적이며 점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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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가진 것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개, 말안장 1벌, 여러 문서와 책이 든 크고 작은 상자 2개, 의복 · 이불 · 갓 갓끈 · 구리그릇을 넣은 작은 가죽 부대 1개, 관모(冠帽)와 관모집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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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 · 김중 · 손효자 · 이정 · 안의 · 이효지 · 최거이산과 총 2인은 가진 것이 없어 군인과 보자기를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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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인들이 가진 것은 보자기에 싸기도 하고 부대에 넣기도 하고 짐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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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검을 마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먼저 항주(杭州)에 가게 될 터인데 진수태감(鎭守太監), 수의(誘衣), 삼사(三司)의 대인(大人)이 다시 물을 것이니, 일일이 해명하고 대답하되 어긋남이 없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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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하직하고 물러 나왔는데, 총병관은 지휘첨사(指揮僉事)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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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흥부(紹興府)는 곧 월왕(越王) 의 옛 도읍으로 진한(秦漢) 시대에는 회계군(會稽郡)이었는데, 절강(浙江)의 동쪽 하류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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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치(府治), 회계·산음의 두 현 및 소흥위의 치소(治所)와 와룡산(臥龍山) 은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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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계산(會稽山)은 성 동쪽 10여 리에 있고, 그 밖에 진망산(秦望山) 과 같은 높은 산들이 겹겹이 솟아있고,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동·서·남 3방에서 빼어남을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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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쪽은 큰 바다에 연해서 평탄하고 넓었으며 구릉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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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정(蘭亭) 은 누공부(婁公婢) 위쪽에 있는 천장사(天章寺)의 앞에 있었으니 바로 왕희지(王羲之)가 수계(修_)7 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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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가호(賀家湖)는 성 서남쪽 10여 리에 있었고, 하지장(賀知章)의 천추관(千秋觀) 옛 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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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계(__溪)는 진망산 남쪽 승현(晦縣)의 땅에 있었으니 부(府)와는 거리가 100여 리나 되었는데, 바로 왕자유(王子獄) , 왕희지의 아들)가 대규(戴達)를 찾아갔던 시내(=소강과 여요강(餘姚江, 위야오장)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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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은 네 갈래로 나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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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갈래는 태주(台州)의 천태산(天台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신창현(新昌縣)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승현에 이르러 북쪽으로 회계현과 상우현(上虞縣)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동소강(東小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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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갈래는 산음현 서북쪽에서 나와 소산현(蕭山縣) 동쪽을 거쳐 산음현으로 되돌아와서 회계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서소강(西小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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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갈래는 상우현 동쪽에서 나와 여요현(餘姚縣)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자계현(慈溪縣)을 거쳐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서 여요강(餘姚江)이 되는데 이것이 신이 지나온 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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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갈래는 금화현(金華縣)의 동양(東陽)에서 나와 포강(浦江)과 의오강(義烏江)과 합류하여 제기현(諸誓縣)에 이르고 산음현을 거쳐 소산현에 이르러서 절강(浙江)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제기강(諸誓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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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중간에 천원(泉源)의 지류가 돌아가다가 제방에 막히고 모였다가 따라 들어간 것이, 마치 혈맥이 서로 연결되고 등나무가 얽혀 끊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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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또 감수(鑑水)를 거슬러 서쪽으로 가서 운전포(__田鋪) · 엄씨정절문(嚴氏貞節門) · 고교포(高橋鋪)를 거쳐 매진교(梅津橋)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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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덕에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산이 불쑥 솟았는데, 동쪽에 깎아지른 석벽이 있고 앞에는 큰 석인(石人) 두개가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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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중 하나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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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융광교(融光橋)를 지나 가교포(柯橋鋪)에 이르니 그 남쪽에 작은 산이 있고, 산등성마루에는 옛 정자 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채옹(蔡邑) 이 연죽(__竹)을 보고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었던 가정(__亭)의 유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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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원사교(院社橋)·백탑포(白塔鋪)·청강교(淸江橋)를 지나 전청역(錢淸驛)에 이르니 강 이름은 일전강(一錢江)이었습니다. 밤에 염창관(鹽倉館) · 백학포(白鶴鋪) · 전청포(錢淸鋪) · 신림포(新林鋪) · 소산현(蕭山縣) 지방을 지나 서흥역에 이르니 날이 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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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 이름은 서흥하(西與河)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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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th Day. Arrival at Hsi-hsing Station. This day was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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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 dawn the three high officials, the Regional Commander and the others, arrived together in sedan-chairs at P'eng-lai Station. They had me and my staff, bringing our baggage, brought before them again and had everything laid out and examined carefully, one by one. Of the things I had, one seal, one horse permit, one saddle, and a number of documents went into one large and one small box. The clothes, rain hat cords, and bronze bowls went into one small leather bag. My hats were together in a small box. Chòng Po, Kim Chung, Son Hyo-ja, Yi Chòng, An Üi, Yi Hyo-ji, Ch'oe Kõisan, and the two slaves had nothing, [their things] being wrapped with the soldiers'. Some of the soldiers had bundles, some bags, and some nothing. When the check was over, they said to me, “You may proceed. When Their Excellencie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and Three Resplendent Authorities of Hang-chou question you again, make distinct answers, one by one. Let there be no confusion or contradictions.” They served us tea and fruit, and I took my leave. Regional Commander was a term used in reference to the Assistant Commissioner. Shao-hsing Prefecture was the old capital of the kings of Yüeh. In Ch'in [221 B.C.-207 B.C.] and Han [202 B.C.-A.D. 220] it was K’uai-chi-chün and was in the lower reaches of Che-tung. 1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s of K’uai-chi County and Shan-yin County, the headquarters of Shao-hsing Garrison and Mt. Wo-lung are within the wall. Mt. K’uai-chi is over ten li east of the wall. East, south, and west, other high mountains, such as Ch’inwang, rise in many lofty ranges, covered with rocks and cliffs and vying in grace. The north borders the sea and lies level, without hills. Lan-t’ing, on top of Lou-kung-pu in front of T’ien-chang Temple, was the place where Wang Hsi-chih held a purification ceremony.2 Lake Ho-chia is more than ten li southwest of the wall. The site of Ho Chih-chang's Thousand Autumns Hermitage [Ch’ien-ch'iu kuan] is there.3 Yen Stream is in Sheng County, south of the Ch’in-wang Mountains. It is over one hundred li away from the prefecture and was the stream on which Tzu-yu sought out Tai K’uei.4 The river system has four main streams. One rises in Mt. T’ien-t’ai, T'aichou, flows west to Hsin-ch'ang County, continues west to north of Sheng County, passes through K’uai-chi and Shang-yü,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Tung-hsiao River. One rises northwest of Shan-yin, passes east of Hsiao-shan County, enters Shan-yin again, reaches K’uai-chi,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Hsi-hsiao River. One rises east of Shang-yü County, passes through Yü-yao County, goes east through Tz'u-ch’i County to Ting-hai,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Yü-yao River and is the river along which I passed. One rises in Tung-yang, Chin-hua. The P’u River and l-wu flow together and reach Chu-chi County. [The river] passes through Shan-yin to Hsiao-shan and into the Che River. That is the Chu-chi River. Throughout the region, the springs and branch streams that rise and disappear and the dikes and dams that are joined one to another are endless, like a labyrinth of veins and arteries. I went up the Chien River to the west, [passing from Yün-t’ien Stop to Hsihsing Station). The sky was growing light. The name of the river was Hsih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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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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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六日。到杭州。是日陰。西興驛之西北。平衍廣闊。卽錢塘江水。潮壯則爲湖。潮退則爲陸。杭州人。每於八月十八日。潮大至觸浪。觀潮之處也。臣等自驛前舍舟登岸。乘車而行。可十餘里至浙江。復乘船而渡。江流曲折傍山。又有反濤之勢。故謂之浙江。浙一作淛。江闊可八九里。江長西南。直抵福建路。東北通海。華信所築捍潮之塘。自團魚嘴至范村。約三十里。又至富陽縣。共六十餘里。石築尙完固如新。故又謂江爲錢塘江也。臣至其塘。復緣岸步行。則西望六和塔臨江畔。行過延聖寺, 浙江驛。至杭州城南門。重城疊門。門有三層樓。入其城。過文魁門,靈順宮,肅憲門,澄淸門,南察院,祐聖殿,土地廟,芝松坊鋪。至武林驛。自城門至此驛。約十餘里矣。翟勇伴臣等。因雨留一日外無留滯。或夜行遠涉千有餘里之地。鎭守太監張慶猶責勇以遲緩之罪。杖之。夕。驛丞楊秀祿。以饌物來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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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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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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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흥역의 서북방은 평탄하고 넓었는데 곧 전당(錢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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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물은 조수가 불어나면 호수가 되고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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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 사람들이 매년 8월 18일에 조수가 크게 밀려오면 파도에 맞부딪치기도 하며, 조수를 구경하던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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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등은 서흥역 앞에서 배를 버려두고 언덕에 올라 수레를 타고 10여 리를 가다가 절강(浙江)에 이르러서는 다시 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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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 흐름이 산을 끼고 구불구불 굽이치고, 또 거꾸로 물결치는 형세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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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므로 이를 절강이라 부르는데 절(浙)은 또 절(制)이라 쓰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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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 너비는 8-9리이고 길이는 서남쪽으로 복건로(福建路)에 이르고, 동북쪽은 바다로 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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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수를 막기 위해 화신(華信) 이 쌓은 제방은 단어취(團魚嘴)로부터 범촌(范村)까지 대략 30리이고, 또 부양현(富陽縣)까지 합계 60여 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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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축(石築)이 새것처럼 아직 견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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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므로 또 강을 전당강(錢塘江)이라고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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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그 제방에 이르러 다시 언덕을 따라 걸어가니 서쪽으로 강가에 세워진 육화탑(六和塔)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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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연성사(延聖寺)와 절강역(浙江驛)을 지나 항주성의 남문에 이르니 겹성에다 이중문이었고 문에는 3층의 누각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들어가 문괴문(文魁門)·영순궁(靈順宮)·숙헌문(肅憲門)·징청문(澄淸門)·남찰원(南察院) ·우성전(佑聖殿)·토지묘(土地廟)·지송방포(芝松坊鋪)를 지나서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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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문으로부터 이 역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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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용(望勇)은 신 등을 이끌고 비로 인해 하루를 머무른 것 이외에는 지체한 적이 없고 밤길을 가기까지 하면서 천여 리의 땅을 거쳐 왔지만, 진수태감(鎭守太監) 장경(張慶, 장칭)은 오히려 적용에게 더디게 왔다는 죄를 물어 곤장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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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에 역승(驛丞) 양수록(楊秀祿)이 찬거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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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th Day. Arrival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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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est of Hsi-hsiang Station was a broad, level plain, which was the Ch’ien-t’ang River. In flood tides it is a lake, but when the tide ebbs, it is land. On the 18th Day of every Eighth Month there is a big tide with great waves, and the people of Hang-chou watch the bore.5 We left the boats in front of the station, went ashore, got into carriages, and went on. In about ten li we came to the Che River. We got into boats again and crossed. The river twists and turns, and the mountains on the side also have the effect of deflecting its waves; that is why it is called Che-chiang, Twisting River ... The width of the river is about eight or nine li. In length, it extends from Fuchien-lu in the southwest and enters the sea in the northeast. The wall built by Hua Hsin to hold off the tide extends from T'uan-yü-tsui to Fan Village, approximately thirty li, and then goes to Fu-yang County, making a total of over sixty li. Of stone construction, it is still as good as new. For that reason, the river is also called the Coin Wall (Ch’ien-tang) River.6 I came to that wall, landed again, and continued on foot. In the west we saw Liu-ho Pagoda, overlooking the river bank. We went past Yen-sheng Temple and Che-chiang Station and came to the south gate of the wall of Hang-chou. The wall was double, the gate multiple, and the gate had a tower of three stories. We went inside the wall, passed Wen-k’uei Gate, Ling-shun-kung, Suhsien Gate, Ch'eng-ch'ing Gate, Nan-ch'a-yuan, Yu-sheng Hall, T’u-ti Shrine, and Chih-sung-fang Stop, and came to Wu-lin Station. It was approximately ten li from the gate of the wall to that station. Chai Yung had accompanied us for a great distance, over one thousand li, in which, except a one-day stop because of rain, we had not delayed and had sometimes travelled at night. Nevertheles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Chang Ch’ing," charged Yung with being dilatory and had him flogged. In the evening, Yang Hsui-lu, the Station Master, came with food and paid his resp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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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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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七日。在杭州。是日陰。詰朝。太監使官人來問曰。鄭麟趾,申叔舟,成三問,金浣之,趙惠,李思哲,李邊,李堅已上。俱係朝鮮人物。是何官職。一一開報來知。臣答曰。鄭麟趾,申叔舟,李思哲。俱位至一品。成三問。位至三品。李邊,金浣之,趙惠,李堅。則我以後進之士。不知其人之職品。有姓名顧壁堂驛中事者。來謂臣等曰。你所食之物。係是朝廷與的。作數支。銷待一年。有文簿到部。本驛丞。貴州夷人。專不曉得人事。就如孩童一般。不會稟上司。以致你等食不敷也。又曰。來此看人。都是閑人。不可與他說話。有傷神氣云云。夕。按察提調學校副使鄭大人。與一大人偕到于驛。招臣至前。問曰。你國科目之制如何。臣曰。有進士試,生員試,文科,武科試。又有文武科重試。又問曰。其試士如何。臣曰。每於寅申己亥年秋。聚儒生精業者。試以三場。初場疑義論中二篇。中場賦表記中二篇。終場對策一道。取若干人。翌年春。又聚入格者。試以三場。初場背講四書五經。取通四書三經者。中場賦表記中二篇。終場對策一道。聚三十三人。又聚三十三人。試以對策一道分次第。謂之登文科篇。許放榜。賜紅牌給花蓋。遊街三日。後又賜恩榮宴,榮親宴,榮墳宴。許通出仕之路。又問曰。文章體格如何。臣曰。表倣宋,元播芳。記論倣唐,宋。義拈出五經文。疑拈出四書文爲題。竝遵華格。對策倣文選對策。又問曰。你治何經。臣曰。四書五經。雖未精硏。粗嘗涉獵。又問曰。經書你可歷數其名。臣曰。庸,學,論,孟爲四書。易,詩,書,春秋,禮記爲五經。又問曰。易字何義。臣曰。以易字形言之。則合日月字也。以易字義言之。則有交易變易之義。又問曰。易之位數。寓於何物。臣曰。河出圖洛出書。聖人則之。又問曰。非圖書則不能作易乎。臣曰。天下萬物皆有數。雖見賣兔者。亦可以推測易中之位數也。兩大人相顧目擊。謂臣曰。你實讀書士。此地人固不識也。鄭大人忘其名。號東園子。齋名卽復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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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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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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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에 태감(太監)이 관인(官人)을 시켜 묻기를,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김완지(金荒之) · 조혜(__惠) . 이사철(李思哲) . 이변(李邊) . 이견(李堅)은 모두 조선의 인물들인데, 이들이 어떤 관직에 있었는가를 일일이 적어 알려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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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대답하기를, “정인지 · 신숙주 · 이사철은 모두 관위(官位)가 1품까지 이르렀고, 성삼문은 3품에 이르렀으며, 이변 · 김완지 · 조혜 · 이견은 내가 후배로서 그 사람들의 벼슬 품계를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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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중(驛中)의 사무를 맡은 고벽(顧壁)이란 자가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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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먹는 물품은 조정에서 주는 것인데, 지출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문부(文簿)가 부(部)에 도착할 것입니다. 본 역승은 귀주(貴州)의 이인(夷人)으로서 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 꼭 어린애와 같고 상사(上司)에게 상신할 줄을 몰라서 당신들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장만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또“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과 이야기해서 원기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라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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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에 안찰제조학교부사(按察提調學校副使) 정(鄭)대인이 어떤 대인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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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 나라의 과거 제도는 어떠하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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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사시(進士試) 생원시(生員試) · 문과시(文科試) ·무과시(武科試) 가 있고, 또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중시(重試)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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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인(士人)의 시험은 어떻게 치룹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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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년(寅年)·신년(申年)·사년(巳年)·해년(亥年)의 가을마다 유생(儒生)으로서 학업에 정통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三場)으로써 시험을 봅니다. 초장(初場)에는 의(疑) · 의(義). 논(論) 중에서 2편(篇)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 · 표(表) · 기(記)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 1도(道)를 시험하여 몇 사람을 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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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이듬해 봄에 또 합격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을 시험합니다. 초장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에는 부 · 표 기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에는 대책 1도를 시험하여 33인을 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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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그 33인을 모아서 대책 1도를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는데, 이를 일러 문과급제라 하며 방방(放榜)을 허가하여 홍패(紅牌)를 내리고 화개(花蓋)를 주어 3일 동안 유가(遊街)하게 한 뒤에 또 은영연(恩榮宴). 영친연(榮親宴). 영분연(榮墳宴)을 내린 다음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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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체(文體)는 어떠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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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表)는 송원(宋元)의 파방(播芳)을, 기(記)와 논(論)은 당송(唐宋)을 본보기로 하고, 의(義)는 오경(五經)의 글을, 의(疑)는 사서(四書)의 글을 집어내어 제목으로 짓되 모두 중화의 체제를 따르고, 대책은 《문선(文選)》의 대책을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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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어떤 경서를 공부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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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서와 오경을 비록 정밀히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대강은 섭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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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경서의 이름을 낱낱이 셀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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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용(中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가 사서이고, 《역경(易經)》 ·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춘추(春秋)》 · 《예기(禮記)》가 오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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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易)자는 무슨 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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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易)은 글자 모양으로 말한다면 일(日)과 월(月)을 합친 것이고, 글자 뜻으로 말한다면 바뀌고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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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의 방위(方位)와 괘수(卦數)는 무엇에 근거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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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하(黃河)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니, 성인(聖人)이 이를 본보기로 삼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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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아니면 역을 지을 수 없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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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의 만물에는 모두 수(數)가 있으니, 토끼를 파는 사람이 토끼를 보는 것만으로도 역 속의 방위와 패수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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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대인은 서로 돌아보고 눈짓을 하고는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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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실로 글을 읽은 선비라는 것을 이 지방 사람들이 잠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소”라고 하였습니다. 정 대인의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호는 동원자(東園子), 재명(齋名)은 복재(復齋)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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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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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 dawn the Overseer sent an official to question me. He said, “Chong In-ji, Sin Suk-chu, Sòng Sam-mun, Kim Wan-ji, Cho He, Yi Sa-choöl, Yi Pyốn, and Yi Kyon are all Koreans. What are their positions? Write a report for each of them and bring it here to let me know.” I answered, “Chong In-ji, Sin Suk-chu, and Yi Sa-ch’ðl have reached First Rank. Sõng Sam-mun has reached Third Rank. Yi Pyon, Kim Wan-ji, Cho He, and Yi Kyon became Chinsa after me, and I do not know their positions or ranks."8 One Ku Pi, a fellow who managed things in the station, came and said to us, "Everything you eat is given by the Court. When we calculate our disbursements, we wait a year for the ledgers to reach the Ministry. The Station Master here is a barbarian from Kuei-chou who is as utterly incapable of managing things as a child. He does not know how to provide for all contingencies in his reports to the superiors and brings it about that you do not get enough to eat.”Then he said, “The people who come here and look at you are all idlers. Do not talk with them. It is a waste of energy.” In the evening, His Excellency Cheng [Chi],9 the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Schools, and another eminent person came to the station. They summoned me before them and asked, “What is the system of scholastic degrees in your country?”. I said “There are the Chinsa Examination, Saeng-won Examination, Civil Service and Military Service Examinations, and Civil and Military Service Second Examinations.”'10 They asked, “What are those examinations like?” I said, “Every third year, the most accomplished of the Confucian pupils are brought together and examined in three sessions. The first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explication, interpretation, or essay [forms on the classics]; the middle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rhyme-prose [fu], memorial [piao], or narrative [chi] forms; and the last session comprises a problem-essay [tuits’ê]. From this a certain number of men are selected, and in the spring of the next year they are brought together and examined in three sessions. The first session is recital from memory from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nd expounding on them. Those versed in the Four Books and three of the Classics are passed. The middle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rhyme-prose, memorial, and narrative forms; and the last session comprises a problem-essay. Thirty-three men are passed. Then the thirty-three are brought together and tested by a problem-essay. The standings are determined and called the Order of Graduates, and permission is given to publish the list. Royal presents of vermilion plaques are made and umbrellas given to the graduates, who parade in the streets for three days. After that, the King gives for them a Banquet of Honor, a Banquet on the Honor to Parents, and a Banquet on the Honor to Ancestors; and they are allowed to enter upon their public careers.” They asked, “What are your literary styles ?” I said, “The memorials follow the polished style of Sung and Yuan, the narratives and essays follow T’ang and Sung. Interpretations are required of passages from the Five Classics, and explications are required of passages from the Four Books. In everything we follow Chinese forms. The problem-essays follow that of Wen hsüan.”11 They asked, “What classics have you mastered?” I said, “Though I have not studied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oroughly, I have browsed in them here and there.” They said, “Name the Classics and the Books in order.” I said, “The Mean, Great Learning, Analects, and Mencius are the Four Books. The Book of Changes, Book of Odes, Book of History, Spring and Autumn Annals, and Book of Rites are the Five Classics.” They asked,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character i [change]?” I said, “In terms of form, the character i combines the characters jih (sun] and yüeh (moon). In terms of meaning, it has the meaning of 'exchange' and ‘substitute'.” They asked, “In what were the diagrams of the Book of Changes lodged?” I said, “The Yellow River put forth the plan, and the Lo River put forth the book. The sages took them as models.” They said, “Without the plan and the book, would it have been impossible to write the Book of Changes?” I said, “All the things of the world have numbers. Though one sees only a rabbit seller, one can deduce the diagrams in the Book of Changes.12 The two personages stared hard at each other and said to me, “You are truly a well-read gentleman. The people here have not understood that at all.” I have forgotten the given name of His Excellency Cheng. His hao was Tungyüan-tzu and his studio name Fu-c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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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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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八日。在杭州。是日陰。顧壁來謂臣曰。今聽說。將你等事。差人晝夜馳奏北京。直待回報。方放回。自此城至北京。水路幾五千餘里。你留此必多日矣。臣曰。我到此。言語有異。實同盲聾。望足下如此聞見。隨卽開說。以恤遠人。壁曰。國法甚嚴。律條甚重。漏泄夷情。新例充軍。凡我所言。不可與人見。只可自知。點頭而去。有二官人來云。都總太監欲討看總兵官所驗點你弓一張,刀一把云云。遂收去。有一人來問曰。景泰年間。我國給事中官張寧。奉使你國。做却金亭詩,皇華集。你曉得否。臣對曰。張給事到我國。著皇華集。其中題漢江樓詩。光搖靑雀舫。影落白鷗洲。望遠天疑盡。凌虛地欲浮之句。尤稱籍。其人喜形於色。又云。張給事致仕在家。家在嘉興府之海鹽縣。距此百里。張公到此杭城。聞朝鮮文士漂海來。欲問朝鮮事。留待累日。前一日回去。問其人姓名。則乃王玠。係給事甥也。有自稱陳梁者來言曰。區區曾與張寧靖之大人。往你國回還。臣曰。張公位至何官。緣何不仕在家。陳曰。張公官至都給事。後任都御史。因無子不仕。四十二歲。回家養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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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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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고벽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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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듣건대 당신들의 일은 사람을 시켜 밤낮으로 달려 북경에 가서 아뢰게 하고 회보(回報)를 받은 뒤에야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이 성에서 북경에 이르기는 수로(水路)가 거의 5천여 리나 되니, 그대는 이곳에 여러 날 머물러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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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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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이곳에 도착해서는 언어가 달라 실로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같은데, 족하께서는 지금처럼 듣고 본대로 즉시 얘기 해주어 먼 나라 사람을 돌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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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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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법이 매우 엄하고 율조(律條)가 아주 무거우니, 이인(夷人)에게 사정을 누설하면 새 법령에는 군호(軍戶)로 충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어서는 안 되고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라 하고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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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관인이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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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총태감(都總太監)께서 총병관이 점검한 당신의 활 1장과 칼 1자루를 찾아 살펴보시겠다고 하오”운운하면서 결국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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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경태(景泰) 연간에 우리나라 급사중(給事中) 벼슬을 한 장녕(張寧)이 귀국에 사신으로 가서 <각금정시(却金亭詩)〉를 지어 《황화집(皇華集)》에 실렸다는데 알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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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답하기를, “장(張) 급사(給事)가 우리나라에 와서 《황화집》을 지었는데 그중 한강(漢江) 이라는 제목의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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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빛은 청작(靑雀)배를 흔들고, 그림자 떨어지는 백구(白鷗)의 모래톱. 저 멀리 바라보니 하늘은 끝이 없고, 공중으로 솟구쳐 땅이 문득 뜨려하네”라고 한 글귀는 더욱 칭송이 자자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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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사람은 기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또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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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급사는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 있는데 집이 가흥부(嘉興府)의 해염현(海鹽縣)에 있으므로 이곳과의 거리가 100리입니다. 장공(公)이 이곳 항주성에 도착하여 조선의 문사(文士)가 바다로 표류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의 사정을 묻고자, 여러 날 머물러 기다리다가 하루 전에 돌아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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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사람의 성명을 물으니 왕개(王恥, 왕제)였는데, 장 급사의 생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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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칭 진양(陳梁, 천량)이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변변치 못한 내가 일찍이 정지(靖之) 대인과 함께 당신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소”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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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장공은 어느 벼슬까지 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장공은 관직이 도급사(都給事)에 이르렀고 후에는 도어사(都御史)에 임명되었는데, 아들이 없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42세에 집으로 돌아와 병을 요양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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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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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 Pi came and said to me, “I hear now that a man has been commissioned to hurry night and day to Peking to submit a memorial about you. He will not come back until he has a reply. It is about five thousand li from here to Peking on the waterway; you must stay here for many days.” I said, “In coming here with a different language, I am really like one blind and deaf. I hope that you will tell me things that you have seen and heard like this and pity me as a stranger.” Ku Pi said, “The laws of the country are extremely strict, and the punishments decreed are very severe. A new regulation imposes banishment for divulging information to barbarians. Do not show others any of what I have written; it is only for you to know.” He bowed and left. Two officials came and said, “The Supreme Commanding13 Overseer wants. to see the things examined by the Regional Commander – your bow and sword.” They took them and left. A man came and said, “In the Ching-t’ai reign [1450-1456] Supervising Secretary [Chi-shih-chung kuan] Chang Ning14 of our country was made an envoy to your country and wrote ‘On Leaving Golden Pavilion' and Huang hua chi.15 Do you know about them?” I answered, “Supervising Secretary Chang wrote Huang hua chi when he came to our country. In it, these lines, entitled “The Han River Tower,' were much praised: “Light plays on the boat with the haw-finch bow, As I look into the distance - do I see the end of the world? – I am air-borne; the earth floats under me.” The man's face took on a happy expression, and he said, “Supervising Secretary Chang has retired from office and is at home. His house is in Hai-yen County, Chia-hsing Prefecture, one hundred li from here. When His Excellency Chang came here to Hang-chou and heard that an educated gentleman from Korea had drifted here from across the sea, he wanted to ask about Korea and waited several days, but he went back a day before you arrived." I asked the man's name. It was Wang Chieh, and he was a nephew of the Supervising Secretary. A man who called himself Ch'en Liang came and said, “I went to your country and back with His Excellency Chang Ning [styled] Ching-chih.” I said, “How high did His Excellency Chang rise? Why is he at home and not in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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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en said, “He rose in office to Chief Supervising Secretary and later was appointed Censor-in-Chief [Tu-yü-shih], but because he had no children he did not take the position. At the age of forty-two he returned home to restore his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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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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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九日。在杭州。是日晴。昨來取弓刀官人又來曰。你弓刀。鎭守老爹留下看。臣曰。唯命。顧壁又來言曰。海上軍官行來文書。開說你還有船一十四隻。在海逞功。今巡按御史說旣有船十四隻。原何不捉拿來。以此罪他。鎭守及三司。議論不一。緣你供辭明辨。審知非倭。今已議定。差了指揮楊旺。送你赴京。轉送你回。竝無他話。還有三四日在此。你宜可寬心。又布政司大人徐圭。按察司副使魏福。同坐驛客館。引臣等曰。送你還國。你可放心好還。臣卽做詩以謝。還退舍。北京人李節來見臣之衣服襤縷。面目蒙垢。謂臣曰。此地人以冶容是尙。故凡看你等。皆驚笑。以謂朝鮮人類皆若是。可於面陽地。洗濯你身。臣卽令從者各自浣澣。遂與程保等面陽環坐。洗去塵垢。李節又來指點臣之皮膚盡換。足爪脫落曰。此是困於患難。不恤身膚之驗也。臣曰。我在海時。喉嘔血數匊。口無津三日。今又認膚爲鹹水所砭而換。足爲徒跣險阻而傷。嘗聞身體髮膚。不敢毀傷。孝之始也。我之體膚之傷若此。其眞不孝之子尒。節曰。無傷也。非你欲傷。天實傷你。雖傷何傷。不須傷心。李節之友人。失其姓名。袖小學一部。因節以遺臣。欲求詩。臣曰。無功而受人之賜。是傷廉之地。敢辭。節曰。此人欲求一詠以爲記爾。臣曰。做得詩不好。擧得筆亦不好。以不好易人之好。非所欲也。其人還袖去。李節謂臣曰。交以道。接以禮。則孔子亦受。是何郤之之甚。臣曰。彼人非是肯捨冊也。意在得詩。則交不以道。接不以禮。我若一受。則是賣詩取直。故郤之。節唯唯而退。夕。李節與其友金太等三人。來饋臣及從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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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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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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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활과 칼을 가져 간 관인이 또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활과 칼은 진수(鎭守) 나으리께서 남겨두었다가 살펴보려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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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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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벽이 또 와서 말하기를, “해상의 군관(軍官)이 보내온 문서는 당신이 배 14척을 가지고 바다에서 겁략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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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순안어사(巡按御史)는, '이미 배 14척이 있었다면 당초에 어찌 잡아오지 않았는가?'라 하면서 이 일로 그에게 죄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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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수와 삼사(三司)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당신의 공술이 명확하여 왜적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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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이미 의논이 정해져 지휘(指揮) 양왕(楊班)을 시켜 당신을 북경으로 보낸 뒤 귀국시키기로 하고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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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일 동안은 이곳에 있어야 하겠지만 당신은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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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포정사(布政司)의 대인 서규(徐圭)와 안찰사부사(按察司副使) 위복(魏福)이 역의 객관(客館)에 함께 앉아서 신 등을 불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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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을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터이니, 당신은 돌아갈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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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곧 시를 지어 사례하고 사관으로 물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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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경 사람 이절(李節)이 와서 신의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에 때가 묻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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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지방 사람들은 용모 가꾸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들을 보면 모두 놀라고 비웃으면서 조선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다고 생각할 것이니, 양지바른 곳에서 당신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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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곧 종자들에게 명하여 각자 스스로 몸을 씻도록 하고, 드디어 정보 등과 함께 볕을 향하여 빙 둘러앉아서 먼지와 때를 씻어내었습니다. 이절은 또 와서 신의 피부가 모두 벗겨지고 발톱이 빠진 것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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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은 환란에 시달려서 몸을 돌볼 수 없었던 표가 되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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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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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바다에 있을 때 목구멍에서 피를 두어 움큼이나 토하고 입에는 침이 마른 지가 3일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또 피부가 짠물에 찌들어 벗겨졌고, 발은 맨발로 험한 땅을 밟아 다친 것입니다. 일찍이 '몸과 모발과 피부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이라 들었지만 나의 몸과 피부의 상처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불효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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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절이 말하기를, “그럴 것 없습니다. 당신이 상처를 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실로 당신을 상하게 한 것이니 비록 상처가 났더라도 뭐 상심할 게 있겠습니까? 상심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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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성명은 잊었지만 이절의 벗이 《소학(小學)》 1부를 소매 속에 넣어 이절을 통하여 신에게 주고 시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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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 말하기를, “공로도 없으면서 남이 주는 것을 받는다면 이는 염치없는 짓이므로 감히 사양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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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가(詩歌) 한 장을 구하여 기념으로 삼고자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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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를 잘 짓지도 못하고 글씨도 또한 좋지 못한데 좋지 못한 것으로서 남의 좋은 것과 바꾸는 일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도로 소매 속에 넣고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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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절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리로써 사귀고 예절로써 대접하면 공자(孔子)께서도 또한 받았사온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물리치시는 것인지요?”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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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사람은 책을 기꺼이 주려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시를 얻는 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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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리로써 사귐이 아니고 예절로써 대접함이 아니니, 내가 만약 한번 받는다면 이는 시를 값을 받고 파는 셈이므로 이를 물리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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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절은 “예, 예, 그렇습니다.” 하면서 물러갔습니다. 저녁에 이절은 그의 벗 김태(金太) 등 3인과 함께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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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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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officials who had come the day before and taken the bow and sword came again and said, “Old Grand Defender has kept your bow and sword to look at." I said, “As you command.” Ku Pi came again and said, “A dispatch came from the naval officers setting forth that you were cruising about with fourteen boats, scourging the sea. Now the Regional Inspector16 says that if there were fourteen boats, why were they not seized in the first place and brought in? For that he has brought charges against them. The Grand Defender and the Three Authorities discussed the matter without reaching agreement, but since your deposition explained things clearly, they have adjudged that you are not Japanese. They have made their findings and have commissioned Commander [Chih-hui] Yang Wang to escort you to the capital, from which you will be sent home. “There was nothing else. You will be here another three or four days. You may put your mind at ease.” Next, His Excellency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Commissioner Hsü Kuei and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Wei Fu17 sat together in the guest house of the station and had us brought to them. They said, “We are sending you back to your country; you may be easy in your mind that you will go home all right.” I wrote a poem to thank them and went back from the house. Li Chieh, a man from Peking, came and saw that my clothes were tattered and my appearance filthy and said to me, “The people here set store by appearances. That is why all who see you laugh in amazement; they take it that all Koreans are like that. You might wash yourself in a sunny place.” I ordered each of my staff to wash his clothes. Then I sat with Chòng Po and others in a circle in the sun and bathed away the dirt. Li Chieh came and pointed to the places where my skin had peeled off and my toe-nails fallen out and said, “That is proof that in your sufferings there was no mercy for your body.” I said, “While I was at sea, I vomited several handfuls of blood. There was no saliva in my mouth for three days. Now I realize that my skin, pierced by salt water, has been peeling off and that my feet have been hurt from tramping over difficult ground. I have heard that not daring to injure any part of one's body is the beginning of filial piety. With my body hurt like this, I am certainly not a filial son.” Chieh said, “There is no harm in that. It is not that you have deliberately hurt yourself, Heaven has hurt you. What does it matter, therefore, that you have been hurt? You need not feel badly about it.' Li Chieh's friend, whose name I have lost, had a copy of a handbook [hsiao-hsüeh] in his sleeve and had Li Chieh present it to me. He wanted a poem. I said, “Accepting someone's gift without merit damages integrity. I make bold to decline it.” Li Chieh said, “This man wants a poem to remember you by.” I said, “I cannot write poems well; I cannot even handle a brush well. I do not want to exchange something not good for something good from him.” The man returned the book to his sleeve and left. Li Chieh said to me, “When the exchange accorded with the Way and the meeting accorded with etiquette, even Confucius accepted something. 18 Why were you so firm in refusing him?” I said, “That man did not want to give away a book, his mind was on getting a poem. Thus the exchange would not have accorded with the Way, and the meeting would not have accorded with etiquette. Once I accepted, it would have been receiving payment for a poem I had sold. That is why I refused him.” Li Chieh agreed and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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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 the evening, Li Chieh, his friend Chin T’ai, and two other men came and served me and my staff 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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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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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十日。在杭州。是日晴。顧壁來言曰。你去京師。前路不可不知。我國蘇,杭及福建,廣東等地。販海私船。至占城國,回回國地。收買紅木,胡椒,番香船不絶。十去五回。其路絶不好。唯赴京一水河路十分好也。故琉球,日本,暹羅,滿刺加等國進貢。俱從福建布政司泊船。到此府。過嘉興。至蘇州。天下紗羅段匹及諸寶貨。皆出於蘇。自蘇州過了常州。至鎭江府。過楊子江。江距此府千餘里。其江洶惡。如無風浪。方可渡。過此江。直至京河。路幾至四十日程。你衆人喜得春天。若是夏天炎熱。蒸燻患病。何以得去。且山東,山西,陝西三布政司。連年旱荒。人食人肉。民各失所。過楊子江。行千有餘里。便到山東地面。你衆深自計較。可也。因贈以筍曰。此素食也。你便可吃。貴國亦有此筍否。臣曰。我國南方有筍。五月乃生。顧壁曰。此地冬春交生。正月方盛。大者十餘斤。貴國與此地風土有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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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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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맑았습니다. 고벽이 와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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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경사에 가려면 앞길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소주(蘇州), 쑤저우·항주(항저우) 및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지역에서 바다로 장사하러 가는 사선(私船)들이 점성국(占城國)과 회회국(回回國) 지역에 이르러 홍목(紅木), 후추, 번향(番香)을 사들이느라 배가 끊이지 않는데, 열이 가면 다섯만 돌아오게 되니 그 길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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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사(京師)로 가는 수로만은 매우 좋기 때문에 유구(琉球), 일본(日本), 섬라(羅), 만랄가(滿刺加) 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바칠 적엔 모두 복건포정사에서 배를 정박한 뒤 이 항주부에 도착하였다가 가흥(嘉興)을 지나 소주에 이르게 되니, 천하의 사라단필(紗羅段匹)과 여러 가지 값진 물건이 모두 소주에서 산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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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주에서 상주(常州)를 지나 진강부(鎭江府)에 이르러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게 되니 양자강은 이 부(府)와의 거리가 천여 리나 됩니다. 강의 이 구간은 물이 세차고 험악하므로 풍랑이 없어야만 건널 수 있습니다. 양자강을 건너 곧장 경하(京河)에 이르기까지는 약 40일 걸리는 노정입니다. 당신들은 봄이어서 다행이지 여름철이라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병이 날 터이니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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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산동(山東), 산서(山西), 섬서(陝西)의 세 포정사에서는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사람이 인육을 먹고 백성들이 그 터전을 잃었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천여 리를 가면 곧 산동 땅에 도착하는데 당신들은 스스로 깊이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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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서 죽순[12][13]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소식(素食)이니 드십시오. 귀국에도 죽순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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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에도 남방에 죽순이 있는데, 5월이 되어서야 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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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지방에서는 겨울과 봄에 나서 정월이 한창인데 큰 것은 10여 근이나 됩니다. 귀국은 이곳의 풍토와 다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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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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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 Pi came and said, “Since you are leaving for the capital, you must know the road ahead. From Su-chou, Hang-chou, Fukien, Kwangtung, and other places in our country, sea-going smugglers go to Champa and Islamic countries and buy red sandalwood, black pepper, and foreign perfumes. The boats go endlessly, and for ten that leave five return. The passage is extremely difficult. “For going to the capital by water, only the river route is quite good. That is why when Ryukyu, Japan, Siam, and Malacca send tribute [the embassies] all go by way of the Fukien Administrative Region [Pu-cheng ssu]19 They land their boats, come to this prefecture, pass Chia-hsing, and reach Su-chou. All the silks and treasures of the Empire come from Su-chou. From Su-chou they pass Ch’ang-chou and reach Chen-chiang Prefecture, where they cross the Yangtze River. The river is more than one thousand li from this prefecture. It is violent and fierce and can be crossed only when there are no wind and waves. They cross that river and reach the capital directly. The river route is about a forty-day journey. “You people are fortunate to have spring weather. If it were summer, with its heat, humidity, and sicknesses, how could you go? In the three administrative regions of Shantung, Shansi, and Shensi, moreover, there has been drought for several years.20 Men are eating human flesh, and the people are losing their homes. After you have crossed the Yangtze River and gone more than one thousand li, you will be in Shantung. It will be well for you all to be very careful.” Then he gave me some bamboo shoots and said, “That is a vegetable dish, so you can eat it. Are there bamboo shoots in your country, too?” I said, “The southern part of my country has bamboo shoots. They sprout in the Fifth Month.” Ku Pi said, “Here they sprout from winter to spring, and they are at their height in the First Month. Big ones weigh more than thirteen pounds. The climate here is different from that of your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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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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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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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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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렌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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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플랜테리어.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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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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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수 - 적재, 검정치마, 기리보이, 아이유, Rex Orange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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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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