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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충현은 대한민국의 국제법학자이다. | 백충현은 대한민국의 국제법학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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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반환과 독도 영유권의 수호를 위해 국가에 이바지한 공헌이 인정되어 사망 이후인 201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39_1_0031178 백충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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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충현 교수의 가장 큰 업적은 <관판실측일본지도>를 통해 독도에 대한 일본과 우리나라의 영토분쟁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을 이끌던 자민당 1996년 10월 20일에 치러지는 일본 중의원 선거공약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내걸었다. 이에 백충현 교수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기 위해 서점을 샅샅이 뒤질 각오로 도쿄 간다 지역 고지도 서점을 방문했다. 일본 최고의 곤찬 지도라고 불리는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서점에서도 연락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팔지 않겠다는 고서점 주인들의 묵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백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4개월 후에야 일본 도쿄에 있는 고지도 전문점 충경당의 주인 이마이 데츠오씨로부터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백 교수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지 않은 이 지도가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결정적 단서’이고, 이로써 영유권 분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데츠오씨는 이 지도의 가치를 1,000만 엔, 당시의 환율로는 무려 1억이라고 책정하였다. 분명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백 교수는 끝끝내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일본 측에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역임을 명백히 밝혀냈다. <ref>[http://www.gimmyoung.com/Contents/StoryView?seq=822 [최초 공개] '독도 고유 영토론'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확실한 증거 <관판실측일본지도>, 김영사 홈페이지]</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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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성명 발표 현장을 담은 2001년 11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이다. <ref>[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158794&memberNo=2367855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한 백충현 교수,김영사 포스트]</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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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https://m.post.naver.com/my/series/detail.nhn?seriesNo=290715&memberNo=2367855&prevVolumeNo=7179911 출판사 '김영사'의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포스팅] |
− | * | +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45873 2001-01-31, "합병조약 국제법상 무효" 본격거론,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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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21:14 기준 최신판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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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백충현 |
출생 | 1939.03.22 |
사망 | 2007.04.11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국제법학자 |
경력 | 대한법학회 부회장
서울국제법연구원 이사장 대한국제법학회 회장 국제중재재판소 재판관 |
정의
백충현은 대한민국의 국제법학자이다.
내용
생애
1961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동 대학원에서 국제법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로 활동하였고, 1987년에 대한법학회 부회장이 되었다. 1990년에 서울국제법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4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1999년에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이자 국제중재재판소 재판관으로 활동하였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2004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또한, 유엔 아프가니스탄 인권문제 특별보고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반환과 독도 영유권의 수호를 위해 국가에 이바지한 공헌이 인정되어 사망 이후인 201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2]
독도를 지키고자 노력
백충현 교수의 가장 큰 업적은 <관판실측일본지도>를 통해 독도에 대한 일본과 우리나라의 영토분쟁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을 이끌던 자민당 1996년 10월 20일에 치러지는 일본 중의원 선거공약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내걸었다. 이에 백충현 교수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기 위해 서점을 샅샅이 뒤질 각오로 도쿄 간다 지역 고지도 서점을 방문했다. 일본 최고의 곤찬 지도라고 불리는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서점에서도 연락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팔지 않겠다는 고서점 주인들의 묵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백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4개월 후에야 일본 도쿄에 있는 고지도 전문점 충경당의 주인 이마이 데츠오씨로부터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백 교수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지 않은 이 지도가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결정적 단서’이고, 이로써 영유권 분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데츠오씨는 이 지도의 가치를 1,000만 엔, 당시의 환율로는 무려 1억이라고 책정하였다. 분명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백 교수는 끝끝내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일본 측에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역임을 명백히 밝혀냈다. [3]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요구
1991년 가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규장각 도서 관리실장을 맡고 있던 이태진 교수가 백충현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대한 국제법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태진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백충현 교수는 외규장각 의궤의 반출 경로가 약탈이기 때문에 전시국제법에 의해 프랑스에 반환을 요청하기로 결심한다. 이후에 프랑스 측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한불 포럼을 개최하는 등 국제법적인 근거를 대며 외규장각 의궤의 '조건 없는 반환'을 위해 노력하였다.[4] 아래는 백충현 교수가 1997년 4월에 열린 제2차 한불 포럼에서 발표한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의 국제법적 성격>의 일부이다.
"1866년 병인양요라는 조선과 프랑스 간 무력 투쟁 과정에서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의 반환을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역사적 정당성과 국제법적 이론을 기초로 한 지혜로운 외교 협상으로만 실현될 수 있는 문제다. 회수 방안의 출발점은 병인양요 당시 불법적으로 약탈된 외규 장각 도서에 대하여 현재 프랑스 측이 점유를 계속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상회복, 즉 완전한 반환만이 국제 법규에 타당한 정의로운 해결책이다."[5] |
멀티미디어
이미지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이충렬, 김영사)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비롯한 백충현의 업적들을 사료와 함께 적어낸 도서이다. [6]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들고 고서점의 데츠오 사장(좌)과 기념사진을 찍는 백충현 교수(우) [7]
공동성명 발표 현장을 담은 2001년 11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이다. [8]
동영상
참고문헌
기여
오미래:최초 작성
주석
- ↑ 2009-09-27, 부고 국제법학자 백충현 교수, 동아일보
- ↑ 백충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 [최초 공개 '독도 고유 영토론'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확실한 증거 <관판실측일본지도>, 김영사 홈페이지]
- ↑ 2017-04-15, 20년 전 1억 주고 ‘일본 지도’ 사온 학자, 중앙일보
- ↑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한 백충현 교수,김영사 포스트
- ↑ 도서소개,교보문고
- ↑ 독도와 외규장각 의궤를 지켜낸 법학자의 삶.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 ↑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한 백충현 교수,김영사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