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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물 정보 | + | #넘겨주기 {{:홍련봉 2보루 ‘庚子’명 토기편}} |
− | |대표명칭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ref>아래 사진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60526/78323616/1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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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 =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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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견지 = [[홍련봉 1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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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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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연화문와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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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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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은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고구려 연화문 와당으로, [[홍련봉 1보루]] 기와 건물지에 사용된 기와로 확인되었다.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련봉 1보루]]에서 연화문 와당을 사용하는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는 점은 [[아차산]]에 행정관청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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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시설과 중요 유물들이 확인된 [[아차산 3보루]]나 [[아차산 4보루]]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3보루]]나 [[아차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투구나 명문접시 등과 같은 주요 유물이 출토된 [[아차산 4보루]]에서는 [[아차산 보루군]]을 관장하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담당했고, [[홍련봉 1보루]]는 해발 125m에 위치하여, [[아차산]]에서 가장 낮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대민(對民)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차산 보루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행정관청을 [[홍련봉 1보루]]에 축조함으로써 한강 유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차산]]의 첫 번째 봉우리에 축조된 기와 건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대민 기능의 효율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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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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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glemap width="510" height="300" lat="37.553800" lon="127.102300" type="hybrid" zoom="15"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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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553226, 127.101614, [[홍련봉 보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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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554614, 127.102911, [[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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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gle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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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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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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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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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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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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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아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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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홍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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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홍련봉 1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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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조사되었다||[[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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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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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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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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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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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시은,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구조 및 성격』고문화, (79), 2012년,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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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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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선]]: 처음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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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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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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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문화유산 디지털 콘텐츠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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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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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발굴조사된 유적의 구조나 농기구와 간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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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간 등의 시설물의 존재,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비교적 오랫동안 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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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려군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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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자庚子’명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새로운 절대연대가 확보되었으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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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산보루에 대한 연대관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따르면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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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은 475년 직후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500년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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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시점까지 사용되었으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500년을 전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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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점부터 551년까지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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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것으로 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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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년庚子年을 의미하며 서기 520년에 해당된다. 아차산보루의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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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교박물관(왼쪽부터 3장), 최종택(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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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가 점차 세력을 회복하는 6세기가 되면, 금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은 석축 성벽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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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지 못하고 폐기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선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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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차산 보루군이 목책에서 석축단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6세기대 백제 유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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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까지 서울 인근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한강 유역은 여전히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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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보다는 이북에 대규모 보루군을 축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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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 가능성이 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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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의 고구려 토기 편년에 따르면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대부분 6세기대에 해당하는 유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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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확인되고 있는데, 근래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비정되는‘庚子’가 새겨진 접시가 발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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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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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자(庚子)」명문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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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발굴조사된 유적의 구조나 농기구와 간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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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간 등의 시설물의 존재,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비교적 오랫동안 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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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려군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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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자庚子’명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새로운 절대연대가 확보되었으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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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산보루에 대한 연대관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따르면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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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은 475년 직후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500년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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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시점까지 사용되었으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500년을 전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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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점부터 551년까지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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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년庚子年을 의미하며 서기 520년에 해당된다. 아차산보루의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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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교박물관(왼쪽부터 3장), 최종택(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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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가 점차 세력을 회복하는 6세기가 되면, 금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은 석축 성벽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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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지 못하고 폐기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선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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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차산 보루군이 목책에서 석축단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6세기대 백제 유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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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까지 서울 인근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한강 유역은 여전히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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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보다는 이북에 대규모 보루군을 축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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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 가능성이 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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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의 고구려 토기 편년에 따르면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대부분 6세기대에 해당하는 유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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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확인되고 있는데, 근래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비정되는‘庚子’가 새겨진 접시가 발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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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자(庚子)」명문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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