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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9-19)
(宋程頤撰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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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程顥撰 書==
 
==宋程顥撰 書==
『문집』2-1 答橫渠先生定性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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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2-1 答橫渠先生定性書(정성서)===
承敎, 諭以定性未能不動猶累於外物此賢者慮之熟矣. 尙何俟小子之言然嘗思之矣. 敢貢其說於左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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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敎諭以定性未能不動, 猶累於外物. 此賢者慮之熟矣, 尙何俟小子之言? 然嘗思之矣, 敢貢其說於左右.
所謂定者動亦定靜亦定無將迎無內外苟以外物爲外牽已而從之是以已性爲有內外也. 且以性爲隨物於外則當其在外時何者爲在內是有意於絶外誘而不知性之無內外也. 旣以內外爲二本則又烏可遽語定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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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謂定者, 動亦定、靜亦定, 無將迎、無内外. 苟以外物爲外, 牽己而從之, 是以己性爲有内外也. 且以性爲隨物於外, 則當其在外時, 何者爲在内? 是有意於絕外誘, 而不知性之無内外也. 旣以内外爲二本, 則又烏可遽語定哉。
夫天地之常以其心普萬物而無心聖人之常以其情順萬事而無情故君子之學莫若廓然而大公物來而順應易曰: 貞吉悔亡憧憧往來朋從爾思苟規規於外誘之除將見滅於東而生於西也. 非惟曰: 之不足顧其端無窮, 不可得而窮(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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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天地之常, 以其心普萬物而無心; 聖人之常, 以其情順萬事而無情. 故君子之學, 莫若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 易曰: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ref>주역 함괘 九四,貞吉,悔亡,憧憧往來,朋從爾思。</ref> 苟規規於外誘之除, 將見滅於東而生於西也. 非惟日之不足, 顧其端無窮, 不可得而除也.
人之情各有所蔽故不能適道大率患在於自私而用智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一作物>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今以惡外物之心而求照無物之地是反鑑而索照也. 易曰: 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孟氏亦曰: 所惡於智者爲其鑿也. 與其非外而是內不若內外之兩忘也. 兩忘則澄然無事矣. 無事則定定則明明則尙何應物之爲累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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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之情各有所蔽, 故不能適道. 大率患在於自私而用智。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sub>一作物.</sub>; 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 今以惡外物之心, 而求<sub>徐本求作永.</sub>照無物之地, 是反鑑而索照也。易曰: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ref>주역 간괘 艮: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无咎。</ref> 孟氏亦曰: “所惡於智者, 爲其鑿也.”<ref>맹자 이루하 26. 孟子曰:「天下之言性也,則故而已矣。故者以利為本。所惡於智者,為其鑿也。如智者若禹之行水也,則無惡於智矣。禹之行水也,行其所無事也。如智者亦行其所無事,則智亦大矣。天之高也,星辰之遠也,苟求其故,千歲之日至,可坐而致也。」</ref> 與其非外而是内, 不若内外之兩忘也. 兩忘則澄然無事矣; 無事則定; 定則明; 明則尙何應物之爲累哉。
聖人之喜, 以物之當喜聖人之怒以物之當怒是聖人之喜怒不繫於心而繫於物也. 是則聖人豈不應於物哉! 烏得以從外者爲非而更求在內者爲是也. 今以自私用智之喜怒而視聖人喜怒之正爲如何哉! 夫人之情易發而難制者惟怒爲甚第能於怒時遽忘其怒而觀理之是非亦可見外誘之不足惡而於道亦思過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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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人之喜, 以物之當喜; 聖人之怒, 以物之當怒. 是聖人之喜怒, 不繫於心而繫於物也. 是則聖人豈不應於物哉? 烏得以從外者爲非, 而更求在内者爲是也? 今以自私用智之喜怒, 而視聖人喜怒之正, 爲如何哉? 夫人之情, 易發而難制者, 惟怒爲甚. 第能於怒時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亦可見外誘之不足惡, 而於道亦思過半矣.
心之精微口不能宣加之素拙於文辭又吏事匆匆未能精慮當否佇報然擧大要亦當近之矣. 道近求遠古人所非惟聰明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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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之精微, 口不能宣. 加之素拙於文辭, 又吏事匆匆, 未能精慮. 當否佇報. 然舉大要, 亦當近之矣. 道近求遠, 古人所非. 惟聰明裁之.
  
 
==宋程顥撰 記==
 
==宋程顥撰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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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程頤撰 雜著==
 
==宋程頤撰 雜著==
『문집』8-1 顔子所好何學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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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8-1 顔子所好何學論<sub>先生始冠遊太學, 胡安定以是試諸生. 得此論, 大驚異之, 卽請相見. 遂以先生爲學職.</sub>
<先生始冠遊太學胡安定以是試諸生得此論大驚異之卽請相見遂以先生爲學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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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人之門其徒三千獨稱顔子爲好學夫詩書六藝三千子非不習而通也. 然則顔子所獨好者何學也. 學以至聖人之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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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人之門, 其徒三千, 獨稱顔子爲好學. 夫詩、書、六藝, 三千子非不習而通也. 然則顔子所獨好者, 何學也? 學以至聖人之道也.  
聖人可學而至歟? 曰: 然學之道如何曰: 天地儲精得五行之秀者爲人其本也. 眞而靜其未發也. 五性具焉曰: 仁義禮智信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曰: 喜怒哀樂愛惡欲情旣熾而益蕩其性鑿矣. 是故覺者約其情始合於中正其心養其性故曰: 性其情愚者則不知制之縱其情而至於邪僻梏其性而亡之故曰: 情其性凡學之道正其心養其性而已中正而誠則聖矣. 君子之學必先明諸心知所養<一作往>然後力行以求至所謂自明而誠也. 故學必盡其心盡其心則知其性知其性反而誠之聖人也. 故洪範曰: 思曰: 睿睿作聖誠之之道在乎信道篤信道篤則行之果行之果則守之固仁義忠信不離乎心造次必於是顚沛必於是出處語黙必於是久而弗失則居之安動容周旋中禮而邪僻之心無自生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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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人可學而至歟? 曰: 然.
故顔子所事則曰: 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仲尼稱之則曰: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又曰: 不遷怒不貳過有不善未嘗不知知之未嘗復行也. 此其好之篤學之之道也. 視聽言動皆禮矣. 所異於聖人者盖聖人則不思而得不勉而中從容中道顔子則必思而後得必勉而後中故曰: 顔子之與聖人相去一息孟子曰: 充實而有光輝之謂大大而化之之謂聖聖而不可知之謂神顔子之德可謂充實而有光輝矣. 所未至者守之也. 非化之也. 以其好學之心假之以年則不日而化矣. 故仲尼曰: 不幸短命死矣. 盖傷其不得至於聖人也. 所謂化之者入於神而自然不思而得不勉而中之謂也. 孔子曰: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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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之道, 如何? 曰: 天地儲精得五行之秀者, 爲人其本也. 眞而靜, 其未發也, 五性具焉, 曰: 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曰: 喜怒哀樂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是故覺者約其情, 始合於中正, 其心養其性. 故曰: 性其情. 愚者則不知制之, 縱其情而至於邪僻, 梏其性而亡之. 故曰: 情其性.
或曰: 聖人生而知之者也. 今謂可學而至其有稽乎曰: 然孟子曰: 堯舜性之也. 湯武反之也. 性之者生而知之者也. 反之者學而知之者也. 又曰: 孔子則生而知也. 孟子則學而知也. 後人不達以謂聖本生知非學可至而爲學之道遂失不求諸已而求諸外以博聞强記巧文麗辭爲工榮華其言鮮有至於道者. 則今之學, 與顔子所好異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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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學之道, 正其心, 養其性而已. 中正而誠, 則聖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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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之學, 必先明諸心, 知所養<sub>一作往</sub>, 然後力行以求至, 所謂'自明而誠'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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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學必盡其心, 盡其心則知其性; 知其性, 反而誠之, 聖人也. 故<洪範>曰: "思曰睿, 睿作聖." 誠之之道在乎信道篤, 信道篤, 則行之果; 行之果, 則守之固, 仁義忠信不離乎心,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出處語黙必於是. 久而弗失, 則居之安, 動容周旋中禮, 而邪僻之心無自生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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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顔子所事則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仲尼稱之則曰: "得一善, 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又曰: "不遷怒, 不貳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此其好之篤, 學之之道也. 視聽言動皆禮矣, 所異於聖人者, 盖聖人則不思而得, 不勉而中, 從容中道; 顔子則必思而後得, 必勉而後中. 故曰: "顔子之與聖人, 相去一息." 孟子曰: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謂神." 顔子之德, 可謂充實而有光輝矣, 所未至者守之也, 非化之也. 以其好學之心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故仲尼曰: "不幸短命死矣." 盖傷其不得至於聖人也. 所謂化之者, 入於神而自然不思而得, 不勉而中之謂也. 孔子曰: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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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曰: "聖人生而知之者也. 今謂可學而至, 其有稽乎?" 曰: "然. 孟子曰: "堯舜, 性之也; 湯武, 反之也. 性之者, 生而知之者也; 反之者, 學而知之者也." 又曰: "孔子則生而知也. 孟子則學而知也." 後人不達, 以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爲學之道遂失, 不求諸已而求諸外, 以博聞强記巧文麗辭爲工, 榮華其言, 鮮有至於道者, 則今之學與顔子所好異矣.  
  
 
『문집』8-2 養魚記<時年二十二>
 
『문집』8-2 養魚記<時年二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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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8-13 四箴幷序
 
『문집』8-13 四箴幷序
顔淵問克已復禮之目夫子曰: 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四者身之用也. 由乎中而應乎外制於外所以養其中也. 顔淵事斯語所以進於聖人後之學聖人者宜服膺而勿失也. 因箴以自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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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淵問克已復禮之目, 夫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四者, 身之用也. 由乎中而應乎外; 制於外, 所以養其中也. 顔淵事斯語, 所以進於聖人. 後之學聖人者, 宜服膺而勿失也. 因箴以自警.
  
 
『문집』8-14 視箴
 
『문집』8-14 視箴
心兮本虛應物無迹操之有要視爲之<一作之爲>則蔽交於前其中則遷制之於外以安其內克已復禮久而誠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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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一作之爲>則. 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已復禮, 久而誠矣.  
  
 
『문집』8-15 聽箴
 
『문집』8-15 聽箴
人有秉彝本乎天性知誘物化遂亡其正卓彼先覺知止有定閑邪存誠非禮勿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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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有秉彝,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卓彼先覺, 知止有定. 閑邪存誠, 非禮勿聽.
  
 
『문집』8-16 言箴
 
『문집』8-16 言箴
人心之動因言以宣發禁躁妄內斯靜專矧是樞機興戎出好吉凶榮辱惟其所召傷易則誕傷煩則支已肆物忤出悖來違非法不道欽哉! 訓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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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內斯靜專. 矧是樞機, 興戎出好. 吉凶榮辱, 惟其所召. 傷易則誕, 傷煩則支. 已肆物忤, 出悖來違. 非法不道, 欽哉訓辭.
  
 
『문집』8-17 動箴
 
『문집』8-17 動箴
哲人知幾誠之於思志士厲行守之於爲順理則裕從欲惟危造次克念戰兢自持習與性成聖賢同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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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厲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
  
 
『문집』8-18 印銘
 
『문집』8-18 印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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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公知遇之厚輒有少見上補聰明亦久懷憤鬱無所控告遇公而伸爾王者父天母地昭事之道當極嚴恭漢武遠祀地祇於汾脽旣爲非禮後世復建祠宇其失已甚因唐妖人作韋安道傳遂爲塑像以配食誣瀆天地天下之妄天下之惡有大於此者乎公爲使者此而不正將正何事願以其像投之河流愼勿先露先露則傳駭觀聽矣. 勿請勿議必見沮矣. 毋虞後患典憲不能相及亦可料也. 願公勿疑.
 
荷公知遇之厚輒有少見上補聰明亦久懷憤鬱無所控告遇公而伸爾王者父天母地昭事之道當極嚴恭漢武遠祀地祇於汾脽旣爲非禮後世復建祠宇其失已甚因唐妖人作韋安道傳遂爲塑像以配食誣瀆天地天下之妄天下之惡有大於此者乎公爲使者此而不正將正何事願以其像投之河流愼勿先露先露則傳駭觀聽矣. 勿請勿議必見沮矣. 毋虞後患典憲不能相及亦可料也. 願公勿疑.
  
===『문집』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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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9-19 여여대림논중서===  
與呂大臨論中書<sub>此書其全不可復見. 今只據呂氏所錄到者編之.</su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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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呂大臨論中書」<sub>此書其全不可復見. 今只據呂氏所錄到者編之.</su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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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대림논중서」<sub>이 편지의 전체 내용은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다. 지금은 단지 여씨가 기록한 것에 따라 엮었다.</sub><br/>
  
 
大臨云: "中者, 道之所由出."<br/>
 
大臨云: "中者, 道之所由出."<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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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br/>
 
先生曰: "'中者, 道之所由出', 此語有病."<br/>
 
先生曰: "'中者, 道之所由出', 此語有病."<br/>
大臨云: "謂: '中者, 道之所由出, 此語有病.' 已悉所諭. 但論其所同, 不容更有二名; 別而言之, 亦不可泥爲一事. 如所謂'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又曰: '中者, 天下之大本; 和者, 天下之達道', 則性與道, 大本與達道, 豈有二乎?"<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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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는 이 말에는 문제가 있다."<br/>
先生曰: "中卽道也. 若謂'道出於中', 則道在中外, 別爲一物矣. 所謂'論其所同, 不容更有二名; 別而言之, 亦不可混爲一事', 此語固無病. 若謂'性與道, 大本與達道, 可混而爲一', 卽未安. 在天曰命; 在人曰性; 循性曰道. 性也, 命也, 道也, 各有所當. 大本, 言其體; 達道, 言其用. 體用自殊, 安得不爲二乎?"<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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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臨云: "謂: '中者, 道之所由出, 此語有病.' 已悉. 所諭'但論其所同, 不容更有二名; 別而言之, 亦不可泥爲一事.' 如所謂'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又曰: '中者, 天下之大本; 和者, 天下之達道', 則性與道、大本與達道, 豈有二乎?"<br/>
大臨云: "旣云'率性之謂道', 則循性而行, 莫非道. 此非性中別有道也, 中卽性也. 在天爲命, 在人爲性, 由中而出者莫非道, 所以言'道之所由出'也. 與'率性之謂道'之義同, 亦非道中別有中也."<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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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는 이 말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같은 것을 논한다면 두 가지 명칭을 쓸 필요가 없고, 구별해 말한다면 또한 하나로 뒤섞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의 경우, 예를 들어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고 하고서 다시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대본大本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달도達道다'라고 말한다면, 성性과 도道·대본大本과 달도達道가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어찌 둘이겠습니까?"<br/>
先生曰: "'中卽性也', 此語極未安. 中也者, 所以狀性之體段,<sub>若謂性有體叚, 亦不可姑假此以明彼.</sub> 如稱天圓地方, 遂謂方圓而天地, 可乎? 方圓旣不可謂之天地, 則萬物決非方圓之所出. 如中旣不可謂之性, 則道何從稱'出於中'? 蓋中之爲義, 自過不及而立名. 若只以中爲性, 則中與性不合, 與'率性之謂道'其義自異. 性、道不可<sub>一作可以</sub>合一而言. 中止可言體而不可與性同德."<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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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曰: "中卽道也. 若謂'道出於中', 則道在中外, 別爲一物矣. 所謂'論其所同, 不容更有二名; 別而言之, 亦不可混爲一事', 此語固無病. 若謂'性與道、大本與達道, 可混而爲一', 卽未安. 在天曰命; 在人曰性; 循性曰道. 性也, 命也, 道也, 各有所當. 大本, 言其體; 達道, 言其用. 體用自殊, 安得不爲二乎?"<br/>
○又曰: "觀此義<sub>一作語</sub>, 謂'不可與性同德', 字亦未安. 子居對以中者性之德, 却爲近之."<sub>子居, 和叔之子. 一云義山之子.</s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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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중中이 곧 도道다. 만약 '도道가 중中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도道는 중中 밖의 별도의 것이 되어버린다. [내가]  '같은 것을 논한다면 두 가지 명칭을 쓸 필요가 없고, 구별해 말한다면 또한 하나로 뒤섞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거에는 진실로 문제가 없다. 만약 [그대의 생각처럼] '성性과 도道·대본大本과 달도達道는 뒤섞어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온당치 않다.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며,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 성性·명命·도道는 각각 해당하는 바가 있다. 대본大本은 그 체體를 말하고, 달도達道는 그 용用을 말한다. 체용體用이 절로 구별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br/>
○又曰: "'不偏之謂中', 道無不中, 故以中形道. 若謂: '道出於中', 則天圓地方, 謂方圓者天地所自出, 可乎?"</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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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臨云: "旣云'率性之謂道', 則循性而行, 莫非道. 此非性中別有道也, 中卽性也. 在天爲命, 在人爲性, 由中而出者莫非道, 所以言'道之所由出'也, 與'率性之謂道'之義同, 亦非道中別有中也."<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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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중용」에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고 말한 이상, 성性을 따라 행하는 것 가운데 도道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는 성性 안에 따로 도道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중中이 곧 성性입니다.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고, 중中에서 나오는 것이 도道 아님이 없기 때문에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와 의미가 같으니, 도道 안에 따로 중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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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曰: "'中卽性也', 此語極未安. 中也者, 所以狀性之體段,<sub>若謂性有體叚亦不可, 姑假此以明彼.</sub> 如稱天圓地方, 遂謂方圓而天地, 可乎? 方圓旣不可謂之天地, 則萬物決非方圓之所出. 如中旣不可謂之性, 則道何從稱'出於中'? 蓋中之爲義, 無過不及而立名. 若只以中爲性, 則中與性不合, 與'率性之謂道'其義自異. 性、道不可<sub>一作可以</sub>合一而言. 中止可言體, 而不可與性同德."<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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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중中이 곧 성性입니다.'라는 말은 지극히 온당치 않다. 중中이란 성性의 모습을 형용하는 것이다.<sub>'성性에 모습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우선 이를 통해 저것을 설명하는 것이다.</sub> 예를 들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라고 해서 '둥글고 네모지며 천지이다(方圓而天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둥글고 네모짐(方圓)'을 천지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 만물은 결코 '둥글고 네모짐(方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중中을 성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 도道를 어떻게 '중中에서 나온다'고 말하겠는가? 대개 중中의 의미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에 이름 붙인 것이다. 만일 단지 중中을 성性으로 여긴다면, 중中과 성性은 합치되지 않고, [「중용」에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와도 의미가 절로 달라진다. 성性과 도道는 하나로 합쳐 말할 수 없다. 중中은 모습(體段)만 말할 수 있을 뿐, 성性과 덕을 같이 할 수는 없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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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曰: "觀此義<sub>一作語</sub>, 謂'不可與性同德', 字亦未安. 子居對以中者性之德, 却爲近之."<sub>子居, 和叔之子. 一云義山之字.</su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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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이 의미를 살펴보니, '성性과 덕을 같이 할 수는 없다.'는 표현도 온당치 않다. 자거子居가 '중中이란 성性의 덕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오히려 그럴 듯하다."<sub>'자거子居'는 여대균呂大鈞(字 和叔, 1031-1082, 여대림의 형)의 아들이다. 일설에는 여의산呂義山의 자字라고 한다.</su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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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曰: "不偏之謂中. 道無不中, 故以中形道. 若謂: '道出於中', 則天圓地方, 謂方圓者天地所自出, 可乎?"<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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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도道는 중中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중中으로 도道를 형용한 것이다. 만일 '도道가 중中에서 나온다'라고 한다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를 '둥글고 네모짐(方圓)은 천지가 나오는 곳이다'라고 말하는 격이니, 가당키나 한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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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臨云: "不倚之謂中; 不雜之謂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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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한쪽으로 기대지 않는 것이 중中이고, 뒤섞이지 않는 것이 화和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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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曰: "'不倚之謂中', 甚善.<sub>語猶未瑩</sub> '不雜之謂和', 未當."<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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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한쪽으로 기대지 않는 것이 중中이다'라는 건 매우 좋다.<sub>표현이 여전히 분명치 않다.</sub> '뒤섞이지 않는 것이 화和이다.'는 적절치 않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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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臨云: "喜怒哀樂之未發, 則赤子之心. 當其未發, 此心至虛, 無所偏倚, 故謂之中. 以此心應萬物之變, 無往而非中矣.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此心度物所以甚於權衡之審者, 正以至虛無所偏倚故也. 有一物存乎其間, 則輕重長短皆失其中矣, 又安得如權如度乎? 故'大人不失其赤子之心', 乃所謂'允執其中'也. 大臨始者有見於此, 便指此心名爲中. 故前言'中者道之所由出'也. 今細思之, 乃命名未當爾. 此心之狀, 可以言中; 未可便指此心名之曰中. 所謂'以中形道', 正此意也. '率性之謂道'者, 循性而行, 無往而非理義也. 以此心應萬事之變, 亦無往而非理義也. 皆非指道體而言也. 若論道體, 又安可言'由中而出'乎?<sub>先生以爲此言未是.</su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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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가 적자지심赤子之心입니다.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 이 심心은 지극히 허虛해서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심心으로 만물의 변화에 응하면 어딜 가더라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맹자께서는 '저울질 한 뒤에야 무게를 알고, 자로 잰 뒤에야 길이를 안다. 사물이 모두 그러한데, 심心은 더욱 그러하다.'<ref><맹자> <양혜왕상> 7. 權,然後知輕重;度,然後知長短。物皆然,心為甚。</ref>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심心으로 만물을 헤아리는 것이 저울질할 때보다 더욱 정밀한 이유는 바로 [심心이] 지극히 허虛해서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도 들어있다면 무게·길이가 모두 들어맞지 않을 것이니, 또 어째서 저울질 하듯, 길이를 재듯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인大人은 자신의 적자지심을 잃지 않는다'<ref><맹자> <이루하> 12. 孟子曰:「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ref>는 것이 바로 이른바 '오직 그 중中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이것을 깨우치고서 이 심心을 중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자세히 생각해보니, 명명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심心의 모습은 중中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심心을 곧장 중中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중中으로 도道를 형용한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라는 것은, 성性을 따라 실천함에 어딜 가더라도 리의理義가 아닌 것이 없는 것이고, 이 심心으로 만사의 변화에 응하는 경우에도 어딜 가더라도 리의理義가 아닌 것이 없으니, 둘 다 도체道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도체道體를 논한다면, 또 어떻게 '중中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sub>선생께서는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셨다.</sub>"<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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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曰: "'喜怒哀樂未發謂之中.' 赤子之心, 發而未遠於中. 若便謂之中, 是不識大本也."<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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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적자지심赤子之心은 [정情이]이 발현되었지만 중中에서 아직 멀어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적자지심赤子之心을] 곧장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대본大本을 모르는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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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臨云:  "聖人智周萬物, 赤子全未有知, 其心固有不同矣. 然推孟子所云, 豈非止取純一無僞, 可與聖人同乎? 非謂無毫髮之異也. 大臨前日所云亦取諸此而已. 此義, 大臨昔者旣聞先生君子之敎, 反求諸己, 若有所自得, 參之前言往行, 將無所不合. 由是而之焉, 似得其所安, 以是自信不疑, 拳拳服膺, 不敢失墜. 今承敎乃云已失大本, 茫然不知所向. 竊恐辭命不明, 言不逮意, 致高明或未深喩, 輒<ref><한어대사전> 8. 副詞。 反而;卻。 </ref>露所見, 求益左右. 卒爲賜敎, 指其迷謬, 幸甚!<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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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성인은 앎이 만물을 아우르지만 적자赤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그들의 심心에는 진실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을 추론해보자면, [적자지심赤子之心의] 순수하고 거짓없는 점이 성인과 같을 수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털끝만한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 역시 이 점을 취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저는 과거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듣고서 스스로에게 돌이켜 탐구해 자득한 바가 있는 것 같았고, 이를 옛 분들의 행적에 견줬더니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서 나아가보니 온당한 바를 얻은 것 같아 이를 믿고 의심치 않으며 가슴에 꼭 지니고 감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미 대본大本을 그르쳤다'는 가르침을 받고 나니, 망연자실해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 문장이 분명치 않고 말이 의도에 미치지 못해 선생님께서 혹 제대로 이해하시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 견해를 드러내어 선생님께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마지막까지 저를 위해 가르침을 주셔서 제 잘못을 지적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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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人之學, 以中爲大本, 雖堯舜相授以天下, 亦云'允執其中'. 中者, 無過不及之謂也. 何所準則而知過不及乎? 求之此心而已. 此心之動, 出入無時, 何從而守之乎? 求之於喜怒哀樂未發之際而已. 當是時也, 此心卽赤子之心,<sub>純一無僞</sub> 卽天地之心,<sub>神明不測</sub> 卽孔子之絶四,<sub>四者有一物存乎其間, 則不得其中.</sub> 卽孟子所謂'物皆然, 心爲甚.'<sub>心無偏倚, 則至明至平. 其察物甚於權度之審.</sub> 卽<易>所謂'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此心所發, 純是義理, 與天下之所同然, 安得不和? 大臨前日敢指赤子之心爲中者, 其說如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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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성인의 학문은 중中을 대본大本으로 삼으니, 비록 요순堯舜께서 천하를 전해주실 때에도 '오직 그 중中을 잡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기준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람을 알겠습니까? 이 심心에서 찾을 뿐입니다. 이 심心의 움직임은 출입에 정해진 시점이 없으니, 언제 지키겠습니까?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에서 찾을 뿐입니다. 이 때 이 심心이 바로 적자지심赤子之心<sub>순수하고 거짓없음.</sub>이고, 천지지심天地之心<sub>신명불측함.</sub>이며, 공자의 절사絶四<ref><논어> <자한> 4. 子絕四:毋意,毋必,毋固,毋我。</ref><sub>네 가지는 거기에 뭐라도 들어있어서 그 중中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sub>이고, 맹자께서 '사물이 모두 그러한데, 심心은 더욱 그러하다'<sub>심心에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으면 지극히 밝고 공평해, 사물을 살피는 것이 저울질 하거나 자로 재는 것보다 정밀하게 된다.</sub>고 말씀하신 것이며, <주역>에서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 심心에서 발현된 것은 순전히 의리義理로 천하 사람들과 공통적인 것인데,<ref><맹자> <고자상> 7. 至於心,獨無所同然乎?心之所同然者何也?謂理也,義也。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故理義之悅我心,猶芻豢之悅我口。</ref> 어떻게 화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에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중中이라고 감히 말씀드린 것의 설명이 이렇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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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敎云: '赤子之心, 可謂之和; 不可謂之中.' 大臨思之: 所謂和者, 指已發而言之. 今言赤子之心, 乃論其未發之際,<sub>一有竊謂字</sub> 純一無僞, 無所偏倚, 可以言中. 若謂已發, 恐不可言心.<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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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은 화和라고 할 수는 있지만 중中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화和라는 것은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은 바로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를 논하는 것으로, 순수하고 거짓 없으며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으니 중中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만일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심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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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敎云: '所謂「循性而行, 無往而非義理.」 言雖無病, 而聖人氣味殊少.' 大臨反而思之, 方覺辭氣迫窘, 無沈浸醲厚之風. 此則淺陋之罪, 敢不承敎? 大臨更不敢拜書先生左右. 恐煩枉答, 只令義山持此請敎. 蒙塞未達, 不免再三浼瀆. 惟望乘間口諭義山傳誨一二, 幸甚! 幸甚!"<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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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그대가] 「성性을 따라 실천함에 어딜 가더라도 리의理義가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 것에는 비록 문제가 없지만, 성인의 기미氣味가 매우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돌이켜 생각해보고서 표현이 궁색해서 깊고 농후한 풍격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 하찮은 견식 탓이니, [어떻게]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감히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잘못된 답으로 번거롭게 해드릴까 두려우니, 단지 의산義山(자 자거子居, 여대균의 아들, 여대림의 조카)에게 이것을 가지고 가서 가르침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무지몽매해서 [선생님께] 거듭 불경을 범했습니다.<ref><주역> 몽괘 初筮告,再三瀆,瀆則不告。</ref> 시간 되실 때 말로 의산義山에게 가르침을 하나하나 전해주신다면, 이보다 큰 다행은 없을 것입니다!"<br/>
  
大臨云: "不倚之謂中; 不雜之謂和."
 
先生曰: "'不倚之謂中', 甚善.<sub>語猶未瑩</sub> '不雜之謂和', 未當."
 
大臨云: "喜怒哀樂之未發, 則赤子之心. 當其未發, 此心至虛, 無所偏倚, 故謂之中. 以此心應萬物之變, 無往而非中矣.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此心度物所以甚於權衡之審者, 正以至虛無所偏倚故也. 有一物存乎其間, 則輕重長短皆失其中矣. 又安得如權如度乎? 故大人不失其赤子之心, 乃所謂'允執其中'也. 大臨始者有見於此, 便指此心名爲中. 故前言'中者道之所由出'也. 今細思之, 乃命名未當爾. 此心之狀, 可以言中; 未可便指此心名之曰中. 所謂'以中形道', 正此意也. '率性之謂道'者, 循性而行, 無往而非理義也. 以此心應萬事之變, 亦無往而非理義也. 皆非指道體而言也. 若論道體, 又安可言'由中而出'乎?<sub>先生以爲此言未是.</sub></br>
 
  
先生曰: "'喜怒哀樂未發謂之中', 赤子之心; 發而未遠於中, 若便謂之中, 是不識大本也."</br>
 
大臨云:  "聖人智周萬物, 赤子全未有知, 其心固有不同矣. 然推孟子所云, 豈非止取純一無僞, 可與聖人同乎? 非謂無毫髮之異也. 大臨前日所云亦取諸此而已. 此義, 大臨昔者旣聞先生君子之敎, 反求諸已, 若有所自得, 參之前言往行, 將無所不合. 由是而之焉, 似得其所安, 以是自信不疑, 拳拳服膺, 不敢失墜. 今承敎乃云已失大本, 茫然不知所向. 竊恐辭命不明, 言不逮意, 致高明或未深喩, 輒露所見, 求益左右, 卒爲賜敎, 指其迷謬, 幸甚! 聖人之學, 以中爲大本, 雖堯舜相授以天下, 亦云'允執其中'. 中者, 無過不及之謂也. 何所準則而知過不及乎? 求之此心而已. 此心之動, 出入無時, 何從而守之乎? 求之於喜怒哀樂未發之際而已. 當是時也, 此心卽赤子之心,<sub>純一無僞</sub> 卽天地之心,<sub>神明不測</sub> 卽孔子之絶四<sub>四者有一物存乎其間, 則不得其中.</sub> 卽孟子所謂'物皆然, 心爲甚.'<sub>心無偏倚, 則至明至平. 其察物甚於權度之審.</sub> 卽<易>所謂'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 故此心所發, 純是義理, 與天下之所同然, 安得不和? 大臨前日敢指赤子之心爲中者, 其說如此. 來敎云: '赤子之心, 可謂之和; 不可謂之中.' 大臨思之: 所謂和者, 指已發而言之. 今言赤子之心, 乃論其未發之際,<sub>一有竊謂字</sub> 純一無僞, 無所偏倚, 可以言中. 若謂已發, 恐不可言心. 來敎云: '所謂「循性而行, 無往而非義理.」 言雖無病, 而聖人氣味殊少.' 大臨反而思之, 方覺辭氣迫窘, 無沈浸醲厚之風. 此則淺陋之罪, 敢不承敎. 大臨更不敢拜書先生左右. 恐煩往答, 只令義山持此請敎. 蒙塞未達, 不免再三浼瀆. 惟望乘間口諭義山傳誨一二, 幸甚! 幸甚!"<br/>
 
 
 
先生曰: "所云'非謂無毫髮之異', 是有異也. 有異者, 得爲大本乎? 推此一言, 餘皆可見."<br/>
 
先生曰: "所云'非謂無毫髮之異', 是有異也. 有異者, 得爲大本乎? 推此一言, 餘皆可見."<br/>
大臨云: "大臨以赤子之心爲未發, 先生以赤子之心爲已發. 所謂大本之實, 則先生與大臨之言, 未有異也. 但解'赤子之心'一句, 不同爾. 大臨初謂: '赤子之心, 止取純一, 無僞與聖人同,<sub>一有處字</sub> 恐孟子之義亦然, 更不曲折一一較其同異. 故指以爲言, 固未嘗以已發不同處爲大本也. 先生謂'凡言心者, 皆指已發而言.' 然則未發之前, 謂之無心, 可乎? 竊謂未發之前, 心體昭昭具在; 已發乃心之用也. 此所深疑未喩. 又恐傳言者失指. 切望指敎."<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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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그대가] '[성인과 적자赤子 사이에] 털끝만한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은 [결국]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성인과] 차이나는 것이 대본大本이 될 수 있겠는가? 이 한 마디를 추론해 본다면, 나머지는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br/>
先生曰: "所論意雖以已發者爲未發反<sub>一作及</sub>求諸言却是認已發者爲說詞之未瑩, 乃是擇之未精爾. '凡言心者, 指已發而言', 此固未當心一也, 有指體而言者;<sub>寂然不動, 是也.</sub> 有指用而言者.<sub>感而遂通天下之故, 是也.</sub> 惟觀其所見如何耳. 大抵論愈精微, 言愈易差. 所謂'傳言者失指', 及反覆觀之, 雖曰有差, 亦不失大意. 又如前論'中卽性'也, 已是分而爲二, 不若謂之性中.<sub>'性中', 語未甚瑩.</sub> 以謂'聖人氣味殊少', 亦不須言聖人. 第二書所以答去者極分明矣."<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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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臨云: "大臨以赤子之心爲未發, 先生以赤子之心爲已發. 所謂大本之實, 則先生與大臨之言, 未有異也. 但解'赤子之心'一句, 不同爾. 大臨初謂: '赤子之心, 止取純一無僞, 與聖人同'<sub>一有處字</sub>恐孟子之義亦然, 更不曲折一一較其同異. 故指以爲言, 固未嘗以已發不同處爲大本也. 先生謂'凡言心者, 皆指已發而言.' 然則未發之前, 謂之無心, 可乎? 竊謂未發之前, 心體昭昭具在; 已發乃心之用也. 此所深疑未喩, 又恐傳言者失指. 切望指敎."<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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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림: "저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未發)으로 여기고, 선생님께서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으로 여기십니다. 대본大本이라는 것의 실질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제 말 사이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적자지심赤子之心' 한 구절을 해석하는 것만 같지 않을 뿐입니다. 저는 원래 '적자지심赤子之心 단지 순수하고 거짓 없으니 성인과 같다'고 말했는데, 맹자의 뜻도 그러할 것이라고 여겨 더 이상 자세히 하나하나 그 동이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언급했던 것이지, 진실로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되어 [성인과] 같지 않은 것을 대본大本으로 여긴 적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릇 심心을 말하는 경우는 모두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을 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심心이 없다'고 여겨도 괜찮습니까? 제 생각에,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심체心體가 밝게 갖춰져 있고, [희노애락의 정情이] 발현된 것(已發)이 바로 심心의 용用입니다. 이 점이 [제가] 깊이 의심하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인데, 또 말씀을 전한 자가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가르침을 절실히 바랍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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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曰: "所論意, 雖以已發者爲未發; 反<sub>一作及</sub>求諸言, 却是認已發者爲說. 詞之未瑩, 乃是擇之未精爾. '凡言心者, 指已發而言', 此固未當. 心一也, 有指體而言者;<sub>寂然不動, 是也.</sub> 有指用而言者.<sub>感而遂通天下之故, 是也.</sub> 惟觀其所見如何耳. 大抵論愈精微, 言愈易差. 所謂'傳言者失指', 及反覆觀之, 雖曰有差, 亦不失大意. 又如前論'中卽性'也, 已是分而爲二, 不若謂之性中.<sub>'性中', 語未甚瑩.</sub> 以謂'聖人氣味殊少', 亦不須言聖人. 第二書所以答去者極分明矣."<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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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그대가] 논한 뜻이 비록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을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未發)으로 여겼지만, 이미 발현된 것(已發)에 대해 말한 것이다.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바로 택함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다. '무릇 심心을 말하는 경우는 모두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을 말한다.'는 것은 진실로 적절치 않다. 심心은 하나지만 체體를 말하는 경우가 있고<sub>'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는다'가 이것이다.</sub> 용用을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sub>'감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한다'가 이것이다.</sub>, 오직 보고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대저 논의가 정밀해 질수록 말은 어긋나기 쉽다. [그대가] '말씀을 전한 자가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반복해 살펴보니, 비록 '차이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내] 큰 뜻을 놓치지는 않았다. 또 이전에 '중中이 곧 성性입니다.'라고 말한 것의 경우, 이미 [중中과 성性을] 둘로 나눴으니, '성중性中'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sub>'성중性中'은 표현이 썩 분명하지 않다.</sub> [내가] '성인의 기미氣味가 매우 적다'고 말한 것 또한 성인을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두 번째 편지에서 답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br/>
  
 
===『문집』9-20===  
 
===『문집』9-20===  
 
答楊時論西銘書<br/>
 
答楊時論西銘書<br/>
  
前所寄史論十篇其意甚正纔一觀便爲人借去俟更子細看西銘之論則未然橫渠立言誠有過者乃在正蒙西銘之爲書推理以存義擴前聖所未發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二者亦前聖所未發>豈墨氏之比哉! 西銘明理一而分殊墨氏則二本而無殊<老幼及人理一也. 愛無差等本二也.> 分殊之蔽私勝而失仁無分之罪兼愛而無義分立而推理一以止私勝之流仁之方也. 無別而迷兼愛至於無父之極義之賊也. 子比而同之過矣. 且謂言體而不及用彼欲使人推而行之本爲用也. 反謂不及不亦異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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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所寄史論十篇, 其意甚正. 纔一觀, 便爲人借去俟. 更子細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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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銘>之論, 則未然. 橫渠立言, 誠有過者, 乃在<正蒙>. <西銘>之爲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sub>二者亦前聖所未發.</sub> 豈墨氏之比哉! <西銘>明理一而分殊; 墨氏則二本而無殊.<sub>老幼及人, 理一也; 愛無差等,本二也.</sub> 分殊之蔽, 私勝而失仁; 無分之罪, 兼愛而無義. 分立而推理一以止私勝之流, ,仁之方也; 無別而迷兼愛, 至於無父之極, 義之賊也. 子比而同之, 過矣. 且謂'言體而不及用', 彼欲使人推而行之, 本爲用也, 反謂不及, 不亦異乎?
  
 
『문집』9-21 代人上宰相論鄭白渠書
 
『문집』9-21 代人上宰相論鄭白渠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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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二程張邵書予以晁昭德讀書志校之周子通書一卷明道中庸解一卷程氏易一卷書說一卷詩說兩卷論語說十卷孟子解十四卷伊川集二十卷程氏雜說十卷張子正蒙書十卷漁樵問對一卷信聞紀一卷孟子解十四卷易說十卷春秋說一卷橫渠崇文集十卷邵子皇極經世十二卷觀物篇六卷擊壤集二十卷凡十九部一百五十四卷所謂程氏雜說十卷者疑卽朱子所謂諸公各自爲書散出幷行之一者也. 而遺書所錄不見其目朱子因其先人舊藏益以類訪爲遺書二十五卷又爲外書十二卷益多雜說數倍而雜說固不傳合晁氏所記與今所傳續蓋可見矣. 然今所傳本皆家藏故書數十年前所刻就令刻板具在意且漫漶廢棄不少矣. 淸廟雅樂姑以備數而鄭衛之聲人爭愛之則此日少而彼日多者亦其勢然也. 近年始有新刻邵子書聞風而起者或誚爲迂濶且笑之. 宜黃譚善心同邑傳君友諒之同人也. 奮然不顧取二程遺書文集刻之, 且將考訂程氏經說, 以次鋟木. 槃託中表之好乃得預聞其說喜其事之有成而學者得以傳讀先儒之遺文而不倦其卓然之見良有可取故題其後以勉同志之士云蜀郡後學虞槃.
 
周二程張邵書予以晁昭德讀書志校之周子通書一卷明道中庸解一卷程氏易一卷書說一卷詩說兩卷論語說十卷孟子解十四卷伊川集二十卷程氏雜說十卷張子正蒙書十卷漁樵問對一卷信聞紀一卷孟子解十四卷易說十卷春秋說一卷橫渠崇文集十卷邵子皇極經世十二卷觀物篇六卷擊壤集二十卷凡十九部一百五十四卷所謂程氏雜說十卷者疑卽朱子所謂諸公各自爲書散出幷行之一者也. 而遺書所錄不見其目朱子因其先人舊藏益以類訪爲遺書二十五卷又爲外書十二卷益多雜說數倍而雜說固不傳合晁氏所記與今所傳續蓋可見矣. 然今所傳本皆家藏故書數十年前所刻就令刻板具在意且漫漶廢棄不少矣. 淸廟雅樂姑以備數而鄭衛之聲人爭愛之則此日少而彼日多者亦其勢然也. 近年始有新刻邵子書聞風而起者或誚爲迂濶且笑之. 宜黃譚善心同邑傳君友諒之同人也. 奮然不顧取二程遺書文集刻之, 且將考訂程氏經說, 以次鋟木. 槃託中表之好乃得預聞其說喜其事之有成而學者得以傳讀先儒之遺文而不倦其卓然之見良有可取故題其後以勉同志之士云蜀郡後學虞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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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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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2024년 7월 9일 (화) 10:45 기준 최신판

해제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기존에 온라인에서 『이정집』에 접근·활용하기가 쉽지 않아 위키 사이트를 활용하려고 한다.

원문

宋程顥撰 奏疏表

『문집』1-1 論君道<一作上殿箚子> 臣伏謂: 君道之大在乎稽古正學明善惡之端辨忠邪之分曉然趨道之正故在乎君志先定君志定而天下之治成矣. 所謂定志者一心誠意擇善而固執之也. 夫義理不先盡則多聽而易惑志意不先定則守善而或移惟在以聖人之訓爲必當從先王之治爲必可法不爲後世駁雜之政所牽制不爲流俗因循之論所遷惑自知極於明信道極於篤<一作滯一本此句在上句上>任賢勿貳去邪勿疑必期致世如三代之隆而後已也. 然天下之事患常生於忽微而志亦戒乎漸習是故古之人君雖出入從容閒燕必有誦訓箴諫之臣左右前後無非正人所以成其德業伏願陛下禮命老成賢儒不必勞以職事俾曰: 親便座講論道義以輔養聖德又擇天下賢俊使得陪侍法從朝夕延見開陳善道講磨治體以廣聞聽如是則聖智益明王猷允塞矣. 今四海靡靡日入偸薄末俗嘵嘵無復廉恥蓋亦朝廷尊德樂道<一作義>之風未孚而篤誠忠厚之敎尙鬱也. 惟陛下稽聖人之訓法先王之治一<一作正>心誠意體乾剛健而力行之則天下幸甚!

『문집』1-2 請修學校尊師儒取士箚子 臣伏謂: 治天下以正風俗得賢才爲本宋興百餘年而敎化未大醇人情未盡美士人微謙退之節鄕閭無廉恥之行刑雖繁而奸不止官雖冗而材不足者此蓋學校之不修師儒之不尊無以風勸養勵之使然耳. 竊以去聖久遠師道不立儒者之學幾於廢熄惟朝廷崇尙敎育之則不日而復古者一道德以同俗苟師學不正則道德何從而一方今人執私見家爲異說支離經訓無復統一道之不明不行乃在於此. 臣謂: 宜先禮命近侍賢儒各以類擧及百執事方岳州縣之吏悉心推訪凡有明先王之道德業充備足爲師表者其次有篤志好學材良行修者皆以名聞其高蹈<一作尙>之士朝廷當厚禮延聘其餘命州縣敦遣萃於京師舘之寬閒之宇, 豐其廩餼, 卹其家之有無以大臣之賢典領其事俾群儒朝夕相與講明正學. 其道必本於人倫明乎物理其敎自小學灑埽應對以往修其孝悌忠信周旋禮樂其所以誘掖激勵漸摩成就之道皆有節序其要在於擇善修身至於化成天下自鄕人而可至於聖人之道其學行皆中於是者爲成德. 又其次取材識明達可進於善者使日受其業稍久則擧其賢傑以備高任擇其學業大明德義可尊者爲大學之師次以分敎天下之學始自藩府至於列郡擇士之願學民之俊秀者入學皆優其廩給而蠲其身役凡其有父母骨肉之養者亦通其優游往來以察其行. 其大不率敎者, 斥之從役. 漸自大學及州郡之學擇其道業之成可爲人師者使敎於縣之學如州郡之制異日則十室之鄕達於黨遂皆當修其庠序之制爲之立師學者以次而察焉縣令每歲與學之師以鄕飮之禮會其鄕老學者衆推經明行修材能可任之士升於州之學以觀其實學荒行虧者罷歸而罪其吏與師其升於州而當者復其家之役郡守又歲與學之師行鄕飮酒之禮大會郡士以經義性行材能三物賓興其士於太學太學又聚而敎之其學不明行不修與材之下者罷歸以爲郡守學師之罪升於大學者亦聽其以時還鄕里復來於學. 太學歲論其賢者能者於朝謂之選士朝廷問之經以考其言試之職以觀其材然後辨論其等差而命之秩凡處郡縣之學與太學者皆滿三歲然後得充薦其自州郡升於太學者一歲而後薦其有學行超卓衆所信服者雖不處於學或處學而未久亦得備數論薦. 凡選士之法, 皆以性行端潔居家孝悌有廉恥禮遜通明學業曉達治道者在州縣之學則先使其鄕里長老次及學衆推之. 在太學者先使其同黨次及博士推之其學之師與州縣之長無或專其私苟不以實, 其懷姦罔上者, 師長皆除其仕籍終身不齒失者亦奪官二等, 勿以赦及去職論州縣之長蒞事未滿半歲者, 皆不薦士師, 皆取學者成否之分數爲之賞罰. 凡公卿大夫之子弟皆入學, 在京師者入太學在外者各入其所在州之學謂之國子其有當補蔭者並如舊制惟不選於學者不授以職每歲諸路別言一路國子之秀者升於太學其升而不當者罪其監司與州郡之司太學歲論國子之有學行材能者於朝其在學賓興考試之法皆如選士. 國子自入學中外通及七年或太學五年. 年及三十以上所學不成者辨而爲二等上者聽授以筦庫之任自非其後學業修進中於論選則不復使親民政. 其下者罷歸之. 雖歲滿願留學者亦聽. 其在外學七歲而不中升選者, 皆論致太學而考察之, 爲二等之法. 國子之大不率敎者, 亦斥罷之. 凡有職任之人其學業材行應薦者諸路及近侍以聞處之太學其論試亦如選士之法取其賢能而進用之. 凡國子之有官者中選則增其秩. 臣謂旣一以道德仁義敎養之又專以行實材學升進去其聲律小碎糊名謄錄一切無義理之弊不數年間學者靡然丕變矣. 豈惟得士浸廣天下風俗將日入醇正王化之本也. 臣謂帝王之道莫尙於此願陛下特留宸意爲萬世行之. <熙寧元年上時爲監察御史裏行>

『문집』1-3 論王覇箚子(論王覇之辨) 臣伏謂: 得天理之正, 極人倫之至者堯舜之道也. 用其私心依仁義之偏者霸者之事也. 王道如砥本乎人情出乎禮義若履大路而行無復回曲. 霸者崎嶇反側於曲徑之中而卒不可與入堯舜之道故誠心而王則王矣. 假之而霸則霸矣. 二者其道不同在審其初而已易所謂差若毫釐繆以千里者其初不可不審也. 故治天下者必先立其志正志先立則邪說不能移異端不能惑故力進於道而莫之禦也. 苟以霸者之心而求王道之成是衒石以爲玉也. 故仲尼之徒無道桓文之事而曾西恥比管仲者義所不由也. 况下於霸者哉! 陛下躬堯舜之資處堯舜之位必以堯舜之心自任然後爲能充其道漢唐之君有可稱者論其人則非先王之學考其時則皆駁雜之政乃以一曲之見幸致小康其創法垂統非可繼於後世者皆不足爲也. 然欲行仁政而不素講其具使其道大明而後行則或出或入終莫有所至也. 夫事有大小有先後察其小忽其大先其所後後其所先皆不可以適治且志不可慢時不可失惟陛下稽先聖之言察人事之理知堯舜之道備於已反身而誠之推之以及四海擇同心一德之臣與之共成天下之務書所謂尹躬曁湯咸有一德又曰: 一哉! 王心言致一而後可以爲也. 古者三公不必備惟其人誠以爲不得其人而居之則不若闕之之愈也. 蓋小人之事君子所不能同豈聖賢之事而庸人可參之哉! 欲爲聖賢之事而使庸人參之則其命亂矣. 旣任君子之謀而又入小人之議則聰明不專而志意惑矣. 今將救千古深錮之弊爲生民長久之計非夫極聽覽之明盡正邪之辨致一而不二其能勝之乎? 或謂: 人君擧動不可不愼易於更張則爲害大矣. 臣獨以爲不然所謂更張者顧理所當耳. 其動皆稽古質義而行則爲愼莫大焉豈若因循苟簡卒致敗亂者哉! 自古以來何嘗有師聖人之言法先王之治將大有爲而返成禍患者乎願陛下奮天錫之勇智體乾剛而獨斷霈然不疑則萬世幸甚! <熙寧二年上時爲監察御史裏行>

『문집』1-4 論十事箚子 <師傅六官經界鄕黨貢士兵役民食四民川澤分數> 臣竊謂: 聖人創法皆本諸人情極乎物理雖二帝三王不無隨時因革踵<一作稱>事增損之制然至乎爲治之大原牧民之要道則前聖後聖豈不同條而共貫哉! 蓋無古今無治亂如生民之理有窮則聖人之法可改後世能盡其道則大治或用其偏則小康此歷代彰灼著明之効也. 苟或徒知泥古而不能施之於今姑欲循名而遂廢其實此則陋儒之見何足以論治道哉! 然儻謂今人之情皆已異於古先王之迹不可復於今趣便目前不務高遠則亦恐非大有爲之論而未足以濟當今之極弊也. 謂如衣服飮食宮室器用之類苟便於今而有法度者豈亦遽當改革哉! 惟其天理之不可易人所賴以生非有古今之異聖人之所必爲者固可槩擧然行之有先後用之有緩速若夫裁成運動周旋曲當則在朝廷講求設施如何耳. 古者自天子達於庶人必須師友以成就其德業故舜禹文武之聖亦皆有所從學今師傅之職不修友臣之義未著所以尊德樂善之風未成於天下此非有古今之異者也. 王者必奉天建官故天地四時之職歷二帝三王未之或改所以百度修而萬化理也. 至唐猶僅存其略當其治時尙得綱紀小正今官秩淆亂職業廢弛太平之治所以未至此亦非有古今之異也. 天生蒸民立之君使司牧之必制其恒産使之厚生則經界不可不正井地不可不均此爲治之大本也. 唐尙能有口分授田之制今則蕩然無法富者跨州縣而莫之止貧者流離餓莩而莫之恤幸民雖多而衣食不足者蓋無紀極生齒曰: 益繁而不爲之制則衣食日蹙轉死日多此乃治亂之機也. 豈可不漸圖其制之之道哉! 此亦非有古今之異者也. 古者政敎始乎鄕里其法起於比閭族黨州鄕酇遂, 以相聯屬統治故民相安而親睦刑法鮮犯廉恥易格, 此亦人情之所自然行之則效亦非有古今之異者也. 庠序之敎, 先王所以明人倫化成天下今師學廢而道德不一鄕射亡而禮樂不興貢士不本於鄕里而行實不修秀民不養於學校而人材多廢此較然之事亦非有古今之異者也. 古者府史胥徒受祿公上而兵農未始判也. 今驕兵耗匱, 國力亦已極矣. 臣謂禁衛之外不漸歸之於農則將貽深慮府史胥徒之役毒遍天下不更其制則未免大患此亦至明之理非有古今之異者也. 古者民必有九年之食無三年之食者以爲國非其國臣觀天下耕之者少食之者衆地力不盡人功不勤雖富室强宗鮮有餘積况其貧弱者乎或一州一縣有年歲之凶卽盜賊縱橫饑羸滿路如不幸有方三二千里之災或連年之歉則未知朝廷以何道處之則其患不可勝言矣. 豈可曰: 昔何久不至是因以幸爲可恃也哉! 固宜漸從古制均田務農公私交爲儲粟之法以爲之傋此亦無古今之異者也. 古者四民各有常職, 而農者十居八九故衣食易給而民無所苦困今京師浮民數逾百萬游手不可貲度觀其窮蹙辛苦孤貧疾病變詐巧僞以自求生而常不足以生曰: 益歲滋久將若何事已窮極非聖人能變而通之則無以免患豈可謂無可奈何而已哉! 此在酌古變今均多恤寡漸爲之業以救之耳. 此亦非有古今之異者也. 聖人奉天理物之道在乎六府六府之任治於五官山虞澤衡各有常禁故萬物阜豐而財用不乏. 今五官不修六府不治用之無節取之不時豈惟物失其性林木所資天下皆已童赭斧斤焚蕩尙且侵尋不禁而川澤漁獵之繁暴殄天物亦已耗竭則將若之何此乃窮弊之極矣. 惟修虞衡之職使將養之則有變通長久之勢此亦非有古今之異者也. 古者冠婚喪祭, 車服器用, 等差分別, 莫敢踰僣, 故財用易給, 而民有恒心. 今禮制未修, 奢靡相尙, 卿大夫之家莫能中禮, 而商販之類或踰王公, 禮制不足以檢飭人情, 名數不足以旌別貴賤, 旣無定分, 則奸詐攘奪人人求厭其欲而後已豈有止息者哉! 此爭亂之道也. 則先王之法豈得不講求而損益哉! 此亦非有古今之異者也. 此十者特其端緖耳. 臣特論其大端以爲三代之法有必可施行之驗如其綱條度數施爲注措之道則審行之, 必也稽之經訓而合, 施之人情而宜, 此曉然之定理, 豈徒若迂疏無用之說哉! 惟聖明裁擇!

『문집』1-5 論養賢箚子 臣竊以議當代者, 皆知得賢則天下治而未知所以致賢之道也. 是雖衆論紛然未極其要朝廷亦以行之爲艱而不爲也. 三代養賢必本於學而德化行焉治道出焉本朝踵循唐舊而館閣淸選止爲文字之職名實未正欲招賢養材以輔時贊化將何從而致之也. 臣歷觀古先哲王所以虛已求治何嘗不盡天下之才以成已之德也. 故曰: 大舜有大焉善與人同樂取於人以爲善今天下之大豈爲乏賢而朝廷無養賢之地以容徐察其器實高下而進退之也. 臣今欲乞朝廷設延英院以待四方之賢, 凡公論推薦及巖穴之賢必招致優禮視品給俸而不可遽進以官止以應詔命名凡有政治則委之詳定, 凡有典禮則委之討論, 經畫得以奏陳而治亂得以講究也. 俾群居切磨日盡其材行其志使政府及近侍之臣互與相接陛下時賜召對詔以治道可觀其材識器能也. 察以累歲人品益分然後使賢者就位能者任職或委付郡縣或師表士儒其德業尤異漸進以帥臣職司之任爲輔弼爲公卿無施之不稱也. 若是則引彙並進野無遺賢陛下尊賢待士之心可謂無負於天下矣. 取進止.

『문집』1-6 乞留張載狀(論遣張載按獄) 臣伏聞差著作佐郞張載往明州推勘苖振公事. 竊謂載經術德義久爲士人師法近侍之臣以其學行論薦故得召對, 蒙陛下親加延問屢形天獎, 中外翕然知陛下崇尙儒學優禮賢俊爲善之人孰不知勸今朝廷必欲究觀其學業詳試其器能則事周有繫敎化之本源於治政之大體者儻使之講求議論則足以盡其所至. 夫推案詔<一作訟>獄, 非謂儒者之不當爲臣今所論者朝廷待士之道爾蓋試之以治獄雖足以見其鉤深練覈之能攻摘斷擊之用正可試諸能吏非所以盡儒者之事業徒使四方之人謂朝廷以儒術賢業進人而以獄吏之事試之則抱道修潔之士益難自進矣. 於朝廷尊賢取士之體將有所失況苖振罪犯明白情狀已具得一公平幹敏之人便足了事伏乞朝廷別賜選差貴全事體謹具狀奏聞. <熙寧二年閏十一月上時爲監察御史裹行>

『문집』1-7 諫新法䟽<熙寧二年三月四日> 臣近累上言, 乞罷預借靑苖錢利息及汰去提擧官事, 朝夕以覬, 未蒙施行. 臣竊謂: 明者見於未形, 智者防於未亂. 况今日事理顯白易知, 若不因機亟決, 持之愈堅必貽後悔悔而後改則爲害已多蓋安危之本在乎人情治亂之機繫乎事始衆心暌乖則有言不信萬邦協和則所爲必成固不可以威力取强言語必勝而近日所聞尤爲未便伏見制置條例司疏駁大臣之奏擧劾 不奉行之官徒使中外物情愈致驚駭是乃擧一偏而盡沮公議因小事而先失<一作動>衆心權其輕重未見其可. 臣竊謂: 陛下固已燭見事體, 究知是非, 在聖心非吝改張由柄臣尙持固必是致輿情大鬱衆論益讙若欲遂行必難終濟. 伏望陛下奮神明之威斷, 審成敗之先機與其遂一失而廢百爲孰若沛大恩而新衆志外汰使人之擾亟推去息之仁况糶糴之法兼行則儲蓄之資自廣在朝廷未失於擧措使議論何名而沸騰伏乞檢會臣所上言再賜施行則天下幸甚! <時爲監寨御史裏行上語及程顥疏安石曰: 顥至中書臣略諭以方鎭沮毁朝廷法令朝廷申明使知法意不得謂之疏駮大臣章奏顥乃言大臣論列事當包含此言尤爲害理若不申明法意使中外具知則是縱使邪說誣民而令詔令本意更不明於天下如此則異議何由帖息>

『문집』1-8 再上疏<熙寧三年四月十七日> 臣聞: 天下之理, 本諸簡易, 而行之以順道則事無不成故曰: 智者若禹之行水行其所無事也. 捨而之於險阻則不足以言智矣. 蓋自古興治, 雖有專任獨決, 能就事功者; 未聞輔弼大臣人各有心暌戾不一致國政異出名分不正中外人情交謂不可而能有爲者也. 况於措置失宜, 沮廢公議, 一二小臣實與大計用賤陵貴以邪妨正者乎? 凡此皆天下之理不宜有成而智者之所不行也. 設令由此僥倖, 事小有成, 而興利之臣日進, 尙德之風浸衰, 尤非朝廷之福. 矧復天時未順地震連年四方人心日益搖動此皆陛下所當仰測天意俯察人事者也. 臣奉職不肖議論無補望允前奏早賜降責. <時權監察御史裏行由是罷爲權發遣京西路同提典刑獄>

『문집』1-9 辭西京提刑奏狀 臣伏蒙聖恩, 差權發遣京西路提點刑獄. 已瀝懇誠不敢祗受願從竄謫日冀允兪不避煩瀆輒再陳請. 臣出自冗散, 過蒙陛下拔擢, 寘在言責伏自供職已來每有論列惟知以憂國愛君爲心不敢以揚已矜衆爲事陛下亮其愚直每加優容故常指陳安危辨析邪正知人主不當自聖, 則未嘗爲謟諛之言知人臣義無私交則不忍爲阿黨之計. 明則陛下, 幽則鬼神, 臣之微誠, 實仰臨照. 然臣學術寡陋, 智識濶疏徒有捧土之心, 曾微回天之力. 近以力陳時政之失, 倂論大臣之非, 不能裨補聖明, 是臣隳廢職業. 旣已抗章自劾, 屛居俟命. 豈意刑書未正而恩典過頒使臣粗知廉隅必不敢蒙恥願就如其見利忘義靦面受之陛下有臣如此亦將安用? 况臺諫之任, 朝廷綱紀所憑, 使不以言之是非皆得進職而去臣恐綱紀自此弛廢臣雖無狀敢以死請. 伏望陛下開白日之照厲嚴霜之刑投諸荒陬實所甘分臣無任瀝血祈天之至. <熙寧三年四月上上謂王安石曰: 人情如此紛紛奈何安石曰: 陳襄程顥專黨呂公著都無助陛下爲治之實今當邪說紛紛之時乃用襄知制誥顥提點刑獄人稱其平正此輩小人若附公著得行其志則天下之利皆歸之旣不得志又不失陛下獎用可爲肯退聽而不爲善乃以爲僉書鎭寧軍節度判官事>

『문집』1-10 謝澶州簽判表 論議無補, 職業不修; 國有典刑罪在誅戮曲蒙弘貸仰荷鴻私期於糜捐莫可報謝<中謝>臣性質朴魯學術空虛志意粗修智識無取陛下講圖大政博謀群材過聽侍臣之言猥加風憲之任臣旣遭遇明聖亦思誓竭疲駑惟知直道以事君豈忍曲學而阿世屢進濶疎之論愧非擊搏之才徒嘗刳瀝肺肝曾無裨補毫髮旣不能繩愆糾繆固不願沽直買名豈敢冒寵以居惟是奉身而退自劾之章繼上闔門之請突堅天意未回憲章尙屈更奉發中之詔俾分提憲之權不惟沮諍論之風亦懼廢賞刑之實力形奏述恭俟誅夷. 此蓋伏遇皇帝陛下極天淸明普日照臨洞正邪之心迹辨眞僞於幽微察臣忠誠恕臣狂直不忍寘諸重辟投之遠荒解其察視之官處以便安之地生成之賜義固等於乾坤涵容之恩重益逾於山嶽臣敢不日新素學力蹈所知秉心不回信道愈篤願狥小夫之志不爲儒者之羞或能自進於尋常庶可仰酬於萬一!


宋程顥撰 書

『문집』2-1 答橫渠先生定性書(정성서)

承敎諭以定性未能不動, 猶累於外物. 此賢者慮之熟矣, 尙何俟小子之言? 然嘗思之矣, 敢貢其說於左右. 所謂定者, 動亦定、靜亦定, 無將迎、無内外. 苟以外物爲外, 牽己而從之, 是以己性爲有内外也. 且以性爲隨物於外, 則當其在外時, 何者爲在内? 是有意於絕外誘, 而不知性之無内外也. 旣以内外爲二本, 則又烏可遽語定哉。 夫天地之常, 以其心普萬物而無心; 聖人之常, 以其情順萬事而無情. 故君子之學, 莫若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 易曰: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1] 苟規規於外誘之除, 將見滅於東而生於西也. 非惟日之不足, 顧其端無窮, 不可得而除也. 人之情各有所蔽, 故不能適道. 大率患在於自私而用智。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一作物.; 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 今以惡外物之心, 而求徐本求作永.照無物之地, 是反鑑而索照也。易曰: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2] 孟氏亦曰: “所惡於智者, 爲其鑿也.”[3] 與其非外而是内, 不若内外之兩忘也. 兩忘則澄然無事矣; 無事則定; 定則明; 明則尙何應物之爲累哉。 聖人之喜, 以物之當喜; 聖人之怒, 以物之當怒. 是聖人之喜怒, 不繫於心而繫於物也. 是則聖人豈不應於物哉? 烏得以從外者爲非, 而更求在内者爲是也? 今以自私用智之喜怒, 而視聖人喜怒之正, 爲如何哉? 夫人之情, 易發而難制者, 惟怒爲甚. 第能於怒時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亦可見外誘之不足惡, 而於道亦思過半矣. 心之精微, 口不能宣. 加之素拙於文辭, 又吏事匆匆, 未能精慮. 當否佇報. 然舉大要, 亦當近之矣. 道近求遠, 古人所非. 惟聰明裁之.

宋程顥撰 記

『문집』2-2 晉城縣令書名記 古者諸侯之國各有史記<一無記字>故其善惡皆見於後世自秦罷侯置守令則史亦從而廢矣. 其後自非傑然有功德者或記之循吏與夫凶忍殘殺之極者以酷見傳其餘則泯然無聞矣. 如漢唐之有天下皆數百年其間郡縣之政可書者宜亦多矣. 然其見書者率纔數十人使賢者之政不幸而無傳其不肖者復幸而得蓋其惡斯<一作其>與古史之意<一作事>異矣. 夫圖治於長久者, 雖聖知爲之且不能倉卒苟簡而就, 蓋必本之人情而爲之法度, 然後可使去惡而從善. 則其紀綱條敎必審定而後下, 其民之服循漸漬亦必待久乃淳固而不變. 今之爲吏三歲, 而代者固已遲之矣. 使皆知禮義者能自始至卽皇皇然圖所施設, 亦敎令未熟民情未孚, 而更書已至矣. 儻後之人所志不同復有甚者, 欲新已之政, 則盡其法而去之, 其迹固無餘矣. 而况因循不職者乎! 噫! 以易息之政而復無以託其傳, 則宜其去皆未幾, 而善惡無聞焉. 故欲聞古史之善而不可得則因謂今有題前政之名氏以爲記者尙爲近古而斯邑無之乃考之案牒訪之吏民纔得自李君而降二十一人, 第其歲月之先後而記之俾民觀其名而不忘其政後之人得從而質其是非以爲師戒云耳. 來者請嗣書其次.


宋程顥撰 雜文

『문집』2-3 南廟試佚道使民賦<民得終佚勞固無怨> 人情莫不樂利聖政爲能使民; 以佚道而敦敕, 俾當時之服循. 敎本於農, 雖極勤勞之事; 功收於後自無怨讟之因. 厥惟生民, 各有常職; 勞而獲養則樂服其事; 勤而無利則重煩其力. 惟王謹以政令, 驅之稼穡. 且爲生之本宜敎使以良勤則從上也. 輕蓋豐餘之自得蠢爾農俗陶乎敎風知所勞者爲乎已圖所利者存乎終莫不勉勉以從令于于而勸功志在便人役以農疇之務時雖畢役樂於歲事之豐雖復敎令時頒科條日出嚴刑以董其或惰加賦以戒其不一然而俗樂趨勸時無怨疾擇可勞而勞也. 敢憚初勤因所利而利焉自全終佚. 大抵善治俗者率俗以敦本善使民者順民而不勞道皆出於優佚令無勤於繹騷不奪其時導以厚生之利將求其欲豈聞力穡之逃勿謂民之冥而無知勿謂農之勞而不務趨其利則雖勞而樂害其事則雖冥而懼志取豐益業其安固使爾農於墾殖縱極勤劬異有國之力征自膺饒俗得非納於豐富之道敎以便安之途在服勞而雖至顧有憾以曾無體兌彖之悅民下安其敎同周詩之戒事衆樂而趨异夫雖上之行抑民所願或躬籍以爲率或名官而申勸是皆俾民有樂佚之道焉雖勞何怨!

『문집』2-4 南廟試九敍惟歌論 論曰: 民受天地之中而生者也. 水火金木土穀民所賴而生者也. 樹之君使修擧其所賴而養之者也. 修之有道行之有節上焉天順之下焉民樂之正德焉利用焉厚生焉此其所以秉統持正而制天下之命者也. 在書禹之謨曰: 九功惟敍九敍惟歌其指言乎是也. 舜禹明其道聖也. 後世不及焉功也. 萬世所利焉宜其事有次序而民歌樂之也. 噫! 舜之君禹之臣其歌之之民, 日聞其道日被其澤其見而知之或言或歌可矣. 今去聖久遠踰數千祀然可覆而擧之者何也. 得非一於道乎道之大原在於經經爲道其發明天地之秘形容聖人之心一也. 然當推本夫明其次著其跡者言之在洪範之九章一曰: 五行次二曰: 五事統之以大中終之以福極聖人之道其見於是乎! 蓋五行者天之道也. 五事者人之道也. 修人事而致天道此王者所以治也. 五事修五行敍則其生材也. 美焉阜焉民居其中享其利而安焉豈非皇極之道用而致乎五材之生天也. 非人也. 五事之修人也. 非天也. 雖然五事正則五材自然得其性矣. 是則天之道亦王者之所爲也. 王者旣修五事而致五材則又擧正德之敎而率之明利用之源而阜之開厚生之道而養之, 五行恊於上, 六府利於下, 三事擧於中. 修焉其功之敍也. 和焉其德之行也. 如是則民浩浩然于于然驩虞於下而歌頌其政矣. 或曰: 子之言五行然矣. 然六府之兼乎穀何也. 答曰: 五行氣也. 五材形也. 君之所致者氣也. 民之所用者形也. 五氣旣敍五材旣豐民並用焉然穀者民之所生也. 不可一日無之此六府所以兼穀也. 要其本則五氣之生而已, 夫何惑焉? 竊原春秋之文求聖人之志災之書者十一大水之書者七不雨之書者九大旱之書者二無麥苖大無麥禾之書者各一蓋言五行失其序則六府失其宜物失其宜則尙何次敍之有乎民失其所則尙何歌詠之有乎可以見聖人之心重時政而謹民事勤勤乎如是也. 由是言之則舜之德其至也. 地平天成矣. 萬世永賴矣. 其民陶其敎遂其生九功之德皆歌之矣. 戒之用休董之用威勸之以九歌俾勿壞其終之之道也, 道是而已矣. 或問行於後者當如何曰: 五事本也. 謹而明之六府外也. 時而治之敎之以德節之以政古之五正各司其方可復也. 周之六官各主其事可用也. 此其略也. 其道則具於經矣. 推而明之勤而修之是亦舜之政也. 夫何遠哉! 顧力行何如爾謹論. <此篇經爲道道是而已矣. 兩處疑有脫誤>

『문집』2-5 南廟試策五道 第一道 問: 禮曰: 凡養老五帝憲三王有乞言厚人倫之義也. 是以鰥寡孤獨皆有養後世則不然敎化之不明衣食之不足黎民老而不得其養饑寒轉死於溝壑者往往而是今將考古養老之禮而行之惟帝堯而上不可聞已虞夏商周之時其所養何老所處何學所衣何服所食何禮一歲凡幾行之宜誦所聞, 悉著於篇. 對: 王者高拱於穆淸之上而化行於裨海之外何修何飾而致哉! 以純王之心行純王之政爾純王之心純王之政<此疑缺字>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此純王之心也. 使老者得其養幼者得其所此純王之心也. 尙慮其未也. 則又尊國老而躬事之優庶老而時養之風得海流民陶其化孰有怠於親而慢於長者哉! 虞夏商周之盛王由是道也. 人倫以正風俗以厚鰥寡孤獨無不得其養焉後世禮廢法壞敎化不明播棄其老饑寒轉死者往往而是嗚呼! 率是而行而欲王道之成猶却行而求及前抑有甚焉爾今朝廷淸明政敎修擧方欲稽講墜典以風天下明執事欲將明上意故訪諸生以古之道俾講求其說敢不道其所聞以裨一二哉! 蓋古者擇三公之有年德者天子以父事之謂之三老孤卿之有年德者天子以兄事之謂之五更皆一人爾大夫士之以年致仕者亦皆養之於其鄕里之庠序焉所處則有虞氏國老養於上庠庶老養於下庠夏后氏國老養於東序庶老養於西序商人國老養於右學庶老養於左學周人國老養於東膠庶老養於虞庠是也. 所服則深燕縞玄之衣四代所服也. 所食則饗燕食之禮三代之制也. 周人修而兼用之一歲所行之數則禮所謂春饗孤子秋饗耆老與夫釋菜釋奠之禮亦其時乎此古之略也. 若夫潤飾之則在乎時矣. 謹對.

『문집』2-6 第二道 問: 昔者孔子傷時王之無政而作春秋所以褒善貶惡爲後王法也. 自去聖旣遠諸儒異論聖人之法得之者寡至唐陸質學於啖趙號爲達者其存書有纂例微旨義統今之學者莫不觀焉若夫諸儒之所失與陸氏之所得學者必有所取舍也. 試爲條其大要庶以質其是非. 對: 春秋何爲而作哉! 其王道之不行乎孟子有言曰: 春秋天子之事是也. 去聖踰遠諸儒紛紜家執異論人爲殊說互相彈射甚於仇讐開元秘書言春秋者蓋七百餘家矣. 然聖人之法得者至寡至於棄經任傳雜以符緯膠固不通使聖人之心鬱而不顯吁可痛也. 獨唐陸淳得啖先生趙夫子而師之講求其學積三十年始大光瑩絶出於諸家外雖未能盡聖作之蘊然其攘異端開正途功亦大矣. 惜夫其書之粹者在乎集傳而世微其傳矣. 今所存者請槩言其一二亦可以觀其道之所至焉. 春秋之法, 大者在乎侵伐戰取圍入執殺盟會如聘, 禘郊蒸嘗, 歸復入納, 災異賦役焉然諸家之論前矛後盾未見其能一也. 其間書侵者五十七伐者二百一十三書圍者四十四入者二十七聖人之意其詳其備也如是. 豈苟然哉! 蓋誅其禍亂之道耳. 彼豈有是哉! 先儒徒隨事而傳之三傳往往從而美之者有矣. 未有一言發明聖人誅之之心者也. 獨陸君用啖氏之說曰: 春秋紀師何無曲直之辭曰: 一之也. 不一則禍亂之門闢矣. 若夫其差者甚者則在乎其文矣. 此則見聖人絶惡之源原情之法此表裏之論也. 其餘若盟若會其法皆用是也. 禘郊之義, 詭譎殊狀: 左氏之文略而不解公穀之論泥而失眞何杜之流汎汎其間耳. 陸氏之學獨能斥先鄭之失明諸侯之僭謂禘爲王者之祭明郊非周公之志皆足以見其所存之博大得聖師救亂明上下之心也. 餘若書鄭伯之克謂克下之辭明君臣之義異乎所謂如二君與能殺者屑屑之論矣. 書次於郞則言非有俟而次則意將爲賊爾防兵亂之源殊乎所謂過信次止者區區之談矣. 發言侵言伐之例則曰: 無名行師與稱罪致討之異遠乎濶略之言賊害之語矣. 且取邑之條則云力得之不是其專奪異乎不用師徒不宜取之淺矣. 其餘稱將稱師紀名紀氏之類亦皆度越於諸家遠甚. 旨義之衆莫可歷數要其歸以聖人之道公不以已得他見而立異故其所造也. 遠而所得也深. 噫! 聖門之學吾不得而見焉幸得見其幾者矣. 則子厚之願掃其門宜乎對問之下不能詳悉故獻其略. 謹對.

『문집』2-7 第三道 問: 官之有屬猶身之有臂臂之有指也. 自建官以來未有無屬焉者也. 擧今之官則治其小者有屬治其大者無屬外郡縣內群有司此治其小者內公府外刺部此治其大者治其小且有屬治其大乃無屬何其輕重勞佚之不侔哉! 豈因其故常而恬莫之擧歟抑擧之未見其益歟刺部之屬向嘗增之直與其長等爾非所謂屬也. 公府之屬今或存之直他官而已非所謂屬也. 請悉陳前古治大有屬之法可施于今者皆何名何選何職古何以有而今何以無古何以可而今何以不可詳之於說以究當今之便. 對: 竊觀治天下之道如構室焉其大者棟也. 梁也. 棟梁豈能獨立哉! 其所與相助而承上者榱桷也. 置官亦如是矣. 古之三公之府諸侯郡國各有其屬以成其政後世改易不常今則外之一郡一邑內之一官一局各有屬焉至於公府機務之煩外臺刺擧之重則反無之此誠小大重輕之貿焉非必謂無益而莫之爲也. 直因循故常未之更爾. 嚮者漕計之司嘗爲之置副矣. 副則誠亞其長者也. 其下亦嘗創賓從之名者矣. 是亦其屬也. 第旋去之耳. 近世宰相之官兼門下之目則府以其省名矣. 今其屬者乃省官爾非丞相之屬. 策謂前古治大有屬之法可施於今者則周冡宰之職有小宰焉小宰之下皆其屬也. 其餘五官亦各有屬焉然其爵位有尊卑之差矣. 外則牧伯之國今刺擧之任也. 其屬則其臣爾漢之三公府則有長史司直焉東曹西曹之掾焉內則御史外則刺部亦各自用其吏爲掾屬其選之之道則周六官以下其屬皆命於天子牧伯之臣則其卿而下其君選於其國爾漢之三公開府辟召唐之藩鎭亦自薦延其位其職則繫其長之所任而分治之耳. 今公府任其小事者非無也. 直無若三公之孤六卿之丞共其事者爾其治文書掌勞役者備矣. 其職亦幾矣. 苟欲愼其選淸其流而易其官之名則可矣. 若欲夫預聞政事則賢明之佐謨謀於廟堂之上又何細吏之間焉若夫刺擧之屬則在選任之爾. 謹對.

『문집』2-8 第四道 問: 今天下費益廣財益匱食加冗農加困貨愈籠文愈密而旱乾水溢無歲無之又未嘗得淸源端本之術少紓其弊雖有智者或任非其責噤不出一語嗚呼! 忍而視斯民之殘也. 今欲使財無匱農無困文無密以拯斯民之殘敢問何策之爲先何修而後可勿踈勿泛以直所論. 對: 天下大器群生重畜惟君上所制養焉今土地之廣人民之衆較之近代未爲甚盛也. 然近歲費益廣財益匱食加冗農加困貨愈籠文愈密者何也. 殆基本似有所未立法度似有所未擧爾三代之制今不能收功於旦夕也. 試取其切近於體務者言之. 今財之匱食之冗農之困貨愈籠文愈密者弊雖煩而其原一而已其始在費益廣也. 費益廣則取於民者衆實於府者鮮財不得不匱農不得不困矣. 彼食冗者亦費之一端爾費旣廣財旣匱農旣困則貨不得不籠貨之籠則文不得不密矣. 所謂費益廣者不曰: 待哺之兵衆乎戍守之費重乎游食之徒煩乎無用之供厚乎爲今之計兵之衆豈能遽去之哉! 在汰其冗而擇其精兵戈之遺豈能遽絶之哉! 在備於我而圖其後游食之徒煩則在禁其末而驅之農無用之供厚則在絶其源而損其數然其所以制之者, 有其道也. 夫水利之興屯田之制府兵之復義倉之設皆濟時之大利顧縉紳議之熟矣. 惟不以爲舊說之迂而忽之則財以豐食以足貨利可寬文法可損矣. 雖旱乾水溢之變繫乎歲數之常亦吾有備焉爾. 謹對.

『문집』2-9 第五道 問: 子曰: 苟有用我者三年有成何其效之疾歟又曰: 善人爲邦百年亦可以勝殘去殺矣. 何其效之遲歟又曰: 如有王者必世而後仁必世云者較諸善人則己疾合諸聖人則已遲三者之效不能齊一然則聖何道而疾善何術而遲王何務而必世願以前代已然之迹質於此三者. 對: 聖人之道, 無所苟而已矣. 以聖人之才施於天下其易矣. 猶必曰: 三年而有成也. 然方之善人之效則聖人之治其疾也. 遠矣. 仲尼曰: 善人爲邦百年亦可以勝殘去殺矣. 夫善人者所謂不踐迹亦不入於室者也. 旣不循前人之弊而守之又不得聖人之道而行之宜其遠且久也. 有人焉相繼而往則百年而後可至治矣. 所謂王者必世而後仁則蒙謂作禮樂之時爾夫民之情不可暴而使也. 不可猝而化也. 三年而成大法定矣. 漸之仁摩之義浹於肌膚淪於骨髓然後禮樂可得而興也. 蓋禮樂者雖上所以敎民也. 然其原則本於民而成於上爾則聖人之效所以疾善人之效所以遲與! 夫王者之仁其道可見矣. 復請以前代已然之迹而明之孟子曰: 小國七年大國五年可爲政於天下此聖人之效也. 若仲由謂三年使知方伯禽之三年報政雖不能若聖人之道醇且具也. 然亦承聖師之敎奉周公之政其庶乎其次也. 若漢之業創乎高祖因循乎呂惠文帝守之以淳儉孝景紹之以恭黙當時漢之興幾百年矣. 其風俗寬厚幾致措刑亦勝殘去殺之效乎周承文王之業歷武王之治至成王之世而周公作禮樂焉此必世後仁之效乎! 謹對.


宋程顥撰 銘詩

『문집』3-1 顔樂亭銘<爲孔周翰作> 天之生民, 是爲物則非學非師孰覺孰識聖賢之分古難其明有孔之遇有顔之生聖以道化賢以學行萬世心目破昏爲醒周爰闕里惟顔舊止巷汙於榛井堙而圮鄕閭蚩蚩弗視弗履有卓其誰師門之嗣. 追古念今, 有惻其心; 良賈善諭, 發帑以(出?)金. 巷治以闢, 井渫而深; 淸泉澤物佳木成陰載基載落亭曰: 顔樂昔人有心予忖予度千載之上顔惟孔學百世之下顔居孔作盛德彌光風流日長道之無疆古今所常水不忍廢地不忍荒嗚呼! 正學其何可忘!

『문집』3-2 游鄠縣山詩十二首<有序>(游鄠山詩序) 僕自幼時, 已聞秦山多奇占, 有扈者尤復秀出, 常恨遊賞無便. 嘉祐二年, 始應擧得官, 遂請於天官氏, 願主簿書於是邑, 謂厭飫雲山, 以償素志. 今到官幾二年矣. 中間被符移奔走外幹者三居其二其一則簿書期會倉廥出入固無暇息. 惟白雲特在山面最爲近邑常乘間兩至其餘佳處都未得往變化初心辜負泉石五年二月初吉聞貳車晁公來遊諸. 山先是晁公見約同往會探吏失期二日早晁公以書見命始知車騎已留草堂走白邑大夫張君. 時民産有在山麓者, 以罪沒官, 府符方命量其租入之數因請以往鞭馬至山而晁公已由高觀登紫閣還憩下院見待已久遂奉陪西遊經李氏五花莊息駕池上夜宿白雲精舍詰旦晁公西首僕復傍山東遊紫閣登南山望仙掌回抵高觀谷探石穴窺石潭因周視所定田徜徉於花林水竹間夜止草堂是晩雨氣自西山來始慮不得徧詣諸境一霎遂霽明旦入太平谷憩息於重雲下院自, 入太平谷, 山水益奇絶殆非人境石道甚巇下視可悸往往步亂石間入長嘯洞過虎溪西南下至重雲閣訪鳳池觀雲頂凌霄羅漢三峰登東嶺望大頂積雪後東北來雲際下深澗白石磷磷於水間水聲淸冷可愛坐石掬水戀戀不能去者久之遂宿大定寺. 凌晨, 登上方, 候日初上, 西望藥山北眺大頂千峰萬巒目極無際下山緣東澗渡橫橋復憩於重雲下院出谷遊太平宮故基而歸馬上率爾口語往往成詩章自入山至歸凡四日得長短詠共十二篇姑存之以誌遊覽之次第云.

『문집』3-3 白雲道中 吏身拘絆同疏屬俗眼塵昏甚瞽矇辜負終南好泉石一年一度到山中.

『문집』3-4 馬上偶成 身勞無補公家事心冗空令學業衰世路嶮巇功業遠未能歸去不男兒.

『문집』3-5 遊紫閣山 仙掌遠相招, 縈紆渡石橋, 瞑雲生澗底寒雨下山腰樹色千層亂天形一罅遙吏紛難久駐, 回首羡漁樵.

『문집』3-6 獼猴 <山僧云: 晏元獻公來獼猴滿山> 聞說獼猴性頗靈相車來便滿山迎鞭羸到此何曾見始覺毛蟲更世情

『문집』3-7 高觀谷 轟雷疊鼓響前峰來自彤雲翠藹中. 洞壑積陰成氣象, 鬼神憑暗弄威風. 噴崖雨露千尋濕落石珠璣萬顆紅縱有虯龍難駐足還應不是旱時功

『문집』3-8 草堂 <寺在竹林之心其竹蓋將十頃> 參差臺殿綠雲中四面篔簹一徑通曾讀華陽眞誥上神仙居在碧琳宮

『문집』3-9 長嘯巖中得冰以石敲餐甚佳 車倦人煩渴思長, 巖中冰片玉成方. 老仙笑我塵勞久乞與雲膏洗俗腸.

『문집』3-10 游重雲 久厭塵籠萬慮昏喜尋泉石暫淸神. 目勞足倦深山裏猶勝低眉對俗人.

『문집』3-11 長嘯洞北回望大頂如列屛幛比到山前却不見蓋爲仙掌所蔽. 行盡重雲幾曲山回頭方見碧峰寒天將仙掌都遮斷元恐塵中俗眼看.

『문집』3-12 凌霄三峰 長嘯巖東古寺前三峰相倚勢相連. 偶逢雲靜得見日若有路通須近天陰吹響雷生谷底老松如箸見崖顚. 結根不得居平地猶與蓮花遠比肩.

『문집』3-13 雲際山 南藥東邊白閣西登臨身共白雲齊上方頂上朝來望陡覺群峰四面低.

『문집』3-14 下山偶成 襟裾三日絶塵埃, 欲上籃輿首重迴. 不是吾儒本經濟等閒爭肯出山來?

『문집』3-15 是遊也. 得小松黃楊各四本植於公署之西窗, 戲作五絶, 呈邑令張寺丞<興宗> 中春時節百花明, 何必繁絃列管聲. 借問近郊行樂地, 潢溪山水照人淸. 心閒不爲管絃樂道勝豈因名利榮? 莫謂冗官難自適暇時還得肆游行. 功名不是關心事富貴由來自有天. 任是榷酤虧課利不過抽得俸中錢. 有生得遇唐虞聖爲政仍逢守令賢縱得無能閒主簿嬉遊不負艶陽天. 獄訟已聞寃滯雪田農還喜土膏勻只應野叟猶相笑不與溪山作主人.

『문집』3-16 偶成<時作鄠縣主簿> 雲淡風輕近午天望花隨柳過前川旁人不識予心樂, 將謂偸閒學少年.

『문집』3-17 郊行卽事 芳原綠野恣行時春入遙山碧四圍. 興逐亂紅穿柳巷困臨流水坐苔磯. 莫辭盞酒十分醉秪恐風花一片飛况是淸明好天氣不妨游衍莫忘歸.

『문집』3-18 下白徑嶺先寄孔周翰郞中 驟經微雨過芳郊, 轉覺長河氣象豪. 歸騎已登吳坂峻飛雲猶認華山高門前岐路通西國城上樓臺壓巨濤欲問甘棠舊風化, 主人邀客醉香(春?)醪.

『문집』3-19 春日江上 新蒲嫩柳滿汀洲春入漁舟一棹浮雲幕倒遮天外日風帘輕颺竹間樓望窮遠岫微茫見興逐歸槎汗漫游不畏蛟螭起波浪却憐淸泚向東流.

『문집』3-20 題淮南寺 南去北來休便休白蘋吹盡楚江秋道人不是悲秋客一任晩山相對愁.

『문집』3-21 桃花菊 仙人紺髮粉紅腮近自武陵源上來<此花近歲方有>不比常花羞晩發故將春色待秋開存留金蘂天偏與漏泄春香衆始猜兼得佳名共堅節曉霜還獨對樓臺.

『문집』3-22 早寒 一夜威霜特地嚴朝來寒氣入書簾乍須火暖親爐獸初覺冰澌結硯蟾敗葉卷風輕蔌蔌遠峰經曉靜尖尖出門未要貂狐燠且著輕裘次第添.

『문집』3-23 新晴野步. 靑帝方成萬物春如何滛雨害芳晨乞求共指雲間日悔恨輕嫌陌上塵消盡風威猶料峭放開山色已嶙峋燕遊莫道王孫樂亦有羲皇更上人. 陰曀消除六幕寬嬉遊何事我心閒鳥聲人意融和候草色花芳杳藹間水底斷霞光出岸雲頭斜日影銜山緣情若論詩家興却恐騷人合厚顔

『문집』3-24 中秋月 雲靜好風吹(微?), 淸光溢四垂金行方盛日陰魄正中時髣髴窺瑤闕分明露桂枝遴英同醉賞誰復歎官羈?

『문집』3-25 盆荷二首 庭下竹靑靑<一作圓>盆荷水面平誰言無遠趣自覺有餘淸影倒假山翠波光朝日明漣漪尤綠淨凉吹夜來生. 衡茅岑寂掩柴關庭下蕭疎竹數竿狹地難容大池沼淺盆聊作小波瀾澄澄皓月供宵影瑟瑟凉風助曉寒不校蹄涔與滄海未知淸興有誰安?

『문집』3-26 象戲 大都博奕皆戲劇象戲翻能學用兵. 車馬尙存周戰法偏裨兼備漢官名中權八面將軍重河外尖斜步卒輕却凭紋楸聊自笑, 雄如劉項亦閒爭.

『문집』3-27 九日訪張子直承出看花戲書學舍五首 平日(昔?)邀相見過門又不逄貪隨看花伴應笑我龍鍾. 須知春色醲於酒醉得遊人意自狂直使華顚老公子看花爭入少年場. 貪花自是少年事 沈酒定嫌醒者非顧我疎慵老山野却騎歸馬背斜暉. 下馬問老僕言公賞花去只在近園中業深不知處. 桃李飄零杏子靑滿城車馬響春霆就中得意張公子十日花前醉不醒.

『문집』3-28 戲題 曾是去年賞春日春光過了又逡巡却是去年春自去我心依舊去年春.

『문집』3-29 贈王求甫鐵如意 妖言莫信傳張惡虛氣休將碎唾壺借問閒窗靜狐背何如爭勝擊珊瑚?

『문집』3-30 和家君早寒之什 滿地淸霜結曉寒, 平明飛霰洒柴關. 乍憑酒力溫肌骨, 陡覺風威著面顔. 閭里相呼泥北戶, 牛羊收牧下前山. 急須趂日藏薪炭, 凍後高枝不易攀.

『문집』3-31 和詠草 漸覺東皇意思勻陳根初動夜來新忽驚平地有輕綠已蓋六街無舊塵莫爲枯榮吟野草<恐當作火>且憐愁醉柅<舊作枕>香輪詩人空怨王孫遠極目萋萋又一春

『문집』3-32 和邵堯夫打乖吟二首 打乖非是要安身道大方能混世塵. 陋巷一生顔氏樂淸風千古伯夷貧. 客求墨妙多攜卷天爲詩豪剩借春儘把笑談親俗子德容猶足慰鄕人. 聖賢事業本經綸肯爲巢由繼後塵? 三幣未回伊尹志萬鍾難換子輿貧. 且因經世藏千古已占西軒度十春. 時止時行皆有命先生不是打乖人.

『문집』3-33 和堯夫首尾吟 先生非是愛吟詩爲要形容至樂時醉裏乾坤都寓物閒來風月更輸誰死生有命人何與消長隨時我不悲直到希夷無事處先生非是愛吟詩.

『문집』3-34 和堯夫西街之什二首 先生相與賞西街小子親攜几杖來行次每容參劇論坐隅還許侍餘盃檻前流水心同樂林外靑山眼重開時泰身閒難兩得直須乘興數追陪. 先生高蹈隱西街風月猶牽賦詠才暫到隣家賞池舘便將佳句寫瓊瑰壯圖已讓心先快劇韻仍降字占挼只有一條誇大甚水邊曾未兩三盃

『문집』3-35 遊月陂 月陂堤上四徘徊北有中天百尺臺萬物已隨秋氣改一鐏聊爲晩凉開水心雲影閒相照林下泉聲靜自來世事無端何足計但逢佳日約重陪.

『문집』3-36 秋日偶成二首 寥寥天氣已高秋更倚凌虛百尺樓世上利名群蠛蠓古來興廢幾浮漚退居陋巷顔回樂不見長安李白愁兩事到頭須有得我心處處自優游. 閒來無事不從容睡覺東窗日已紅萬物靜觀皆自得四時佳興與人同道通天地有形外思入風雲變態中富貴不滛貧賤樂男兒到此是豪雄.

『문집』3-37 代少卿和王宣徽遊崇福宮 睿祖開眞宇祥光下紫微威容凝粹穆仙仗儼周圍嗣聖嚴追奉神遊遂此歸. 冕旒臨秘殿天日照西畿朱鳳銜星蓋淸童護玉衣鶴笙鳴遠吹珠蘂弄晴暉瑤草春常在瓊霜曉未晞. 木文靈像出太一醴泉飛. 醮夕思飆馭, 香晨望絳闈. 衰遲愧宮職蕭洒自忘機.

和王安之五首

『문집』3-38 小園 閒坊西曲奉常家景物天然占一窳恰似庾園基址小全勝浥澗路途賖知君陋巷心猶樂比我僑居事已誇. 且喜杖藜相過易隔牆無用少游車. <白樂天有詩戲盧中丞浥澗山居去城之遠>

『문집』3-39 野軒 誰憐大第多奇景自愛貧家有古風會向紅塵生野思始知泉石在胸中.

『문집』3-40 汙亭 强潔猶來眞有爲好高安得是無心汙亭妙旨君須會物我何爭事莫侵

『문집』3-41 藥軒 囊中數味應千種砌下栽苖過百名好是微風入庭戶淸香交送滿檐楹.

『문집』3-42 晩暉亭 亭下花光春正好亭頭山色晩尤佳欲知剩占淸<一作春>風處思順街東第一家

『문집』3-43 和花菴 得意卽爲適種花非貴多一區才丈席滿目自雲蘿靜聽禽聲樂閒招月色過期公在康濟終柰此情何!

『문집』3-44 子直示以新詩一軸偶爲四韻奉謝 治劇君能佚居閒我更慵自惟降藻麗不解斷舂容寡和知高唱深情見古風靜吟梁甫意眞似臥隆中.

『문집』3-45 和諸公梅臺 急須乘興賞春英莫待空枝謾寄聲淑景暖風前日事淡雲微雨此時情.

『문집』3-46 後一日再和 常勸嬉遊須及辰莫辭巾屨染埃塵秪應風雨梅臺上已減前時一半春.

『문집』3-47 送呂晦叔赴河陽 曉日都門颭旆旌晩風鐃吹入三城知公再爲蒼生起不是尋常刺史行.

『문집』3-48 贈司馬君實 二龍閒臥洛波淸今日都門獨餞行. 願得賢人均出處始知深意在蒼生.

『문집』3-49 哭張子厚先生 歎息斯文約共修如何夫子便長休山東無復蒼生望西土誰共後學求千古聲名聯棣萼二年零落去山丘寢門慟哭知何限豈獨交親念舊游?

『문집』3-50 陪陸子履遊白石萬固 條山蒼蒼河流黃中蒲形勢天下彊. 帝得賢侯殿一方四年不更慰民望. 元豐戊午季春月上心閔雨愁黎蒼. 使車四出走群望我亦奉命來侯(陜?)疆. 情誠感格天意順詔書才下雨已雱病麥還靑禾出土野農鼓舞歌君王. 故人相見不道舊爲雨歡喜殊未央聖主寬憂小臣樂自可放蕩舒胸腸白石萬固皆勝地主人爲我攜壺觴. 况逢佳日俗所尙車馬未曉塡康莊扶提十里雜老幼迤邐千騎明戈槍初聽鳴鐃入靑靄漸見朱旆輝朝陽. 遨頭自是謝康樂, 後乘獨慚元漫郞侯來雖知有賓客衆喜更爲將豐穰臨溪坐石遍巖谷幽處往往聞絲簧山光似迎好客動日景定爲遊人長乘高望遠興不盡戀戀不知歧路忙人生汨沒苦百態得此樂事眞難常我辭佳境已惆悵侯亦那得久此鄕他時會合重相語辜負泉石何能忘?

『문집』3-51 陳公廙園修禊事席上賦 盛集蘭亭舊風流洛社今坐中無俗客水曲有淸音香篆來還去花枝泛復沈未須愁日暮天際是輕陰.

『문집』3-52 春雪 二月將臨尾群陰久退潛. 只知桃李艶何復雪霜嫌? 密霰仍先集飄霙忽散霑. 帶風成料峭, 和雨作廉纖. 江漢初彌望珠璣亦間兼. 片痕才著瓦斜勢漸穿簾. 鳥化遼城鶴途鋪越女(糸+兼). 落英時鬪舞飛絮或同黏. 直把瓊瑤比誰疑鵠鷺撏透肌錐共利洒面刃爭銛. 寒怯開闈賞光凝伴月覘價增樵市炭興入酒家帘. 駐足銀粧履昻頭玉裹髥如何欺煦律重復困窮閻? 薪乏經朝備衣因恃暖拈. 擷芳游女恨憂歲老農占. 惜竹頻敲葉愁花旋覆苫. 失權悲太皥助虐有飛廉. 驟降初疑勇旋消亦訝謙. 朔雲雖借便水后可無厭. 縱任陰靈巧, 難令木氣殲. 寒威徒自奮春氣亦時添積勢方平壟澌流已墜簷暗空猶沓沓近地卽佔佔遠水難遮面高峰不裹尖著墻聊畫粉蓋地豈成鹽? 紈扇驚塵曀崑崗認火炎. 端來薦融釋空復助洳漸積潤終滋嫩驚雷亦震淹. 東君莫惆悵杲日待重瞻.

『문집』3-53 晩春 人生百年永光景我逾半. 中間幾悲歡况復多聚散. 靑陽變晩春弱條成老榦不爲時節驚把酒欲誰勸?

『문집』3-54 西湖 潩水橋邊鴨子陂, 樓臺只在郡城西煙波乍見心先快島嶼將尋路欲迷盡日無風橫舴艋有時經雨飮虹霓如何咫尺塵埃地能使遊人意不齊?

『문집』3-55 環翠亭 城居不見萬山重因起高 亭破遠空虛曠直疑天宇外周旋如在畫屛中凝嵐散藹層層出削玉排靑面面同暫得登臨已忘去四時佳致屬賢公.

『문집』3-56 酬韓持國資政湖上獨酌見贈 對花酌酒公能樂飯糗羹藜我自貧. 若語至誠無內外却應分別更迷眞. <韓詩云曲肱飮水程夫子宴坐焚香范使君愧我未能忘外樂緣尊紅芰對西曛>


宋程顥撰 墓誌銘

『문집』4-1 故戶部侍郞致仕彭公行狀 公諱思永字季長其先京兆人唐之中世有爲吉州刺史者因家焉今爲廬陵人尙書治經術以能詩名於世慷慨有大節仕不得志未老以東宮官退居臨湘公其次子也. 公性淳粹明重材質瑰秀孩提時卽異於常兒未嘗爲戱弄之事數歲已自知爲學尙書每撫其背曰: 興吾家者必是兒也. 未冠居尙書喪以孝聞家貧無以葬晝夜號泣營治歲終卒能襄事扶喪數千里歸廬陵知者無不咨歎終喪益自奮勵力學有文稱. 天聖五年擧進士擢第授南康軍判官計臣言其材遂監泰州角斜鹽場當路益知其賢交薦之秩滿遷大理寺丞監洪州鹽務移知廣州南海縣以母喪去職服除知洪州分寧縣二邑素號難治前令比以罪去民化公之誠相戒以毋犯法至於無訟. 旣又通判睦州會海水大上夜敗台州城郡人多死詔監司擇良吏往撫之公遂行將至吏民皆號訴於道公悉心救養不憚勞苦至忘寢食盡葬溺死者爲文以祭之問疾苦賑饑乏去盜賊撫羸弱其始至也. 城無完舍公周行相視爲之規畫朝夕暴露未嘗憩息民貧不能營葺者命工伐木以助之數月而公私之舍畢復人安其居公視故城庳壞僅有髣髴思爲遠圖召僚屬而謂之曰: “郡瀕海而無城此水所以爲害也. 當與諸君圖之.” 程役勸功民忘其勞城成遂爲永利天子嘉之錫書獎異後去台還睦二州之民喜躍啼戀者交於道. 未幾, 就移知潮州潮民歲苦修堤之役吏緣爲奸貧者尤被其害. 公爲之法, 役均而費省, 民大悅. 代還, 知常州時爲都官員外郞尋召爲侍御史極論內降授官賞之弊以謂斜封非公朝之事仁宗深然之. 皇祐祀明堂前一曰: 有傳赦語百官皆得遷秩者公方從駕宿景靈宮亟上言不宜濫恩以益僥倖. 旣肆赦果然. 時張堯佐以妃族進王守忠以親侍帷幄被寵參知政事闕員堯佐朝暮待命守忠亦求爲節度使物議讙動公帥同列言之皆曰: 宜待命行公曰: 宜以先事得罪命出而不可救則爲朝廷失矣. 遂獨抗疏極言, 至曰: 陛下行此覃恩無意孤寒獨爲堯佐守忠故取悅衆人耳. 且言妃族秉政內臣用事皆非國家之福疏入仁宗震怒人皆爲公危之. 公曰: 苟二人之命不行雖赴鼎鑊無恨於是御史中丞郭勸諫官吳奎皆爲上言其忠當蒙聽納不宜加罪. 仁宗怒解而堯佐守忠之望遂格. 公猶以汎恩罷臺職以司封員外郞出守宣州. 前守以贓敗郡政隳弛歲復大歉公至修紀綱撫凋瘵奏發官庾以活饑莩卒無流亡. 體量安撫使上公治狀, 爲諸將<一作州>之最. 儂智高連陷州郡, 嶺表用兵餉饋仰於荊湖除北路轉運使至部奏黜守令之殘暴疲懦者各一人而八州知勸丁溪蠻酋彭仕羲恃險而驕將帥群蠻爲亂先移文罵辰州守將將不能制請公誅之公行部至辰仕羲畏公卽遣親信持書迎謁禮甚謹公推誠待之諭以禍福皆悚懼感服請自悛革邊患遂息. 時大農以利誘諸路使, 以羡餘爲獻. 公曰: “裒民取賞, 吾不忍爲.” 遂無所獻. 南寇平, 公以勞進工部郞中, 召爲度支判官升刑部歲餘出爲益州路轉運使始直史館賜三品服入辭仁宗諭之曰: 益部遠方以卿安撫吾無憂矣. 至蜀會城都闕守詔公權領府事前政多務姑息寖失法度至有吏盜官錢千緡付獄已三歲猶縱其出入自若者公命窮治之一曰: 而獄具蜀人以交子貿易皆藏於腰間盜善以小刃取之於稠人中如己物民病苦之. 公得其狀, 卽捕獲一人使疏其黨類得十餘輩, 悉黥隸諸軍, 盜者遂絶二罪而人知畏法蜀乃大治. 歲有中貴人祠峨嵋常留成都中數十日誅取珍貨奇玩例至數百萬錢一出於民間. 公命三省其二使者恨怒而去公不之顧任中遷兵部郞中召還爲戶部副使. 歲餘以天章閣待制充陜西都轉運使河朔謀帥以公鎭高陽仍進秩諫議大夫英宗嗣位恩升給事中. 時狃於承平治兵者鮮明紀律而三關爲甚. 公爲帥方重嚴正犯者頗以軍法從事, 驕兵大戢. 河北舊以桑麻爲産籍之高下民懼不敢藝植故益貧公奏更其法自是絲績之利歲歲增益. 在鎭二年邊圉帖寧, 人民浹和. 公惡邊臣之邀功啓事者屢加裁正遂與大臣持議不合由是以病請解兵任求爲江南官徙知江寧府潮與江寧舊多火災迄公去未嘗作人以爲德政之感. 留金陵歲餘, 復召權御史中丞. 時追崇濮王大號復有稱親之議諫官御史以典禮未正相繼論列者六七人皆以罪去公始拜中司力陳其不可, 且請召還言事者. 上未之察更爲疏極論其事言益切至英宗深加聽納事幾施行而大臣持之甚力故不果公因求解憲職以章言者五進見而面陳者多至不記會英宗不豫公方憂懼不復自言. 今天子踐阼, 眞拜御史中丞, 請裁損出入用度, 務從儉約以稱先志上嘉納之會御史蔣之奇奏發大臣陰事, 其說蓋盛於都下, 而之奇欲扳公爲助, 乃曰: 公嘗言之公亦謂帷箔之私, 非外人所知, 誠難究詰, 然亦有以取之, 故謗言一興而人以爲信且其首爲濮園議違典禮以犯衆怒不宜更在政府而執政以之奇所論, 冥昧不可質, 迫公言其所從來. 三問而公奏益急, 且曰: 風聞者以廣聰明也. 今必問其所從來因而罪之則後無聞矣. 寧甘重謫不敢廢國家開言路之法因極陳大臣朋黨專恣非朝廷計翌日降授給事中知黃州道徙太平州郊祀推恩復工部侍郞知毫州未滿歲移揚州熙寧三年上書告老遷戶部侍郞致仕朝廷憐之故詔辭甚美所以寵耀其終始焉. 公晩樂歷陽風土遂徙居之將歸十一月過金陵二十六日以疾終享年七十有一金陵之人奔走供事往來哭於道路其得人心如此公任官四十五年累階至某勳某爵某食邑若干. 公精愼長於政事遇繁劇他人若不可堪而公處之裕然故世稱有大體精吏治者必歸之公其事業磊落見於時者爲不少矣. 然其德性之美心術之醇世尤尊之蓋資禀有過於人者也. 故其仁厚誠恕出於自然. 年八九歲時, 尙書爲岳州從事公晨起將就學舍得金釵於門外公黙坐其處以伺訪者有一吏徘徊久之問故果墜釵者也. 公詰其狀驗之信則出付之吏謝以數百金公笑不受曰: 我若欲之取釵不過於數百金邪吏歎駭而去. 始就擧時貧無餘貲惟持金釧數隻棲於旅舍同擧者過之衆請出釧爲翫客有墜其一於袖間者公視之不言衆莫知也. 皆驚求之公曰: 數止此耳. 非有失也. 將去袖釧者揖而擧手釧墜於地衆服公之量. 撫宗族有恩意外甥孤女收視之如已子爲擇善士而嫁之守常一不妄遷習與朋友交盡信義始卒無移改廉潔純儉本之天性居母喪貧甚鄕人爭饋之皆謝去風俗爲之化後居顯仕自奉養不改其素平生無聲色奇巧之翫其氣宇高爽議論淸澹而端莊恭謹動必由禮未嘗有惰慢之色戲侮之言見者皆知畏重然襟度夷曠, 不可澄撓, 與人處雖終歲莫見其喜怒之變遇事明白不事襮飾接人無貴賤高下一以忠信動無疑忌卽之溫然有大雅之德. 爲政本仁惠, 吏民愛之如父母惟不喜矯情悅衆揚已取譽常曰: 牢籠之事吾所不爲居憲府多所論奏未嘗以語人. 或疵其少言惟謝之終不自辨每謂人曰: 吾不爲他學但幼卽學平心以待物耳. 又嘗敎其子弟曰: 吾數歲時冬處被中則知思天下之寒者矣. 蓋源流如此宜其仁恕之善見於天下自朝廷至於士人推其誠長者. 至其持守剛勁, 不可毫髮遷奪, 喜善嫉惡, 勇於斷決, 不爲勢利誘, 不以威武移. 潮州州宅舊傳多怪前後守臣無寧處者公迄去未嘗問其有無其達理守正若此凜乎其丈夫也. 故歷事三朝人主信之. 公娶晏氏, 故相元憲公之姪而刑部侍郞諱容之子也. 封延安郡君有賢行爲宗黨所尊二男長曰: 衛前趙州軍事判官孝謹和厚以親老不忍去左右解官歸侍者十年矣. 次曰: 衍俊敏有高才方擧進士而卒五女子長適知鄂州嘉魚縣胡從次適宜春李伯英次卽顥之室又次適太常博士田祐次適著作佐郞齊域而歸李氏齊氏者皆早世. 孫四人: 曰: 該曰: 諮並試將作監主簿詢訢尙幼. 孫女五人俱未嫁. 公終之明年嗣子將以某月某日奉公之喪, 葬於和州歷陽縣某鄕某里某地. 前期得公之官次行事於其家若公之道德則顥所親炙而知者, 謹加編錄, 請求誌於盛德君子, 以圖不朽. 謹狀.

『문집』4-2 程邵公墓誌 邵公, 廣平程顥之次子也, 生於治平始元仲秋之四日, 死於熙寧首祀仲夏之十四日越三日藏<一作葬>之於伊陽縣神陰鄕祖塋之東邵公其幼名也. 端慤其名也. 生而有奇質未滿歲而溫粹端重之態完然可愛聰明日發而方厚淳美之氣益備其始言也. 或授之以詩率未三四過卽已成誦矣. 久亦不復忘去雖警悟俊穎若照徹內外而出之從容故敏於見知而安於言動坐立必莊謹不妄瞻視, 未嘗有戲慢之色. 孝友信讓之性蓋出於自然與人言則溫然及其有所不爲則確乎其守也. 大凡其心有所許後雖以百事誘迫終不復移矣. 日視群兒相與狎弄歡笑跳梁於前泊乎如不聞知雖有喜相侵暴者亦莫之敢侮蓋厥生五年而人不見其有喜怒好欲是豈特異於常兒哉! 皆老於學者之所難能也. 而吾兒之資乃成於生之初嗚呼! 使其降年之永則吾不知其所至也. 吾弟頤亦以斯文爲己任嘗意是兒當世吾兄弟之學今則已矣. 則吾之慟亦不特以父子之親也. 夫動靜者陰陽之本况五氣交運則益參差不齊矣. 賦生之類宜其雜揉者衆而精一者間或値焉以其間値之難則其數或不能長亦宜矣. 吾兒其得氣之精一而數之局者歟天理然矣. 吾何言哉! 以其葬日之迫刋刻之不暇也. 惟砂書於磚以誌其壙.

『문집』4-3 程殿丞墓誌銘 程氏居永寧之博野土風渾厚世以忠廉孝謹聞少師貴重於朝始賜第京師爲開封人世風不衰子孫多好善而吾叔父可謂能守其家法者矣. 叔諱瑜字叔寶: 少師諱羽淸河太君張氏襄陵太君賈氏之曾孫尙書虞部員外郞諱希振高密縣君崔氏之孫, 贈大理寺丞諱道天水趙氏長壽縣大君任氏之子. 少以族兄廣平文簡公廕試將作監主簿未冠爲荊南監利尉卽以幹敏稱再調永州零陵簿益以才著時谿蠻嘯動焚劫縣邑道州寧遠最當賊衝部使者命公攝令事至止之日邑無城壁府無兵械公經營創治夜以繼日完集未幾蠻寇大至設長圍以逼城公激勵士卒躬冒矢石捍守累日以奇兵由水中旁出賊後合戰甚苦賊乃敗去旣而同守者皆論功丐賞公曰: 城守吾事也. 城獲完足矣. 尙當以爲利乎卒不自言. 代還得爲汝州龍興令計省言其材遂監解州鹽池歲課羡溢改大理寺丞簽書磁州判官公事太守武人不知爲政公從容開贊一郡大治事雖出公而人莫窺其跡謙晦不伐率皆此類以年勞升太子贊善大夫賜五品服就移知邛州依政縣時長壽太君春秋高公懼有遠行之勞卽上書願就監臨以便奉養改舒州皖口監轄乃以考課遷殿中丞還朝知濮州雷澤縣未行暴疾終於京師實嘉祐七年三月十八日也. 公姿儀偉秀風度平雅端莊謹厚不妄言笑進退動止皆有法度衣冠整理望之肅然三歲而孤長壽太君敎養嚴至恂恂奉事恪恭朝夕未嘗少懈善與人交久而益篤嗚呼! 行足以勵俗才足以有爲不幸短命未究所施歿之年方四十三矣. 公娶張氏封福昌縣君和慈孝睦族人推其賢三子曰: 預以疾廢曰: 顗曰: 顓皆爲儒學三女長適前常州軍事推官王師古仲適襄陵賈芮季適汝南周純明. 熙寧二年八月丙申公之從兄司農葬公於河南府伊陽縣神陰鄕先塋之次顥以父命得預役事又掇公之官世行業而爲之誌旣又繫之以銘曰: 謹於奉親勤於事君端於立身無愧乎古人山可夷谷可堙斯言不泯.

『문집』4-4 李寺丞墓誌銘 予友李君仲通諱敏之世居北燕高祖避亂南徙今爲濮人丞相文定公迪乃其世父也. 曾祖令珣祖護皆以丞相故贈太師尙書令考遜用子貴贈吏部尙書. 仲通生而有賢資端厚仁恕見於孩提之時擧動齊整不妄言笑燕居終日汨然而無情容望之者皆知其君子人矣. 與人言無隱情惟聞人之過則未嘗復出於口安靖寡欲居貧守約裕如也. 好古力學博觀群書尤精於春秋詩易其後所得殊爲高深方勇勵自進不幸短命惜夫未見其止也. 死之年纔三十矣. 仲通之德蓋完於天成孝友之性尤爲絶異侍太夫人疾衣不解帶者累月及居喪哀毁過甚中外數百口上愛下信人無間言群從聚居臧獲使令者衆雖馭之過嚴不能使之無犯惟偶爲仲通所責則其人必慚悵累日痛自飭勵及仲通之亡濮之人無賢不肖皆失聲痛惜或爲隕涕非至誠及物, 其能有是乎? 仲通外甚和易遇物如恐傷之雖家人未始見其喜怒. 及其出辭氣, 當事爲則莊厲果斷, 不可以非義回屈. 始用蔭補郊社齋郞, 調虔州瑞金縣主簿. 會劇賊戴小八攻害數邑, 朝廷患之命御史督視仲通時承尉乏與其令謀曰: 劉右鶻石門羅姓者皆健賊招捕之累年矣. 小八不能連二盜以自張吾知其無能爲也. 當說使自効則賊爲不足破矣. 乃遣人諭二盜皆曰: 我服李君仁信久矣. 願爲之死然召我亦有以爲信乎仲通卽以其符誥與之且約曰: 某日當以甲二百來見我於邑中衆皆恐懼仲通曰: 彼欲爲惡雖不召將至且吾信於邑人彼亦吾人也. 何憚乎乃將二盜與之周旋卒得其死力遂斬小八盡平其黨朝廷嘉之遷衛尉寺丞仍升一任御史用間者言將誅劉羅二黨. 仲通以爲失信不義抗論甚力久始見從仲通又自言於朝請因其立功, 縻以冗職, 可絶後患書奏不報其羅姓者果復爲害. 仲通宰江寧之上元有古循吏之風. 邑之舊田稅不均, 貧弱受其弊, 仲通爲法以平之豪猾惡其害己共爲謗語借勢於上官以搖其事人皆爲仲通危仲通堅處不變未滿歲而所均者萬七<一作二>千室事業雖百未一施槩是二節則高明之見剛勇之氣發於事者亦可知已. 嗚呼! 人非有古今之殊特患夫忽近而慕遠耳. 如吾仲通之材之美古獨可以多乎哉! 向若天假之年成就其所學自當無媿於古人況使得與古之人並而親炙於聖人之時乎則吾知其果不後曾閔之列矣. 仲通以治平三年五月終於家熙寧七年二月庚寅葬於濮州鄄城縣遺直鄕之先塋夫人王氏附焉夫人太子中舍杲之女賢慧靖淑雅有法度及寡居益自晦重素衣一食以終身焉蓋後仲通六年而亡仲通嘗生二女皆天卒無子以兄之子孝和爲嗣. 仲通平生相知之深者莫如予故將葬其家以誌文來屬其可辭乎銘曰: 二氣交運兮五行順施剛柔雜揉兮美惡不齊禀生之類兮偏駮其宜有鍾粹美<一作純粹>兮會元之期. 聖雖可學<一作學作>兮, 所貴者資便儇皎厲兮去道遠而展矣. 仲通兮賦材特奇進復甚勇兮其造可知德何完兮命何虧秀而不實聖所悲孰能使我無愧辭後欲有考觀銘詩.

『문집』4-5 程郞中墓誌 公諱璠字仲韞姓程氏世居中山之博野宋興先少師以勳德顯重賜第京師始爲開封人少師諱羽其媲曰: 淸河太君張氏襄陵太君賈氏是生虞部府君諱希振娶博陵崔氏封高密縣君是生尙書府君諱遹公卽尙書之仲子母曰: 孝感太君長安太君皆張氏. 公生數歲而孤敎養於伯兄十六以族兄廣平文簡公廕試將作監主簿始冠爲常州戶曹掾時朝廷遣使安撫二浙表言公才就除明州司法力抗暴守數活疑獄. 當途者交薦之遂改京官知壽州安豐邑富多彊猾小民困於侵漁爲令者常苦其難制公至未幾皆歛手莫敢犯盜賊亦越逸他境增治芍陂以廣灌漑人賴其賜道路謠頌聞於京師大豪陳順謀去其母紿之醉宿旁舍因誣以爲嫁使其黨證之公察其情卽命捕置果已亡去權至能使監司移其獄公拒弗與根索益急順乃持金謂審官吏謀去公以緩其事吏卽爲謾奏移公興元府西縣公具得行賂狀人或勸公辨之朝公曰: 吾豈與吏辨者乎? 曹吏以謬誤自陳得改洪州之豐城江水嘗環城人大饑邑豪吳氏以貲得官藏粟閉糴公召諭之不從謂曰: 民餓且死令亦不敢自保祿位當杖爾以取之吳氏大懼哀祈請命於是富人爭出粟民用以濟. 以謀葬其先世求知河南伊闕縣秩滿簽書河東節度判官公事丁長安太君憂服除知永安縣兼陵臺令奉陵寢皆中貴人前令多務姑息往往侵暴邑人公待之有方皆歛戢就法度內韓贄守洛醜公正直誣以非罪洛人不直其事讙聞道路而公卒不自辨還朝通判和州. 先是, 蔡州妖尼惠普以左道惑衆數年之間四方響動奔走奉事惟恐不至其後奸跡暴露有司猶暴其罪但坐杖皆羈置歷陽時朝廷當有赦惠普卽詐疾以俟卒得免杖人皆神之謂果不可得而刑也. 居和未久崇奉者稍稍自遠而至郡守禮之甚謹公始戾止會守以謫去權領郡事. 一日捽至庭下, 布獄械於前使具道所以罔人之狀. 故其奸謀詭說, 皆掀揭呈露, 乃正其罪而刑之. 有識之士以謂微公之斷不能解天下之惑. 有李洞元者爲神怪之說妄言受知昭陵嘗以金字書賜之江淮之間從者如市公亦按置於法由是遠近悚服. 復通判隰州. 歲大饑力爲賑助所存活者甚衆. 熙寧乙卯夏四月代還甲申以疾終於河南享年五十七. 公資質瑰壯明辨剛決接人誠厚動有恩意輕材好義中懷豁如材長於治民嚴而有愛敏而不苛區繁剸劇常有餘裕其所斷獄人自以爲不寃故前所涖去久而人思之識用高爽有大過人者凡是山川土田人物名氏目所一見耳. 所暫聞閱年雖多不復忘廢豐城大邑公爲之三年識其民且半其餘政事條理從可知矣. 官自衛尉丞, 九遷爲比部郞中, 以年勞賜五品服. 始娶倪氏, 事姑不謹公以義罷遣繼以曹氏魏襄悼公利用之孫封仁壽縣君. 二子: 曰顧, 曰(舌+頁), 皆太廟齋郞四女長適國子博士張昭立次早亡其二未嫁. 公平生不惑流俗邪妄之說常曰: 吾死愼勿爲浮屠事及用陰陽拘忌之術公歿家人奉以從事熙寧十年仲秋丙申公兄司農葬公河南府伊陽縣神陰鄕祔於先塋且命顥論公之官世材行以誌其墓.

『문집』4-6 澶娘墓誌銘 澶娘, 廣平程顥之幼女也. 其父佐澶淵軍而生故命之曰: 澶其第四十七生於熙寧四年季秋之丁未死於十年季夏之壬午其質端而厚其氣溫而良其擧動知思安靜沈遠殆如老成衆皆意其福且壽事固有莫可計者命矣夫! 始病痘瘡工藥之過劑<一作劇>善醫者論之曰: 痘瘡之初誠欲利者也. 然當視其氣之强弱爲藥之可否疾之重輕爲劑之大小今槩以大藥下之宜其死也. 噫是亦命歟人理之未至吾容當責命於天言之以爲世戒云耳. 悲夫! 澶娘旣死七十五日而葬於河南伊陽縣神陰鄕先塋之東與其姊嬌兒同兆<一作宂>銘曰: 合而生非來盡而死非往然而精氣本於天形魄歸於地謂之往亦可矣.

『문집』4-7 邵堯夫先生墓誌銘 熙寧丁已孟秋癸丑, 堯夫先生疾終於家洛之人弔哭者相屬於塗其尤親且舊者又聚謀其所以葬先生之子泣以告曰: 昔先人有言誌於墓者必以屬吾伯淳噫先生知我者以是命我我何可辭? 謹按邵本姬姓系出召公故世爲燕人大王父令進以軍職逮事藝祖始家衡漳祖德新父古皆隱德不仕母李氏其繼楊氏先生之幼從父徙共城晩遷河南葬其親於伊川遂爲河南人先生生於符祥辛亥至是蓋六十七年矣. 雍先生之名而堯夫其字也. 娶王氏伯溫仲良其二子也. 先生之官初擧遺逸試將作監主簿後又以爲潁州團練推官辭疾不赴. 先生始學於伯原勤苦刻厲, 冬不爐, 夏不扇, 夜不就席者數年, 衛人賢之. 先生歎曰: 昔人尙友於古而吾未嘗及四方遽可已乎於是走吳適楚過<一作寓>齊魯客梁晋久之而歸曰: 道其在是矣. 蓋始有定居之意. 先生少時, 自雄其材慷慨有大志旣學力慕高遠謂先王之事爲可必致及其學益老德益劭玩心高明觀於天地之運化陰陽之消長以達乎萬物之變然後頹然其順浩然其歸在洛幾三十年始至蓬蓽環堵不蔽風雨躬爨以養其父母居之裕如講學於家未嘗强以語人而就問者日衆鄕里化之遠近尊之士人之道洛者有不之公府而必之先生之廬. 先生德氣粹然, 望之可知其賢然不事表襮不設防畛正而不諒通而不汙淸明坦夷洞徹中外接人無貴賤親疏之間群居燕飮笑語終日不取甚異於人顧吾所樂何如耳. 病畏寒暑常以春秋時行遊城中士大夫家聽其車音倒屣迎致雖兒童奴隸皆知懽喜尊奉. 其與人言, 必依於孝弟忠信, 樂道人之善, 而未嘗及其惡, 故賢者悅其德, 不賢者服其化, 所以厚風俗, 成人材者, 先生之功<一有爲字>多矣. 昔七十子學於仲尼其傳可見者惟曾子所以告子思而子思所以授孟子者耳. 其餘門人各以其材之所宜<一有者字>爲學雖同尊聖人所因而入者門戶則衆矣. 况後此千餘歲師道不立學者莫知其從來獨先生之學爲有傳也. 先生得之於李挺之挺之得之於穆伯長推其源流遠有端緖今穆李之言及其行事槪可見矣. 而先生淳一不雜汪洋浩大乃其所自得者多矣. 然而名其學者豈所謂門戶之衆各有所因而入者歟語成德者昔難其居若先生之道就所至而論之可謂安且成矣. 先生有書六十二卷命曰: 皇極經世古律詩二千篇題曰: 擊壤集先生之葬附於先塋實其終之年孟冬丁酉也. 銘曰: 嗚呼! 先生志豪力雄濶步長趨凌高厲空探幽索隱曲暢旁通在古或難先生從容有問有觀以飫以豐. 天不憖遺哲人之凶鳴臯在南伊流在東有寧一宮, 先生所終.

『문집』4-8 華陰侯先生墓誌銘 先生姓侯氏名可字無可其先太原人宦學四方因徙家華陰少時倜儻不羈以氣節自喜旣壯盡易前好篤志爲學祁寒酷暑未嘗廢業博極群書聲聞四馳就學者日衆雖邊隅遠人皆願受業諸侯交以書幣迎致有善其禮命者亦時往應之故自陜而西多宗先生之學. 元昊盜邊時名卿賢儒結轍西使服先生之名莫不願見親老而家益貧思得祿養勉就科擧再試春官卒無所遇因喟然太息曰: 丈夫之事止於是乎會蠻酋儂智高攻陷二廣孫威敏公奉命出征習先生之賢請干其軍事先生奮然從之振旅奏功. 初命武爵言事者以爲非宜遂改文資調知巴州化成縣巴俗尙鬼而廢醫, 惟巫言是用雖父母之疾皆棄去弗視先生誨以義理嚴其禁戒或親至病家爲視醫藥所活旣衆人亦知化巴人娶婦必責財於女氏貧人至有老不得嫁者先生爲立制度稱其家之有無與之約曰: 踰是者有誅未閱歲邑無過時之女遂變其俗巴山土薄民貧絲帛之賦反倍他所日益凋敝先生抗議計司爭之數十卒得均之旁郡境多虎暴農者不敢朝暮耕商旅俟衆而後行. 先生日夜治器械發徒衆親執弓矢與之從事迹而追之遠或數百里所殺不可勝數後皆避人遠去不復爲害. 再調耀州華原主簿. 有富人不占地籍, 惟以利誘貧民而質其田券, 多至萬畝歲責其入. 先生晨馳至其家發櫝出券召其主而歸之失業者復安其生郡胥趙至誠貪狡凶暴持郡吏短長而爲奸吏前後爲守者莫能去一郡患之先生暴其罪荷校置於獄自守而下畏恐生禍交爲之請先生不顧卒言於帥府而誅之聞者快服. 用薦者, 監慶州折博務, 歲滿授儀州軍事判官. 計省第折博之最就改大理評事. 部使者丐留遂復簽書本官事韓忠獻公鎭長安薦知涇陽縣至則鑿小鄭<一作□>泉以廣灌漑議復鄭白舊利未幾召至闕下得對便殿始命計工興役旋復專總其事邀功害能之人疾其不自已出渠功有緖而讒毁交至以微文細故爲先生罪遂罷其役, 美利不究論者惜之. 元豐己未季夏先生以疾終於家享年七十有三. 先生純誠孝友剛正明決非其義一毫不以屈於人視貪邪奸佞若寇賊仇怨顯攻面數意其人改而後已雖甚貴勢視之藐然遇人之善友之助之欲其成達不啻如在已也. 博物强記貫涉萬類若禮之制度樂之形聲詩之比興易之象數天文地理陰陽氣運醫藥算數之學無不究其淵源先生發强壯厲勇於有爲而平易仁恕中懷洞然至於輕財樂義安貧守約急人之急憂人之憂謀其道不謀其利忠於君不顧其身古人所難能者先生安而行之蓋出於自然非勉强所及. 少與申顔爲友易衣互出而謀食以養二家如一. 顔病先生徒步千里爲之求醫歸而顔死矣. 其目不瞑人曰: 其待侯君乎未歛而先生至撫之而瞑顔謀葬其先世而未能顔死無子又不克葬先生辛勤百圖不足則賣衣以益之卒襄其事時方天寒先生與其子單服以居適有饋白金者先生顧顔之孤妹爲憂未遑卹已遂以嫁之近世朋友道薄臨患難鮮不愛其力聞先生之風可以激頹波而起廢疾. 先生家無甔石之儲而人有不得其所者必以先生爲歸非力能也. 誠使然也. 一日自遠歸家人方以窶告友人郭行者詣門曰: 吾父病亟醫須百千乃爲治賣吾廬而不售先生憫然計囊中裝適當其數盡以與之嘗隨計詣京師里中出金贐行比還悉散其所餘曰: 此金鄕里所以資應詔也. 不可以爲他利當與同擧者共之且行聞鄕人有病於逆旅者先生曰: 吾歸則彼死矣. 遂留不去病者瘉貧無以爲車乘先生曰: 子行則未能留則將困因推其馬與之躧步而歸其克己濟物若是者多矣. 少喜穰苴孫武之學, 兵家事無所不通. 尤詳於西北形勢談其山川道路郡縣部族纖細備具聽之者宛如在目前<一無此字>熙河未開之時<一作前>, 韓忠獻公請先生謀渭源之地. 先生馳至境上, 召其酋豪六百人, 諭以朝廷恩德, 爲明利害, 皆感悟喜躍翌曰: 詣軍門輸土納<一作聽>命願爲藩籬一塵不驚而開地八千里因城熟羊以撫之忠獻公上其功朝廷賞以減考績之年治平中敵嘗寇邊主將出兵禦戰轉運使以爲妄擧互言於朝時敵去未遠遣先生按視其迹受命卽行人皆爲之寒心先生以數十騎馳涉敵境日暮猝與敵遇乃分其騎爲三四令之曰: 高爾旗幟旋山徐行敵循環間見疑以爲大兵誘已終不敢擊秦州舊苦蕃酋反覆縶其親愛而質之多至七百人久者已數十歲公家之費不貲雜羌離怨益甚其後釋其縻而歸之戍人感<一作悅>服乃先生發其謀也. 平生以勸學新民爲己任主華學之敎育者幾二十年官之所至必爲之治學舍興絃誦其所以成就材德可勝道哉! 先生之文尤長於詩晩益翫心於天人性命之學其自樂者深矣. 病革命其子曰: 吾死愼勿爲浮屠事焚楮貨徼福覬利非吾志也. 嗚呼! 死而不忘於正可謂至矣. 大王父諱元, 王父諱暠, 當五代之亂皆隱德弗耀父諱道濟潤州丹徒令贈尙書比部員外郞母刁氏追封福昌縣太君. 妻<一作其媲>劉氏早卒封延長縣君繼以其姝封永壽縣君二子曰: 孚曰: 淳三孫尙幼先生之官自評事四遷爲殿中丞階宣奉郞勳騎都尉服錫五品旣終之明年仲春八日葬於華陰縣保德鄕先塋之次, 擧前夫人祔焉. 顥先生女兄之子也. 知先生之道爲詳故得論載行治之美以詔後人銘曰: 南山崇崇其下也. 先生之宮惟其淸風與山無窮.

『문집』4-9 祭彭侍郞文 悠悠彼蒼顧佑有常如何不淑殲時之良? 胡不憖遺, 以慰士大夫之望? 嗚呼! 哀哉! 昔我穉齒爲公所器敎之誨之, 實妻以子. 二姓之歡疇可倫擬? 逾二十年, 顧愛終始. 我謫河北公薨建康義不得往神魂飛翔. 望南浦之蕭條想丹旐之悠揚淚如流水不到公之堂號聲動天不徹公之喪. 惟公德尊本朝行高當世爲四國之矜式被三朝之注倚風誼傳於後人事業存乎國史磊落明白掀揭天地縱綿百世之長公爲不亡雖竭無能之鄙辭何足以增盛德之輝光惟寓愚之誠兮因遠致乎肴觴公其來饗兮慰余之悲傷長言恩禮之厚兮知何時之可忘? 嗚呼! 哀哉! 伏惟尙饗!

祭文

『문집』4-10 祭富鄭公文 維元豐六年歲次癸亥十一月壬寅朔十九日庚申奉議郞監汝州鹽酒稅輕車都尉賜緋魚袋程顥謹遣外甥張敷以淸酌庶羞之奠敢昭告於太尉文忠公之靈. 嗚呼! 粤稽古昔得全實難; 惟夔契出乎唐虞之際而姬呂位乎文武之間其餘雖有鉅賢碩輔僅或濟一時之險艱眞儒大聖多處非其位而孤騫. 孰如我公道行乎重熙累洽之運而身享乎尊富安榮之完事繫天下之重位極人臣之班? 生逢四世, 皆上聖之主, 時歷七紀, 膺太平之安. 勳業揭乎日月, 聞望塞乎天淵, 優游里第者猶十有三年. 於人之職可謂無負在天之理亦爲曲全然而捐館之日, 遠近聞之, 孰不齎咨而涕尙以公之沒也, 爲有憾焉. 嗚呼! 世之常態苟於自便終始之節艱於永肩屛伏者以憂責不及而怠懈, 休老者以血氣旣衰而志遷惟公年彌高而志愈厲身久退而誠益堅惟是愛君憂國之道極晝夜之拳拳. 迨乎瞑目之旦, 屬纊之前萬物已莫累乎心胸, 而朝廷之念獨有進乎昔日之當權. 宜乎易名之謚典號爲摭實祭冊之聖詔極於哀憐. 則士大夫以公之沒爲憾者, 蓋非偶然. 顥愚不肖辱公禮遇顧相期於義理非見私於趨附公薨於洛賤居在汝官守有制欲往無路歛不望棺葬不臨墓引領西風悲慟何數誠寓鄙文禮陳菲具恭祭道周後期無所嗚呼! 哀哉! 伏惟尙饗!

宋程頤撰 奏疏

『문집』5-1 上仁宗皇帝書<皇祐二年> 草莽賤臣程頤謹昧死再拜上書皇帝闕下. 臣伏觀前古聖明之主無不好聞直諫博采芻蕘故視益明而聽益聰紀綱正而天下治昏亂之主無不惡聞過失忽棄正言故視益蔽而聽益塞紀綱廢而天下亂治亂之因未有不由是也. 伏惟陛下德侔天地明並日月寬慈仁聖自古無比曷嘗害一忠臣戮一正士群臣雖有以言事得罪者旋復拔擢過其分際此千載一遇言事之秋也. 桀紂暴亂殘賊忠良然而義士不顧死以盡其節明聖在上其仁如天布衣之士雖非當言責也. 苟有可以裨聖治何忍黙黙而不言哉! 今臣竭其愚忠非有斧鉞之虞也. 所慮進言者至衆豈盡有取狂愚必多而陛下因謂賤士之言無適用者臣雖披心腹瀝肝膽不見省覽秖成徒爲此臣之所懼也. 儻或陛下少留聖慮則非臣之幸實天下之幸臣請自陳所學然後以臣之學議天下之事. 臣所學者天下大中之道也. 聖人性之爲聖人賢者由之爲賢者堯舜用之爲堯舜仲尼述之爲仲尼其爲道也. 至大其行之也. 至易三代以上莫不由之. 自秦而下衰而不振魏晉之屬去之遠甚漢唐小康行之不醇自古學之者衆矣. 而考其得者蓋寡焉. 道必充於已而後施以及人是故道非大成不苟於用然亦有不私其身應時而作者也. 出處無常惟義所在所謂道非大成不苟於用顔回曾參之徒是也. 天之大命在夫子矣. 故彼得自善其身非至聖人則不出也. 在於平世無所用者亦然所謂不私其身應時而作者諸葛亮及臣是也. 亮感先主三顧之義閔生民塗炭之苦思致天下於三代義不得自安而作也. 如臣者生逢明聖之主而天下有危亂之虞義豈可苟善其身而不以一言悟陛下哉! 故曰: 出處無常惟義所在. 臣請議天下之事不識陛下以今天下爲安乎危乎治乎亂乎烏可知危亂而不思救之之道如曰: 安且治矣. 則臣請明其未然方今之勢誠何異於抱火厝之積薪之下而寢其上火未及然因謂之安者乎書曰: 民惟邦本本固邦寧竊惟固本之道在於安民安民之道在於足衣食. 今天下民力匱竭, 衣食不足春耕而播延息以待一歲失望便須流亡以此而言本未得爲固也. 臣料陛下仁慈愛民如子必不忍使之困苦一至於是臣竊疑左右前後壅蔽陛下聰明使陛下不得而知今國家財用常多不足不足則責於三司三司責諸路轉運轉運何所出誅剝於民爾或四方有事則多非時配卒毒害尤深急令誅求竭民膏血往往破産亡業骨肉離散衆人觀之猶可傷痛陛下爲民父母豈不憫哉! 民無儲備官廩復空臣觀京師緣邊以至天下率無二年之備卒有連歲凶災如明道中不知國家何以待之坐食之卒計踰百萬旣無以供費將重斂於民而民已散矣. 强敵乘隙於外姦雄生心於內則土崩瓦解之勢深可虞也. 太寧之世聖人猶不忘爲備必有九年之蓄以待凶歲况今百姓困苦愁怨之氣上衝於天災沴凶荒是所召也. 陛下能保其必無乎中民之家有十金之産子孫不能守則人皆謂之不孝陛下承祖宗基業而前有土崩瓦解之勢, 可不懼哉! 戎狄强盛, 自古無比. 幸而目前尙守盟誓果能以金帛厭其欲乎能必料其常爲今日之計乎則夫沿邊豈宜無備益以兵則用不足省其戍則力弗支皆非長久之策也. 前者昊賊叛逆西垂用兵數年之間天下太困蓋內外經制多失其宜陜西之民苦毒尤甚及多逃散重以軍法禁之以至人心大怨皆有思寇之言悖逆之深不敢以聞聖聽顧恐陛下亦頗知之故曰: 無恒産而有恒心者惟士爲能彼庶民者飢寒旣切於內父子不相保尙能顧忠義哉! 非民無良政使然也. 當時秦中寇盜屢起儻稽撲滅必多響應幸而尋時盡能誅剪尙賴社稷之福西虜亦疲彼知未可遠圖遂且詭辭稱順向若更相牽制未得休兵內釁將生言之可駭今天下勞弊不比景祐以前復有加曩時之役臣愚切恐不能堪矣. 况爲患者豈止西戎臣每思之神魂飛越不知朝廷議者以爲如何? 亦嘗置之慮乎? 其謂制之無術乎? 臣竊謂今天下猶無事, 人命未甚危, 陛下宜早警惕於衷, 思行王道不然臣恐歲月易失因循不思事勢觀之理無常爾雖我太祖之有天下救五代之亂不戮一人自古無之非漢唐可比固知趙氏之祀安於泰山然而損陛下之聖明陷斯民於荼毒深可痛也. 臣料群臣必未嘗有爲陛下陳王道者以陛下聖明豈有言而不行者乎? 竊惟王道之本仁也. 臣觀陛下之仁堯舜之仁也. 然而天下未治者誠由有仁心而無仁政爾故孟子曰: 今有仁心仁聞而民不被其澤不可法於後世者不行先王之道也. 陛下精心庶政常懼一夫不獲其所未嘗以一喜怒殺一無辜官吏有犯入人罪者則終身棄之是陛下愛人之深也. 然而凶年饑歲老弱轉死於溝壑壯者散而之四方爲盜賊犯刑戮者幾千萬人矣. 豈陛下愛人之心哉! 必謂歲使之然非政之罪歟則何異於刺人而殺之曰: 非我也. 兵也. 三代之民無是病也. 豈三代之政不可行於今邪州縣之吏有陷人於辟者陛下必深惡之然而民不知義復迫困窮放辟邪侈而入於罪者非陛下陷之乎必謂其自然則敎化聖人之妄言邪? 天下之治由得賢也. 天下不治由失賢也. 世不乏賢顧求之之道如何爾今夫求賢本爲治也. 治天下之道莫非五帝三王周公孔子治天下之道也. 求乎明於五帝三王周公孔子治天下之道者各以其所得大小而用之有宰相事業者使爲宰相有卿大夫事業者使爲卿大夫有爲郡之術者使爲刺史有治縣之政者使爲縣令各得其任則無職不擧然而天下弗治者未之有也. 國家取士雖以數科然而賢良方正歲止一二人而已又所得不過博聞强記之士爾明經之屬唯專念誦不曉義理尤無用者也. 最貴盛者唯進士科以詞賦聲律爲工詞賦之中非有治天下之道也. 人學之以取科第積日累久至於卿相帝王之道敎化之本豈嘗知之居其位責其事業則未嘗學之譬如胡人操舟越客爲御求其善也. 不亦難乎往者丁度建言祖宗以來得人不少愚瞽之甚議者至今切齒使墨論墨固以墨爲善矣. 今天下未治誠由有君而無臣也. 豈世無人求之失其道爾苟欲取士必得豈無術哉! 王道之不行二千年矣. 後之愚者皆云時異事變不可復行此則無知之深也. 然而人主往往惑於其言今有人得物於道示玉工曰: 玉也. 示衆人曰: 石也. 則當以玉工爲是乎以衆人爲然乎必以玉工爲是矣. 何則識與不識也. 聖人垂敎思以治後世而愚者謂不可行於今則將守聖人之道乎從衆人之言乎謂衆人以王道可行其猶詰瞽者以五色之鮮詢聾者以八音之美其曰: 不然宜也. 彼非憎五色而惡八音聞見限也. 臣觀陛下之心非不憂慮天下也. 以陛下憂慮天下之心行王道豈難乎哉! 孟子曰: 以齊王猶反手也. 又曰: 師文王大國五年小國七年必爲政於天下矣. 以諸侯之位一國之地五年可以王天下况陛下居天子之尊令行四海如風之動苟行王政奚啻反手之易哉! 昔者大禹治水八年於外三過其門而不入思以利天下雖勞苦不避也. 今陛下行王政非有苦身體勞思慮之難也. 何憚而不爲哉! 孝經曰: 立身行道揚名於後世以顯父母孝之終也. 匹夫猶當行道以顯父母况陛下貴爲天子豈不發憤求治思齊堯舜納民仁壽上光祖考垂休無窮凡所謂孝無大於此者也. 臣以謂: 治今天下猶理亂絲非持其端條而擧之不可得而治也. 故臣前所陳不及歷指政治之闕但明有危亂之虞救之當以王道也. 然而行王之道非可一二而言願得一面天顔罄陳所學如或有取陛下其置之左右使盡其誠苟實可用陛下其大用之若行而不效當服罔上之誅亦不虛受陛下爵祿也. 陛下問群臣, 群臣必謂寒賤之士未可使近上側自臣思之以爲不然臣高祖羽太祖朝年六十餘爲縣令一言遭遇聖祖特加拔擢攀附太宗終於兵部侍郞顧遇之厚群臣無比備存家牒不敢繁述臣曾祖希振旣以父任後祖遹復被推恩國家錄先世之勳臣父珦又蒙延賞今爲國子博士非有橫草之功食君祿四世一百年矣. 臣料天下受國恩之厚無如臣家者臣自職事以來思爲國家盡死未得其路爾則臣進見宜無疑也. 或者更爲强詞言其不可此乃自負陰私懼防詆訐者也. 伏望陛下出於聖斷勿狥衆言以王道爲心以生民爲念黜世俗之論期非常之功昔漢武笑齊宣不行孟子之說自致不王而不用仲舒之策隋文笑漢武不用仲舒之策不至於道而不聽王通之言二主之昏料陛下亦嘗笑之矣. 臣雖不敢望三子之賢然臣之所學三子之道也. 陛下勿使後之視今猶今之視昔則天下不勝幸甚! 望陛下特留意焉臣愚無任踰越狂狷恐懼之極臣頤昧死頓首謹言.

『문집』5-2 代彭思永上英宗皇帝論濮王典禮疏(代彭中丞論濮王稱親疏) 臣思永言伏見近日以濮王稱親事言事之臣奏章交上中外論議沸騰此蓋執政大臣違亂典禮左右之臣不能開陳理道而致陛下聖心疑惑大義未明臣待罪憲府不得不爲陛下明辨其事竊以濮王之生陛下而仁宗皇帝以陛下爲嗣承祖宗大統則仁廟陛下之皇考陛下仁廟之適子濮王陛下所生之父於屬爲伯陛下濮王出繼之子於屬爲姪此天地大義生人大倫如乾坤定位不可得而變易者也. 固非人意所能推移苟亂大倫人理滅矣. 陛下仁廟之子, 則曰父, 曰考, 曰親, 乃仁廟也. 若更稱濮王爲親是有二親則是非之理昭然自明不待辨論而後見也. 然而聖意必欲稱之者豈非陛下大孝之心義雖出繼情厚本宗以濮王寔生聖躬曰: 伯則無以異於諸父稱王則不殊於臣列思有以尊大使絶其等倫如此而已此豈陛下之私心哉! 蓋大義所當典禮之正天下之公論而執政大臣不能將順陛下大孝之心不知尊崇之道乃以非禮不正之號上累濮王致陛下於有過之地失天下之心貽亂倫之咎言事之臣又不能詳據典禮開明大義雖知稱親之非而不知爲陛下推所生之至恩明尊崇之正禮使濮王與諸父夷等無有殊別此陛下之心所以難安而重違也. 臣以爲所生之義至尊至大雖當專意於正統豈得盡絶於私恩故所繼主於大義所生存乎至情至誠一心盡父子之道大義也. 不忘本宗盡其恩義至情也. 先王制禮本緣人情旣明大義以正統緖復存至情以盡人心是故在喪服恩義別其所生蓋明至重與伯叔不同也. 此乃人情之順義理之正行於父母之前亦無嫌間至於名稱統緖所繫若其無別斯亂大倫. 今濮王陛下之所生義極尊重無以復加以親爲稱有損無益何哉! 親與父同而所以不稱父者陛下以身繼大統仁廟父也. 在於人倫不可有貳故避父而稱親則是陛下明知稱父爲決不可也. 旣避父而稱親則是親與父異此乃姦人以邪說惑陛下言親義非一不止謂父臣以謂取父義則與稱父正同決然不可不取父義則其稱甚輕今宗室疎遠卑幼悉稱皇親加於所生深恐非當孝者以誠爲本乃以疑似無正定之名黷於所尊體屬不恭義有大害稱之於仁廟乃有嚮背之嫌去之於濮王不損所生之重絶無小益徒亂大倫. 臣料陛下之意不必須要稱親止謂不加殊名無以別於臣列臣以爲不然推所生之義則不臣自明盡致恭之禮則其尊可見况當揆量事體別立殊稱要在得盡尊崇不愆禮典言者皆欲以高官大國加於濮王此甚非知禮之言也. 先朝之封豈陛下之敢易爵秩之命豈陛下之敢加臣以爲當以濮王之子襲爵奉祀尊稱濮王爲濮國太王如此則夐然殊號絶異等倫凡百禮數必皆稱情請擧一以爲率借如旣置嗣襲必伸祭告當曰: 姪嗣皇帝名敢昭告於皇伯父濮國太王自然在濮國極尊崇之道於仁皇無嫌貳之失天理人心誠爲允合不獨正今日之事可以爲萬世之法復恐議者以太字爲疑此則不然蓋繫於濮國下自於大統無嫌. 今親之稱大義未安言事者論列不已前者旣去後者復然雖使臺臣不言百官在位亦必繼進理不可奪勢不可遏事體如此終難固持仁宗皇帝在位日久海宇億兆涵被仁恩陛下嗣位之初功德未及天下而天下傾心愛戴者以陛下仁廟之子也. 今復聞以濮王爲親含生之類發憤痛心蓋天下不知陛下孝事仁皇之心格於天地尊愛濮王之意非肯以不義加之但見誤致名稱所以深懷疑慮謂濮王旣復稱親則仁廟不言自絶, 群情洶懼異論喧囂. 夫王者之孝在乎得四海之歡心胡爲以不正無益之稱使億兆之口指斥謗讟致濮王之靈不安於上臣料陛下仁孝豈忍如斯皆由左右之臣不能爲陛下開明此理在於神道不遠人情故先聖謂事死如事生事亡如事存設如仁皇在位濮王居藩陛下旣爲冢嗣復以親稱濮王則仁皇豈不震怒濮王豈不側懼是則君臣兄弟立致釁隙其視陛下當如何也. 神靈如在亦豈不然, 以此觀之, 陛下雖加名稱濮王安肯當受? 伏願陛下深思此理去稱親之文以明示天下則祖宗濮王之靈交歡於上皆當垂祐陛下享福無窮率土之心翕然慰悅天下化德人倫自正大孝之名光於萬世矣. 夫姦邪之人希恩固寵自爲身謀害義傷孝以陷陛下今旣公論如此不無徊徨百計搜求務爲巧飾欺罔聖聽枝梧言者徼冀得已尙圖自安正言未省而巧辯已至陛下之心無由而悟伏乞將臣此章省覽數遍裁自宸衷無使姦人與議其措心用意排拒人言隱迹藏形陰贊陛下者皆姦人也. 幸陛下察而辨之勿用其說則自然聖心開悟至理明白天下不勝大願.

『문집』5-3 爲家君應詔上英宗皇帝書(爲太中上皇帝應詔書) 臣珦言: 伏覩八月八日詔勑以比年以來水潦爲沴八月庚寅大雨應中外臣僚並許上實封言時政闕失及當世利病此蓋皇帝陛下承祖宗大業嚴恭天命祇畏警懼之深也. 天下士民欽聞德音苟有知見孰不願披忠瀝懇上達天聽臣雖至愚官爲省郞職分郡寄敢不竭其區區之誠以應明詔惟陛下寬其狂易之誅賜之省覽則天下幸甚! 臣聞水旱之沴由陰陽之不和陰陽不和繫政事之所致是以自昔明王或遇災變則必警懼以省躬之過思政之闕廣延衆論求所以當天心致和氣故能消弭變異長保隆平昔在商王中宗之時有桑穀之祥高宗之時有雊雉之異二王以爲懼而修政行德遂致王道復興皆爲商宗百世之下頌其聖明今陛下嗣位之初比年陰沴聖心警畏下明詔以求政之闕誠聖明之爲也. 然臣觀近古以來引咎之詔自新之言亦世有之其如人君不由於至誠天下徒以爲虛語豈復有如商之二宗興王道於旣衰者乎臣願陛下因此天戒奮興善治思商宗之休實鑒後代之虛飾不獨消復災沴於今日, 將永保丕基於無窮. 伏觀詔旨時政闕失當世利病可以佐元元者悉心以陳毋有所諱臣竊惟天下之勢所甚急者在安危治亂之機若夫指一政之闕失陳一事之利病徒爲小補不足以救當世之弊而副陛下勤求之意也. 所謂安危治亂之機臣請條其大端. 所謂安且治者朝廷有綱紀權持總攝百職庶務天下之治如網之有綱裘之有領擧之而有條委之而不紊也. 郡縣之官得人而職修惠養有道朝廷政化宣達於下也. 百姓安業衣食足而有恒心知孝悌忠信之敎率之易從勞之不怨心附於上固而不可搖也. 化行政肅無姦宄盜賊之患設有之不足爲慮蓋有殲滅之備而無響應之虞也. 民心和而陰陽順無水旱蟲螟之災雖有之不能爲害蓋倉廩實而府庫充官用給於上民食足於下也. 武備修而威靈振四方之民無敢不服雖有之不足爲憂, 蓋甲兵利而儲備豐將善謀而士素練也. 此六者所謂安且治者今之事一皆反是朝廷紀綱汗漫離散莫可總攝本原如此治將安出郡縣之官選不以道更易之數雖時謂才者尙莫能稱其職况庸常者乎循常苟安狃以成俗擧世以爲當然政治廢亂生民困苦朝廷雖有惠澤孰能宣布以達於下所與共理者如此天下斯可知矣. 百姓窮蹙日以加甚而重斂繁賦消削之不息天下戶口雖衆而自足者益寡司牧者治其事爾非有師保左右之也. 其善惡勤惰趨利避害或昧而反之一從其自然而困之陷之之道又非一塗人用無聊苟度歲月驅之於治則難格率之於惡則易搖民惟邦本本根如是邦國奈何民無生業極困則慮生不漸善敎思利而志動乘間隙則萌姦宄逼凍殍則爲盜賊今玆幸無大故尙爾苟安設或遇大饑饉有大勞役奸雄一呼所在必應以今無事之時尙恐力不能制况勞擾多事之際乎天下安危實繫於此保民之道以食爲本今自京師至於天下計平時之用率無三年之蓄民間空匱則又甚焉以萬室之邑觀之有厚蓄者百無二三困衣食者十居六七統而較之天下虛竭可知矣. 豐年樂歲飢寒見於道路一穀不稔便致流轉卒有方數千里連數年之水旱不知何以待之姦盜蜂起於內四裔乘隙於外雖欲爲之末如何矣. 四裔强盛古未有比歲輸金帛以修好而好不可恃窮天下之力以養兵而兵不足用尙幸二寇無謀厭小欲而忘大利故我得以紓朝夕之急若其連衡而來則必興數十萬之衆宿於邊境饋餉不繼財用不充將何以濟乎驕惰之兵縱無奔潰之患曠日持久終有窮極之虞又况征斂興發而人民轉亡饑饉愁怨而姦雄競起. 事至於此, 興衰可知以此觀之天下之勢安乎? 危乎? 凡此數端皆有危亡之虞而未至於是者不識朝廷制置能使之然耶? 抑亦天幸而偶然耶? 幸然之事其可常乎先皇帝至仁格天地保持之以至於今歷時旣已久言者旣已多朝廷遂以爲果不足憂也. 可以常然姑維持之而已雖聞至深至切之言不爲動也. 嗚呼! 貽天下之患必由於是乎今天下尙無事朝廷宜急思所以救時之道不然臣恐因循歲月前之所陳者一事至則爲之晩矣. 中人之家有百金之産子孫保守不敢不念陛下承祖宗大業可不懼乎! 今言當世之務者必曰: 所先者寬賦役也. 勸農桑也. 實倉廩也. 備災害也. 修武備也. 明敎化也. 此誠要務然猶未知其本也. 臣以爲所尤先者有三焉請爲陛下陳之一曰: 立志二曰: 責任三曰: 求賢今雖納嘉謀陳善算非君志先立其能聽而用之乎君欲用之非責任宰輔其孰承而行之乎君相協心非賢者任職其能施於天下乎三者本也. 制於事者用也. 有其本不患無其用. 三者之中復以立志爲本君志立而天下治矣. 所謂立志者至誠一心以道自任以聖人之訓爲可必信先王之治爲可必行不狃滯於近規不遷惑於衆口必期致天下如三代之世此之謂也. 夫以一夫之身立志不篤則不能自修况天下之大非體乾剛健其能治乎自昔人君孰不欲天下之治然而或欲爲而不知所措或始銳而不克其終或安於積久之弊而不能改爲或惑於衆多之論而莫知適用此皆上志不立故也. 臣觀朝廷每有善政鮮克堅守或行之而天下不從請擧近年一二事以明之朝廷以今之任人未嘗選擇一用薦擧之定式患所擧不得其人也. 故詔以飭之非不丁寧然而當其任者如弗聞也. 陛下以爲自後所擧果得其人乎曾少異於舊乎又以守令數易之害治也. 詔廉察之官擧其有善政者俾之再任於今未聞有應詔者豈天下守令無一人有善政耶? 苟誠無之朝廷負生民不已甚乎且以爲善而行之何不使天下奉承以見其效若曰: 非不欲必行也. 奈天下不從何如此則是政令不行矣. 將如天下何此亦在陛下而已苟陛下之志先立奮其英斷以必行之雖强大諸侯跋扈藩鎭亦將震慴莫敢違也. 况郡縣之吏乎故臣願陛下以立志爲先如臣前所陳法先王之治稽經典之訓篤信而力行之救天下深沈固結之弊爲生民長久治安之計勿以變舊爲難勿以衆口爲惑則三代之治可望於今日也. 若曰: 人君所爲不可以易易而或失其害則大臣以爲不然稽古而行非爲易也. 歷觀前史自古以來豈有法先王稽訓典將大有爲而致敗亂者乎惟動不師古苟安襲弊卒至危亡者則多矣. 事據昭然無可疑也. 願陛下不以臣之疎賤而易其言則天下幸甚! 所謂責任者夫以海宇之廣億兆之衆一人不可以獨治必賴輔弼之賢然後能成天下之務自古聖王未有不以求任輔相爲先者也. 在商王高宗之初未得其人則恭黙不言蓋事無當先者也. 及其得說而命之則曰: 濟川作舟楫歲旱作霖雨和羹惟鹽梅其相須倚賴之如是此聖人任輔相之道也. 夫圖任之道以愼擇爲本擇之愼故知之明知之明故信之篤信之篤故任之專任之專故禮之厚而責之重擇之愼則必得其賢知之明則仰成而不疑信之篤則人致其誠任之專則得盡其才禮之厚則體貌尊而其勢重責之重則其自任切而功有成是故推誠任之待以師傅之禮坐而論道責之以天下治陰陽和故當之者自知禮尊而任專責深而勢重則挺然以天下爲已任故能稱其職也. 雖有姦諛巧佞知其交深而不可間勢重而不可搖亦將息其邪謀歸附於正矣. 後之任相者異於是其始也. 不愼擇擇之不愼故知之不明知之不明故信之不篤信之不篤故任之不專任之不專故禮之不厚而責之亦不重矣. 擇不愼則不得其人知不明則用之猶豫信不篤則人懷疑慮任不專則不得盡其能禮不厚則其勢輕而易搖責不重則不稱其職是故任之不盡其誠待之不以其禮僕僕趨 走若吏史然文案紛冗下行有司之事當之者自知交不深而其勢輕動懷顧慮不肯自盡上懼君心之疑下虞群議之奪故蓄縮不敢有爲苟循常以圖自安爾君子弗願處也. 姦邪之人亦知其易搖日伺間隙如是其能自任以天下之重乎? 若曰: 非任之艱知之惟艱且何以知其賢而任之或失其人治亂所繫此人君所以難之也. 臣以爲知人誠難亦繫取之之道如何爾臯陶爲帝舜謨曰: 在知人禹吁而難之及其陳九德載采采則曰: 底可績蓋詢行考實人焉廋哉! 歷觀前史自古以來豈有履道之士孝聞於家行著於鄕德推於朝廷節見於事爲其言合聖人之道其施蹈經典之訓及用之於朝反致敗亂者乎用是而求其有差乎? 若乃人君以爲賢而用之卒敗厥事者古亦多矣. 稽迹其由蓋取之不以其道也. 大率以言事合於已心則謂之才而用之曾不循核本末稽考名實如前之云傷明害政不亦宜乎四海之大未始乏賢誠能廣聰明揚側陋至誠降禮求之以道雖臯夔伊周之比亦可必有賢德志道之士皆可得而用也. 願陛下如臣前所陳旣堅求治之志則以責任宰輔爲先待之盡其禮任之盡其誠責之盡其職不患其不爲患其不能爲不患其不能爲患其不得爲蓋不爲者可責之必爲不能者可勉求而能惟不得爲則已矣. 所謂不得爲者君臣之志不通懷顧慮而不肯自盡此由失待任之道也. 今執政大臣皆先朝之選天下重望在陛下責任之而已臣願陛下召延宰執從容訪問今天下之事爲安爲危爲治爲亂當維持以度歲月乎當有爲以救其弊乎如曰: 當爲則願示之以必爲之意詢之以所爲之政審慮之力行之時不可後事不可緩也. 如曰: 非不爲也. 患不能也. 則天下之廣豈無賢德可以禮問朝廷之上豈無英髦可以討論有先王之政可以考觀有經典之訓可以取則道豈遠哉! 病不求爾在君相協心勤求力爲之而已. 如曰: 無妄爲也. 姑守常而已則在陛下深思而明辨之唐文宗之時大權漸奪天下將亂而牛僧孺欺以爲治矣. 史冊書之可爲明鑒今陛下聖明執政忠良無是事也. 願陛下不以臣之疎賤而易其言則天下幸甚! 所謂求賢者夫古之聖王所以能致天下之治無他術也. 朝廷至於天下公卿大夫百職群僚皆稱其任而已何以得稱其任賢者在位能者在職而已何以得賢能而任之求之有道而已雖天下常用易得之物未有不求而得者也. 金生於山木生於林非匠者採伐不登於用况賢能之士傑出群類非若山林之物廣生而無極也. 非人君搜擇之有道其可得而用乎自昔邦家張官置吏未嘗不取士也. 顧取之之道如何爾. 今取士之弊議者亦多矣. 臣不暇條析而言大槩投名自薦記誦聲律非求賢之道爾求不以道則得非其賢間或得才適由偶幸非知其才而取之也. 朝廷選任盡自其中曾不虞賢俊之棄遺於下也. 果天下無遺賢邪抑雖有之吾姑守法於上不足以爲意邪將科擧所得之賢已足治而不乏邪臣以爲治天下今日之弊, 蓋由此也. 以今選擧之科用今進任之法而欲得天下之賢興天下之治其猶北轅適越不亦遠乎? 臣願陛下如臣前所陳旣立求治之志又思責任之道則以求賢爲先苟不先得賢雖陛下焦心勞思將安所施誠得天下之賢置之朝廷則端拱無爲而天下治矣. 此所謂勞於求賢逸於得人也. 歷觀前史自古以來稱治之君有不以求賢爲事者乎有規規守常以資任人而能致大治者乎有國家之興不由得人者乎. 由此言之, 用賢之驗不其甚明? 若曰: 非不欲賢也. 病求之之難也. 臣以爲不然夫以人主之勢心之所嚮天下風靡景從設若珍禽異獸瓌寶奇玩之物雖遐方殊域之所有深山大海之所生志所欲者無不可致蓋上心所好奉之以天下之力也. 若使存好賢之心如是則何巖穴之幽不可求何山林之深不可致所患好之不篤爾. 夫人君用賢亦賴公卿大臣推援薦達之力今朝廷未嘗求賢公卿大臣亦不以求賢取士爲意相先引彙世所罕聞訪道求師貴達所恥大率以爲任已可也. 士將安補今世無賢求之何益夫以周公之聖其自任足矣. 尙汲汲求賢以自輔也. 以其聖且好賢知人之明宜天下之賢皆爲之用莫有遺也. 尙乃日不暇給恐失天下之士後之人其才不及周公而自謂足矣. 不求賢以自輔也. 以其不求且知之不明宜賢者在下之多也. 乃曰: 天下無賢矣. 噫何其用意與周公異也. 欲其助皇明燭幽隱不可得也. 然亦繫上之所爲而已陛下誠能專心致志孜孜不倦以求賢爲事常恐天下有遺棄之才朝廷之上推賢援能者登進之蔽賢自任者疎遠之自然天下嚮風自下及上孰不以相先爲善行薦達爲急務搜拔旣廣雖小才片善無所隱晦如此則士益貴而守益堅廉恥格而風敎厚矣. 天下之賢其有遺乎旣得天下之賢則天下之治不足道也. 今世人情淺近積慣成俗朝廷進人苟循常法則雖千百而取群伍而用庸惡混雜曾不以爲非. 設或拔一賢進一善出於不次, 則求摭小差, 衆議囂沸如眞廟擢种放先朝用范仲淹是也. 設非君心篤信寧免疑惑反自以爲過此所以非常之擧曠久不行也. 伏見近日陛下不由言薦擢范純仁置之言路在今世爲非常之擧純仁名臣之子有才名在位多言其能陛下擢之當也. 然臣願陛下自信勿疑純仁果賢則陛下知人之明也. 如用之而無顯效則亦曰: 吾勞心任人雖未得其效亦無愧於天下矣. 設或大敗厥職則亦曰: 吾知之失也. 當益務選擇期於得人爾蓋拔十得五才不可勝用求賢而失尙愈於不求誠持是心何患不得賢也. 方陛下用純仁識者皆喜臣獨憂之何者陛下始奮英斷拔一人誠恐或有差失遂抑聖心以爲專守常規可以無過不復以簡擢爲意則天下將何望焉此在陛下自信勿疑而已願陛下不以臣之疎賤而易其言則天下幸甚! 臣前所陳三者治天下之本也. 臣非不知有興利除害之方安國養民之術邊境備禦之策敎化根本之論可以爲陛下陳之顧三者不先徒虛言爾三者旣行不患爲之無術也. 願陛下以社稷爲心以生民爲念鑒苟安之弊思永世之策賜之省覽察其深誠萬一有毫髮之補於聖朝臣雖被妄言之誅無所悔恨昔賈誼爲漢文言治亂漢文不能用百世之下爲譏願陛下勿使後之視今猶今之視昔則天下不勝幸甚! 狂瞽之言惟聖明裁恕干冒宸嚴臣無任兢皇戰汗激切屛營之至.

『문집』5-4 爲家君上神宗皇帝論薄葬書(代太中上皇帝書) 具位臣程珦皇恐昧死再拜上書皇帝陛下. 臣聞孝莫大於安親忠莫先於愛主人倫之本無越於斯人無知愚靡不知忠孝之爲美也. 然而不得其道則反害之. 故自古爲君者莫不欲孝其親而多獲不孝之譏爲臣者莫不欲忠其君而常負不忠之罪. 何則? 有其心行之不得其道也. 伏惟陛下以至德承洪業以大孝奉先帝聖心切至天下共知. 然臣以疎賤復敢區區冒萬死以進其說者, 願陛下以至孝之心盡至孝之道, 鑑歷古之失爲先帝深慮則天下臣子之心無不慰安. 所謂歷古之失臣觀秦漢而下爲帝王者居天下之尊有四海之富其生也. 奉養之如之何其亡也. 安厝之如之何然而鮮克保完其陵墓者其故何哉! 獨魏文帝唐太宗所傳嗣君能盡孝道爲之遠慮至今安全事迹昭然存諸簡策. 嗚呼! 二嗣君不苟爲崇侈以狥巳意乃以安親爲心可謂至孝矣. 漢武之葬霍光秉政暗於大體奢侈過度至使陵中不復容物赤眉之亂遂見發掘識者謂赤眉之暴無異光自爲之爲其不能深慮以致後害也. 二君從儉後世不謂其不孝霍光厚葬千古不免爲罪人自古以來觀此明鑑而不能行之者無他衆議難違人情所迫爾苟若務合常情遂亡遠慮是乃厚於人情而薄於先君也. 不亦惑乎! 魏文帝所作終制及唐虞世南所上封事皆足取法其指陳深切非所忍言願陛下取而觀之可以見明君賢臣所慮深遠古人有言曰: 死者無終極國家有廢興自昔人臣當大事之際乃以興廢之言爲忌諱莫敢議及如此苟循人情辜負往者不忠之大者也. 臣竊慮陛下追念先帝聖情罔極必欲崇厚陵寢以盡孝心臣愚以爲違先帝之儉德損陛下之孝道無益於實有累於後非所宜也. 伏願陛下損抑至情深爲永慮承奉遺詔嚴飭有司凡百規模盡依魏文之制明器所須皆以瓦木爲之金銀銅鐵珍寶奇異之物無得入壙然後昭示遐邇刋之金石如是則陛下之孝顯於無窮陛下之明高於曠古至於紈帛易朽之物亦能爲患於數百年之後漢薄后陵是也. 或曰: 山陵崇大雖使無藏安能信於後世臣以爲不然天下旣知之後世必知之臣嘗遊秦中歷觀漢唐諸陵無有完者惟昭陵不犯陵旁居人尙能道當日儉素之事此所以歷數百年屢經寇亂而獨全也. 夫臣之於君猶子之於父豈有陛下欲厚其親而臣反欲薄於其君乎誠以厚於先帝無厚於此者也. 遺簪墜履尙當保而藏之不敢不恭况於園陵得不窮深極遠以慮之乎? 陛下嗣位方初群臣畏威, 臣苟不言必慮無敢言者陛下以臣言爲妄而罪之則臣死且不悔以臣言爲是而從之則可以爲先帝之福大陛下之孝安天下之心示萬世之法所補豈不厚哉! 臣哀誠內激言意狂率願陛下詳覽而深察之天下不勝大願臣無任踰越狂狷恐懼之極臣昧死頓首謹言.

『문집』5-5 代呂晦叔應詔疏(代呂晦叔應詔疏) 伏覩今月十三日詔勑以彗出東方, 許中外臣僚直言朝廷闕失. 臣自言事得罪久去朝廷無所補報退就間冗尙敢區區以言自進者誠見陛下寅畏天命有恐懼修省之意草萊之人尙思效其忠懇况臣世荷國恩久忝近侍雖罪釁之餘敢不竭其愚誠以應明詔? 臣伏觀前史所載彗之爲變多矣. 鮮有無其應者蓋上天之意非徒然也. 今陛下旣有警畏之心當思消弭之道且以今日之變孰從而來書曰: 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豈非政之所致歟如曰: 非政之由則經爲誣矣. 臣復何言詔之所求亦爲虛設若以爲政之所致則改以<一作而>順天在陛下而已. 晏子所謂可祝而來亦可禳而去也. 傳曰: 天之有彗以除穢也. 又曰: 所以除舊布新臣願陛下祇若天戒思當除者何事而當新者何道. 如曰: 舊政旣善, 無所可除, 則天爲誣矣. 臣復何言若以爲當求自新則在陛下思之而已. 自非大無道之世何嘗不遇災而懼然而能自新者蓋寡大率蔽於所欲惑於所任明不足以自辨也. 視是而爲非以邪而爲正敗亡至而不寤天亦不能戒也. 豈其惡存而好亡憎治而喜亂哉! 亦惑而不能辨爾臣以爲辨之非艱顧不得其道也. 誠能省已之存心考已之任人察已之爲政思已之自處然後質之人言何惑之不可辨哉! 能辨其惑則知所以應天自新之道矣. 臣請爲陛下辨之. 所謂省已之存心者人君因億兆以爲尊其撫之治之之道當盡其至誠惻怛之心視之如傷動敢不愼兢兢然惟懼一政之不順於天一事之不合於理如此王者之公心也. 若乃恃所據之勢肆求欲之心以嚴法令擧條綱爲可喜以富國家强兵甲爲自得銳於作爲快於自任貪惑至於如此迷錯豈能自知若是者以天下狥其私欲者也. 勤身勞力適足以致負<一作貪>敗夙興夜寐適足以招後悔以是而致善治者未之聞也. 願陛下內省於心有近於是者乎苟有之則天之所戒也. 當改而自新者也. 所謂考己之任人者夫王者之取人以天下之公而不以已求其見正而不求其從欲逆心者求諸道巽志者察其非尙孜孜焉懼或失也. 此王者任人之公也. 若乃喜同而惡異偏信而害明謂彼所言者吾之所大欲也. 悅而望之信而惑之至於甚惡而不察恣欺而不悟推是而往鹿可以爲馬矣. 願陛下考已之任人有近於是者乎苟有之則天之所戒也. 當改而自新者也. 方陛下思治之初未有所偏主好惡取舍一以公議天下謂之賢陛下從而賢之者衆矣. 進之於朝亦多矣. 及乎旣有爲也. 皆以不合而去之更用後來之人皆昔未嘗以爲賢者也. 然後議論無違始之所賢者皆愚始之未嘗賢者皆賢此爲天下之公乎已意之私乎自論議無違之後逆耳. 怫心之言亦罕聞矣. 夫以居至尊之位負出世之資而不聞怫逆之言可懼之大者也. 知人之難雖至明不能無失然至於朝合則爲不世之賢暮隙則有<一作爲>無窮之罪顚錯亦已甚矣. 在任人之道當改亦明矣. 所謂察已之爲政者爲政之道以順民心爲本以厚民生爲本以安而不擾爲本陛下以今日之事方於卽位之初民心爲歡悅乎爲愁怨乎民生爲阜足乎爲窮蹙乎政事爲安之乎爲擾之乎億兆之口非不能言也. 顧恐察之不審爾苟有不察則天之所戒也. 當改而自新者也. 所謂思已之自處者聖人謂亡者保其存者也. 亂者有其治者也. 陛下必不以斯言爲妄自古以來何嘗有以危亡爲憂而至危亡者乎惟其自謂治安而危亡卒至者則多矣. 不識陛下平日自處以天下爲如何聖心所自知也. 苟有憂危恐懼之心常慮所任者非其人所由者非其道唯恐不聞天下之言如此則聖王保天下之心也. 上帝其鑒之矣. 或以爲已安且治所任者當矣. 所爲者至矣. 天下之言不足恤矣. 如此則天之所戒也. 當改而自新者也. 所謂質之人言者當有其方欲詢之於衆人乎衆人之言可使同也. 欲訪之下民乎下民之言亦可爲也. 察之以一人之心而蔽之以衆人之智其可勝乎是不足以辨惑而足以固其蔽爾臣以爲在外一二老臣事先朝數十年久當大任天下共知其非欺妄人也. 知其非覆敗邦家者也. 臣願陛下禮而問之宜可信也. 及天下所謂賢人君子陛下聞之於有爲之前而不在今日利害之間者亦可訪也. 以是數者參考之則所當改者何事所當新者何道固可見矣. 天下之人, 一聞詔音莫不鼓舞相慶謂陛下必能上應天心召迎和氣臣以爲唯至誠可以動天在陛下誠意而已昔在商王中宗之時有桑穀之祥高宗之時有雊雉之異二王以爲懼而修政遂致王道復興皆爲商宗百世之下頌其聖明近世以來引咎之詔自新之言亦常有之倘人君不由於至誠則天下徒以爲虛語其能感天心弭災變乎? 臣願陛下因此天戒奮然改爲思商宗之休實鑑後代之虛飾不獨消復災沴於今日將永保丕基於無窮, 天下幸甚!

『문집』5-6 代富弼上神宗皇帝論永昭陵疏(代富弼上神宗皇帝疏稿) 臣弼伏覩太皇太后山陵有期老臣之心有所甚切不忍不言昧死以聞惟陛下深思而力行之不勝大願往者營奉昭陵時英宗皇帝方不豫未能聽事朝廷罔然不知其制失於迫卒不復深慮博訪凡百規畫一出匠者之拙謀中人之私意以巨木架石爲之屋計不百年必當損墜壙中又爲鐵罩重且萬斤以木爲骨大止數寸不過二三十年決須摧毁梓宮之厚度不盈尺異日以億萬鈞之石自高而墜其將奈何思之及此骨寒膽喪臣始則不知其詳後則無以爲計士民之間有知之者無不痛心飮恨况老臣之心乎况陛下之心乎? 其後厚陵始爲石藏議者竊意主事大臣已悟昭陵之事獨陛下未知之爾今也. 不幸太皇太后奄棄天下之養因此事會當爲之謀竊以周公制合葬之禮仲尼善魯人之祔歷代諸陵雖不盡用亦多行之太祖皇帝神謀聖慮超越萬古昭憲太后亦合安陵夫以周公之制仲尼之訓歷代之舊藝祖之法循而行之可無疑也. 老臣願陛下思安親之道爲後日之慮決於聖心勿循浮議奉太皇太后合祔昭陵因得徹去鐵罩用厚陵石藏之制仍更別加裁處使異日雖木壞石墜不能爲害救仁皇必至之禍成陛下莫大之孝復何難哉! 在陛下斷之而已. 旣合禮典, 又順人情雖無知之人必不敢以爲非是但恐有以陰陽拘忌之說上惑聰明者在陛下睿斷不難辨也. 不遵聖訓不度事宜而規規於拘忌者爲賢乎爲愚乎且陰陽之說設爲可信吉凶之應貴賤當同今天下臣庶之家夫婦莫不同穴未聞以爲忌也. 獨國家忌之有何義理唐中宗庸昏之主尙能守禮法盡孝心責嚴善思愚惑之論卒祔乾陵其後高宗子孫歷世延永是合葬非不利也. 老臣位至三公年將八十復何求哉! 所保者名節而已肯以不是事勸陛下取譏於後世乎? 復恐陛下謂臣心雖忠切而識慮愚暗不能曉達事理臣誠至愚然臣所言者欲陛下守經典之訓遵藝祖之規使仁宗皇帝得安全之道於太皇太后極崇奉之意豈獨老臣之心哉! 天下之心莫不然也. 陛下不信試以臣之所陳訪於群臣必無以爲非者若以臣言爲非則是使仁宗遺骨聖體碎於巨石之下而不恤乃爲是也. 凡有血氣之類孰肯爲此意乎? 臣事仁宗皇帝三十餘年位至宰相聾瞽之蔽不能早知而救之於始已爲大罪今遇可爲之時若更惜情顧已不能極言天地神靈必加誅殛死何面目見仁宗於地下且陛下不知則已今旣聞之在常人之情無可忍而不爲之理况陛下至仁大孝乎惟陛下深思而力行之則天下不勝大願. 富公見託爲此奏頤以拙於文辭辭之再三其意甚切義不可拒數日之間遂生顧慮不克上惜乎其不果於義也. 遂爲忠孝罪人!

宋程頤撰 表疏

『문집』6-1 辭免西京國子監敎授表<元豐八年十一月> 臣頤言今月日准汝州牒送到官誥一道伏蒙聖恩授臣汝州團練推官充西京國子監敎授者臣愚陋小儒晦處草野忽承明命不任震驚<中謝> 伏念臣才識迂疎學術膚淺自治不足焉能敎人豈敢貪冒寵榮致朝廷於過擧所降誥命不敢當受謹奉表辭免以聞.

『문집』6-2 再辭免表 臣頤言今月日准汝州牒備到尙書禮部符奉聖旨不許辭免恩命者<中謝> 伏以皇帝陛下嗣位之初方圖大治, 首拔一人於畎畝之中, 宜得英異之才寘之於位則天下聳動知朝廷急賢不特濟一時之用足以爲後世之光. 今乃取庸常之人, 命之以官則天下何望? 後世何觀? 朝廷之擧也. 何爲臣之受也. 何義臣雖至愚敢貪寵祿以速戾厥躬是以罔虞刑威而必盡其辭也. 臣願陛下擴知臣之明以照四方充取臣之心以求眞賢求之以其方待之以其道雖聖賢亦將爲陛下出况如臣者何足道哉! 冒犯天嚴臣無任戰恐激切屛營之至.

『문집』6-3 辭免館職狀<元祐元年閏二月二十四日> 伏蒙聖恩, 授臣宣德郞秘書省校書郞聞命震驚不知所措臣昨蒙恩授西京國子監敎授方再具辭免奉聖旨令乘遞馬赴闕祗命而來未獲進見遽然有此除授伏念臣草萊之人旣蒙賜召禮合見君先受恩命義理未安况祖宗朝布衣被召者故事具存伏望聖慈令臣入見所降誥命不敢當受伏候勅旨.

『문집』6-4 乞再上殿論經筵事箚子 新授汝州團練推官西京國子監敎授臣程頤右臣昨日上殿辭免前降恩命面奉德音除臣崇政殿說書臣雖瀝懇辭避不蒙兪允臣輒有愚誠昧死上聞天聽. 竊以知人則哲帝堯所難雖陛下聖鑒之明然臣方獲進對於頃刻之間陛下見其何者遽加擢任今取臣於畎畝之中驟置經筵蓋非常之擧朝廷責其報效天下之所觀矚苟或不當則失望於今而貽譏於後可不愼哉! 臣亦未敢必辭只乞再令臣上殿進箚子三道言經筵事所言而是則陛下用臣爲不誤臣之受命爲無愧所言而非是其才不足用也. 固可聽其辭避如此則朝廷無擧動之過愚臣得去就之宜伏望聖慈特賜兪允臣無任 ···. 貼黃 臣不候命下便有奏陳蓋欲朝廷審處於未授之前免煩回改成命 貼黃 如以臣昨日已上殿, 只乞指揮許臣實封箚子進呈逐一分明貼黃, 亦與口陳無異.

『문집』6-5 論經筵第一箚子 臣伏觀自古人君守成而致盛治者莫如周成王成王之所以成德由周公之輔養昔者周公輔<一作傅>成王幼而習之所見必正事所聞必正言左右前後皆正人故習與智長化與心成今士大夫家善敎子弟者亦必延名德端方之士, 與之居處使之薰染成性. 故曰: 少成若天性習慣如自然. 伏以皇帝陛下春秋之富雖睿聖之資得於天亶而輔養之道不可不至所謂輔養之道非謂告詔以言過而後諫也. 在涵養薰陶而已. 大率一日之中, 親賢士大夫之時多, 親寺人宮女之時少, 則自然氣質變化, 德器成就. 欲乞朝廷愼選賢德之士, 以待勸講, 講讀旣罷, 常留二人直日, 夜則一人直宿, 以備訪問皇帝習讀之暇游息之間時於內殿召見從容宴語不獨漸磨道義至於人情物態稼穡艱難積久自然通達比之常在深宮之中爲益豈不甚大? 竊聞間日一開經筵講讀數行群官列侍儼然而退情意略不相接如此而責輔養之功不亦難乎今主上沖幼太皇太后慈愛亦未敢便乞頻出但時見講官久則自然接熟. 大抵與近習處久熟則生褻慢, 與賢士大夫處久熟則生愛敬, 此所以養成聖德爲宗社生靈之福天下之事無急於此取進止. 貼黃 臣竊料衆人之意必以爲皇帝尙幼未煩如此此乃淺近之見夫幼而習之爲功則易發然後禁禮經所非古人所以自能食能言而敎者蓋爲此也.

『문집』6-6 第二 臣聞三代之時人君必有師傅保之官師道之敎訓傅傅其德義保保其身體後世作事無本知求治而不知正君知規過而不知養德傅德義之道固已疎矣. 保身體之法復無聞焉. 伏惟太皇太后陛下聰明睿哲超越千古皇帝陛下春秋之富輔養之道當法先王臣以爲傅德義者在乎防見聞之非節嗜好之過保身體者, 在乎適起居之宜, 存畏愼之心. 臣欲乞皇帝左右扶侍祇應宮人內臣並選年四十五已上厚重小心之人服用器翫皆須質朴一應華巧奢麗之物不得至於上前要在侈靡之物不接於目淺俗之言不入於耳. 及乞擇內臣十人充經筵祇應以伺候皇帝起居凡動息必使經筵官知之有翦桐之戲則隨事箴規違持養之方則應時諫止. 調護聖躬莫過於此取進止. 貼黃 今不設保傅之官傅德義保身體之責皆在經筵皇帝在宮中語言動作衣服飮食皆當使經筵官知之.

『문집』6-7 第三 臣竊以人主居崇高之位持威福之柄百官畏懼莫敢仰視萬方承奉所欲隨得苟非知道畏義所養如此其惑可知中常之君無不驕肆英明之主自然滿假此自古同患治亂所繫也. 故周公告成王稱前王之德以寅畏祗懼爲首從古以來未有不尊賢畏相而能成其聖者也. 皇帝陛下未親庶政方專問學臣以爲輔養聖德莫先寅恭動容周旋當主於此歲月積習自成聖性臣竊聞經筵臣寮侍者皆坐而講者獨立於禮爲悖欲乞今後特令坐講不惟義理爲順所以養主上尊儒重道之心. 取進止. 貼黃 竊聞講官在御案旁以手指書所以不坐欲乞別一人指書講官稍遠御案坐講. 貼黃 臣竊意朝廷循沿舊體只以經筵爲一美事臣以爲天下重任唯宰相與經筵天下治亂繫宰相君德成就責經筵. 由此言之, 安得不以爲重.

『문집』6-8 辭免崇政殿說書表 臣頤言准閤門告報伏蒙聖恩除臣通直郞充崇政殿說書者. 臣昨上殿面奉德音已嘗瀝懇辭避及繼有陳奏愚誠已竭天聽不回<中謝> 竊以儒者得以經術進說於人主之前言信則志行自昔抱道之士孰不願之顧恨弗獲臣何人哉! 有此遭遇然臣竊觀前古君臣道合靡不由至誠感動信以發志今臣道未行於家室善未信於鄕黨何足以感動人主之心乎苟不度其誠之未至而欲善辭說於進對之間爲一時之觀則可矣. 必欲通於神明光於四海久誠而無斁臣知其不可也. 臣是以欲進而思義喜時而愧已冒犯天威而盡其區區之說. 伏以皇帝陛下春秋之富方賴左右前後之人輔養聖性勸講之職任莫重焉竊惟海宇之廣賢俊至多臣願朝廷博謀群臣旁加收擇期得出類之賢寘諸左右輔成聖德爲廟社生靈之福如臣之愚實懼不足以當重任所有誥命不敢當受. 謹奉表辭免以聞.

『문집』6-9 再辭免狀 臣蒙恩授通直郞崇政殿說書尋具表辭免. 准尙書省箚子, 奉聖旨不許辭免者. 臣聞古之人見行可而後仕臣雖至愚讀書爲儒敢不先民是憲臣近進箚子三道未聞進止伏望聖慈更賜省覽如小有可用則臣受命不敢復辭或狂妄無取則乞許臣辭避所貴朝廷無取人之失小臣盡進退之道臣山野之人不能文飾傾竭悃誠願賜開納伏候勅旨.

『문집』6-10 乞六參日上殿箚子<元祐元年四月> 臣竊以朝廷置勸講之官輔導人主豈止講明經義所以薰陶性質古所謂承弼厥辟出入起居者焉宜朝夕納誨以輔上德自來暑熱罷講直至中秋方御經筵數月之間講讀官無由進見夫以文武之齊聖而欲旦夕承弼今乃數月不接儒臣甚非先王輔導養德之意方主上春秋之富輔養之道豈可疎略如此臣欲乞未御講筵每遇六參日宰臣奏事退許講讀官上殿問聖體數日一對儒臣不惟有益人主在勸講之禮亦當然伏望聖慈特賜兪允

『문집』6-11 上太皇太后書<元祐元年> 六月日具位臣程頤昧死再拜上書太皇太后陛下. 臣愚鄙之人自少不喜進取以讀書求道爲事於玆幾三十年矣. 當英祖朝曁神宗之初屢爲當塗者稱薦臣於斯時自顧學之不足不願仕也. 及皇帝陛下嗣位太皇太后陛下臨朝求賢願治大臣上體聖意搜揚巖穴首及微賤蒙恩除西京學官臣於斯時未有意於仕也. 辭避方再而遽有召命臣門下學者促臣行者半勸臣勿行者半促臣行者則曰: 君命召禮不俟駕勸臣勿行者則曰: 古之儒者召之則不往臣以爲召而不往惟子思孟軻則可蓋二人者處賓師之位不往所以規其君也. 已之微賤食土之毛而爲王民召而不至邦有常憲是以奔走應命到闕蒙恩授館職方以義辭遂蒙召對臣於斯時尙未有意於仕也. 進至廉前咫尺天光未嘗敢以一言及朝政陛下視臣豈求進者哉! 旣而親奉德音擢至經筵事出望外惘然驚惕臣竊內思儒者得以道學輔人主蓋非常之遇使臣自擇所處亦無過於此矣. 臣以斯時雖以不才而辭然許國之心實已萌矣. 尙慮陛下貪賢樂善果於取人知之或未審也. 故又進其狂言以覬詳察曰: 如小有可用則敢不就職或狂妄無取則乞聽辭避章再上再命祇受是陛下不以爲妄也. 臣於是受命供職而來夙夜畢精竭慮惟欲主上德如堯舜異日天下享堯舜之治廟社固無窮之基乃臣之心也. 臣本山野之人禀性朴直言辭鄙拙則有之矣. 至於愛君之心事君之禮告君之道敢有不盡上賴聖明可以昭鑒臣自惟至愚蒙陛下特達之知遭遇如此願効區區之誠庶幾毫髮之補惟陛下留意省覽不勝幸甚! 伏以太皇太后陛下心存至公躬行大道開納忠言委用耆德不止維持大業且欲興致太平前代英主所不及也. 但能日愼一日天下之事不足慮也. 臣以爲今日至大至急爲宗社生靈長久之計惟是輔養上德而已歷觀前古輔養幼主之道莫備於周公周公之爲萬世之法也. 臣願陛下擴高世之見以聖人之言爲可必信先王之道爲可必行勿狃滯於近規勿遷惑於衆口古人所謂周公豈欺我哉! 周公作立政之書擧言常伯至於綴衣虎賁以爲知恤玆者鮮一篇之中丁寧重複惟在此一事而已又曰: 僕臣正厥后克正又曰: 后德惟臣不德惟臣又曰: 侍御僕從罔匪正人以旦夕承弼厥辟出入起居罔有不欽是古人之意人主跬步不可離正人也. 蓋所以涵養氣質薰陶德性故能習與智長化與心成後世不復知此以爲人主就學所以涉書史覽古今也. 不知涉書史覽古今乃一端爾若止於如是則能文宮人可以備勸講知書內侍可以充輔導何用置官設職精求賢德哉! 大扺人主受天之命禀賦自殊歷考前史帝王才質鮮不過人然而完德有道之君至少其故何哉! 皆輔養不得其道而位勢使之然也. 伏惟皇帝陛下, 天資粹美德性仁厚必爲有宋令主但恨輔養之道有未至爾臣供職以來六侍講筵但見諸臣拱手黙坐當講者立案傍解釋數行而退如此雖彌年積歲所益幾何與周公輔養成王之道殊不同矣. 或以爲主上方幼且當如此此不知本之論也. 古人生子能食能言而敎之大學之法以豫爲先. 人之幼也, 知思未有所主, 便當以格言至論日陳於前. 雖未曉知, 且當薰聒, 使盈耳充腹, 久自安習, 若固有之雖以他言惑之不能入也. 若爲之不豫, 及乎稍長, 私意<一作思慮>偏好生於內衆口辯言鑠於外欲其純完不可得也. 故所急在先入豈有太早者乎? 或又以爲主上天資至美自無違道不須過慮此尤非至論夫聖莫聖於舜而禹臯陶未嘗忘規戒至曰: 無若丹朱好慢遊作傲虐且舜之不爲慢遊傲虐雖至愚亦當知之豈禹而不知乎蓋處崇高之位儆戒之道不得不如是也. 且人心豈有常哉! 以唐太宗之英睿躬歷艱難力平禍亂年亦長矣. 始惡隋煬侈麗毁其層觀廣殿不六七年復欲治乾陽殿是人心果可常乎所以聖賢雖明盛之際不廢規戒爲慮豈不深遠也哉! 况沖幼之君閑邪拂違之道可少懈乎? 伏自四月末間以暑熱罷講比至中秋蓋踰三月古人欲旦夕承弼出入起居而今乃三月不一見儒臣何其與古人之意異也. 今士大夫家子弟亦不肯使經時累月不親儒士初秋漸涼臣欲乞於內殿或後苑淸涼處召見當日講官俾陳說道義縱然未有深益亦使天下知太皇太后用意如此又一人獨對與衆見不同自然情意易通不三五次便當習熟若不如此漸致待其自然是輔導官都不爲力將安用之將來伏假旣開且乞依舊輪次直日所貴常得一員獨對. 開發之道蓋自有方朋習之益最爲至切故周公輔成王使伯禽與之處聖人所爲必無不當眞廟使蔡伯希侍仁宗乃師古也. 臣欲乞擇臣寮家子弟十歲已上十二已下端謹穎悟者三人侍上左右上所讀之書亦使讀之辨色則入昏而罷歸常令二人入侍一人更休每人擇有年宮人內臣二人隨逐看承不得暫離常情笑語亦勿禁止唯須言語必正擧動必莊仍使日至資善堂呈所習業講官常加敎勸使知嚴憚. 年纔十三便令罷去歲月之間自覺其益. 自來, 宰臣十日一至經筵亦止於黙坐而已又間日講讀則史官一人立侍史官之職言動必書施於視政之時則可經筵講疑<一作肄>之所乃燕處也. 主上方問學之初宜心泰體舒乃能悅懌今則前對大臣動虞有失旁立史官言出輒書使上欲游其志得乎欲發於言敢乎深妨問學不得不改欲乞特降指揮宰臣一月兩次與文彦博同赴經筵遇宰臣赴日卽乞就崇政殿講說因令史官入侍崇政殿說書之職置來已久乃是講說之所漢唐命儒士講論亦多在殿上蓋故事也. 邇英迫狹講讀官內臣近三十人在其中四月間尙未甚熱而講官已流汗况主上氣體嫩弱豈得爲便春夏之際人氣烝薄深可慮也. 祖宗之時偶然在彼執爲典故殊無義理欲乞今後只於延和殿講讀後楹垂簾簾前置御座太皇太后每遇政事稀簡聖體康和時至簾下觀講官進說不惟省察主上進業於陛下聖聰未必無補兼講官輔導之間事意不少有當奏禀便得上聞亦不可煩勞聖躬限以日數但旬月之間意適則往可也. 今講讀官共五人, 四人皆兼要職獨臣不領別官近復差修國子監太學條制是亦兼他職也. 乃無一人專職輔導者執政之意可見也. 蓋惜人才不欲使之閒爾又以爲雖兼他職不妨講讀此尤不思之甚也. 不敢言告君之道只以告衆人言之夫告於人者非積其誠意不能感而入也. 故聖人以蒲蘆喩敎謂以誠化之也. 今夫鍾怒而擊之則武悲而擊之則哀誠意之感而入也. 告於人亦如是古人所以齋戒而告君者何謂也. 臣前後兩得進講未嘗敢不宿齋豫戒潛思存誠覬感動於上心若使營營於職事紛紛其思慮待至上前然後善其辭說徒以頰舌感人不亦淺乎此理非知學者不能曉也. 道衰學廢世俗何嘗聞此雖聞之必以爲迂誕陛下高識遠見當蒙鑒知以朝廷之大人主之重置二三臣專職輔導極非過當. 今諸臣所兼皆要官, 若未能遽罷且乞免臣修國子監條制俾臣夙夜精思竭誠專在輔導. 不惟事理當然且使天下知朝廷以爲重事不以爲閑所也. 陛下擇臣於草野之中蓋以其讀聖人書聞聖人道臣敢不以其所學上報聖明竊以聖人之學不傳久矣. 臣幸得之於遺經不自度量以身任道天下駭笑者雖多而近年信從者亦衆方將區區駕其說以示學者覬能傳於後世不虞天幸之至得備講說於人主之側使臣得以聖人之學上沃聖聰則聖人之道有可行之望豈特臣之幸哉! 如陛下未以臣言爲信何不一賜訪問臣當陳聖學之端緖發至道之淵微陛下聖鑒高明必蒙照納如其妄僞願從誅殛臣愚不任懇悃惶懼待罪之至.

『문집』6-12 辭免判登聞鼓院奏狀<元祐元年八月> 臣今月二十二日准尙書省黃牒奉勑差臣兼權判登聞鼓院臣不敢避斧鉞之誅傾瀝悃誠上煩天聽竊以勸講之官體宜專任. 臣昨於六月中所進文字, 論之甚詳, 不敢重疊敍陳. 伏望聖慈將臣前來文字再賜省覽惟求義理之當不以臣微賤而廢其言前件勑命不敢當受伏乞特降睿旨許令辭免. 冒凟宸嚴, 臣無任···. 貼黃 自來鼓院官出入以時若使兼領遇講說日或有急訴訟必須留滯伏望聖慈特賜詳察.

『문집』6-13 再辭免狀 臣准尙書省箚子, 以臣辭免兼權判登聞鼓院奉聖旨不許辭免者微賤小官冒凟天威甘從顯戮旣荷朝廷寬大之賜敢復盡其區區之誠如陛下擢臣草野之中置之勸講之列天下聳然知陛下崇儒重道留意大本豈特一時之美事? 足<一作將>爲後世之盛談今復命臣兼判鼓院使臣入則侍人主而談道德出則坐司局而領訴訟臣愚竊謂失朝廷用人之體况臣禀性朴愚唯知爲學今時之務皆所未諳使臨事局必致廢闕. 若得專心致志窮硏聖學以備顧問臣愚不勝至願伏望聖慈矜察特許辭免伏候勅旨.

『문집』6-14 論冬至稱賀箚子<元祐元年> 臣伏聞冬至日百官拜表稱賀臣以爲節序變遷時思方切若受表賀大失居喪之禮萬方後世輕笑朝廷無以風化天下臣欲乞特降中旨改賀作慰臣備員勸講職在以經術輔導人主見此違經失禮不敢不言取進止. 貼黃 臣竊慮聖意以去年冬至及今歲旦已受賀表不欲改更此甚不然後是可以蓋前非改過不吝成湯所以稱聖也.

『문집』6-15 又上太皇太后疏<元祐二年春> 臣頤傾竭愚誠冒聞天聽狂妄之誅非所敢避伏念臣草萊賤士蒙陛下拔擢置之勸講之列夙夜畢精竭慮思所以補報萬一昨於去年六月中嘗有奏陳言輔導人主之事已踰半年不蒙施行一事臣愚竊思所言甚多如皆不可用其狂妄亦甚矣. 雖朝廷寬大不欲以言罪人然主上春秋方富宜親道德之士豈可以狂妄之人置之左右臣彷徨疑慮不能自已况臣所言非出已意皆先王之法祖宗之舊不應無一事合聖心者. 臣竊疑文字煩多陛下不能詳覽或雖蒙覽而未察愚意臣不敢一一再言止取一事最切者復爲陛下陳之. 臣前上言乞於延和殿講讀太皇太后每遇政事稀簡聖體康和時至簾下觀講官進說不惟省察主上進業於陛下聖聰未必無補兼講官輔導之間事意不少有當奏禀便得上聞臣今思之太皇太后雙日垂簾聽政隻日若更親臨講讀亦恐煩勞聖躬欲乞只就垂簾日聽政罷聖體不倦時召當日講官至簾前問當主上進業次第講說所至如何開益使天下知陛下於輔養人主之道用意如此. 延對儒臣自古以爲美事陛下試從臣言後當知其不謬此一時之事且非定制. 如其無益, 罷之何晩? 自來經筵賜坐啜茶蓋人主崇儒重道之體今太皇太后省察主上進業雖或使之講說亦無此禮臣所以再言此一事者蓋輔導之間有當奏知之事無由上達若得時至簾前可以陳說所繫甚大. 陛下必謂主上幼沖間日講讀足矣. 更無他事此甚不然蓋從前不曾有爲陛下極陳輔養少主之道者故陛下未深思爾願陛下聖明不以臣之微賤而忽其言察臣區區之心豈有他哉! 惟欲有補於人主爾臣披瀝肝膽言盡於此伏望聖慈采納天下幸甚!

『문집』6-16 乞就寬涼處講讀奏狀 <元祐二年三月二十六日> 臣伏見邇英閣講讀入夏漸熱去年四月後侵晨講讀亦甚有暑氣恐於聖體非宜欲乞特降聖旨移就一寬涼處貴得穩便謹錄奏聞伏候勅旨. 貼黃 雖祖宗以來只在邇英緣主上聖體少嫩尤須過意愼護祖宗法度固有不可改者至於講讀處所卽無不可從便之理 貼黃 如別無穩便只乞就崇政或延和殿隻日講讀與雙日垂簾自不相妨

『문집』6-17 又上太皇太后書 <元祐二年四月> 月日, 具位臣程頤昧死再拜上書太皇太后陛下. 臣近言邇英講讀漸熱乞移就寬涼處貼黃稱如別無穩便處所, 只乞就崇政或延和殿竊聞給事中顧臨有言以延和講讀爲不可臣本謂邇英熱恐於聖體非宜今聞修展邇英苟得寬涼則臣志願遂矣. 於臨之言在臣自可不恤然有所甚害不得不爲陛下辨之若臨之言止於移惑太皇太后聖意臣官非諫諍不辨尙可也. 今以臨言爲是則誤主上知見臣職當輔導安得不辨. 臣竊謂自古國家所患無大於在位者不知學在位者不知學則人主不得聞大道朝廷不能致善治不聞道則淺俗之論易入道義之言難進人君功德高下, 一繫於此. 臣非敢以諛言悅陛下竊聞陛下博覽前史請陛下歷觀簡策前世母后臨朝有不壞紀綱者乎有以至公爲心孜孜求治爲英主之事如陛下者乎此陛下所自知也. 陛下有簡策所無乏盛德則天下亦望陛下爲簡策所無之功業不止維持歲月俟人主長大而已蓋望陛下致海內於治安詒孫謀於久大詒謀致治之道當使聖德日躋善治日新進德在於求道圖治莫如稽古. 道必詢於有道之士古必訪諸稽古之人若夫世俗淺士以守道爲迂以稽古爲泥適足惑亂人主之聽. 近年以來士風益衰志趣汙下議論鄙淺高識遠見之士益少習以成風矣. 此風不革臣以爲非興隆之象乃陵替之勢也. 大率淺俗之人以順從爲愛君以卑折爲尊主以隨俗爲知變以習非爲守常此今日之大患也. 苟如是者衆則人君雖有高世之見豈能獨任哉! 臣不知進道德之言足以增益聖德者有幾而損陛下之遠圖移陛下之善意則有矣. 如顧臨之言是也. 臣料臨之意, 不過謂講官不可坐於殿上以尊君爲說爾夫殿上講說義理之至當古者所常行也. 臣不暇遠引只以本朝故事言之太祖皇帝召王昭素講易眞宗令崔頤正講書邢昺講春秋皆在殿上當時仍是坐講立講之儀只始於明肅太后之意此乃祖宗尊儒重道之盛美豈獨子孫當以爲法萬世帝王所當法也. 而臨以爲非臨謂講官不可坐殿上則昭素布衣之士其不可更甚矣. 邇英講讀只自仁宗時亦從便爾非是避殿上也. 若避殿上則不應置崇政說書之職雖以殿名設職不必須在本殿說書然亦必不肯於不可講說之處置說書官也. 臣每進講未嘗不規勸主上以祖宗美事爲法如臨之意則是禁止主上不得復爲優禮昭素之事及有崇政設職之意祖宗美事而使主上獨不得爲若主上信以爲然所損豈不甚大殿上說書亦是常事人主崇儒之道甚有重於此者臣今口未敢言然中心惟欲輔養主上重道之心如前代明王光耀史冊不止此一事而已臨之見與臣之心何其異也. 且講經與飮宴孰重眞宗仁宗時皆宴講讀官於崇政殿從來侍宴皆在殿上而講經獨不得在殿上臣未諭其義也. 臨之意必曰: 彼一時之事爾日常則不可夫於義苟當日常何害義或不可一時亦不可也. 臣始言之, 執政大臣未以爲非也. 及臨一言則是而從之以臣度之以臨之言爲是者亦或有之若謂四五大臣皆以爲是則必不然蓋非難知之事不應四五人所見皆如是也. 特以陛下信臨之言而又迫於尊君之意故不敢言爾恐非以道事君之義今世俗之人能爲尊君之言而不知尊君之道人君唯道德益高則益尊若位勢則崇高極矣. 尊嚴至矣. 不可復加也. 過禮則非禮强尊則不尊漢明帝於桓榮親自執業可謂謙屈矣. 周宣帝稱天自比上帝群臣齋戒淸身數日方得朝見可謂自尊矣. 然以理觀之漢明帝賢明之君百世所尊也. 周宣帝昏亂之主百世所賤也. 如臨之見則必以桓榮爲不能尊君以周宣之臣爲能尊君矣. 不知道之人益進不合理之言日聞雖人主聖明習熟見聞亦恐不能無損爾後世功業益卑先王粹美之道不復見於世者正由淺俗之論易信而得行爾. 夫先王之道雖未能盡行然稽古之心不可無也. 猶學者於聖賢之事雖未能盡行然希慕之心不可無也. 此乃進學求益之道今臨之意則以古先之事爲不足法今日之事足矣. 不可更有進也. 此乃塞進善之門絶稽古之路方主上春秋之富進德之際而其所獻納如是使勸講官稍思職業敢不辨乎若陛下以臣言爲非則狂妄之誅不可避也. 萬一以臣言爲是則願陛下明示好古求道之意使朝廷在位皆知之雖鄙陋之人見陛下聖慮高明不喜淺近亦將勉思義理不敢任其卑俗之見懼獲鄙於聖鑒矣. 誠如是則將見道學日明至言日進弊風日革爲益孰大於此臣職當辨明義不敢黙臣無任懇切惶懼待罪之至.

『문집』6-18 論開樂御宴奏狀 <元祐二年夏> 臣伏覩有司排備開樂御宴臣備員勸講職在以經義輔導人主事有害義不敢不言夫居喪用喪禮除喪用吉禮因事而行乃常道也. 今若爲開樂張宴則是特爲一喜慶之事失禮意害人情無大於此雖曰: 故事祖宗亦不盡行或以故而罷或因事而行臣愚竊恐祖宗之意亦疑未安故也. 自古太平日久則禮樂純備蓋講求損益而漸至爾雖祖宗故事固有不可改者有當隨事損益者若以爲皆不可改則是昔所未遑今不得復作前所未安後不得復正朝廷之事更無損益之理得爲是乎况先朝美事亦何嘗必行臣前日所言殿上講說是也. 故事未安則守而不改臣前日所言冬至受表賀是也. 臣前後累進狂言未嘗得蒙采用而言之不已者蓋職之所當不敢曠廢伏望聖慈特賜聽納自中降旨罷開樂宴直候因事而用於義爲安冒瀆天威臣無任····.

『문집』6-19 乞歸田里第一狀 <元祐二年十一月初六日> 臣昨任崇政殿說書, 忽奉勅差權同管勾西京國子監. 傳聞有言事官言臣罪狀臣旣知是責命禮當奔走就職今已到任訖方敢傾瀝懇誠仰干天聽. 竊念臣本草萊之人因二三大臣論薦遂蒙朝廷擢任置之經筵授以朝階今旣有罪不使勸講則所受之官理當還奪雖朝廷務存寬厚在臣義所難處伏望聖慈許臣納官歸田里以安愚分冒凟宸嚴臣無任···. 貼黃 若臣元是朝官朝廷用爲說書雖罷說書却以朝官去乃其分也. 臣本無官, 只因說書授以朝官旣罷說書獨取朝官而去極無義理

『문집』6-20 第二狀 <十二月十八日> 臣今月十四日准河南府送到尙書省箚子一道以臣乞歸田里奉聖旨不允所乞者聞命惶懼不知所安須至再竭悃誠上煩天聽. 臣昨自崇政殿說書受勑權同管勾西京國子監傳聞因諫官有言臣雖不知所言何事必是罪惡有實竊念臣畎畝之人因司馬光呂公著韓絳等以行義稱薦蒙朝廷受官今旣有罪惡是無行義自當追奪以正誤朝廷之罪. 尙叨祿位, 有何義理? 臣愚竊意朝廷顧惜事體以嘗旌用不欲放棄臣竊以爲不然始聞其善而用之陛下急賢之心也. 後見其惡而去之至公之道也. 伏望聖慈俯鑒丹誠許歸田里

『문집』6-21 第三狀 <元祐三年春> 臣竊以見善而用見不善而退人主黜陟之至公道合則從不合則去儒者進退之大節黜陟失當則亂所由生進退忘義則道所由廢. 愚臣無狀蒙陛下擢自衡茅寘之勸講旋以人言至於黜逐朝廷信其惡矣. 愚臣道不用矣. 信其惡而使之在官恐非黜陟之當道不用而徒玆苟祿殊乖進退之義臣是以不敢遑寧繼上封章願歸田里待命三月未奉<一作聞>兪音在臣義旣當去敢不固請與其至於凟而加罪曷若因其請而使去臣非不知享祿勝於躬耕貧匱不如溫足顧以讀書爲儒粗知廉恥不敢枉道以求苟安伏望聖慈矜察至誠俾完素守苟遂丘園之請敢忘天地之恩罔避誅夷必期兪允.

『문집』6-22 乞致仕第一狀 臣伏自到任三具奏陳乞歸田里待命又已三月未得指揮在臣所以求去之義前後陳述盡矣. 不敢重疊煩凟聖聽竊以朝廷特起臣於畎畝之中寘之經筵使輔導人主非常之擧也. 旣以罪去若包羞苟得不顧去就之義實懼萬世之下非笑聖朝之擧臣是以屢冒天威必期得請自古爲臣陳力不能則致其仕禮也. 切恐朝廷顧惜事體旣已招來不欲放棄臣更不敢乞歸田里只乞令臣致仕伏望聖慈察其懇誠特賜兪允.

『문집』6-23 第二狀 臣自到任三請歸田一乞致仕至今未得指揮須至再竭懇誠仰冀省察. 方皇帝陛下嗣位之初太皇太后臨朝之始一新政事首及人才擢臣草野之中處以勸講之職觀陛下好賢之心可謂至矣. 惟陛下用人之意不其深乎歷觀簡策自古母后臨朝未有能爲如此之事者豈止聳動一時足以輝光千古臣旣遭遇如此宜有令德重望爲朝廷光而乃德義不修誠意不至上不能取信人主下不能鎭服浮議遂致詆毁潛加罪釁陰積招延未幾斥逐隨至使陛下高古之盛美翻爲天下所譏議古之君子用之則其君尊榮今臣之進乃爲聖明之累則臣之罪大矣. 尙以何義復齒仕列臣是以累上封章願歸田里臣若得去則天下後世當謂陛下前日招延雖不得獲上有道明哲保身之士猶不失行已有恥進退顧義之人則朝廷之擧未爲大過二三大臣之薦未爲甚欺故臣之累請不止自爲亦所以爲朝廷也. 不知臣者不以臣爲忿躁必以爲沽激臣豈然哉! 臣身傳至學心存事道不得行於時尙當行於已不見信於今尙期信於後安肯失禮害義以自毁於後世乎蓋質之聖賢考之經義爲當然爾况去就之義豈獨臣知之學道者所共知也. 願陛下遍詢輔臣臣之請爲義乎爲非義乎如以爲非義是臣所學偏謬不敢避愚妄煩凟之罪如以爲義則乞從臣之請或朝廷顧惜事體不欲使歸田里只乞令臣致仕.

『문집』6-24 辭免服除直秘閣判西京國子監狀 <元祐七年四月> 臣今月一日准河南府差人送到官誥一道伏蒙聖恩授臣左通直郞直秘閣權判西京國子監者臣昨被責命出爲外官夙夜靡遑惟是內省始蒙招致之禮旋爲爲黜逐之人將胡顔以立朝當自劾而引去至於五請而未聽豈可力辯以求伸遂且從容以須替罷未及任滿遽丁家艱思無忝於所生惟堅持於素節未終喪制已降除書上體眷恩內深愧懼. 伏念臣志存守道識昧隨時俗所忌憎動招謗毁昨蒙擢任旣以人言被黜爲朝廷羞矣. 今復授以職任適足重爲朝廷羞無所益於明時徒取笑於後世伏望聖慈矜察愚誠追寢恩命臣昨因丁憂旣已去官今來所降誥命不敢祇受已於河南府寄納伏乞朝廷撿會臣前來五次奏陳特賜指揮許歸田里.

『문집』6-25 再辭免表. 臣頤言: 昨蒙聖恩授臣左通直郞直秘閣權判西京國子監尋具狀辭免今月十九日河南府送到尙書省箚子奉聖旨不許辭免者斥逐之人分當遠引甄收之命義實難安<中謝> 伏念臣力學有年以身任道唯知耕養以求志不希聞達以干時皇帝陛下詔起臣於草野之中面授臣以講說之職臣竊思之得以講學侍人主苟能致人主得堯舜禹湯文武之道則天下享唐虞夏商周之治儒者逢時孰過於此臣是以躍然有許國之心在職歲餘夙夜畢精竭慮蓋非徒爲辯辭解釋文義唯欲積其誠意感通聖心徯交發志之孚方進沃心之論實覬不傳之學復明於今日作聖之效遠繼於先王自二年春後來臣每進說陛下常首肯應臣臣知陛下聖資樂學誠自以謂千載之遇也. 而不思道大則難容跡孤者易躓入朝見嫉世俗之常態名高毁甚史冊之明言如臣至愚豈免衆口不能取信於上而欲爲繼古之事成希世之功人皆知其難也. 臣何狂簡敢爾覬幸宜其獲罪明時見嗟公論志旣乖於事道義當致於爲臣屢懇請而未從俄遭憂而罷去銜恤旣終於喪制退身當遂於初心豈捨王哉! 忠戀之誠雖至不得已也. 去就之義當然. 自惟衰邁之軀得就安閒之地聞今傳後更有望於殘年行道致君甘息心於聖世豈期矜貸尙俾甄升恩雖甚隆義則難處前日朝廷不知其不肖使之勸學人主不用則亦已矣. 若復無恥以苟祿位孟子所謂是爲壟斷也. 儒者進退當如是乎臣非苟自重實懼上累聖明使天下後世謂朝廷特起之士乃貪利苟得之人甚可羞也. 臣猶羞之况朝廷乎在臣無可受之理敢冒萬死上還恩命伏乞撿會臣前後累奏特賜指揮 貼黃 臣家傳忠孝世受國恩擢自草萊久侍經閣豈無愛君報國之心義迫當去無路自効惟今日冒死爲陛下陳儒者進退之道爲臣去就之義覬望有補乃區區上報之心也. 貼黃 臣求去與辭官前後七章陳說進退之義旣已詳明言亦盡於此矣. 皆據經義非出私意伏望聖明特賜省察

『문집』6-26 謝管勾崇福宮狀 <元祐七年五月> 臣昨蒙聖恩除臣左通直郞直秘閣權判西京國子監兩具表狀免辭乞歸田里今月十日准勅特授左通直郞管勾西京嵩山崇福宮者誤蒙甄錄再露封章不敢遜言惟盡敬主之意深陳古義蓋存報國之心天聽至高言已盡而誠孚未格君威難犯慮其凟而憂懼交深非特畏於刑章實願存於國體幸蒙寬貸豈敢頻煩臣更不敢固違朝命所降勅牒臣已領訖伏爲見患腰跨拜受未得候痊損日謝恩就職次

『문집』6-27 申河南府乞尋醫狀 <元祐七年八月> 頤昨准勅授左通直郞管勾嵩山崇福宮尋具奏聞爲患腰跨拜受未得候痊損日謝恩就職次今來已滿百日未得痊安竊懼久稽朝命欲乞尋醫謹具申西京留府伏乞依條施行

『문집』6-28 辭免再除直秘閣判監狀 <元祐九年春> 臣今月十四日准河南府送到官誥一道尙書省箚子一道伏蒙聖恩授臣依前左通直郞直秘閣權判西京國子監專主敎導者祇荷睿恩不任惶懼. 恭以皇帝陛下親政之初萬邦黎獻至于海隅蒼生夷狄蠻貊之人莫不仰首以觀傾耳. 而聽今聽政未及兩月而念及勸學舊臣, 收錄於退藏之中. 玆見陛下聖明崇儒重道事無不察足以聳動天下然而處得其道用當其人乃允公論爲盛美之事不然則四方傳議, 反累聖政. 伏念臣去年丁憂服闋之初已蒙朝廷授此職任臣以於義未安兩具奏辭免陳儒者進退之義已極詳明但恐微賤之言繫常程文字卽以付外不曾得經聖覽旣而改命祠宮遂以尋醫得去方安愚分忽被誤恩雖仰荷於甄收敢自渝其節守伏望聖慈曲憐舊物深鑒丹誠將臣前來辭免表狀特賜省覽則知臣所以辭者蓋守古義非出私意所降誥命不敢祇受已於河南府寄納冒凟宸嚴臣無任.

『문집』6-29 再辭免狀 臣昨蒙聖恩授臣依前左通直郞直秘閣權判西京國子監尋具狀辭免今月十七日河南府送到尙書省箚子一道奉聖旨不許辭免者聞命惶懼不知所措臣聞邦有道危言危行邦無道危行言孫今主上親政之初臣未極其言而遽爲孫言則不敬莫大乎是臣是以不避斧鉞之誅而必盡其辭也. 臣昨被恩命卽具奏陳乞將臣丁憂服闋之初辭免表狀特賜省覽則知臣所以辭者蓋守古義非出私意今奉聖旨不許辭免臣誠至愚不喩朝廷之意不知以臣前日所陳進退之義爲是乎爲非乎若以爲是則受爲非義臣四十年學聖人之道敢以非義而受致朝廷於過擧乎若以臣前日所陳爲非是臣狂妄不知義理狂妄不知義理之人使去宜也. 豈可處敎導之職不知使臣以何義受之? 臣竊思之豈非朝廷以臣微賤去就不足爲輕重故忽棄其言陛下不經省覽而輔臣莫以告也. 臣誠微賤然臣之言本諸聖賢之言臣之進退守儒者進退之道雖朝廷不見省察臣恐天下後世有誦其言思其義而以進退儒者之道議朝廷也. 故臣區區愛君之意不能自已尙冀微誠感悟聖心謹昧死以聞不敢受命再凟宸嚴臣無任

『문집』6-30 謝復官表 <元符三年十月> 臣頤言今月二十日准河南府送到官誥一道伏蒙聖恩授臣通直郞權判西京國子監者始竄遐荒分甘終廢豈期洪造復畀舊官仰荷恩私伏增愧懼<中謝> 竊念臣天資愚暗自致放投旣仰荷於寬恩如安居於樂土忽遇非常之宥繼蒙牽復之恩玆蓋伏遇皇帝陛下道大兼容明無不照念先帝經筵之舊推至仁愛物之心臣敢不益善其身勵精所學期有傳於後世以上報於深恩!

宋程頤撰 學制

『문집』7-1 三學看詳文 <元祐元年五月> 一三學制看詳舊制公私試試上舍補內舍蓋無虛月皆糊名考校排定高下煩勞費用不可勝言於學者都無所益學校禮義相先之地而月使之爭殊非敎養之道今立法改試爲課更不考定高下只輪番請召學生當面下點抹敎其未至所貴有益學者不失庠序之體舊制考察行蓺以不犯罰爲行試在高等爲蓺有注官免省試免解三等旌擢今不用舊考察法只於內舍推擇才學行蓺爲衆所稱者升爲上舍上舍學行才器堪爲時用者長貳狀其行能聞於朝廷 一三學制看詳太學舊制博士二人同講一經論語孟子又置學諭分講聖人之道雖一而治經家法各有不同二人同講一經則學者所從不一今立法置博士十人六人分講六經餘四人分講論語孟子講大經終者却講小經諸經輪互講說有專經者亦許通那 一律學制看詳律學之設蓋欲居官者知爲政之方其未出官及未有官人且當專意經術並令入太學乃學古入官之義今立法到吏部人方許入律學 一武學制看詳所治經書有三略六韜尉繚子鄙淺無取今減去却添入孝經論語孟子左氏傳言兵事 一三學制看詳舊來條制有期親尊長服不許應擧後來改法雖祖父母喪亦許應擧夫尊祖之義人道之本若許居喪進取深害義理今立法學生遭祖父母喪給長假行服貢擧條貫乞朝廷指揮修改.

『문집』7-2 論改學制事目 一舊來博士只是講說考校不治學事所以別置正錄十員今已立法博士分治學事及增置職事人其正錄並合減罷<所減罷官乞與比類差遣俸給如舊及依元條年限改官> 一舊制八十齋每齋三十人學生以二千四百人爲額每齋五間容三十人極甚迫窄至兩人共一臥榻暑月難處遂更互請假出外學者失所如此而願留者止爲解額優寬而已今欲以七間爲一齋容三十人除學官職事人及諸般占使外可爲五十齋所容千五百人在朝廷廣敎之意雖爲未足而齋舍未能遽增所容止可如此若朝廷選通儒爲敎導之官去利誘來實學之士人數雖減成才必多 一國學解額嘉祐以前一百人自元豐後欲得擧人入學遂設利誘之法改作太學解額五百人又患來者遽去復立一年之限以拘留之近日朝廷知其非便已改去逐次科場一年之限然而人數歲歲增添以外處解名比之五百人額當有萬餘人奔湊使萬餘人捨父母之養忘骨肉之愛往來道路旅寓他土人心日偸士風日薄所費財幾何所破産幾何少年子弟遠父兄而放蕩者幾何父母骨肉離別悲念以至失所者幾何以萬餘人聚之京師弊害不可勝言今欲量留一百人解額以待在學者取應餘四百人分在州郡解額窄處自然士人各安鄕土養其孝愛之心息其奔趨流浪之志風俗亦當稍厚况人於鄕里行迹易知冒濫之弊因而少革 一近年編修勅條並立看詳要見刪改因依今來國子監勅令是有司所行條貫已立看詳外有三學制皆是庠序之事與佗處條貫體面不同今來條立所存舊文甚少觀文可見義理乞更不立看詳.

『문집』7-3 回禮部取問狀 準尙書禮部帖子, 仰國子監修太學條制手分依下項所問事理具印狀送尙書禮部. 一本部看詳創法有司推行之際須有條目事實方可經久施行今來尊賢立堂待賓吏師立齋並繫創立卽未見得祭酒司業以下如何延請尊禮學錄以下如何供億條目合有幾其人在學若干歲月朝廷如何進用又待賓吏師二齋不言無人卽虛若無其人未委合與不合亦虛 勘會學制尊賢堂以延天下道德之士學者所矜式者長貳以下尊禮之學錄一人專主供億無其人則虛之所謂道德之士不必遠引古者以近時言之如胡太常瑗張著作載邵推官雍之輩所居之鄕學者不遠千里而至願一識其面一聞其言以爲模楷有如此之人至於京師則長貳造門求見道學者願得矜式之意延請居於堂中或一至或時來或淹留旬時不可必其久速也. 不獨學者得以矜式而已又以見長貳之爲敎不敢足諸已旣上求古之人復博采今之士取善服義如恐不及乃爲敎之大本化人之要道如此待之卽是尊禮所謂供億只是灑埽堂室供給飮膳學錄專主所貴整肅不須更立條目待賓吏師體皆相類無人則虛理自當爾只於一處立文自可見矣. 一看詳文稱朝廷廣敎之意不當有限只於齋舍立定可容人數每齋改爲七間繫咸二十四齋止容一千六百餘人卽是立限比舊更窄又條稱三舍每齋七楹其看詳文却稱七間爲一齋有此間架不同又稱舊制每齋五間至兩人共一臥榻暑月難處未見得今來各展兩間設與不設三十臥榻其大學見今屋宇若依新立條貫一齋七間修截得若干齋舍有無妨闕又條稱若學行著聞及曾得解人並免試使入內舍如何容著 勘會看詳文稱朝廷廣敎之意不當有限蓋謂不當立定二千四百人之限若逐齋人數自是據地位所容難爲强使之多齋舍多少則繫朝廷處之雖使未及徐圖之可也. 蓋無立定限數之意若不恤齋舍寬窄苟欲人數之多使學者不安其居乃是徒爲美觀不務實事非聖朝立事之意所稱每齋七楹則是七間別無間架不同見今學舍除學官職事人及諸般占使外可爲五十餘齋每齋置三十臥榻並是量度丈尺算計可容舊來常是二人, 或有三人共一榻, 不惟暑月難處, 兼褻凟至甚. 其學行著聞及曾得解人免試入學逐齋人數自定卽無容著不得之理 一舊制考行蓺以不犯罰爲行試在高等爲蓺今來看詳文稱不用舊考察法只於內舍推擇才學行蓺爲衆所稱者升爲上舍上舍學行才器堪爲時用者長貳狀其行能聞於朝廷未見得長貳如何推擇及狀其行能其條目事實各合如何聞於朝廷如何推恩又旣不用舊法考察若曾犯罰及課曾在退等合與不合推擇如推擇有不當及生員在齋供課代筆竊用佗人文字如何防察 勘會舊考察法專據文簿計校等差所以今來立法只委長貳以公議推擇凡所推擇一繫長貳鑒裁長貳公明與否則繫朝廷所任用在朝廷豈可不信所任用而專考驗於案籍自古推賢進善未聞如此今但取學行才器堪爲時用者聞於朝廷所推恩數自繫朝廷裁處有司不當立法所狀行能各隨人之所有難爲更立條目旣推學行才器之人推擇不當自有論如律之文更不須繁文勘會犯罰退等之類其在齋供課明有長諭察視不得交互課卷之文兼供課與舊來公私試不同別無陞黜自少代筆竊用之事有則自當罰格若更苛細曲爲防閑甚失庠序之體 一擧人及仕宦家子弟, 鬪毆使酒等, 本監採察牒開封府或本貫施行本部看詳條稱仕宦家子弟據文卽雖作工商諸色在公之人其家各曾仕宦及見仕宦亦是仕宦家子弟如何却令國子監採察若本監止是採察仕宦家子弟爲擧人者卽今來立文未盡又稱擧人及仕宦家子弟據文卽擧人家子弟亦在其中若本監不採察擧人家子弟卽立文亦是未盡兼看詳假有擧人本貫是廣南因游學在西川, 若有犯牒與本貫施行有無迂枉? 本所勘會監勅稱擧人及仕宦家子弟蓋是兩般猶言擧人若仕宦家子弟也. 凡文若是一事而言及者必須以重及輕未有以輕及重者豈有先言擧人以及仕宦之理如或以爲不明卽可改及爲若古者四民各世其業後世法度不立失守易業仕族之貴而爲工商雜類者有矣. 此朝廷當禁而未能者固未嘗立文許其然也. 旣流落入於非類豈復能責其士人行檢况自來條制凡爲品官家立法皆是仕族之體未嘗更開說若爲工商之類時則如何也. 略擧一二事以爲證如舊衣服令五品以上子孫婚聽假以爵弁卽不言若充軍及遭黥杖者之類許假與否又雜令品官家雖不請券並聽入驛卽不言子弟爲卒僕乞丐者之類許入驛與否此蓋大體立法不可亦謂之立文不盡欲厚風敎當由仕族始所以立法之意欲幷包仕族子弟若指定爲擧人者則年少學業未成或治家不暇應擧者皆不及也. 所云牒開封府或本貫施行或者疑辭量可而行爾安得便見迂枉必云牒本貫者蓋人之惡最恥聞於鄕里立文所以爲警且暴一罪而使之一鄕知戒所益甚大 一新制稱四方士人願觀光者掌儀引入游覽堂舍觀禮儀聽絃誦唯不得入齋願觀光者旣不得入齋卽未見得於何處觀禮儀聽絃誦又其觀聽繫在何時若願觀光者無時得入卽掌儀疲於接引亦非學校之體若限以時則新制無法又言士人願觀講說者聽堂上相見今看詳願觀講說者未見令何人引入如何相見若願觀之人衆至位次不足如何序齒如何令坐皆未有法 本所勘會太學首善之地將以流化天下從來賓客不得過客位天下之士徒聞朝廷有學而不得見其規制視其法度所以今來立觀光之法觀學者出入往來少長有敍威儀濟濟卽是觀禮儀行廊廡之間聞諸齋絃誦之聲卽是聽絃誦自可使觀光之士以爲盛談流傳天下何必須入齋中及更立處所學制通客之時自有明文卽無無時得入之說所謂掌儀疲於引接亦無是理以太學之大掌儀八人之多又早晩不許通客不當升堂掌禮之時常輪一人延接四方之士極非過當設使美化大行願觀者衆數時之間不過數番而已樂使人嚮善者固不憚其煩也. 况又更休願觀講說者卽是賓客明有學制門吏白直學後報所見之人相見自有常儀坐位自有爵齒不須煩文往年胡博士瑗講易常有外來請聽者多或至千數人孫殿丞復說春秋初講旬日間來者莫知其數堂上不容然後謝之立聽戶外者甚衆當時春秋之學爲之一盛至今數十年傳爲美事 一合支用條制所不載者長貳裁度支破今要見如何裁度支破因何刪去舊條比類二字本所勘會本監支費隨宜應用條制豈能具載舊條長貳審量比類支給若須比類必多拘礙或無類例亦須裁度所以立法但云裁度刪去比類二字用比類字則關防之意多去二字則委付之意重朝廷之任長貳自當有體

『문집』7-4 論禮部看詳狀 准都省送下禮部狀看詳三學制國子監勅勒送國子監長貳與元修官同共再行看詳已於某月日與長貳同狀供去訖竊慮朝廷只見禮部一面辭說未盡見元初立法之意今却將禮部看詳事節逐一開析如後 一學制尊賢堂待賓齋吏師齋等先准禮部帖子取問修條制所, 今來尊賢立堂待賓吏師立齋卽未見得祭酒以下如何延請? 尊禮學錄以下如何供億條目各合有幾其人在學若干歲月朝廷如何進用? 本所爲見禮部所問與立法意全不相似遂逐一開析供答. 今來送到禮部看詳所駁之事却已改換了前來所難之意却稱學士大夫有賢可尊, 朝廷自當褒顯以勸多士不應有遺却於學校立法俟其自至京師然後祭酒以下延請尊禮. 再詳所駁依前誤認立法之意雖是朝廷褒顯之士苟未大用何妨學校延請何必須待朝廷所遺方得尊禮不應有遺之說大非朝廷用心雖古盛治之世賢才並用尙旁求博采未嘗敢言已無遺也. 又云若一至或時來或淹留旬時殆非尊禮之實亦恐道德之士出處去來不應如此此蓋因禮部取問其人在學若干歲月故本所如此供答大意謂道德之士一見其人足以矜式一聞其言足以興起得其一至猶足爲益况淹久乎或速或久繫其人所處之勢固難必也. 如此尊賢之道可謂至矣. 而禮部以爲非尊禮之實不知如何乃謂之實也. 夫與人爲善君子所樂亂國之聘夫子亦往從太學之禮請而云道德之士出處去來不應如此似不知君子出處之道本所供答禮部狀稱<全文具回禮部取問狀內>今來禮部看詳引所供狀只至矜式而已字便住將一段文義中間截斷要切義理都將刪去又云尊賢堂稱無人則虛待賓吏師二齋不言無人則虛有司無所執守切緣學制是學校之事將付之儒臣以治學者與尋常吏文不同今來禮部蓋欲全用吏文若使吏人以吏文格之則新修之學制皆不可用 一禮部看詳四方士人願觀光一事但云難議施行不言所以伏乞朝廷詳酌 一禮部看詳舊法每齋五間容三十人不聞有訴窄狹者今新立條制每齋展爲七間止容得一千六百餘人有八百餘人須至遣出勘會自來暑月齋舍中難處須至更互請假出外今年尤甚應是在學已及一年可以應擧者往往遷出朝廷立定齋舍間數豈有學者自訴窄狹之理今來立定逐齋所容人數之法亦須乘學者稀少之時漸次修展<某年只幾人>豈有一旦遣出之事以至增添牀榻皆有法度並是據間架丈尺算計不惟寬涼兼是齊整又云卽是齋舍數目未有定論夫今日所設學官職事人及其餘事皆是且據今日學舍爲之安用須立數目定論太平日久則文風益盛學者益衆故唐至貞觀六年以後學生增至三千二百異日朝廷美化大行事力克盛學生之員增至唐生員之數未爲過也. 何必須要立定數目 一三舍升補推擇法禮部所駁最詳竊以舊法惟三舍升補一事最爲未便天下人所以議論言者所以爲言朝廷所以重修及爭競之端獄訟之興皆由於此而禮部乃云三舍升補法爲最完密不可以廢則禮部用意可見其看詳云行法以來至今七年得推恩授官纔一人其中選艱難又如此夫朝廷養士唯欲成材之多豈以艱難爲貴以二千人之衆七年之久通其去來不知幾千人矣. 應授官者纔一人何其少也. 正由書行蓺考察之法不可用爾夫人之美行天之尊爵莫過於仁義忠信樂善不倦不知前日有書此而蒙考察者乎又云今來一切略去此法惟令長貳推擇行蓺衆所稱者升爲上舍緣行蓺若無法考驗卽無事實可據恐人情不服別致爭訟夫案文責跡有司之事非庠序育材論秀之道且立之以格考之以文則人案跡以求差殊爭心所以起也. 授之賢才重其委任則人無辭以犯分義訟所以息也. 今以專任長貳爲不可是不知治體之甚古之時天子擇宰相而任之政宰相擇諸司長官而委之治諸司長官各擇其屬而授以事治功所以成也. 後世朝廷授法必達乎下長官守法而不得有爲前日考察之法是也. 始於諸齋而由正錄博士以及長貳諸齋所取學官就其中而論之不得有易也. 學官所考長貳就其中而論之不得有易也. 易之則按文責跡入於罪矣. 是事成於下而下得以制其上此後世所以不治也. 今欲朝廷專任長貳長貳自委之屬官以達於下取舍在長貳則上下之體順而各得致其功先王爲治之道也. 難者必曰: 長貳得人則善矣. 或非其人不若使防閑詳密上下相制爲可循守也. 此世俗鄙論烏足以言治道先王制法待人而行未聞立不得人之法也. 苟長貳非人不知敎育之道徒守虛文密法果足以成人才乎自古以來未有如是而能成治者也. 一禮部看詳博士十人六人分講六經四人分講論語孟子難以施行今詳禮部所駁之意却是不知太學有四堂自來分講諸經四處各講論語孟子又云諸經輪互講說若治經家法不同愈見紛亂夫人講一經則終一經是一家之學比之人講一授安得却爲紛亂又云一人日專一經不惟已勞如有疾故在假月日稍久不免別那博士代講學者所從亦安能一博士之職比之佗官極爲淸簡日講書一授不足爲勞人專一經所從自一若疾病稍久或他事故則出無可奈何不當以此爲限 一禮部看詳武學入學之法難以施行乃是禮部未喩立法之意乞自朝廷詳察其中更不引試便入外舍尤爲疎簡其間豈無隳業苟求之人亦是禮部未詳外舍之法其外舍立法已甚詳密不過一月須試又不許請假隳業之人無由久容 一禮部看詳律學本以敎習法律今來却令講經讀史不唯事情迂濶兼妨廢生員專意法律夫法律之意蓋本諸經先能知經乃可議律專意法律者胥吏之事可以行文案治期會貫通經義者士人之事也. 可以爲政治民所以律學必使兼治經史又云太學博士通取幕職州縣官律學博士却止取承務郞以上難以施行緣太學生秖是布衣之士或未出官人設有已歷官人願入亦是能自折節之人律學皆是已從仕者所以敎官須宜稍重 一禮部看詳武學制減去三略六韜尉繚子却合添習孝經論語孟子於事情迂濶難以施行勘會元立法減去三略等蓋爲鄙淺無取今禮部以爲有取恐是不曾硏究其添入孝經論語等蓋欲武勇之士能知義理比之漢明帝令羽林通孝經唐太宗使飛騎受經尙未足爲迂濶 一禮部看詳未有官人不許入律學卽擧人盡當遣出但立入學之法先在學之人久須自去豈有遣出之理又云已有官人使之習學法律以應吏部試格正其宜分難令與未有官人一例不許入學難以施行夫學古入官古之制也. 未出官人且令入太學專治經術最爲善意不可改也. 一禮部看詳國子監勅主簿書庫官職事不至繁重難以不依常制擧官勘會主簿專管莊土支收文案諸事最爲繁重書庫官本職外准備本監逐時差委幹當皆須公勤幹敏之人立法不依常制擧官所貴得人禮部又引本所修立上條不曾申明得旨勅條不許旣曰: 修條卽須損益舊法豈可却引舊條破難朝廷差官修條卽當盡其所見聽朝廷取舍若令逐事先申明取旨不唯於體非是兼亦於法無文 一禮部看詳助敎雖緣進納亦繫有官人難以却令繳納誥勅繫牴牾勘會上條繫舊法竊詳元初立法之意蓋爲助敎皆是富民只納數百千便得爲士人卽恐流類混雜又不可絶人進善所以願納誥身乃許入學今來禮部駁難必爲專指助敎其餘進納官却無此法蓋進納自齋郞以上朝廷許其臨政治民難爲不許入學監學立法又不可侵議進納條貫所以專指助敎 一禮部看詳大率以檢察士人爲不可竊以朝廷欲厚風敎必自士人始近世士風薄惡士人不修行檢或無異於市井小人朝廷未嘗有法以敎勵檢束之也. 近年方有檢察擧人條貫今來立法更加增益使之詳備蓋欲士人有所忌憚而天下知朝廷欲厚風敎之意習俗漸化今禮部難云牒開封府或本貫施行卽不說如何施行事節又帖子<文具回禮部取問狀>勘會學生在學有犯則依學規待學者之道也. 擧人及仕族子弟有犯於外自有條法更令本監察訪者蓋欲朝廷有法檢束士人知所戒懼爾况所察皆是顯惡失士人之行者難爲因本監察訪不用常憲又云假有擧人本貫是廣南游學在西川若有所犯却牒廣南施行顯是迂枉今令本監採訪及牒開封府則是在京所以更云或本貫者或者疑辭蓋量宜可牒本貫則牒本貫欲其一鄕知戒爾禮部有西川牒廣南之說乃是誤認立法之意 一禮部看詳稱三舍升補法不可以廢須用命官正錄其三舍升補舊法事理甚明白賢愚所共知繫在朝廷取舍又云新條添置學生充正錄人給錢米屋若干未見支錢米去處切緣自來職事人皆有俸錢禮部合知支錢去處又云屋見繫出賃收掠房錢難以施行錢旣可支屋亦何異新條明載於閒慢處支撥無難行之理 一禮部看詳舊條錢物格令所不載者長貳審詳比類 支給今來所修新條刪去比類二字只令長貳裁度支破緣存比類二字卽臨時輕重多寡有所依倣不至過有支破合依舊存比類二字禮部先有帖子取問本所因何刪去舊條比類二字本所供答稱勘會本監支費<文具回禮部取問狀內>其事理甚明乞自朝廷詳酌 一禮部勘會官員在職遭祖父母喪不許解官行服今若獨令擧人不得應擧考之人情法意皆所未安竊以官員在職蓋守其常擧人應擧乃是求進律禁冒哀求仕不聞禁冒哀守常也. 官員與擧人事體不同又云今乞修改貢擧條貫及立到上條遭祖父母喪給長假奔喪等事難議施行學生遭祖父母喪非有君事官守安然不奔自非不孝甚惡之人不應至此學校所以厚人倫立法固當敎以尊祖若祖父母喪不許奔深害人理 一禮部看詳: 新制博士減去二員又令一人專講一經無輪講法又添分治學事比舊已是煩勞兼月課先須考較緣又考課卷不少又令五人爲番請召對面點抹慮日力不給却成苟簡亦生員請益恐不暇應答難以施行自來學中生員整會假限辯理事節自有牒訴如聽訟之所今來修改法制無致訟之端學事淸簡博士日逐說書治學事不爲煩勞改試爲課乃學校大體當面點抹敎告爲益最多舊來公私試排比名次衆人爭計高下必銖銖而校之用功甚多當面讀過指其瑕病用力甚少一日只請三番計人數十日可畢今限半月已甚優游又有長貳察其當否之法無日力不足却成苟簡之事自來學官學生皆不相識今則人人相接易爲誘益 一禮部看詳改齋諭爲學諭名稱不正自慶歷學制逐齋置學諭蓋學正者大學之正也. 學諭者敎諭爲學者也. 義各不同非是名稱不正齋諭之名不成意義今來改作學諭本爲正名又云長貳選差與舊法不同難議施行帖子稱舊令繫令博士參預不唯知接生員親於長貳亦或互相防檢無所容私新條立意大率唯是欲朝廷重倚任故使長貳自委其屬禮部所難大率唯是欲密爲防檢恐其有私若使屬與其長互相防檢非先王之道 一禮部看詳保官狀式舊條稱私罪徒今條稱私罪情重舊條稱徭人幷相容隱之人不許爲保今條內刪去又舊條稱曾經屛斥之人不許人保今條內稱自來士行無闕舊條稱未及七十今條內稱年若干並無刪改因依兼慮士行無闕立文太泛有司難以執用勘會私罪雖不至徒有情重不可爲保者徭人與歸明無異相隱之人及七十以上自有海行格式旣云士行無闕則曾經屛斥在其中矣. 一禮部看詳學規舊制不齒之罰一曰: 盜博鬪毆今刪去盜字卽未委犯盜合如何施行若謂行止乖惡注云乖惡多端犯名敎者皆是包盜在內又緣謗訕悖慢兇恣受賕鬪毆之類亦是有犯名敎亦是包括在內今却分立兼行止乖惡舊無此一項切緣學校所以檢束學者不可設盜賊之法况有行止乖惡一條凡言之醜者皆麗其中他犯可言者自合分立條項.

『문집』7-5 修立孔氏條制 一添賜田幷舊賜爲五百頃設溝封爲奉聖鄕世襲奉聖公爵以奉祭祀不使更爲他官位在中大夫之下. 如有高才重德朝廷必賴其用卽令嗣子奉祀事○ 一所賜田蠲免稅賦依鄕川厚薄召人種佃其佃戶並免差徭夫役○ 一奉聖公表章慶賀進奉聖節, 並依兗州例朝廷頒歷賜衣等恩數並依兗州知州每遇大禮許入覲陪位○ 一奉聖公差當直兵士二十人○ 一奉聖公宅敎授一人主導翊襲封之人及敎導其嗣子吏部於擧到學官選差○ 一置官一員主其家事或只令仙源縣簿尉兼管.

宋程頤撰 雜著

『문집』8-1 顔子所好何學論先生始冠遊太學, 胡安定以是試諸生. 得此論, 大驚異之, 卽請相見. 遂以先生爲學職.

聖人之門, 其徒三千, 獨稱顔子爲好學. 夫詩、書、六藝, 三千子非不習而通也. 然則顔子所獨好者, 何學也? 學以至聖人之道也. 聖人可學而至歟? 曰: 然. 學之道, 如何? 曰: 天地儲精得五行之秀者, 爲人其本也. 眞而靜, 其未發也, 五性具焉, 曰: 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曰: 喜怒哀樂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是故覺者約其情, 始合於中正, 其心養其性. 故曰: 性其情. 愚者則不知制之, 縱其情而至於邪僻, 梏其性而亡之. 故曰: 情其性. 凡學之道, 正其心, 養其性而已. 中正而誠, 則聖矣. 君子之學, 必先明諸心, 知所養一作往, 然後力行以求至, 所謂'自明而誠'也. 故學必盡其心, 盡其心則知其性; 知其性, 反而誠之, 聖人也. 故<洪範>曰: "思曰睿, 睿作聖." 誠之之道在乎信道篤, 信道篤, 則行之果; 行之果, 則守之固, 仁義忠信不離乎心,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出處語黙必於是. 久而弗失, 則居之安, 動容周旋中禮, 而邪僻之心無自生矣. 故顔子所事則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仲尼稱之則曰: "得一善, 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又曰: "不遷怒, 不貳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此其好之篤, 學之之道也. 視聽言動皆禮矣, 所異於聖人者, 盖聖人則不思而得, 不勉而中, 從容中道; 顔子則必思而後得, 必勉而後中. 故曰: "顔子之與聖人, 相去一息." 孟子曰: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謂神." 顔子之德, 可謂充實而有光輝矣, 所未至者守之也, 非化之也. 以其好學之心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故仲尼曰: "不幸短命死矣." 盖傷其不得至於聖人也. 所謂化之者, 入於神而自然不思而得, 不勉而中之謂也. 孔子曰: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是也. 或曰: "聖人生而知之者也. 今謂可學而至, 其有稽乎?" 曰: "然. 孟子曰: "堯舜, 性之也; 湯武, 反之也. 性之者, 生而知之者也; 反之者, 學而知之者也." 又曰: "孔子則生而知也. 孟子則學而知也." 後人不達, 以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爲學之道遂失, 不求諸已而求諸外, 以博聞强記巧文麗辭爲工, 榮華其言, 鮮有至於道者, 則今之學與顔子所好異矣.

『문집』8-2 養魚記<時年二十二> 書齋之前有石盆池. 家人買魚子食猫見其煦沫也. 不忍因擇可生者得百餘養其中大者如指細者如箸支頤而觀之者竟日始舍之洋洋然魚之得其所也. 終觀之戚戚焉吾之感於中也. 吾讀古聖人書觀古聖人之政禁數罟不得入洿池魚尾不盈尺不中取市不得鬻人不得食聖人之仁養物而不傷也. 如是物獲如是則吾人之樂其生遂其性宜何如哉! 思是<一無此二十字>魚之<一無之字>於是時寧有是困耶? 推是魚孰不可見耶? 魚乎! 魚乎! 細鉤密網吾不得禁之於彼炮燔咀嚼吾得免爾於此吾知江海之大足使爾遂其性思置汝於彼而未得其路徒能以斗斛之水生汝之命生汝誠吾心汝得生已多萬類天地中吾心將奈何魚乎魚乎感吾心之戚戚者豈止魚而已乎? 因作養魚記<一無此上十一字有爾乎二字>. 至和甲午季夏記. 書養魚記後 吾昔作養魚記, 於玆幾三十年矣. 故藁中偶見之. 竊自嘆少而有志不忍毁去觀昔日之所知循今日之所至愧負初心不幾於自棄者乎示諸小子當以吾爲戒. 元豐己未正月戊戌西齋南牕下書.

『문집』8-3 爲家君作試漢州學策問三首(爲太中作試漢州學生策問<三首>) 問: 士之所以貴乎人倫者以明道也. 若止於治聲律爲祿利而已則與夫工技之事將何異乎夫所謂道固若大路然人皆可勉而至也. 如不可學而至則古聖人何爲敎人勤勤如是豈其欺後世邪然學之之道當如何? 後之儒者莫不以爲文章治經術爲務文章則華靡其詞新奇其意取悅人耳. 目而已經術則解釋詞訓較先儒短長立異說以爲已工而已如是之學果可至於道乎仲尼之門獨稱顔子爲好學則曰: 不遷怒不貳過也. 與今之學不其異乎 或曰: 如是則在修身謹行而已夫檢行者設曰: 勉强之可也. 通諸身者姑謹修而可能乎况無諸中不能强於外也. 此爲儒之本諒諸君之所素存也. 幸明辨而詳著於篇

問: 聖人之道傳諸經學者必以經爲本然而諸經之奧多所難明今取其大要各擧其一以言之 夫易卦之德曰: 元亨利貞或爲四曰: 元也. 亨也. 利也. 貞也. 或爲二曰: 大亨也. 利於貞也. 其詞旣同義可異乎所以異者何謂 春秋垂褒貶之法所貶則明矣. 所褒者何事 詩之美刺聖人取其止乎禮義者以爲法於後世晉武公身爲幷奪無衣美之其敎安在 書爲王者軌範不獨著聖之事以爲法也. 亦存其失以示戒爾五子之歌是也. 如盤庚之遷國穆王之訓刑爲是而可法邪爲非而可戒邪 禮記雜出於漢諸儒所傳謬亂多矣. 考之完合於聖人者其篇有幾 夫古人之學貴專不以泛濫爲賢諸君之於經必各有所治人言其所學可也. 惟毋泛毋略

問: 儒者積學於已以待用也. 當世之故固當講明若夫朝廷之治君相謨之斯無間矣. 以一郡而言守之職豈不以養人爲本然而民産不制何術以濟乎困窮吏繇有數何道以寬乎力役比閭無法敎化何由而可行衣食不足風俗何緣而可厚 自唐而上世有循吏著之史冊何今世獨無其人豈古之治不可行於今耶? 抑爲之者不得其道邪思欲仰希前哲之爲上副聖朝之寄何所施設而能及斯 諸君從事於學旣勤且久爲政之方固當明其體要至於民<一作風>俗<一作之>利病皆耳. 目之所接也. 願陳高論, 得以矜式.

『문집』8-4 爲家君書家藏太宗皇帝寶字後(爲太中書家藏寶字後) 先臣少師以府僚事太宗皇帝於開封被眷特異前後所賜親筆多矣. 天聖中遭家難諸父繼亡臣時未冠復在遠方京師賜第外姻守之寶藏之物旣於盜手於今在者乃其遺也. 故太宗遺書惟存十二字其六乃開封文移皆緣祭祀及貢擧事臣恭思太宗皇帝以介弟之貴晉王之重尹正天府而常事之小者皆親書之<自來大臣領州小事多不親書>聖心可見矣. 盖於祀事之嚴取士之重雖細故必親誠孝恭虔之心也. 急賢好士之心也. 嗚呼! 成萬世無窮之基豈不由是心乎愚臣竊謂是心也. 宜爲後聖法元祐四年己巳十一月癸未大中大夫致仕上柱國永年縣開國伯食邑九百戶, 臣程珦題詩(題?).

『문집』8-5 易傳序 易變易也, 隨時變易以從道也. 其爲書也, 廣大悉備, 將以順性命之理, 通幽明之故, 盡事物之情, 而示開物成務之道也. 聖人之憂患後世, 可謂至矣. 去古雖遠, 遺經尙存. 然而前儒失意以傳言, 後學誦言而忘味. 自秦而下, 蓋無傳矣. 予生千載之後, 悼斯文之湮晦, 將俾後人沿流而求源, 此傳所以作也. 易有聖人之道四焉: “以言者尙其辭, 以動者尙其變, 以制器者尙其象, 以卜筮者尙其占.” 吉凶消長之理, 進退存亡之道, 備於辭. 推辭考卦, 可以知變, 象與占在其中矣. 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動則觀其變而玩其占. 得於辭, 不達其意者有矣; 未有不得於辭而能通其意者也. 至微者理也, 至著者象也. 體用一源, 顯微無間. 觀會通以行其典禮, 則辭無所不備. 故善學者, 求言必自近. 易於近者, 非知言者也. 予所傳者辭也, 由辭以得其意, 則在乎人焉. 有宋元符二年己卯正月庚申, 河南程頤正叔謹序.

『문집』8-6 春秋傳序 天之生民, 必有出類之才, 起而君長之, 治之而爭奪息, 導之而生養遂, 敎之而倫理明, 然後人道立, 天道成, 地道平. 二帝而上, 聖賢世出, 隨時有作, 順乎風氣之宜, 不先天以治(開?)人, 各因時而立政. 曁乎三王迭興, 三重旣備, 子丑寅之建正, 忠質文之更尙, 人道備矣, 天運周矣. 聖王旣不復作, 有天下者, 雖欲倣古之跡, 亦私意妄爲而已. 事之謬, 秦至以建亥爲正; 道之悖, 漢專以智力持世; 豈復知先王之道也? 夫子當周之末, 以聖人不復作也, 順天應時之治不復有也, 於是作春秋爲百王不易之大法, 所謂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者也. 先儒之傳曰: 游夏不能贊一辭. 辭不待贊也, 言不能與於斯耳. 斯道也, 惟顔子嘗聞之矣.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此其準的也. 後世以史視春秋, 謂褒善貶惡而已, 至於經世之大法則不知也. 春秋大義數十. 其義雖大, 炳如日星, 乃易見也, 惟其微辭隱義, 時措從宜者爲難知也. 或抑或縱, 或與或奪, 或進或退, 或微或顯, 而得乎義理之安, 文質之中, 寬猛之宜, 是非之公, 乃制事之權衡, 揆道之模範也. 夫觀百物, 而後識化工之神; 聚衆材, 而後知作室之用. 於一事一義而欲窺聖人之用(心), 非上智不能也. 故學春秋者, 必優游涵泳, 黙識心通, 然後能造其微也. 後王知春秋之義, 則雖德非禹湯, 尙可以法三代之治. 自秦而下, 其學不傳. 予悼夫聖人之志不明於後世也, 故作傳以明之, 俾後人通其文而求其義, 得其意而法其用, 則三代可復也. 是傳也, 雖未能極聖人之蘊奧, 庶幾學者得其門而入矣. (有宋崇寧二年癸未四月乙亥, 伊川程頤序.)

『문집』8-7 褉飮詩序 上已褉飮風流遠矣. 而蘭亭之會最爲後人所稱慕者一作爲何哉! 盖其遊多豪逸之才而右軍之書復爲好事者所重爾事之顯晦未嘗不在人也. 潁川陳公廙始治洛居則引流迴環爲泛觴之所元豐乙未首修褉事公廙好古重道所命皆儒學之士旣樂嘉賓形於咏歌有不媿山陰之句諸君屬而和者皆有高致野人程頤不能賦詩因論今昔之異而爲之評曰: 以我好賢方逐樂之心禮義爲疎曠之比道藝當筆札之工誠不媿矣. 安知後日之視今日不若今人之慕昔人也哉!

『문집』8-8 論漢文殺薄昭事(漢文殺薄昭論) 古人謂忠孝不兩全恩義有相奪非至論也. 忠孝恩義一理也. 不忠則非孝無恩則無義並行而不相悖故或捐親以盡節或舍君以全孝惟所當而已 唐李衛公以爲漢文誅薄昭斷則明矣. 義則未安司馬溫公以爲法者天下之公器惟善持法者親疎如一無所不行皆執一之論未盡於義也. 義旣未安則非明也. 有所不行不害其爲公器也. 不得於義則非恩之正害恩之正則不得爲義 使薄昭盜長陵土則太后雖不食而死昭不可不誅也. 其殺漢使爲類亦有異焉若昭有罪命使往治昭執而殺之太后之心可傷也. 昭不可赦也. 后若必害其生則存昭以全后可也. 或與忿爭而殺之則貸昭以慰母心可也. 此之謂能權盖先王之制也. 八議設而後重輕得其宜義豈有屈乎法主於義義當而謂之屈法不知法者也.

『문집』8-9 與人論立賑濟法事(賑濟論) 不制民之産無儲蓄之備飢而後發廩以食之廩有竭而飢者不可勝濟也. 今不暇論其本救目前之死亡唯有節則所及廣. 常見今時州縣濟飢之法或給之米豆或食以粥飯來者與之不復有辨中雖欲辨之亦不能也. 穀貴之時何人不願得食倉廩旣竭則殍死者在前無以救之矣. 數年前一親戚爲郡守愛恤之心可謂至矣. 鷄鳴而起親視俵散官吏後至者必責怒之於是流民歌咏至者日衆未幾穀盡殍者滿道愚常矜其用心而嗤其不善處事 救飢者使之免死而已非欲其豐肥也. 當擇寬廣之處宿戒使晨入至已則闔門不納午而後與之食申而出<給米者午卽出>日得一食則不死矣. 其力自能營一食者皆不來矣. 比之不擇而與當活數倍之多也. 凡濟飢當分兩處擇羸弱者作稀粥早晩兩給勿使至飽俟氣稍完然後一給第一先營寬廣居處切不得令相枕藉如作粥須官員親嘗恐生及入石灰不給浮浪游手無是理也. 平日當禁游惰至其饑餓則哀矜之一也.

『문집』8-10 蜀守記 成都人稱近時鎭蜀之善者莫如田元均文潞公語不善者必曰: 蔣堂程戡故謠言曰: 彦博虧<虧猶言不如也. >田况程戡勝蔣堂言最善之中田更優不善之中程猶差勝也. 予嘗訪之士大夫以至閭里間察其善不善之迹所謂善者得民心之悅固有可善焉所謂最不善者乃可謂至善者也. 至今人言及蔣公時事必有不樂之言問其所不樂者衆口所同惟三事而已减損遨樂毁后土廟及諸滛祠伐江瀆廟木修府舍也. 其尤失人心者節遨樂也. 前蔣者數十年爲政<闕>

『문집』8-11 雍行錄(遺金閑志) 元豐庚申歲予行至雍華間關西學者相從者六七人予以千錢掛馬鞍比就舍則亡矣. 僕夫曰: 非晨而亡之則涉水而墜之矣. 予不覺嘆曰: 千錢可惜坐中二人應聲曰: 千錢失去甚可惜也. 次一人曰: 千錢微物何足爲意後一人曰: 水中囊中可以一視人亡人得又何嘆乎予曰: 人得之乃非亡也. 吾嘆夫有用之物若沈水中則不復爲用矣. 至雍以語與叔曰: 人之器識固不同自上聖至於下愚不知有幾等同行者數人耳. 其不同如此也. 與叔曰: 夫數子者之言如何予曰: 最後者善與叔曰: 誠善矣. 然觀先生之言則見其有體而無用也. 予因書而志之. 後十五年紹聖乙亥秋九月因閱故編偶見之思與叔之不幸早死爲之涕下.

『문집』8-12 雜說三首 父母之於子愛之至也. 子不孝則愛心弛焉聖人之於民雖窮凶極惡而陷於刑戮哀矜之心無有異也. 情有替也. 誠無息也. 言命所以安義從義不復語命以命安義非循理者也. 仲尼之徒豈皆聖人其見豈能盡同於仲尼惟其不敢信已而信其師故常舍已以求合聖人之敎是以卒歸於不異也. 及夫子沒則漸異也.

『문집』8-13 四箴幷序 顔淵問克已復禮之目, 夫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四者, 身之用也. 由乎中而應乎外; 制於外, 所以養其中也. 顔淵事斯語, 所以進於聖人. 後之學聖人者, 宜服膺而勿失也. 因箴以自警.

『문집』8-14 視箴 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一作之爲>則. 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已復禮, 久而誠矣.

『문집』8-15 聽箴 人有秉彝,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卓彼先覺, 知止有定. 閑邪存誠, 非禮勿聽.

『문집』8-16 言箴 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內斯靜專. 矧是樞機, 興戎出好. 吉凶榮辱, 惟其所召. 傷易則誕, 傷煩則支. 已肆物忤, 出悖來違. 非法不道, 欽哉訓辭.

『문집』8-17 動箴 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厲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

『문집』8-18 印銘 我祖裔伯始封於程及其後世以國爲姓惟我皇考卜居近程復爵爲伯子孫是稱程伯之後崇寧癸未歲二月丁卯, 頤銘.

『문집』8-19 聞舅氏侯無可應辟南征詩(聞侯舅應辟南征詩) <時年十八> 辭華奔競至道離茫茫學者爭驅馳. 先生獨奮孟軻舌扶持聖敎增光輝. 志期周禮制區夏人稱孔子生關西當途聞聲交薦牘蒼生無福徒爾爲. 道大不爲當世用著書將期來者知. 今朝有客關內至聞從大幕征南垂南. 垂凶寇陷州郡, 久張螳臂抗天威. 聖皇赫怒捷書緩(渙?), 虎侯秉鉞驅熊羆宏才未得天下宰良謀且作軍中師. 蕞爾小蠻何足殄庶幾聊吐胸中奇!

『문집』8-20 謝王佺期寄藥 至誠通聖<一作化>藥通神遠寄衰翁濟病身. 我亦有丹君信否? 用時還解壽斯民.

『문집』8-21 游嵩山(詩) 鞭羸百里遠來遊巖谷陰雲暝不收遮斷好山敎不見如何天意異人謀?

宋程頤撰 書啓

『문집』9-1 爲家君上宰相書 珦聞古之君子相其君而能致天下於大治者無他術善惡明而勸懲之道至焉爾勸得其道而天下樂爲善懲得其道而天下懼爲惡二者爲政之大權也. 然行之必始於朝廷而至要莫先於諡法何則刑罰雖嚴可警於一時爵賞雖重不及於後世帷美惡之諡一定則榮辱之名不朽矣. 故歷代聖君賢相莫不持此以勵世風<一作也.>. 伏惟閣下以上賢之資爲聖主之輔深功厚德卓出前古所以致今日之治者盖由盡心勸懲之道而天下之善惡明也. 今若有善人於此而不得彰顯, 以至於泯沒, 則於閣下, 豈不甚惜而欲聞之乎? 珦是以敢忘其僣易之罪而布其誠懇於左右. 伏念珦之曾祖當五代之亂棄官避世以俟眞主之興我朝受命首赴闕庭一言遭遇受聖祖非常之知及太宗皇帝之在晉藩親自選擢俾之輔佑於時眞宗皇帝親受經訓太宗纂緖顧遇益隆凡所獻替無不開納稱其忠厚待以腹心前後兩欲相之而姦臣盧多遜惡其方正皆因四方之事薦之使行曁於還朝復將大用而先祖自以衰老瀝懇辭避乃特爲改置文明殿學士之職俾處庶僚之右制辭丁寧復示終用爲相之旨至於沒身不許告老歷事兩朝受恩三聖終始一節存沒異遇考於諡法宜得美名而當時有司失於擧行門生故吏不能論請以至於今未有易其名者. 珦大懼年祀浸遠遂至湮晦近三請於朝廷而有司引條例以旣葬爲限夫聖人作諡之意本以彰善癉惡若以請之後時遂廢其禮則是爲善者未必見褒而爲惡者得以自隱也. 况國家推恩率循舊例竊見近日王嗣宗輩亦是已葬朝廷恩旨特許追賜獨珦之曾祖以條例爲限某竊惑焉. 若以官言之則三品以上, 皆應令文. 以德言之則先祖淸儉之節淳厚之德寬大之量周通之才比於嗣宗誠亦無媿何嗣宗得請於無例之前而先祖見抑於有例之後若以先祖非兩府而異之耶? 則太宗皇帝眷遇如此累將柄用至於老疾聖意未已制詞具在遺旨如存繼聖之朝得不念之哉! 古之聖賢生非其時身無其位不得主懲勸於天下尙猶論古之人觀其言考其世以分別其賢愚善惡何哉! 有至仁之心而自任之重也. 故人有一善晦而不顯其心媿恥若已揜之今閣下當明盛之時居宰執之任褒賢勸善是所職也. 若使本朝賢士名跡湮晦以爲朝廷之闕閣下得不惜之乎矧主上以至孝御天下祖宗之朝一政一令靡所更易一器一玩弗忍遺棄而恩舊之臣豈不存念伏望閣下體聖祖選擢之意感神宗恩遇之厚念眞皇受經之舊副主上繼志之心力賜主張許循近例. 如此則恩滿泉底, 光生後昆, 則珦闔門粉骨不足以報厚德矣.

『문집』9-2 謝呂晦叔待制(相見)書 竊以古之時公卿大夫求於士故士雖自守窮閻名必聞才必用今之時士求於公卿大夫故干進者顯榮守道者沈晦頤處乎今之世才微學寡不敢枉道妄動雖親戚鄕閭間鮮克知其所存者矧敢期知於公卿大夫乎伏承閣下屈近侍之尊下顧愚陋仰荷厚禮媿不足以當之. 噫! 公卿不下士久矣. 頤晦於賤貧世莫之顧而公獨降禮以就之非好賢樂善之深孰能如是乎幸甚! 幸甚! 願閣下持是好賢之心廣求之之方盡待之之道異日登廟堂翊明天子治以之自輔以福天下豈不厚與鄙朴之人不善文詞姑竭其區區少致謝懇.

『문집』9-3 爲家君請宇文中允典漢州學書 中允明公執事竊以生民之道以敎爲本故古者自家黨遂至於國皆有敎之之地民生八年則入於小學是天下無不敎之民也. 旣天下之人莫不從敎小人修身君子明道故賢能群聚於朝良善成風於下禮義大行習俗粹美刑罰雖設而不犯此三代盛治由敎而致也. 後世不知爲敎之本不善其心而驅之以力法令嚴於上而敎不明於下民放僻而入於罪然後從而刑之噫是可以美風俗而成善治乎? 往者朝廷深念其然究思治本詔京師至於郡縣皆立學雖未能如古之時比屋人人而敎之可以敎爲士者矣. 誠能敎之由士始使爲士者明倫理而安德義知治亂之道政化之本處足以爲鄕里法出可以備朝廷用如是則雖未能詳備如古之敎亦得其大端近古而有漸矣. 是朝廷爲敎之意非不正也. 顧州縣之吏奉承之何如爾. 珦庸瑣之質叨恩領郡雖才不足以有爲, 然少承父師之訓久從士大夫之後涉聞學古爲政之道, 不敢斷斷俗吏之爲, 專以簿書期會爲事勉思所以副朝廷明敎化育賢才之意以學校爲先務然念敎道之職非得豪傑之士學術足以待問行義足以率人則何以爲衆人之矜式? 竊聞執事懿文高行, 爲時所推仕不合則奉身而退不爲榮利屈其志歸安田閭道義爲鄕里重豈特今人之難能古人所難能也. 愚謂執事非甘於退處而樂於自善也. 盖道旣不偶去就之義不得不然在執事之心諒無一日忘天下不以行道濟物爲意也. 盖聞賢人君子未得其位無所發施其素蘊則推其道以淑諸人講明聖人之學開導後進使其敎益明其傳益廣故身雖隱而道光跡雖處而敎行出處雖異推已及人之心則一也. 此鄕人所望於執事而執事所以自任也. 珦是以敢布其區區之意. 願執事從鄕人之望枉屈軒馭來憩郡庠俾後進子弟得所依歸不獨一郡學者漸被善敎四方之士聞風慕義亦將奔走門下是執事之道雖未用於時而所及人者固已博矣. 孟子所謂天下之樂也. 執事豈無意乎或賜允從不勝幸甚!

『문집』9-4 再書 近者書其鄙懇陳於左右輒欲邀致軒從內省不度方負媿惕辱敎之答詞意甚厚且承燕居休適感慰深矣. 然而過持謙巽, 未許臨屈. 區區之意, 有所未盡, 輒敢再浼聽覽. 珦至郡之初延見僚吏士民首道朝廷所以憂念遠方愛養元元之意旣則詢州郡之賢人足以取則爲治者於是聞執事之名於衆人之口珦退而三思三省之始曰: 彼鄕先生也. 吾將奉之以敎郡人旣而曰: 賢者以類至惟賢能致賢彼賢豈我屑耶? 旣又曰: 賢者雖有爲而退豈將自善其身耶? 必將化導鄕里敎育後進自古賢者未有不然者也. 豈特守之爲乎於是決之不疑以請於左右豈意執事未賜深亮拒而弗從. 珦竊觀在易觀之上九曰: 觀其生君子无咎象曰: 觀其生志未平也. 上九以陽剛之德居無位之地是賢人君子抱道德而不居其位爲衆人仰觀法式者也. 雖不當位然爲衆人所觀固不得安然放意謂已無與於天下也. 必觀其所生君子矣. 乃得无咎聖人又從而贊之謂志當在此固未得安然平定無所慮也. 觀聖人敎示後賢如是之深賢者存心如是之仁與夫索隱行怪, 獨善其身者異矣. 今執事居是鄕爲一鄕所宗仰適當觀上九之義豈得圖一身之安逸而不以化導爲意乎 見諭日<一作曰: >近多微疾憚於應接此大不然古者庠序爲養老之地所養皆眉壽之人其禮有扶有杖有鯁噎之祝則其羸廢可知盖資其道德模範豈尙其筋力也哉! 幸執事觀觀爻之義詳聖人贊之之意思賢人君子所當用心勉從鄕人之願不勝幸甚!

『문집』9-5 答橫渠先生書 累書所論病倦不能詳說試以鄙見道其略幸不責其妄易觀吾叔之見至正而謹嚴如虛無卽氣則虛無之語深探遠賾豈後世學者所嘗慮及也. <然此語未能無過>餘所論以大槩氣象言之則有苦心極力之象而無寬裕溫厚<一作和>之氣非明睿所照而考索至此故意屢偏而言多窒小出入時有之<明所照者如目所觀纖微盡識之矣. 考索至者如揣料於物約見髣髴爾能無差乎?> 更願完養思慮涵泳義理, 他日自當條暢. 何日得拜見當以來書爲據句句而論字字而議庶及精微牽勉病軀不能周悉. 謝生佛祖禮樂之說相知之淺者亦可料也. 何吾叔更見問大哥書中云聖人之悟前後矛盾不知謂何莫不至此否?

『문집』9-6 再答 昨□書中所示之意於愚意未安敢再請於左右今承盈幅之諭詳味三反鄙意益未安此非侍坐之間從容辨析不能究也. 豈尺書所可道哉! 况十八叔大哥皆在京師相見且請熟議異日當請聞之. 內一事云已與大哥議而未合者試以所見言之所云孟子曰: 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也. 此信乎入神之奧若欲以思慮求之是旣已自累其心於不神矣. 惡得而求之哉! 頤以爲有所事乃有思也. 無思則無所事矣. 孟子之是言方言養氣之道如是何遽及神乎氣完則理正理正則不私不私之至則神自養氣至此猶遠不可驟同語也. 以孟子觀之自見其次第也. 當以必有事焉而勿正爲句, 心字屬下句. 此說與大哥之言固無殊但恐言之未詳爾遠地未由拜見豈勝傾戀之切餘意未能具道. 所諭勿忘者但不舍其虛明善應之心爾此言恐未便旣有存於心而不舍則何謂虛明安能善應耶? 虛明善應乃可存而不忘乎?

『문집』9-7 上富鄭公書 伊川程頤齋心裁書再拜獻於致政司空相公閣下頤鄙野之人未嘗請謁有位故不獲從鄕里士子趨進門下今者來自山中聞太皇太后厭代心誠有所迫切無路上達敢以聞於左右盖非公無可告者非公無肯爲者. 頤頃歲見治昭陵制度規畫一出匠者之拙謀中人之私意宰執而下受成而已莫復置思以巨木架石爲之屋計不百年必當損墜旣又觀陵中之物見所謂鐵罩者鐵幾萬斤以木爲骨大不及三寸其相穿叩之處厚纔寸餘遠不過二三十年決須摧朽壓於梓宮於時私心惶駭不能自巳使人聞於魏公魏公不以爲意以魏公之忠孝於仁皇非不盡心惟其蔽於衆論昧於遠慮以天下之力, 葬一人於至危之地, 可不痛哉! 陵土旣復固知無可奈何然每一念之心悸魄喪或終夕不寐今鄕隣之間有如是事可謀爲而不以告人必謂之不信况仁皇天下父母乎? 今也不幸, 太皇太后奄棄宮闈因此事會可爲之謀夫合葬之禮周公已來未之有改近取諸唐帝后亦或同穴至於乾陵乃是再啓太祖皇帝神謀遠慮超越萬古昭憲太后亦合安陵稽典禮則得尊親之道徇俗法則皆享福之永此爲可行無足疑者. 伏願公忠誠奮發爲朝廷極論其事請奉太皇太后合祔昭陵因得撤去鐵罩用厚陵石槨之制仍更別加裁處使異日雖木壞石墜不能爲害救仁皇必至之禍成主上莫大之孝任此事者非公孰能誠能爲之天祐忠孝必俾公熾昌壽臧子孫保無疆之休. 竊惟公事仁宗皇帝三十餘年位極人臣恩遇無比料公之心苟能使仁皇聖體保其安全雖陷<一作蹈>禍患所不避也. 况一言之易肯顧慮而不發乎? 事理至明, 顧主上素未知耳. 以公言之重, 竭誠致懇再三陳之不憂朝廷之不悟獨繫公爲不爲爾哀誠憤激語辭鄙直內省狂易戰灼無地. 不宣.

『문집』9-8 答富公小簡 昨日妄有布聞方懷煩凟之懼乃辱敎誨加賜酒食仰荷台意之厚不勝媿悚尊者之賜禮不敢辭然頤方有言於左右公若見取雖執鞭門下盖所欣慕况受賜乎苟不見從是忘忠義公之賜也. 實爲頤羞未敢拜貺謹復上納瀆冒台嚴第深戰慄.

『문집』9-9 上河南帥書 頤荷德旣深思報宜異輒以狂言浼聞台聽公到鎭之初必多詢訪衆人對公之語頤能料之當曰: 敵旣再寇河外必復不來公可高枕矣. 是常言也. 未知奇勝之道兵法曰: 攻必取者攻其所不守也. 謂其不來乃其所以來也. 又曰: 彼興大衆豈徒然哉! 河外空矣. 復來何利是大不然誠使彼得出不意破蕩數壘足以勞弊一道爲利大矣. 何必負載而歸然後爲利也. 竊恐謀士悅於寬憂計司幸於緩責衆論旣一公雖未信而上下之心已懈矣. 是可慮也. 寧捐力於不用毋惜功而致悔莫若使彼聞嚴備而絶意則疆埸安矣. 豈獨使敵人知有備而不來當使內地之人信可恃而願往則一二年間便可致完實長久之策也. 自古乘塞禦敵必用驍猛招徠撫養多在儒將今日之事則異矣. 願公念之.

『문집』9-10 答人示奏草書 辱示奏藁足以見仁人君子愛民之心深切如此欽服欽服子弟當勉公以速且堅何可已也. 然於愚意有未安者敢布左右 觀公之意專以畏亂爲主頤欲公以愛民爲先力言百姓飢且死丐朝廷哀憐因懼將爲寇亂可也. 不惟告君之體當如是事勢亦宜爾公方求財以活人祈之以仁愛則當輕財而重民懼之以利害則將恃財以自保古之時得丘民則得天下財散則人聚後世苟私利於目前以兵制民以財聚衆聚財者能守保民者爲迂秦漢而下莫不然也. 竊慮廟堂諸賢未能免此惟當以誠意感動覬其有不忍之心而已淺見無取惟公裁之.

『문집』9-11 答朱長文書<或云明道先生之文> 相去之遠未知何日復爲會合人事固難前期也. 中前奉書以足下心虛氣損奉勸勿多作詩文而見答之辭乃曰: 爲學上能探古先之陳迹綜群言之是非欲其心通而黙識之固未能也. 又曰: 使後人見之猶庶幾曰: 不忘乎善也. 苟不如是誠懼沒而無聞焉此爲學之末宜兄之見責也. 使吾日聞夫子之道而忘乎此豈不善哉! <恐不記書中之言故却錄去>此疑未得爲至當之言也. 某於朋友間其問不切者未嘗敢語也. 以足下處疾罕與人接渴聞議論之益故因此可論而爲吾弟盡其說庶幾有小補也. 向之云無多爲文與詩者非止爲傷心氣也. 直以不當輕作爾聖賢之言不得已也. 盖有是言則是理明無是言則天下之理有闕焉如彼耒耜陶冶之器一不制則生人之道有不足矣. 聖人之言雖欲已得乎然其包涵盡天下之理亦甚約也. 後之人始執卷則以文章爲先平生所爲動多於聖人然有之無所補無之靡所闕乃無用之贅言也. 不止贅而已旣不得其要則離眞失正反害於道必矣. 詩之盛莫如唐唐人善論文莫如韓愈愈之所稱獨高李杜二子之詩存者千篇皆吾弟所見也. 可考而知矣. 苟足下所作皆合於道足以輔翼聖人爲敎於後乃聖賢事業何得爲學之末乎? 某何敢以此奉責? 又言欲使後人見其不忘乎善人能爲合道之文者知道者也. 在知道者所以爲文之心乃非區區懼其無聞於後欲使後人見其不忘乎善而已此乃世人之私心也. 夫子疾沒世而名不稱焉者疾沒世無善可稱云爾非謂疾無名也. 名者可以厲中人君子所存非所汲汲. 又云上能探古先之陳迹綜群言之是非欲其心通黙識固未能也. 夫心通乎道然後能辨是非如持權衡以較輕重孟子所謂知言是也. 揆之以道則是非了然不待精思而後見也. 學者當以道爲本心不通乎道而較古人之是非猶不持權衡而酌輕重竭其目力勞其心智雖使時中亦古人所謂億則屢中君子不貴也. 臨紙遽書不復思繹故言無次序多註改勿訝辭過煩矣. 理或未安却請示下足以當面話.

『문집』9-12 上文潞公求龍門菴地小簡 頤竊見勝善上方舊址從來荒廢爲無用之地野人率易敢有干聞欲得葺幽居於其上爲避暑著書之所唐王龜構書堂於西谷松齋之名傳之至今頤雖不才亦能爲龍門山添勝迹於後代爲門下之美事可否俟命.

『문집』9-13 上韓持國資政書(上韓持國資政求撰兄墓誌) 頤輒恃顧遇之厚敢以哀誠上煩台聽. 家兄學術才行爲世所重自朝廷至於草野相知何啻千數今將歸葬伊川當求誌述以傳不朽然念相知者雖多也. 能知其道者則鮮矣. 有文者亦衆也. 而其文足以發明其志意形容其德美者則鮮矣. 能言者非少也. 而名尊德重足以取信於人者則鮮矣. 如是誌之作豈易哉! 頤竊謂智足以知其道學文足以彰其才德言足以取信後世莫如閣下家兄素出門下受知最深不幸早世當蒙哀惻顧其道不得施於時學不及傳之書遂將泯沒無聞此尤深可哀也. 恭惟閣下至誠待物與人有終知其生必當念其死愛其人必欲成其名. 願丐雄文, 以光窀穸, 俾伯夷不泯於西山展季得顯於東國則死生受賜子孫敢忘捐軀殞命未足爲報率妄之罪非所敢逃.

『문집』9-14 上孫叔曼侍郞書(上孫叔曼侍郞求寫兄墓誌書) 頤輒恃垂顧敢以哀誠上煩台聽. 家兄學術才行爲時所重出入門下受知最深不幸短命天下孰不哀之又其功業不得施於時道學不及傳之書遂將泯沒無聞此尤深可哀也. 竊惟自昔有道之士名或未彰賢人君子爲之發揚而後顯於後世者多矣. 今將歸葬伊川太一資政韓公爲誌其墓思得大賢之筆共久其傳恭惟閣下名足以取重將來道足以流光後世致誠待物與人有終知其生必當念其死愛其人必欲成其名. 願求眞蹟以賁窀穸倘蒙哀矜曲賜開允則死生受賜子孫敢忘內循率妄戰越無地.

『문집』9-15 答楊時慰書 頤泣啓頤罪惡不弟感招禍變不自死滅兄長喪亡哀苦怨痛肝心摧裂日月迅速忽將三月追思痛切不可堪處遠承慰問及寄示祭文哀辭足見歲寒之意. 家兄道學行義足以澤世垂後不幸至此天乎奈何頤悲苦之餘僅存氣息筋骸支離尤倦執筆况哀誠非書所能盡所幸老而經此煩惱飮食起居如常不煩深慮伏紙摧咽言不倫次頤泣啓楊君法曹<九月十二日> 十月二十四日葬韓持國爲誌行狀頤自作徐當寄去.

『문집』9-16 謝韓(康)公啓 竊以朝廷取士所以爲致治之先公卿薦賢固必有知人之哲允諧公議始厭衆聞. 頤也不才, 少而從學, 致知格物, 粗窺聖道之端倪明善誠身, 未得古人之髣髴. 徒忘懷於白首竊有志於斯文時和歲豐已足素望言揚德進敢有覬心? 屬嗣皇訪落之初乃元老告猷之會. 豈虞過聽猥被明揚文陛進登被德音之溫厚; 西淸入侍密宸扆之光輝. 考於近世而來可謂非常之遇. 荷恩爲愧惴分則逾若何行爲可以報稱? 惟殫素學勉副厚知過此以還不知所措. 未緣望履徒切向風悃愊所懷敷宣罔旣.

『문집』9-17 又謝簡 頤惶恐再拜啓仲夏毒熱伏惟臺候動止萬福頤執耕畎畝於門下未嘗有一日之素猥蒙過聽薦之於朝沾被恩命何以稱報未由展覿伏冀上爲宗社善護寢興下情區區之至.

『문집』9-18 答呂進伯簡三 相別累年區區企渴之深言不盡意按部往來想在勞止. 秦人瘡瘵未復而偶此旱暵賴賢使者措置受賜何涯儒者逢時生靈之幸勉成休功乃所願望頤備員於此夙夜自竭未見其補時望賜書開諭不逮與叔每過從至慰至幸引素門墻坐馳神爽所欲道者非面不盡惟千萬自愛. 別紙見諭持法爲要其來已久矣. 旣爲今日官當於今日事中圖所設施舊法之拘不得有爲者擧世皆是也. 以頤觀之苟遷就於法中所可爲者尙多先兄明道之爲邑及民之事多衆人所謂法所拘者然爲之未嘗大戾於法衆亦不甚駭謂之得伸其志則不可求小補則過今之爲政者遠矣. 人雖異之不至指爲狂也. 至謂之狂則大駭矣. 盡誠爲之不容而後去又何嫌乎鄙見如此進伯以爲如何? 荷公知遇之厚輒有少見上補聰明亦久懷憤鬱無所控告遇公而伸爾王者父天母地昭事之道當極嚴恭漢武遠祀地祇於汾脽旣爲非禮後世復建祠宇其失已甚因唐妖人作韋安道傳遂爲塑像以配食誣瀆天地天下之妄天下之惡有大於此者乎公爲使者此而不正將正何事願以其像投之河流愼勿先露先露則傳駭觀聽矣. 勿請勿議必見沮矣. 毋虞後患典憲不能相及亦可料也. 願公勿疑.

『문집』9-19 여여대림논중서

「與呂大臨論中書」此書其全不可復見. 今只據呂氏所錄到者編之.
「여여대림논중서」이 편지의 전체 내용은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다. 지금은 단지 여씨가 기록한 것에 따라 엮었다.

大臨云: "中者, 道之所由出."
여대림: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
先生曰: "'中者, 道之所由出', 此語有病."
정이: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는 이 말에는 문제가 있다."
大臨云: "謂: '中者, 道之所由出, 此語有病.' 已悉. 所諭'但論其所同, 不容更有二名; 別而言之, 亦不可泥爲一事.' 如所謂'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又曰: '中者, 天下之大本; 和者, 天下之達道', 則性與道、大本與達道, 豈有二乎?"
여대림: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는 이 말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같은 것을 논한다면 두 가지 명칭을 쓸 필요가 없고, 구별해 말한다면 또한 하나로 뒤섞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의 경우, 예를 들어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고 하고서 다시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대본大本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달도達道다'라고 말한다면, 성性과 도道·대본大本과 달도達道가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어찌 둘이겠습니까?"
先生曰: "中卽道也. 若謂'道出於中', 則道在中外, 別爲一物矣. 所謂'論其所同, 不容更有二名; 別而言之, 亦不可混爲一事', 此語固無病. 若謂'性與道、大本與達道, 可混而爲一', 卽未安. 在天曰命; 在人曰性; 循性曰道. 性也, 命也, 道也, 各有所當. 大本, 言其體; 達道, 言其用. 體用自殊, 安得不爲二乎?"
정이: "중中이 곧 도道다. 만약 '도道가 중中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도道는 중中 밖의 별도의 것이 되어버린다. [내가] '같은 것을 논한다면 두 가지 명칭을 쓸 필요가 없고, 구별해 말한다면 또한 하나로 뒤섞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거에는 진실로 문제가 없다. 만약 [그대의 생각처럼] '성性과 도道·대본大本과 달도達道는 뒤섞어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온당치 않다.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며,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 성性·명命·도道는 각각 해당하는 바가 있다. 대본大本은 그 체體를 말하고, 달도達道는 그 용用을 말한다. 체용體用이 절로 구별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大臨云: "旣云'率性之謂道', 則循性而行, 莫非道. 此非性中別有道也, 中卽性也. 在天爲命, 在人爲性, 由中而出者莫非道, 所以言'道之所由出'也, 與'率性之謂道'之義同, 亦非道中別有中也."
여대림: "[「중용」에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고 말한 이상, 성性을 따라 행하는 것 가운데 도道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는 성性 안에 따로 도道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중中이 곧 성性입니다.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고, 중中에서 나오는 것이 도道 아님이 없기 때문에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와 의미가 같으니, 도道 안에 따로 중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先生曰: "'中卽性也', 此語極未安. 中也者, 所以狀性之體段,若謂性有體叚亦不可, 姑假此以明彼. 如稱天圓地方, 遂謂方圓而天地, 可乎? 方圓旣不可謂之天地, 則萬物決非方圓之所出. 如中旣不可謂之性, 則道何從稱'出於中'? 蓋中之爲義, 無過不及而立名. 若只以中爲性, 則中與性不合, 與'率性之謂道'其義自異. 性、道不可一作可以合一而言. 中止可言體, 而不可與性同德."
정이: "'중中이 곧 성性입니다.'라는 말은 지극히 온당치 않다. 중中이란 성性의 모습을 형용하는 것이다.'성性에 모습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우선 이를 통해 저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라고 해서 '둥글고 네모지며 천지이다(方圓而天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둥글고 네모짐(方圓)'을 천지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 만물은 결코 '둥글고 네모짐(方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중中을 성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 도道를 어떻게 '중中에서 나온다'고 말하겠는가? 대개 중中의 의미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에 이름 붙인 것이다. 만일 단지 중中을 성性으로 여긴다면, 중中과 성性은 합치되지 않고, [「중용」에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와도 의미가 절로 달라진다. 성性과 도道는 하나로 합쳐 말할 수 없다. 중中은 모습(體段)만 말할 수 있을 뿐, 성性과 덕을 같이 할 수는 없다."
○又曰: "觀此義一作語, 謂'不可與性同德', 字亦未安. 子居對以中者性之德, 却爲近之."子居, 和叔之子. 一云義山之字.
정이: "이 의미를 살펴보니, '성性과 덕을 같이 할 수는 없다.'는 표현도 온당치 않다. 자거子居가 '중中이란 성性의 덕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오히려 그럴 듯하다."'자거子居'는 여대균呂大鈞(字 和叔, 1031-1082, 여대림의 형)의 아들이다. 일설에는 여의산呂義山의 자字라고 한다.
○又曰: "不偏之謂中. 道無不中, 故以中形道. 若謂: '道出於中', 則天圓地方, 謂方圓者天地所自出, 可乎?"
정이: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도道는 중中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중中으로 도道를 형용한 것이다. 만일 '도道가 중中에서 나온다'라고 한다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를 '둥글고 네모짐(方圓)은 천지가 나오는 곳이다'라고 말하는 격이니, 가당키나 한가?"


大臨云: "不倚之謂中; 不雜之謂和."
여대림: "한쪽으로 기대지 않는 것이 중中이고, 뒤섞이지 않는 것이 화和입니다."
先生曰: "'不倚之謂中', 甚善.語猶未瑩 '不雜之謂和', 未當."
정이: "'한쪽으로 기대지 않는 것이 중中이다'라는 건 매우 좋다.표현이 여전히 분명치 않다. '뒤섞이지 않는 것이 화和이다.'는 적절치 않다."
大臨云: "喜怒哀樂之未發, 則赤子之心. 當其未發, 此心至虛, 無所偏倚, 故謂之中. 以此心應萬物之變, 無往而非中矣.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此心度物所以甚於權衡之審者, 正以至虛無所偏倚故也. 有一物存乎其間, 則輕重長短皆失其中矣, 又安得如權如度乎? 故'大人不失其赤子之心', 乃所謂'允執其中'也. 大臨始者有見於此, 便指此心名爲中. 故前言'中者道之所由出'也. 今細思之, 乃命名未當爾. 此心之狀, 可以言中; 未可便指此心名之曰中. 所謂'以中形道', 正此意也. '率性之謂道'者, 循性而行, 無往而非理義也. 以此心應萬事之變, 亦無往而非理義也. 皆非指道體而言也. 若論道體, 又安可言'由中而出'乎?先生以爲此言未是.
여대림: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가 적자지심赤子之心입니다.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 이 심心은 지극히 허虛해서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심心으로 만물의 변화에 응하면 어딜 가더라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맹자께서는 '저울질 한 뒤에야 무게를 알고, 자로 잰 뒤에야 길이를 안다. 사물이 모두 그러한데, 심心은 더욱 그러하다.'[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심心으로 만물을 헤아리는 것이 저울질할 때보다 더욱 정밀한 이유는 바로 [심心이] 지극히 허虛해서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도 들어있다면 무게·길이가 모두 들어맞지 않을 것이니, 또 어째서 저울질 하듯, 길이를 재듯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인大人은 자신의 적자지심을 잃지 않는다'[5]는 것이 바로 이른바 '오직 그 중中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이것을 깨우치고서 이 심心을 중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중中이란 도道가 나오는 곳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자세히 생각해보니, 명명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심心의 모습은 중中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심心을 곧장 중中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중中으로 도道를 형용한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라는 것은, 성性을 따라 실천함에 어딜 가더라도 리의理義가 아닌 것이 없는 것이고, 이 심心으로 만사의 변화에 응하는 경우에도 어딜 가더라도 리의理義가 아닌 것이 없으니, 둘 다 도체道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도체道體를 논한다면, 또 어떻게 '중中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선생께서는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셨다."


先生曰: "'喜怒哀樂未發謂之中.' 赤子之心, 發而未遠於中. 若便謂之中, 是不識大本也."
정이: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적자지심赤子之心은 [정情이]이 발현되었지만 중中에서 아직 멀어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적자지심赤子之心을] 곧장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대본大本을 모르는 것이다."
大臨云: "聖人智周萬物, 赤子全未有知, 其心固有不同矣. 然推孟子所云, 豈非止取純一無僞, 可與聖人同乎? 非謂無毫髮之異也. 大臨前日所云亦取諸此而已. 此義, 大臨昔者旣聞先生君子之敎, 反求諸己, 若有所自得, 參之前言往行, 將無所不合. 由是而之焉, 似得其所安, 以是自信不疑, 拳拳服膺, 不敢失墜. 今承敎乃云已失大本, 茫然不知所向. 竊恐辭命不明, 言不逮意, 致高明或未深喩, 輒[6]露所見, 求益左右. 卒爲賜敎, 指其迷謬, 幸甚!
여대림: "성인은 앎이 만물을 아우르지만 적자赤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그들의 심心에는 진실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을 추론해보자면, [적자지심赤子之心의] 순수하고 거짓없는 점이 성인과 같을 수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털끝만한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 역시 이 점을 취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저는 과거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듣고서 스스로에게 돌이켜 탐구해 자득한 바가 있는 것 같았고, 이를 옛 분들의 행적에 견줬더니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서 나아가보니 온당한 바를 얻은 것 같아 이를 믿고 의심치 않으며 가슴에 꼭 지니고 감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미 대본大本을 그르쳤다'는 가르침을 받고 나니, 망연자실해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 문장이 분명치 않고 말이 의도에 미치지 못해 선생님께서 혹 제대로 이해하시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 견해를 드러내어 선생님께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마지막까지 저를 위해 가르침을 주셔서 제 잘못을 지적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聖人之學, 以中爲大本, 雖堯舜相授以天下, 亦云'允執其中'. 中者, 無過不及之謂也. 何所準則而知過不及乎? 求之此心而已. 此心之動, 出入無時, 何從而守之乎? 求之於喜怒哀樂未發之際而已. 當是時也, 此心卽赤子之心,純一無僞 卽天地之心,神明不測 卽孔子之絶四,四者有一物存乎其間, 則不得其中. 卽孟子所謂'物皆然, 心爲甚.'心無偏倚, 則至明至平. 其察物甚於權度之審. 卽<易>所謂'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此心所發, 純是義理, 與天下之所同然, 安得不和? 大臨前日敢指赤子之心爲中者, 其說如此.
여대림: "성인의 학문은 중中을 대본大本으로 삼으니, 비록 요순堯舜께서 천하를 전해주실 때에도 '오직 그 중中을 잡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기준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람을 알겠습니까? 이 심心에서 찾을 뿐입니다. 이 심心의 움직임은 출입에 정해진 시점이 없으니, 언제 지키겠습니까?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에서 찾을 뿐입니다. 이 때 이 심心이 바로 적자지심赤子之心순수하고 거짓없음.이고, 천지지심天地之心신명불측함.이며, 공자의 절사絶四[7]네 가지는 거기에 뭐라도 들어있어서 그 중中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이고, 맹자께서 '사물이 모두 그러한데, 심心은 더욱 그러하다'심心에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으면 지극히 밝고 공평해, 사물을 살피는 것이 저울질 하거나 자로 재는 것보다 정밀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주역>에서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 심心에서 발현된 것은 순전히 의리義理로 천하 사람들과 공통적인 것인데,[8] 어떻게 화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에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중中이라고 감히 말씀드린 것의 설명이 이렇습니다."
來敎云: '赤子之心, 可謂之和; 不可謂之中.' 大臨思之: 所謂和者, 指已發而言之. 今言赤子之心, 乃論其未發之際,一有竊謂字 純一無僞, 無所偏倚, 可以言中. 若謂已發, 恐不可言心.
여대림: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은 화和라고 할 수는 있지만 중中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화和라는 것은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은 바로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를 논하는 것으로, 순수하고 거짓 없으며 치우치거나 기대는 바가 없으니 중中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만일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심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來敎云: '所謂「循性而行, 無往而非義理.」 言雖無病, 而聖人氣味殊少.' 大臨反而思之, 方覺辭氣迫窘, 無沈浸醲厚之風. 此則淺陋之罪, 敢不承敎? 大臨更不敢拜書先生左右. 恐煩枉答, 只令義山持此請敎. 蒙塞未達, 不免再三浼瀆. 惟望乘間口諭義山傳誨一二, 幸甚! 幸甚!"
여대림: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그대가] 「성性을 따라 실천함에 어딜 가더라도 리의理義가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 것에는 비록 문제가 없지만, 성인의 기미氣味가 매우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돌이켜 생각해보고서 표현이 궁색해서 깊고 농후한 풍격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 하찮은 견식 탓이니, [어떻게]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감히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잘못된 답으로 번거롭게 해드릴까 두려우니, 단지 의산義山(자 자거子居, 여대균의 아들, 여대림의 조카)에게 이것을 가지고 가서 가르침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무지몽매해서 [선생님께] 거듭 불경을 범했습니다.[9] 시간 되실 때 말로 의산義山에게 가르침을 하나하나 전해주신다면, 이보다 큰 다행은 없을 것입니다!"


先生曰: "所云'非謂無毫髮之異', 是有異也. 有異者, 得爲大本乎? 推此一言, 餘皆可見."
정이: "[그대가] '[성인과 적자赤子 사이에] 털끝만한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은 [결국]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성인과] 차이나는 것이 대본大本이 될 수 있겠는가? 이 한 마디를 추론해 본다면, 나머지는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大臨云: "大臨以赤子之心爲未發, 先生以赤子之心爲已發. 所謂大本之實, 則先生與大臨之言, 未有異也. 但解'赤子之心'一句, 不同爾. 大臨初謂: '赤子之心, 止取純一無僞, 與聖人同'一有處字, 恐孟子之義亦然, 更不曲折一一較其同異. 故指以爲言, 固未嘗以已發不同處爲大本也. 先生謂'凡言心者, 皆指已發而言.' 然則未發之前, 謂之無心, 可乎? 竊謂未發之前, 心體昭昭具在; 已發乃心之用也. 此所深疑未喩, 又恐傳言者失指. 切望指敎."
여대림: "저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未發)으로 여기고, 선생님께서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으로 여기십니다. 대본大本이라는 것의 실질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제 말 사이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적자지심赤子之心' 한 구절을 해석하는 것만 같지 않을 뿐입니다. 저는 원래 '적자지심赤子之心 단지 순수하고 거짓 없으니 성인과 같다'고 말했는데, 맹자의 뜻도 그러할 것이라고 여겨 더 이상 자세히 하나하나 그 동이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언급했던 것이지, 진실로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되어 [성인과] 같지 않은 것을 대본大本으로 여긴 적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릇 심心을 말하는 경우는 모두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을 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심心이 없다'고 여겨도 괜찮습니까? 제 생각에, [희노애락의 정情이]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심체心體가 밝게 갖춰져 있고, [희노애락의 정情이] 발현된 것(已發)이 바로 심心의 용用입니다. 이 점이 [제가] 깊이 의심하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인데, 또 말씀을 전한 자가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가르침을 절실히 바랍니다."
先生曰: "所論意, 雖以已發者爲未發; 反一作及求諸言, 却是認已發者爲說. 詞之未瑩, 乃是擇之未精爾. '凡言心者, 指已發而言', 此固未當. 心一也, 有指體而言者;寂然不動, 是也. 有指用而言者.感而遂通天下之故, 是也. 惟觀其所見如何耳. 大抵論愈精微, 言愈易差. 所謂'傳言者失指', 及反覆觀之, 雖曰有差, 亦不失大意. 又如前論'中卽性'也, 已是分而爲二, 不若謂之性中.'性中', 語未甚瑩. 以謂'聖人氣味殊少', 亦不須言聖人. 第二書所以答去者極分明矣."
정이: "[그대가] 논한 뜻이 비록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을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未發)으로 여겼지만, 이미 발현된 것(已發)에 대해 말한 것이다.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바로 택함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다. '무릇 심心을 말하는 경우는 모두 [희노애락의 정情이] 이미 발현된 것(已發)을 말한다.'는 것은 진실로 적절치 않다. 심心은 하나지만 체體를 말하는 경우가 있고'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는다'가 이것이다. 용用을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감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한다'가 이것이다., 오직 보고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대저 논의가 정밀해 질수록 말은 어긋나기 쉽다. [그대가] '말씀을 전한 자가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반복해 살펴보니, 비록 '차이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내] 큰 뜻을 놓치지는 않았다. 또 이전에 '중中이 곧 성性입니다.'라고 말한 것의 경우, 이미 [중中과 성性을] 둘로 나눴으니, '성중性中'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성중性中'은 표현이 썩 분명하지 않다. [내가] '성인의 기미氣味가 매우 적다'고 말한 것 또한 성인을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두 번째 편지에서 답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문집』9-20

答楊時論西銘書

前所寄史論十篇, 其意甚正. 纔一觀, 便爲人借去俟. 更子細看.

<西銘>之論, 則未然. 橫渠立言, 誠有過者, 乃在<正蒙>. <西銘>之爲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二者亦前聖所未發. 豈墨氏之比哉! <西銘>明理一而分殊; 墨氏則二本而無殊.老幼及人, 理一也; 愛無差等,本二也. 分殊之蔽, 私勝而失仁; 無分之罪, 兼愛而無義. 分立而推理一以止私勝之流, ,仁之方也; 無別而迷兼愛, 至於無父之極, 義之賊也. 子比而同之, 過矣. 且謂'言體而不及用', 彼欲使人推而行之, 本爲用也, 反謂不及, 不亦異乎?

『문집』9-21 代人上宰相論鄭白渠書 某聞: 天下之事有甚難而易者有甚易而難者獨繫在上之人爲與不爲而已昔韓欲罷秦兵使鄭國說以鑿涇水漑田注塡閼之水漑瀉鹵之地四萬頃畝收常一鍾關中遂爲沃壤無凶年秦以富强至漢白公復引涇水以漑田民得其饒歌之曰: 田於何所池陽谷口鄭國在前白渠起後衣食關中億萬之口此兩渠之功也. 秦漢而下皆獲其利熙寧中神宗皇帝講求治典興葺遺利時先祖殿丞建明鄭白之利神宗皇帝賜對便殿大稱聖心付以其事興役踰年功已有敍而害能者巧爲沮止不終厥功陜右之人至今爲恨某每思神宗皇帝知其利而欲興之意與先祖盡其力而被沮之恨某未嘗不憤歎至於流涕也. 閣下嘗尹長安矣. 必聞其事. 今則又非昔年之比也. 涇水低下渠口高仰灌漑之功幾盡廢矣. 民用困乏物斛湧貴職此之由今方外有不順之羌師旅之興儲偫爲急誠使秦中歲增穀數百千萬斛所濟豈不甚大某關西陋儒也. 自幼小稔知其事人微處遠無由自伸其憤鬱幸遇僕射相公以經緯之才逢時得君以天下事爲已任某是以敢不避狂妄之誅塵瀆鈞聽倘蒙采錄或致成功不使先祖抱恨泉下則某平生志願足矣.

『문집』9-22 上謝帥師直書 頤皇恐上書於知府安撫寶文閣下頤至愚學道幾五十年惟是自信行其所知不敢爲世俗所移知之罪之則繫乎人焉 伏覩律節文諸醫爲人合藥誤不如本方殺人者徒二年半故不如本方殺傷人者以故殺傷論雖不傷人杖六十古人造律之意非特矜死者之無辜亦以警懼庸醫使不敢輕妄致害人命則其爲益豈不甚大近世以來律雖存而實不用俗吏拘文乃云律稱合藥誤不如本方若用藥不如方論雖日殺千人法所不禁官不當治也. 遂使庸醫輩肆其盲妄無所忌憚殺人如麻耳. 目所聞見士大夫爲庸醫反陰陽背方論而殺之者不可勝數况天下之大民庶之衆可勝言哉! 獨嘉祐中族兄大中嗣宗知扶溝縣嘗以醫者用藥過劑殺人送府鞭其背過劑乃用藥之失非合藥誤也. 當時衆論稱之蓋他人未嘗用此律故也. 今死者之家莫肯與醫者辨者其故有三以當官者無愛人之心苟欲省事不肯爲之窮辨一也. 與醫者習熟不忍訟之二也. 慮今而後難復用藥三也. 是皆以利害爲心而不顧骨肉之義知其寃死而不爲之辨骨肉之義絶矣. 旣不能辨則爲之詞曰: 彼無惡意又曰: 訟之無益矣. 又曰: 已之命也. 此皆至愚不知義理之言. 彼有惡意自當從故殺傷之法此律正爲無故意者設也. 辨之所以申骨肉之義豈繫有益無益也. 謂已之命則爲人毆而殺之亦可以不校矣. 世之人雖其父母本非死疾爲醫所殺隱忍而不辨者多矣. 衆人觀之亦不以爲非也. 習俗之迷人也. 如是今之士大夫使馬醫治馬誤殺馬而杖馬醫者目所常見耳. 所常聞衆人不以爲非也. 至以父母骨肉爲醫所殺而責醫者則未嘗見豈愛親不若愛馬乎愚惑不思之甚也. 凡人之疾病誤醫者多矣. 若風疾與氣藥肝病而攻脾之類雖不中病未能害人其死乃病死未得爲醫殺之也. 若醫經明言下之則死是不下則不死也. 今下而殺之, 與操刃而斷其喉何異? 古人立法原其意本不惡故罪止於徒恕之至也. 若聽其妄殺人而不加治豈爲政之道乎? 姪子某爲令醴泉病陰證傷寒而邑之醫者乃大下之又與洗心散遂至寃死今有狀披訴伏惟明公居大帥之任操勸懲之柄經術政事聞於天下高識遠見卓然絶俗法之所無者尙可權其宜而行之况有法可依者乎民之於令其義最重致令之死而不加一毫之罪於義得爲安乎竊聞邑中憤歎不平之聲聞於道路豈當任者獨不念之乎重思閣下天下吏師誠能行之郡縣必多效之者若使遠近傳之庸醫之輩皆知戒懼不敢輕視人命則公及人之功豈細也哉! 匪惟先兄父子懷結草之報當獲上天之祜後昆享繁衍盛大之福不勝哀懇頤皇恐上訴

『문집』9-23 與金堂謝君書 頤啓前月末吳齋郞送到書信卽遞中奉報計半月方達冬寒遠想雅履安和僑居旋爲客次日以延望乃知止行甚悒悒也. 來春江水穩善候有所授能一訪甚佳. 只云忠涪間看親人必不疑也. 頤偕小子甚安來春本欲作春秋文字以此無書故未能却先了論孟或禮記也. 春秋大義數十皎如日星不容遺忘只恐微細義例老年精神有所漏落且請推官用意尋究後日見助如往年所說許止蔡般書葬類是也. 若欲治易先尋繹令熟只看王弼胡先生王介甫三家文字令通貫餘人易說無取枉費功年亦長矣. 宜汲汲也. 未相見間千百愼愛十一月初九日, 頤啓.(知縣推官)

『문집』9-24 答周孚先問<幷跋> 問先生舊語門人云天下至忙者無如禪客市井之人雖曰: 營利猶有休息時禪客行住坐臥無不在道存無不在道之心便是至忙孚先竊謂此語如孟子所謂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也. 若正若助長卽是忙也. 或者謂此語非爲學者設謂以聖人方之禪客未嘗閒若學者須是行住坐臥在道. 存無不在道之心便是助長方其學也. 固當有事亦當知助長之非. 問: 書曰: 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孚先竊謂聖者謂有聖人資質一不念則流入於狂狂者進取曾晳之徒是也. 借如顔子不能拳拳服膺亦必至於此若是聖人則從心所欲不踰矩雖不念亦無害也. 六德: 知仁聖義中和聖通明之稱狂狂愚之稱. 問: 孔子曰: 知者樂水仁者樂山知者動仁者靜知者樂仁者壽孚先竊謂樂山樂水狀仁知之體動靜述仁知之用樂與壽明仁知之効知則能知之能知之則務窮物理務窮物理則運用不息故樂水水謂其周流也. 故動動謂其理之無窮也. 故樂樂謂其無疑也. 仁則能體之能體之則有得於所性有得於所性則循理而行之故樂山山謂其安止也. 故靜靜謂其無待於外也. 故壽壽謂其達生理也. 言意未能體仁知且宜潛思. 問: 孔子曰: 知及之仁不能守之雖得之必失之知及之仁能守之不莊以涖之則民不敬知及之仁能守之莊以涖之動之不以禮未善也. 孚先竊謂此語是告學者亦是入道之序故知及之者見得到也. 仁能守之者, 孶孶於此也. 莊以涖之者, 外設藩垣以遠暴慢也. 動之以禮觀時應用皆欲中節也. 或者謂此是人君事. 臨政處已莫不皆然所謂仁能守之者孶孶於此也. 此言未能盡仁且宜致思仁則安矣. 所以云守也. 孚先舊講習太學建中靖國庚辰冬過洛陽游伊川先生之門預群弟子之列親炙模範時聞誨語越明年暮春歸省庭闈期歲復入學以所疑爲書請質於先生皆得親筆開諭逮今幾四十年矣. 以今日視前日固知學之不博問之不切日月逝矣. 功不加倍祗益自歉紹興丁巳冬周孚先謹書.

『문집』9-25 答周閎中書 易傳未傳自量精力未衰尙覬有少進耳. 然亦不必直待身後覺耄則傳矣. 書雖未出學未嘗不傳也. 第患無受之者耳. 來書云易之義本起於數謂義起於數則非也. 有理而後有象有象而後有數易因象以明理由象而知數得其義則象數在其中矣. 必欲窮象之隱微盡數之毫忽乃尋流逐末術家之所尙非儒者之所務也. 管輅郭璞之徒是也. 理無形也. 故因象以明理理旣見乎辭矣. 則可由辭以觀象故曰: 得其義則象數在其中矣.

『문집』9-26 答楊時書 頤啓. 相別多年常深渴想前日自伊川歸得十一月十五日南康發來書知赴新任體况安佳甚慰遠懷頤如常自去冬來多在伊川見謀居伊力薄未能遽成耳. 朝廷設敎官蓋欲敎人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道苟能修職則不素餐兮孰大於是赴省試令子不知其名中第可喩及也. 名廸者好學質美當成遠器應未有北來期兩小子<大者項城尉小者鄢陵尉>承問故及之此獨與諸孫處歲計稔則自餘無足道春暄惟進學自愛不宣頤啓楊君敎授<三月六日>

『문집』9-27 答楊廸書 相別累月思渴前承惠書恐已出京故不復奉答近又收書乃知未行喜聞夏暑安佳. 前書所問心迹之說固知未能無疑也. 若以心迹有判則象憂亦憂乃僞矣. 是宜精索未易曉也. 又云有道又有易何如此語全未是更將傳序詳思當自通矣. <變易而後合道易字與道字不相合也. >大率所論辭與意太多孔孟之門人豈能盡與孔孟同唯其不敢信已而信其師之說是以能思而卒同也. 若紛然致疑終亦必亡而已勉之勉之盛暑在途千百自愛.

『문집』9-28 答門人書 前者奉答適病倦不能詳後來親知講論幾盈箱矣. 設端雖多, 大率意不相遠. 於大槪尙弗識况屈伸久速之際乎平日不謂至如是豈皆知不足以及之蓋爲衆說漂喣不能自立耳. 此由見信不篤故也. 孔孟之門豈皆賢哲固多衆人以衆人觀聖賢弗識者多矣. 惟其不敢信已而信其師是故求而後得今諸君於頤言纔不合則置不復思所以終異也. 不可便放下更且思之致知之方也. 姑求自曉無庸他恤深尤不知者甚無謂也.

『문집』9-29 答鮑若雨書幷答問 頤咨. 諸君處常問知動止忽領惠書審已安康其慰可知頤如常不煩見念示及所疑百忙中謝君告行不暇周悉略奉答思之可也. 夏暑千百善愛五月十日頤咨鮑君秀才 疑難六, 謹寫拜呈伏乞詳賜指諭若雨拜覆. 佛氏輪廻之說, 凡爲善者死, 則復生爲善人, 爲惡者死, 則變而爲禽獸之類. 雖無此實應, 竊恐有此理. 何則? 凡稟冲氣以生者未始不同聖人先得人之所同者而踐履之故能保全太和至死其氣冥會於中和之所造化之中自然有復生爲人之理愚者平居作惡而冲氣已喪至死其氣則會於繆戾之所造化之中自然有爲禽獸之理故曰: 恐有此理也. 夫子曰: 未知生焉知死知生則知死矣. 能原始則能要終矣. 易曰: 陰陽不測之謂神又曰: 神妙萬物而爲言觀此則佛氏所謂鬼神者妄矣. 然祖考來格敬鬼神而遠之之說則似乎有佛氏所謂意者氣類感應處便是來格但當至誠不當褻近近得却有也. 不知此說如何? 潛心久當自明. 孟子曰: 其爲氣也. 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則塞於天地之間嘗謂凡人氣量窄狹只爲私心隔斷苟以直養而無害則無私心苟無私心則志氣自然廣大充塞於天地之間氣象自可以意會而莫能狀者此所謂難言也. 或謂塞于天地之間只是到處去得此言似無氣味 如是涵養 樂正子見孟子孟子曰: 子亦來見我乎云云觀此一篇都無聖人氣象或謂樂正子從子敖有激而云不得不然. 此無疑眞孟子之言 今之成人者何必然見利思義見危授命久要不忘平生之言亦可以爲成人矣. 此言是子路說耶? 孔子說耶? 仲尼言 孟子曰: 不孝有三無後爲大所謂二不孝何如說者謂陷父於不義與家貧親老不求祿仕竊恐不然 何以知不然所謂祿仕凡所以養皆同

『문집』9-30 定親書 頤啓伏以古重大婚蓋將傳萬世之嗣禮稱至敬所以合二姓之歡顧族類之非華愧聲猷之弗競不量非偶妄意高門以頤第幾男雖已勝冠未諧受室恭承賢閣第幾小娘子性質<一作資>甚茂德容有光輒緣事契之家敢有婚姻之願豈期謙厚遽賜允從穆卜良辰恭伸言定有少儀物, 具如別箋.

『문집』9-31 又書 不量衰族久慕高閎. 輒憑咫尺之書, 已諾婚姻之好有少儀物具如別箋.

『문집』9-32 答求婚書 頤啓族望非高聲猷弗競猥蒙謙眷屢致勤誠爰稽合姓之文將卜宜家之慶伏承某人性質挺立器蘊夙成以頤第幾女子年已及笄義當有適特枉緘題之及俾交秦晉之歡仰認深誠敢言非偶在姆師之訓雖愧未閑而箕箒之勤願俾恭事

宋程頤撰 婚禮

『문집』10-1 納采 納采謂壻氏爲女氏所采故致禮以成其意使辭曰: 吾子有惠貺某室也. 某<壻父>有先人之禮使某也. 敢納采 『문집』10-2 問名 問名謂問所娶女子之名若今之小名也. 使者請辭曰: 某旣受命將加諸卜敢請女爲誰氏. 『문집』10-3 納吉 納吉謂壻氏旣得女名以告神而卜之得吉兆又往告女氏猶今之言定使辭曰: 吾子有貺命某加諸卜占曰: 吉使某也. 敢告 『문집』10-4 納徵 徵證也. 成也. 用皮帛以證成娶婦之禮使辭曰: 吾子有命貺某室也. 某有先人之禮某物使某也. 請納徵 『문집』10-5 請期 請期實告婚期也. 必先禮請以示謙使辭曰: 吾子有貺命某旣申受命矣. 惟是三族之不虞使某也. 請吉日女氏對曰: 某旣前受命矣. 惟命之從<一作是聽>使又曰: 某使某聽命於吾子女氏固辭使曰: 某使某受命吾子不許某敢不告期曰: 某日<日猶言甲乙之類> 『문집』10-6 成婚 期日壻氏告迎於廟初昏<禮雖云初昏然當量居之遠近>壻受命於所尊<謂醮而受告戒之命>出乘前引婦車<受命而出乘馬前引婦車迎婦之車也. 今或用擔子>執燭前馬<使徒役持火炬居前照道今用燭四或二>賓將至<賓壻也. >女氏之擯俟於大門之外主人俟於門內賓降<下車也. >擯進揖請事賓對<今以介對>曰: 某<稱壻父>命某<壻名>以玆初昏將請承命擯對曰: 主人固以恭俟擯揖入門主人揖賓及階主人揖升介以賓升介南面贊賓就位<東面>再拜贊卽席內告具主人肅賓而先賓從之見於廟<見女氏之先祖>至於中堂見女之尊者徧見女之黨於東序贊者延賓出就位<贊者以女氏之子姪爲之>卒食興辭<介以賓辭>主人請入戒女氏奉女辭於廟至於中堂母南面於房外女出於母左父西面醮女而戒之母施衿結帨<今謂之整冠飾>戒諸西階之上擯者出壻降立於庭中北面婦降自西階壻揖前導立於車前旣升而先俟於門外<先之者導之也. 門外壻家大門外也. >婦至主人<壻也. >揖婦以入及寢門揖入壻退就次及期<期謂早暮之節>贊者引壻入<贊者壻氏之女相>立東席西面姆侍奉婦立西席東面贊揖壻再拜<男下女也. >姆侍扶婦答拜遂卽席女之從者沃壻盥於南壻之從者沃婦盥於北<沃盥以水濯手也. 於坐席之南北>壻搢笏擧婦蒙首<蓋頭也. >復位贊者進酌<用常爵>三爵用巹姆助婦擧卒食相者以壻婦興說服女之從者受壻服壻之從者受婦服燭出<康成云禮畢>女侍待呼於外夙興婦纚笄衣服以俟見質明贊見婦於舅姑進拜奠贄還又拜見屬之尊者長者於東偏南面東上屬自爲別<是爲見已不復特見>若異宮則見諸父各就其寢幼者賤者皆見於堂下西面北上舅姑入於室婦盥饋舅姑饗婦於堂之西偏卒食婦降自阼階<饗禮謂嫡婦>翌壻拜於婦氏之門 『문집』10-7 奠菜 三月預祭祀事舅姑復三月然後奠菜祝稱婦之姓曰: 某氏來婦敢奠菜於舅某子姑某氏<此段義有未詳> 『문집』10-8 葬說<幷圖> 卜其宅兆卜其地之美惡也. 非陰陽家所謂禍福者也. 地之美者則其神靈安其子孫盛若培壅其根而枝葉茂理固然矣. 地之惡者則反是然則曷謂地之美者土色之光潤<一作澤>草木<一作生物>之茂盛乃其驗也. 父祖子孫同氣彼安則此安彼危則此危亦其理也. 而拘忌者惑以擇地之方位決日之吉凶不亦泥乎甚者不以奉先爲計而以利後爲慮尤非孝子安厝之用心也. 惟五患者不得不愼須使異日不爲道路不爲城郭不爲溝池不爲貴勢所奪不爲耕犁所及<一本所謂五患者溝渠道路避村落遠井窯>五患旣愼則又鑿地必至四五丈遇石必更穿之防水潤也. 旣葬則以松脂塗棺槨石灰封墓門此其大略也. 若夫精畫則又在審思慮矣. 其火葬<一作焚>者出不得已後不可遷就同葬<一作焚>矣. 至於年祀寖遠曾高不辨亦在盡誠各具棺槨葬之, 不須假夢寐蓍龜而決也. 葬之穴尊者居中左昭右穆而次後則或東或西亦左右相對而啓穴也. 出母不合葬亦不合祭棄女還家以殤穴葬之 『문집』10-9 葬法決疑 古者聖人制卜葬之禮蓋以市朝遷變莫得預測水泉交浸<一作侵>不可先知所以定吉凶決善惡也. 後代陰陽家流競爲詭誕之說葬書一術遂至百二十家爲害之大妄謬之甚在分五姓. 五姓之說驗諸經典本無證據古陰陽家亦無此說直是野俗相傳竟無所出之處惟堪輿經黃帝對天老乃有五姓之言且黃帝之時只有姬姜二三姓其餘姓氏盡出後代何得當時已有此語固妄謬無稽之言其所謂五姓者宮商角徵羽是也. 天下萬物悉配屬之行事吉凶依此爲法至如以張王等爲商武庾等爲羽是則同韻相求及其以柳姓爲宮以趙姓爲角又非四聲相管其間亦有同是一姓, 分屬宮商複姓數字徵角不辨都無憑據只信其臆說爾. 夫姓之於人也. 其始也. 亦如萬物之同形者呼某白黑小大以爲別耳. 後世聖人乃爲之制因生賜姓胙土命氏其後子孫因邑因官分枝布葉而庶姓益廣. 如管蔡郕霍魯衛毛呥郜雍曹滕畢原豐郇, 本皆姬姓華向蕭亳皇甫本皆子姓其餘皆爾不可勝擧今者用其祖姓則往往數經更易難盡尋究况復葬書不載古姓若用今姓則皆後代所受乃是吉凶隨時變改也. 人之分宗譬如木之異枝木之性有所宜之地也. 取其枝而散植之其性所宜寧有異乎? 若一祖之裔姓音不同同葬一地遂言彼凶而此吉決無是理設有人父本宮姓子以功勳更賜商姓則將如何用之今二人同言則必擇其賢者信之葬禮聖人所制五姓俗人所說何乃舍聖制而從俗說不亦愚乎? 昔三代之時天下諸侯之國卿大夫之家久者千餘歲其下至數百歲不絶此時葬者未有五姓也. 古之時庶人之年不可得而見矣. 君卿大夫史籍所可見者往往八九十歲有百歲者自唐而來五姓葬法行於世已數世百歲之家鮮矣. 人壽七八十歲者希矣. 苟吉凶長短不由於葬邪則安用違聖人之制而從愚俗所尙吉凶長短果由於葬耶? 是乃今之法徒使人家不久長壽命短促大凶之道也. 進退無取何足言哉! 夫葬者藏也. 一藏之後不可復改必求其永安故孝子慈孫尤所愼重欲地之安者在乎水之利水旣利則終無虞矣. 不止水一事此大槩也. 而今之葬者謂風水隨姓而異此无大害也. 愚者執信將求其吉反獲其凶矣. 至於卜選時日亦多乖謬按葬者逢日食則舍於道左待明而行行是必須晴明不可用昏黑也. 而葬書用乾艮二時爲吉此二時皆是夜半如何用之又曰: 己亥日葬大凶今按春秋之中此日葬者二十餘人皆無其應宜忌者不忌而不宜忌者反忌之顚倒虛妄之甚也. 下穴之位不分昭穆易亂尊卑死者如有知居之其安乎如此背謬者多矣. 不欲盡斥但當棄而勿用自從正法耳. 『문집』10-10 記葬用栢棺事 古人之葬欲比化不使土親膚今奇玩之物尙寶藏固密以防損汚况親之遺骨當何如哉! 世俗淺識惟欲不見而已又有求速化之說是豈知必誠必信之義且非欲其不化也. 未化之間保藏當如是耳. 吾自少時謀葬曾祖虞部已下積年累歲精意思索欲知何物能後骨而朽後咸陽原上有人發東漢時墓栢棺尙在又韓修王城圮得古栢木皆堅潤如新諺有松千栢萬之說於是知栢最可以久然意猶未已因觀雜書有松脂入地千年爲茯芩萬年爲琥珀之說疑物莫久於此遂以栢爲棺而塗以松脂特出臆說非有稽也. 不數月嵩山法王寺下鄕民穿地得古棺裹以松脂乃知古人已用之矣. 自是三四十年七經葬事求安之道思之至矣. 地中之事察之詳矣. 地中之患有二惟蟲與水而已所謂毋使土親膚不惟以土爲汚有土則有蟲蟲之侵骨甚可畏也. 世人墓中多置鐵以辟土獸土獸希有之物尙知備之蟲爲必有而不知備何也. 惟木堅縫完則不能入求堅莫如栢求完莫如漆然二物亦不可保栢有入土數百年而不朽者有數十年而朽者人多以爲栢心不朽而心之朽者見亦多矣. <闕> 『문집』10-11 作主式<用古尺> 作主用栗取法於時月日辰趺方四寸象歲之四時高尺有二寸象十二月身博三十分象月之日厚十二分象日之辰<身趺皆厚一寸二分>剡上五分爲圓首寸之下勒前爲額而判之一居前二居後<前四分後八分>陷中以書爵姓名行<曰: 故某官某公諱某字某第幾神主陷中長六寸濶一寸一本云長一尺>合之植於趺<身出趺上一尺八分幷趺高一尺二寸>竅其旁以通中如身厚三之一<謂圓徑四分>居二分之上<謂在七寸二分之上>粉塗其前以書屬稱<屬謂高曾祖考稱謂官或號行如處士秀才幾郞幾翁>旁題主祀之名<曰: 孝子某奉祀>加贈易世則筆滌而更之<水以洒廟墻>外改中不改 『문집』10-12 祭禮 <羅氏本有此諸本皆無之恐未必先生所著姑附於此> (四時祭) 凡祭, 洒埽廳事, 設几案於階下設盥盆帨手巾祭前一日視滌濯五更起安排如法具時菓井菜三飣或五飣盞盤匙筯訖次設香卓次設盥盆茅縮更祭服焚香請曰: 孝孫某今以仲春之祭共請太祖某官高祖某官曾祖某官祖某官考某官降赴神位奠酒焚香跪執事者過酒左手把盤右手以酒澆酹於灌盆茅縮處俛伏興再拜左避位遂行獻執事者注酒下食二味或一味隨人家貧富頃之再拜亞獻如前三獻如前事畢焚香曰: 祭事已畢揖執事者徹饌祭祖妣亦如前式<四時祭> 始祖<冬至祭> 祭始祖, 灑掃廳事如時祭只設一位以妣配祝執辭出主人之左東向讀之曰: 維年月日孝遠孫某敢昭告於某氏之祖妣今以陽至之始追惟報本禮不敢忘謹備淸酌庶羞之奠尙享三獻如前式 先祖<立春祭> 祭先祖者自始祖而下高祖而上非一人也. 故設二位曰: 惟年月日孝遠孫某今以生物之始恭請先祖祖妣以下降居神位餘如前式 禰<季秋祭> 祭禰曰: 孝子某今以成物之始恭請考君某官妣某官某封某氏降居神位餘如前式



宋程頤撰 行狀 墓誌 祭文

『문집』11-1 明道先生行狀 曾祖希振任尙書虞部員外郞妣高密縣君崔氏祖遹贈開府儀同三司吏部尙書妣孝感縣太君張氏長安縣太君張氏父珦見任大中大夫致任母壽安縣君侯氏先生名顥字伯淳姓程氏其先曰: 喬伯爲周大司馬封於程後遂以爲氏先生五世而上居中山之博野高祖贈太子少師諱羽太宗朝以輔翊功顯賜第於京師居再世曾祖而下葬河南今爲河南人. 先生生而神氣秀爽異於常兒未能言叔祖母任氏太君抱之行不覺釵墜後數日方求之先生以手指示隨其所指而往果得釵人皆驚異數歲誦詩書强記過人十歲能爲詩賦十二三時群居庠序中如老成人見者無不愛重故戶部侍郞彭公思永謝客到學舍一見異之, 許妻以女. 踰冠中進士第調京兆府鄠縣主簿令以其年少未知之民有借其兄宅以居者發地中藏錢兄之子訴曰: 父所藏也. 令曰: 此無證佐何以決之先生曰: 此易辨耳. 問兄之子曰: 爾父藏錢幾何時矣. 曰: 四十年矣. 彼借宅居幾何時矣. 曰: 二十年矣. 卽遣吏取錢十千視之謂借宅者曰: 今官所鑄錢不五六年卽遍天下此錢皆爾未居前數十年所鑄何也. 其人遂服令大奇之. 南山僧舍有石佛歲傳其首放光遠近男女聚觀晝夜雜處爲政者畏其神莫敢禁止先生始至詰其僧曰: 吾聞石佛歲現光有諸曰: 然戒曰: 俟復見必先白吾職事不能往當取其首就觀之自是不復有光矣. 府境水害倉卒興役諸邑率皆狼狽惟先生所部飮食苃舍無不安便時盛暑泄痢大行死亡甚衆獨鄠人無死者所至治役人不勞而事集常謂人曰: 吾之董役乃治軍法也. 當路者欲薦之多問所欲先生曰: 薦士當以才之所堪不當問所欲再期以避親罷再調江寧府上元縣主簿田稅不均比他邑尤甚蓋近府美田爲貴家富室以厚價薄其稅而買之小民苟一時之利久則不勝其弊先生爲令畫法民不知擾而一邑大均其始富者不便多爲浮論欲搖止其事旣而無一人敢不服者後諸路行均稅法邑官不足益以他官經歲歷時文案山積而尙有訴不均者, 計其力比上元不啻千百矣. 會令罷去先生攝邑事上元劇邑訴訟日不下二百爲政者疲於省覽奚暇及治道先生處之有方不閱月民訟遂簡江南稻田賴陂塘以漑盛夏塘堤大決計非千夫不可塞法當言之府府禀於漕司然後計功調役非月餘不能興作先生曰: 比如是苖稿久矣. 民將何食救民獲罪所不辭也. 遂發民塞之歲則大熟. 江寧當水運之衝舟卒病者則留之爲營以處曰: 小營子歲不下數百人至者輒死先生察其由蓋旣留然後請於府給券乃得食比有司文具則困於饑已數日矣. 先生白漕司給米貯營中至者與之食自是生全者大半措置於纖微之間而人已受賜如此之比所至多矣. 先生常云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於人必有所濟. 仁宗登遐遺制官吏成服三日而除三日之朝府尹率群官將釋服先生進曰: 三日除服遺詔所命莫敢違也. 請盡今日若朝而除之所服止二日爾尹怒先生曰: 公自除之某非至夜不敢釋也. 一府相視無敢除者. 茅山有龍池其龍如蜴蜥而五色祥符中中使取二龍至中途中使奏一龍飛空而去自昔嚴奉以爲神物先生嘗捕而脯之使人不惑其始至邑見人持竿道旁以黏飛鳥取其竿折之敎之使勿爲及罷官艤舟郊外有數人共語自主簿折黏竿鄕民子弟不敢畜禽鳥. 不嚴而令行大率如此. 再期, 就移澤州晉城令. 澤人淳厚尤服先生敎命. 民以事至邑者, 必告之以孝弟忠信, 入所以事父兄, 出所以事長上. 度鄕村遠近爲伍保使之力役相助患難相恤而姦僞無所容. 凡孤煢殘廢者責之親戚鄕黨使無失所行旅出於其途者疾病皆有所養諸鄕皆有校暇時親至召父老而與之語兒童所讀書親爲正句讀敎者不善則爲易置俗始甚野不知爲學先生擇子弟之秀者聚而敎之去邑纔十餘年而服儒服者蓋數百人矣. 鄕民爲社會爲立科條旌別善惡使有勸有恥邑幾萬室三年之間無强盜及鬪死者秩滿代者且至吏夜叩門稱有殺人者先生曰: 吾邑安有此誠有之必某村某人也. 問之果然家人驚異問何以知之曰: 吾常疑此人惡少之弗革者也. 河東財賦窘迫官所科買歲爲民患雖至賤之物至官取之則其價翔湧多者至數十倍先生常度所需使富家預儲定其價而出之富家不失倍息而鄕民所費比常歲十不過二三民稅常移近邊載往則道遠就糴則價高先生擇富民之可任者預使購粟邊郡所費大省民力用紓縣庫有雜納錢數百千常借以補助民力部使者至則告之曰: 此錢令自用而不敢私請一切不問使者屢更無不從者先時民憚差役役及則互相糾訴鄕鄰遂爲仇讐先生盡知民産厚薄第其先後按籍而命之無有辭者. 河東義勇農隙則敎以武事然應文備數而已先生至晉城之民遂爲精兵晉俗尙焚屍雖孝子慈孫習以爲安先生敎諭禁止民始信之而先生去後郡官有母死者憚於遠致以投烈火愚俗視傚先生之敎遂廢識者恨之先生爲令視民如子欲辨事者或不持牒徑至庭下陳其所以先生從容告語諄諄不倦在邑三年百姓愛之如父母去之日, 哭聲振野. 用薦者改著作佐郞尋以御史中丞呂公公著薦授太子中允權監察御史裏行神宗素知先生名召對之日從容咨訪比二三見遂期以大用每將退必曰: 頻求對來欲常相見爾一日論議甚久日官報午正先生遽求退庭中中人相謂曰: 御史不知上未食耶? 前後進說甚多大要以正心窒欲求賢育材爲先先生不飾辭辨獨以誠意感動人主神宗嘗使推擇人才先生所薦者數十人而以父表弟張載曁弟頤爲首所上章疏子姪不得窺其藁嘗言人主當防未萌之欲神宗俯身拱手曰: 當爲卿戒之及因論人才曰: 陛下奈何輕天下士神宗曰: 朕何敢如是言之至於再三. 時王荊公安石日益信用先生每進見必爲神宗陳君道以至誠仁愛爲本未嘗及功利神宗始疑其迂而禮貌不衰嘗極陳治道神宗曰: 此堯舜之事朕何敢當先生愀然曰: 陛下此言非天下之福也. 荊公寖行其說先生意多不合事出必論列數月之間章數十上尤極論者輔臣不同心小臣與大計公論不行靑苖取息賣祠部牒差提擧官多非其人及不經封駁京東轉運司剝民希寵不加黜責興利之臣日進尙德之風浸衰等十餘事荊公與先生雖道不同而嘗謂先生忠信先生每與論事心平氣和荊公多爲之動而言路好直者必欲力攻取勝由是與言者爲敵矣. 先生言旣不行懇求外補神宗猶重其去上章及面請至十數不許遂闔門待罪神宗將黜諸言者命執政除先生監司差權發遣京西路提點刑獄復上章曰: 臣言是願行之如其妄言當賜顯責請罪而獲遷刑賞混矣. 累請得罷旣而神宗手批暴白同列之罪獨於先生無責改差簽書鎭寧軍節度判官事. 爲守者嚴刻多忌通判而下莫敢與辨事始意先生嘗任臺憲必不盡力職事而又慮其慢已旣而先生事之甚恭雖筦庫細務無不盡心事小未安必與之辨遂無不從者相與甚歡屢平反重獄得不死者前後蓋十數. 河淸卒於法不他役時中人程昉爲外都水丞怙勢蔑視州郡欲盡取諸埽兵治二股河先生以法拒之昉請於朝命以八百人與之天方大寒昉肆其虐衆逃而歸州官晨集城門吏報河淸兵潰歸將入城衆官相視畏昉欲弗納先生曰: 此逃死自歸弗納必爲亂昉有言某自當之卽親往開門撫諭約歸休三日復役衆歡呼而入具以事上聞得不復遣後昉奏事過州見先生言甘而氣懾旣而揚言於衆曰: 澶卒之潰乃程中允誘之吾必訴於上同列以告先生曰: 彼方憚我何能爾也. 果不敢言. 會曹村埽決時先生方救護小吳相去百里州帥劉公渙以事急告先生一夜馳至帥俟於河橋先生謂帥曰: 曹村決京城可虞臣子之分身可塞亦爲之請盡以廂兵見付事或不集公當親率禁兵以繼之帥義烈士遂以本鎭印授先生曰: 君自用之. 先生得印, 不暇入城省親, 徑走決堤, 諭士卒曰: 朝廷養爾輩, 正爲緩急爾. 爾知曹村決則注京城乎? 吾與爾曹以身捍之. 衆皆感激自效. 論者皆以爲勢不可塞, 徒勞人爾. 先生命善泅者運細繩以渡, 決口水方奔注, 達者百一, 卒能引大索以濟衆, 兩岸並進, 晝夜不息, 數日而合. 其將合也. 有大木自中流而下, 先生顧謂衆曰: 得彼巨木橫流入口則吾事濟矣. 語纔已木遂橫衆以爲至誠所致其後曹村之下復決遂久不塞數路困擾大爲朝廷憂人以爲使先生在職安有是也. 郊祀霈恩, 先生曰: 吾罪滌矣. 可以去矣. 遂求監局以便親養得罷歸自是醜正者競揚避新法之說歲餘得監西京洛河竹木務薦者言其未嘗敍年勞丐遷秩特改太常丞神宗猶念先生會修三經義嘗語執政曰: 程某可用執政不對又嘗有登對者自洛至, 問曰: 程某在彼否? 連言佳士. 其後彗見翼軫間詔求直言先生應詔論朝政極切還朝執政屢進擬神宗皆不許旣而手批與府界知縣差知扶溝縣事. 先生詣執政復求監當執政諭以上意不可改也. 數月右府同薦除判武學新進者言其新法之初首爲異論罷復舊任. 先生爲治專尙寬厚以敎化爲先雖若甚迂而民實風動扶溝素多盜雖樂歲强盜不減十餘發先生在官無强盜者幾一年廣濟蔡河出縣境瀕河不逞之民不復治生業專以脇取舟人物爲事歲必焚舟十數以立威先生始至捕得一人, 使引其類得數十人不復根治舊惡分地而處之使以挽舟爲業且察爲惡者自是邑境無焚舟之患. 畿邑田稅重朝廷歲常蠲除以爲惠澤然而良善之民憚督責而先輸逋負獲除者皆頑民也. 先生爲約前科獲免者今必如期而足於是惠澤始均司農建言天下輸役錢達戶四等而畿內獨止第三請亦及第四先生力陳不可司農奏其議謂必獲罪而神宗是之畿邑皆得免. 先生爲政常權穀價不使至甚貴甚賤會大旱麥苖且枯先生敎人掘井以漑一井不過數工而所灌數畝闔境賴焉水災民饑先生請發粟貸之鄰邑亦請司農怒遣使閱實使至鄰邑而令遽自陳穀且登無貸可也. 使至謂先生盍亦自陳先生不肯使者遂言不當貸先生力言民饑請貸不已遂得穀六千石饑者用濟而司農益怒視貸籍戶同等而所貸不等檄縣杖主吏先生言濟饑當以口之衆寡不當以戶之高下且令實爲之非吏罪乃得已. 內侍都知王中正巡閱保甲, 權寵至盛所至凌慢縣官諸邑供帳競務華鮮以悅奉之主吏以請先生曰: 吾邑貧安能效他邑且取於民法所禁也. 令有故靑帳可用之先生在邑歲餘中正往來境上卒不入鄰邑有寃訴府願得先生決之者前後五六有犯小盜者先生謂曰: 汝能改行吾薄汝罪盜叩首願自新後數月復穿窬捕吏及門盜告其妻曰: 吾與太丞約不復爲盜今何面目見之邪? 遂自經. 官制改除奉議郞朝廷遣官括牧地民田當沒者千頃往往持累世契券以自明皆弗用諸邑已定而扶溝民獨不服遂有朝旨改稅作租不復加益及聽賣易如私田民旣倦於追呼又得不加賦乃皆服先生以爲不可括地官至謂先生曰: 民願服而君不許何也. 先生曰: 民徒知今日不加賦而不知後日增租奪田則失業無以生矣. 因爲言仁厚之道其人感動謝曰: 寧受責不敢違公遂去之他邑. 不踰月先生罷去其人復至謂攝令者曰: 程奉議去矣. 爾復何恃而敢稽違朝旨督責甚數日而事集鄰邑民犯盜繫縣獄而逸旣又遇赦先生坐是以特旨罷邑人知先生且罷詣府及司農丐留者千數去之日不使人知老穉數百追及境上攀挽號泣遣之不去. 以親老求近鄕監局, 得監汝州酒稅今上嗣位覃恩改承議郞先生雖小官賢士大夫視其進退以卜興衰聖政方新賢德登進先生特爲時望所屬召爲宗正寺丞. 未行, 以疾終, 元豐八年六月十五日也. 享年五十有四士大夫識與不識莫不哀傷爲朝廷生民恨惜. 先生資稟旣異而充養有道純粹如精金溫潤如良玉寬而有制和而不流忠誠貫於金石孝悌通於神明視其色其接物也. 如春陽之溫聽其言其入人也. 如時雨之潤. 胸懷洞然徹視無間測其蘊, 則浩乎若滄溟之無際極其德, 美言蓋不足以形容. 先生行已內主於敬而行之以恕見善若出於已不欲勿施於人居廣居而行大道言有物而動有常. 先生爲學自十五六時聞汝南周茂叔論道遂厭科擧之業慨然有求道之志未知其要泛濫於諸家出入於老釋者幾十年返求諸六經而後得之明於庶物察於人倫知盡性至命必本於孝弟窮神知化由通於禮樂辨異端似是之非開百代未明之惑秦漢而下未有臻斯理也. 謂孟子沒而聖學不傳以興起斯文爲已任其言曰: 道之不明異端害之也. 昔之害近而易知今之害深而難辨昔之惑人也. 乘其迷暗今之入人也. 因其高明自謂之窮神知化而不足以開物成務言爲無不周徧實則外於倫理窮神極微而不可以入堯舜之道天下之學非淺陋固滯則必入於此自道之不明也. 邪誕妖異之說競起塗生民之耳. 目溺天下於汙濁雖高才明智膠於見聞醉生夢死不自覺也. 是皆正路之蓁無聖門之蔽塞闢之而後可以入道. 先生進將覺斯人退將明之書不幸早世皆未及也. 其辨析精微稍見於世者學者之所傳爾先生之門學者多矣. 先生之言平易易知賢愚皆獲其益如群飮於河各充其量. 先生敎人自致知至於知止誠意至於平天下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循循有序病世之學者舍近而趨遠處下而窺高所以輕自大而卒無得也. 先生接物辨而不間感而能通敎人而人易從怒人而人不怨賢愚善惡咸得其心狡僞者獻其誠暴慢者致其恭聞風者誠服覿德者心醉雖小人以趨向之異顧於利害時見排斥退而省其私未有不以先生爲君子也. 先生爲政治惡以寬處煩而裕當法令繁密之際未嘗從衆爲應文逃責之事人皆病於拘礙而先生處之綽然衆憂以爲甚難而先生爲之沛然雖當倉卒不動聲色方監司競爲嚴急之時其待先生率皆寬厚設施之際有所賴焉先生所爲綱條法度人可效而爲也. 至其道之而從動之而和不求物而物應未施信而民信則人不可及也. 彭夫人封仁和縣君嚴正有禮事舅以孝稱善睦其族先一年卒<一有五字>子<一有三早卒字>曰: 端懿蔡州汝陽縣主簿曰: 端本治進士業<一有四字>女<一有三夭二字>適假承務郞朱純之卜以今年十月乙酉葬於伊川先塋謹書家世行業及歷官行事之大槩以求誌於作者謹狀元豐八年八月日弟頤狀

『문집』11-2 明道先生門人朋友敍述序 <敍述四篇見附錄> (先兄)明道先生之葬, 頤狀其實以求誌銘且傋異日史氏採錄旣而門人朋友爲文以敍其事迹述其道學者甚衆其所以推尊稱美之意人各用其所知蓋不同也. 而以孟子之後傳聖人之道者一人而已是則同文多不能盡取取其有補於行狀之不及者數篇附於行狀之後.

『문집』11-3 明道先生墓表 (大)宋明道先生程君伯淳之墓 (宋)太師致仕潞國公文彦博題 先生名顥字伯淳葬於伊川潞國太師題其墓曰: 明道先生弟頤序其所以而刻之石曰: 周公沒聖人之道不行孟軻死聖人之學不傳道不行百世無善治學不傳干載無眞儒無善治士猶得以明夫善治之道以淑諸人以傳諸後無眞儒天下貿貿焉莫知所之人欲肆而天理滅矣. 先生生千四百年之後得不傳之學於遺經志將以斯道覺斯民天不憖遺哲人早世鄕人士大夫相與議曰: 道之不明也. 久矣. 先生出揭聖學以示人辨異端闢邪說開歷古之沈迷聖人之道得先生而復明爲功大矣. 於是帝師採衆議而爲之稱以表其墓學者之於道知所嚮然後知斯人之爲功知所至然後見斯名之稱情山可夷谷可堙明道之名亘萬世而常存勒石墓傍以詔後人元豐乙丑十月戊子書

『문집』11-4 孝女程氏墓誌 孝女程氏其第二十九有宋名臣諱羽之後故宗正寺丞顥之女. 幼而莊靜, 不妄言笑; 風格瀟灑, 趣向高潔發言慮事遠出人意終日安坐儼然如齊未嘗敎之讀書而自通文義擧族愛重之擇配欲得稱者其父名重於時知聞遍天下有識者皆願出其門訪求七八年未有可者旣長矣. 親族皆以爲憂交遊咸以爲非謂自古未聞以賢而不嫁者不得已而下求嘗有所議不忍使之聞知蓋度其不屑也. 母亡持喪盡哀雖古篤孝之士無以過也. 遂以毁死. 病旣革頤念無以適其意謂之曰: 爾喜聞道義吾爲爾言之曰: 何不素敎我今且惛矣. 我死無憾獨以不勝喪爲恨耳. 盡召兄弟舅甥姪人人敎誡幼者撫視頃之而絶嗚乎是雖女子亦天地中一異人也. 如其高識卓行使之享年足以名世勵俗幷前古賢婦垂光簡冊不幸短命何痛如之 衆人皆以未得所歸爲恨頤謂不然頤與其父以聖賢爲師所爲尙<一作常>恐不當其意苟未遇賢者而以配世俗常人是使之抱羞辱以沒世頤恨其死不恨其未嫁也. 其生以嘉祐辛丑九月庚戌其卒以元豐乙丑二月丙寅葬於伊川先塋之東是年十月乙酉也. 叔父頤誌.

『문집』11-5 爲家君祭司馬溫公文 嗚乎! 公乎誠貫天地行通神明徇已者私衆口爲容於異論合聽則聖百姓曾無於間言老始逢時心期行道致君澤民雖有志而未終救弊除煩則爲功而已大何天乎之不弔斯人也. 而遽亡溥天興殄瘁之悲明主失倚毗之望如其可贖人百其身死生旣極於哀榮名德永高於千古藐玆羸老夙被深知撫柩慟哀聊陳薄奠.

『문집』11-6 爲家君祭韓康公文 嗚乎! 惟公天賦忠義世推孝友忠以事君完始終之大節孝施有政作儀刑於四方樂善本乎至誠好學至於沒齒故有識之士無思不服. 垂老之年其猷益壯位雖極於將相志則歉於施爲; 恢弘之度, 若海瀆之難量高邈之風非世俗之可企推賢獎善惟日不足周急樂施室幾屢空. 方逢時之尙年遽奉身而勇退如何不弔奄及云亡忠義之表, 天不憖遺孝友之規世將安倣? 寒族有姻家之契, 二男蒙國士之知. 感恩德而未酬痛音容之遽隔玆焉歸葬復阻臨穴恭陳薄奠以寫哀誠.

『문집』11-7 爲家君祭呂申公文 嗚乎! 公禀則異得天之粹遘玆良辰出爲嘉瑞生而富貴處之無累幼而聰明充之能至學旣知眞仕則爲道出入屢更夷險一操二聖臨御人望是從起藩入輔命相冊公平日視公靜密恂恂國論所斷一言萬鈞謂公無位位爲相臣謂公得志志存未伸然公心如權衡所以無間言於率土德如山嶽所以致敬心於人主從容語黙之間人孰量其所補胡上天之不弔不一老之憖遺淵水無涯孰將求於攸濟百身莫贖爲有識之同悲. 嗚乎哀哉! 羸老餘生辱知有素二男論忘勢之交不偶無酬知之路阻臨穴以伸哀姑托文而披露想英靈兮如在監丹誠而來顧!

『문집』11-8 爲家君祭李屯田九縣君文 嗚乎! 夫婦不幸皆終盛年美才不克究其施淑德不克久其芳此親戚交舊知聞所共悲也. 及玆歸葬去故鄕之沮洳得水土之深厚幽安顯慰其善之報而幸之厚與羸老不任遠之莫由臨穴盡於一哀聊爲薄奠尙其來饗!

『문집』11-9 祭劉質夫文 嗚乎! 聖學不傳久矣. 吾生百世之後志將明斯道興斯文於旣絶力小任重而不懼其難者蓋亦有冀矣. 以謂苟能使知之者廣則用力者衆何難之不易也. 遊吾門者衆矣. 而信之篤得之多行之果守之固苦子者幾希方賴子致力以相輔而不幸遽亡使吾悲傳學之難則所以惜子者豈止從遊之情哉! 玆焉歸葬不克臨穴, 姑因薄奠以敍其哀.

『문집』11-10 祭李端伯文 嗚乎! 自予兄弟倡明道學世方驚疑能使學者視效而信從子與劉質夫爲有力矣. 質夫於子爲外兄弟同邑而居同門而學才器相類志尙如一予謂二子可以大受期之遠到而半年之間相繼以亡使予憂事道者鮮悲傳學之難嗚乎天於斯文何其艱哉! 官制有拘不克臨穴寄文爲奠以敍其哀.

『문집』11-11 祭楊應之文 嗚乎! 昔予與君邂逅相遇於大江之南言契氣合遂從予游歲將三紀情均骨肉忽聞來訃何痛如之. 嗚乎! 應之誰謂君而止於此乎高才偉度絶出群類善志奇蘊曾未得施天胡爲厚其稟而嗇其年人誰不死君之死爲可恨也. 奚止交舊之情悲哀而已管城之原歸祔先兆屬予衰年憚於長道不能臨穴一慟以伸余情姑致菲薄之奠魂兮其來歆此誠意!

『문집』11-12 祭朱公掞文 嗚乎! 道旣不明世罕信者不信則不求不求則何得斯道之所以久不明也. 自予兄弟倡學之初衆方驚異君時甚少獨信不疑非夫豪傑特立之士能如是乎篤學力行至於沒齒志不渝於金石行可質於神明在邦在家臨民臨事造次動靜一由至誠上論古人豈易其比蹇王臣之節凜凜循吏之風著見事爲皆可紀述謂當大施於時必得其壽天胡難忱遽止於此嗚乎哀哉! 不幸七八年之間同志共學之人相繼而逝<劉質夫李端伯呂與叔范巽之楊歷之相繼而逝也. >今君復往使予踽踽於世憂道學之寡助則予之哭君豈特交朋之情而已邙山之陽歸祔先宅思平生之深契痛音容之永隔陳薄奠以將誠庶英靈兮來格

宋程頤撰 墓誌 家傳 祭文

『문집』12-1 書先公自撰墓誌後(大中自撰墓誌) 程姓珦名伯溫字. 姓源世系詳於家牒故不復書曾王父尙書兵部侍郞贈太子少師諱羽曾王母淸河太君張氏. 襄陵太君賈氏王父尙書虞部員外郞諱希振王母高密縣君崔氏考贈司空諱遹妣追封趙國太夫人張氏. 冀國太夫人張氏. 予性質顓蒙學術黯淺不能自奮以嗣先世天聖中仁宗皇帝念及祖宗舊臣例錄子孫一人補郊社齋郞歷黃州黃陂吉州廬陵二縣尉潤州觀察支使由按察官論薦改大理寺丞知虔州興國縣龔州徐州沛縣監在京西染院知鳳磁漢三州事. 熙寧中, 厭於職事, 丐就閒局管勾西京嵩山崇福宮歲滿再任遂請致仕官自大理寺丞十三遷至大中大夫勳自騎都尉至上柱國爵永年縣伯食邑戶九百. 娶侯氏, 贈尙書比部員外郞道濟之長女封壽安縣君先三十八年卒追封上谷郡君男六人長應昌次天錫皆幼亡次顥承議郞宗正寺丞先卒次頤今爲通直郞次韓奴蠻奴皆夭女四人長婆嬌幼亡次適奉禮郞席延年次馮兒幼亡次適都官郞中李正臣孫男五人端懿蔡州汝陽縣主簿監西京酒次端中治進士業次端輔早亡次端本治進士業次端彦郊社齋郞孫女八人長適宣義郞李偲次適假承務郞朱純之次適安定席彦正次未嫁而卒次爲李偲繼室次適淸河張敷次幼亡曾孫六人昻昪昺易旻, 曾孫女一人. 元祐五年庚午春正月十三日己卯以疾終於正寢<先居暖室旣得疾命遷正寢>享年八十五越三月孟夏庚戌望葬於伊川先塋之次上谷郡君祔焉. 予歷官十二任享祿六十年但知廉愼寬和孜孜夙夜無勳勞可以報國無異政可以及民始終得免瑕謫爲幸多矣. 葬日切不用干求時賢製撰銘誌旣無事實可紀不免虛詞溢美徒累不德耳. 只用此文刻於石向壁安置若或少違遺命是不以爲有知也. 先公大中年七十則自爲墓誌及書戒命於後後十五年終壽子孫奉命不敢違惟就其闕處<事未至者皆缺字使後人加之>加所遷官爵晩生諸孫及享年之數終葬時日而已醇德懿行宜傳後世者皆莫敢誌著之家牒孤頤泣血書

『문집』12-2 先公大中家傳 先公大中諱珦字伯溫舊名溫<一有其字>字君玉旣登朝改後名景德三年丙午正月二十三日生於京師泰寧坊賜第. 性仁孝溫厚恪勤畏愼開府事父兄謹敬過人責子弟甚嚴公纔十餘歲則使治家事事有小不稱意旨公恐懼若無所容自少爲族兄文簡公所器. 開府終於黃陂公年始冠諸父繼亡聚屬甚衆無田園可依遂寓居黃陂勞身苦志奉養諸母敎撫弟妹時長弟璠七歲從弟瑜六歲餘皆孩幼後數歲朝廷錄舊臣之後授公郊社齋郞以口衆不能偕行遂不赴調文簡公義之爲請於朝就注黃陂縣尉任滿又不能調閒居安貧以待諸弟之長至長弟與從弟皆得官娶婦二妹旣嫁乃復赴調. 授吉州廬陵縣尉時劉丞相沆已貴顯其子弟有恃勢暴橫於鄕里者郡守以下皆爲之屈公獨不與接劉丞相聞而愧之待公甚厚. 再調潤州觀察支使有侍禁曹元哲者挾權要勢與人爭田守畏逼囑公右之公弗爲撓潤當途事繁劇多賴公以濟聲聞甚著部使者至無有不論薦者. 改大理寺丞知虔州興國縣事虔人素號難治而邑之衣錦鄕尤爲稱首自昔治之與他鄕異前令欲以慘酷威之盛冬使爭者對立於庭以雪埋及膝而人益不服公善告諭之與他鄕一視人遂信服在邑幾二年而獄空者歲餘江西狡民善爲古券契田訟最爲難辨而虔尤甚旁邑有爭積十餘歲不能決部使者以委公根連證佐然盈庭公獨呼爭者前訊之不十數語盡得其情遂皆服事決於頃刻之間人以爲神. 就移知龔州事時宜州反獠毆希範旣誅鄕人忽傳其降言當爲我南海立祠於是迎其神以往自宜至龔歷數州矣. 莫之禁也. 公使詰之對曰: 過潯州守以爲妖投奉神之具於江中逆流而上守懼乃更致禮公曰: 試再投之越人畏鬼甚於畏官皆莫敢前公杖不奉命者及投之乃流去人方信其爲妄在州二歲部使者未嘗入境時潘師旦爲提點刑獄最稱嚴察, 一道𢥠畏, 嘗過境上以書謝公曰: 旣聞淸治不須至也. 遷太子中舍. 明堂覃恩, 改殿中丞. 代還在塗, 而儂智高作亂破州城後守貸死羈置人皆以公獲免爲積善之報. 授知徐州沛縣事會久雨平原出水穀旣不登晩種不入民無卒歲具公謂俟可耕而種則時已過矣. 乃募富家得豆數千石以貸民使布之水中水未盡涸而甲巳露矣. 是年遂不艱食. 有丐於市者, 自稱僧伽之弟愚者相倡競遺金錢公杖之而出諸境. 遷國子博士賜緋魚袋歸監在京西染院遷尙書虞部員外郞知鳳州事鳳當川蜀之衝軺傳旁午毁譽易得爲守者相承務豐廚傳主吏多至破産公裁減幾半曰: 是足以爲禮未爲薄也. 會漢中不稔饑民自褒斜山谷而出公敎於路口爲糜粥以待之所濟甚衆. 遷司門員外郞丁崇國太夫人憂服除權判鴻臚寺英宗嗣位覃恩遷庫部員外郞知磁州事磁城趙簡子所築東南隅水泉惡灌濯亦不可用居民安於久習婦女晨出遠汲不惟勞且乏用風俗以之弊歷千餘歲無爲慮者公度城曲之地曰: 此去濠水數步之近漸漬旣久地脉當變矣. 穿二井果美泉也. 人甚賴之時久雨自河以北城壘皆圮公言於帥府請發衆治之帥不敢主使聽命於朝公請於朝者三不報蓋自北朝通好未嘗發衆治城時韓魏公秉政使人諭公曰: 城壞州當自治何以請爲公曰: 役大法不許擅興且完舊非創築何害乃得請後數月始槩命諸州治城每歲春首興役治河民間自秋成則爲之傋貧室尙患不及是年二役幷興人甚苦之獨磁先已畢工民得復營河役之用又築於未凍之前城得堅固遷水部郞中神宗卽位覃恩遷司門郞中是歲城中瓦屋及濠水上氷澌盤屈成花卉之狀奇怪駭目郡官皆以爲嘉瑞請以上聞公曰: 石晉之末嘗有此朝廷豈不惡之衆皆服. 代還知漢州事遷庫部郞中蜀俗輕浮而公臨之以安靜視事之翌日上謝表命園中取竹爲筩衆吏持筩走白殺靑而文見於中曰: 君王萬歲公知其僞不應吏懼而退中元節宴開元寺蓋盛遊也. 酒方行衆呼曰: 佛光見觀者相騰踏不可禁公安坐不動頃之乃定大興州學親視敦勉士人從化者甚衆漢守有園圃公田之入素稱優厚至者無不厚藏而歸公始被命親舊以其素貧皆爲之喜公擇而取之終任所獲布數百匹而已. 熙寧中議行新法州縣囂然皆以爲不可公未嘗深論也. 及法出爲守令者奉行惟恐後成都一道抗議指其有未便者獨公一人時李元瑜爲使者挾朝廷勢凌蔑州郡沮公以爲妄議公奏請不俟滿罷去不報乃移疾乞授代不復視事. 歸朝願就閒局得管勾西京嵩山崇福宮歲滿再任遷司農少卿南郊恩賜金紫以年及七十乞致仕家貧口衆仰祿以生據禮引年略不以生事爲慮人皆服公勇決兩經南郊恩以子敍遷中散大夫中大夫今上卽位覃恩遷大中大夫累封永年縣開國伯食邑九百戶勳上柱國. 元祐五年正月十三日以疾終於西京國子監公舍先居暖室病革命遷正寢享年八十有五太師文公彦博西京留守韓公縝今左丞蘇公頌等九人相繼以公淸節言於朝詔賜帛二百匹仍命有司供其葬事以四月十五日葬於伊川先塋之次. 始少師厭五代河北之多亂徒葬少監於京兆之興平將謀居醴泉及貴賜第於泰寧坊遂再世居京師嘉祐初公卜葬祖考於伊川始居河南. 公娶侯氏贈尙書比部員外郞道濟之女封壽安縣君先公三十八年終追封上谷郡君男六人長曰: 應昌次曰: 天錫皆幼亡次曰: 顥任承議郞宗正寺丞先公五年卒次頤也. 次韓奴次蠻奴皆幼亡女四人長幼亡次適奉禮郞席延年次幼亡次適都官郞中李正臣. 公孝於事親順於事長慈於撫幼寬於治民二歲喪母祖母崔夫人撫愛異於他孫嘗以漆鉢貯錢與之公終身保藏其鉢命子孫寶之開府再娶崇國太夫人時方八歲已能親順顔色崇國愛之如已出奉養五十年崇國未嘗形慍色開府喜飮酒公平生遇美酒未嘗不思親頤自垂髫至白首不記其曾偶忘也. 遇人與開府同年而生者士人也. 無賢愚高下必拜之賤者亦待之加禮開府嘗從趙炎者貸錢五千未償公記其姓名而不知其子孫鄕里終身訪求以不獲爲恨. 始公撫育諸孤弟其長二人仕登朝省二十餘年間皆亡長弟之子九歲從弟之子十一歲公復撫養至於成長畢其婚宦育二孤皆再世亦異事也. 前後五得任子以均諸父子孫嫁遣孤女必盡其力所得俸錢分贍親戚之貧者伯母劉氏寡居公奉養甚至其女之夫死公迎從女兄以歸敎養其子均於子姪旣而女兄之女又寡公懼女兄之悲思又取甥女以歸嫁之. 時小官祿簿克已爲義人以爲難. 後遇劉氏之族子於襄邑, 偶詢其宗系知姻家也. 未幾劉生卒其子立之纔七歲公取歸敎養今登進士第爲宣德郞矣. 公慈恕而剛斷平居與幼賤語惟恐有傷其意至於犯義理則不假也. 左右使令之人無日不察其飢飽寒煖與人接淡而有常不妄交遊於所信愛久而益篤在虔時, 常假倅南安軍一獄掾周惇實年甚少不爲守所知公視其氣貌非常人與語果爲學知道者因與爲友及爲郞官故事當擧代每遷授輒一薦之. 聞人有慶樂事喜之如在已不爲皎皎之行平生不親附權勢而請謁常禮亦不廢也. 至於親舊之貴顯者旣不與之加親亦不示之踈遠故賢者莫不敬愛不賢者亦無敢慢寓居黃陂時主簿貪凶人也. 常曰: 諺云明鏡爲醜婦之寃君居此照我何其不幸也. 遂頗自歛有歐陽乾曜者以才華自負多肆輕傲易公年少常以語侵公, 公如不聞後公官嶺下乾曜適倦道路公以人船濟之乾曜曰: 可謂汪汪如千頃之波也. 南昌黃灝有高才名動江表然頗不羈稠人廣坐無所不狎侮公時最少獨見禮重常目公曰: 長者無笑我自少時德度服人已如此. 居官臨事, 孜孜不倦. 歷守四郡溫恭待下身率以淸愼, 所至, 寮屬無有敢貪縱者自朝廷行考課法無歲不居上. 平生居官不以私事笞扑人公之親愛者常有所怒堅請杖之曰: 吏卒小人不加以威是使之慢也. 公曰: 當官用刑蓋假手耳. 豈可用於私也. 終不從謙退不伐善常欿然自以爲不足所能者雖曲藝小事人莫知也. 平生所爲詩甚多自謂非工卽棄去退休後所作方稍編錄亦未嘗以示人也. 自少師以來, 家傳淸白, 而公處已尤約官至四品奉養如寒士(糸+兼)素之衣有二三十年不易者終身非宴會不重肉旣謝事遂屛朝衣賓客來者無貴賤見之雖公相亦不往謝方仕宦時每歎曰: 我貧未能舍祿仕苟得早退休閒十年志願足矣. 自領崇福外無職事內不問家有無者蓋二十餘年居常黙坐人謂靜坐旣久寧無悶乎公笑曰: 吾無悶也. 家人欲其怡悅, 每勸之出遊, 時往親戚之家, 或園亭佛舍然公之樂不在此也. 嘗從二子遊壽安山爲詩曰: 藏拙歸來已十年身心世事不相關洛陽山水尋須遍更有何人似我閒顧謂二子曰: 遊山之樂猶不如靜坐蓋亦非好也. 晩與文潞公席君從司馬伯康爲同甲會洛中圖畫傳爲盛事. 年八十喪長子親舊以其慈愛素厚憂不能堪公以理自處無過哀也. 頤時未仕闔門皇皇不知所以爲生公不以爲憂也. 及頤被召叨傋勸講人皆慶之公無甚喜也. 嘗有疾召醫視脉曰: 無害公笑曰: 吾年至此矣. 有害無害皆可也. 雖疾病服藥必加巾年七十則自爲墓誌紀履歷始終而已書其後以戒子孫曰: 吾歷官十二任享祿六十年, 但知廉愼寬和, 孜孜夙夜, 無勳勞可以報國無異政可以及民始終得免瑕謫爲幸多矣. 葬日, 切不用干求時賢製撰銘誌旣無事實可紀, 不免虛詞溢美, 徒累不德只用此文刻於石向壁安置若或少違遺命是不以爲有知也. 不肖孤奉命不敢違於葬旣無銘述家傳所記不敢一辭溢美取誣親之罪承公志也.

『문집』12-3 上谷郡君家傳 先妣夫人姓侯氏太原孟縣人行第一<一作二>世爲河東大姓曾祖元祖暠當五代之亂以武勇聞劉氏偏據日錫土於烏河川以控寇盜亡其爵位父道濟始以儒學中科第爲潤州丹徒縣令贈尙書比部員外郞母福昌縣太君刁氏. 夫人幼而聰悟過人女功之事無所不能好讀書史博知古今丹徒君愛之過於子每以政事問之所言雅合其意常歎曰: 恨汝非男子七八歲時常敎以古詩曰: 女人不夜出夜出秉明燭自是日暮則不復出房閣刁夫人素有風厥之疾多夜作不知人者久之夫人涕泣扶侍常連夕不寐. 年十九歸於我事舅姑以孝謹稱與先公相待如賓客德容之盛內外親戚無不敬愛衆人遊觀之所往往捨所觀而觀夫人先公賴其內助禮敬尤至而夫人謙順自牧雖小事未嘗專必禀而後行. 仁恕寬厚撫愛諸庶不異已出從叔幼孤夫人存視常均已子治家有法不嚴而整不喜笞扑奴婢視小臧獲如兒女諸子或加呵責必戒之曰: 貴賤雖殊人則一也. 汝如此大時能爲此事否道路遺棄小兒屢收養之有小商出未還而其妻死兒女散逐人去惟幼者始三歲人所不取夫人懼其必死使抱以歸時聚族甚衆人皆有不欲之色乃別糴以食之其父歸謝曰: 幸蒙收養得全其生願以爲獻夫人曰: 我本以待汝歸非欲之也. 好爲藥餌以濟病者大寒有負炭而繫者過門家人欲呼之夫人勸止曰: 愼勿爲此勝則貧者困矣. 先公凡有所怒必爲之寬解惟諸兒有過則不掩也. 常曰: 子之所以不肖者由母蔽其過而父不知也. 夫人男子六人所存惟二其愛慈可謂至矣. 然於敎之之道不少假也. 纔數歲行而或踣家人走前扶抱恐其驚啼夫人未嘗不呵責曰: 汝若安徐寧至踣乎飮食常置之坐側嘗食絮羹皆叱止之曰: 幼求稱欲長當如何雖使令輩不得以惡言罵之故頤兄弟平生於飮食衣服無所擇不能惡言罵人非性然也. 敎之使然也. 與人爭忿雖直不右曰: 患其不能屈不患其不能伸及稍長常使從善師友遊雖居貧或欲延客則喜而爲之具其敎女常以曹大家女誡. 居常敎告家人曰: 見人善則當如已善必共成之視他物當如已物必加愛之先公罷尉廬陵赴調寓居歷陽會叔父亦解掾毗陵聚口甚衆儲傋不足夫人經營轉易得不困乏先公歸問其所爲歎曰: 良轉運使才也. 所居之處鄰婦里姥皆願爲之用雖勞不怨始寓丹陽蹴葛氏舍以居守舍王氏翁姥庸狡前後居者無不苦之夫人待之有道遂反柔良及遷去王姥涕戀不已 夫人安於貧約服用儉素觀親族間紛華相尙如無所見少女方數歲忽失所在乳母輩悲泣叫號夫人罵止之曰: 在當求得苟亡失矣. 汝如是將何爲在廬陵時公宇多怪家人告曰: 物弄扇. 夫人曰: 熱爾. 又曰: 物擊鼓. 夫人曰: 有椎乎可與之後家人不敢復言怪怪亦不復有遂獲安居. 夫人有知人之鑒. 姜應明者中神童第人競觀之. 夫人曰: 非遠器也. 後果以罪廢頤兄弟幼時夫人勉之讀書因書線貼上曰: 我惜勤讀書兒又幷書二行曰: 殿前及第程延壽先兄幼時名也. 次曰: 處士及先兄登第頤以不才罷應科擧方知夫人知之於童稚中矣. 寶藏手澤使後世子孫知夫人之精鑒. 夫人好文而不爲辭章見世之婦女以文章筆札傳於人者深以爲非平生所爲詩不過三二篇皆不存獨記在歷陽時先公覲親河夜聞鳴雁嘗爲詩曰: 何處驚飛起雝雝過草堂早是愁無寐忽聞意轉傷良人沙塞外羈妾守空房欲寄廻文信誰能付汝將讀史見姦邪逆亂之事常掩卷憤歎見忠孝節之士則欽慕不已嘗稱唐太宗得禦戎之道其識慮高遠有英雄之氣夫人之弟可世稱名儒才智甚高嘗自謂不如夫人. 夫人自少多病好方餌修養之術甚得其效從先公官嶺外偶迎凉露寢遂中瘴癘及北歸道中病革召醫視脉曰: 可治謂二子曰: 紿爾也. 未終前一日命頤曰: 今日百五爲我祀父母明年不復祀矣. 夫人以景德元年甲辰十月十三日<一作二十二>生於太原皇祐四年壬辰二月二十八日終於江寧享年四十九始封壽安縣君. 追封上谷郡君.

『문집』12-4 叔父朝奉墓誌銘 叔父名珫字季聰贈太子少師諱羽淸河郡太君張氏襄陵郡太君賈氏之曾孫尙書虞部員外郞諱希振高密縣君崔氏之孫贈開府儀同三司諱遹榮國太夫人張氏崇國太夫人張氏之子先公大中之季弟其上世居深州之博野累代聚居以孝義稱至少師顯於朝賜第京師始居開府先君葬祖考於伊川遂遷河南. 公天性孝友淳質不事文飾幼孤事崇國能竭其力於宗族篤恩義愛幼稚如已生事伯兄丘嫂如父母與人接傾盡心腑信人如已屢致欺而不變人多笑之而好德者重之. 年四十五始以伯兄大中恩補郊社齋郞調懷州修武縣主簿秩滿受權澤州端氏縣令閱歲卽眞用薦者改大理寺丞復四遷至朝奉郞積勳至上輕車都尉賜服銀緋歷河中府龍門汝州襄城縣事權管勾西京國子監遂致官事公當官竭力不擇難易盡心於愛民故所至民愛之嘗捕蝗徒步執篲爲衆人先其不愛力皆此類喜求民利病力可行者行之不能者言之上官雖沮却不恨. 年五十始有子傷從兄無嗣遂以繼之先君六得任子恩公與二子實居其三則公之見愛於兄與先君之厚於弟可見矣. 娶賈氏追封宜興縣君繼室張氏封壽光縣君子二人長曰: 頔郊社齋郞出繼從伯父後次曰: 顒太廟齋郞女二人長適承議郞劉立之次適進士王霂公生於天聖元年四月壬寅終於紹聖四年六月乙酉歷年七十有五是年十月某日葬於伊川先塋孤姪頤號泣而銘其穴曰: 孝於事親順於事兄質直而好義勤瘁以奉公家無間言仕有善效古之所謂躬行君子公其是乎歸全於斯嗚呼! 哀哉!

『문집』12-5 家世舊事 少師影帳畫侍婢二人一曰: 鳳子一曰: 宜子頤幼時猶記伯祖母指其爲誰今則無能識者抱笏蒼頭曰: 福郞家人傳曰: 畫工呼使啜茶視而寫之福郞尋卒人以爲畫殺叔父七郞中影帳亦畫侍者二人大者曰: 楚雲小者曰: 僿<一作賽>奴未幾二人皆卒由是家中益神其事人壽短長有數豈畫能殺蓋偶然耳. 成都寺院皆無高門限傳云少師脚短當時皆去之至今猶不復用 少師卜居醴泉第舍卑狹頤少時嘗到宛然如舊諸房門皆題誰居先公大中所記也. 後十年再到則已爲四翁<名逢堯>房子孫所賣更易房室不忍復觀矣. 自少師貴顯居京師醴泉第宅大評事諸孫居之後遂分而賣之先公未嘗問也. 券契皆存以其上有少師書 字故不忍毁去然收藏甚密家中子弟有未嘗見者先公守鳳州時四翁問欲得宅否先公答以叔有之與某有之正同當善守而已又出一少師小印合示頤曰: 祖物也. 可收之. 頤曰: 翁能保之足矣. 不敢受者所以安其疑心也. 又如太宗皇帝御書及少監眞像皆在亦未敢求見不意纔數年四翁卒比再至醴泉則散失盡矣. 思之痛傷後又二十年頤到醴泉改葬少師始求得少監段太君誥於三翁家少師犀帶於長安太監簿家少師綠玉枕於四翁女种家鞍兀於三翁家. 少師厭河北五代兵戈及宰醴泉遂謀居焉徙葬少監於縣城之西旣顯雖賜第居京師囊橐至於御書誥勑皆多在醴泉從高祖大評事四評事治生事皆淳儉嚴整大評事家人未嘗見笑惟長孫始生<長安虞部也. >一老嫗白曰: 承旨<將軍也. >新婦生男微開顔曰: 善視之曾祖母崔夫人亦留醴泉與從曾祖母雷氏<將軍之室>奉事二叔姑晨夕敬畏平居必曵之長裾烹飪少有失節則不食拱手而起二婦恐懼不敢問所由伺其食美取所餘嘗之然後知所嗜太高祖母楊氏前卒四高祖母李氏主內事性尤嚴峻二婦晝則供侍夜復課以女工之事雷氏不堪其勞有間則泣於後庭崔夫人每勸勉之竟得羸疾而終崔夫人怡怡如也. 叔舅姑遂加愛之後外祖崔駕部過雍見其艱苦之甚屬少師取至京師不撤帷帳盡置囊篋云暫往省覲叔舅姑方聽其來少師之待兄弟崔夫人之事叔舅姑後世所當法也. 少師治醴泉惠愛及人至深其後諸房子弟旣多不無侵損於邑人而邑人敬愛之不衰有爭忿者及門則止俟過而復爭小兒持盤賣菓爲族中群兒奪取啼而不敢較嘉祐初頤過邑去少師時八十年矣. 驢足病呼醫治之問知姓程辭錢不受昔時村婦多持香茶祈蠶於冡因搯取其土以乞靈後禁止之. 族父文簡公應擧來京師館於廳旁書室惟乘一驢更無餘資至則賣驢得錢數千伯祖殿直輕財好義待族人甚厚日責文簡公具酒餚欲觀其器度文簡公訴曰: 驢兒已喫至尾矣. 文簡公一夕夢紫衣持箱幞, 其中若勑書授之曰: 壽州陳氏不測所謂以問伯祖殿直亦莫能曉後登科有媒氏來告有陳氏求壻必欲得高第者問其鄕里乃壽州人文簡公年少才高欲壻名家弗許伯祖曰: 爾夢如是蓋黙定矣. 豈可違也. 强之使就後累年猶怏怏陳夫人賢德宜家夫婦偕老享封大國子孫相繼豈偶然哉! 叔祖寺丞有知人之鑒常謂文簡公公輔之器文簡公爲著作佐郞時賈文元尙少一日侍叔祖坐曰: 某昨夜夢坐此有一人乘驢而來索紙寫門狀復乘驢而去坐中有一人指之曰: 此將來宰相也. 頃之文簡公乘驢而來索紙寫門狀復登驢而去正如所說之夢賈文元曰: 程六當爲宰相歎羨不已叔祖謂曰: 爾無羡彼爾作相當在先及文簡公爲兩制賈方小官及參大政風望傾朝衆謂旦夕爰立俄以事罷去比三易藩郡而賈已登庸方拜使相雖古之精於術者無以過也. 叔祖寺丞年四十謂家人曰: 吾明年死矣. 居數月又指堂前屋曰: 吾去死如隔此屋矣. 又數月指室中窗曰: 吾之死止如隔此紙耳. 未幾而卒叔祖多才藝與人會射發矢能如其意常從主人之後主人中則亦中主人遠則亦遠不差尺寸. 伯祖殿直喜施而與人周一日苦寒有儒生造門卽持綿袴與之其人大驚曰: 何以知我無袴也. 蓋於遊從間嘗察其不足也. 至晩年家資懸罄而爲義不衰有儒生以講說醵錢時家無所有偶伯祖母有珠子裝抹胸賣得十三千盡以與之. 明道先生宰晉城時有富民張氏子其父死未幾晨起有老父立於門外問之曰: 我汝父也. 今來就爾居具陳其由張氏子驚疑莫測相與詣縣請辨之老父曰: 業醫遠出治疾而妻生子貧不能養以與張氏某年某月某日某人抱去某人某人見之先生謂曰: 歲久矣. 爾何記之詳也. 老父曰: 某歸而知之則書於藥法策後因懷中取策進之其所記曰: 某年月日某人抱兒與張三翁家先生問張氏子曰: 爾年幾何曰: 三十六矣. 爾父而在年幾何曰: 七十六矣. 謂老父曰: 是子之生其父年纔四十人已謂之三翁乎老父驚駭服罪. 明道主簿上元時謝師直爲江東轉運判官師宰來省其兄嘗從明道假公僕掘桑白皮明道謂之曰: 漕司役卒甚多何爲不使曰: 本草說桑白皮出土見日者殺人以伯淳所使人不欺故假之耳. 師宰之相信如此謝師直尹洛時嘗談經與鄙意不合因曰: 伯淳亦然往在上元某說春秋猶時見取至言易則皆曰: 非是頤謂曰: 二君皆通易者也. 監司談經而主簿乃曰: 非是監司不怒主簿敢言非通易能如是乎.

『문집』12-6 改葬告少監文 維元祐六年辛未二月癸卯, 玄孫右承議郞權司管勾西京國子監輕車都尉賜緋魚袋珫謹遣姪頤就墳所以酒肴之具祭告於高祖少監高祖母京兆太君段氏之靈. 秦人之俗以開發冡墓爲事. 近年以來大評事四評事墓繼遭盜劫少師墓亦嘗有穴固不知完否. 苟不完矣, 理當改厝. 幸而尙完異日之禍不得不慮今將改葬少師而遷公丘封使後人不知墓之所在以圖永安謹具昭告伏惟鑒饗!

『문집』12-7 祭席仁叟文 年月日河南程頤謹以香醪致奠於亡姊夫奉禮郞席仁叟之靈自我未冠與君爲姻游從嬉戲不殊同隊之魚情好恩義無異一門之親知吾心而丹誠相照信吾道而白首逾新<仁叟晩年見信益篤>於聚散之間尙不勝於悽慘况死生之隔何以喩其悲辛昔我姊之云亡望君舍而來奔悼彼中途之天逝各懷哀憤以難伸表情誠之不替遂婚姻之重論於是君之女以女於吾姪吾之息復歸於君門敦契義之如是豈淺薄之所存何其降年不永訃音遽聞相去千里徒增勞於魂夢逮玆三稔始克展於丘墳宿草雖久子哀未泯挈甥女以將歸敍中懷而告違淸香一炷芳醪一巵君其饗之當鑒我心之悲

『문집』12-8 祭張子直文 妹夫故尙書虞部員外郞張君子直之靈. 嗚呼! 與君游從歲踰一紀情在睦姻我於君而旣厚心存樂善君於我而彌隆會則盡盍簪之歡別則有索居之嘆信吾道而白首逾堅知余心而中懷靡間君在洛南我居畿甸常爲命駕之約方切離群之戀忽承置郵之書重有婚姻之願雖稚女之愛憐感君心之勤眷遽報諾音曾未幾月走介欻來言君被疾觀遣辭之甚遽已驚皇而自失走十舍之修途冒如焚之赫日始及近郊已聞捐室撫孤孀而長慟痛死生之永隔. 嗚呼子直! 惟君之生爲善是力臨官政有慈惠幹濟之稱居鄕里推謹厚淳和之德謂所享之宜長胡降衷之莫測祐薄命短人之所悲母老子幼禍兮何極雖道路以興嗟宜親朋之共惜何君命之若斯俾我心之重衋羇旅之次肴羞麤飾惟君之靈監斯誠而來格!

『문집』12-9 祭四十一郞文 叔父頤令昂具酒餚致祭於姪四十一郞之靈. 嗚呼! 乃祖乃父世積慶善而汝兄弟姊妹皆不克壽天造差忒至如是乎惟汝資禀善和修謹無子弟之過期汝有成而遽死耶? 吾方以罪戻竄縶遠方生不獲視汝疾死不獲撫汝柩寃痛之深衷腸如割吾知汝有未伸之志抱無窮之恨吾當致力慰爾心於泉下又汝婦盛年自今當待之加厚冀其安室嗣子循良今已可見當敎誨之期於成立則汝爲有後矣. 此外吾無以致其力矣. 嗚呼! 吾將七十望汝收我而我反哭汝天乎寃哉!

『문집』12-10 祭李邦直文 嗚呼! 惟公世推文章位登丞輔簡編見其才華廊廟存其步武固不待誄而後知也. 自與公別於玆九年旣升沈之異迹望履潟以無緣惟期與公掛冠之後居洛之濱葛巾藜杖日以相親何志願之未諧遂音容之永隔追念平昔悲辛塡臆. 嗚呼! 哀哉! 頤也. 少服公名晩識公面重以姻媾始終異眷感懷知遇丹誠莫見一慟靈筵, 聊伸薄奠

『문집』12-11 祭李通直文<先生之婿> 嗚呼! 余周流天下閱人多矣. 求其忠孝仁厚如子者幾希宜得其壽而遽死耶? 余老矣. 有賴於子而反哭於子何其酷耶? 薄奠致誠尙其來享

附錄 遺文

『문집』13-1 放蝎頌<見游氏本拾遺> 殺之則傷仁放之則害義

『문집』13-2 酌貪泉詩<見劉立之敍述> 中心如自固外物豈能遷

『문집』13-3 書縣廳壁<見龜山語錄> 視民如傷 右明道先生文

『문집』13-4 易上下篇義 <見易傳後> 乾坤, 天地之道, 陰陽之本, 故爲上篇之首; 坎離, 陰陽之成質, 故爲上篇之終. 咸恒, 夫婦之道, 生育之本, 故爲下篇之首; 未濟坎離之合, 旣濟坎離之交, 合而交則生物, 陰陽之成功也, 故爲下篇之終. 二篇之卦旣分, 而後推其義以爲之次, 序卦是也. 卦之分則以陰陽. 陽盛者居上, 陰盛者居下. 所謂盛者, 或以卦, 或以爻. 卦與爻取義有不同. 如剝: 以卦言, 則陰長陽剝也; 以爻言, 則陽極於上, 又一陽爲衆陰主也. 如大壯: 以卦言, 則陽長而壯; 以爻言, 則陰盛於上, 用各於其所, 不相害也. 乾父也, 莫亢焉; 坤母也, 非乾无與爲<一无爲字>敵也. 故卦有乾者居上篇, 有坤者居下篇. 而復陽生, 臨陽長, 觀陽盛, 剝陽極, 則雖有坤而居上; 姤陰生, 遯陰長, 大壯陰盛, 夬陰極, 則雖有乾而居下. 其餘有乾者皆在上篇, 泰否需訟小畜履同人大有无妄大畜也. 有坤而在上篇皆一陽之卦也. 卦五陰而一陽則一陽爲之主故一陽之卦皆在上篇師謙豫比復剝也. 其餘有坤者皆在下篇晉明夷萃升也卦一陰五陽者皆有乾也, 又陽衆而盛也, 雖衆陽說於一陰, 說之而已, 非如一陽爲衆陰主也. 王弼云: 一陰爲之主非也. 故一陰之卦皆在上篇小畜履同人大有也. 卦二陽者, 有坤則居下篇小過雖無坤陰過之卦也亦在下篇其餘二陽之卦皆一陽生於下而達於上又二體皆陽陽之盛也皆在上篇屯蒙頤習坎也. 陽生於下謂震坎在下震生於下也坎始於中也. 達於上謂一陽至<一作在>上, 或得正位也. 生于下而上<一作陽>達陽暢之盛也. 陽生於下而不達於上, 又陰衆而陽寡復失正位陽之弱也震也解也. 上有陽而下无陽无本也艮也蹇也震坎艮以卦言則陽也, 以爻言則皆始變微也. 而震之上艮之下无陽坎則陽陷皆非盛也. 惟習坎則陽上達矣, 故爲盛卦. 二陰者有乾則陽盛可知需訟大畜无妄也无乾而爲盛者大過也離也. 大過陽<一有過字>盛於中, 上下之陰弱矣. 陽居上下則綱紀於陰頤是也陰居上下不能主制於陽而反弱也必上下各二陰中唯兩陽然後爲勝小過是也大過小過之名可見也離則二體上下皆陽陰實麗焉陽之盛也. 其餘二陰之卦二體俱陰陰盛也皆在下篇家人睽革鼎巽兌中孚也. 卦三陰三陽者敵也則以義爲勝陰陽尊卑之義男女長少之序天地之大經也陽少於陰而居上則爲勝蠱少陽居長陰上賁少男在中女上皆陽盛也. 坎雖陽卦而陽爲陰所陷溺也又與陰卦重陰盛也. 故陰陽敵而有坎者皆在下篇困井渙節旣濟未濟也. 或曰: 一體有坎尙爲陽陷二體皆坎反爲陽盛何也曰一體有坎陽爲陰所陷又重爲陰也二體皆坎陽生於下而達於上又二體皆陽可謂盛矣. 男在女上乃理之常未爲盛也若失正位而陰反居尊則弱也故恒損歸妹豐皆在下篇女在男上陰之勝也凡女居上者皆在下篇咸益漸旅困渙未濟也唯隨與噬嗑則男下女非女勝男也. 故隨之彖曰剛來而下柔噬嗑彖曰柔得中而上行長陽非少陰可敵以長男下中少女故爲下之. 若長少敵, 勢力侔, 則陰在上爲陵, 陽在下爲弱, 咸益之類是也. 咸亦有下女之象, 非以長下少也, 乃二少相感<一作感說>以相與所以致陵也故有利貞之戒困雖女少於男乃陽陷而爲陰揜无相下之義也. 小過二陽居四陰之中則爲陰盛中孚二陰居四陽之中而不爲陽盛何也曰陽體實中孚中虛也然則頤中四陰不爲虛乎? 曰: 頤二體皆陽卦而本末皆陽盛之至也中孚二體皆陰卦上下各二陽不成本末之象以其中虛故爲中孚陰盛可知矣.

『문집』13-5 易序 <見性理群書> 易之爲書, 卦爻彖象之義備, 而天地萬物之情見. 聖人之憂天下來世, 其至矣: 先天下而開其物, 後天下而成其務. 是故極其數以定天下之象, 著其象以定天下之吉凶. 六十四卦, 三百八十四爻, 皆所以順性命之理, 盡變化之道也. 散之在理, 則有萬殊; 統之在道, 則无二致. 所以“易有太極, 是生兩儀.” 太極者道也, 兩儀者陰陽也. 陰陽一道也. 大極无極也. 萬物之生, 負陰而抱陽, 莫不有太極, 莫不有兩儀, 絪縕交感, 變化不窮. 形一受其生, 神一發其智, 情僞出焉, 萬緖起焉. 易所以定吉凶而生大業. 故易者陰陽之道也, 卦者陰陽之物也, 爻者陰陽之動也. 卦雖不同, 所同者奇耦爻雖不同, 所同者九六. 是以六十四卦爲其體, 三百八十四爻互爲其用. 遠在六合之外, 近在一身之中, 暫於瞬息, 微於動靜, 莫不有卦之象焉, 莫不有爻之義焉. 至哉易乎! 其道至大而无不包, 其用至神而无不存. 時固未始有一, 而卦未始有定象; 事固未始有窮, 而爻亦未始有定位. 以一時而索卦, 則拘於无變, 非易也. 以一事而明爻, 則窒而不通, 非易也. 知所謂卦爻彖象之義而不知有卦爻彖象之用亦非易也. 故得之於精神之運, 心術之動,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然後可以謂之知易也. 雖然, 易之有卦易之已形者也卦之有爻卦之己見者也己形己見者可以知言未形未見者不可以名求. 則所謂易者果何如哉? 此學者所當知也.

『문집』13-6 禮序 <見性理群書> 經禮三百威儀三千, 皆出於性非僞貌飾情也. 鄙夫野人卒然加敬逡巡遜却而不敢受三尺童子拱而趨市暴夫悍卒莫敢狎焉彼非素有於敎與邀譽於人而然也. 蓋其所有於性物感而出者如此故天尊地卑禮固立矣. 類聚群分禮固行矣. 人者位乎天地之間立乎萬物之上天地與吾同體萬物與吾同氣尊卑分類不設而彰聖人循此制爲冠婚喪祭朝聘燕享之禮以行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義. 其形而下者具於飮食器服之用其形而上者, 極於無聲無臭之微; 衆人勉之賢人行之聖人由之. 故所以行其身與其家與其國與其天下禮治則治禮亂則亂禮存則存禮亡則亡上自古始下逮五季質文不同罔不由是然而世有損益惟周爲傋是以夫子嘗曰: 郁郁乎文哉! 吾從周逮其弊也. 忠義之薄情文之繁林放有禮本之問而孔子欲先進之從蓋所以矯正反弊也. 然豈禮之過哉! 爲禮者之過也. 秦氏焚滅典籍三代禮文大懷漢興購書禮記四十九篇雜出諸家傳記不能悉得聖人之旨考其文義時有牴牾然而其文繁其義博學者觀之如適大通之衢珠珍器帛隨其所取如游阿房之宮千門萬戶隨其所入博而約之亦可以弗畔蓋其說也. 粗在應對進退之間而精在道德性命之要始於童稚之習而終於聖人之歸惟達於道者然後能知其言能知其言然後能得於禮然則禮之所以爲禮其則不遠矣. 昔者顔子之所從事不出乎視聽言動之間而鄕黨之記孔子多在於動容周旋之際此學者所當致疑以思致思以達也.

『문집』13-7 禘說 <見朱子文集> 禘其祖之所自出始受姓者也. 其祖配之以始祖配也. 文武必以稷配後世必以文王配所出之祖無廟於太祖之廟禘之而已萬物本乎天人本乎祖故以所出之祖配天也. 周之后稷生於姜嫄姜嫄以上更推不去也. 文武之功起於后稷故配天者須以后稷嚴父莫大於配天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帝卽天也. 聚天之神而言之則謂之上帝此武王祀文王推父以配上帝須以父也. 曰: 昔者周公郊祀后稷以配天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不曰: 武王者以周之禮樂出於周公制作故以其作禮樂者言之猶言魯之郊禘非禮周公其衰是周公之法壞也. 若是成王祭上帝則須配以武王配天之祖則不易雖百世惟以后稷配上帝則必以父若宣王祭上帝則亦以厲王雖聖如堯舜不可以爲父雖惡如幽厲不害其爲所生也. 故祭法言有虞氏宗堯非也. 如此則須舜是堯之子苟非其子雖授以天下之重不可謂舜之父也. 如此則是堯養舜以爲養男也. 禪讓之事蔑然矣. 以始祖配天須在冬至一陽始生萬物之始祭用圓丘器用陶匏藁秸服用大裘而祭宗祀九月萬物之成父者我之所自生帝者生物之祖故推以爲配而祭於明堂也. 本朝以太祖祀於圓丘以禰配於明堂自介甫此議方正先此祭五帝又帝昊天上帝幷配者六位自介甫議惟祭昊天上帝以禰配之太祖而上有僖順翼宣先嘗以僖祧之矣. 介甫議以爲不當祧順以下祧可也. 何者本朝推僖祖爲始已上不可得而推也. 或難以僖祖無功業亦當祧以是言之則英雄以得天下自已力爲之幷不得與祖德或謂靈芝無根醴泉無源物豈有無本而生者今日天下基本蓋出於此後人安得爲無功業故朝廷復立僖祖廟爲得禮介甫所見終是高於世俗之儒

『문집』13-8 書銘<見微言> 含其英茹其實精於思貰於一

『문집』13-9 與方元宷手帖 <見近思錄> 聖人之道坦如大路學者病不得其門耳. 得其門無遠之不可到也. 求入其門不由於經乎今之治經者亦衆矣. 然而買櫝還珠之弊人人皆是經所以載道也. 誦其言辭解其訓詁而不及道乃無用之糟粕耳. 覬足下由經以求道勉之又勉異日見卓爾有立於前然後不知手之舞足之蹈不加勉而不能自已矣. <按朱子跋此帖有二其一有應擧耕田之語又嘗得先生年二十五時與方氏帖惜皆不可見姑記朱說云>

『문집』13-10 謝執政書 <見張繹師說> 公知射乎有人執弓於此發而多中人皆以爲善射矣. 一日使羿立於其傍道之以彀率之法不從羿且怒而去矣. 從之則戻其故習而失多中之功<一作巧>故不若處羿於無事之地則羿得盡其言而用舍羿不恤也. 頤才非羿也. 然聞羿之道矣. 慮其害公之多中也.

『문집』13-11 謝傳耆伯壽手謁<見朱子文集> 頤謹詣行舘拜謝長官秘書十月日河南程頤狀

『문집』13-12 答晁以道書<見呂氏雜志> 頤與堯夫同里巷居三十年餘世間事無所不論惟未嘗一字及數耳.

『문집』13-13 與橫渠簡<見朱子語錄> 堯夫說易好今夜試來聽他說看<一作說先天之圖甚有理可試往之聽他說看>

『문집』13-14 答謝良佐書 <見微言. 〇又楊遵道錄但是簡答不云有書> 族子至愚無足責故人素厚不敢疑孟子旣知天安用尤臧氏

『문집』13-15 寄范淳夫書<同上> 丞相久留左右所助一意正道者實在原明耳. 右伊川先生文

『문집』13-16 傳聞續記 <此記係取朱子名臣言行錄及邵氏易學辨惑所載以補遺書外書之未傋若夫他書豈無附見然未敢必信故不復取云> (一)日二程先生侍大中公訪康節於天津之廬康節攜酒飮月陂上歡甚語其平生學術出處之大致明日明道悵然謂門生周純明曰: 昨從堯夫先生遊聽其論議振古之豪傑也. 惜其無所用於世純明<一作甫>曰: 所言何如明道曰: 內聖外王之道也. 是日康節有詩明道和之今各見集中<聞見錄> 右二先生語 李文定公爲擧子時從种放明逸先生學將試京師攜明逸書見柳開仲塗以文卷爲贄與謁俱入久之仲塗出曰: 讀君之文須沭浴乃敢見因留之門下一日仲塗自出題令文定與其諸子及門下客同賦賦成驚曰: 君必魁天下爲宰相令門下客與諸子拜之曰: 異日無忘也. 及文定爲宰相仲塗門下客有柳某者文定命長子東之娶其女不忘仲塗之言也. 文定所擬賦題不傳如王沂公曾初作有物混成賦識者知其決爲宰相蓋所養所學發爲言詞者可以觀矣. 程明道先生爲伯溫云<聞見錄> 神宗欲用溫公召知許州令過闕上殿方下詔謂監察御史裏行程顥曰: 朕召司馬光卿度光來否顥對曰: 陛下能用其言光必來不能用其言光必不來帝曰: 未論用其言如光者常在左右人主自可無過公果辭詔命<同上> 熙寧十年春呂申公起知河陽河南尹賈公昌衡率溫公程伯淳餞於福先寺上東院康節以疾不赴明日伯淳語康節曰: 君實與晦叔席上各辨論出處不已顥以詩解之云云<同上> 陳左司瓘曰: 范公淳夫嘗論顔子不遷怒不貳過惟伯淳能之予問公曰: 伯淳誰也. 公黙然久之曰: 不知有程伯淳邪予謝曰: 生長東南實未知也. 予常以寡陋自媿了翁之子正由云了翁自是每得明道先生之文必冠帶然後讀之<范太史遺事> 右明道先生語 曹彬攻金陵垂克忽稱疾不視事諸將皆來問疾彬曰: 余之病非藥石所愈惟須諸公共發誠心自誓以克城之日不妄殺一人則自愈矣. 諸將許諾共焚香爲誓明日稍愈及克金陵城中皆安堵如故曹翰克江州忿其久不下屠戮無遺彬之子孫貴盛至今不絶翰卒不三十年子孫有乞丐於海上者矣. 程頤云<涑水記聞> 程伊川曰: 凡從安定先生學者其醇厚和易之氣望之可知也. <聞見錄> 或問伊川量可學否曰: 可學進則識進識進則量進曰: 如魏公可學否曰: 魏公是間氣<胡氏傳家錄> 異時, 伊川同朱公掞訪先君先君留之飮酒因以論道伊川指面前食卓曰: 此卓安在地上不知天地是安在甚處先君爲之極論天地萬物之理以及六合之外伊川歎曰: 平生惟見周茂叔論至此然不及先生之有條理也. <易學辨惑> 伊川又同張子堅來方春時先君率同遊天門街看花伊川辭曰: 平生未嘗看花先君曰: 庸何傷乎物物皆有至理吾儕看花異於常人自可以觀造化之妙伊川曰: 如是則願從先生遊<同上> 先君病且革伊川曰: 先生至此他人無以致力願先生自主張先君曰: 平生學道固知此矣. 然亦無可主張伊川猶相問難不已先君戲之曰: 正叔可謂生薑樹頭生必是生薑樹頭死也. 伊川曰: 從此與先生永訣矣. 更有可以見告者乎先君聲氣已微擧張兩手以示之伊川曰: 何謂也. 先君曰: 面前路徑須常令寬路徑窄則自無著身處况能使人行也. <同上> 右伊川先生語

二程文集卷下 附錄

『문집』14-1 朱子辨論胡本錯誤書<南軒語附> 近略到城中歸方數日見平父示近間承寄聲存問感感但所論二先生集則愚意不能無疑伯逢主張家學固應如此熹不敢議所不可解者以老兄之聰明博識欽夫之造詣精深而不曉此此可怪耳. 若此書是文定所著卽須依文定本爲正今此乃是二先生集但彼中本偶出文定家. 文定當時, 亦只是據所傳錄之本. 雖文定蓋不能保其無一字之訛也. 今別得善本復加補綴乃是文定所欲聞文定復生亦無嫌間不知二兄何苦尙爾依違也. 此間所用二本固不能盡善亦有灼然却是此間本誤者當時更不曾寫去但只是平氣虛心看得義理通處便當從之豈可肚裏先橫却一箇胡文定後不復信道理邪? 如定性書及明道敍述上富公與謝帥書中刪却數千字及辭官表倒却次序易傳序改沿爲泝祭文改姪爲猶子之類皆非本文必是文定刪改熹看得此數處有無甚害者但亦可惜改却本文蓋本文自不害義理故也. 敍述及富謝書是也. 有曲爲回互而反失事實害義理者辭表是也. 欲爲回互便是私意害義理矣. 惟定性書首尾雖非切要之辭然明道謂橫渠實父表弟聞道雖有先後然不應以聞道之故傲其父兄如此語錄說二先生與學者語有不合處明道則曰: 更有商量伊川則直云不是明道氣象如此與今所刪之書氣象類乎不類乎且文定答學者書雖有不合亦甚宛轉不至如此無含蓄况明道乎今如此刪去不過是減得數十箇閒字而壞却一箇從容和樂底大體氣象恐文定亦是偶然一時意思欲直截發明向上事更不暇照管此等處或是當時未見全本亦不可知. 今豈可曲意苟從邪? 向見李先生本出龜山家猶雜以游察院之文比訪得游集乃知其誤以白先生先生歎息曰: 此書所自來可謂端的猶有此誤况其他又可盡信邪只此便是虛已從善公平正大之心本亦不是難事但今人先着一箇私意橫在肚裏便見此等事爲難及耳. 又猶子二字前論未盡禮記云喪服兄弟之子猶子也. 言人爲兄弟之子喪服猶已之子非所施於平時也. 况猶字本亦不是稱呼只是記禮者之詞如下文嫂叔之無服姑姊妹之薄也. 今豈可沿此遂謂嫂爲無服而名姑姊妹以薄乎古人固不謂兄弟之子爲姪然亦無云猶子者但云兄之子弟之子孫亦曰: 兄孫耳. 二先生非不知此然猶從俗稱姪者蓋亦無害於義理也. 此等處文定旣得以一時已見改易二程本文今人乃不得據相傳別本改正文定所改之未安處此何理邪? 又明道論王覇箚子等數篇胡本亦無乃此間錄去有所脫誤非文定之失伊川上仁廟書此間本無後來乃是用欽夫元寄胡家本校亦脫兩句此非以他人本改文定本乃是印本自不曾依得文定本耳. 似此之類恐是全不曾參照只見人來說自家刻得文字多錯校得不精便一切逆拒之幾何而不爲訑訑之聲音顔色距人於千里之外乎? 夫樂聞過勇遷善有大於此者猶將有望於兩兄不意只此一小事便只如此殊失所望然則區區所以劇論不置者正恐此私意根株消磨不去隨事滋長爲害不細亦不專爲二先生之文也. 如必以胡氏之書一字不可改易則又請以一事明之集中與呂與叔論中書注云子居和叔之子胡氏編語錄時意其爲邢恕之子遂削此注直於正文子居之上加一邢字頃疑呂氏亦有和叔因以書問欽天答云嘗問之邢氏果無子居者以此例之則胡氏之書亦豈能一無謬誤乃欲不問是非一切從之乎况此乃文字間舛誤與其本原節目處初無所妨何必一一遵之而不敢改乎? 近以文定當立祠於鄕郡說應求邦彦二公皆指其小節疑之魏元履至爲扼腕今二兄欲尊師之而又守其尤小節處以爲不可改是文定有所謂大者終不見知於當世也. 此等處非特二先生之文之不幸亦文定之不幸耳. 今旣用官錢刋一部書却全不睹是只守却胡家錯本文字以爲至當可謂直截不成議論恐文定之心却須該遍流通決不如是之陋也. 若說文定決然主張此書以爲天下後世必當依此卽與王介甫主張三經字說何異作是說者却是謗文定矣. 設使微似有此亦是克未盡底已私所謂賢者之過橫渠所謂其不善者共改之正所望於後賢不當守已殘而妬道眞使其遺風餘弊波蕩於末流也. 程子嘗言人之爲學其失在於自主張太過橫渠猶戒以自處太重無復以來天下之善今觀二兄主張此事得無近此聖賢稽衆舍已兼聽幷觀之意似不然也. 胡子知言亦云學欲約不欲陋此得無近於陋邪如云當於他處別看此尤是不情悠悠之說與月攘一雞何異非小子所敢聞也. 每恨此道衰微邪說昌熾擧世無可告語者望二兄於千里之外蓋不翅飢渴之於飮食乃不知主意如此偏枯若得從容賓客之後終日正言又不知所以不合者復幾何耳. 欽夫尊兄不及別狀所欲言者不過如此幸爲呈似所言或不中理却望指敎熹却不敢憚改也. 向所錄去數紙, 合改處當時, 極費心力又且勞煩衆人意以爲必依此改正故此間更無別本今旣不用切勿毁棄千萬盡爲拾便中寄來當什襲藏之以俟後世耳. 向求數十本欲遍遺朋友今亦不須寄來熹不敢以此等錯本文字誤朋友也. 天寒手凍作字不成不能傾竭懷抱惟加察而恕其狂妄可也. <朱子與劉共夫>

昨見共殳家問以爲二先生集中誤字老兄以爲嘗經文定之手更不可改愚意未曉所謂夫文定固有不可改者如尊君父定內外討亂臣誅賊子之大倫大法雖聖賢復出不能改也. 若文字之訛安知非當時所傳亦有未盡善者而未得善本以正之與至所特改數處竊以義理求之恐亦不若先生舊本之善若如老兄所論則是伊川所謂昔所未遑今不得復作前所未安後不得復正者又將起於今日矣. 已作共父書詳言之復此具禀更望虛心平氣去彼我之嫌而專以義理求之則於取舍從違之間知所處矣. 道術衰微俗學淺陋極矣. 振起之任平日深於吾兄望之忽聞此論大以爲憂若每事自主張如此則必無好問察言之理將來任事必有不滿人意處而其流風餘弊又將傳於後學非直一時之害也. 只如近世諸先達聞道固有淺深涵養固有厚薄擴充運用固有廣狹然亦不能不各有偏倚處但公吾心以玩其氣象自見有當矯革處不可以火濟火以水濟水而益其疾也. 熹聞道雖晩賴老兄提掖之賜今幸略窺彷彿然於此不能無疑不敢自鄙外於明哲故敢控瀝一盡所言不審尊意以爲如何? 其詳則又具於共父書中幸取而並觀之無怪其詞之太直也. <與張欽夫>

不先天而開人各因時而立政<胡本天作時欽天云作天字大害事>愚謂此言先天與文言之先天不同文言之云先天後天乃是左右參贊之意如左傳云實先後之意思却在中間正合天運不差毫髮所謂啐啄同時也. 此序所云先天却是天時未至而妄以私意先之若耕穫菑畬之類耳. 兩先天文同而意不同先天先時却初不異但上言天下言人上言時下言政於文爲協耳.

窺聖人之用心<胡本無心字欽夫云著心字亦大害事請深思之>愚謂孟子云堯舜之治天下豈無所用其心哉! 言用心莫亦無害於理否<並同上>

稱姪固未安稱猶子亦不典按禮有從祖從父之名則亦當有從子從孫之目矣. 以此爲稱似稍穩當慮偶及此因以求敎非敢復議改先生之文也. 與富公及謝帥書全篇反覆無非義理卒章之言止是直言義理之效感應之常如易六十四卦無非言吉凶禍福書四十八篇無非言災祥成敗詩之雅頌極陳福祿壽考之盛以歆動其君而告戒之者尤不爲少<卷阿尤著>孟子最不言利然對梁王亦曰: 未有仁義而遺後其君親者答宋牼亦曰: 然而不王者未之有也. 此豈以利害動之哉! 但人以以私心計之便以爲利故不肖者則起貪欲之心賢者則有嫌避之意所趣雖殊然其處心之私則一也. 若夫聖賢以大公至正之心出大公至正之言原始要終莫非至理又何嫌疑之可避哉! 若使先生全篇主意專用此說則誠害理矣. <向所見敎同行異情之說於此亦可見矣. > 春秋序兩處觀其語脉文勢似熹所據之本爲是先天二字卷中論之詳矣. 莫無害於理否理旣無害文意又協何爲而不可從也. 聖人之用下著心字語意方足尤見親切主宰處下文所謂得其意者是也. 不能窺其用心則其用豈易言哉! 故得其意然後能法其用語序然也. 其精微曲折蓋有不苟然者矣. 若謂用心非所以言聖人則孟子易傳中言聖人之用心者多矣. 蓋人之用處無不是心自聖人至於下愚一也. 但所以用之者有精粗邪正之不同故有聖賢下愚之別不可謂聖人全不用心又不可謂聖人無心可用但其用也. 妙異乎常人之用耳. 然又須知卽心卽用非有是心而又有用之者也. <別紙> 伏蒙垂諭向論程集之誤定性書辭官表兩處已蒙收錄其他亦多見納用此見高明擇善而從初無適莫而小人向者妄發之過也. 然所謂不必改不當改者反復求之又似未能不惑於心輒復條陳以丐指諭. 夫所謂不必改者豈以爲文句之間小小異同無所繫於義理之得失而不必改邪熹所論出於已意則用此說可也. 今此乃是集諸本而證之按其舊文然後刋正雖或不能一一盡同亦是類會數說而求其文勢語氣所趨之便除所謂疑當作某一例之外未嘗敢妄以已意更定一點畫也. 此其合於先生當日本文無疑今若有尊敬重正而不敢忽易之心則當一循其舊不容復有毫髮苟且遷就於其間乃爲盡善惟其不爾故字義迂晦者必承誤强說而後通<如遵誤作尊今便强說爲尊其所聞之類是也. >語句刓闕者須以意屬讀然後備<如嘗食絮羹叱止之無皆字則不成文之類是也. >此等不惟於文字有害反求諸心則隱微之間得無未免於自欺邪? 且如吾輩秉筆書事惟務明白其肯故舍所宜用之字而更用他字使人强說而後通邪其肯故爲刓闕之句使人屬讀而後備邪人情不大相遠有以知其必不然矣. 改之不過印本字數稀密不勻不爲觀美而他無所害然則胡爲而不改也. 卷子內如此處已悉用朱圈其上復以上呈然所未圈者似亦不無可取方執筆時不能不小有嫌避之私故不能盡此心今人又來督書不容再閱矣. 更乞詳之可也. 所謂不當改者豈謂富謝書春秋序之屬而書中所喩沿泝猶子二說又不當改之尤者邪以熹觀之所謂尤不當改者乃所以爲尤當改也. 大抵熹之愚意止是不欲專輒改易前賢文字稍存謙退敬讓之心耳. 若聖賢成書稍有不愜已意處便率情奮筆恣行塗改恐此氣象亦自不佳蓋雖所改盡善猶啓末流輕肆自大之弊况未必盡善乎伊川先生嘗語學者病其於已之言有所不合則置不復思所以終不能同也. <楊迪及門二書見集>今熹觀此等改字處竊恐先生之意尙有不可不思者而改者未之思也. 蓋不特已不之思又使後人不復得見先生手筆之本文雖欲思之以達於先生之意亦不可得此其爲害豈不甚哉! 夫以言乎已則失其恭敬退讓之心以言乎人則啓其輕肆妄作之弊以言乎先生之意則恐猶有未盡者而絶人之思姑無問其所改之得失而以是三者論之其不可已曉然矣. 老兄試思前聖入太廟每事問, 存餼羊謹闕文述而不作信而好古深戒不知而作敎人多聞闕疑之心爲如何而視今日紛更專轍之意氣又爲如何審此則於此宜亦無待乎熹之言而決且知熹之所以再三冒凟貢其所不樂聞者豈好已之說勝得已而不已者哉! 熹請復論沿泝猶子之說以實前議夫改沿爲泝之說熹亦竊聞之矣. 如此曉破不爲無力然所以不可改者蓋先生之言垂世已久此字又無大害義理若不以文詞害其指意則只爲沿字而以因字尋字循字之屬訓之於文似無所害而意亦頗覺寬舒必欲改爲泝字雖不無一至之得然其氣象却殊迫急似有强探力取之弊疑先生所以不用此字之意或出於此不然夫豈不知沿泝之別而有此謬哉! 蓋古書沿字亦不皆爲順流而下之字也. <荀子云反鉛察之注云鉛與沿同循也. >惜乎當時莫或疑而扣之以祛後人之惑後之疑者又不能闕而遽改之是以先生之意終已不明而擧世之人亦莫之思也. 大抵古書有未安處隨事論著使人知之可矣. 若遽改之以沒其實則安知其果無未盡之意邪漢儒釋經有欲改易者但云某當作某後世猶或非之况遽改乎且非特漢儒而已孔子刪書血流漂杵之文因而不改孟子繼之亦曰: 吾於武成取二三策而已終不刋去此文以從已意之便也. 然熹又竊料改此字者當時之意亦但欲使人知有此意未必不若孟子之於武成但後人崇信太過便憑此語塗改舊文自爲失耳. 愚竊以爲此字決當從舊尤所當改若老兄必欲存之以見泝字之有力則請正文只作沿字而注其下云<某人云沿當作泝>不則云<胡本沿作泝>不則但云或人可也. 如此兩存, 使讀者知用力之方改者無專轍之咎而先生之微音餘韻後世尙有黙而識之者豈不兩全其道而無所傷乎? 猶子之稱謂不當改亦所未喩蓋來敎但云姪止是相沿稱之而未見其害義不可稱之意云稱猶子尙庶幾焉亦未見其所以庶幾之說是以愚瞢未能卒曉然以書傳考之則亦有所自來蓋爾雅云女子謂兄弟之子爲姪注引左氏姪其從姑以釋之而反覆考尋終不言男子謂兄弟之子爲何也. 以漢書考之二䟽乃今世所謂叔姪而傳以父子稱之則是古人直謂之子雖漢人猶然也. 蓋古人淳質不以爲嫌故如是稱之自以爲安降及後世則心有以爲不可不辨者如是假其所以自名於姑者而稱焉雖非古制然亦得別嫌明微之意而伯父叔父與夫所謂姑者又皆吾父之同氣也. 亦何害於親親之義哉! 今若欲從古則直稱子而已若且從俗則伊川橫渠二先生者皆當稱之伊川嘗言禮從宜使從俗有大害義理處則須改之夫以其言如此而猶稱姪云者是必以爲無大害於義理故也. 故其遺文出於其家而其子序之以行於世擧無所謂猶子云者而胡本特然稱之是必出於家庭之所筆削無疑也. <若曰: 何故他處不改蓋有不可改者如祭文則有對偶之類是也. >若以稱姪爲非而改之爲是亦當從其舊文而附以新意况本無害理而可遽改之乎今所改者出於檀弓之文而彼文止爲喪服兄弟之子與已子同故曰: 兄弟之子猶子也. 與下文嫂叔之無服也. 姑姊妹之薄也. 之文同耳. 豈以爲親屬之定名哉! 猶卽如也. 其義繫於上文不可殊絶明矣. 若單稱之卽與世俗歇後之語無異若平居假借稱之猶之可也. 豈可指爲親屬之定名乎若必以爲是則自我作古別爲一家之俗夫亦孰能止之似不必强挽前達使之同已以起後世之惑也. 故愚於此亦以爲尤所當改以從其舊者若必欲改之則請亦用前例正文作姪注云<胡本作猶子>則亦可矣. 春秋序富謝書其說略其卷中不知是否更欲細論以求可否此人行速屢來督書不暇及矣. 若猶以爲疑則亦且注其下云<元本有某某若干字>庶幾讀者旣見當時言意之實又不揜後賢刪削之功其他亦多類此幸賜詳觀卽見區區非有偏主必勝之私但欲此集早成完書不誤後學耳. 計老兄之意豈異於此但恐見理太明故於文意瑣細之間不無濶略之處用心太剛故於一時意見所安必欲主張到底所以紛紛未能卒定如熹則淺暗遲鈍一生在文義上做窠窟苟所見未明實不敢妄爲主張農馬智專所以於此等處不敢便承誨諭而不自知其僣易也. 伏惟稍賜寬假使得盡愚將來改定新本便中幸白共父寄兩本來容更參定箋註求敎<所以欲兩本者蓋欲留得一本作底以備後復有所得也. >儻蒙矜恕不錄其過而留聽焉不勝幸甚! <同上>

右明道先生遺文九篇長沙學官旣刻二先生文集後三年新安朱熹復以此寄拭云得之玉山汪應辰敬以授敎授何蘊俾嗣刻之乾道己丑四月朔廣漢張拭謹書<南軒書明道先生遺文後>

河南二程先生文集憲使楊公已鋟板三山學官遺書外書則庾司舊有之乙未之火與他書俱燬不存諸書雖未能復是書胡可緩師耕承乏此來亟將故本易以大字與文集爲一體刻之後圃明敎堂賴吾同志相與校訂視舊加密二先生之書於是乎全時淳祐丙午古汴趙師耕書<麻沙本後序>

程氏遺書長沙本最善而字頗小閱歲之久板已漫漶敎授王君湜出示五羊本參校旣精大字亦便觀覽然無外書襲之乃模鋟於舂陵郡庫又取長沙所刋外書附刻焉願與同志者共學淳祐六年立秋日東川李襲之謹題<舂陵本後序>

右河南程氏遺書外書俱出程門弟子手記考亭朱夫子家藏類訪旁搜先後次第爲此世所刋本無不同者獨二先生文集出胡文定公家頗有改削如定性書及明道行述上富公與謝帥書中刪却數十字辭官表之顚倒次第易傳序之改沿爲泝祭文之改姪爲猶子劉張二公以是本刻之長沙考亭定其所當改者數紙與共父劉帥書及與南軒張子屢書凜然承舛習訛末流波蕩之爲懼而卒亦莫之從也. 今所傳文集大率渾本是固不能無餘論矣. 臨川譚善心元之蚤讀二書慮其傳本寢少悉爲刻棗而於文集復加詳審與蜀郡虞槃叔常往復討論以復乎考亭所改之舊且註劉張本異同於其下其餘遺文凡集所未錄者各以類附焉至若伊川經說其目見近思錄其書見時氏本特易傳止繫辭上篇春秋傳止魯桓九年書解止舜格於文祖詩解止四方以無拂論語解止吾從下恨多誤字不敢臆決惟易繫取呂氏精義所編春秋傳取尹氏纂集所補以舊板本審校先刋而他書則俟求善本讎校續刻此其爲意固將以集程氏書文之全明程朱授受之正稽之往哲而不悖傳之來裔而無窮觀此書者如挹座春而立門雪俱非苟然爲之也. 嗚呼! 元之之用心亦可謂勤也. 已裝褫成帙家學人誦謹緝大意書於左方至治二年壬戌之秋七月旣望臨川後學鄒次陳謹書(識?).

周二程張邵書予以晁昭德讀書志校之周子通書一卷明道中庸解一卷程氏易一卷書說一卷詩說兩卷論語說十卷孟子解十四卷伊川集二十卷程氏雜說十卷張子正蒙書十卷漁樵問對一卷信聞紀一卷孟子解十四卷易說十卷春秋說一卷橫渠崇文集十卷邵子皇極經世十二卷觀物篇六卷擊壤集二十卷凡十九部一百五十四卷所謂程氏雜說十卷者疑卽朱子所謂諸公各自爲書散出幷行之一者也. 而遺書所錄不見其目朱子因其先人舊藏益以類訪爲遺書二十五卷又爲外書十二卷益多雜說數倍而雜說固不傳合晁氏所記與今所傳續蓋可見矣. 然今所傳本皆家藏故書數十年前所刻就令刻板具在意且漫漶廢棄不少矣. 淸廟雅樂姑以備數而鄭衛之聲人爭愛之則此日少而彼日多者亦其勢然也. 近年始有新刻邵子書聞風而起者或誚爲迂濶且笑之. 宜黃譚善心同邑傳君友諒之同人也. 奮然不顧取二程遺書文集刻之, 且將考訂程氏經說, 以次鋟木. 槃託中表之好乃得預聞其說喜其事之有成而學者得以傳讀先儒之遺文而不倦其卓然之見良有可取故題其後以勉同志之士云蜀郡後學虞槃.

각주

  1. 주역 함괘 九四,貞吉,悔亡,憧憧往來,朋從爾思。
  2. 주역 간괘 艮: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无咎。
  3. 맹자 이루하 26. 孟子曰:「天下之言性也,則故而已矣。故者以利為本。所惡於智者,為其鑿也。如智者若禹之行水也,則無惡於智矣。禹之行水也,行其所無事也。如智者亦行其所無事,則智亦大矣。天之高也,星辰之遠也,苟求其故,千歲之日至,可坐而致也。」
  4. <맹자> <양혜왕상> 7. 權,然後知輕重;度,然後知長短。物皆然,心為甚。
  5. <맹자> <이루하> 12. 孟子曰:「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
  6. <한어대사전> 8. 副詞。 反而;卻。
  7. <논어> <자한> 4. 子絕四:毋意,毋必,毋固,毋我。
  8. <맹자> <고자상> 7. 至於心,獨無所同然乎?心之所同然者何也?謂理也,義也。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故理義之悅我心,猶芻豢之悅我口。
  9. <주역> 몽괘 初筮告,再三瀆,瀆則不告。