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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정축년 3월 26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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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과 박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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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stma.aks.ac.kr/imageViewer/ImageViewer.aspx?datauci=JOKBO_B001_006&imagetype=mangabo&bonID=b082_s028&defaultpage=48&viewmode=bookmode&Viewoption=inmul 朴泰觀](1678~17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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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세족 반남박씨 박소(朴紹)의 후손. 4세에 모친을 여위고, 20살에 부친상을 당함. 족형인 징사공 박태초를 스승으로 섬김. 농암 김창협에게 가서 학문을 질정했는데 김공이 자주 칭송을 함. 김수종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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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역한 친구 사이로 김수종과 자주 교류하며 간찰과 선물을 주고 받았음. 강호에 오랫동안 살다가 늦게 三淸 白蓮峯 아래에 집을 사서 ‘白厓’라 이름 지음. 저서는 시고 한 권이 있음. 호는 凝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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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646 朴東說]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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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朴濠 첨지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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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http://people.aks.ac.kr/front/tabCon/gov/govView.aks?govId=GOV_JBK_6JOb_MN_3JN_02IMSL_011204&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朴世標] 南平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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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咸平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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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娶 全州李氏, 參奉讓錫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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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娶 寧越辛氏, 縣令泰東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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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http://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486A_0250_010_0130&solrQ=query%E2%80%A0%E5%87%9D%E9%BD%8B%E6%9C%B4%E5%90%9B%E5%A2%93%E8%A1%A8$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MO_AA$solr_toalCount%E2%80%A01$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GS_ITKC_MO_0486A_0250_010_0130 고전번역원 凝齋朴君墓表, (朴弼周의 黎湖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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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守宗(1671~1736)<ref>출처: 전경목,[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37014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신아출판사,2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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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은 자는 주경(胄卿), 호는 취선당(醉醒堂)이다. [http://archive.aks.ac.kr/imageViewer/ImageViewer.aspx?datauci=G002+AKS+KSM-XE.1672.4580-20101008.B002a_002_00426_XXX&refuci=G002+AKS+KSM-XE.1672.4580-20101008.B002a_002_00426_XXX&fname=G002+AKS+KSM-XE.1672.4580-20101008.B002a_002_00426_XXX-IMG.001.jpg&closed=true 김명열의 손자]이며 우반동 입향조인 김번의 양자로 그의 생부는 김번의 아우인 김문이다. 김수종은 큰아버지 김번이 아들이 없고 김번의 부인인 한양조씨가 아파 아들을 얻을수 없자 다섯 살이던 1675년에 큰아버지인 김번에게 [http://archive.aks.ac.kr/imageViewer/ImageViewer.aspx?datauci=G002+AKS+KSM-XD.1675.1111-20101008.B002a_002_00361_XXX&refuci=G002+AKS+KSM-XD.1675.1111-20101008.B002a_002_00361_XXX&fname=G002+AKS+KSM-XD.1675.1111-20101008.B002a_002_00361_XXX-IMG.001.jpg&closed=true 양자]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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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은 40세인 1710(숙종 36)년에 [http://archive.aks.ac.kr/imageViewer/ImageViewer.aspx?datauci=G002+AKS+KSM-XA.1710.1111-20101008.B002a_002_00086_XXX&refuci=G002+AKS+KSM-XA.1710.1111-20101008.B002a_002_00086_XXX&fname=G002+AKS+KSM-XA.1710.1111-20101008.B002a_002_00086_XXX-IMG.002.jpg&closed=true 진사에 급제]하였다.([http://archive.aks.ac.kr/imageViewer/ImageViewer.aspx?datauci=G002+AKS+KSM-XD.1710.0000-20101008.B002a_002_00606_XXX&refuci=G002+AKS+KSM-XD.1710.0000-20101008.B002a_002_00606_XXX&fname=G002+AKS+KSM-XD.1710.0000-20101008.B002a_002_00606_XXX-IMG.003.jpg&closed=true 시권]이 남아있음). 참봉직에 몇 차례 천거되었으나 결국 과거길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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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수종은 중앙 관리나 명문세족과 교유하며 가문의 지체를 높이고 자녀들을 좋은 집안의 자제들과 혼인시키려고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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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만성(李晩成)·이병상(李秉常)·조관빈(趙觀彬)·조도빈(趙道彬)·박태관(朴泰觀)·박태겸(朴泰謙)등과 교우하면서 이들을 통해 서울 소식을 전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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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571_1_0020648&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金弘遠]. 조부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613_1_0020406 金命說] . 양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187 通德郞行慶基殿參奉 金璠]. 양모 漢陽趙氏. 생부 宣敎郎 金璊. 생모 牛峯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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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順興安氏, 靑松沈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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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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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정축년 3월 26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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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정축년 3월 26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11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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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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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날마다 드세 짐에 형의 西行이 이미 출발했다고 했었는데, 홀연히 행차를 미룰 뜻이 있음을 들었으니, 이전의 생각이 호쾌하였는데 혹시 다른 일이 있어 그렇습니까? 기대하던 나머지 배나 아쉽고 놀랬습니다. 요즘 조금 추운 가운데 형의 지내시는 생활이 여러 면에서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을바람이 날마다 드세 짐에 형의 西行이 이미 출발했다고 했었는데, 홀연히 행차를 미룰 뜻이 있음을 들었으니, 이전의 생각이 호쾌하였는데 혹시 다른 일이 있어 그렇습니까? 기대하던 나머지 배나 아쉽고 놀랬습니다. 요즘 조금 추운 가운데 형의 지내시는 생활이 여러 면에서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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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仲秋에 맞추어 내려가고자 했으나, 쓸데없는 일이 많아 이에 이룰 수 없습니다. 이번 달 10일 사이에 마땅히 奴를 하나 보낼 것이니, 그 때에 편지를 쓰겠습니다. 日萬은 이미 重杖을 맞았다고 합니다.
 
저는 仲秋에 맞추어 내려가고자 했으나, 쓸데없는 일이 많아 이에 이룰 수 없습니다. 이번 달 10일 사이에 마땅히 奴를 하나 보낼 것이니, 그 때에 편지를 쓰겠습니다. 日萬은 이미 重杖을 맞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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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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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風日高, 謂兄西行己駕矣, 忽聞有退行之意, 前料爽矣, 或有事否. 企待之餘, 倍用悵愕. 伏惟簿寒中, 兄起居凡百冲勝. 弟得秋病憂, 哀哀無一善狀, 悄然少意趣, 自憐奈何. 定之, 各牽冗故, 近甚罕面, 今忽告歸, 悵觖何言. 因其行, 卒諒修書, 所欲言者多, 而百不及一, 只希諒照, 拜上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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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九月初一 弟 泰觀 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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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者借空, 思想正苦, 只俟西笑之期. 今聞行程似退云, 不勝觖然, 此欲趂秋下下去, 冗故多端, 玆未果. 今旬間, 當送一奴, 其時作書耳, 自前己施重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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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계미년 추정)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태지(12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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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86%8D%EB%8F%99 典農]에서 보낸 봉물과 서간은 심부름꾼을 즉시 보냈는데, ‘답장은 수일 내에 당연히 보낼 것이다.’라 말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士古가 찾아옴에 다시 보내는 것을 독촉하니, 답할 때는 ‘네네’하면서 갔는데 끝내 또한 답장을 전하지 않으니, 참으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육명의 어머니는 바야흐로 광주에 머무시고, 누이께서는 전농에 계시니, 피차가 모두 평안하십니다. 심씨 어른 집에는 지난 달 27일에 자식의 혼사를 잘 치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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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奴의 조카 有秋가 4~5번을 종종 와서 보았는데, 그가 이미 이판부사댁의 모시는 하인으로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됨을 보면, 앞으로 서리의 역을 충분히 감당할만합니다. 저 또한 그를 권하여 서울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으니, 형께서는 돌아오라고 재촉하지 마십시오. 비록 끝내 배반하여 떠나가는 것으로 걱정하더라도, 형께서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이 무리가 배반할 수 없으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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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掩에 들어가는 비용이 11냥에 준하므로, 이로서 庄奴에게 계산해 주십시오. 돈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336 錦平]의 魚箭에 대한 세금인데 이롭지 않아 버려두었으므로, 그래서 나가서 이엄을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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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中에다가 집을 짓는 계획은 가히 큰 결정이라 그만두기 어렵다 할 만 합니다. 목재는 반드시 겨울 전에 베어두고 기다리심이 어떠하십니까. 초봄에 즉시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간다면 마땅히 수송할 것입니다. 저번에 겨우 台甫를 한번 만났는데, 부안 수령께서 간혹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형들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탄식스럽습니다. 우환이 조금 나아진 다음에 마땅히 다시 권학사에게 편지로 간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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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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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農所送封物書簡, 專人卽送. 答簡數日內當送云, 而終不來. 其後士古來訪, 更督其送, 答則唯唯而去矣, 終亦不送答, 誠不知其故也. 盖聞六命慈闈方留廣州, 其妹氏獨在典農, 彼此俱平安. 沈丈家去卄七, 利過子婚云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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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奴姪子有秋, 四五次頻頻來謁, 聞其已入李判府事家陪下人, 觀其爲人, 前頭足當書吏之役. 弟亦勸使留住京家, 兄須毋促其還下也. 雖以畢境叛去爲慮, 而兄之未盖棺前, 此輩不能叛, 勿慮勿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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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掩所入, 準費十一兩, 以此計給庄奴如何. 錢是錦平魚箭貰物, 而不利而去, 故出而貿耳掩耳. 福中構屋之計, 可謂大決難罷. 材木必須冬前伐置以待如何. 春初卽當南下, 下則卽當輸送耳. 頃者, 僅一面台甫, 扶安守許, 間有不好之端, 不言及兄輩事云, 可歎可歎. 憂患稍間之後, 當更權學士書懇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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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을미년 3월 23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11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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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전해 준 편지는 신년 소식이었습니다. 대체로 저번에 조용히 계실 때의 안부가 편안하고 건강하시다하니 매우 위로가 되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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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거에서 번번이 떨어져서 지금 다시금 유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봄의 강을 가깝게 대면하면서 자고 먹는 것은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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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것을 들으니 형은 새롭게 나이어린 첩을 두었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참척해서 무료한 나머지 나온 것입니다. 이는 쇠약해 지는 때에 보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마침내 단지 집안을 어지럽게 하는 일이니 진실로 계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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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것을 생각해보면 형 나이 오십에 사세의 가묘를 받들면서 자식을 낳아도 번번이 기르지 못하니 조물주의 뜻을 이미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입후의 일은 하루도 늦출 수 없는데 머뭇거리는 것을 돌이켜보면 이는 이익이 없고 해가 있는 일입니다. 옛 친구가 기대하는 바가 아니니 사람으로 하여금 개탄하게 할 뿐입니다. 저의 조카를 천리 밖에서 상견하였는데 비록 심히 기쁜 소식이라도 낙방하여 슬퍼하면서 돌아가니 또한 저의 마음이 괴롭고 심난한 것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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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편으로 인해 서울로 올라올 뜻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계책이 과연 어긋나지는 않았습니까. 작별하고 온 것이 지금 삼년이라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바라는 바는 오직 형의 말머리가 서쪽을 향하는 것일 뿐입니다. 궁함을 구해주는 곡식은 매번 당하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또 집이 가난하여 부끄러운데 형이 나를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전농으로 보낸 것은 즉시 찾아서 보냈습니다. 많고 적은 것을 다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잘 살펴주십시오. 절하고 편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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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1715년) 3월 23일 아우 태관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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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환후는 근래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지만 대체로 차도를 보이는 지경에 들어갔으니 신하된 자의 다행함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약원이 만약 물러가면 마땅히 특별히 실시하는 과거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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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한개를 올려 보냅니다. 대하는 쓸 곳이 있으니 그것을 얻는 것이 만약 크게 어렵지 않으면 모름지기 넉넉하게 뒤에 오는 편에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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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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姪輩所傳惠書, 卽新年消息. 槩審向來靜履安健, 區區殊用慰喜.弟科事輒敗, 今而不復恨有司矣. 近對春江, 眠飯粗遣, 餘外不須論也.流聞兄新畜少妾, 想亦出於慘慽無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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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餘, 而此非衰年保養之道. 畢竟徒亂人家事, 誠非得計也. 且又念之, 兄五十之年, 奉四世家廟, 而生子輒不育, 造物者之意已可知. 立後事, 不可一日少緩, 而顧反遲回, 乃爲此無益有害之事. 殊非故舊之所期望, 令人慨歎不已. 家姪千里相見. 雖甚喜報 而落榜悵然而歸, 亦覺弟心之惱擾矣. 聞有因便西上之意, 此計果不差池否. 別來今三年, 不堪思慮之懷. 所企者, 惟兄馬首之西耳. 救窮之栗, 每當盛惠, 且愧家貧, 致煩兄費念不少也. 典農所送, 卽爲推傳之矣. 多少不究, 伏惟下照, 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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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三月卄三日 弟 泰觀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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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候近亦進退, 而大槩已差境, 臣人之幸曷極. 藥院若退歸, 則當有庭試之科云矣. 一墨送呈. 大蝦有用處, 得之如不大難, 幸須優惠後來便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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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을미년 7월 18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12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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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인편이 있는데 오는 소식은 없고 절기의 차례는 빨라서 이미 가을입니다. 매번 형을 생각하지만 보지 못하며 다만 걱정과 답답함만 쌓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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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柳浦에서 사람이 와서 멀리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그동안 온 가족이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으로 족히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듣기로는 형이 낙상하여 앓은 일이 있다고 하니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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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심한 더위로 소와 말이 목말라 죽는 일이 있는 것은 古老가 수 십년동안 없었던 바라고 하니 남쪽은 반드시 북쪽보다 곱절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형께서 어찌 편하게 지내시겠습니까? 다만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혹시 큰 비가 많이 내려 더위가 심하지 않은 것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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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이 적막하여 하나도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없고 매번 형님의 신세가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생각하니 어찌 일찍이 슬퍼 탄식하지 않은 적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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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을 두는 일은 집이 부유하고 영화를 누린 사람들이 관례처럼 하는 것인데, 진실로 세속의 정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집안일을 해치지 않는 사람 또한 적습니다. 본디 형이 이 뜻이 있음을 알고 불가하다는 뜻을 많이 말한 것이 또한 두세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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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온 편지에 ‘만약 형과 같은 친애함이 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냐’는 등의 말이 있는데, 어찌 이렇게 성실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수년간 떨어져 있어 평소에 거듭 경계한 말을 전부 잊은 것이면, 제가 형에게 있어서 결코 친애하는 벗이 아닌 것이니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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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다 이루어진 일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첩을)얻은 후에는 처치하는 방법을 얻어야 바야흐로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지금 마음을 움직여 경계함을 가진 후에 크게 후회함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자가 굳센 마음이 있어도 나이가 들어 뜻이 쇠약해지면 부인에게 흔들려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거의 드뭅니다. 이것이 매우 걱정되니 저의 뜻에는 어떤 다른 뜻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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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가죽 베개를 얻어 여름에 그 서늘함을 취하니, 그것을 항상 사용합니다. 양쪽 모두 귀가 먹어서 큰 소리여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한 몸에 눈과 귀가 밝은 것은 매우 귀중한 것인데, 제가 지금 이와 같으니 민망하고 민망합니다. 세속의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말은 모두 들으려하지도 않지만, 이러한 것은 들리지 않으니 또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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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stma.aks.ac.kr/e-map/mapSearch_AN.aspx?lang=ko&mType=anciNm&sType=anSearch&sWord=DYD_02_03_0060 盤松]의 찰방 숙부가 오랫동안 굶주린 나머지 갑자기 설사를 하여 그저께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돌아가셨습니다.) 일생이 곤궁하다가 끝내 아사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비통하고 비통하니 어찌 그 말로 다하겠습니까. 부안의 친구가 이 소식을 들으면 또한 반드시 슬퍼할 것입니다. 아직 쓸 말은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굽어 살펴주십시오.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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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1715년) 7월 18일 아우 태관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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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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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去便而無來訊, 節序駸駸, 已流火矣. 每思之而不可見, 則徒積煩菀而已. 忽於柳浦人來, 獲奉遠書之辱, 槪審向來合眷平安, 此足可慰, 而第聞兄有下堂之憂, 馳念馳念. 今夏盛熱, 牛馬至有渴死者, 古老以爲數十年來所無, 可想炎方必倍北地, 兄何能聊遣, 但無見及語, 或是潦雨多下, 熱不甚作耶? 山村寂寥, 無一可慰心者, 每念兄身世凄苦, 何嘗不悲歎也. 蓄妾之事, 家富身榮者例爲之, 固世俗之情也. 然畢竟不敗家事者亦少, 素知兄有此意, 多陳不可之義, 亦不至再三而止矣. 來書有若有如兄親愛豈有此事等語, 何其不誠實耶? 不然, 數年睽離, 全忘平昔申戒之語, 弟之於兄, 決非親愛之友也. 殊用慨歎. 然遂事不可說也. 旣得之後, 處之得其道, 方可無後患, 幸及今動心存戒後, 無至大悔可也. 男子剛腸, 年老志衰, 則不爲婦人所搖奪者甚鮮, 此殊可慮, 弟意中無甚他故. 而適得皮枕, 署月取其凉, 而常用之. 兩耳俱聾, 大聲方可聽, 人之一身上聰明甚貴, 而弟今如此, 可悶可悶. 然俗間細瑣語, 都不欲掛耳, 此則不聞亦好矣. 盤松察訪叔, 久飢之餘, 暴得泄瀉, 再昨不起疾, 一生窮困, 終未免餓死, 慘痛慘痛, 何可盡言, 扶安親舊聞之, 亦必悲之矣. 多少不宣, 伏惟下照, 謹謝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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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七月十八日 弟 泰觀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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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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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background:whi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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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문서번호||서기년||간지||편지 발신자||박태관나이||김수종나이||내용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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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8||1697||정축년 3월 26일||弟 泰觀 頓首||20||27||안부를 전하면서 가을이라 한번 찾아오라 함.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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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4||1700||경진년 10월 2일||朴泰觀||23||30||만남 후에 보낸 편지로 僮僕이 돌아감에 부침, 부탁한 시를 지어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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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6||1701||신사년 上元日 아침||弟 泰觀||24||31||안부 편지, 監試 初試가 8월로 결정되니 그 때 올라오는지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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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9||1701||신사년 2월 6일||弟 泰觀||24||31||선친의 忌日을 지냈음, 며느리가 유산됨, 읍리 편에 편지를 부침. 추신-[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916 『遺響』]을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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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1||1701||신사년 5월 7일||服弟 泰觀||24||31||과거를 보려는 것이 잘못됨을 들음, 춘궁을 구제해 준 두 가마니는 너무 과해 송구하다. 답장. /추신-盤松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을 요구. 『遺響』은 잘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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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1703||계미년 6월 19일||弟 泰觀||25||33||뜻을 확고히 하여 마음을 다잡아라, 子受 집에서 인편이 감에 작성함. /추신-庄奴는 엄하게 다스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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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8||1703||계미년 7월 19일||弟 泰觀||25||33||小紙에 적힌 盤松의 家舍는 형이 定之와 각자 가지는 문제는 둘이 잘 합의해라, 전복과 종이를 보내주어 감사함, 錦平에 노인이 죽었다고 통보.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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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5||1703||계미년 9월 1일||弟 泰觀||25||33||定之가 돌아감에 안부를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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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0||1703||계미년 9월 18일||弟 泰觀||25||33||定之가 돌아감에 쓴 안부편지. /추신-定之가 잘 돌아갔는지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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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3||1703||계미년 12월 5일||服弟 泰觀||25||33||奴가 돌아감에 쓴 안부 편지. /추신-생선을 보내주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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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7||1704||갑신년 11월 30일||朞服情弟 泰觀||26||34||박태관이 부안에서 서울로 온 후 잘 왔다고 보낸 편지. 공부하라는 조언, 시를 지어 보냄, 서울 소식을 전함, 新曆 4부 大墨 1홀을 보냄, 저고리가 바뀌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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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2종의 생선과 耳掩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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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9||1705||을유년 9월 28일||服弟 泰觀||26||35||과거시험에 못 보게 되어 아쉬움, 농사가 흉년이라 놀랍다, 湖伯형에 처소에서 돌아가는 편에 쓴 안부편지. /추신-船卜을 급하게 기다리니 廳奴에게 빨리 보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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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8||1706||병술년 1월 17일||服人世弟 泰觀||27||36||定之가 죽어 슬픔, 정지는 문필을 버리고 무과에 급제 편모와 어린 자식이 있음, 喪車는 兩湖의 方伯에 부탁했음, 부의를 제대로 못해 송구함, 海墨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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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고-冑卿이 公山에서 만나자는 것은 기제 때문에 할 수 없음, 遮陽竹을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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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0||1706||병술년 5월 7일||服弟 泰觀||27||36||定之가 죽은 후로 김수종과 연락이 그침, 김수종이 아들을 낳는 것에 축하함, 竹園에 모르는 시체를 파 갔다고 하여 축하함, 두 섬의 벼와 여섯 묶음의 생선 30개의 靑竹에 감사함, 배를 팔게 하고 곡식을 받을 것임, 定之의 가족 소식을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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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5||1707||정해년 5월 30일||弟 泰觀||28||37||홍역이 경향에 만연한데 안부를 물음, 아들딸 중 무엇을 낳았는지 물음, 과거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웬만하면 올라와라, 조카의 婚處가 古阜人을 택하는데 적합처를 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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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泉의 金友 일은 禮判이 거부하여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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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4||1708||무자년 8월 2일||眷弟 泰觀||29||38||전염병이 없어졌는지 공부는 잘하는지 물음, 婚處에 대해서는 沈友에게 들었는데 집안이 좋다고 함, 비가 많이 내려 걱정됨, 京畿의 밭에는 수확물이 없어 부안만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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廳奴를 타일러 빨리 곡식을 보내 달라, 白紙는 품질이 안 좋음, 전복은 감사함, 조카의 혼례는 10월로 미룸, 筆墨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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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2||1708||무자년 8월 3일||服弟 泰觀||29||38||200냥을 보내주어 감사, 方伯과는 추후에 인사를 하겠다. /추신-金鏡의 친우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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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5||1709||기축년 1월 3일 밤||服弟 泰觀||30||39||부안에서 돌아온 후 안부편지, 김수종의 상사에 대해 위로, 자신은 조카가 요절함, 蘆橋에 대한 原情을 보내니 올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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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2||1709||기축년 1월 28일||服弟 泰觀||30||39||만난 지가 10개월이 됨, 김수종 계씨의 죽음을 위로함, 박태관은 요절한 조카를 묻을 것임, 蘆橋에 대한 송사가 정지되면 남쪽에 못 내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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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相이 沈浚과 崔壽慶을 붙여주기 위해 복과를 시행할 것이니 올라와라. /추신-東湘의 노형과 李忠義 부자와 石橋의 郎君 안부를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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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709||기축년 踏靑日(3월 3일)||服制 泰觀||30||39||김수종 계씨의 장례에 부안군수가 도와줬는지 물음, 蘆橋 일은 내려가지 않음, 조카아이는 내려감, 網巾은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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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領相이 『禮記類編』을 찬술함, 이로서 성균관 유생과 갈등함, 노론과 소론들이 혈전을 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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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74||1709||기축년 9월 26일||服弟 泰觀||30||39||김수종이 간 후 10개월 지남, 박태관은 두 장례식의 返虞를 마침, 조카는 멀리 떠나 감, 完山의 백일장은 잘 볼 수 있는지 물음, 人馬는 가까운 고을에서 빌리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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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68||1709||기축년 11월 5일||服弟 泰觀||30||39||조카가 모두 남쪽에 내려감, 인마를 빌려주어 감사함, 굶주림에 곡식을 도와 달라. /추신-李鉽의 鞫廳을 설치하고 사형시킴, 영상 李濡가 쫓겨나고 崔相이 다시 배수 받음, 전복과 생선은 감사함, 먹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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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69||1710||경인년 1월 5일||服弟 泰觀||31||40||편지를 한지 60일이 됨, 남쪽에 간 조카의 소식을 못 들음, 임금의 병이 심하다가 회복함, 봄에 慶科를 설치한다 함, 조카를 잘 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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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姪 朴弼揆가 完山 判官이 되어 가는데 만나 봐라, 상사에 의한 병으로 봄에 도성으로 이사하려 함, 靑竹 3~40통을 보내 달라, 三曆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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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6||1710||경인년 12월 16일||弟 泰觀||31||40||김수종 딸의 혼처를 물음, 李兄의 旬撫하는 행차가 바뀐 것을 전함, 달력을 보냄. /추신-黃口筆 2개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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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6||1711||신묘년 4월 17일||服弟 泰觀||32||41||營中에 있는 李柏年에게 편지를 보내라 함.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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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54||1711||신묘년 12월 17일||弟 泰觀||32||41||박태관은 賢兒와 모든 아이들이 마마 걸림, 6일에 젖먹이 애가 죽음, 일찍 고아가 된 후 부인과 형을 잃었다고 함, 김수종이 아들 얻은 것을 축하함, 坤殿에 창질이 회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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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庭試를 2월 30일 설행한다 함, 과거공부를 하라, 柳婚이 틀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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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새 수령이 재목을 베어 배를 만든 것을 단속한다는 데 잘 처리해 달라, 台甫가 扶安수령과 다투어 안 내려감, 청나라 황제가 歲幣를 없앰, 新曆은 금처럼 귀하여 3부만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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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70||1712||임진년 8월 26일||弟 泰觀 頓||33||42||박태관은 동쪽 여행 후 학질에 걸림, 남행은 다음 달 10일 갈 것임, 根壽의 죽음이 안타까움, 科獄의 곡절이 심하여 鞫獄이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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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52||1713||계사년 4월 11일||弟 泰觀||34||43||박태관이 반년 동안 있다가 서울로 잘 올라왔다고 전함, 진송해 준 것이 감사, 關伯형의 龍山 江亭에서 1~2년 보낼 것임, 金昌翕에게 그 풍경을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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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에게 이곳에 집을 지어 달라 함, 붓 2개 먹 하나를 보냄. /추신-東湘에 안부를 전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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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67||1713||계사년 11월 7일||弟 泰觀 頓||34||43||東村의 伯兄이 1일에 죽음, 부안에 있는 박태관의 막내 조카가 죽었다고 전해서 놀람, 柳庄은 풍토가 좋지 않아 조심하고 산 사람을 돌봐 달라, 임금의 감기가 차도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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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史로 尹鳳朝·呂光周·李秉常이 나감, 鵞峴의 季兄이 廣州府尹으로 부임할 것임. /추신-新曆 2건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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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47||1714||갑오년 1월 26일||服弟 泰觀||35||44||希甫가 죽었다하여 놀람, 김수종의 동생인 根壽가 작년에 希甫가 이번에 죽음이 한탄스러움, 庶弟 하나만 남음, 박태관은 부인과 형과 아이를 잃고 작년에 조카가 요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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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東村형을 장사지냄, 돈을 보내주어 감사함. /추신-임금의 건강이 회복함, 主材와 먹 하나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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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61||1714||갑오년 2월 28일||服弟 泰觀||35||44||김수종에게 동생을 잃은 후 안부를 물음, 大庭試를 치룰 것이니 공부하라, 李慶叔이 부인을 묻기도 전에 새 부인을 얻은 것을 만류시켜라. /추신-붓 1자루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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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46||1714||갑오년 4월 1일||服弟 泰觀||35||44||龍湖의 하류로 이사가려 함, 식량을 보내주어 감사함, 곡식을 보내 달라, 李慶叔의 자식이 죽음은 슬픔. /추신-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청나라 사정을 전함, 三日製에 李匡輔가 장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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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19||1715||을미년 3월 23일||弟 泰觀||36||45||과거에 낙방, 김수종이 소첩을 데린 것에 대한 훈계, 김수종 조카도 낙방하고 돌아감. 답장. /추신-국왕이 나으면 庭試가 있을 것임, 먹을 보냄, 大蝦를 보내 달라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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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30||1715||을미년 5월 10일||弟 泰觀||36||45||보리를 몇 가마 보내 달라. /추신-임금이 병환이 심해짐, 도정은 8월에 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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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22||1715||을미년 7월 18일||弟 泰觀||36||45||더위가 심함, 첩을 두는 것에 훈계, 숙부 盤松察訪이 돌아가심.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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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38||1715||을미년 8월 24일||服弟 泰觀||36||45||아들을 낳음, 察訪 숙부가 굶어 죽음은 친구들이 슬퍼할 것임, 관 값을 박태관 자신에게 보내 달라, 吏判은 趙泰采가 되고 申銋은 체직됨. /추신-東湘의 안부를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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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57||1716||병신년 정월 아침||弟 泰觀||37||46||새해 안부편지, 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講經 別試는 2월 20일 후로 정해짐, 察訪 숙부의 賻儀金을 모을 수 있는지 물음, 관 가격을 독촉 받음, 凶書 만든 사람이 잡혀 사형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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鵞峴 李兄이 藥院에 들어감, 새로 얻어 아이의 건강을 물음, 抱龍丸 安神丸 淸心丸을 보내 달라, 월력 3건과 먹 하나를 보냄. /추신-大蝦는 좋은 것으로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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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18||1716||병신년 단오일||弟 泰觀||37||46||새로 얻어 아이의 마마를 걱정해 줌, 곡식을 보내주어 감사함, 집을 짓는데 돈을 보태 달라, 여러 사람들의 안부를 물음. /추신-大蝦를 보내 달라, 아이 약과 붓 하나를 보냄.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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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40||1716||병신년 11월 23일 저녁||弟 泰觀||37||46||山訟으로 바쁠 것이라 염려 됨, 박태관은 아이가 요절함, 굶주리고 있으니 곡식을 보내 달라, 湖儒가 孝廟를 추숭하는 일로 上䟽함, 太守의 행차 편에 편지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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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大小 달력 2개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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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41||1717||정유년 5월 14일||弟 泰觀||38||47||서울에 돌림병이 심함, 金春澤과 鄭錫敷 이 때문에 죽음, 임금의 건강이 걱정됨, 받은 網巾은 너무 사치스러움, 부채 1개 먹 2개 붓 3개를 보냄. /추신-참빗 2개를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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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66||1717||정유년 7월 5일||服弟 泰觀||38||47||김수종의 庶弟가 죽은 것을 위로, 時病이 일어남에 괜찮은지 물음, 박태관은 三淸에 집을 옮김, 종이를 구하는 것에 부안 것이 오히려 비쌈, 종이 값을 그냥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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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21○||||미상(계미년 9)||||||||典農에서 보낸 물건과 편지의 행방을 물음, 龍奴 조카인 有秋에 대해 걱정 말라, 耳掩의 가격을 보내라, 집 짓는 목재는 준비해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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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23||||미상(을미년 7)||||||||김수종이 목이 쉬는 병에 걸림을 위로, 딸아이 얻음을 축하함, 자식이 번성하지 못함을 위로함, 박태관의 서제와 조카가 부안으로 이사 감에 인마를 빌려 달라.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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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24||||신○년 11월 1일||弟 泰觀||||||큰 아이가 마마를 앓음, 귀마개는 품질이 좋은 것임, 서울 소식을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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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27○||||(경인년 12)||眷弟||||||상대가 행차하는 관계로 어제 이별한 후에 보낸 편지, 행차 길에 瘡疾이 퍼져 걱정됨, 臘藥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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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32||||병○년 6월 27일||眷弟 泰觀||||||竹林에 시체를 파 갔다고 들음, 박태관의 庶弟의 병이 위독함, 김수종이 새로 얻은 아이의 병을 걱정함, 독서를 하라, 庶母집에 곡식을 金無毒에게 빼앗겼는데 이를 해결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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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安郡守가 李塾의 甥姪인데 만나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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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35||||갑○년 10월 9일||弟 泰觀||||||산속 암자에서 논어를 읽다가 돌아 옴, 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전에 보내준 음식에 감사함, 달력 2건 붓 1자루 보냄, 신년 안부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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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37||||무○년 1월 23일||朞服弟 泰觀||||||次雲이 온 후로 소식을 못 받음, 初喪부터 신세가 처량함, 楊州의 선산 가까이 혈처를 얻어 地師에게 날짜를 요구함, 世子의 謁聖이 2월 21일 정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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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書 閔鎭厚를 수장에 규정한다는 윤허를 받음, 시험보러 올라 와라. /추신-아이 약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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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42||||병○년 9월 4일||眷弟 泰觀||||||김수종의 자식이 요절한 것을 위로함, 박태관 자신의 친조카와 庶弟를 못 도와줘 안타까움, 呂必重 姜履相 등이 유배 감, 신사년 옥사에 대신들이 파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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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之의 상사에 슬픔, 扶庄에 곡식이 잘 되도록 도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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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43○||||(병?년 9)||眷弟||||||비가 걱정됨, 戶牌 나무는 시장에서 구입하라, 壯紙 등 종이를 보냄, 錦平과 燕行과 西郊에 종이를 보내는데 말을 빌려 달라. /추신-호패 작성법을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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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44||||을○년 30일 밤||服弟 泰觀||||||김수종의 어린 딸을 묻는 참혹함을 위로, 湖儒의 上䟽로 인해 春宮과 廷臣들이 몰려가서 간청함, 增廣試를 설행한다고 함, 서울로 와서 계속 떨어지는 치욕을 떨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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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東湘과 茁來의 안부를 묻고, 釋之의 안부를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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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53||||무○년 윤월 21일||弟 泰觀||||||남쪽의 瘡疾이 아직 있어 걱정됨, 李自白의 일은 호남방백을 만났는지 물음, 김생원댁 堂額을 빨리 지어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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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55||||병○년 12월 20일||服制 泰觀||||||緬禮를 잘 치렀다 하여 하례함, 박태관은 부인이 출산 후 병으로 고생함, 舍姪이 고생한 것이 어른 입장에서 안타까움, 곡식이 빨리 오도록 도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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遮陽竹은 좋으니 더 보내 달라, 林浣이 장을 맞아 죽음. /추신-新曆 3부를 보냄, 別試는 중춘에 하니 올라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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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56||1698||무○년 11월 17일||弟朞服人 泰觀||||||잘 돌아갔는지 물음, 박태관은 첫 期日이 다가와 슬픔, 金友가 初試에 합격함. /추신-生薑을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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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59○||||26일 저녁(정축년 3)||眷弟||||||柳庄에 잘 도착함을 들음, 박태관은 부친의 忌日을 지내고 잠시 머무름, 같이 데리고 온 人馬가 많으니 양식을 보내 달라, 臘劑와 붓과 먹을 보냄, 典農 沈生의 창질이 나아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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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東湘에 안부를 전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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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60○||1707||小紙(정해년 1)||||||||判義禁府事 李頤命이 급하게 홀로 請對하려는 것을 배척당함, 이로서 파직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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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63||||병○년 10월 10일 밤||眷弟 泰觀||||||緬禮가 정해짐을 들음, 부탁한 내용은 민생과 의논하면 민대감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음,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을 느슨하게 함을 질책, 보내준 벼와 생선에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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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毒의 일족 소재를 파악해 달라, 緬禮를 잘 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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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65||||경○년 10월 1일||弟 泰觀||||||파도로 行裝을 바다에 빠뜨린 것을 위로함, 과거시험을 못 봄, 저번 달에 아들을 얻음, 畿田이 흉년이라 扶庄의 곡식만 믿음, 해적이 창궐하니 조심하라, 婚事는 직접 찾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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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71||||12월 15일||服弟 泰觀||||||三淸의 具兄이 돌아와 편지를 받음, 奴를 湖中으로 보내 공물을 가져오다가 강도를 만나 빼앗기고 노도 죽음,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내년 가을에 別試를 시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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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73||||편지 받은 아침||損弟 泰觀||||||낮에 출발할 것이므로 자신에게 찾아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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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76||||정○년 7월 11일 저녁||眷弟 泰觀||||||次雲이 편지를 전해 줌, 종이 구입은 좋은 종이를 구입하는 것 보다 그냥 돈을 준다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김수종의 庶兄 상사를 당함에 위장을 제때 못 보내 송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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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李忠義 노인의 안부를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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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이 박태겸,박태관과 주고받은 물품 목록<ref>출처: 전경목,『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신아출판사,2001,25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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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60%; background:whi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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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문서번호||서기년||보낸물품||받은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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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1699||대복(大鰒), 괴판(槐板), 담배[南草]||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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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1||1701||벼[粟]||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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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8||1703||복(鰒), 종이[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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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3||1703||물고기(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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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7||1704||||달력[曆], 먹[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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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0||1705||괴판(槐板)||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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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8||1706||차양죽(遮陽竹)||해묵(海墨), 주재(主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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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0||1706||나락[租], 물고기[鱗], 푸른대[靑竹]||먹[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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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8||1706||||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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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5||1706||차양죽(遮陽竹)||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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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2||1708||돈[靑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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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4||1708||||붓[筆], 먹[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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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1||1709||망건(網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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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9||1710||푸른대[靑竹]||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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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6||1710||||달력[曆], 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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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4||1711||||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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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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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0||1712||물고기[魚], 돈[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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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2||1713||||붓[筆], 먹[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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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7||1713||||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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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1714||돈[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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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61||1714||||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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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46||1714||벼[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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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9||1715||벼[粟], 대하(大蝦)||먹[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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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38||1715||돈[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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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57||1716||돈[錢], 대하(大蝦)||달력[曆], 먹[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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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18||1716||벼[粟], 돈[錢], 대하(大蝦)||아이 약[兒藥],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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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63||1716||나락[租], 물고기[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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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40||1716||벼[粟]||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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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41||1717||망건(網巾), 천초(川椒), 참빗[眞梳]||부채[扁],먹[墨],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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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37||1718||||아이 약[兒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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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56||1718||생강(生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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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41||1721||보리[牟麥], 괴판(槐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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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11||1733|||||달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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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27||미상||||납제(臘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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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35||미상||벼[粟]||달력[曆], 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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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 간찰 관련 지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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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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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 민족문화대백과사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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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ryeong.com/shop/content.php?co_id=41 부안 부령김씨 대종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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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itkc.or.kr/ 한국고전종합D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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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eople.aks.ac.kr/index.aks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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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stma.aks.ac.kr/ 한국학자료센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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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2017년 12월 11일 (월) 15:06 기준 최신판


김수종과 박태관


명문세족 반남박씨 박소(朴紹)의 후손. 4세에 모친을 여위고, 20살에 부친상을 당함. 족형인 징사공 박태초를 스승으로 섬김. 농암 김창협에게 가서 학문을 질정했는데 김공이 자주 칭송을 함. 김수종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김수종과 자주 교류하며 간찰과 선물을 주고 받았음. 강호에 오랫동안 살다가 늦게 三淸 白蓮峯 아래에 집을 사서 ‘白厓’라 이름 지음. 저서는 시고 한 권이 있음. 호는 凝齋.

증조부 朴東說 관찰사. 조부 朴濠 첨지중추부사. 부 朴世標 南平현감. 모 咸平李氏.

初娶 全州李氏, 參奉讓錫의 딸

再娶 寧越辛氏, 縣令泰東의 딸

참고문헌: 고전번역원 凝齋朴君墓表, (朴弼周의 黎湖先生文集)

  • 金守宗(1671~1736)[1]


김수종은 자는 주경(胄卿), 호는 취선당(醉醒堂)이다. 김명열의 손자이며 우반동 입향조인 김번의 양자로 그의 생부는 김번의 아우인 김문이다. 김수종은 큰아버지 김번이 아들이 없고 김번의 부인인 한양조씨가 아파 아들을 얻을수 없자 다섯 살이던 1675년에 큰아버지인 김번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김수종은 40세인 1710(숙종 36)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시권이 남아있음). 참봉직에 몇 차례 천거되었으나 결국 과거길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이후 김수종은 중앙 관리나 명문세족과 교유하며 가문의 지체를 높이고 자녀들을 좋은 집안의 자제들과 혼인시키려고 노력을 하였다.
당시 이만성(李晩成)·이병상(李秉常)·조관빈(趙觀彬)·조도빈(趙道彬)·박태관(朴泰觀)·박태겸(朴泰謙)등과 교우하면서 이들을 통해 서울 소식을 전해 받았다.

증조부 金弘遠. 조부 金命說 . 양부 通德郞行慶基殿參奉 金璠. 양모 漢陽趙氏. 생부 宣敎郎 金璊. 생모 牛峯李氏. 처 順興安氏, 靑松沈氏


간찰 번역

1697정축년 3월 26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115번)

가을바람이 날마다 드세 짐에 형의 西行이 이미 출발했다고 했었는데, 홀연히 행차를 미룰 뜻이 있음을 들었으니, 이전의 생각이 호쾌하였는데 혹시 다른 일이 있어 그렇습니까? 기대하던 나머지 배나 아쉽고 놀랬습니다. 요즘 조금 추운 가운데 형의 지내시는 생활이 여러 면에서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가을에 병과 우환을 얻어 슬픈 중에 하나도 좋은 상황이 없이 슬프게도 意趣가 줄어드니, 절로 슬퍼짐을 어쩌겠습니까? 定之는 각각 쓸데없는 일에 이끌려 근래에 심히 얼굴보기 힘들다가, 지금 홀연히 돌아가길 고하니, 아쉬움을 무슨 말로 하겠습니까? 그 행차로 인해 급하게 편지를 쓰기에 하고 싶은 말들은 많으나, 백에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단지 헤아려 주시기 바라며, 절하고 편지를 올립니다.

계미년 9월 1일, 弟 泰觀이 頓.

病者가 공허함만 빌리고 있어 그리움이 심히 고통스럽습니다. 단지 서로 말날 기약만 기다리는데, 지금 행차하는 날짜가 미루어질 것 같다고 말함을 들었으니, 서운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仲秋에 맞추어 내려가고자 했으나, 쓸데없는 일이 많아 이에 이룰 수 없습니다. 이번 달 10일 사이에 마땅히 奴를 하나 보낼 것이니, 그 때에 편지를 쓰겠습니다. 日萬은 이미 重杖을 맞았다고 합니다.


원문

秋風日高, 謂兄西行己駕矣, 忽聞有退行之意, 前料爽矣, 或有事否. 企待之餘, 倍用悵愕. 伏惟簿寒中, 兄起居凡百冲勝. 弟得秋病憂, 哀哀無一善狀, 悄然少意趣, 自憐奈何. 定之, 各牽冗故, 近甚罕面, 今忽告歸, 悵觖何言. 因其行, 卒諒修書, 所欲言者多, 而百不及一, 只希諒照, 拜上狀.

癸未九月初一 弟 泰觀 頓

病者借空, 思想正苦, 只俟西笑之期. 今聞行程似退云, 不勝觖然, 此欲趂秋下下去, 冗故多端, 玆未果. 今旬間, 當送一奴, 其時作書耳, 自前己施重秋云.

(1703계미년 추정)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태지(121번)

典農에서 보낸 봉물과 서간은 심부름꾼을 즉시 보냈는데, ‘답장은 수일 내에 당연히 보낼 것이다.’라 말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士古가 찾아옴에 다시 보내는 것을 독촉하니, 답할 때는 ‘네네’하면서 갔는데 끝내 또한 답장을 전하지 않으니, 참으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육명의 어머니는 바야흐로 광주에 머무시고, 누이께서는 전농에 계시니, 피차가 모두 평안하십니다. 심씨 어른 집에는 지난 달 27일에 자식의 혼사를 잘 치렀다고 합니다.

龍奴의 조카 有秋가 4~5번을 종종 와서 보았는데, 그가 이미 이판부사댁의 모시는 하인으로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됨을 보면, 앞으로 서리의 역을 충분히 감당할만합니다. 저 또한 그를 권하여 서울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으니, 형께서는 돌아오라고 재촉하지 마십시오. 비록 끝내 배반하여 떠나가는 것으로 걱정하더라도, 형께서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이 무리가 배반할 수 없으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耳掩에 들어가는 비용이 11냥에 준하므로, 이로서 庄奴에게 계산해 주십시오. 돈은 錦平의 魚箭에 대한 세금인데 이롭지 않아 버려두었으므로, 그래서 나가서 이엄을 샀습니다.

福中에다가 집을 짓는 계획은 가히 큰 결정이라 그만두기 어렵다 할 만 합니다. 목재는 반드시 겨울 전에 베어두고 기다리심이 어떠하십니까. 초봄에 즉시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간다면 마땅히 수송할 것입니다. 저번에 겨우 台甫를 한번 만났는데, 부안 수령께서 간혹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형들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탄식스럽습니다. 우환이 조금 나아진 다음에 마땅히 다시 권학사에게 편지로 간청하겠습니다.


원문

典農所送封物書簡, 專人卽送. 答簡數日內當送云, 而終不來. 其後士古來訪, 更督其送, 答則唯唯而去矣, 終亦不送答, 誠不知其故也. 盖聞六命慈闈方留廣州, 其妹氏獨在典農, 彼此俱平安. 沈丈家去卄七, 利過子婚云耳.

龍奴姪子有秋, 四五次頻頻來謁, 聞其已入李判府事家陪下人, 觀其爲人, 前頭足當書吏之役. 弟亦勸使留住京家, 兄須毋促其還下也. 雖以畢境叛去爲慮, 而兄之未盖棺前, 此輩不能叛, 勿慮勿慮.

耳掩所入, 準費十一兩, 以此計給庄奴如何. 錢是錦平魚箭貰物, 而不利而去, 故出而貿耳掩耳. 福中構屋之計, 可謂大決難罷. 材木必須冬前伐置以待如何. 春初卽當南下, 下則卽當輸送耳. 頃者, 僅一面台甫, 扶安守許, 間有不好之端, 不言及兄輩事云, 可歎可歎. 憂患稍間之後, 當更權學士書懇耳.

1715을미년 3월 23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119번)

조카가 전해 준 편지는 신년 소식이었습니다. 대체로 저번에 조용히 계실 때의 안부가 편안하고 건강하시다하니 매우 위로가 되고 기쁩니다.

저는 과거에서 번번이 떨어져서 지금 다시금 유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봄의 강을 가깝게 대면하면서 자고 먹는 것은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

떠도는 것을 들으니 형은 새롭게 나이어린 첩을 두었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참척해서 무료한 나머지 나온 것입니다. 이는 쇠약해 지는 때에 보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마침내 단지 집안을 어지럽게 하는 일이니 진실로 계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을 생각해보면 형 나이 오십에 사세의 가묘를 받들면서 자식을 낳아도 번번이 기르지 못하니 조물주의 뜻을 이미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입후의 일은 하루도 늦출 수 없는데 머뭇거리는 것을 돌이켜보면 이는 이익이 없고 해가 있는 일입니다. 옛 친구가 기대하는 바가 아니니 사람으로 하여금 개탄하게 할 뿐입니다. 저의 조카를 천리 밖에서 상견하였는데 비록 심히 기쁜 소식이라도 낙방하여 슬퍼하면서 돌아가니 또한 저의 마음이 괴롭고 심난한 것을 깨닫습니다.

인편으로 인해 서울로 올라올 뜻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계책이 과연 어긋나지는 않았습니까. 작별하고 온 것이 지금 삼년이라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바라는 바는 오직 형의 말머리가 서쪽을 향하는 것일 뿐입니다. 궁함을 구해주는 곡식은 매번 당하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또 집이 가난하여 부끄러운데 형이 나를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전농으로 보낸 것은 즉시 찾아서 보냈습니다. 많고 적은 것을 다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잘 살펴주십시오. 절하고 편지를 보냅니다.

을미(1715년) 3월 23일 아우 태관 拜

상의 환후는 근래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지만 대체로 차도를 보이는 지경에 들어갔으니 신하된 자의 다행함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약원이 만약 물러가면 마땅히 특별히 실시하는 과거가 있다고 합니다.

먹 한개를 올려 보냅니다. 대하는 쓸 곳이 있으니 그것을 얻는 것이 만약 크게 어렵지 않으면 모름지기 넉넉하게 뒤에 오는 편에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姪輩所傳惠書, 卽新年消息. 槩審向來靜履安健, 區區殊用慰喜.弟科事輒敗, 今而不復恨有司矣. 近對春江, 眠飯粗遣, 餘外不須論也.流聞兄新畜少妾, 想亦出於慘慽無聊 之餘, 而此非衰年保養之道. 畢竟徒亂人家事, 誠非得計也. 且又念之, 兄五十之年, 奉四世家廟, 而生子輒不育, 造物者之意已可知. 立後事, 不可一日少緩, 而顧反遲回, 乃爲此無益有害之事. 殊非故舊之所期望, 令人慨歎不已. 家姪千里相見. 雖甚喜報 而落榜悵然而歸, 亦覺弟心之惱擾矣. 聞有因便西上之意, 此計果不差池否. 別來今三年, 不堪思慮之懷. 所企者, 惟兄馬首之西耳. 救窮之栗, 每當盛惠, 且愧家貧, 致煩兄費念不少也. 典農所送, 卽爲推傳之矣. 多少不究, 伏惟下照, 拜謝.

乙未三月卄三日 弟 泰觀 拜

上候近亦進退, 而大槩已差境, 臣人之幸曷極. 藥院若退歸, 則當有庭試之科云矣. 一墨送呈. 大蝦有用處, 得之如不大難, 幸須優惠後來便如何.

1715을미년 7월 18일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편지(122번)

보낸 인편이 있는데 오는 소식은 없고 절기의 차례는 빨라서 이미 가을입니다. 매번 형을 생각하지만 보지 못하며 다만 걱정과 답답함만 쌓일 뿐입니다.

갑자기 柳浦에서 사람이 와서 멀리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그동안 온 가족이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으로 족히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듣기로는 형이 낙상하여 앓은 일이 있다고 하니 걱정됩니다.

이번 여름 심한 더위로 소와 말이 목말라 죽는 일이 있는 것은 古老가 수 십년동안 없었던 바라고 하니 남쪽은 반드시 북쪽보다 곱절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형께서 어찌 편하게 지내시겠습니까? 다만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혹시 큰 비가 많이 내려 더위가 심하지 않은 것 입니까?

산촌이 적막하여 하나도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없고 매번 형님의 신세가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생각하니 어찌 일찍이 슬퍼 탄식하지 않은 적이 있겠습니까?

첩을 두는 일은 집이 부유하고 영화를 누린 사람들이 관례처럼 하는 것인데, 진실로 세속의 정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집안일을 해치지 않는 사람 또한 적습니다. 본디 형이 이 뜻이 있음을 알고 불가하다는 뜻을 많이 말한 것이 또한 두세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보내온 편지에 ‘만약 형과 같은 친애함이 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냐’는 등의 말이 있는데, 어찌 이렇게 성실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수년간 떨어져 있어 평소에 거듭 경계한 말을 전부 잊은 것이면, 제가 형에게 있어서 결코 친애하는 벗이 아닌 것이니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 이루어진 일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첩을)얻은 후에는 처치하는 방법을 얻어야 바야흐로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지금 마음을 움직여 경계함을 가진 후에 크게 후회함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자가 굳센 마음이 있어도 나이가 들어 뜻이 쇠약해지면 부인에게 흔들려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거의 드뭅니다. 이것이 매우 걱정되니 저의 뜻에는 어떤 다른 뜻은 없습니다.

마침 가죽 베개를 얻어 여름에 그 서늘함을 취하니, 그것을 항상 사용합니다. 양쪽 모두 귀가 먹어서 큰 소리여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한 몸에 눈과 귀가 밝은 것은 매우 귀중한 것인데, 제가 지금 이와 같으니 민망하고 민망합니다. 세속의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말은 모두 들으려하지도 않지만, 이러한 것은 들리지 않으니 또한 좋습니다.

盤松의 찰방 숙부가 오랫동안 굶주린 나머지 갑자기 설사를 하여 그저께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돌아가셨습니다.) 일생이 곤궁하다가 끝내 아사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비통하고 비통하니 어찌 그 말로 다하겠습니까. 부안의 친구가 이 소식을 들으면 또한 반드시 슬퍼할 것입니다. 아직 쓸 말은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굽어 살펴주십시오.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을미(1715년) 7월 18일 아우 태관 拜


원문

有去便而無來訊, 節序駸駸, 已流火矣. 每思之而不可見, 則徒積煩菀而已. 忽於柳浦人來, 獲奉遠書之辱, 槪審向來合眷平安, 此足可慰, 而第聞兄有下堂之憂, 馳念馳念. 今夏盛熱, 牛馬至有渴死者, 古老以爲數十年來所無, 可想炎方必倍北地, 兄何能聊遣, 但無見及語, 或是潦雨多下, 熱不甚作耶? 山村寂寥, 無一可慰心者, 每念兄身世凄苦, 何嘗不悲歎也. 蓄妾之事, 家富身榮者例爲之, 固世俗之情也. 然畢竟不敗家事者亦少, 素知兄有此意, 多陳不可之義, 亦不至再三而止矣. 來書有若有如兄親愛豈有此事等語, 何其不誠實耶? 不然, 數年睽離, 全忘平昔申戒之語, 弟之於兄, 決非親愛之友也. 殊用慨歎. 然遂事不可說也. 旣得之後, 處之得其道, 方可無後患, 幸及今動心存戒後, 無至大悔可也. 男子剛腸, 年老志衰, 則不爲婦人所搖奪者甚鮮, 此殊可慮, 弟意中無甚他故. 而適得皮枕, 署月取其凉, 而常用之. 兩耳俱聾, 大聲方可聽, 人之一身上聰明甚貴, 而弟今如此, 可悶可悶. 然俗間細瑣語, 都不欲掛耳, 此則不聞亦好矣. 盤松察訪叔, 久飢之餘, 暴得泄瀉, 再昨不起疾, 一生窮困, 終未免餓死, 慘痛慘痛, 何可盡言, 扶安親舊聞之, 亦必悲之矣. 多少不宣, 伏惟下照, 謹謝狀上.

乙未七月十八日 弟 泰觀 拜


편지 목록

순번 문서번호 서기년 간지 편지 발신자 박태관나이 김수종나이 내용요약
1 158 1697 정축년 3월 26일 弟 泰觀 頓首 20 27 안부를 전하면서 가을이라 한번 찾아오라 함. 답장.
2 164 1700 경진년 10월 2일 朴泰觀 23 30 만남 후에 보낸 편지로 僮僕이 돌아감에 부침, 부탁한 시를 지어 보냄.
3 136 1701 신사년 上元日 아침 弟 泰觀 24 31 안부 편지, 監試 初試가 8월로 결정되니 그 때 올라오는지 물음.
4 149 1701 신사년 2월 6일 弟 泰觀 24 31 선친의 忌日을 지냈음, 며느리가 유산됨, 읍리 편에 편지를 부침. 추신-『遺響』을 보내 달라.
5 131 1701 신사년 5월 7일 服弟 泰觀 24 31 과거를 보려는 것이 잘못됨을 들음, 춘궁을 구제해 준 두 가마니는 너무 과해 송구하다. 답장. /추신-盤松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을 요구. 『遺響』은 잘 받음.
6 129 1703 계미년 6월 19일 弟 泰觀 25 33 뜻을 확고히 하여 마음을 다잡아라, 子受 집에서 인편이 감에 작성함. /추신-庄奴는 엄하게 다스려 달라.
7 128 1703 계미년 7월 19일 弟 泰觀 25 33 小紙에 적힌 盤松의 家舍는 형이 定之와 각자 가지는 문제는 둘이 잘 합의해라, 전복과 종이를 보내주어 감사함, 錦平에 노인이 죽었다고 통보. 답장.
8 115 1703 계미년 9월 1일 弟 泰觀 25 33 定之가 돌아감에 안부를 전함.
9 120 1703 계미년 9월 18일 弟 泰觀 25 33 定之가 돌아감에 쓴 안부편지. /추신-定之가 잘 돌아갔는지 물음.
10 133 1703 계미년 12월 5일 服弟 泰觀 25 33 奴가 돌아감에 쓴 안부 편지. /추신-생선을 보내주어 감사.
11 117 1704 갑신년 11월 30일 朞服情弟 泰觀 26 34 박태관이 부안에서 서울로 온 후 잘 왔다고 보낸 편지. 공부하라는 조언, 시를 지어 보냄, 서울 소식을 전함, 新曆 4부 大墨 1홀을 보냄, 저고리가 바뀌었다고 함.

/추신-2종의 생선과 耳掩을 보냄.

12 139 1705 을유년 9월 28일 服弟 泰觀 26 35 과거시험에 못 보게 되어 아쉬움, 농사가 흉년이라 놀랍다, 湖伯형에 처소에서 돌아가는 편에 쓴 안부편지. /추신-船卜을 급하게 기다리니 廳奴에게 빨리 보내게 하라.
13 148 1706 병술년 1월 17일 服人世弟 泰觀 27 36 定之가 죽어 슬픔, 정지는 문필을 버리고 무과에 급제 편모와 어린 자식이 있음, 喪車는 兩湖의 方伯에 부탁했음, 부의를 제대로 못해 송구함, 海墨을 보냄.

/별고-冑卿이 公山에서 만나자는 것은 기제 때문에 할 수 없음, 遮陽竹을 보내 달라.

14 150 1706 병술년 5월 7일 服弟 泰觀 27 36 定之가 죽은 후로 김수종과 연락이 그침, 김수종이 아들을 낳는 것에 축하함, 竹園에 모르는 시체를 파 갔다고 하여 축하함, 두 섬의 벼와 여섯 묶음의 생선 30개의 靑竹에 감사함, 배를 팔게 하고 곡식을 받을 것임, 定之의 가족 소식을 물음.
15 175 1707 정해년 5월 30일 弟 泰觀 28 37 홍역이 경향에 만연한데 안부를 물음, 아들딸 중 무엇을 낳았는지 물음, 과거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웬만하면 올라와라, 조카의 婚處가 古阜人을 택하는데 적합처를 알려 달라,

寒泉의 金友 일은 禮判이 거부하여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16 134 1708 무자년 8월 2일 眷弟 泰觀 29 38 전염병이 없어졌는지 공부는 잘하는지 물음, 婚處에 대해서는 沈友에게 들었는데 집안이 좋다고 함, 비가 많이 내려 걱정됨, 京畿의 밭에는 수확물이 없어 부안만 믿음,

廳奴를 타일러 빨리 곡식을 보내 달라, 白紙는 품질이 안 좋음, 전복은 감사함, 조카의 혼례는 10월로 미룸, 筆墨을 보냄.

17 172 1708 무자년 8월 3일 服弟 泰觀 29 38 200냥을 보내주어 감사, 方伯과는 추후에 인사를 하겠다. /추신-金鏡의 친우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
18 145 1709 기축년 1월 3일 밤 服弟 泰觀 30 39 부안에서 돌아온 후 안부편지, 김수종의 상사에 대해 위로, 자신은 조카가 요절함, 蘆橋에 대한 原情을 보내니 올려 달라.
19 162 1709 기축년 1월 28일 服弟 泰觀 30 39 만난 지가 10개월이 됨, 김수종 계씨의 죽음을 위로함, 박태관은 요절한 조카를 묻을 것임, 蘆橋에 대한 송사가 정지되면 남쪽에 못 내려감,

領相이 沈浚과 崔壽慶을 붙여주기 위해 복과를 시행할 것이니 올라와라. /추신-東湘의 노형과 李忠義 부자와 石橋의 郎君 안부를 물음.

20 151 1709 기축년 踏靑日(3월 3일) 服制 泰觀 30 39 김수종 계씨의 장례에 부안군수가 도와줬는지 물음, 蘆橋 일은 내려가지 않음, 조카아이는 내려감, 網巾은 감사함.

/추신-領相이 『禮記類編』을 찬술함, 이로서 성균관 유생과 갈등함, 노론과 소론들이 혈전을 벌임.

21 174 1709 기축년 9월 26일 服弟 泰觀 30 39 김수종이 간 후 10개월 지남, 박태관은 두 장례식의 返虞를 마침, 조카는 멀리 떠나 감, 完山의 백일장은 잘 볼 수 있는지 물음, 人馬는 가까운 고을에서 빌리기로 함.
22 168 1709 기축년 11월 5일 服弟 泰觀 30 39 조카가 모두 남쪽에 내려감, 인마를 빌려주어 감사함, 굶주림에 곡식을 도와 달라. /추신-李鉽의 鞫廳을 설치하고 사형시킴, 영상 李濡가 쫓겨나고 崔相이 다시 배수 받음, 전복과 생선은 감사함, 먹을 보냄.
23 169 1710 경인년 1월 5일 服弟 泰觀 31 40 편지를 한지 60일이 됨, 남쪽에 간 조카의 소식을 못 들음, 임금의 병이 심하다가 회복함, 봄에 慶科를 설치한다 함, 조카를 잘 봐 달라,

族姪 朴弼揆가 完山 判官이 되어 가는데 만나 봐라, 상사에 의한 병으로 봄에 도성으로 이사하려 함, 靑竹 3~40통을 보내 달라, 三曆을 보냄.

24 126 1710 경인년 12월 16일 弟 泰觀 31 40 김수종 딸의 혼처를 물음, 李兄의 旬撫하는 행차가 바뀐 것을 전함, 달력을 보냄. /추신-黃口筆 2개를 보냄.
25 116 1711 신묘년 4월 17일 服弟 泰觀 32 41 營中에 있는 李柏年에게 편지를 보내라 함. 답장.
26 154 1711 신묘년 12월 17일 弟 泰觀 32 41 박태관은 賢兒와 모든 아이들이 마마 걸림, 6일에 젖먹이 애가 죽음, 일찍 고아가 된 후 부인과 형을 잃었다고 함, 김수종이 아들 얻은 것을 축하함, 坤殿에 창질이 회복됨,

大庭試를 2월 30일 설행한다 함, 과거공부를 하라, 柳婚이 틀어짐. /추신-새 수령이 재목을 베어 배를 만든 것을 단속한다는 데 잘 처리해 달라, 台甫가 扶安수령과 다투어 안 내려감, 청나라 황제가 歲幣를 없앰, 新曆은 금처럼 귀하여 3부만 보냄.

27 170 1712 임진년 8월 26일 弟 泰觀 頓 33 42 박태관은 동쪽 여행 후 학질에 걸림, 남행은 다음 달 10일 갈 것임, 根壽의 죽음이 안타까움, 科獄의 곡절이 심하여 鞫獄이 일어남.
28 152 1713 계사년 4월 11일 弟 泰觀 34 43 박태관이 반년 동안 있다가 서울로 잘 올라왔다고 전함, 진송해 준 것이 감사, 關伯형의 龍山 江亭에서 1~2년 보낼 것임, 金昌翕에게 그 풍경을 들음,

김수종에게 이곳에 집을 지어 달라 함, 붓 2개 먹 하나를 보냄. /추신-東湘에 안부를 전해 달라.

29 167 1713 계사년 11월 7일 弟 泰觀 頓 34 43 東村의 伯兄이 1일에 죽음, 부안에 있는 박태관의 막내 조카가 죽었다고 전해서 놀람, 柳庄은 풍토가 좋지 않아 조심하고 산 사람을 돌봐 달라, 임금의 감기가 차도를 보임,

御史로 尹鳳朝·呂光周·李秉常이 나감, 鵞峴의 季兄이 廣州府尹으로 부임할 것임. /추신-新曆 2건을 보냄.

30 147 1714 갑오년 1월 26일 服弟 泰觀 35 44 希甫가 죽었다하여 놀람, 김수종의 동생인 根壽가 작년에 希甫가 이번에 죽음이 한탄스러움, 庶弟 하나만 남음, 박태관은 부인과 형과 아이를 잃고 작년에 조카가 요절함,

17일 東村형을 장사지냄, 돈을 보내주어 감사함. /추신-임금의 건강이 회복함, 主材와 먹 하나를 보냄.

31 161 1714 갑오년 2월 28일 服弟 泰觀 35 44 김수종에게 동생을 잃은 후 안부를 물음, 大庭試를 치룰 것이니 공부하라, 李慶叔이 부인을 묻기도 전에 새 부인을 얻은 것을 만류시켜라. /추신-붓 1자루 보냄.
32 146 1714 갑오년 4월 1일 服弟 泰觀 35 44 龍湖의 하류로 이사가려 함, 식량을 보내주어 감사함, 곡식을 보내 달라, 李慶叔의 자식이 죽음은 슬픔. /추신-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청나라 사정을 전함, 三日製에 李匡輔가 장원함.
33 119 1715 을미년 3월 23일 弟 泰觀 36 45 과거에 낙방, 김수종이 소첩을 데린 것에 대한 훈계, 김수종 조카도 낙방하고 돌아감. 답장. /추신-국왕이 나으면 庭試가 있을 것임, 먹을 보냄, 大蝦를 보내 달라 요구.
34 130 1715 을미년 5월 10일 弟 泰觀 36 45 보리를 몇 가마 보내 달라. /추신-임금이 병환이 심해짐, 도정은 8월에 할 것임.
35 122 1715 을미년 7월 18일 弟 泰觀 36 45 더위가 심함, 첩을 두는 것에 훈계, 숙부 盤松察訪이 돌아가심. 답장.
36 138 1715 을미년 8월 24일 服弟 泰觀 36 45 아들을 낳음, 察訪 숙부가 굶어 죽음은 친구들이 슬퍼할 것임, 관 값을 박태관 자신에게 보내 달라, 吏判은 趙泰采가 되고 申銋은 체직됨. /추신-東湘의 안부를 물음.
37 157 1716 병신년 정월 아침 弟 泰觀 37 46 새해 안부편지, 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講經 別試는 2월 20일 후로 정해짐, 察訪 숙부의 賻儀金을 모을 수 있는지 물음, 관 가격을 독촉 받음, 凶書 만든 사람이 잡혀 사형 당함,

鵞峴 李兄이 藥院에 들어감, 새로 얻어 아이의 건강을 물음, 抱龍丸 安神丸 淸心丸을 보내 달라, 월력 3건과 먹 하나를 보냄. /추신-大蝦는 좋은 것으로 보내 달라.

38 118 1716 병신년 단오일 弟 泰觀 37 46 새로 얻어 아이의 마마를 걱정해 줌, 곡식을 보내주어 감사함, 집을 짓는데 돈을 보태 달라, 여러 사람들의 안부를 물음. /추신-大蝦를 보내 달라, 아이 약과 붓 하나를 보냄. 답장.
39 140 1716 병신년 11월 23일 저녁 弟 泰觀 37 46 山訟으로 바쁠 것이라 염려 됨, 박태관은 아이가 요절함, 굶주리고 있으니 곡식을 보내 달라, 湖儒가 孝廟를 추숭하는 일로 上䟽함, 太守의 행차 편에 편지를 보냄.

/추신-大小 달력 2개를 보냄.

40 141 1717 정유년 5월 14일 弟 泰觀 38 47 서울에 돌림병이 심함, 金春澤과 鄭錫敷 이 때문에 죽음, 임금의 건강이 걱정됨, 받은 網巾은 너무 사치스러움, 부채 1개 먹 2개 붓 3개를 보냄. /추신-참빗 2개를 보내 달라.
41 166 1717 정유년 7월 5일 服弟 泰觀 38 47 김수종의 庶弟가 죽은 것을 위로, 時病이 일어남에 괜찮은지 물음, 박태관은 三淸에 집을 옮김, 종이를 구하는 것에 부안 것이 오히려 비쌈, 종이 값을 그냥 보내 달라.
42 121○ 미상(계미년 9) 典農에서 보낸 물건과 편지의 행방을 물음, 龍奴 조카인 有秋에 대해 걱정 말라, 耳掩의 가격을 보내라, 집 짓는 목재는 준비해 두라.
43 123 미상(을미년 7) 김수종이 목이 쉬는 병에 걸림을 위로, 딸아이 얻음을 축하함, 자식이 번성하지 못함을 위로함, 박태관의 서제와 조카가 부안으로 이사 감에 인마를 빌려 달라. 답장.
44 124 신○년 11월 1일 弟 泰觀 큰 아이가 마마를 앓음, 귀마개는 품질이 좋은 것임, 서울 소식을 전함.
45 127○ (경인년 12) 眷弟 상대가 행차하는 관계로 어제 이별한 후에 보낸 편지, 행차 길에 瘡疾이 퍼져 걱정됨, 臘藥을 보냄.
46 132 병○년 6월 27일 眷弟 泰觀 竹林에 시체를 파 갔다고 들음, 박태관의 庶弟의 병이 위독함, 김수종이 새로 얻은 아이의 병을 걱정함, 독서를 하라, 庶母집에 곡식을 金無毒에게 빼앗겼는데 이를 해결해 달라,

扶安郡守가 李塾의 甥姪인데 만나봐라.

47 135 갑○년 10월 9일 弟 泰觀 산속 암자에서 논어를 읽다가 돌아 옴, 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전에 보내준 음식에 감사함, 달력 2건 붓 1자루 보냄, 신년 안부편지.
48 137 무○년 1월 23일 朞服弟 泰觀 次雲이 온 후로 소식을 못 받음, 初喪부터 신세가 처량함, 楊州의 선산 가까이 혈처를 얻어 地師에게 날짜를 요구함, 世子의 謁聖이 2월 21일 정해짐,

判書 閔鎭厚를 수장에 규정한다는 윤허를 받음, 시험보러 올라 와라. /추신-아이 약을 보냄.

49 142 병○년 9월 4일 眷弟 泰觀 김수종의 자식이 요절한 것을 위로함, 박태관 자신의 친조카와 庶弟를 못 도와줘 안타까움, 呂必重 姜履相 등이 유배 감, 신사년 옥사에 대신들이 파직됨,

釋之의 상사에 슬픔, 扶庄에 곡식이 잘 되도록 도와 달라.

50 143○ (병?년 9) 眷弟 비가 걱정됨, 戶牌 나무는 시장에서 구입하라, 壯紙 등 종이를 보냄, 錦平과 燕行과 西郊에 종이를 보내는데 말을 빌려 달라. /추신-호패 작성법을 적음.
51 144 을○년 30일 밤 服弟 泰觀 김수종의 어린 딸을 묻는 참혹함을 위로, 湖儒의 上䟽로 인해 春宮과 廷臣들이 몰려가서 간청함, 增廣試를 설행한다고 함, 서울로 와서 계속 떨어지는 치욕을 떨쳐라.

/추신-東湘과 茁來의 안부를 묻고, 釋之의 안부를 물음.

52 153 무○년 윤월 21일 弟 泰觀 남쪽의 瘡疾이 아직 있어 걱정됨, 李自白의 일은 호남방백을 만났는지 물음, 김생원댁 堂額을 빨리 지어 보내라.
53 155 병○년 12월 20일 服制 泰觀 緬禮를 잘 치렀다 하여 하례함, 박태관은 부인이 출산 후 병으로 고생함, 舍姪이 고생한 것이 어른 입장에서 안타까움, 곡식이 빨리 오도록 도와 달라,

遮陽竹은 좋으니 더 보내 달라, 林浣이 장을 맞아 죽음. /추신-新曆 3부를 보냄, 別試는 중춘에 하니 올라 와라.

54 156 1698 무○년 11월 17일 弟朞服人 泰觀 잘 돌아갔는지 물음, 박태관은 첫 期日이 다가와 슬픔, 金友가 初試에 합격함. /추신-生薑을 보내 달라.
55 159○ 26일 저녁(정축년 3) 眷弟 柳庄에 잘 도착함을 들음, 박태관은 부친의 忌日을 지내고 잠시 머무름, 같이 데리고 온 人馬가 많으니 양식을 보내 달라, 臘劑와 붓과 먹을 보냄, 典農 沈生의 창질이 나아 기쁨.

/추신-東湘에 안부를 전해 달라.

56 160○ 1707 小紙(정해년 1) 判義禁府事 李頤命이 급하게 홀로 請對하려는 것을 배척당함, 이로서 파직 당함.
57 163 병○년 10월 10일 밤 眷弟 泰觀 緬禮가 정해짐을 들음, 부탁한 내용은 민생과 의논하면 민대감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음,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을 느슨하게 함을 질책, 보내준 벼와 생선에 감사함,

無毒의 일족 소재를 파악해 달라, 緬禮를 잘 치러라.

58 165 경○년 10월 1일 弟 泰觀 파도로 行裝을 바다에 빠뜨린 것을 위로함, 과거시험을 못 봄, 저번 달에 아들을 얻음, 畿田이 흉년이라 扶庄의 곡식만 믿음, 해적이 창궐하니 조심하라, 婚事는 직접 찾아봐라.
59 171 12월 15일 服弟 泰觀 三淸의 具兄이 돌아와 편지를 받음, 奴를 湖中으로 보내 공물을 가져오다가 강도를 만나 빼앗기고 노도 죽음,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내년 가을에 別試를 시행함.
60 173 편지 받은 아침 損弟 泰觀 낮에 출발할 것이므로 자신에게 찾아와라.
61 176 정○년 7월 11일 저녁 眷弟 泰觀 次雲이 편지를 전해 줌, 종이 구입은 좋은 종이를 구입하는 것 보다 그냥 돈을 준다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김수종의 庶兄 상사를 당함에 위장을 제때 못 보내 송구함.

/추신-李忠義 노인의 안부를 물음.


김수종이 박태겸,박태관과 주고받은 물품 목록[2]

순번 문서번호 서기년 보낸물품 받은물품
1 112 1699 대복(大鰒), 괴판(槐板), 담배[南草] 달력[曆]
2 131 1701 벼[粟] 붓[筆]
3 128 1703 복(鰒), 종이[紙]
4 133 1703 물고기(魚)
5 117 1704 달력[曆], 먹[墨]
6 110 1705 괴판(槐板) 붓[筆]
7 148 1706 차양죽(遮陽竹) 해묵(海墨), 주재(主材)
8 150 1706 나락[租], 물고기[鱗], 푸른대[靑竹] 먹[墨]
9 108 1706 달력[曆]
10 155 1706 차양죽(遮陽竹) 달력[曆]
11 172 1708 돈[靑銅]
12 134 1708 붓[筆], 먹[墨]
13 151 1709 망건(網巾)
14 169 1710 푸른대[靑竹] 달력[曆]
15 126 1710 달력[曆], 붓[筆]
16 154 1711 달력[曆]
17 170 1712 물고기[魚], 돈[錢]
18 152 1713 붓[筆], 먹[墨]
19 167 1713 달력[曆]
20 147 1714 돈[錢]
21 161 1714 붓[筆]
22 146 1714 벼[粟]
23 119 1715 벼[粟], 대하(大蝦) 먹[墨]
24 138 1715 돈[錢]
25 157 1716 돈[錢], 대하(大蝦) 달력[曆], 먹[墨]
26 118 1716 벼[粟], 돈[錢], 대하(大蝦) 아이 약[兒藥],붓[筆]
27 163 1716 나락[租], 물고기[魚]
28 140 1716 벼[粟] 달력[曆]
29 141 1717 망건(網巾), 천초(川椒), 참빗[眞梳] 부채[扁],먹[墨],붓[筆]
30 137 1718 아이 약[兒藥]
31 156 1718 생강(生薑)
32 141 1721 보리[牟麥], 괴판(槐板)
33 111 1733 달력[曆]
34 127 미상 납제(臘劑)
35 135 미상 벼[粟] 달력[曆], 붓[筆]
36 143 미상 종이[紙]
37 159 미상 쌀[米],콩[太],말죽[馬粥]


부안김씨 간찰 관련 지리 정보


참고 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안 부령김씨 대종회
한국고전종합DB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자료센터

  1. 출처: 전경목,『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신아출판사,2001.
  2. 출처: 전경목,『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신아출판사,2001,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