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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가 시조인 덕수이씨(德水李氏) 가문에 태어났다. 이순신은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 환경에 기죽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전쟁 놀이를 즐겨하며 활동적인 성격을 자랑했다. 1565년 8월,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을 하였고, 장인인 방진은 이순신에게 무관직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는 22세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여 10년간 준비를 한 끝에 32세란 다소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 + |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가 시조인 덕수이씨(德水李氏) 가문에 태어났다.<ref>[https://www.gyeongnam.go.kr/yisunshin/index.gyeong?menuCd=DOM_000009304001002001],충무공 이순신'집안배경'</ref> 이순신은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 환경에 기죽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전쟁 놀이를 즐겨하며 활동적인 성격을 자랑했다. 1565년 8월,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을 하였고, 장인인 방진은 이순신에게 무관직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는 22세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여 10년간 준비를 한 끝에 32세란 다소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
====3)관직생활==== | ====3)관직생활==== |
2025년 3월 28일 (금) 21:29 판
명량 | |
작품명(국문) | 명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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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영문) | The Admiral: Roaring Currents |
국가 | 대한민국 |
감독 | 김한민 |
각본 | 전철홍,김한민 |
개봉일 | 2014년 7월 30일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장르 | 액션,드라마,사극,전쟁,스릴러 |
러닝타임 | 128분 (2시간 8분 20초) |
관객수 | 17,616,141명(2025.03.25 기준) |
목차
[숨기기]시놉시스
1597년 임진왜란 6년, 오랜 전쟁으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 무서운 속도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누명을 쓰고 파면 당했던 이순신 장군(최민식)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 뿐.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마저 불타고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류승룡)가 왜군 수장으로 나서자 조선은 더욱 술렁인다.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가 속속 집결하고 압도적인 수의 열세에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 바다를 향해 나서는데…! 12척의 조선 vs 330척의 왜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1]
예고편
명대사
![]() |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 ![]() |
- 이순신 |
![]() |
전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 |
- 이순신 |
수상 이력
2014 대종상
- 최우수 작품상
- 남우 주연상 (최민식)
- 기획상 (김한민)
- 기술상 (윤대원)
2014 영평상
- 남우주연상 (최민식)
2014 청룡영화상
- 감독상 (김한민)
- 한국영화최다관객상
2015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대상 (최민식)
출연진
- 주연
- 최민식-이순신 역
- 류승룡-구루지마 역
- 조진웅-와키자카 역
- 조연
- 진구-임준영 역
- 이정현-정씨 여인 역
- 김명곤-도도 역
- 권율-이회 역
- 노민우-하루 역
촬영지 정보
- 광양항
배 무게 지탱할 수 있고, 바다와도 맞닿아 있어 촬영 장소로 택하였고, 영화 분량의 70%를 광양항에서 촬영하였다.[2]
- 전라남도 진도군
- 전라남도 해남군
역사적 배경
1.이순신에 대하여
1)가족 관계
- 아버지-이정
하급 무관인 교위(校尉)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명예직 혹은 임시직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평민으로 살아갔다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순신이 함경도 건원보(乾源堡)의 군관으로 있던 1583년 11월,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어머니-변씨(卞氏)
초계(草溪) 변(卞)씨 수림(守琳)의 딸. 1597년 4월 11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옥에서 나와 권율의 휘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찾아가는 배 위에서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형제-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
항렬자인 ‘신(臣)’자를 돌림자로 하였다.
- 자녀
- 적자(嫡子)-이회,이열,이면
- 서자(庶子)-히훈(薰),이신(藎)
- 서녀(庶女) 2명
2)유년시절과 무과급제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가 시조인 덕수이씨(德水李氏) 가문에 태어났다.[3] 이순신은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 환경에 기죽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전쟁 놀이를 즐겨하며 활동적인 성격을 자랑했다. 1565년 8월,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을 하였고, 장인인 방진은 이순신에게 무관직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는 22세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여 10년간 준비를 한 끝에 32세란 다소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3)관직생활
- 동구비보 권관
- 훈련원봉사
- 충청병사 군관
- 발포 수군만호(파직)
- 훈련원 봉사(복귀)
- 건원보 권관
- 조산보만호와 녹둔도둔전관
- 정읍현감
- 전라좌수사
- 삼도수군통제사
2.명량해전
1597년(선조 30) 9월 16일 명량 해협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압도적 다수의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